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보다 옳도다
창 38:24-30,2023.03.26.늘찬양교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와 다말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문 24절에 기록된 대로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그의 며느리 다말이 음행을 저질렀고 그 결과로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말은 들은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끌어내어 불살라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본문 26절에서 보는 대로 잠시 후 생각을 바꾸어 “그는 나보다 옳도다” 하고는 다말을 살려주었습니다. 왜 유다는 다말에 대한 그의 판단을 이렇게 180도로 바꾸었을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옳다고 여기며 주장하며 살아왔던 부분들은 없을까? 에 살펴보며 은혜받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Ⅰ. 다말의 유혹
다말은 과부의 옷을 벗어버리고 ‘신전 창녀’로 변장을 하였습니다. ‘신전 창녀’ 제도는 일찍이 가나안 이방인들에게 유행했던 것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법령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신 23:19), 몰래 그런 행위들이 성행되고 있었습니다. 이 제도를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여인이 성전의 숲 같은데 앉아있으면 외간 남자가 그리고 가서 의사를 물어보고 한 여인을 선택합니다. 외간 남자는 선택한 여인에게 돈을 던져주고는 성전 밖에서 그녀와 동침하기까지 여인은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말이 이러한 ‘신전 창녀’로 변장을 하고 시아버지 유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더욱이 다말은 12절에 있는 것처럼 유다의 아내이자 자신의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마음에 여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음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말’은 이토록 철저하게 준비하고 유혹하는 미소와 정열적인 몸짓으로 시아버지 유다에게 다가갔을 것입니다. 유다는 이러한 며느리의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육신적인 정욕에 이끌려 창녀로 변장한 며느리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유혹했습니다.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당신이 무엇을 주고 네게 들어오려 하느냐?”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약조물(約條物)을 주겠느냐?” “무슨 약조물을 네게 주랴?”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내게 달라 그리하면 내가 허락하리라”(16-18절) 당시 인장과 지팡이는 유복하고 점잖은 집안은 어른들이 가지고 다니는 부의 표징이었습니다. 두 사람 간의 합의가 성사된 후 유다는 인장과 끈과 지팡이를 주고 다말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다말은 집으로 돌아가 면박을 벗고 다시 과부의 의복으로 갈아입고 집에서 칩궁(蟄宮)하며 지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유다는 자신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되찾기 위해 염소 새끼를 아둘람의 친구 ‘히라’에게 내어주면서 어제 내가 만난 여인을 찾아서 염소 새끼를 주고 내 약조물을 찾아오라고 부탁하였습니다(20절).
‘히라’는 유다의 부탁을 받고 성전 길 곁에 서 있던 창녀를 백방으로 찾아다녔으나 과부로 돌아간 다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곳 사람들은 “이곳은 창녀가 없다.”(21절)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히라’는 빈손으로 돌아왔고 유다도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났을 때 “자신의 며느리 다말이 행음으로 인하여 아이를 잉태하였다.”(24절)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유다는 며느리의 잉태 소식에 노발대발하며 “다말을 끌어내어 화형(火刑)을 시켜라. 정숙지 못하게 수절과부가 간음하여 아이를 배다니. 못된 것...(24절) 유다는 자신의 추악한 행동은 생각지 않고 며느리를 단호하게 정죄했습니다. 사람에겐 공통적인 심리가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과도하게 분개하며 역정을 냅니다.
다말이 사람들에게 붙잡혀 끌려 나와 석고대죄하고 있습니다. 시아버지가 나와 며느리에게 “네 죄를 내가 알렸다.” 말하자 며느리 다말이 말합니다. “이 물건이 누구의 것입니까? 저는 이 물건의 임자의 아이를 배었습니다.(25절)하며 유다의 인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밀었습니다. 유다는 다말이 내민 인장과 끈과 지팡이를 받아들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며느리가 나보다 낫구나. 다 내 잘못이다. 아들 셀라와 결혼시킨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26절)
Ⅱ. 그는 나보다 옳도다
우리는 여기서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보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26절)고 한 말의 뜻에 대하여 더 깊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부분이 오늘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유다가“그는 나보다 옳도다.”한 말의 뜻은 다말의 행동 모두가 옳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범한 옳지 못한 행동과 비교해볼 때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지 다말의 행동이 ‘의롭다’ ‘선하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결국 유다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발생한문제이기에 그는 다말을 용서하는 것뿐입니다.
더 중요한 메시지는 유다가 자신의 의로움과 정의로움만 강조하며 형제와 부모를 떠나온 것에 대한 큰 깨달음을 받은 것입니다. 다말이 보여준 아버지 집의 자녀를 잇고자 하는 열정은 하나님 아버지 집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있는가? 를 반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아버지 집의 중요성을 다말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아버지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과 사랑을 나누며 아버지를 곁에 모시며 살겠다 결정하고 이스라엘 야곱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하고 돌아가게 한 것이 다말의 교훈이었습니다.
결국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에게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을 따르며 가족과 화친할 기회와 용기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베레스’와 ‘세라’라는 쌍둥이를 후손으로 물려주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베레스를 통하여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를 통하여 다윗을 낳았으며 다윗이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말의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시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통하여 태어난 베레스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도록 하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오늘 유다 집안의 타락과 방탕함은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지 못하고 반듯하지 못하고 구원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깨끗하지 못한 모습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더럽다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처럼 비록 유다의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고 많은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행동이지만 이 모든 것을 덮어두시고 이 부족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려는 그 깊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메시야이신 주님은 이렇게 부패하고 온전하지 못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탄생을 하신 것입니다.
Ⅲ. 영적 교훈
첫째, 우리는 온전하지 못한 존재.
우리는 얼마나 온전하지 못한 존재입니까?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남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섬기려는 마음보다는 질투와 시기와 미움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감사함을 감사함으로 알지 못하고 거룩함을 거룩함으로 인정하지도 못하고 늘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안타까운 존재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고 죄사함을 받고 영생함에 이르는 은혜를 받았습니까? 우리가 깨끗하고 온전해질 수가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깨끗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거룩한 존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하고 있듯이 주안에 있는 사람만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도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꿈을 꾸면서 귀하게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둘째, 시련과 환경을 극복하는 믿음.
다말은 여자입니다. 여자는 성에 대해서 남자보다 훨씬 더 부자유합니다.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도 잘 표현할 수도 없고, 그냥 남자들의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것이 당시 여자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갔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찾아 삶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갔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여자라는 운명, 그리고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운명에 항거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숙명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이후 삼고(고물가, 고이자, 고환율)의 위기 속에 심한 경제난과 높은 실업률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더 많은 아픔을 당하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크리스천들입니다. 친구에게 잘못 보증을 섰다가 집도 직장도 잃어버린 채 거리로 쫓겨나 앉은 사람 중에 크리스천도 많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키려다 보니 좋은 직장도 갖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환경에 대하여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남편의 사업과 실직으로 가정을 포기하거나 삶을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다말이 며느리의 권리를 되찾으려고 그런 모진 고난과 핍박과 조롱을 이겨냈듯이 우리도 어려운 삶의 환경을 이겨내고 일어서기를 원합니다.
실패의 자리 낙심의 자리 절망의 자리를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막 9:23)
셋째, “그는 나보다 옳도다.”는 자세로 나의 신앙과 삶을 살펴보십시오!
제 아내가 사모로서 “오직 예수, 오직 말씀”을 강조하며 살다 보니 가족과 친척들에게 “그건 아닌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남편인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참고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그는 나보다 옳도다” 고백하며 자신이 너무 골수신앙인이었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타인의 행동과 판단을 이해하며 적극적으로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사, 사모, 성도 중에 자기 의로움과 옳음만을 주장하며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페이스북에 보면 이런 사람들의 글이 너무나 많습니다. 누가 이들을 말릴 수가 있을까요?
만일 유다가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다말이 제시하는 증거물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속이며 자신의 무관함을 주장하고 다말의 행위에 대해 단죄하며 처벌을 하였다면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 베레스는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레스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나보다 옳도다” 고백한 유다의 깨달음과 솔직한 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갖 추악한 일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조차도 어리석고 부끄러우며 낯 뜨거운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네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서로 자신이 옳고 남이 틀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갈등하게 되며 오해와 미움을 증폭시키기도 합니다.
내가 잘못 이해하고 알아 왔던 부분은 없을까요?
“그는 나보다 옳도다”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아버지의 집이 더욱 번성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