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대국집 회화나무 - 여기 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Master Eckhart taught that to have nothing and make oneself open and "empty," not to let one's ego stand in one's way, is the condition for achieving spiritual wealth and strength.
(수사(修士)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설교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마세요. 마음을 늘 여세요. 철저히 비우세요. 에고가 없어져요. 그래야만 영적으로 부자가 됩니다. 그래야만 역경을 이기는 힘을 얻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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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명 : Sophora japonica L. / 콩과 회화나무속
♧ 꽃말 : 망향(nostalgia)
이십대부터 혼술을 즐기는 편이었는데, 식당에서의 혼술은 사십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습관이다. 그때 나는 기업 CEO의 경영 사례를 대필해주고 있었다. 1년이 걸렸는데, 미팅을 마치고 나면 그분이 넉넉히 차비를 주곤 했다. 그 돈을 가지고 늦은 밤 식당을 찾아들었다. 힘들어도 입금될 때까지는 멈추지 말자며 혼술로 쓰러지는 내 영혼을 달랬다.
모든 일정이 끝났는데도 식당에서의 혼술 버릇은 버릴 수가 없었다. 혼밥과 혼술이 자연스러운 세태가 되고 있어 눈치 볼 필요도 없었지만, 그것보다는 테이블을 독차지하고 앉아 밥 한 숟갈 먹고 술 한 잔 마시고 생각에 잠기는 상황이 내 영성을 깊게 하는 것 같았다.
이를 존재의 환(幻)이라고 표현해 보면 어떨까? 즉 주변 테이블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모습들에 명멸(明滅)이란 단어가 덧씌워지면서 모든 게 덧없다는 생각에 다다르면, 나도 환각으로 앉아 있다는 기묘한 느낌이 꾹 눌러온다. 말없이 술을 마시다 보니 취기가 확 달아올라서 나타난 현상일 수도 있지만, 그 순간만은 내가 사람들로부터 우열 없는 평등한 존재가 되면서 살겠다는 의지가 다져진다.
혼밥하며 혼술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순대국집이다. 혼밥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의 술 한 병은 술이 아니라 시름을 달래는 벗으로 여겨져 부담이 없다. 그런데 사람보다 나무에 더 많은 시선을 주면서 사는 요즘 혼술 시 전과 다른 느낌들이 차올랐다. 내 존재의 환(幻)을 통해 무념의 경지를 맛보는 것은 사라졌고, 창가 넘어 아파하며 외롭게 서 있는 나무를 보면서 연민이 커져만 갔다. 잘 자라는 것 같았는데, 어느 날 수족이 잘리는 비운으로 어둠 속에서 천둥처럼 떨고 있는 게 보였다. 가로수라는 그 이유만으로 겪어야 하는 나무의 수난에 공포스러운 연민이 감정이입되면서 내 존재의 환(幻)은 아픈 자각으로 이어져갔다. 무덤처럼 몹시 슬펐다.
에리히 프롬이 인용한 말을 보자.
[수사(修士)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설교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마세요. 마음을 늘 여세요. 철저히 비우세요. 에고가 없어져요. 그래야만 영적으로 부자가 됩니다. 그래야만 역경을 이기는 힘을 얻어요.”]
여기서 말하는 수사(修士) 에크하르트는 중세 독일 신비주의 사상가라고 하는데, 비우면서 에고를 없애야 한다는 것은 부처의 말과 같아 보인다. 이를 통해 영성을 길러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하는 대목은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소유가 없으면, 최소한의 자존감이 없으면, 살아가기가 좀 힘든데 어찌해서 이런 문장들이 나올 수 있을까? 순대국집 앞에 서 있는 회화나무를 통해 이 사유를 진전시켜 보자.
나를 비우고 없애는 존재의 환(幻)을 깨뜨린 회화나무에 다가갔다. 검갈색으로 삼각 무늬를 만들고 있는 딱딱한 수피에 손을 대고는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둥근 철망의 가로수 보호덮개가 가벼운 흙먼지를 쓰고 있었고, 주위로 시멘트 보도블록이 부채 모양으로 감싸고 있었다. 사람이 허락한 작은 공간에 놓인 흙 위로 피어오르는 꽃다지가 봄을 알리고 있었지만, 시선을 쏘면 쏠수록 갑갑증이 일었다. 수피가 굵어지면 제거한다는 보호덮개가 눈을 차갑게 찔러댔다.
고개를 들어 나무줄기를 타고 가녀린 나뭇가지에 눈길을 주었다. 칙칙한 은빛을 띠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작년에 자란 나뭇가지였을 것이다. 건물을 가린다고, 도로에 늘어진다고,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고, 때가 되면 잘리는 비참한 운명을 딛고 뻗어간다고 여기니 슬픔보다 울화가 얹혀졌다.
왜 꼭 거리에 가로수가 있어야 할까? 전에 없던 논리가 생겨나면서 만들어지는 먹장구름 같은 감정에 맥이 풀린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놓인 것 같은 모든 거리의 가로수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그러면서 <슬픈 짐승>에 나오는 “여기 서 있는 것이 좋지 않아”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그러자 가슴에 태산 하나가 쿵 떨어지고 시린 불꽃같은 감정이 회오리로 일어 더는 내 존재를 그곳에 붙박을 수 없었다.
우리 동네 가로수로 많이 심겨진 회화나무 학명은 Sophora japonica L.이다. 속명 Sophora는 이 속의 식물을 가리키던 아랍어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종소명 japonica는 일본을 지칭하는데, 일본이 원산이라는 뜻은 아니고 일본에서 채집한 표본을 보고 학명 표기를 처음 시작한 린네가 명명한 것이란다.
여기서 자생지가 있는 원산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식물의 진화사를 보면 원산지 구분은 크게 의미가 없다. 기후 변동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나타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원산지 표기가 행해지고 있는 걸 보면 이것 또한 소유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가늠해 본다. 소유만이 존재를 확장시킨다는 본능적 본성 말이다.
회화나무 원산지가 중국이라고도 하고 한국이라고도 하고 일본이라고도 하는 것 같은데, 여하튼 서양에는 거의 없고 동아시아에서 주로 자라는 게 회화나무란다. 서양에서는 회화나무를 Chinese scholar tree 즉 중국 학자수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고 Necklacepod(neck목, lace레이스, pod콩이 들어 있는 꼬투리) 그러니까 염주 모양의 열매가 달린 목걸이 열매 나무로 부른다고 한다.
더 많은 논의가 있는 것 같지만, 생략하고 넘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생지 혹은 숲에서 잘 살아가고 있을 회화나무를 선비나무라고 혹은 재앙을 물리친다고 하면서 우리 곁에 심어놓고 참혹하게 다룬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혹한 운명을 갖고 사는 나무가 어디 회화나무뿐이겠는가? 조경수로 가로수로 심어진 모든 나무들에게 두꺼운 가죽처럼 씌어진 굴레인 것을.
그렇다면 거리에 집에 나무가 없다면 어떤 풍경이 만들어질까? 사막 같은 황량함에 우리 마음도 시들어질까? 바이오필리아가 사라져 뿌리 없는 삶으로 존재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대목에서 이런 발언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공간을 우리 시선으로 창조한다는 인간중심의 생각을 과감히 버리고, 모두가 고유의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자연중심의 생각으로 이 공간을 디자인할 수 있지 않을까? 즉 나무에 손을 대지 않는 조경 말이다. 이 또한 현실성 없는 상상뿐일지도 모르지만 상상은 사물을 소유하지 않고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멋진 일이기에 주저 없이 적어 보았다.
회화나무 꽃말은 망향(望鄕)이라고 한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homesickness와 nostalgia 두 단어가 나온다. 노스탤지어(nostalgia). 사춘기 시절 시를 쓰고 있을 때 지극히 소중히 모셨던 단어였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자라는 의지를 꺾지 못해 꾸역꾸역 가지를 뻗으면 여지없이 전지당하는 회화나무는 어떤 노스탤지어를 갖고 살아갈까?
나무교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여기 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네 살려는 의지가 남아 있을 수 없어
최소한의 자존감마저
광기의 살인극에 넘어갈 수 있어
여기 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기이한 창조에 멋을 들인 작자들이
아픈 상처가 만든 가지들을 소유하려고
네 존재를 무참히 짓이길 수 있어
여기 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모든 것이 환(幻)이라고 하는 작자도
모든 것이 환유(幻有)라고 믿는 작자도
모든 것이 환화(幻化)라고 상상하는 작자도
네가 품고 사는 비련의 노스탤지어 발톱 때만도 못해
너는 정말 여기 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슬프고 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