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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는 고종황제의 외동딸이다.
그녀는 고종이 환갑에 들어서 얻은 늦둥이였다.
고종의 자식들은 9남 몇 녀로 꽤 많았다.
하지만, 순종,영친왕,의친왕,덕혜옹주 빼고는 전부 어린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고종은 덕혜옹주에겐 딸바보 였다.
매일 보고 싶어서, 덕혜옹주가 5살때, 덕수궁 내에 유치원까지 만들었다.
이 당시 일본은 조선왕실의 인원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덕혜옹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테라우치 총독은 덕혜옹주를 보고...
"저 귀엽고 천진무구한 옹주를 본 이상 나도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군! 오늘은 멋지게 한방먹었다." 라고 했다고 한다.
덕혜옹주가 점점 커오자 고종은 딸의 앞날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영친왕의 경우 11살때,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으로 데려가 일본인으로 키우고 일본인과 강제로 결혼 시켰다.
고종은 덕혜옹주도 그 전철을 밟을까 걱정했었다.
그래서 은밀히 시종인 김황진을 불러 옹주의 배필을 알아보라 명령한다.
김황진은 자신의 어린 조카인 김장한을 추천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이 이 일을 알게 되면서, 김황진은 쫏겨 나고 이 혼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종은 독살 당한다.
황제의 독살 소식이 퍼지자, 민심은 폭발 지경까지 갔고, 3.1운동으로 발전했다.
3.1운동 이후, 신문에는 종종 옹주의 사진이 실렸는데, 그녀는 조선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가 되어 갔다.
의친왕도 국내를 탈출해서 상하이로 갈려다 일제에 잡히고 만다.
이 탈출에 대해선 말들이 많다.
독립운동을 하러 갔다는 등...하지만, 정확하진 않다.
8살 때, 독살 당한 아버지.
이 일로 덕혜옹주는 심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피아노나 풍금을 좋아하던 옹주는 그 뒤로는 악기들을 처다 보지도 않았다.
고종이 죽고 나자, 결국 옹주는 일제의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동경 학습원 으로 유학을 가야만 했다.
일제는 조선 민중의 마스코트가 되어가는 옹주가 사람들의 기역 속에서 잊혀지길 바랬다.
옹주는 결국 일본으로 가게 됐고, 이후 영친왕의 집에 머물게 된다.
당시 그녀를 본 영친왕의 부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처음 내가 조선에 갔을 때 본 옹주와 는 너무 도 달랐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 나를 매료 시켰던 발랄하고 영롱했던 눈초리는 아예 찾을 수 없었다.
일본말로 인사를 하니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엔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옹주는 나를 보고 미소조차 띄지 않았다."
14살 소녀였던 옹주는 세상과의 문을 닫은 것처럼 보였다.
덕혜옹주는 여자학습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없고,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덕혜옹주의 동창생의 증언中
"덕혜옹주는 매일 보온병을 들고 다녔습니다.
왜 그렇게 보온병을 들고 다니냐? 고 물었더니 덕혜옹주는 독살 당하지 않으려고 보온병 물만 마신다고 했습니다."
덕혜는 아버지처럼, 자신도 언제 독살 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 사는 듯 했다.
동창생의 또 다른 증언
"나는 덕혜옹주에게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에 나섰을 텐데 당신은 왜 여기에 있나요? 라고 말했더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독살의 공포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능함 속에서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자학의 날만 보내고 있었다.
일본 생활 5년 째 되던 날, 어머니 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왕실의 전통을 따르면, 덕혜옹주는 3년 간 상복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총독부는 왕실법을 바꾸어 덕혜가 3년 상복을 입을 수 없게 하고,
서둘러 일본으로 돌려 보냈다.
어머니의 장례 후, 덕혜옹주는 점점 더 이상해 갔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며 항상 누워있고 식사도 하지 않았다.
불면증으로 밤에 거리를 거닐기도 했다...
영친왕의 부인이 걱정이 되서 의사를 불러 진찰해보니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다.
일본은 그런 그녀를 대마도주와 강제로 결혼 시켰다.
1931년 그녀는 대마도주 쇼 다케유키와 강제로 결혼 했다.
이에 조선일보는 결혼식 사진에서 남편의 사진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덕혜옹주 관련 기사를 쓰지 않았다.
강제로 한 결혼이긴 했지만, 나름 화목 했다고 한다.
둘 사이에는 마사에(정혜)라는 딸도 생겼다.
하지만, 덕혜옹주는 마사에를 낳은 뒤, 정신분열이 더 심해졌다.
거기다,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도쿄대를 졸업하고 영문학자가된 남편 다케유키는 덕혜옹주 때문에 바깥 세상과의 연을 끊었다.
결국, 그녀를 집안에 감금 시키다가, 정신병원에 입원 시켜버렸다.
1955년에는 병원에 있는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이혼 통보를 한다.
이혼 통보를 한 뒤, 다음해인 1956년.
그녀의 딸 마사에(정혜)는 24세의 나이에 '야마나시 고마가타케에서 자살한다.'는 쪽지 한 장을 남기고 가출한다.
마사에가 결혼하고 3개월 뒤에 생긴 일이다.
덕혜옹주는 이런 일들과는 무관하게 15년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조선에선 잊혀지고, 남편에겐 버림 받은 여인.
그런 덕혜옹주를 누군가 찾아 왔다.
옹주의 배필이 될 뻔했던 김장한의 친형인 김을한 이였다.
당시 기자였던 김을한은 해방 후, 그녀의 행적을 찾았고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 정부는 이를 거부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왕실 사람들을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
조선왕실이 다시 일어나진 않겠지만, 조선 왕실의 후손들이 보여준 행태는 볼쌍 사나운 것들 이였다.
이 들은 어릴 때부터,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 자연스럽게 친일파가 됐던 사람들 이였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망했지만, 이왕가 라 불리던 그들은 일본 정부가 주는 돈으로 편히 살았다.
거기다 일본의 패전 후, 일본 궁내청 (왕실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해주고 비서역활을 하는 관청)은 이왕가에게 더 이상 물질적인 지원을 못해 준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가길 권했다.
이왕가 사람들이 잘 행동하면, 다시 왕이나 대통령이 되서, 권력을 잡을 수도 있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이왕가 사람들은 일본에 남길 희망했다.
일본의 일반 국민이 되더라도, 일본에 사는 쪽을 택한 것이다.
궁내청 관계자들은 한 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1961년 김을한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다시 부탁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덕혜옹주에 대해 물었다.
"덕혜옹주가 누구요?"
"조선의 마지막 공주 입니다."
김을한은 말했다.
조선 왕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환국을 허락 했다.
두 달 후, 1962년 덕혜옹주는 3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죽을 때 까지 제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국내에서도 7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머물게 된다.
그 후,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덕혜옹주가 환국 하고 10년이 지났을 때, 일본인 노신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쇼 타케유키. 덕혜의 전 남편이었다.
그는 덕혜옹주를 보게 해달라고 청했다.
낙선재 관리인은 정중히 노 신사의 청을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일절 면회를 허용하지 않으니까 돌아가시오"
쇼 타케유키가 덕혜에게 과거에 했던 행동들 때문 이였다. (그녀를 집에 감금해서 병을 키운 것과 정신병원에 입원 시켜 놓고 이혼한 것 등.)
이후,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소 다케유키는 1985년 77세의 나이로 사망.
덕혜옹주는 1989년 77세의 나이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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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에서 가장 미화된 인물 중 하나가 덕혜와 명성황후 다.
명성 황후 경우는 조선의 역사상 가장 악독한 인물 중 한 명 이였다.
그녀는 확실히 조선이 망하는데 한 몫을 했다.
영화나 소설을 보고 감동 받은 이도 많겠지만, 그건 전부 실제가 아니라, 작가의 상상 속 인물이다.
옹주는 8살 때 부터, 평생 제 정신이 아니 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시를 잘 쓰고 독립운동을 하고는 작가의 상상일 뿐이다.
옹주도 불행 했겠지만, 타케유키도 옹주와 강제로 결혼해서 인생을 망친 경우라,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치매 환자를 돌봐 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거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