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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라졌다!
소문은 불과 한 달이 안되어 강호 전역으로 퍼져 갔다.
숭산에서 벌어졌던 청방과 홍방의 암투에 대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수십년간 무림인들 사이에 공포로 떠돌던 존재들이 모습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이제 모두가 믿고 있었다.
청방의 숨은 고수가 그들을 전멸시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홍방의 편에 섰던 자들이 하나 둘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고 홍방에서 탈퇴하는 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무력에서 밀리고 있던 청방의 세력은 무력에서도 조금씩 홍방을 압도하기 시작하고----.
홍방을 운영하는 여섯 마리의 숨은 용들은 암담한 심정으로 그들만이 알고 있는 숨겨진 장소에 모여들었다.
똑 같은 차림에 똑 같은 탈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들의 입에서는 쉴 세 없이 말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들 알다시피 우려하던 데로 그자는 엄청난 고수가 되어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소."
"이제 어쩔 거요? 십년 전의 그 사건만 벌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오. 그가 다시 나타난 이상 복수를 하지 않을 리 만무하오. 백초당은 백초당 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지난 십년 사이 백초당과의 전쟁으로 자금은 말라버렸소. 우리가 백초당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무력에서 조금은 앞서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힘들어졌소."
한 사람이 긴말을 단숨에 내 뱉어서인지 잠시 말을 멈춘 사이 또 한 사람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끝났소. 백초당의 방종구는 홍방의 자금줄을 하나하나 끊어버리고 있고--, 마지막 하나 남은 자금줄인 북풍표국 또한 오늘내일 하는 처지요. 홍방의 무사들과 고용된 상인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돈이 벌써 석달째 밀려 있소. 홍방에서 탈퇴하는 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가 절망적인 것들뿐이었다.
상석에 앉아서 묵묵히 다른 동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가면 속의 칠호의 얼굴 역시 새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그 꼬마가 정녕 무적의 고수가 되어 돌아온 것인가? 나라해도 암천혈혼대와 암흑전사단을 동시에 상대할 능력은 없는데?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것이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이었던가?'
칠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또 한 사람의 말이 들려왔다.
"지금은 우리 운룡회의 위기요.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고 했소. 그자를 죽이게 되면 강호는 완전히 우리의 손에 들어올 기회라는 생각이오. 아직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오."
칠호는 약간 놀란 심정으로 방금 말한 자를 쳐다보았다. 운룡회에서 검룡이라고 불려지는 전 무당파의 제자였던 임지한이었다. 모두가 절망하고 포기하고 있을 때 한 사람만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수로 그자를 죽인단 말인가?
"후우--, 모두 가면을 벗게. 여기는 우리들만 있으니--."
칠호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에 쓰고 있던 황금가면을 벗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수척해진 칠호의 얼굴이 드러나고, 다른 자들 또한 탁자 위에 가면을 벗어 올려놓았다. "사문(師門)에서 버림받은 자네들과 황산에서 모임을 가지고 운룡회를 결성한지도 벌써 십년이 흘렀네. 그 동안 우리가 이룩한 일은 눈부신 일이었지. 일개 살수에 불과했던 나와 자네들이 힘을 합쳐 삼 년이 채 안돼서 무림의 절반을 정복했지 않은가?"
거기 모여 있던 다른 다섯 사람의 고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멋진 나날들이었다.
현재의 어려움만 이겨낸다면 멋진 나날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지만 현재는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현재의 궁지를 벗어날 길은 보이지 않고---.
"그러나--, 그 때 미래의 적을 걱정한 나머지 우리는 백초당을 공격하게 되었네. 그때 그 일이 성공했다면 지금의 어려움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지만---."
칠호의 말에 화산파에서 파문 당한 남명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불바다 속에서 방종구가 살아 남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맞아. 난 상술의 천재라는 방종대와 그의 막내아들만 생각했지--. 방종구가 있는 줄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지."
칠호의 말에 거기 모인 모두의 얼굴은 허탈해졌다. 그것은 그들의 가장 큰 실수였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방종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해서 그날의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상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지요."
무당파의 제자였던 임지한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맞아, 한 동안은 식량과 의복과 기타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일도 벌어졌었지."
칠호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말하는 임지한을 바라보며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그 때 우리는 굶어죽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해야 했지요."
"하지만 다행이 우리하고 손잡는 상인들이 생기면서 그 일은 해결되고 방종구가 만들어낸 청방과의 싸움이 시작되었지."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누군가 질린다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참으로 끈질긴 자입니다. 온몸이 화상으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몸을 하고 있다는데, 그 몸으로 그런 상술을 전개하는 것을 보면---."
"그자가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내기 위해 한 동안은 광분했었지."
"결국 못 찾아내었지요. 조금이라도 일찍 그자를 죽였다면 일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을---."
나중에 운룡회에 가입하게 된 화사파의 파문 제자 악종진이 입을 열었다.
"맞아, 맞아! 십년 전의 그날 방종대 일가를 다 죽였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후--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는 것입니다. 지금은 앞으로의 일을 모색해야 합니다!"
말이 없던 곤륜파 출신의 진하정이 탁자를 두드리며 갑갑하다는 듯 소리쳤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칠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고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칠호,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홍방을 해체한다. 다들 따로 돈주머니를 차고 꽤나 많은 돈을 저축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칠호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뜨끔한 표정이 되어 시선을 돌렸다.
"자네들을 탓하려는 게 아닐세. 사람이라면 욕심을 가지지 않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이지. 나 역시 엄청나게 가난한 생활을 해 본 사람이니 자네들의 심정을 아네. 모두들 평생 놀고먹을 돈은 저축해 두었겠지?"
"홍방을 해체하면--, 칠호는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
개방의 왕질악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우선은 그 꼬마를 이길 방법을 찾아야겠지. 부모가 내 손에 죽었고 형은 온 몸이 화상을 입어 오늘내일 하고 있네. 날 배신하고 백초당에 붙은 천궁(天弓)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그 꼬마에게 안 할 리가 없으니 반드시 날 찾아 복수하려고 들거야."
"그럼 어디로 갈 생각입니까?"
"묘강(苗岡)."
"혹시 마교의 발원지라는 흑목애(黑木崖)로--?"
"그렇네. 내 무공의 근원이 바로 마교이지. 마교(魔敎)에서도 전설로 전해지는 무공이 하나 있는데---, 그걸 얻는 다면 그 꼬마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네."
"저희들은 어쩌면 좋을까요?"
"자네들 역시 그 꼬마의 복수의 칼날을 피하기 힘들 거야. 알아서들 살아남게. 홍방은 해체 되도 운룡회는 우리가 모두 죽는 그 순간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세."
운룡회의 비밀회의는 그렇게 끝이 나고 홍방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개봉에 있는 백초당(百草堂)이란 현판이 달린 건물 앞에 네 사람이 서서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수련아, 수고했어."
"언니도요."
자매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를 껴안았다. 숭산에서 이곳 개봉까지 오는데 무려 한달이나 걸릴 줄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적들의 앞을 가로막고 공격해서 늦어진 것이라면 이해 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늦게 도착한 데에는 소구의 책임이 막중했다.
핏발이 곤두선 눈을 한 소구가 방수련의 짐이 실려진 수레 앞에 서서 물었다.
"누나들 다 온 거지?"
화련 수련 자매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동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수레를 끄는 노새나 말 대신 이곳까지 수레를 끌고 온 것은 소구였다. 그래서 수레의 노새가 있어야 할 부분에서 서 있던 소구는 선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한달 동안 이 오누이들과 같이 여행하면서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천궁 옥형진은 경악한 얼굴로 소구의 모습을 쳐다보면서 한소리 내뱉었다.
"그렇게 자고도 잠이 모자라다니---, 도대체 얼마나 자야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
자매는 한숨을 내쉬며 백초당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방수련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옥 대협! 제 짐 좀 지켜주고 계셔요!"
"알았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자매를 쳐다보며 천궁이 소리쳤다. 자매를 향해 소리치고 난 후 천궁의 시선은 다시 소구를 향했다. 강호무림의 전설을 만들어낸 장본인, 홍방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저승사자의 모습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노새의 등에 얹혀져 있어야 할 안장이 어깨에 매달려 있고, 짐이 잔뜩 실려진 수레의 앞부분에 선 채로 잠든 소구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천궁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허 정말 지독한 잠꾸러기로고-----. 이 나이 먹도록 이런 잠꾸러기는 생전 처음 보는 구만---. 그런데 이대로 자게 놔둬도 되는 건가?"
한여름의 태양이 이글거리면서 대지를 달궈 놓을 때였다. 가만있어도 온 몸에서 땀이 쏟아지는 판에, 그늘도 아니고 거리 한 복판에서 서서 잠들어 있는 소구를 바라보는 천궁의 얼굴에 서린 것은 경악을 넘어서 감탄이었다. 땡볕 아래에서 저렇게 잘도 잘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신기한 일이었다.
침상 위에 누워 있는 방종구의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너희들이 도착했구나."
잔잔하지만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방종구의 눈은 수련과 화련 두 자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몸은 좀 어때?"
침상 옆으로 다가서는 방화련의 입에서도 잔잔한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에 서 있는 여동생과 침상 위의 오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방의 입구에 서 있는 방수련은 멍하니 침상 위의 오빠라고 알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화상을 입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모습일 줄은 상상도 못한 그녀였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몸의 대부분이 화상으로 일그러지고 쭈그러진 상태였다. 얼굴도 화상으로 흉측하게 변해 있었고, 화상 자국 위로 피고름이 줄줄 흐르는 모습을 하고 있는 오빠의 모습은 괴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저--정말, 종구 오빠가----?"
넋을 잃고 침상을 바라보던 수련이 더듬거리면서 말문을 열자, 방화련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런데--, 소구는 소구는 어디 있지?"
방종구의 입에서 소구에 대해 묻는 소리가 나오자 방화련은 한숨을 내쉬면서 아직도 문 앞에 서서 움직일 줄 모르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수련아, 네가 소구를 들고 와라."
"아-알았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방수련은 급하게 대답하고, 백초당의 정문을 향해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침상 옆의 의자에 소구가 앉게 되었지만,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 있지는 않은 상태였다. 낮이 지나고 해가 저물어 깜깜한 밤이 되었지만 여전히 소구는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졸고 있는 막내를 바라보던 방종구는 쓴웃음을 흘리며 그 옆에 서 있는 셋째 방수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건 둘 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구나."
"우린 무사하지만 오빠는----,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설움이 복받치는지 방수련은 말을 잊지 못하고 큰 눈에서 눈물을 샘솟듯 흘리고 있었다.
"소구야, 이 형하고 말 좀 하자. 그만 잠에서 깨어나지 그러냐?"
다시 졸고 있는 소구를 바라보며 방종구가 입을 열었지만 소구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수련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옆에서 방화련이 자신이 보고 겪었던 일을 말하는 사이 해는 지고 깜깜한 밤이 되었다.
"녀석,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너희들도 모두 피곤할 테니 그만 돌아가서 씻고 쉬도록 해라. 소구는 여기다 그냥 놔두고----."
누이동생들의 말을 들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방종구는 막내동생 소구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응, 밀린 이야기는 내일 하자구. 오빠도 피곤할텐데--. 소구하고는 내일 이야기하도록 하고 그만 자라구."
방수련의 울음 섞인 대답을 끝으로 방종구의 침실은 종구와 소구 두 형제만이 남게 되었다.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해지고 그 방안에는 소구의 낮은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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