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에서 여름휴가를 즐기던 김상배씨(38)는 지하철 2호선 왕십리역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있어야 했다. 2호선과 5호선, 중앙선이 얽혀 출구가 어딘지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2년 전 지나다 들렀을 땐 공사가 한창이더니 지금은 이른바 멀티역세권으로 불리며 이동경로가 복잡해졌다.
김씨가 도심 휴가지로 왕십리를 선택한 건 지난 월드컵 시즌. 왕십리 광장에서 월드컵 응원전이 진행된다는 소식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원스톱 엔터테인먼트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쇼핑과 영화, 워터파크에 골프까지 온 가족의 관심분야가 한 공간에 몰려있어 휴가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왕십리가 변하고 있다. 2004년 착공한 왕십리 민자역사(이하 비트플렉스)가 지하 3층, 지상 17층 규모로 2008년 9월 완공된 이후 성동구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청계천, 중랑천, 한강변을 산책한 후 마장축산물시장에서 식사를, 비트플렉스에서 여흥을 즐기는 코스가 새로운 관광코스로 불리기도 한다. 비트플렉스 앞에 조성된 왕십리 광장은 시민의 휴식공간. 총사업비 78억원, 총면적 9146㎡으로 서울광장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이곳은 특히 야외공연, 거리응원 등이 열리며 부도심으로서 왕십리의 입지를 높이고 있다. 덕분에 왕십리 상권에 투자자와 창업자의 관심이 꾸준하다. 구도심이던 이곳에 새로운 호재가 작용하며 상권의 확실한 업그레이드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왕십리 상권의 호재는 뉴타운과 신분당선 연장, 뚝섬 개발 등 풍부한 개발재료가 돋보인다. 서울시도 2020년 도시기본계획에 왕십리를 동북생활권의 부도심이자 서울 남북교류의 거점으로 지정해놓은 상태. 지금껏 곱창과 금속 산업이 왕십리 골목을 대표했다면 현재의 왕십리는 젊음의 거리를 꿈꾸고 있다.
조선 건국 초기,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현재의 왕십리 지역에서 이름 모를 노인을 만났다. 노인이 말하길 ‘서북쪽으로 십 리를 더 가 그곳을 도읍지로 정하라’ 했다. 그리하여 붙여진 지명이 왕십리(往十里)다.
여타 역세권에 비해 왕십리의 상권은 지하철역 개통과 무관하게 성장했다. 1980~1990년대 인근 상권은 금속업계가 좌우했다. 당시 전풍관광호텔을 중심으로 대로변과 이면도로에 먹을거리, 유흥시설이 주를 이뤘다.
또한 인근 왕십리동과 도선동, 행당동 등의 거주자와 학생들의 수요에 학원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하철역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상권이다. 오랫동안 인근 근로자와 직장인, 학생, 거주자들의 소비가 주를 이뤘던 곳으로 왕십리역 1번 출구와 반대편 11번 출구 대로변, 이면도로가 그곳이다. 이곳은 현재도 왕십리역 방향에 비해 외부 인구 유입 비율이 낮은 곳이다.
11번 출구 방향인 옛 한미은행 자리 주변은 패스트푸드와 약국, 안경점, 이동통신점, 옷가게 등의 판매시설이 몰려있다. 1번 출구 방향인 전풍관광호텔 주변에는 판매시설과 함께 회집과 한식집, 고기집 등 먹을거리 상권이 자리를 잡았다. 학생층과 중장년층의 먹을거리 소비 인구가 주야로 비슷해 상권에 투자한다면 방향 설정이 쉽지 않은 구역이다. 주변에 자리한 동대문, 건대역 상권이 특화 돼 있어 권리금 수준도 답보 상태, 업종에 따라 수준차도 심하다.
한국창업부동산정보원의 장경철 이사는 “전반적으로 왕십리 상권의 전망은 밝다”며 “구상권의 경우, 왕십리 뉴타운 지역에 속해 있어 개발 속도에 따라 상권 변화 속도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뉴타운 개발 시점과 속도가 상권 활성화의 바로미터라는 것이다.
맞은편 왕십리로터리 옆 지하철역 3, 4, 5번 출구와 연결되는 행정타운은 성동경찰서, 성동구청, 성동구의회, 성동교육지원청이 자리했다. 지난해 서울시가 왕십리역 주변을 개발하는 ‘왕십리 부도심권 제1종지구단위계획구역 재정비안’을 통과시켜 사업이 예정됐던 곳. 성동경찰서 부지에 최고 150m 높이의 랜드마크 건축이 가능해져 관심을 모았으나 경찰서 이전 논의가 지지부진해 개발시기가 요원한 상황이다
지하철 5번 출구와 연결된 비트플렉스는 하루 유동인구만 16여만 명이다. 이중 상당수가 비트플렉스에 입점한 시설을 이용한다. 지하철역과 연결된 쇼핑몰 엔터식스(Enter-6)에 들어서면 르네상스식 중세 유럽의 거리가 펼쳐진다. 라스베이거스 그랜드 캐넌숍과 포럼숍 등을 벤치마킹했다. 패쇄적인 공간이 아니라 개방된 거리에서 다양한 쇼핑과 편의시설, 휴식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이름하여 ‘엔터테인먼트 패션 쇼핑몰’이다.
비트플렉스 개관과 함께 개점(2008년 9월)한 엔터식스 왕십리점은 개점 당시에 비해 약 두 배가량 매출이 올랐다. 지하철 환승 시 잠깐 이용하는 고객도 있지만 주변 행당동, 마장동, 옥수동, 답십리, 중곡동 거주자를 비롯해 최근엔 강남권과 경기도 구리에서도 일부러 찾는 공간이 됐다. 물론 엔터식스를 비롯해 비트플렉스에 입점한 이마트, CGV, Dome Golf, 포시즌 워터파크 등의 시설이 단단히 한몫했다. 잠실에 거주하는 신미경씨(28)는 “폭염주의보가 내렸을 땐 CGV에서 영화 한 편 보고 포시즌에서 수영과 찜질을 즐긴 후 이마트로 이동해 장을 봤다”며 “지하철로 연결돼 이동이 편하다”고 왕십리의 교통과 지리적 장점을 이야기했다.
현재 지하철 2호선과 5호선 그리고 중앙선이 통과하는 왕십리역은 2011년 분당선 연장구간, 2017년 경전철이 예정돼 있다. 7년 후엔 무려 5개 노선이 통과하는 퀸터플 역세권이 된다. 성동구는 2012년 하루 유동인구가 4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상권 분석 전문가들은 “동북권 최대상권이라는 건대상권을 뛰어넘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한다. 특히 강남권과 연결되는 분당선의 영향력이 예상보다 크다. 강남의 교통, 교육 등과 이어지는 대체 고급 도시로 급부상할 것이란 예측이 속속 보도되는 상황. 여기에 성동구 뉴타운계획 ‘마스터플랜’이 가시화되는 2015년엔 미니 신도시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주변 환경의 변화와 함께 지가 상승도 예상된다. 왕십리역 주변 대로변의 상가시세는 3.3㎡당 5000만원 선. 현재 개발 초기 단계로 앞으로 계획안이 변경될 여지도 있어 투자 시 이점을 고려해야 한다.
비트플렉스를 중심으로 상권이 활성화 됐지만 왕십리역 일대의 상권은 지하철 환승역 방향에만 집중돼 있다. 왕십리로터리를 중심으로 동편은 국철로 인해 단절현상이 나타나고, 남북을 가로지르는 응봉로의 지하도가 상권 연계의 걸림돌이 되고 있어서다. 비트플렉스와 구상권의 연계가 미진한 원인이다.
성동구가 야심차게 선보인 ‘신(新)문화의 거리’는 한양대길에서 왕십리역(진솔길)까지 630m 도로를 가리킨다. 2008년 4월 30억원을 들여 이듬해 3월 말 완성됐다. 한양대학교 주변 지역은 주거지역과 소규모 시장이 혼재돼 건국대 로데오거리, 홍익대 거리, 이화여대 앞 등과 달리 젊은층을 유입할 수 있는 특성화된 아이템이 부족했다.
신문화의 거리는 한양대생이 즐겨 찾는 곳으로 보행자의 편의를 최대한 반영해 한양대길 300m에 넓이 2m의 보도를 확장했다. 특히 느티나무 등 다양한 품종의 나무 76주를 심어 친환경적인 도로를 조성했다. 성동구는 상권 활성화를 위해 이곳을 사람이 북적대는 패션의류 특화거리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우선 한양대길 옆 진솔길은 차량을 통제하고 보행자 전용도로로 전환했다. 왕십리역 6번 출구 앞에는 등의자 등을 설치해 쉼터를 조성하기도 했다. 현재 이곳은 젊은층의 유입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구상권은 직장인, 비트플렉스는 유동인구와 가족단위 고객, 신문화의 거리는 대학생 등 젊은층이 주 소비층이다. 새로운 거리가 조성되고 상권이 들어서니 기존의 상인들에겐 부담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비트플렉스 인근의 한 공인중개사는 “거리가 새롭게 조성되고 소비가 늘면서 상인들의 매출이 오르는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이면에 임대료가 두 배 이상 뛰면서 원래 있던 상인들이 이주를 모색하고 있다”고 상황을 전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새로운 상권에 새로운 상인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설명한다.
왕십리 상권은 현재 뉴타운과 비트플렉스, 교통 호재 등이 겹치며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게 사실. 부동산 투자자들은 분당선 연장선의 완공 등 교통요지에 강남권 출퇴근이 자유로운 점, 한양대가 지척인 점을 들어 오피스텔 분양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특히 지하철역 2번 출구 방향, 행정타운 맞은편 지역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창업부동산정보원 권강수 대표는 왕십리 상권에 대해 “강북에서도 상대적으로 낙후된 상권이었지만 비트플렉스가 안정권에 들어섰고 뉴타운 등 주변 개발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며 “개발계획이 속도를 낸다면 일대 상권은 비트플렉스와 시너지 효과를 내 지금보다 활성화 되고 커질 것으로 예상돼 투자가치가 높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