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6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선비 정신으로 삽시다.
가끔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 혼자서 사람들과 동 떨어진 생각과 사고방식을 고집하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갈 때도 그렇고,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될 때도 그렇습니다. 지금 사회는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가치관도 빠르게 변하고 있고, 관심도 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처럼 공자 맹자를 찾으며 군자 운운하는 사람은 이제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의를 해도 학생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웃으라고 웃기는 얘기를 해도 썰렁한 농담으로 들리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점점 외로움을 느낍니다.
말씀도 내가 느끼는 것과 젊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다른 모양입니다. 물론 같이 느낀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의 환경과 나이와 상황에 꼭 맞도록 말씀을 들려주실 것이며 각 사람이 알아듣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알아듣는 귀가 달라야 하고 해석하는 것도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 의견과 같을 수 없습니다.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의(義)로움’이라는 말씀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무엇을 의로움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말입니다. 맹자의 말씀으로 사생취의(捨生取義)라고 말하는 의로움이 있습니다. 목숨을 던져 의로움을 취한다는 뜻입니다. 의리 또는 의로움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는 선비의 올곧은 기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맹자에 나오는 글로, ‘삶도 내가 바라는 바요, 의로움 또한 내가 바라는 바이다. 만일 둘을 모두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 것이다.
이자불가득겸, 사생이취의자야 : 二者不可得兼, 捨生而取義者也
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로움이란 올곧은 기개를 말합니다.
또한 공자는 논어에서 ‘의이위질(義以爲質)’이라고 ‘의로움으로써 바탕을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이치와 부합하는 것이 ‘의로움(義)’이고, 사람이 가야할 바른 길이 ‘의로움(義)’이라고 하였습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바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현들은 ‘삶’이 ‘의로움(義)’보다 소중하지 않다고 여겨 의로운 일에 자기 목숨까지도 바쳤던 것입니다. 따라서 ‘의로움(義)’으로써 자기 신념의 바탕으로 삼아야 올곧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며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의로움을 말하면 젊은 사람들은 나를 보고 고리타분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누가 이런 말을 현실에서 따르겠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의(正義)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람들을 속이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길을 찾으려고 미친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답답하고 가슴이 아파옵니다. 금융정보가 유출되고 보이스피싱이나 스미싱이나 인터넷이나 전화 문자를 이용한 각종 사기사건이 활개를 치고 있으며 정의와 의로움의 기둥으로 알려진 법조계 인사들의 비리와 부정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의 의로움은 실종된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맹자의 사생취의의 선비정신은 이제 정말 실종되었다는 생각이 들고 정치가들의 행태에서도 선비정신은 찾아볼 수 없으니 암담한 심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로워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따지고 그 준법생활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과 행실이 달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말로만 의로웠고 생각이나 행실은 의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옛날 위선적인 양반들과 같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정의로워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조목조목 의로움의 실천 방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그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얼마나 위선적으로 살았는지 소름이 끼칠 지경입니다. 정말 정신 차려서 시대에 뒤떨어지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도 또한 아무리 외톨이로 산다고 하여도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으로 의롭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선비정신이 고리타분하다고 하여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는 것이 좋다고 하셨으니 선비정신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조금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된들 무슨 큰 탈이 있겠습니까?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8,21-28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1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22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23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24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25 그런데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26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27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28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축일 : 2월 26일 알렉산데르 (Alexander)
신분 : 총대주교
활동지역 :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연도 : 250년경-328년경
같은 이름 : 알레산드로, 알렉산더, 알렉산델, 알렉싼데르, 알렉싼델
250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성 알렉산데르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313년 성 아킬라(Achillas, 11월 7일)를 계승하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임명된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의 뛰어난 반대자였다. 자신의 온화한 책망으로 아리우스가 정통 교리로 돌아오지 않자, 성 알렉산데르는 318년 혹은 320년에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아리우스주의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그와 추종자들을 파문에 처했다. 그 후 그는 325년의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에서 당시 부제였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의 도움을 받아 아리우스의 파문 결정을 공식적으로 받아냈다.
축일 2월 26일 디오니시오 (Dionysius)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활동연도 : +303년경
같은 이름 :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초대주교로 공경을 받는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성 마르첼루스(Marcellus)에 의해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성 나르키수스(Narcissus, 3월 18일)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중에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순교 이야기는 성녀 아프라(Afra, 8월 5일)의 순교록에 등장한다.
오늘 축일을 맞는 알렉산데르 형제와 디오니시오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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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죄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서기를 바라시는 주님!
찬미와 흠숭과 영광을 받으소서.
늘 오늘 하루를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주님 뜻에 맞도록 살게 하소서. 아멘.
주님, 수산나의 찬미와 흠숭과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감사합니다. 수산나 자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