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생산력이 수도를 결정한다는 썩은 괴설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공분하는 와중에 그냥 묻힌고로 몇자 적어 손방아들을 찧을 기회를 마련하는 바이다.
우선 중국 역대왕조의 수도변천과 그 요인을 살펴보도록 하자.
전한 - 장안
초기에 군현제가 정착하지 못한 상황에서(군국제) 방어적 요인과 생산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수분지, 그리고 배후에 풍족한 사천지방을 둔 장안이 선택된 것은 어찌보면 자명한 이치였다. 그러나 문제는 [조운제도]다. 동아시아사에서 통치질서로써의 군현제와 같이 놓고 보아야 하는 중요한 제도... 전한이 안정적으로 군현제를 정착시키면서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중원지역은 이미 조운체제가 원활히 작동하고 있었다. <사기>에 보면 그런 양상이 자세히 서술되어있음... 도로정비와 함께... 이런 상황에서 이전의 생산력이 수도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헛소리...ㅋ 수도근방이 불모지라도 조운으로 조세를 걷어 조달하면 됨...ㄳ
후한 - 낙양
물론 조운체제도 영향을 미쳤지만(장안보다 수월한 위치), 중요한 것은 후한의 건국세력이 남양군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세력이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위진남북조 - 장안, 낙양, 건강
북조세력의 경우, 북중국을 장악한 이민족들이 유서깊은 역대의 수도이며 많은 인구를 가졌던 장안과 낙양을 근거지로 삼아 '한화'를 촉진하여 한족세력을 포섭하고 안정적 통치를 도모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이 매우 짙었음. 그러다가 후일 수당의 건국주체인 [관롱집단]이 형성되는 거고...
남조의 경우는 애시당초 장강 중상류나 복건, 광동지역을 영역에 포함하기는 했지만 인구밀도나 개발의 양상을 보면 회수 유역과 장강 하류지역이 인구-정치-경제에서 중심적 지역임. 특히 화북에서 이주한 동진의 경우는 이 지역 호족들의 후원을 받아 통치력을 유지할 정도이니, 다른 지역으로 천도 자체가 거의 불가능...-_-;
수, 당 - 장안
위에 언급한 관롱집단(관중-농서를 중심으로 하는 호화한 한족 및 한화한 호족들의 정치집단)이 건국주체이니, 이들의 근거지인 관중의 장안이 수도가되는 것은 당연함.
여기서도 위의 썩은 괴설은 간단히 격파됨... 왜냐?! 만능적인 키워드인 [조운제도]...ㄲㄲ
안사란 이후의 당나라의 중심였던 장안-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중원지역과 기존의 경제중심이었던 화북은 황폐화로 ㅈㅁ테크를 탄다. 그럼 무르씨의 썰처럼 다른 경제중심지인 강남으로 천도하는 것이 정답아닌가?! 그.러.나... 당은 이를 조운으로 해결한다!!! 조정의 명이 먹히지 않던 화북은 제껴두고 강남과 영남(광동 등지)에서 '상공(조정에 올려보내는 조세)'을 받아 장강-대운하-황하를 경유하는 루트로 장안으로 수송... 이렇게 강화한 경제력으로 강력했던 평로치청번진과 회서번진을 평정하고 하북삼진도 벌벌 떨게하는 중흥을 맞이한다. 근데 문제는 얼마후 '황소의 난'이 일어나 경제적 기반인 영남과 강남이 쑥밭이 되면서 조정이 거지가 되어버렸다는 거...ㅠㅠ 당은 그렇게 망하고 만다.
오대, 북송 - 개봉
남송 - 임안(항주)
당이 망하고 유례없는 혼란기였던 오대십국의 헬차이나가 벌어진다. 나중에 이를 수습한 것은 송나라... 근데 이때 새로이 부상한 도읍지가 바로 개봉이다. 개봉의 성장은 이 주변의 경제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여기서도 황하와 대운하를 경우하는 [조운제도]와 수운중심의 물류유통이 영향을 미친다.
대운하와 황하가 교차하는 개봉은 애초에 물류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한 도시였다. 대운하를 통해 북상한 조세와 상품이 황하의 수운조건에 따라 적재되고 이를 위해 대기하던 곳이 바로 개봉이었기 때문이다. 개봉의 성장에 '경제'가 관여한 것 맞지만, 생산력과는 그닥 관계 없다...-_-;
남송의 경우는 남조 이래의 강남개발과 관련이 깊다. 남천한 남송의 경제중심은 지금의 절강지역인 '양절지방'이었고 때문에 항주와 강녕(남경), 상주 같은 대도시가 밀집해있었다. 그렇다고 이 경제중심이 생산력만을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명심할 것...
원, 명, 청 - 대도, 북경
이 세개의 대제국이 북경을 수도로 정한 것은 이 지역의 생산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바로 초원을 중심으로 하는 유목민족과 정주민족 간의 알력이 작용했던 결과였기 때문이다.
원의 경우는 상도 개평부와 대도가 유목지역과 정주지역을 매개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고, 명의 경우는 북경이 북변을 침공하는 이민족을 방어하는 장성선의 보급, 군대충원, 무기조달 및 배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점이 수도로 정해진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청의 경우는 원과 다르지 않게 몽골왕공들과 한족지역인 내지 및 만주를 제어하는 정치-지리적인 중심이었기 때문에 북경을 수도로 삼았던 거다.
게다가 이 세왕조 모두 강남지역의 조세를 [조운]을 통해 대운하로 수송하여 국가경제를 꾸려나갔다. 북방민족에게 줄기차게 개털리던 명나라가 안망하고 버틴 것도 이 때문이다. 원의 경우는 아예 산동반도를 가로질러 운하를 판적도 있다.
이렇게 살펴보니 경제력을 따라 수도가 이동한다는 썰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수준인지 알만하지 않나?! 15세기에 중국에 표류했던 조선의 관료 최부는 그의 기행문인 <표해록>에서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지역을 "가난하고 인심이 부박하며 학문이 성하지 않았다"면서 강남지방과 비교하여 까고 있다. 경제력이 수도를 결정하는 요인이었다면, 원 이래로 역대왕조의 수도는 남경이나 상해였어야 맞다(뭐 상해현의 설치는 청대였지만...ㄲㄲ).
이런 썩은 썰은 [조운제도]라는 키워드로도 간단히 반박이 가능하다...헐~
※ 한반도와 일본의 경우는 귀찮지 않을 때 쓰도록 하겠다.
첫댓글 오호16국빠(?)로써 숟가락 하나 얹자면,16국 시기 각국의 수도를 보아도 중심 세력의 부침에 따른 것+기존 인프라 상의 대도시가 전부죠. 기존의 대도시가 장안을 제외하면 전무하다시피한 관중+관서 지역의 국가들은 초기 호하를 제외하면 전부 장안이 수도, 관동의 국가들도 패권을 잡기 전까지는 중심 세력의 근거지가 수도이고, 패권을 잡은 이후에는 기존 대도시를 수도로 했죠. 조금 특이한 케이스는 후연인데, 수도 중산은 수도급 대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중산이 수도로 된 배경에는 비수대전 이후의 혼란기 와중에 중산 지역에 유랑민+선비족 인구를 정착시켜서 근거지를 마련했고, 덕분에 수도로 낙찰. 이 역시 생산력과 아무 관련 없죠
게다가 북위의 경우를 보면 더 골때리는게, 북위가 관동의 패권을 잡은 이후로도 여전히 평성이 수도였고, 낙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거의 100년이나 지난 다음이었죠. 말타고 초원이나 떠돌아다니는 생번들이 생산력 따위 신경이나 쓴답니까?ㅋㅋ
@[Total-Hot]아하스페르츠 문제는 이렇게 명백하게 격파되는 헛소리를 [다른 관점]을 운운하면서 똥고집을 부리는 작자들이 있다는 것이죠...ㅋ
와악 한반도와 일본도 빨리 부탁드립니당 ㅋㅋㅋ
...불 붙이려면 삼국지 게시판을 만들면...
...불 붙는 레베링 아니라 폭발을 합죠;;
맞는 말씀인 듯. 덕국의 중세에 번창한 도시들도 마찬가지였죠. 농산물이니 특산물이 전혀 없어도 거기에 세력가나 대상인들 혹은 기술자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교통시설이 알맞다면 큰 도시들로 성장했다죠. 그 분이 구체적으로 뭐라 하셨는지 모르겠다만...ㅎㅎ...
그렇게 따지자면 서울도 별건 없지요.
김포평야 자체도 일찍이 개발되서 수리시설이 잘 갇추어진 알토란같은 땅이지만 임용한 교수도 지적했듰이 크기 자체는 자동차로 반나절이면 다 돌아 볼만큼 크지 않았고 그보다는 중국과 연결되는 뱃길이 있다는게 강력한 메리트였지요.
하지만 역시나 여기서 등장하는 치트키 [조운제]
한반도 중부에 적절하게 박혀 있다는 점과 서해안의 뱃길과 남북한강을 이용하면 손쉽게 많은 물화를 모으는것이 가능했지요(...)
정말 개경 서울은 딱 봐도 '뱃길 이용하면 물자란 물잔 다 여기 모이게 생겼다' 싶게 생긴 위치에 박혀있는 도시들입죠. 여기에 비하면 평양도 너무 북쪽이라 좀 아니고...(물론 요동까지 다 먹고 물류 잇는다면 평양도 딱 좋지만)
생산력하면 우리 절라도가 제일이랑게요.~ (근데 요샌 이런 말투 쓰면 일베충이라고 오해받는다죠.. )
@2Pac 이잉 근디 그짝은 백제시대 중심지인 한강-금강땅에서 솔찬히 멀게 있제라.....
인천 앞바다가 사이다라고 고뿌가 없으면 못먹는당께요. 즌라도 쌀이 기름기 좌르르헌 알곡이락두 조운제도가 없으면 서울 촌놈들은 손가락 빨아불제라.
우걱우걱 냠냠 짭짭
좋은 먹이로다
근데 해동천자님이 드신 예는 중앙집권화가 진행된 국가, 그러니까 조운시설과 같이 수취제도에 필요한 인프라가 공고히 자리잡은 케이스를 주로 예를 드셨는데, 이런 중앙집권화가 아직 공고히 이뤄지지 않은 케이스나, 아니면 더 큰 반례로 이제 갓 정치집단을 구축하는 농경에 기반을 둔 초기정치체제 내에서 통치권을 가진 권력자를 가리는데 생산력(즉 전쟁에 쏟아부을 수 있는 힘)이 가지는 중요성은 무시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한 지역의 정치적 중심지가 대부분 물(바다, 강, 아님 둘 다)을 끼고 넓은 평야에 의존한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죠. 해동천자님도 언급하셨듯 '건국주체'의 정치적 권한은 굉장히 막강하고,
그들의 막강함은 굳이 정치적 정당성에서만 오는 그런 젠틀한건 아니었으니까요. 생산력과 경제력을 나눠서 보셨는데, 농업 생산력이 경제력과 일치하던 시대와, 상업화가 징행되는 시기에 따라 생산력과 경제력의 관계가 크게 달라지겠죠. 즉 생산력, 경제력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좀 더 샤프하게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고로, 그때 생산력=수도라는 의견을 제시하신 분의 원글이 그렇게 나쁜 글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논리가 너무 단순했을 뿐이고 정치적 중심지를 정하는 요소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뿐이지.
그 반대죠. 중앙집권화가 미흡한 봉건적 사회나 아예 소국 난립 상태면 특별한 케이스가 아닌 한 "생산력이 좋은 지역을 중심지로 가진 세력"이 패권을 잡는 것이고, 그래서 그 세력이 패권을 잡고 나면 그 지역이 중심지가 되는 것이니까요. 싱산력이 좋은 지역이 수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패권자가 되어서 수도가 되는 겁니다.
@[Total-Hot]아하스페르츠 네 그게 제 말입니다. (특히 정주사회에서) 땅의 생산력, 또는 경제력이 지역패자를 만드는데 굉장히 큰 공헌을 하기 때문에 전근대사회에서 땅의 생산력과 정치적 중심지의 관계성에 대한 얘기를 가볍게 비웃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분명 토지 생산력이 경제력과 일치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덧: 무르님 글을 다시 보니까 좀 민망할 정도로 논지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시각의 방향 자체는 썩 나쁘지 않았던 글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거론하신 문제는 충분히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중국의 경우는 이미 전국시대에는 각국이 군현제와 제민지배를 실현할 만큼 중앙집권화가 매우 진전된 사회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토지와 지배층 및 거주인민의 연관성이 점차 약화되는, 그러니까 [분권적 봉건성]이 점차 사라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위에 거론한 사례들은 중국사에서 대부분의 시기를 차지하는 가장 대표적인 왕조들이에요...ㅎㅎ;;
물론 중국의 혼란기에 분열된 왕조들이 좀더 나은 생산력과 경제력을 선점하면서 통일의 길로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도 분명 존재합니다. 특히 '항산'을 가지지 못한 이민족의 중국지배는 매우 극적이죠.
더구나 각각의 분열된 왕조들도 전국시대 이래로 내려오는 군현제의 패러다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군현제에 자연스럽게 연관되는 조세제도와 [운송체계]를 갖추는 성향을 보인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말씀대로 건국주체들이 기존의 중심세력으로 막강한 경제력을 갖추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진 이래의 남조귀족들이 대표적이죠. 그러나 관롱집단의 경우는 경제력 보다는 선비족이라는 정치집단과의 연관성이 더 큽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경우는 대부분의 시기가 집권적인 통일국가였다는 점, 분열된 시기에 조차 각국은 하나의 "작은 중앙집권적 국가"였다는 겁니다.
더불어 경제적 요인 보다는 정치적 요인이 미치는 영향이 더 크지 않았겠느냐는 것이죠..^^; 중국정사를 보면 조정의 명으로 황무지에 신도시를 건설한다던가, 특정지역에 사민을 행하여 경제적으로 성장시킨다던가 하는 식으로 정치가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꽤나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