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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54) 아름답고 겸손한 신념의 삶
가톨릭 신앙 교육과 문화는 왜 윤리적 인간 잘 길러내지 못할까
나이듦과 어른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시청했다. 내친김에 그에 관한 책 「줬으면 그만이지」도 사서 읽었다. 그 다큐멘터리가 많은 사람에게 꽤 깊은 반향과 울림을 주었다는 사실을 페이스북과 신문 칼럼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그랬다. 어떻게 한 인간이 자신의 생활 철학과 신념을 지키면서, 조용하고 겸손하며 올곧은 모습으로, 전 재산을 ‘대가 없는 나눔’과 ‘간섭 없는 지원’에 사용할 수 있었는지. 다큐멘터리와 책을 보고 읽은 후, 경이감과 경외감이 교차했다. ‘일상의 성인’, ‘옆집의 성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성숙하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어려운 세상이다. 어른이 부재하다고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왜 어른이 부재할까. 노년의 시간까지 자기 삶을 견결하게 지탱하는 일이 불가능한 세상이어서일까. 돈과 힘과 지위를 향한 경쟁과 인정투쟁의 장이 되어버린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흔들고, 물질과 감각의 쾌락과 향유를 향한 우리의 감정과 욕망이 점점 더 변덕스러워지며 쉬이 멈출 줄 모르기 때문일까. 물질적 향유의 욕심과 인정 욕망은 늙어가도 식지 않는다. 생의 굴곡진 여정에서 변절과 타락과 퇴행의 모습을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발견한다.
오늘의 세상은 어른을 만들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어른이 되기 어려운 사회 현실 속에서 오히려 더 무결점의 인간, 완벽한 성인(聖人)을 요구하고 있다. 무결점의 인간은 없다. 완벽한 성인도 없다. 삶의 큰 흐름과 방향을, 흔들리는 여정 속에서도, 애써 노력하며 견지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졸 학력의 한약사,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지 않았던 사람, 이름과 지위를 탐하지 않았던 사람, 마지막까지 다 나누고 평범한 노인으로 돌아간 사람. 그의 약력과 삶의 궤적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어쩌면 이름과 지위를 쫓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고 인정투쟁의 갈등에서 발생하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든지 명예를 얻고 지위를 가지게 되면, 놀랍도록 무서운 정보의 세상에서, 시기와 질투에서 나오는 모함과 왜곡의 칼날 앞에 마주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건강하고 올곧은 신념을 간직하고 그 신념을 한결같이 실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평생 한약방의 일을 하면서, 지역사회의 교육, 언론, 문화와 예술, 시민운동, 평등과 여성 인권의 문제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그의 어떤 신념에서 기인되었을까.
사건과 경험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신념을 갖게 할 수 있다. 사람은 교육과 문화를 통해 어떤 생각과 신념을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어떤 특정한 사건과 경험이, 교육과 문화적 환경이 신념을 발생하게 하고 그 신념을 실천하게 하는 원동력 될 수 있을까. 숱한 사건을 겪고 다양한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화려한 교육 이력과 좋은 문화적 배경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빈번하게 목격한다.
사건과 경험, 교육과 문화라는 외부적 요소들은 사람의 신념과 태도 형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신념과 품성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반응하고 응대하는 과정에서, 경험을 수용하고 이해하며 체현하는 여정에서 더 많이 형성될 것이다. “인생은 역경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결심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바꾸며 살 수 있다”(「줬으면 그만이지」)고 그는 고백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공적 배움의 기간은 짧았지만, 생의 여정 속에서 늘 주체적으로 배우고 공부하고 성찰하는 자세와 태도로 살아왔다는 것을 그에 관한 책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실천적 신념은 자발적이고 자율적이고 지속적인 공부와 성찰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일까.
선순환
악이 전파되고 순환되는 것처럼 선도 전파되고 순환된다. 좋은 사람 곁에는 언제나 또 다른 좋은 사람들이 있다. 김장하 선생 주변에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의 방식을 택하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탁월하고 인상 깊은 사람들도 있었다. 김장하 선생의 초등학교 동창 최관경 교수, 선생의 장학금을 받았던 헌법재판관 문형배 판사, 선생을 세상에 알린 지역 언론인 김주완 기자. 그들의 삶 역시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김장하 선생을 닮아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들 역시 교육자, 법조인, 언론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선생들이었다. 우리 주변에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김현지 PD와 김주완 기자가 전해 준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는 다양한 공감과 반응을 불러냈다. 어떤 이는 선생의 삶 안에서 “인의에 충실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유교적 수신 윤리와 싸가지”에 대한 자기반성의 감응을 적었다.(문학평론가 김명인의 페이스북에서) 어떤 이는 선생의 삶과 태도를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에 대한 안티테제”로 해석하기도 한다.(김영민, 중앙일보 칼럼) 또 어떤 이는 선생의 이야기 안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사회에 대한 믿음, 평범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선한 본성에 대한 믿음, 어떤 간계도 평범한 사람들을 영영 속일 수 없다는 믿음”을 읽어낸다.(위근우, 경향신문 칼럼)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수용하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선생의 이야기가 자기반성과 성찰의 힘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고, 삶의 평범한 진실을 발견하는 교훈으로 작동될 수도 있다. 선택은 읽는 독자의 몫이다. 다만 선한 이야기가 선한 방향으로 작용하기를 희망할 뿐이다.
다시, 신앙의 신념
김장하 선생의 삶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언급되는, ‘사회적 우애’와 ‘세상의 형제애’의 진정한 본보기 같다. 그는 어떻게 형제애와 연대와 돌봄의 윤리를 내면화(신념화)할 수 있었을까. 신앙의 신념은 김장하 선생 같은 사람들을 왜 잘 만들지 못하고 있을까.
성사 참여와 신앙적 사건들의 경험이, 우리가 받는 신앙 교육과 우리가 만들어가는 신앙 문화가 왜 선생 같은 사람을 잘 길러내지 못하고 있을까. 성사와 신앙 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윤리적 인간의 형성이 아니어서일까. 신앙이 윤리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신앙은 당연히 윤리적 인간을 포함하지 않는가.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를 보고 읽으면서 우리 신앙의 신념과 신앙 교육과 신앙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40) 공부하는 신앙 – 두 번째 이야기
하느님 앞에서 자기 삶과 신앙 돌아보는 공부 모임 필요하다
‘신학서원’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
신자들과 함께 공부 모임을 하고 있다. 지난 5월부터 두 그룹의 신자들과 한 달에 한 번, 공동 사제관 빈방을 이용해서 진행하고 있다. 처음의 내 계획은, 신학서원과 신앙 공부 모임(혜연공동체)을 별개의 형태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신학서원은 내가 직접 개입해서 함께하는 형식으로, 혜연공동체는 자료만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신학서원은 신앙과 교회에 대해 학문적 관심을 가진 신앙인들이 신학을 집중적으로 함께 탐구하는 공부 모임이다. 혜연공동체는 교회의 신심 모임과 세속의 독서 클럽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신학서원과 혜연공동체, 둘 다 신앙의 올바른 의미와 수행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신앙 운동, 공부를 통해 신앙과 영성의 성숙을 추구하는 신학 운동, 공부하는 공동체의 형성을 통해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꿈꾸는 교회 운동을 지향한다. 강의 중심이 아니라 함께 읽고 토론하고 대화하는 방식을 택한다.
지방 소도시에서 학문적인 모임을 함께 할 구성원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선 신학서원과 신앙 공부 모임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모임을 시작했다. 모임의 전반부에는 짧은 신학 강의를 내가 하고, 후반부에는 기도와 독서 모임 형식의 토론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 형태로 시간표를 구상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신앙과 신학에 관한 공부에 목말라 있었던 신자들이 예상외로 많았다. 대도시 교구와는 달리 농촌 교구에는 신앙 공부의 기회 자체가 부족하다. 도시 교구에는 다양한 성경 공부 모임이 개설되고 교리 신학원 형태의 신학 공부 모임도 있다. 하지만 지방 소도시에는 성경과 신학에 관한 기본적인 공부와 배움의 공간이 제대로 갖춰있지 못하고, 인문적 교양에 대한 지적 훈련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잘 없다. 도시중심의 삶이라는 자본주의 문명의 폐해가 신앙의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
본당의 현실과 신앙 공부
본당이 수행해야 할 여러 가지 기능 가운데, 전례와 성사를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일은 신앙교육이다. 물론 전례 안에 신앙교육 기능이 존재한다. 하지만 신앙의 교육과 성숙은 다른 여러 방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오늘날 본당은 미사 거행하는 곳으로만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저 미사만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이 모여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던 본당의 모습은 이제 옛 추억이 되었다. 본당 안에 제대로 된 신앙교육이 부재하고 있다. 단순한 사회적 친목이 아닌 진정한 공동체적 친교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를 향한, 이웃과 세상을 향한 헌신과 봉사 모습도 점점 옅어지고 있다. 본당에서 전례와 성사, 관리와 행정만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본당 공동체는 당연히 전례 공동체다. 하지만 전례 외에 다른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본당은 활력을 잃어갈 위험이 있다. 본당 공동체 안에 다양한 작은 공동체 모임이 활발해져야 전체로서의 본당 공동체는 활기를 갖는다. 본당의 기초 소모임 역할을 담당했던, 레지오와 구역 반 모임이 점점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대안으로 추진되었던 소공동체 모임도 여전히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총체적 난국이다. 사람들이 모여야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데, 본당 공동체 안에 사람들이 예전처럼 잘 모이지 않는다.
새로운 형식의 본당 소모임이 필요하다. 속지주의적 원칙만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취미와 취향과 기질의 동질성을 고려하는 모임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성경 공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신앙 공부 모임도 요청된다. 사실, 공부를 통해 신앙과 삶의 성숙을 추구하는 신자들도 많다. 신앙 공부에 대한 갈증을 본당 공동체가 채워주지 못하니, 이웃 종교의 공부 모임에 참여하기도 한다. 어떤 신자들은 온라인을 통해 유명 스님의 경전 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다양한 형식의 신앙 공부 모임이 활발하게 존재하는 본당을 상상하고 희망한다.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신앙을 수행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다. 많은 부분이 성직자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신자들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참여 공간이 부족하다. 자발적인 신앙 공부의 방식보다 전례에 피동적 참여 형식으로 신앙 수행이 이루어지는 경향도 강하다.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신앙의 수행은 사유와 공부와 체험보다는 삶의 형식을 강조한다. 단순 범주화의 위험과 오류를 내포하지만, 깨달음의 사유와 공부를 강조하는 불교, 신앙 체험을 강조하는 개신교, 종교적 삶과 형식을 강조하는 가톨릭으로 구분해볼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종교는 사유(이성, 인식, 공부)와 체험(마음, 감정, 정서)과 몸(의지, 삶, 종교적 행위)의 차원을 포함하지만 말이다.
개별적 자유와 자율적 개체성을 강조하는 시대다. 공통의 관심사와 공동체적 비전이 사라진 세상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타자의 인정을 추구하고 친밀성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작은 공동체를 여전히 요청하고 있다. 개인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공동체 운동이 역설적으로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본당이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본당 안의 소모임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기존의 본당 모임들이 친밀성과 소속감을 제공하지 못하고, 건강한 인정 욕망을 채워주지도 못하고, 신앙 성숙과 자기 계발에도 별로 도움이 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공부하는 신앙은 성찰하는 신앙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수행해온 신앙방식의 변화와 쇄신이 필요하다. 신앙생활의 기쁨은 규범과 의무에 따르는 수동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와 노력 안에 있다.
감정과 욕망의 시대를 살고 있다. 차분한 생각과 성찰보다는 조급한 감정과 물질적인 욕망의 이해관계가 더 중요시되는 세상이다.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반응으로서의 감정과 물질문명 속에서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은 사람들에게서 성찰하는 힘을 빼앗고 있다. 오늘의 우리는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잘 갖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느님 앞에서 잠시 멈추는 시간, 즉 기도의 시간을 가질 마음의 여유도 갖지 못하고 있다. 그저 감정의 만족과 욕망의 채움에만 몰두하며 살아간다.
성찰하는 신앙인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 삶과 신앙의 모습을 돌아보는 사람이다. 세상 모든 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섬세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다. 즉, 일상 안에서 초월성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신앙은 희망과 사랑 속에서 그 본질을 드러낸다. 성찰하는 신앙인은 숱한 의심과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성찰하는 신앙을 위해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신앙 공부 모임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시절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7) 살아있는 전례를 위하여 ①
전례 목적은 하느님 현존 체험하고 신앙 올바로 살게 하는 것
포스트 팬데믹
사회적 거리두기 규정이 사라진 후 미사 참여 숫자가 회복되고 있다. 본당들은 잃었던 활력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사제들의 표정도 밝아져 간다. 다른 한편으로 코로나19 이전의 미사 참여 숫자로 돌아가기 위해서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완전 회복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하지만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정말 중요한 일은 ‘복구’(restoration)가 아니라 ‘쇄신’(renewal)일 것이다.
팬데믹의 시간은 교회와 신앙의 삶 전 영역에 많은 도전과 질문을 제기했다. 성사와 전례가 어떻게 거행되고 있는지, 성사와 전례가 신앙인들에게 실제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역할과 기능을 담당했는지 다시 돌아보게 했다. 성직자들의 사목과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수행되어 왔는지, 본당이라는 공동체적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톨릭 신앙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성찰하게 했다. 포스트 팬데믹의 시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정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다시 새롭게 시작할 것인지 말이다
제의(ritual)와 전례(liturgy)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종교는 신화(myth)와 제의와 윤리적 가치체계를 통해 구성된다. 어떤 종교에 소속된다는 것은 그 종교가 선포하는 신성한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그 종교의 제의에 참여하며, 그 종교가 가르치는 사회문화적 가치체계를 수용하고 실천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 행위 가운데 제의에 참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제의 안에서 신성한 이야기가 선포되고 가치체계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종교적 삶은 곧 제의적 삶을 의미한다.
제의는 종교가 행하는 의례와 예식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전례는 제의적 특성을 포함하지만, 신자들을 위한 더 공적인 성격을 지닌다. 신앙의 삶에 있어서 전례는 정점이며 핵심이다. 신앙은 전례 안에서 시작되고 성장한다. 교회 공동체 역시 전례 공동체이다. 전례 안에서 공동체가 시작되고 전례를 통해 공동체는 성장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신학적이고 종교학적인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신앙생활의 모습을 솔직하게 돌아보면 쉽게 발견하고 알 수 있다. 우리 신앙생활의 대부분이 전례 참여로 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전례 안에서 신앙 교육이 이루어지고, 신앙적 가치와 윤리를 실천할 힘을 얻고, 기도와 영성의 자세와 태도를 배운다.
전례의 성사화
가톨릭교회에서 전례는 성사와 맞물려 있다. 성사의 전례적 거행이 가톨릭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전례의 성사화 또는 성사의 전례화는 가톨릭 신앙생활의 기본토대를 형성한다. 하지만 성사의 전례적 거행은 간혹 성사 전례를 지나치게 엄숙하고 엄격한 프레임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전례의 의미를 살아내게 하기보다는 전례 예식 그 자체를 정확하게 거행하는 데 초점을 맞출 위험이 많다는 뜻이다.
성사 전례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성사 전례는 전례적 예식이며 동시에 은총의 표징이며 통로다. 성사에 대해 동사적으로 접근해도 두 개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사를 ‘거행하다’(celebrate), 성사를 ‘집전하다’(administer), 성사에 ‘참여하다’(participate in)라고 말할 때 성사는 전례 예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성사를 ‘주다’(give), 성사를 ‘받다’(receive)라는 표현 속에는 성사가 은총(grace)과 은사(gift)와 관련이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성사에 관한 이 동사적 표현을 보면 성사는 공동체가 거행하는 것이지만, 성사 안에서 집전자와 참여자, 주는 자와 받는 자가 구별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칫 이러한 구별은 성사 전례 안에서 참여자(받는 자)와 집전자(주는 자) 사이에 위계적 서열이 발생할 위험을 낳을 수 있고, 성사 전례가 집전자를 중심으로 구성될 위험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성사 전례에 대해 신학자는 은총의 표징으로서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한다. 이러한 경향은 성사 전례를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방향으로 변하게 할 위험을 내포한다. 교회법 학자는 성사 전례가 유효하고 합법적으로 거행되었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성사 전례를 규범적 울타리에 가둘 위험이 있다. 전례학자는 성사 전례적 예식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에 방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는 성사 전례를 형식적으로 만들 위험을 낳는다. 성사 전례가 추상적, 규범적, 형식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여자 중심의 전례
전례 성사의 보이지 않는 은총과 구원의 힘(성사의 사효성)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적 설명을 할 수 있다. 교회는 오랫동안 전례가 가진 아름다움과 숨겨진 힘과 시간을 초월하는 장엄함에 관해 설명해왔다. 우리가 전례 성사의 깊은 의미와 힘을 잊었기 때문에 전례와 신앙생활이 연결되지 않고 따로 놀았다. 전례 안의 경문과 상징과 동작들은 풍요로운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진정한 전례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가르치는 교육만으로 되지 않는다. 실제 전례 안에서 그 깊은 의미와 효과와 힘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즉, 전례의 신학적 의미와 효과에 대한 인식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전례 안에서 신자들이 느끼고 공감하고 변화되는 정서적 차원의 문제다.
성사 전례의 신학적 의미와 효과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의미와 효과에 대해서 성찰해야 한다. 전례의 실제적 모습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팬데믹의 시간은 집전자인 성직자 중심의 전례보다 참여자인 신자 중심의 전례로 전환해야 할 때가 도래하고 있음을 예감한다. 기존의 전례가 신자들에게 과연 어떤 모습과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요청하고 있다.
신자들이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형태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방식과 태도로 전례에 참여한다면 하느님의 현존을 더 깊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전례의 중요한 목적은 전례 예식을 올바르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신앙의 삶을 올바르게 살게 하기 위해서다. 오늘의 가톨릭 전례가 정말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고 있는지, 전례를 통해 신자들이 삶의 모든 자리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고 실천하고 수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전례 안에서 생각과 마음과 몸의 모든 감각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전례가 우리의 신앙 감각을 성장하게 하고, 하느님을 향한 그 감각으로 우리의 일상과 삶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우리 전례가 과연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8) 살아있는 전례를 위하여 ②
삶을 미사로 봉헌하는 건 그리스도 닮은 방식으로 산다는 것
미사의 중요성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전례헌장, 10항) 가톨릭 전례의 핵심은 미사(성체성사)다. 사제들에게 미사는 사목 활동에 있어서 중심의 자리를 차지한다. 강론을 잘 준비하고 정성을 다해 미사를 드리는 일이 사제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사목의 영역 안에는 다양한 일과 역할과 직무들이 있지만, 미사가 사목 행위의 정점이라는 뜻이다. 신자들에게도 미사는 핵심이다.
신앙생활은 여러 형태로 수행된다. 다양한 신심 행위들에 참여하기도 하고, 레지오마리애, 꾸르실료, 성경 공부 등 교회 안의 숱한 단체에 가입해서, 친교와 교육과 봉사의 삶을 산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정점 역시 미사 참여다. 사목과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핵심 장소인 본당의 중요한 기능과 역할은 그 지역 공동체의 미사 거행이다. 이처럼 미사는 사제의 사목, 신자들의 신앙생활, 본당 공동체의 중심이자 핵심이다.
미사에 대한 참교육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난 글에서 말했듯이, 미사에 대한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 차원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아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은 다르다. 앎은 느낌을 촉발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정서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미사가 신학적으로 이러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경문과 동작과 상징 안에 이러저러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아무리 교육을 해도, 실제 미사의 현장에서 그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저 피상적인 앎으로 끝나고 만다.
미사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신학적(이론적) 설명과 교육보다 실제 미사의 현장에서 거행자(집전자와 참여자)들이 어떻게 미사를 머리와 마음과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지에 대한 현상학적 관찰과 분석이 더 절실히 요청된다.
미사의 현실과 풍경
오늘날 우리가 거행하는 미사가 정말 생생하고 역동적인 모습일까? 솔직히 말해보자. 실제 미사의 자리에서 성직자들이 무엇을 느끼고 체험하는지, 신자들이 어떻게 체험하고 반응하는지. 미사 안에서 생각과 마음과 몸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있는지. 즉, 미사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은총을 온 마음과 온몸으로 느끼고, 그 은총의 힘으로 일상의 자리로 돌아가서 삶을 하느님께 드리는 미사로 봉헌하고 있는지.
전례의 모습이 신앙의 모습이다. 미사의 모습은 신앙의 모습을 반영한다. 실제 미사의 풍경이 형식적이고 추상적이면 신앙의 모습도 추상적이고 형식적일 가능성이 많다. 미사 참여가 능동적이면 신앙생활의 모습도 능동적일 확률이 크다. 우리의 신앙이 혹시 형식적이고 관습적인 모습이라면 아마도 우리는 습관적이고 의무적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미사의 모습과 신앙의 모습은 늘 함께 간다. 오늘날 우리가 거행하는 미사의 현실과 풍경이 정말 생동감 있고 역동적인 모습일까? 우리 미사의 구체적 현실을 조금 더 냉정하게 분석하고 진단할 필요가 있다.
머리와 가슴과 몸으로 참여하는 미사
어느 저명한 가톨릭 전례 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미사는 하느님의 현존과 우리의 현존이 교차하고, 하느님의 이야기와 우리들의 이야기가 만나는 장이다. 주님의 현존과 주님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존과 우리의 이야기도 중요하다. 생각과 마음 없이 그저 빈 몸으로 행하는,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미사 참여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과 마음과 몸으로 미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갖고 참여한다는 의미다. 미사 안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네 군데서 표현된다. 성가, 참회 예절, 신자들의 기도, 강론이다. 성가와 강론은 정말 중요하다. 인간은 노래를 통해 정서를 표현하고 공감과 연대를 체험한다. 한국교회는 신자들의 삶과 사연을 담아내는 성가를 만들어야 한다. 사제는 강론 안에서 하느님의 이야기와 신자들의 이야기가 만날 수 있게 해야 한다.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개별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참회와 기도다. 한 주간을 돌아보며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에 대해 성찰하고, 주님께 올리는 자신만의 간절한 기도를 갖고 미사에 참여할 때, 그 미사는 생동적인 미사가 된다. 그저 가슴을 세 번 치며 습관적으로 경문을 외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미사 안에서 용서의 은총을 깊이 체험할 것이다. 신자들의 기도 시간에 자기 내면의 기도를 올릴 수 있어야 한다. 감사, 탄원, 청원, 전구, 그 어떤 형식의 기도이든 그 기도가 하느님과 우리를 깊이 연결한다. 자기 성찰과 내면의 기도, 이 두 준비만으로도 미사가 달라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미사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 아니면 그저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참여하고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일상의 예식화(ritualization), 삶의 성사화(sacramentalization)
미사는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일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7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신비를 기억하고 기념한다. 미사의 출발은 신비와 사건이다. 예식은 신비와 사건을 기념하는 형식이다. 즉, 미사의 핵심은 신비와 사건에 있는 것이지 예식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 안에서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미사 안에서 예식과 사건과 신비는 언제나 연결된다.
형식(예식)은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내용은 언제나 보이는 형식을 통해 그 의미와 신비를 드러낸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 같은 것이다. 형식은 언제나 내용(의미, 지향, 목적)을 담고 있을 때 살아있는 것이 된다. 형식 그 자체에만 얽매이면, 즉 형식 그 자체를 유지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지면, 형식은 자칫 굴레와 억압이 되기도 한다. 형식은 늘 변화되고 쇄신되어야 한다.
형식(예식)은 필요하다. 사건과 신비는 예식을 통해서 선포되고 전달된다. 형식을 갖추지 못한 내용은 제멋대로 되기 쉽다. 삶의 형식을 놓쳐버리면 방종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예식이 필요하다. 삶에 있어서 생각과 마음과 욕망과 의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예식(의례)이 필요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기 일상의 삶을 예식화 하는 일은 중요하다. 삶의 예식화는 부정적인 의미의 형식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인에게 일상을 예식화 한다는 것은 자신의 말과 행동과 태도를 예수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예식, 형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우리 삶을 주님께 드리는 미사로 봉헌한다는 뜻이다. 보편 사제직의 진정한 의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