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17-19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나(들음의 결과)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 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그동안 이 말씀을 생각할 때 땅이 저주를 받아서 잡초가 생겨나고 또 여러 가지 독충들이 생겨나서 우리의 소산들을 망치는 그런 입장에서 이해를 해 오고 그것은 저주로 말미암아서 당연한 결과라고 운명적으로 받아드리면서 살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새롭게 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어떤 의미인가 성경적으로 한 번 살펴보고, 또 가시와 엉겅퀴가 우리에게서 떠나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운명적으로 그런 삶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새롭게 살펴보면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먼저 17절의 말씀을 보면.....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 본문을 잘 살펴보면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그를 만드신 분에 말씀을 거역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아담에게 내리신 이 저주가 결국은 온 인류에게 미치는 인생의 마지막의 결론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사람, 땅에 속한 사람들은 다 이 아담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아담 안에서 태어는 났지만 그 저주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기 때문에, 오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말씀이 되어 지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먼저 아담이 그렇게 된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아담을 만드신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 문제를 굉장히 소홀히 하기가 쉬운데 대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을 무시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존재인 우리는 중간에 하나님의 종이라는 분이 있어 가지고 그 매개체를 통해서 나에게 말씀 하신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은 언제든지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교류가 이어지지를 않고 있고, 대신 하나님의 종과 관계성을 유지하려고 하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 생각에 의한 종과의 관계, 이것이 빨리 끊어져야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이어지던지 할터인데, 중간에 이 인간이라는 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이 인간이라는 하나님의 종과 인연을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곧 성경 말씀으로 내게도 하나님은 지금 직접 말씀하신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여기에 여자가 등장하는데, 돕는 베필에 대하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그가 내게 주므로’ 이 말은, 나는 돕는 베필을 통해서 공급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 부분을 영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이것이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이고 바벨론 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와 이것과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성을 유지할 수 없고, 범 죄하게 되는 제일 첫 번째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이 시간에도 나는 교회나 혹은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계속 가르침을 받고 있고,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여러분들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빨리 단절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실존을 말씀하고 있고, 그 하나님의 실존을 나에게 소개하는 것으로서 그 사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것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계속 유지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 종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실존을 알게 되면 되는 것이며, 그다음은 그를 떠나 곧바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 성경의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실존을 알게 된 다음에는 무조건 이 하나님의 종과의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종으로부터 소개를 받은 그다음부터는 만나든 못 만나든 하나님을 향한 몸부림이 계속 되어져야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지금 본문 17절에서도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의식할 때 항상 잊지 말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의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저주의 말씀도 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창2:16-17절에서, “네가 이것은 먹되 이것은 먹지 말라” 그러십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먼저 무엇을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시하신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저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내 말을 들으라 하는 그 생명 나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겁니까? 나는 길이라고 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분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신 말씀을 듣고 따르지 않고 끊임없이 종과의 관계로 생활하는 것이라면 이는 하나님의 말을 어겼기 때문에 저주가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만 들어야 한다는 말씀임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종 누구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복은 그분의 말을 들음, 곧 생명 나무 열매입니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고 아버지께로 가는 본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가지 않는 모든 길은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에 가서 기도를 일평생 하던지 교회에서 청소만 일평생 하든지 그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자연히 나오는 말이.....“네 아내의 말을 듣고”입니다.
아담, 그는 아내의 말을 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여자가 아담에게 여보! 당신도 먹어보세요. 하고 줄 때에는 이미 그 여자는 무엇을 먹은 사람입니까? 선악과를 먹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아내가 먹으라고 하면서 준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 아내가 먹고 난 이후의 아내를 잘 살펴서 구분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먹어보라 했어? 먹으니 어때? 라든지 눈이 몸은? 하면 살펴야 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째서 저 사람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는가 하는 것을 추적해 보고 생각했어야 했다는 겁니다.
이는 우리가 매일 듣는 주일날 목사의 설교가 칠성당에서 빌며 복 받으라는 기복신앙에서 나오는 말이 아닌가를 추적을 해 봐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아내가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바로 선악과를 따 먹은 그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서 먹었다는 사실이 결국은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세상 물질을 왜 축복하지 아니하시는가 하는 것 가지고 탄식하거나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지나친 과욕입니다.
내가 어땠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를 먼저 자인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만 기다려지는 것이지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고 왜 축복해 주시지 않는가 하는 불평불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우리의 죄부터 자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은.... 죄 없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부터 자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다음에 예수 십자가의 필요성도 느끼는 것이고, 그다음에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목사에게가 아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슬프게도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큰 병입니다. 이 사실이 자인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요사이 많은 강단의 목사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창 3장에 미혹하는 사단이 한 말 그대로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아닙니다. 죽는다고 말 해줘야 합니다. 죽을 짓을 했으면 죽는다고 말해 줘야 합니다. 그게 참 종입니다.
교회를 오든지 말든지, 뺨을 때리고 침을 밷는다고 하더라도 죽을 짓을 하면 죽는다고 말 해줘야 합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말한 그 나무의 실과를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먹었은즉”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담이 하나님의 말보다 여자의 말을 더 믿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내의 말을 듣고 그 실과 하나 따 먹었다고 해서 그렇게 하나님이 저주를 하시고 온 억조창생 인류로 하여금 이렇게 고통 가운데 살게 하시는가 하나님 너무하시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먹으라 한 나무의 실과가 무엇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사람의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점을 놓쳐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생명이십니다. 예수 믿으면 죽은 다음에 천국 가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바로 나의 생명이 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하신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며, 이것을 믿는 것이 구원이 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코로 숨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성경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 삶이 지금 현재 있지 않으면 나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마땅히 그 생명이 내 안에 없으면 나는 지금 현재 저주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엉겅퀴와 가시가 나를 계속 찌르고 계속해서 날마다 고통을 줘야 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수가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렇게 태평하고 평안하단 말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영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표정이 없습니다. 감각이 없습니다. 일단 예수의 생명으로 산 사람 평강이 넘치는 얼굴이던지, 고통과 근심에 찌들린 얼굴이던지 표정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괴로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취향에 맞게 취하면 안 됩니다.
이건 어려워서 못 듣겠고, 저것은 지루해서 못 듣겠고, 그러면 안 됩니다. 어떤 말씀이던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게 그것이 어려운 것은 내가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요, 그것이 내게 지루한 것은 내가 아직 죄 가운데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말씀 자체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성령 훼방입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하나님이 말씀을 깔아 뭉겐 죄가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겁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에게 분별함의 깨달음이 있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