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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4강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말씀 / 마가복음 2:18-3:6
요절 / 마가복음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의 금식과 안식일 법으로 인한 충돌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18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모세오경에는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금식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 그 외 특별한 참회가 요구되거나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 앞에서 금식하기도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때는 일 년에 네 차례 금식했습니다. 또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율법에는 1번 금식 규정이 있는데 자신들의 필요나 경건 생활을 위해 4회, 예수님 때는 주 2회, 이렇게 늘어난 것입니다. 또 금식은 기도, 구제와 함께 유대인들의 경건 생활의 3대 표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금식이 오래 행해져 오면서 바리새인들은 금식의 본래 정신과 목적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이고 관습적으로 자신의 경건 생활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세수도 하지 않고 어두운 옷을 입고 수척한 모습으로 머리를 흩어 늘어뜨리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티를 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바리새인들을 경건한 사람들로 바라보고 매우 존경하는 마음으로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들어 참된 금식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첫 번째는 혼인 잔칫집 비유입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금식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에는 때가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혼인 집 신랑으로, 제자들을 혼인 집 손님들로 비유합니다. 자신이 세리 레위를 비롯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고 있는 그 식사 자리를 혼인 잔치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공인된 죄인들인 세리와 그 밖의 다른 죄인들과 함께 식사 교제하는 것은 그저 밥 한번 같이 먹고, 다독거려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가족 공동체로 받아들여주는 것입니다. 호세아 2장 19,20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져 타락한 이스라엘을 부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 성경이 예언한 이 말씀이 성취되는 놀라운 자리에 함께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타락한 백성들, 죄인들을 영접하고 용서하고 그들을 영원한 아내요, 가족으로 맞아들이는 그 잔치에 함께 앉아 있는 친구들입니다. 유대의 혼인 잔치는 일주일 동안 지속했는데 이 기간 모든 슬픈 행사들은 전면 금지되었습니다. 비록 금식 날일지라도 면제되었습니다. 혼인 잔칫집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먹고 마시며 기뻐하고 춤을 추며 즐거워했습니다. 성도 된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이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순수하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고 예수님과 동행할 때, 우리 마음에는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이 이미 나의 모든 죄짐과 허물과 슬픔과 운명과 인생의 모든 고뇌의 짐들을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시면서 전부 담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분들에게 혼인 잔치와 같은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과 충만한 은혜로 함께 해 주십니다. 신앙생활은 규례에 얽매인 생활이나 금욕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혼인 잔치에서처럼 본질적으로 기쁘고 즐거운 생활입니다. 그 기쁨은 우리 성도들의 신랑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가 서로 함께 마주만 봐도 행복하고 웃음꽃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 그 자체로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고 뭔가 의욕적으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그런 마음 자세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인 잔칫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 없지만,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는 금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말이 뭔말일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를 의미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교훈집인 『디다케』에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세상 죄와 유혹들이 예수님과 멀어지도록, 우리에게서 예수님을 빼앗아간다는 의미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쁜 일들로 인해 예수님을 내 마음 중심에 모시고 있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심령에 항상 예수님을 모시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그러나 세상 죄와 유혹들에 예수님을 빼앗길 때 혼인 잔칫집의 기쁨과 은혜가 사라집니다. 대궐 같은 집, 아무리 좋은 차를 굴리며 살아도 그 영혼은 염려와 고독과 슬픔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느냐 없느냐, 예수님을 빼앗겼느냐, 빼앗기지 않았느냐가 진정한 금식의 기준인 셈입니다. 우리 심령에 예수님이 없을 때는 금식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회복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과 은혜로 충만한 신앙생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두 번째 비유는 옷감 비유, 세 번째 비유는 포도주와 포도주를 담는 부대 비유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붙인 생베 옷감이 수축력으로 인해 낡은 옷을 당겨서 찢어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면 새 포도주가 발효하여 낡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쏟아져 버리고, 부대도 터져 둘다 버리게 됩니다. 여기 비유의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가르침, 즉 복음을 가리킵니다.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나, 또는 그동안 이어져 내려왔던 유대교의 전통이나 관습, 율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형식과 제도는 내용을 담기 위한 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형식과 제도, 또는 아무리 좋은 전통도 시간이 가고 오래되다 보면, 굳어지고 낡아지기 쉽습니다. 본질을 지키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사람의 마음 또한 굳어지고 낡아지기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위험한 것은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굳어 버리는 것입니다. 굳어 버리는 가장 큰 원인은 교만과 안일입니다. 교만은 다 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세계관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 방식만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배우지 않을 때 성장하지 못하게 되고 성장하지 못하면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겸손하게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성품을 끊임없이 배우고 닮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젊은이라도 배우려는 마음이 없다면 낡은 가죽 부대가 되고, 비록 나이가 많을지라도 겸손히 배우고자 하면 새 부대가 됩니다. 또 안일을 사랑하는 마음도 낡은 가죽 부대가 되게 하는 큰 요인입니다. 안일은 뭔가 도전하는 것을 싫어하고, 그저 그렇게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뭔가 새로운 삶의 방식에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낡은 가죽 부대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전통과 율법적인 생각에만 사로잡혀 예수님의 가르침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종교 지도자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부딪칠 때마다 “어찌하여 그렇게 하는가? 어찌하여, 어찌하여”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픈된 마음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와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배우고자 하는 심정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끊임없이 예수님의 삶과 성품을 배우고자 하는 분들이 바로 새 부대입니다.
둘째, 새 부대가 되려면 성경으로 돌아가 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봐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개혁되는 것입니다. 여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에서부터 ‘개혁주의’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종교개혁 시대 때 루터나 칼빈, 쯔빙글리를 비롯한 개혁파를 따르는 신앙 노선이 바로 개혁주의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뜨거운 심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연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진리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들고 매너리즘에 빠져 형식적이 되기 쉽습니다. 본질은 사라지고, 제도화, 형식화 될 때 권위주의가 생겨나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판단 정죄하기 쉽습니다. 제도나 형식은 본질, 내용을 담는 좋은 그릇이지만 제도나 형식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 공동체가 제도화될 때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낡은 가죽 부대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리가 늘 새 부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 교회 공동체가 복음 중심, 예수님 중심으로 끊임없이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4:22-24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로마서 12:2절도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늘 굳어지고 낡아지기 쉬운 마음을 돌이켜 회개함으로 새로운 가죽 부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끊임없이 배우는 삶을 통해 본성적인 삶들이 변화를 받아 늘 복음 안에 담긴 신선함과 생명력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예수님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트집을 잡았습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당시 유대 선생, 랍비들은 안식일에 금지된 일의 조항들 39가지를 만들었습니다. 그중에는 추수하는 일을 해서도 안 되고 타작도 안되고, 키질도 안 되었습니다. 밀 이삭을 자른 것을 추수로, 손으로 비비고 후후 불어 껍질을 날리는 행위를 타작과 키질로 본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어이없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입니다. 또 안식일에는 1Km 이상 움직여서는 안 되었는데 밀밭 사잇길로 지나가다 보면, 1Km이상 걷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바리새인들의 잣대로 본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 법을 어긴 중죄인들이었습니다. 한 가지도 아니고 서너 가지를 어긴 셈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사무엘상 21장에 나오는 다윗의 경우를 예로 들어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다윗과 다윗의 추종자들이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을 때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이때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가서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전의 진설병 외에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진설병은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히멜렉 제사장은 다윗 일행의 사정을 참작해 그 진설병을 다윗 일행에게 줍니다. ‘진설병’을 먹은 것은 율법을 범한 행위였지만 하나님은 다윗 일행이나 아히멜렉 제사장을 징계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 말씀을 인용하면서 기계적인 잣대로 안식일 규정들을 갖다 댈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본뜻을 생각해 보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27)” 하나님은 안식일부터 만드신 후, 그것을 지킬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먼저 만드시고 안식일을 복되게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위해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 금지 조항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항에 얽매여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본뜻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핵심 가치가 안식일 규정들을 잘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훌륭한 서기관은 ‘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저수지’에 비유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의 문자가 몇 자인지까지도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들의 본뜻에 대해서는 외면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의 주인은 규정도, 종교 지도자들도 아닌 인자이십니다. 인자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이 안식일을 만드셨고 안식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기준과 규정들을 세우고 주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율법의 조항을 지키는 데는 열심을 내었지만,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무시했습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이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준과 규정을 세우고 모범을 보여주고 계시는데, 바리새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무엇일까요? 16세기,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 중 하나인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는 일요일은 주님의 날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악이 패배한 날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축하하는 날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 마가는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이렇게 말하지 않고 “예수님이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날의 주인이십니다. 구약시대와 예수님 당시 지켜졌던 안식일인 토요일도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지금 우리가 모여 예배하는 주일인 일요일도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켜 예배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을 기억하고 그 주권을 고백하는 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입니다. 신부가 신랑을 만나 사귀며 기쁨을 누리듯, 우리 성도들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 그분과 함께하는 즐거움과 행복이 있는 날이 바로 오늘 주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마음의 쉼과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고 삶의 에너지를 새롭게 충전하는 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어떻게 안식을 주시는가 한 사건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는 사건이 나옵니다. 고대 유대 문서에 의하면, 이 사람의 본래 직업이 목수였다고 하기도 하고, 미장이였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 나왔지만, 손으로 뭔가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예수님이 이 사람을 고치시는가만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손 마른 사람에 대한 자비와 관심은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한 손이 말라 정상적인 생활을 못 하면 얼마나 살기가 불편하고 힘들겠습니까? 그의 인생은 참된 쉼과 안식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도와줄까 생각을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지키는가? 어기는가? 여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을 예수님을 고발하는 도구로만 바라본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한손 마른 사람은 당장 고쳐 주지 않으면 안되는 시급한 병은 아니기 때문에 다음 날 고쳐줄 수도 있습니다. 유대 선생, 랍비들은 안식일에 의료 행위가 허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생명이 위협받을 때는 의료 행위가 허용된다고 일반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산파들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분만을 미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할례 또한 허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모독하지 않는 신성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생명은 위험에 처해 있지 않았으므로 바리새인들은 그를 도우려는 예수님의 행동을 안식일을 어기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소를 비롯한 가축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소중한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만든 안식일의 세부 규정들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명시한 제도가 아니라 인간이 안식일을 잘 지키려고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제도가 하나님이 만드신 안식일의 본뜻을 침해하고 훼손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의 제정자이자, 주인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일어서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질문 속에 정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으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고,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선’은 ‘생명을 구하는 일’이고, ‘악’은 ‘생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한손 마른 그 사람을 돕고 섬기고 고쳐주는 것이 선이고, 그 사람을 가만 내버려두는 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제정자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한 규정들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안식일에는 소극적으로 뭔가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 즉 생명을 구하고 살리고 돕고 섬기는 일들을 하는 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이 존재하는 목적이고 안식일의 핵심 가치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본뜻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일을 구별해서 지키며 예배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주일을 지키는 것이 잘 지키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한 생명을 돕고 섬기셨던 것처럼 한 생명을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인생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고난을 겪고 있다면, 그 사람이 평안을 찾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돕고 섬겨야 합니다. 이를 통해 안식이 없는 영혼들이 안식을 찾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한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 말씀하심으로 마른 손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 안식이 필요한 영혼들에게 안식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옳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야 옳을까요? 회개해야 마땅할 것 같지만, 낡은 가죽 부대가 되어버린 그들은 더욱 완악해져 예수님을 죽일 궁리까지 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볼 때 신앙생활이 뭘까요? 안식일은 어떤 날일까요?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은혜의 잔치입니다. 안식일은 기계적인 쉼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적극적으로 선한 일, 생명을 살리는 일, 안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누리도록 돕는 날입니다. 우리가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은 교만과 안일,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부인하고, 힘써 예수님의 삶과 성품을 배우고 동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안식이 필요한 영혼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섬겨서 예수님께로 인도하므로 그들 또한 예수님과 함께하는 가운데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 속에서 혼인 잔칫집과 같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