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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역사에 도전하라. / 임현수 목사
저는 지난 한달 동안 보았던 뉴스 3건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주제를 연결시켜 보았습니다.
지난 부활절, 美 ABCnews가 미국내 메가처치를 집중 조명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ABCnews는 이 현상을 월마트에 비유하면서 현재 미국전역에 850에서 900여개의 메가처치들(2천여명 이상이 예배에 참석하는 교회)이 존재한다고 소개했습니다.
그 뉴스가 있고 난 후 대표적인 교회 가운데 다시 소개된 교회가 새들백 교회입니다. 새들백 교회 이야기는 미국을 충격으로 몰아 넣었던 엄청난 법정 살인 사건과 연결되면서 전세계적으로 급물살을 타면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3월 11일 미국 동남부 조지아주가 공포에 휩싸였던 적이 있습니다. 재판을 기다리던 한 흑인 미결수가 판사를 비롯한 법원공무원 3명을 그것도 법정에서 살해한 뒤 달아난 엽기적인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유명 택배회사의 컴퓨터 전문가로 일하던 브라이언 니콜스(33)는 3월 11일 오전 9시, 8년 동안 동거해온 여자친구를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을 예정이었습니 다. 니콜스는 구치소에서 아틀란타 법원으로 호송된 뒤 재판정으로 들어가기 전에 호송관이 수갑을 벗기는 순간 여자 부보안관을 힘으로 제압하고 총을 빼앗았습니다. 대학 재학시절 미식축구 선수를 하고 태권도,가라데를 수련한, 몸무게 100kg이 넘는 건장한 체격의 니콜스로서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 니다. 니콜스는 곧바로 법정으로 돌진해서 재판준비를 하고 있던 판사와 속기사를 총으로 쏴 살해했습니다.
니콜스는 그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8층으로부터 빠져나가다가 자신을 뒤쫓아온 또 다른 부 보안관을 법원 밖에서 또 다시 살해했습니다.
순식간에 법원 공무원 3명을 살해하고 범인이 감쪽같이 사라진 이 사건으로 CNN과 FOX 등 미국의 모든 주요 방송은 매시간 속보를 전했습니다.
만약의 인질사태에 대비해서 아틀란타시의 모든 초등학교에는 출입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렇게 비상사태가 계속되는 동안 경찰은 단 한 건의 단서도 잡지 못 하고 전전긍긍했고, 조지아주는 범인 체포에 6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고 시민들의 제보를 기다렸습니다. 이러기를 26시간… 3월 12일 아침 10시쯤 911 전화를 통해 마침내 한 건의 신고전화가 접수됐습니다. 자신의 집에 범인이 있다는 차분한 목소리의 20대 주부의 전화였습니다.
자기가 밤새 인질로 잡고 있던 한 주부를 7시간 만에 풀어주고 그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백기를 내걸고 순순히 투항했습니다. 그 7시간 동안 이 남녀 사이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다음은 새벽 2시에 들이닥친 살인범의 총부리 앞에서도 용기와 기도를 잃지 않았던, 그래서 마침내 더 이상의 살상을 막고 결과적으로 자신과 살인범의 목숨도 구한 주부 애쉴리 스미스(26)는 4년 전 살인사건의 피해자로서 칼에 맞은 채 자신의 품에서 숨져가는 남편을 지켜봐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7시간 동안 그녀는 살인범과의 7시간 동안의 만남을 통해 그 동안 자기가 만났던 하나님 그리고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자를 나누면서 그 살인범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지만 불과 7시간 만에 딴 사람으로 바뀐 브라이언은 백기를 들고 순수하게 투항한 것 입니다.
그 후에 CNN방송은 2시간 동안이나 특집으로 그녀가 공부하고 있던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심층취재 하므로 미국 출판 역사상 최고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엄청난 전도를 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 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새들백 교회는 너무도 훌륭한 교회로 전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저는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현재 미국 전역에 이런 위험한 인물로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이 400만명 이라는 뉴스를 접하면서 감옥과 교회를 생각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줄어들고 교인이 없어지면서 미국 땅에는 감옥이 늘어나고 법원이 늘어나고 땅이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 모습들 입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것, 금기사항이 많다는 것...이것이 감옥과 수도원의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한곳에는 적막과 어둠의 분위기가 흐르고...
한 곳에는 평화와 온화함이 흐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생활도 불편하고 식사도 온전치 못한 비슷한 환경이지만 ...
감옥 안에는 불평의 목소리로 하루가 저무는 반면
수도원에는 감사와 찬송의 목소리로 하루가 지나간다는 점 때문입니다.
1940년부터 1960년까지 20년 동안은 미국교회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습니다.
1940년대 미국의 주요 개신교, 장로교, 성공회, 루터교, 침례교, 감리교인이 미국 전 인구의 49%이었으며 그 뒤 20년 동안 기독교는 전 인구의 15%가 증가했습니다. 이토록 왕성하게 성장하는 기간 동안 미국교회가 주로 추진해온 대표적인 일이 예배당을 크게 짓는 것 이었습니다. 무려 38만개의 에배당을 지었습니다. 수 십만 개의 교회 건물이 그 때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미국교회는 가장 왕성하게 성장할 때에 신학교를 많이 세웠습니다. 깊은 산 속에 캠프장이나 기도원을 세우는 일이 유행처럼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65년 동안 이런 사역이 지속되어온 것이고 지금은 다시 메가처치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 입니다.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것은 언제나 확인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 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회사를 짓고, 호텔을 짓고, 고층 아파트를 짓고, 대형 쇼핑몰을 짓고, 엄청난 규모의 화려한 카지노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뜻 인가를 심각하게 묻지 않습니다.
우리 집 짓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 공장 짓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유독 하나님의 교회를 짓는 것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습니다. 물론 아무 목적도 없이 무턱대고 예배당을 지을 수는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예배당 짓는 것은 일반 건물 짓는 것과는 확실히 구별 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 입니다.
타락한 제정 러시아 시절 볼세비키 혁명을 주도한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전역에 있던 교회들을 몰수했고 불태우고 다 부셔 버렸습니다. 그리고 70년 동이나 저주 가운데 살았습니다. 북한 땅에도 2,800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한 개도 남기지 않고 다 부셔 버렸습니다.
지구상에서 단 한나의 교회 건물도 존재하지 않았던 북한 땅은 지난 60년 동안 가장 무서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처럼 197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부흥이 일어나면서 약 5만개의 교회가 생겨 났고 그 후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막강한 파워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들이 아닙니다.
사54 입니다…
사 54: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3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54에 보시면 “네 장막터를 넓히며 성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라”고 명 하십니다. 그리고 “말뚝을 견고하게 하라” 하십니다. 이제 성읍들이 번창하게 될 것 이고, 구원 받은 백성들이 크게 번성 할 것 이라하십니다.
여호수아 17장에 보시면 요셉 자손에게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 합니다.
수 17:1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성경의 정신은 항상 개척 정신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개척에는 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습니다.
마태 28장과 사도행전 1장에 보시면 주님은 천국을 지상에 확장하라 명하십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3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라 하십니다. 땅 끝까지 이 장막터를 넓히며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라 하십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역대상 29장에 있는 것처럼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 건축의 대의 명분입니다. 성전 건축은 개인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 입니다.
왕상5:5절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 하려하오니”
학개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회당을 중심해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복음 활동도 그렇고 사도 바울도 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 성전은 복음 사역의 중요한 센터가 될 것 입니다.
자손 만대가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기복신앙의 차원에서 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직접 짓지는 못했지만 성전 건축에 심혈을 기울려 헌신했던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의 집을 놀랍게 축복하셨고 그 가계에서 메시야가 탄생하는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전보다 내 집에 빠르면 복 받지 못 합니다. 잘 아시는 학개서 1:9절입니다.
학 1: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아무리 포부가 크고 비젼이 크다 할지라도 준비된 그릇이 적으면 그만큼 채움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은 그런 면에서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가난한 한 과부의 가정을 축하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왕하4:2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3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4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5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6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준비된 만큼 주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십니다. 믿음대로 되리라 하시고, 네가 밟는 땅을 네게 주리라 하십니다. 스스로 개척하라 하십니다.
7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고한대 저가 가로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아무리 부어 주고 싶어도 그릇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21세기에 축복을 받으려면 이런 역사적인 대전환기에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건축은 현재도 중요하지만 후대를 위함이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앞으로 추진해야 될 전파선교도 그렇고, 인터넷 선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위대한 동물 인간에게 주신 축복가운데 하나가 개척정신, 도전정신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도전한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한 꿈이 이루어졌을 때,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거룩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험한 산지에 도전한 갈렙처럼" 편한 길만 찾아 다니지 말고 바른길에 도전해야 하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나라가 태동된 이후 줄곧 한 가지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비전은 세상을 떠돌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족장시대에는 물론 심지어 비참했던 포로생활 속에서도, 430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때에도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 비전이었습니다.
드디어 광야 길을 마치고 이제 저기 요단강만 건너면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리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겠는데 거기서 지도자 모세가 죽습니다. 엄청난 충격이었겠지요. 지도자가 죽어도 이 비전만큼은 포기될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워 다시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비전이 선포되어집니다.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 온갖 도전과 역경을 이겨내고 그 비전을 이루어 가는 이야기가 여호수아서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를 비전서라 부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서는 단지 수 천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룩한 비전 성취서가 아닙니다.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비전을 이루길 원하는 모든 사람 사람들의 텍스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비전을 주시고, 한 땅을 정복한 다음엔 또 다른 땅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비전과 꿈을 이루어갈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본문의 주인공 - 여호수아란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 전체에 흐르는 사상은 "야훼는 구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비전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우리를 주목시키는 세단어가 있습니다.
① 가라!
② 축복의 땅을 얻게 하겠다.
③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이제 이 싸움은 이미 승리한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싸움은 싸워서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이겨 놓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요. 여호수아는 불안에 떨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본문을 읽을 때에 "강하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강하라"는 얘기는 지금 여호수아의 마음이 약해질 때로 약해져 있다는 얘기입니다.
"담대하라"는 얘기는 지금 여호수아가 잔뜩 겁을 먹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는 얘기는 지금 여호수아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로버트 모건이 쓴 「홍해의 법칙」이란 책에 보면 성경 도처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수 없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하는 성경의 모든 상황은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러한 여호수아를 하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약한 자를 찾아 오십니다. 낙심한자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여, 일어나라 !
신구약 성경에 '일어나라'는 단어가 618번 나옵니다.
영적 전쟁에서 실패한 너의 모습이 진정한 너의 모습이 아니다. 일어나라! 낙심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 너의 모습이 진정한 너의 모습이 아니다. 일어나라! 게으름과 나태한 모습이 진정한 너의 모습이 아니다.
일어나라! 이 시간 사업에 문제를 안고 오신 분이 계십니까?
일어나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비전의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구경꾼처럼 앉아 있지 않습니다. 작은 일에 넘어져 있지 않습니다.
헬라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우스왕이 적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웃나라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나라의 사신이 찾아와 "우리 임금님이 생각해 보겠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때, 아게실라우스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의 왕에게 전하라.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일어나 행군하고 정복할 것이다!"
누군가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분이 계십니까?
의지할 곳이 없어 무엇인가를 붙들어야 살아 갈 수 있을 만큼 약해진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일어나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그 순간은 여러분이 상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해야 할 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찬스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일어나십시오.
기드온이 용사를 모집했을 때 3만 2천명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길르앗 산에서 만용으로 몰려온 사람 2만 2천명을 돌려보냅니다. 그리고도 미련한 병사들을 다 돌려보냅니다.
겨우 300명의 군사만 남았습니다. 이 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수십만 미디안 군사를 무찌릅니다. 이 전쟁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자는 하나님이다." 이 말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대성을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세상의 위인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기독교의 위인들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들어낸다」고요.
믿음이란 인간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크게 믿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일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사람은 참 위대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은 세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 문장은 2절에서 마쳐지는데 "내가 ... 주는 땅으로 가라"
둘째 문장은 4절에서 맺어지는데 "너희 지경이 되리라"
셋째 문장은 6절로 마쳐집니다.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여기 세 문장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주셨다"는 겁니다. 이미 주신 비전을 이루시겠다는 겁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축복의 땅을 얻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그것은 미래의 천국보장과 현실의 승리보장입니다.
누가 이 비전을 이룹니까?
출애굽 백성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긍정적 보고를 했던 사람입니다. 신령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신령한 능력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는 승리한다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제외해 놓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는 능히 정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발바닥입니까?
여호수아는 맨발입니까?
신발을 신었습니까?
여호수아 5장 13절을 봅시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이야기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 '발바닥 사건'입니다.
발바닥으로 밟는 것을 주겠다고 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합니다. 여리고성 싸움을 앞두고 떨어지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5장의 여리고성 사건도 발바닥 사건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호수아 1장 사건은 그 다음 일어나는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의 전초전입니다. 그것도 발바닥입니다.
3장 15절을 봅시다.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영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요단을 건너기 위하여 앞장을 서서 언약궤를 메고 요단에 들어가 서 있는데 그들의 발이 4장 1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넘쳐 흘렀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 발바닥으로 요단강에 들어서자 요단강이 갈라졌고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육지를 다시 밟자 요단강이 합쳐 흐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맨발바닥으로 지내는 사람은 종 밖에 없습니다. 모든 자유인들은 신발을 신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호수아 1장, 3장, 4장, 5장에 걸쳐서 계속 발바닥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모세야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신발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이 메시지 때문입니다. 너는 내 종이니라! 네가 선 곳이 거룩한 곳이라는 말은 땅이 거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휘권을 쥔 통치권자는 나다. 너는 내 명령에 그냥 순종하는 병사이다." 이런 뜻입니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민감하라는 뜻입니다. 즉, 성령에 민감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에게 민감한 사람입니다. 셀교회가 무엇입니까? 셀모임을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찬송하며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응답받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목장모임의 자리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 하는 곳이 셀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맨발로 선 종들에게 하나님 앞에 항복한 졸병들에게 축복의 땅,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고려말기의 충신 정몽주의 충절은 어려울 때 나타났습니다.
고려시대의 많은 군신들이 충절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성계에게 기울어졌을 때 이방원은 정몽주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하여가' 시 한구절을 읊어보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산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자."
그때에 이방원에게 정몽주가 답하여 보낸 '단심가'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였습니다.
국가가 위급할 때 애국자를 알 수 있으며 세상이 어지러울 때 의인을 선별할 수 있고 가난한 살림 속에서 현모양처가 드러나고 성도의 신앙은 환난 중에서 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집안에 들어가서 어려움이 없고 낙이 있을 때에 누가 감사를 못하겠습니까? 밖에 나와서 대접받고 높임 받을 때 누가 인격자 노릇을 못하겠습니까?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 신앙의 향기를 토할 때 그가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어려운 처지에서 충성할 때 그가 진정한 일꾼이 아니겠습니까? 큰 일을 치루고 나면 인물이 들어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부탁하신 말씀은 편안할 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앞에는 요단강, 건너편엔 두려운 대적이 놓여 있었고 안에는 무지하고 우매한 백성들이 지도자를 잘 따라주지 아니하는 때에 주셨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가정교회의 비전을 주신 것은 이민 교회가 부흥되는 시기에 주신 비젼이 아니었습니다.
이민교회 이미지가 실추되고 전도의 문이 막히고 교회들마다 행복과 기쁨, 능력과 열정이 사라져 가고 있을 때 주신 비전이었습니다.
① 셀교회 모델교회 하나를 세우기까지 누군가 이 비전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② 주님이 보시고자 하는 성경의 원형교회를 이루기까지는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③ 그러나 반드시 그 교회는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 교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살아나고 카나다 교회와 세계민족이 살아나는 그 영광의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은 분명 하나님이 보증하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 준비되어 포장된 선물은 아니었습니다. 온 백성이 피와 땀을 흘려 수고하며 애써서 얻어야 할 땅이었습니다. 축복의 땅은 완성제품이 아니라 도전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이었습니다. 싸워서 얻어야 할 땅이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싸우도록 버려 두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신임장이 들려있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잃어버릴 것이 없으며 우리를 넘어뜨릴 사람도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여러번 하신 말씀 중 '믿는 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받고 적게 믿으면 적게, 안 믿으면 못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믿기만 하면 또 말씀대로 순종만하면 아낌없이 다 주시는 것입니다. 주신 분은 아끼지 않으시는데 어찌하여 마음껏 밟지 못하는가? 큰 은혜를 받아 큰 힘을 얻어 크게 일해야 할
것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은 누가 축복의 땅을 얻을 수 있는가?
1. 실패 할 것 생각하면 실패자 된다.
2. 자신의 미래를 과소평가하지 말라.
3. 크게 믿으라
4. 크게 기도하라.
5. 크게 행동하라.
6. 하나님의 도우심을 크게 얻으라.
미국 로스앤젤리스에 한 유대인 노파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유대인 노파가 하는 일은 일정한 거리를 정해 놓고 매일 그 거리를 돌면서 중얼중얼 거리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할머니, 무엇을 하십니까?" 물었습니다.
할머니의 대답, "내가 우리 민족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겠는데 나이 많고 가진 것이 없어서 별로 할 것이 없습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니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했는데 이 땅을 밟으면서 이 땅을 우리민족에게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몇 년 기도하고 세월이 흐르면 이상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유대인 할머니가 밟으며 기도하는 거리에 유대인 상점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유대인 학교가 세워집니다.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거리가 됩니다. 유대인들이 상권을 잡습니다. 유대인 구의원, 시의원이 뽑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수아에게만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지금 우리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교회의 비전을 붙들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 유대인 노파처럼 돌고 도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에 도전한 여호수아처럼 그 땅에 도전 할 것입니다. 교회 비전을 가슴에 품고 신발을 벗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발벗고 나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