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조선시대 백성들의 커뮤니케이션』을 펼쳐서 내가 궁금한 딱 그부분을 위주로 본문을 읽어보았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2) 부부간의 상호경어의 사례
이처럼 부부간의 대화가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부부간에 대화할 때에는 대체로 상호 경어를 사용하였다. 《소현성록》의 주인공이 먼곳으로 부임하여 떠나면서 부인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당신이 황제의 명을 받들었으니 시어머니의 슬픔과 저의 마음을 헤아리겠습니까? 그러나 멀리 가시니 몸을 잘 돌보시고 일들도 잘 다스리시고 얼른 돌아오시길 원합니다.”
어사가 천천히 말하였다.
“호광 땅이 비록 멀지만 평안한 곳이고 내 또 몸이 건강해서 다른 염려가 없소. 다만 아침저녁 문안과 낮 세 때 문안을 못하니 어머니를 뵙지 못하는 것이 자식으로서 참기 어려운 바이오. 부인은 어머니 앞을 떠나지 말고 뵙는 것을 게을리 마시오.”
드디어 몸을 일으켜 나가려다 다시 말하였다.
“언제 돌아올지 말할 수 없으니 부인은 부디 잘 지내시오.”
부부가 헤어지며 서로 아쉬움과 당부를 나누며 양쪽 모두 경어를 사용하여 대화한다. 《배비장전》에서도 주인공 배비장이 제주도로 부임하게 되자 그 부인은 먼 곳에 가는 남편을 걱정하며 머나먼 제주 땅에는 부디 단념하고 가지 말라고 말린다. 이에 배비장은 “단망으로 언약함을 어찌 아니 가오리까?” 하여 단망, 즉 관원의 자리에 자신만이 추친되었는데 어찌 안 가겠느냐고 대답한다.
이 부부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 받는다.
“제주는 도중島中이나 물색이 번화하여 자래로 색향이라. 만일 그곳 가셨다가 주색에 몸이 잠겨 회정치 못하오면, 부모에게 불효되고 처자에게 못할 일 두루 당합치 않사오니 심량조처 하옵소서.”
“그 일은 염려 마오.(.....) 대장부 뜻을 한번 세운 후에 어찌 요만한 여자에게 신세를 맞추리까, 중맹을 하오리니 아무쪼록 방심하고 어머님께 효양하오.”
(생략)
이 두 장면의 대화에서 소경 부부와 배비장 부부 모두 경어를 사용하여 대화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높임의 정도에서 남자와 여자가 다소 차이를 보인다. 우리말의 경어에는 존경법과 겸양법, 공손법의 세 가지가 있다. 존경법은 ‘드시다’나 ‘하시다’처럼 주체를 높이는 어법이고 겸양법은 ‘여쭈다’처럼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대방을 높이는 어법이며 공손법은 종결어미 ‘습니다’, ‘어요’ 등을 사용하여 공손하게 표현하는 어법을 말한다. 부인은 남편에게 존경법과 겸양법, 공손법을 모두 사용하며 깍듯하게 높이고 있다. 하지만 남편은 부인에게 위의 예에서 ‘게을리 마시오’라거나 ‘잘 지내시오’ 혹은 ‘효양하오’라는 하오체의 예사 높임을 사용한다.
물론 남편이 부인에게도 ‘하소서’의 공손법을 사용하는 사례도 등장한다. 《조웅전》을 보면 조웅의 어머니인 왕부인이 남편을 만나는 꿈을 꾸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이날 왕부인이 등하에서 일몽을 얻으니 승상이 들어와 부인의 몸을 만지며 왈,
“부인이 무슨 잠을 깊게 자나이까? 날이 새면 대환大患을 당할 것이니 웅을 데리고 급히 도망하소서.”
하거늘, 부인이 망극하여 문 왈,
“이 깊은 밤에 어디로 가리이까?”
승상 왈,
“수십 리를 가면 자연 구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급히 떠나소서.”
남편인 승상이 부인에게 ‘도망하소서’, ‘떠나소서’ 하는 식으로 공손법을 사용하며 대화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조웅전》에서는 남편이 역시 부인의 꿈에 나타나 “웅이 이 앞으로 지나거늘 부인이 어찌 모르고 잠만 자시나이까?”라고 하여 부인에게 공손법을 사용한 사례도 나타난다.
《조웅전》의 주인공 조웅도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에 유숙했던 장진사 집의 처자와 인연을 맺고는 아침에 길을 떠나면서 처자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은은한 정으로 밤을 지내고 삼경이 지나 원촌의 닭이 우는지라. 웅이 일어나니 소저 왈,
“모친이 낭군을 보려 하시니, 오늘 머물러 모친을 보시고 훗날 가소서.”
웅이 답 왈,
“내 모친을 천리 밖에 두고 떠난지 삼년이라. 일각이 여삼추하니 어찌 일신들 머물리오?”
여기서도 소저는 깍듯한 경어를 사용하지만 조웅은 예사 높임의 하오체를 사용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부부간에 기본적으로 상호 존중하는 커뮤니케이션 양태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남녀에 따라 그 높임의 정도에서 다소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부인은 남편에게 여러 가지 경어법을 사용하여 최대한 높이지만 남편은 공손법을 사용하거나 하오체의 에사 높임을 사용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이는 조선시대의 남성 중심 문화가 부부간 대화에서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한일통의 정리
①부부간에는 기본적으로 상호 존중하는 대화가 이뤄짐
②남녀에 따라 높임의 정도가 다소 차이가 있음
③부인은 남편에게 여러 경어법(존경법, 겸양법, 공손법)을 사용하지만 남편은 공손법 or 하오체
(3) 상민 부부는 에사 높임: 신분에 따른 차이
부부간의 경어법 사용은 신분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하위직 관리나 상민들의 경우는 부부간의 대화에서 격식이나 높임의 정도가 양반들보다 완화된 형태로 나타났다. 《이춘풍전》을 보면 이춘풍이 부인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춘풍 아내 곁에 앉아 하는 말이,
“여보시오. 내 말쓰 들어보소. (........) 이녁은 어찌 부모의 세전지물을 일조에 다 없애고 수다한 노비 전답 누구에게 다 떠넘겨 처자들 돌보지 않고 일신을 맡겨 기주탐색 호투쳔을 주야로 방탕하여 이렇듯이 즐겨하니 어이하여 살자는 말인가?”
춘풍이 대답하되,
“자네 내 말 들어보게. 그 말이 다 옳다 하되 (.........)나도 이리 노닐다가 나중에 일품되어 후세에 전할리라.”
춘풍의 아내가 어찌하여 부모의 물려준 유산을 하루아침에 다 날리고 많던 노비와 전답을 누구에게 다 넘겨 버리고 처자식을 돌보지도 않고 술을 즐기고 색을 탐하여 투전을 주야로 즐겨하니 어찌 살겠는가라고 한탄하는 내용이다. 이에 이춘풍은 다른 사람들의 사례를 들먹이며 나도 나중에는 잘 되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말로 받아 넘긴다. 여기서 춘풍의 아내와 이춘풍은 서로 ‘들어보소’, ‘들어보게’와 같이 예사 높임말을 사용한다.
《심청전》을 보면 심청을 출산한 직후 딸을 낳았음을 확인하고 서운해하는 곽씨 부인과 심봉사가 대화를 나눈다. 곽씨 부인이 “신공 드려 만득으로 낳은 자식, 딸이란 말입니까?” 라고 늙어 어렵게 얻은 자식이 ᄄᆞᆯ이라고 서운함을 토로한다. 이에 심봉사가 “마누라 그 말 마오. 첫째는 순산이오. 딸이라도 잘 두면 어느 아들 준다고 바꾸겠소”라고 말을 잇는다. 죽음을 눈앞에 둔 곽씨 부인은 남편에게 “건너 마을 귀덕 어미 내게 절친하여 다녔으니 어린아이 안고 가서 젖을 먹여 달라 하면 응당 괄세 안이하리니. 천행으로 이 자식이 죽지 않고 자라나서 제 발로 걷거든 앞 세우고 길을 물어 내 무덤 앞에 찾아와서 너의 죽은 모친 무덤이로다 가르쳐 모녀 상면하면 혼이라도 원이 없겠소.”라고 당부의 말을 남긴다. 여기서도 부부는 예사 높임체를 사용하여 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위가 높은 양반집에서는 부부간 상호 깍듯한 경어를 사용하지만 몰락 양반이나 상민들의 경우는 말 높임의 정도가 완화된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삼한일통의 정리
●몰락 양반이나 상민들의 경우는 말 높임의 정도가 완화됨. 아내 역시 남편에서 맞먹는 말빨로 대응 가능한 듯.
2)“모친 슬하를 떠나려 하오니, 염려치 마소서”:부모와 자식 간
(1) 부모와 자식의 커뮤니케이션
자식들은 예를 다하고
유교 윤리 속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삼강오륜에서 부위자강父爲子綱을 두 번째로 꼽을 만큼 강조되는 덕목이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엄격한 예법과 격식이 요구되었다. 특히 양반들의 경우 자식은 매일 아침 부모에게 가서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소현성록》을 보면 주인공 소생의 하루 일과를 “새벽 북이 울리면 일어나 세수하고 아침 문안을 드리고 대궐에 가서 조회에 참석한 후 어머니께 하루 세 때 문안”한다고 묘사한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기에 어머니가 집안의 최고 어른이었다. 주인공의 아침 첫 일과가 어머니의 거처인 정당正堂에 가서 문안드리는 것이며 하루에 세 번 문안드린다는 것이다. 문안을 드릴 때도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방 밖에서 문안을 올렸다.
《소현성록》을 보면 “새벽닭이 처음 울 때 세수하고 부인 숙소 창 밖에서 소리를 나직이 하여 문안을 여쭙고 회답을 기다려 두 번 절하고 물러”났다는 것이다. 방 밖에서 문안 인사를 올리고 회답을 듣고는 다시 절하고 물러나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의 커뮤니케이션도 어러한 엄격함 속에서 이루어졌다. 부부 사이와 마찬가지로 부모와 자식 간에도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지는 않았다. 특히 묵언의 윤리가 강조된 남자들, 즉 부자간의 커뮤니케이션 사례는 고전 소설에서도 매우 드물었다.
부모와 대면 상황에서 자식은 스스로를 ‘소자’, ‘소인’ 등으로 낮추었다...(생략)
한편 제3자와의 대화에서는 자기 아버지를 칭할때는 ‘부친’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생략)
어머니와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면전 대화에서는 대부분 ‘모친’이라 호칭하며 항상 깍듯한 경어를 사용하였다. (생략)
부모는 평어체로
한편 부모는 자식과의 대면 상황에서 별도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너’ 혹은 ‘네’ 등의 인칭 대명사로 지칭하였다. 《조웅전》에서 먼길을 다녀온 조웅이 어머니에게 인사드리며 “모친은 그사이 기체일향하시니까?”라고 문안을 여쭙자 어머니는 “나는 잘 있거니와, 네 그사이 어디 가 머물며 저 칼과 말을 어디서 얻었느뇨.”라고 응답한다. 서자의 설움을 말한 홍길동도 그 아버지, 어머니 모두 “재상의 집안에 천한 종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이 너뿐이 아닌데”라며 야단을 친다.
부모들이 면전에서 자식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조웅전》을 보면 피난길에 오른 조웅 모자가 중으로 신분을 위장하고자 머리를 깎은 모습이 서글퍼 붙잡고 통곡한다. 부인이 아들을 달래며 말하기를 “웅아 울지 마라. 내 심사 둘 데 없다.”라고 이름을 부르며 말한다. 이 사례 외에는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면전에서 직접 부른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3자와의 대화에서 자식을 언급할 때는 대개 그 이름을 거명하였다. (사례 생략)
호칭으로 이름을 잘 새용하지 않는 현상은 당시의 문화적 풍토에 기인한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고 여겼던 인식이 강했다. 이를 실명경피속實名敬避俗이라 하였다. 대신 성인이 되면 부모가 붙여 주는 자字를 부르거나 스승이나 웃어른, 친구 등이 지어 주던 호를 즐겨 사용하였다.
삼한일통의 정리
옛날 시대를 배경으로 스토리텔링을 할때 참고하려고 필기해서 정리했는데
카페 내에서도 이시대에 부부간에는 어떤 말투 쓰고, 부모자식간에는 어떤 말투를 썼는지 궁금하실 분이 많을것 같아서 정리해서 올려봤습니다.
더 가독성을 위해서 PPT로 정리도 해봤습니다.
첫댓글 그러면 어머니또는 아버지같은 표현은 잘 쓰지 않나요?
아예 쓰지 않은건 아닙니다.
문헌이나 편지를 보면 드물게 쓰이기도 합니다.
http://archive.aks.ac.kr/letter/letterViewIframe.aspx?dataUCI=G002+LET+KSM-XF.0000.0000-20140430.B0018_119&sType=검색결과
아들이 어머니에게 한글편지 보낸 사례를 보면 이렇습니다.
아들이 임금이면 어머니 대왕대비는 어떻게 호칭했나요?
왕이 모후를 부를때는 [국모(國母), 모후(母后), 자성(慈聖), 자전(慈殿), 자위(慈闈)]으로 불렀고 반대의 경우인
대비가 왕을 부를때는 [주상, 금상, 상감]으로 불렀습니다.
@삼한일통 가령 예시로는..
순조실록 6권, 순조 4년 6월 23일 경진 1번째기사 中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어찌 수렴의 중대함을 알지 못하랴? 그리고 또한 어찌 철렴한 뒤에 다시 이런 일을 하랴?.... 주상의 보령(寶齡)이 이제 15세가 되었고 예덕(睿德)이 일찍 성취되어 직접 만기(萬機)를 총괄하고 있다...... "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가 순조를 주상이라고 언급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