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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엘 시드 ]
복합상영관이 일반화되어 버린 오늘날에는 구시대의 유물처럼 되어 버렸지만 TV의 등장 이후 영화가 TV와 경쟁하는 한 방식은 70mm 와이드 스크린을 활용한 스펙타클이었습니다.
이런 70mm 와이드 스크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는 역시 대형 사극이었습니다. <벤허>의 전차경기 장면,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장쾌한 사막 씬, <엘 시드>의 발렌시아 전투 장면은 이런 영화의 전투 장면 중 단연 백미에 들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실제 스페인 현지에서 촬영된 발렌시아 전투 장면에서는 수천 개의 화살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가는 장대한 스펙터클이 미클로스 로자의 웅장한 음악과 어우러져 기억될만한 명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영화 <엘 시드>는 무려 3시간의 러닝 타임을 가진 대작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역을 맡은 찰톤 헤스톤은 진지해 보이는 고전적인 외모 탓인지 <벤허>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여러 서사 장르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습니다.
찰톤 헤스톤이 스페인의 영웅 엘시드(본명,'로드리고 디아즈 데 비바르)로, 소피아 로렌은 그의 전설의 사랑 히메나로 분해 불꽃 튀는 연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찰톤 헤스톤은 이 영화를 <벤허>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연출했더라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으리라 말하지만 몇 가지 스토리적인 문제를 제외한다면 <엘 시드>의 감독 안소니 만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게 볼 만한 감독은 아니었습니다.
안소니 만 역시 1965년 <로마제국의 멸망>은 <엘시드>만한 호평이나 흥행 성적은 올리지 못했지만 서사극 장르에 강한 감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스토리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엘시드'라는 한 인물의 서사와 레콩키스타(스페인의 국토수복운동)의 주요한 국면들을 모두 잡아내겠다는 욕심을 부렸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사실 엘시드는 레콩키스타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슬람군과 싸우기도 했지만 카톨릭군과도 싸운 인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후에 보이는 종교적인 열정은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엘시드는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싸웠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엘시드의 일생>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합니다.
[ 간략한 줄거리 ]
기독교도인 스페인인들과 이슬람의 무어족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살았던 것은 거의 몇 백년에 이르는 일이었고, 이들은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알고 배웠습니다. 영화 속에서 로드리고는 전투 끝에 잡힌 무어족 포로들을 같은 스페인인이라며 석방시켜 주고 그 덕분에 추종자들에게는 '엘 시드'라는 칭호를, 그의 반대자들에게는 '반역자'로 의심받게 됩니다.
과거 페르디난드 국왕의 경호대장이었던 로드리고의 부친은 국왕 앞에서 현재의 경호대장인 고마즈에게 모욕을 당하고, 로드리고는 연로한 부친을 대신해 자신이 사랑하는 약혼녀 시멘의 아버지인 고마즈와 결투를 벌여 그만 고마즈를 죽이고 맙니다.
부친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사랑을 부인하고 싶지만 부인할 수도 없었던 시멘. 로드리고는 이교도에게는 관용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같은 기독교도들에게 용서받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실제 역사 속의 무어족들과 기독교도들 사이에서의 갈등은 크게 보자면 늘 상존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오다 보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마련이었습니다. 무려 8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전쟁은 때로 포용하기도 하고, 때로 싸우기도 하며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이루어졌던 겁니다.
페르디난드 국왕의 경호대장이 된 로드리고는 이후 왕의 장남 산초와는 친하게 지내지만 차남인 알폰소는 이런 로드리고를 못 마땅해 합니다. 극중에서 로드리고는 매우 우직하고, 신심이 도드라진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 역사 속의 엘 시드는 물론 훌륭한 인물이긴 했지만 정치적으로 아둔하지는 않았던 듯 합니다.
그는 기회를 잡으면 어느 순간에 밀고 당기기를 해야 할지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페르디난드 국왕의 사후 형제간의 왕권 다툼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로드리고는 차남인 알폰소가 왕위 다툼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형을 암살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그 과정에서 로드리고는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음을 공포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로드리고의 야심이 결코 작지 않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로드리고는 알폰소 국왕의 즉위식에서 홀로 충성 맹세를 유보하고, 그에게 성서에 대고 자신은 형의 암살 음모와 아무런 관련도 없음을 서약하라고 강요한 뒤에야 비로소 충성을 맹세하지만 추방당하고 맙니다.
무어 족이 다시 스페인을 침략하려 들자 국왕 알폰소는 원치 않았지만 추방했던 로드리고를 다시 불러들여 이들에 대한 방비를 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로드리고는 자신을 따르는 무어족 족장들의 군대와 동맹을 이루어 이를 상대하겠다는 방책을 제시합니다.
기독교도 왕국의 국왕 알폰소는 이에 대노하여 다시 로드리고를 물리치고 단독으로 무어족과의 대결에 나섰다가 패하고 맙니다. 그는 시멘과 그의 쌍둥이 두 딸을 유폐시켜 로드리고에게 복수하고자 합니다.
이 무렵 로드리고는 무어인들의 전략적 근거지인 발렌시아를 공격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가족이 알폰소 국왕에게 핍박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을 구하기 위해 군대의 일부를 회군시키기 까지 합니다. 과거 시멘을 사이에 두고 로드리고와 반목하던 오르도네즈 백작은 스페인과 시멘을 위해 로드리고의 가족을 지하 감옥에서 빼내 로드리고의 군대와 합류합니다.
발렌시아 포위 전투에서 성내의 무어족 백성들을 움직이며 내분을 촉발하는 식량 투척 작전의 성공으로 발렌시아 함락에 성공한 로드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로드리고에게 발렌시아의 왕관을 씌워주려고 하지만 로드리고는 발렌시아가 국왕 알폰소의 것임을 선포합니다.
이번에는 무어족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이번에는 역으로 발렌시아에 입성한 로드리고의 군대가 포위되고 맙니다. 발렌시아 입성 소식을 알리러 알폰소 국왕에게 달려간 로드리고의 사자는 푸대접을 받고 응원군은 한 명도 보낼 수 없다는 최후의 통첩을 받게 됩니다.
로드리고가 이끄는 군대는 무어인과의 마지막 일전을 겨루기 위해 성문을 열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며 싸워 나갑니다. 그때 영웅의 가슴에 꽂히는 한 발의 화살. 전투는 로드리고의 부상으로 말미암아 중도에서 끝나게 되고 성 밖에 진을 치고 있는 무어족의 군대는 로드리고의 죽음을 소리 높여 떠들며 자신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의사는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화살을 뽑아내고 치료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로드리고는 자신의 최후를 적에게 알리지 말라며 치료를 거부하고 내일의 작전을 자신이 직접 지휘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이때 알폰소 국왕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옵니다. 알폰소 국왕은 로드리고의 사자가 돌아간 뒤에야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의 충정을 알게 되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도착한 것입니다.
로드리고는 국왕에게 "자신의 잘못을 되돌이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이를 실천에 옮기다니 국왕이 참으로 훌륭하다"며 나이어린 국왕을 격려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거든 자신을 말에 태워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하여 적을 격퇴하라고 말합니다.
로드리고는 죽고, 사람들은 그의 몸에 철제 부목을 대어 말에 태우고 해안의 무어족들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러 나갑니다. 로드리고는 죽었으리라 생각하며 크게 사기가 올라 있던 무어인들에게 성문이 열리면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틀림없이 죽었으리라 생각한 바로 로드리고였습니다.
온몸을 흰색 기사복으로 성장을 한 로드리고의 출현은 일순간에 무어인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그 기세를 몰아 스페인의 기독교 군대는 발렌시아를 침공해온 무어족 군대를 격퇴하게 됩니다. 무어족이 격멸된 해안가를 이미 죽은 로드리고의 시체와 말이 달려가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 영화와는 많이 다른 엘시드의 일생 ]
엘시드(El Cid)는 11세기에 활동한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를 말합니다. 스페인에서 그는 이슬람의 통치 기간 동안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회자됩니다. 그는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보다 엘시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엘시드의 ‘엘’은 스페인어의 관사이고 ‘시드’는 아랍어로 주군(Lord)이라는 뜻입니다.
엘시드는 페르난도 1세 사후 산초 2세가 형제들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이슬람 군대와 싸워 공을 세운 것은 그 이후의 일입니다. 엘시드는 1048년 부르고스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페르난도 1세의 총애를 받던 기사였기 때문에 엘시드는 어린 시절 왕궁에서 왕자 산초 2세와 가깝게 지낼 기회가 많았습니다. 산초 2세는 엘시드를 그의 모든 기사 중에서 가장 총애했습니다. 1036년 처음으로 엘시드는 산초와 함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 전투는 페르난도 1세가 살아 있을 때 카톨릭 왕국들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었습니다. 아라곤 왕인 라미로 1세는 카스티야 왕국에 파리아를 내고 있는 사라고사 타이파(이슬람 소국을 말함)를 공격했습니다. 파리아는 보호비의 명목으로 카톨릭 왕국에 내는 세금이었으므로 카스티야 왕국은 공격을 받고 있는 사라고사 타이파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페르난도 1세는 사라고사 타이파를 돕고자 산초와 엘시드를 보냈습니다. 둘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엘시드는 어린 나이에 군인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증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투는 이교도를 돕기 위해 카톨릭 국가가 같은 카톨릭 국가를 친 것이므로 정의로운 싸움이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습니다.
* 부르고스에 있는 엘시드 동상
오히려 공공의 적이던 이슬람 소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같은 종교, 같은 핏줄을 가진 나라의 군대를 격파한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했습니다(이런 일은 이후에도 번번히 일어납니다).
페르난도 1세는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어느 정도 골고루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산초 2세는 다른 형제들의 유산을 뺏으려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엘시드는 바로 이 산초 2세의 옆에서 전투에 참여해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1072년 산초 2세가 암살당하고(바로 밑의 동생 알폰소에게 당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난 뒤 그는 곤란한 상황에 빠져버렸습니다.
* 세비야
형 산초 2세를 피해 톨레도에 숨어 있었던 레온의 왕이었던 알폰소가 카스티야를 접수하고 알폰소 6세로 등극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엘시드는 알폰소가 나라를 잃고 감옥에 포로 신세로 수감되고 톨레도로 도망가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전설에는 엘시드가 카스티야의 왕이 된 알폰소 6세에게 그가 산초 2세를 죽이지 않았다고 선언해야만 그를 섬기겠다고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알폰소는 엘시드가 껄끄럽게 싫었지만 카스티야를 원만하게 다스리기 위하여는 엘시드가 필요했습니다. 엘시드는 카스티야의 귀족들과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반란의 위험이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알폰소 6세는 영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이 산초 2세가 죽는데 가담하지 않았다고 맹세하고 엘시드를 곁에 두었습니다.
1074년 엘시드는 레온의 알폰소 가문과 관련한 귀족 출신의 고귀한 신분의 히메나와 결혼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엘시드는 알폰소와 관계를 회복해 가고 있었으나 산초가 살아있을 때처럼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알폰소세는 레온 왕가의 핏줄이 흐르는 귀족인 오르도네스를 중용합니다.
1079년 알폰소 국왕은 엘시드를 세비야로 파리아를 받으라고 보냅니다. 알폰소 역시 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이슬람 소국들을 점령하는 대신 보호비를 받고 이슬람 소왕국들끼리의 싸움이나 외부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군사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알폰소는 파리아를 징수하러 오르도네스를 세비야 바로 옆의 그라나다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비야와 그라나다가 영토 분쟁으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엘시드와 오르도네스는 양 편으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난처한 입장에 빠집니다. 이래서 엘시드와 오르도네스는 군대를 이끌고 서로 싸우는 처지가 버렸습니다.
두 군대는 알폰소 휘하의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각기 다른 이슬람 소왕국을 돕기 위해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엘시드는 승리를 거두고 오르도네스를 3일 동안 감옥에 쳐 넣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르도네스가 알폰소의 오른팔이었다는 것이죠. 그런 그를 3일에 불과하지만 감옥에 쳐 박아 둔 것은 또 한번 알폰소에게 눈 밖에 나는 처사였습니다.
알폰소와 엘시드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갈라선 계기는 1080년에 일어납니다. 엘시드가 허락없이 알폰소 휘하의 톨레도 타이파의 소리아를 약탈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런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알폰소는 그렇지 않아도 엘시드가 못마땅했었는데 이를 기화로 그를 또 다시 쫓아 버립니다.
엘시드는 모든 부와 명예를 버리고 그를 따르는 부하들과 머나먼 길을 떠납니다. 이로써 엘시드는 알폰소의 눈치를 보고 있는 카톨릭 왕국 전체가 등을 돌리게 됩니다.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그는 사라고사 타이파를 찾아갑니다. 당시에는 카톨릭 왕국의 귀족이라 하더라도 필요하면 이슬람 소왕국에 몸을 의탁하기도 했습니다. 사라고사 타이파는 엘시드를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엘시드는 여러 차례 공을 세우며 사라고사 타이파 내에서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게 됩니다.
* 알폰소 국왕과 대치하고 있는 로드리고
카스티야의 알폰소는 그동안 이슬람 소왕국들로부터 세금을 받고 그들을 묵인해 왔습니다. 1084년 그는 이와같은 이슬람 소왕국에 대한 정책을 바꿔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카톨릭 왕국으로 통일시키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먼저 톨레도 타이파를 점령합니다. 톨레도 파이파는 그가 산초로부터 피신했을 때 도와주었던 타이파이기도 했습니다.
세비야의 알무타미드 왕은 알폰소가 톨레도를 점령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모로코의 무어족 이슬람 왕인 유스프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유스프는 군대를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왔습니다. 그는 알폰소의 군대와 사그라하스에서 맞붙어 격파시키고 모로코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아들이 위독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스프에 패한 알폰소는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을 염려했습니다. 알폰소는 사라고사에 있는 엘시드를 기억해내고 그를 다시 불렀습니다. 엘시드는 그의 명을 받고 그의 군대를 다시 지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충실히 군사작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알폰소는 다시 또 이슬람 소왕국들을 압박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세비야는 다시 또 모로코의 무어족이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오게 됩니다. 알폰소는 이를 막기 위하여 출동하면서 다른 지역에 있던 엘시드에게 합류하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러나 엘시드가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도착을 못했습니다. 알폰소는 간신히 알모리데 군을 격퇴를 시켰지만 늦게 도착한 엘시드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알폰소는 엘시드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또 추방하게 됩니다. 알폰소가 엘시드를 이렇게 사사건건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바로 옆에서 엘시드에 억하심정이 있는오르도네스가 충동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엘시드는 추반단한 뒤 이제 다시는 알폰소를 모시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에게는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사병들을 이끌고 스페인 동북부 해안 발렌시아 근처로 가서 이슬람 소왕국들로부터 보호비를 받으며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넓혀 갔습니다.
발렌시아 지역은 비옥한 땅이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도 갖고 싶어하는 매력적인 곳이기도 했습니다. 1092년 알폰소는 이 지역에 침범하여 왔으나 엘시드에게 격퇴되고 맙니다. 이제 엘시드는 거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 발렌시아에서 내부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가볍게 접수하면서 완전히 그의 나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발렌시아가 엘시드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무어족이 다시 또 바다를 건너와 한판 벌이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엘시드가 승리하자 카톨릭교도들은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무어족 군을 카톨릭 군이 이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시드의 전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 부터였습니다.
엘시드는 발렌시아를 다스리다가 1099년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가 죽은 뒤 발렌시아는 부인인 히메나가 다스리게 됩니다. 엘시드가 죽자 무어족은 끊임없이 발렌시아를 공격했습니다. 히메나는 먼 친척 관계인 알폰소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알폰소는 스페인 전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느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는 히메나에게 발렌시아를 무어족에게 넘겨주라는 충고를 하고 히메나는 이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래서 잠시 무어족이 발렌시아를 점령했었으나 20년 후 카스티야군이 이를 탈환하고 영원히 카톨릭의 수중에 들어오게 됩니다.
엘시드는 알폰소 6세에게 여러 번 버림을 받았으나 그게 그의 인생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군이 카톨릭이든 이슬람이든 가리지 않고 그를 섬기는 동안 충성을 다했습니다. 엘시드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고, 딱 그가 보상받을 수 있을 만큼 봉사햇습니다. 결국은 그는 그의 왕국을 만들엇습니다.
* 부르고스에 있는 엘시드 무덤
[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Reconquista) ]
스페인어로 레콩키스타(Reconquista)란 ‘재정복’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카톨릭 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교도들을 축출하는 운동 또는 전쟁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 전쟁은 정복이 아닌 재정복의 전쟁으로서 1492년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왕국인 그라나다 왕국이 함락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카톨릭 교도들은 이슬람 교도들로부터 빼앗긴 국토를 되찾기 위해서 장장 800년 동안이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이 800년에 걸친 국토회복 운동 기간은 카톨릭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뚜렷한 국경도 없이 서로 마주하면서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화해도 하면서 서로의 피와 정열과 지혜를 교환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스페인은 유럽의 모든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스페인의 모든 힘이 이처럼 이슬람 교도들이 점령한 국토를 되찾는 전쟁에 집중되었기 때문입니다.
* 레콩키스타 전개 과정(북쪽의 아스트리아스에서 레온,카스티야,아라곤 등으로 분리되고, 이후
점차 합쳐지면서 국토수복운동을 전개하여 나갑니다. 마지막 사진 12번은 현재 스페인 각 주
이 국토회복 운동은 카톨릭 교도들이 이슬람 교도들에 대항해서 싸운 전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난 뒤에 얻을 수 있는 반도 내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 카톨릭 세력끼리 서로 투쟁했던 카톨릭 왕국들 사이의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 레콩키스타의 시작 - 코바동가 전투(718년)
* 스페인 북부 코바동가 가는 길
원래 스페인은 이슬람이 전 지역을 지배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샤를르마뉴 대제의 프랑크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이슬람군을 격파한 뒤 이슬람은 이베리아 반도 남부로 물러가서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이슬람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 이슬람 최전성기, 카톨릭교도들은 이베리아 반도 맨위에 쬐끄맣게 옹색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는 이슬람에게 밀려난 스페인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고향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었지만 피레네를 넘어간다고 해도 그 북쪽은 프랑스의 아키텐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제 집에서도 쫓겨난 철새에게 순순히 자리를 내줄 텃새는 없을 겁니다.
* 레콩키스타의 전개방향,1157년
그래서 그들은 반도 북부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고 했고 그런 배수진의 자세가 효과를 보아 이슬람은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바로 옛 서코트족의 후예였습니다. 한때 용맹을 떨쳤던 게르만의 강성한 민족이었으니 이슬람이 어쩌지 못한 것도 당연했습니다. 그들은 반도 북쪽 끝의 산악 지대로 도피해서 아스트리아스라는 조그만 왕국을 세우고, 남부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살아가는 무기력한 동포들을 비난하며 재기를 꿈꾸었습니다.
* 아래 지도에서 이슬람 수도였던 톨레도,세비야,코르도바,그라나다가 보입니다
엘시드의 고향인 부르고스는 마드리드 북쪽 바이틀리드 근방에 있습니다
서유럽이 중세의 안정기 속에서 서서히 발전을 이루는 동안 이슬람은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여기저기에서 빈틈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서코트 후예들은 하나둘씩 나라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아스투리아스는 레온으로 확대 재편되었고, 레온에서는 새로이 카스티야가 분리되어 나왔습니다. 이미 그 동쪽에는 일찍이 샤를마뉴가 설치한 에스파냐 변경주가 10세기부터 나바라 왕국으로 독립해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독립의 계절이 도래하였습니다, 카스티야가 생겨날 무렵, 나바라(나바르)에서 갈라져 나온 바스크인들은 그 동쪽에 아라곤 왕국을 세웠습니다. 또 그 동쪽의 바르셀로나 일대에는 이미 백작령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곳도 독립의 계절풍을 타고 자연스럽게 미니 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로써 11세기 무렵 이베리아 반도 북부와 피레네 산맥 남쪽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다섯 개의 왕국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올망졸망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 라스 나바스 데 톨레스 전투 그림
사실 이들이 행동을 개시한 것은 십자군이 조직되기 이전이었습니다. 때마침 코르도바의 식민지 정부에서 내란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이들은 이교도에게 잃은 영토를 되찾고 이교도에게 당한 굴욕을 되갚기 위해 일제히 일어섰습니다.
비록 나라는 다섯이지만 같은 그리스도교권의 형제들이었으므로 공동전선을 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길고 먼 에스파냐의 국토 수복 운동이 벌어졌는데, 이른바 레콩키스타가 시작됩니다.
이슬람 교도들이 처음 스페인 땅에 들어왔을 때에는 분열된 카톨릭 왕국들로부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큰 어려움 없이 스페인 북쪽으로 올라가던 그들이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스트리아스 지방의 산중에 남아있던 카톨릭 교도들 때문이었습니다.
*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 레콩키스타의 효시, 코바동카 전투
남쪽에서 반도 북부 대서양 연안의 아스투리아스 산악지대로 가려면 험준한 칸타브리아 산맥을 넘어야 합니다. 718년, 서코트 왕국의 귀족들이 이곳에서 펠라요를 중심으로 최초의 카톨릭 왕국인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웠습니다. 이곳의 카톨릭 세력이 722년에 칸타브리아 산악지대의 코바동가라는 작은 마을에서 북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던 이슬람 교도들을 처음으로 격퇴했습니다.
* 코르도바
이를 시작으로 카톨릭 교도들은 이슬람 교도 축출을 위한 국토회복 운동인 ‘레콩키스타’를 시작했습니다. 북부의 산악지대에서 시작된 국토회복 운동이 인근의 레온까지 퍼져 나가면서 많은 지역이 카톨릭 교도들의 세력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회복된 땅은 왕족 형태의 독립적인 카톨릭 국가들로 각각 발전해 나갔습니다.
이때 형성된 여러 카톨릭 왕국들은 지금까지도 각각의 지역에서 그들 나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두고 내려온 이베리아 반도내의 언어적, 문화적 다양성은 스페인 문화와 국민성의 특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톨레도
* 국토회복 운동의 완료(1492년)
카톨릭 교도들은 718년 위에서 언급한 코바동가에서 처음으로 이슬람군에 승리하며 국토회복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그 후 10세기에서 14세기까지 이베리아 반도의 카톨릭 교도와 프랑스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용병들 그리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순례를 지원했던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힘을 합쳐 이슬람 치하의 거의 모든 스페인을 재정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재정복의 결정적인 사건은 1085년,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엘시드의 주군) 때의 톨레도 정복이었습니다. 톨레도는 그곳에 거주하던 모사라베(이슬람 교도 치하에 남아있던 카톨릭 교도)들의 협조로 쉽게 점령되었습니다. 카스티야 왕국의 톨레도 정복으로 에브로 강 유역으로 통하는 이슬람 교도들의 보급선이 차단되었습니다. 이로써 이슬람 교도들의 영토는 상당히 줄어들었습니다.
발렌시아 지방은 1094년 엘 시드(로드리고)에 의해서 재정복되었지만, 12세기 중엽까지 북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무어 족이 침입하여 카톨릭 교도들에 대한 재정복은 일시적인 소강상태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1212년에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의 왕들이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에서 코르도바의 이슬람 교도들에 대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카톨릭 세력은 반도 남쪽의 안달루시아 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
* 카스티야 이사벨 여왕
이에 그라나다 나사리 왕국의 이슬람 교도들은 아프리카 북부의 새로운 세력인 베닌메리 족들에게 원군을 청했다. 이들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왔지만, 알폰소 11세의 군대가 1240년에 이들을 물리쳐 아프리카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1252년, 성왕 페르난도 3세가 죽을 무렵에는 이슬람 세력은 그라나다 지방에 국한되었고, 카톨릭 세력은 거의 전 국토를 회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1490년에 카톨릭 왕들의 군대는 그라나다 성 밑에 진을 쳤고, 몇 달 동안 그라나다를 공격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카톨릭 교도들이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이슬람 교도의 진영에는 절망감이 확산되어 명예로운 항복이 군사적 패배보다 더 낫다는 분위기가 우세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1491년10월, 두 세력 사이에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 그라나다 함락 직전
합의는 11월 말에 이루어져,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는 카톨릭 세력의 수중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슬람 교도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압딜 왕이 부부왕인기도 한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에게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의 열쇠를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카톨릭의 상징인 십자가와 깃발이 가장 높은 탑 위에 세워짐으로써 장장 800년에 걸친 카톨릭 교도들의 국토회복 운동은 막을 내렸습니다.
* 보압딜 왕이 페르난디 3세와 이사벨 여왕에게 알람브라 궁전의 열쇠를 건네주는 장면
이렇게 해서 그라나다의 함락으로 레콩키스타가 종료됩니다
* 레콩키스타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쫓아낸 이후에도 스페인은 카스티야, 아라곤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두 왕국이 합쳐져서 스페인이 통일된 것은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외손자인 카를로스 1세 때였습니다. 카를로스 1세는 친가가 합스부르크 계통이었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페르난도 3세가 레콩키스타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페르난도 2세가 레콩키스타를 완성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 둘은 각각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레콩키스타가 종료되는 1492년은 이사벨 여왕이 후원하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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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스페인과 엘시드의 역사적 진수를 느끼고 맛보았읍니다
환상과 꿈은 깨어지라고 만든것같읍니다
고박사덕분에 냉철한 스페인 이베리아반도의 두 종교의 대립과 흡수 화합
로드리고의 정체성 역사적 혼잡한 뒤썩임 마침내 통합의 휘나레. 마침표가 끝나는 순간까지
다 읽고 스페인 고대사를 맛보앗읍니다
두루 감사합니다 명기된 지방 반드시 가볼수 잇도록 신께 기도하걧읍니다
실제 엘시드와 영화 엘시드가 많이 다르지요? 당시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오손도손 잘
살았는데...엘시드 사후 유럽에서 교황이 불러 일으킨 십자군 운동이 시작하면서 이
베리아 반도에서도 종교적 광풍이...정작 광풍은 레콩키스타 이후, 필리페 2세 때부
터인데...종교재판이 기승을 부리면서 많은 사람이 불더미 속으로...스페인이 유럽에
서 후진국으로 전락한 것은 이런 종교적 광신이 한몫했다고 알려져 있지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쫓아낸 공로로 로마 교황청에서 스페인의 이런 무지막지한 광풍을
눈감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알암하부라 궁전이 남아 잇는게 신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