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모세 세 번째 시간으로 첫 번째 강요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모세는 모세의 삶은 3기로 나눌 수 있어요. 그 애굽의 궁전에서 산 40년, 또 광야에서 산 미대한 광야에서 산 40년 그 이후 이제 사역 출애굽 이후에 사역은 40년 그렇게 해서 모세는 3기로 인생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궁전에서 첫 번째 보낸 시간이 40년이에요. 정말 긴 시간이죠. 이미 애굽에 완전히 동화되고도 남은 시간이죠. 남은 시간. 그런데도 모세의 본질적인 궁금증은 해결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한국 부모를 두고 외국에서 자란 자녀들이 처음에는 그냥 뭐 미국에 미국인처럼 이렇게 잘 살아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본질에 대한 고민이 생긴대요.
근데 조국은 어떤 곳인가 가보고 싶기도 하고 또 그 사람들과 동화되어 보고 싶기도 하고 이런 욕망이 생겨난다는 거예요. 모세도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으로 살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는 없었던 거죠. 마음에 계속 그 본질적인 질문을 갖고 40년을 보낸 겁니다. 모세가 애굽 왕궁에서 보낸 40년은 화려한 시간이에요. 세상의 학문을 받아들이는 시간 그러니까 지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했던 시간이 왕궁에서의 40년입니다.
어쨌든 모세는 이 왕궁에서 이 격전지에서 왕궁은 격전지예요. 그 당시는 지금도 전투가 격전지죠. 정치가. 근데 애굽 시대도 마찬가지로 전투 왕궁에 산다는 것은 왕궁은 격전지와도 같아요. 어떻든 모세는 40년 동안 잘 지냈어요. 출생의 비밀을 지녔잖아요. 그러니까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에요. 이것도 엄청난 핸디캡이죠. 사람이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데도 잘 산다는 건 진짜 잘 사는 거예요. 태어났는데 너무 가난해 태어났는데 부모님이 한쪽에 안 계셔 이런 핸디캡이 있고 자란다는 건 되게 어려운 건데 어쨌든 모세는 잘 자랐어요. 지난번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바로의 딸들이 60명이었어요.
이 60명이 자녀를 낳았으면 도대체 몇 명일까요?
최소한 한 120명, 많게는 200명 넘는 자녀들이 왕궁에서 같이 머물러 있었어요. 그러니까 경쟁 관계인 거죠. 그 관계를 40년 동안 잘 지낸 것만으로 봐도 모세는 궁정에서의 40년을 잘 보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화려한 곳에서 잘 자랐어요.
근데 그래도 그래도 자기가 히브리 민족이라는 이 본질적인 문제는 다 해결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화려하게 살았죠. 경쟁을 이겨가며 살았어요. 잘 살았어요. 살았는데도 자기가 히브리 민족이라는 이 사실에 대해서는 잊어버릴 수 없었던 거죠.
두 가지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첫 번째로는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라는 문장을 통해 알 수 있고, 두 번째로는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서 모래 속에 감추니라라는 문장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모세는 화려하게 살았고 여기서 60명의 공주가 낳은 자녀들 중에 경쟁하며 어떻든 이기며 잘 살았어요. 그래도 자기의 본질적인 질문 물음에 대한 자기가 히브리 민족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 정체성은 감출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도 쉽게 감출 수는 없어요. 대충 교회를 다녀도요. 이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 거예요. 어디 가도 진짜 믿음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술자리에 가면 부담스럽고 또 가야 되지 말아야 할 곳에 가면 부담스럽고 괴롭고 우리의 신앙적인 정체성도 쉽게 이렇게 숨길 수는 없습니다.
이 숨길 수 없는 모세의 정체성을 모세는 하나님의 눈으로 포로로 잡혀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게 됐어요. 그래서 이게 11절에 보면 보도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모세의 눈에 민족이 들어오면서 모세의 눈에 민족의 고통이 보이게 되면서 이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히브리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아직 그 민족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일하지 않으셨어요.
근데 그 민족의 고통이 모세의 눈에 들어오자 그때부터 하나님이 모세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자기 민족이 맞는 것을 모세가 봤어요. 그래서 울분을 참지 못해서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에 묻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모세의 대적 이스라엘의 대적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게 돼요. 애굽이 이스라엘의 대적인 거죠. 모세의 대적인 거예요.
이튿날 이제 이 일들이 들키게 됩니다. 들키게 되자 모세는 위대한 광야로 도망가서 거기에 아내를 만나고 40년 동안 이제 광야의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모세가 지닌 정체성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이죠.
두 번째로는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로는 히브리 민족의 편에 동족의 편에 섰다는 것 그리고 애굽 궁정에서 40년 동안 잘 훈련을 받았다는 것, 경쟁자를 이기고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살았다는 이유 너무 좋은 조건을 갖췄죠.
근데 하나님이 그 이유만으로 모세를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조건이 너무 좋아요. 히브리 민족이라는 정체성도 잊어버리지 않으세요?
지도자로 딱이잖아요. 그리고 동족들의 편에 서서 애굽 사람을 죽였어요. 얼마나 이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가 되게 좋은 자격을 가졌어요.
세 번째로는 공개적으로 히브리 민족 편에 섰어요.
네 번째로는 40년 동안 너무 훈련을 잘 받아 경쟁을 이기면서 훈련을 잘 받고 애굽의 궁전에서 애굽의 궁전은 살고 있었어요.
여러분 이 정도만 되면 지도자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바로 모세를 등판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는 일에 사용해도 충분할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200만 대군을 맡기고 싶었던 거죠. 이런 거예요. 모세의 지금의 모습으로는 좋은 이웃은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히브리 민족들의 좋은 이웃은 될 수 있지만 200만 대군을 이끄는 지도자는 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첫 번째 광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성도로 사는 것과 지도자가 되는 건 또 다른 일인 것 같아요. 다른 역량이 필요한 거죠. 모세가 애굽의 궁전에서 훈련도 잘 받고 히브리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리지도 않았고, 히브리 민족의 편에 서서 히브리 민족을 도왔어요. 그리고 수많은 경쟁을 이겨서 살아남은 사람이에요.
이 정도면 이스라엘의 좋은 지도자가 될 거라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지 않은 거죠.
좋은 이웃은 될 수 있지만 좋은 지도자는 될 수 없었어요. 200만 대군을 이끌기 위해서는 40년의 광야가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모세를 광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모세는 지도자가 되기에 좋은 조건을 가졌지만 딱 하나 가지지 않은 조건이 있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과 보낸 시간이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좋은 성도는 하나님과 보낸 시간이 있어야 돼요. 좋은 목회자도 하나님과 보낼 시간이 있어야 돼요. 개인적으로 기도해야 돼 이런 의미가 아니에요. 우리는 언제든지 기도해야 되니까 하나님이 훈련시키고 다듬고 연단시킨 정말 외롭고 힘들게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있어야 좋은 리더나 목회자나 그리고 좋은 성도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냥 우리가 일반적인 자격으로는 그냥 뭐 좋은 이웃은 될 수 있죠. 그러나 리더 교회 부흥을 위한 결정적인 역할들, 하나님이 쓰시는 결정적인 사람의 자리에는 가기가 어렵던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200만 대군을 이끌 지도력을 주기 위해서 40년 동안 그를 광야에 있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보낸 시간들은 우리를 자라게 하고요. 또 성숙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게 만들어요. 하나님은 그런 이유로 모세를 위대한 광야로 보냈습니다.
성도들 중에 광야가 없는 성도가 있어요. 두 종류죠. 광야가 없거나 광야를 잊어버렸거나 이 두 가지예요. 그러니까 성도들은 광야를 겪지 않은 성도들이 있잖아요.
여러분 인생의 사소한 괴로움들은 누구나 다 있는 거죠. 그걸 광야로 하기는 어려워요. 진짜 광야 정말 자살을 결심할 정도의 큰 고통이 있었던 그런 광야를 가 없는 성도가 있고요. 두 번째 어떤 성덕이 있냐 하면 광야는 통과했는데 잊어버린 거죠. 지금의 내 편안한 삶 때문에 내가 지나가는 광야의 삶을 잊어버렸어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은 그냥 좋은 성도는 될 수 있어요.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또 교회를 봉사할 수 있어요. 그러나 지도자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역의 무게만큼 큰 광야를 경험하게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목회자가 큰 교회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도 조심해야 돼요. 왜냐하면 큰 교회 목회자들은 큰 교회에 맞는 고난이 있어요.
물론 없는 사람도 있긴 있지만 그래도 많은 퍼센티지는 그 교회 규모에 맞는 고난을 겪은 경우가 아주 많아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냥 좋은 성도입니까? 아니면 광야를 겪고 광야를 기억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좋은 성도와 하나님의 쓰시는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거죠.
교회가 좋아지려면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돼요. 근데 이 사람이 어디서 준비되어지느냐 광야에서 준비됩니다.
히브리인들은 광야를 어떤 땅으로 해석했냐 하면 메시아가 나오는 땅으로 해석했어요. 그래서 실제로 많은 이 쿠테타를 일으킨 사람들이 히브리 광야에서 반군들을 모아가지고 이스라엘의 공격하는 일들, 또 로마를 공격하는 일들을 했어요. 그래서 이들 정서 속에는 광야는 지도자를 만드는 곳이라는 이게 생각이 딱 비어 있는 거죠.
여러분 교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광야를 겪고 있다면 그 광야 속에 하나님이 뜻하신 계획이 숨어 있을 거예요. 여러분 저는 바라건대 여러분이 그냥 좋은 성도가 아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고 또 성장해서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