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전도연을 말한다. *사진은 연합뉴스에서* 그 여자 전도연을 처음 드라마에서 봤을 때 내 나이 마흔을 갓 넘겼을 때이던 것 같다. (오랜 기억이라 정확지는 않음) 저녁 식사 후 하루 일 분량의 노동의 노독을 푸는 가족의 대화 시간에는 비디오를 보며 담소 나누던 행복하고 즐거운 휴식의 시간이다. 우린 그 시절 '종합 병원' 과 '모래시계'라는 두 드라마를 홈 비디오로 보게 되었다. 그 시절 주인공은 아니였으나 꾸밈없는 미소의 간호사 구실을 하던 발랄한 연기자가 마음에 들어 이런 이야기를 가족들과 나눈 적이 있다. "분명히 저 여자 대성할 거야, 아마도" 라고 그리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디오를 접할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이 나름대로 열심히 바쁘게 쳇바퀴 돌듯 살아왔다.
오래전 그때는 이민자들이 많지 않았다. 지금보다 매우 조용한 삶으로 시장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딸아이는 내 등 뒤에서 "엄마! 한국사람이다." 하며 알려주곤 했다. 아이들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반에 하나, 혹은 둘 정도였고, 아들아이 고교 졸업식에도 일곱 명 뿐이였다. 어쩌다 마주치는 같은 민족을 보게 되면 서로 붙잡고 인사하며 수다의 시간을 할애하였었다.
이웃에 살던 몇 가정이 의례 모이다 보니 약속 없는 모임을 자주 하게 되고 우리는 주말이면 요리자랑 장기자랑이나 하듯 정성어린 우리 음식을 각 가정이 한 접시씩 마련해 정을 나누고 우리 언어를 통한 격식 없는 만남의 조촐한 파티를 열고는 했다. 우리의 고유명절에는 언제나 윷판을 벌리고 흥겨워했으며 끈끈한 정을 이어갔다. 전라도 깽 갱이, 경상도 문둥이, 경기도 속 잠방이 깍쟁이, 강원도 감자바위, 충청도 느림보, 그리고 여우 깍쟁이라 그네들이 말하는 서울내기인 우리가정 이렇게 여섯 가정은 참으로 끈끈한 정으로 살아가며 우리는 '작은 대한민국'이라며 우스갯소릴 잘하시던 000의 리더로 더욱 화기애애 하며, 고유의 우리 음식을 나누고, 이민 문화의 정보를 배우며 참으로 잘 지내 왔다. 작은 나라 안에는 천주교가 두 가정, 기독교, 불교, 무신론자가 두 가정 이였지만 왕따도 지역감정도 없었던 모두가 한마음 한자리였다.
지금은 자녀 교육으로 동부로 두 가정이 떠나고, 두 가정은 고국으로의 역이민에 한 가정이 살만 할 때 아내가 저 하늘로 떠나고, 우린 아직도 여기 남은 마지막 가정으로 이곳에서 인연을 나눈 그 시절의 이민동기의 터줏대감으로 열심히 지키고 살아간다. 지금도 연락이 이어져 간간이 소식을 나누면 그때 그 시절을 모두 그리워하는 눈치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전화의 마지막 소통 공용어는 변함이 없다. 이민의 삶은 초라하고 꾀 제재한 노독이 뭉쳐진 막노동의 시간으로 어느 사람이나 아픔을 끓어 않고 살아간다. 각 가정에서는 다른 문화권 교육에서 오는 자녀와의 대립, 자유롭게 소통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 그리고 입에 풀칠하기 위한 생계 수단은 학벌이나 배경은 소용이 없다.
고교에서 수학과목의 제자를 가르치던 가정은 그로 서리에서 로터리 복권과 담배를 팔아야 하고, 은행원이던 시절 사내 결혼을 한 그들 부부는 구두 수선공으로 생계를 꾸리며, 다른 한 가정은 해보지도 않던 일로 일식집을 열고 초밥 요리사와 웨이츄리스로 부부는 일하고, 고국에서 유치원원장으로 남편은 박사님을 하시던 이웃 가정은 새벽 4시에 '머 핀'을 굽고 원두를 갈아서 새벽 손님을 맞이하려고 모닝커피를 내린다. 수 간호사로 일하시던 분은 목사님의 부인이 되어 혹시나 은혜로 만날까? 한국 그로 서리의 오가는 행인에게 주님의 구원을 알리는 전단을 돌린다. 작은 중소기업의 사장소릴 듣던 내 남편은 세상만 한탄하는 백수로, 나는 우리 가정을 직장에서 주는 2주 급여로 삶을 꾸린다. 나는 정확히 칠 년 한 달을 000으로 일해왔다. 그 후 3년을 더 일하고. 내가 학사모를 쓴 대학 4년의 전공과는 전혀 거리가 먼. 밤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서러워 울기도 많이 하고 피치 못 할 사정에 의해 떠나오게 된 고국이 그리워 매일 밤 하염없이 울었다.
이민와 조금지난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오는 차 안에서 갑자기 눔물이 핑 돌았다. 급기야 쏟아진 눈물은 절제하기에는 이미 울음의 둑이 무너져 흐느끼며 울게 되었다. 옆에 앉은 원어민이 내 한쪽 어깨를 안으며" 너 괜찮으냐? 어디 아프냐? 도와 줄 일이 있느냐?" 하며 나를 연민의 정으로 다독여 주었지만 나의 울음의 질긴 끝은 정지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식구들 저녁거리도 장만치 못하고, 피자를시켜 주고 온 밤 내 울어야 했던 씁쓸한 기억, 그래도 바르게 자라준 고마운 아들 딸, 나 역시 잘 견뎌온 긴 세월의 강을 건너왔다. 백수인 남편은 4~5년 동안 비행기 삯을 헤프게 쓰며 많이도 드나들더니 고국의 사업을 완전 정리하고 잘 정착하고.
지금은 잠시 외출을 해도 스치는 이 어딜 가나 한국인이다. 물결처럼 밀려온 이민의 인구는 늘어나 참으로 다양한 문화권이 형성되고, 다민족, 다국적을 가진 나라에서 외롭다는 말이나, 한국 음식이 그립다던 옛추억은 추억일 따름이며, 새로 생긴 대형 마?에는 마치 고국의 대형 마켓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것이나 다름없이 넘치는 물건들은 오히려 충동구매를 자극한다. 그만큼 지구촌은 좁아지고 밀착돼가고 있다.
전도연, 그 배우가 연기한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큰 상을 탄 우수작이라 관심을 둔 이유도 있으나, 오래전 '종합병원' 드라마의 풋내기 간호사였던 그 연기자였기에 더욱 호감으로 다가왔다. 오래전 우리는 노동의 지친 피로를 풀며 드라마 한편에 휴식을 취했던 그 시절... . 여기에 영화감상문을 다 기록하기는 그렇고, 단지 가장 남는 내용은 '신적인 용서와 그 여자의 아이를 살해한 범인이 스스로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는 오만함에서 오는 갈등, 하느님에 대한 부정이나, 용서에서 오는 구원 등등, 다양한 메시지로 다가온 영화는 화려한 꾸밈이 없는 진솔한 표출의 영화라는 생각이다. 그 후 나는 그여자가 나오는 영화 몇 편을 대여하여 보게되었다.
오늘 오래전 추억이 담긴 시청하던 드라마, 그 배우의 얼굴을 컴퓨터에서 기사 내용에 보도된 사진을 접하게 되고 우리가 오래전 이웃과 나누던 대화 "분명히 대성 할거야!" 했던 추억 속의 아련한 옛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와 지금 그녀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너 성공했구나! 역시" 난 그녀의 웃음, 잇몸이 보여도 매력으로 느껴졌던 그때의 가식 없는 웃음이 왜? 그리 좋아 보였는지. 상복이 많은 연기자? 아니면 능력이 있는 연기자? 연기가 무엇인지 몸으로 아는 연기자? 어떤 수식어를 늘어놓아도 그는 배우임은 틀림없다. 그런 그가 오늘 상을 받았단다. 홍콩에서 열린 국제무대에서. 붉은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리며, 여전히 매력적인 웃음으로.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변함없는 그녀의 웃음에서 지난 추억을 떠올려내는 나의 기막힌 발상에 나도 웃는다. 실컷 웃는다. 2008/3/21 |
출처: 아름다운 세상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영원한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