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
(막 7 : 31~37)
귀 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이 사람에게 안수해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 올 때, 많은 성도들은 언제나 선입견을 가지고 나옵니다.
본문 마가복음 7장 32절을 보면,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을 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방법과 내 방법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타이밍이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접근 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예수님의 시간, 예수님의 방법과, 내 시간, 내 방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 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좋은 시간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나를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맡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대부분 이것을 못합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초조해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9절의 말씀을 보면,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면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나는 내 생각에 하나님을 가두어둡니다.
언제나 내 생각에 맞게 움직이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하나님이라면, 내 생각에 제한이 있을 때에, 그 하나님은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 생각대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생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그 하나님은 내 인생을 맡길 만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지성을 의지해야 합니다.
내 감정을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내 부족한 부분까지 하나님께 의지해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조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보다 나를 더 생각하고, 내 방법을 고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내 방법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말합니다.
내 시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면서 내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바라보면서 내 자아가 깨집니다.
성도들은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부르심에 민감한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 인생의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주도 여행 하나를 계획하더라도 시행착오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함께 가는 사람과도 마음이 맞아야 하고, 돈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방 잡는 것도 그렇고, 누가 운전할 것인지, 추가로 지불되는 경비도 어떻게 부담할 것인지를 계획할 지라도 막상 시행하게 되면, 처음 계획과 전혀 다르게 움직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맛 집을 찾아 그곳에 가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사용할 돈도 찾아놓고, 가면서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를 다 점검하였는데, 막상 현장에 갔더니 휴무라면, 어떨까요?
정말 허무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속에 내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르심은 강조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목적을 둡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모습입니다.
예배할 때에 부르심에 초점을 두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에 집중하면, 됩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으러 온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 제한적 접근만 허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치유 방법을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방법대로 행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뜻대로 일하십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내 뜻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다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부르심입니다. 나를 주 뜻대로 인도해달라는 자기 고백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치유 방법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이 상대로 하여금 그것을 인정하게 만들었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능력이 일어 난 것입니다.
예수님께 치유 받으러 나온 사람은 두 곳이 불안정합니다.
두 곳이 감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하면, 이해가 될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고치면서 ‘에바다’라고 딱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더 이상 말씀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도 못하고, 표현이 불가능함으로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몸으로 말씀합니다.
본문 마가복음 7장 33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장애인입니다.
인권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시대에 홀로 받은 상처가 무척이나 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치유 받을 경우 치유 받는 사람이 위축 될 경우가 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만 집중하고, 자신의 문제만을 볼 수 있도록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함께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혼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지금까지 받았던 멸시가 아닌 창조주의 관심을 그에게 쏟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따로 만나시고, 나만 바라보시고 있다는 것은 정말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신 것이 손가락을 양 귀에 대시고 ‘에바다’라고 하시는 말씀은, 내가 네 귀를 고쳐 줄 것이라는 확신을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큰 도움을 주시려고 하시는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만지심을 통해서 듣지 못하는 사람을 붙잡으심으로, 그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셨습니다.
그가 말하지 못한 것을 풀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렇게 치유하는 방법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주 특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한 확신으로 이런 행동을 하심으로 받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님이 고쳐주시는 모든 사람의 반응은 언제나 믿음으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이 사람도 믿음으로 반응하게 된 것입니다.
모두 이해 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외국에서 외국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아도 몸의 표현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본문 마가복음 7장 34절에 보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병자도 하나님께 간구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눈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 수 있는 것은, 능력의 심히 큰 것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은 각자가 다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장 좋은 방법으로 다가오시고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때로는 제한적인 내 생각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로 막을 때도 있지만, 주님은 언제나 주님의 방법으로 치유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내 삶에 막힌 부분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여시면 닫을 자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내 신앙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전한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PS.
예배 장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는 말씀은 미래의 지정학정 사건들을 예언한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장소의 특별한 신성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단지 한 민족이 자기들끼리만 하나님을 섬기던 시대를 지나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보편적인 믿음의 시대가 열린다는 뜻이다.
이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받아들여지면 그 말씀이 거기에 거함으로 그곳이 신성해질 수 있다.
- 대린 패드릭&마크 디바인의 [나의 사랑하는 교회] 중에서 -
초대교회의 시작은 성령이 임재하심을 경험하면서부터입니다.
오직 성령이 우리안에 임하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있는 곳이면, 복음이 들려지는 곳이면, 그곳에서 누구든 예배합니다.
거룩함은 우리가 우리의 신을 벗어놓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시작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