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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소구야. 이제 이 방 안에는 너하고 난 둘이다. 그만 일어나라. 수련이하고 화련이를 대리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고생이 심했겠구나."
조금 더 지나서 방종구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소구의 맑고 차가운 눈이 열렸다.
"형, 왜 이렇게 몸이 망가진 거야?"
"내가 멍청한 탓이다. 계약에 관계되는 문서들을 챙긴다고 하다가 화마(火魔) 속에 휩쓸렸지. 그리고---, 청방이라는 단체를 그 때 구한 문서로 만들 수 있었지."
"정말 아버지하고 어머니하고 돌아가신 거야?"
"그래. 정말이다."
"시신을 확인했어?"
"시신을 내 두 눈으로 확인했다. 살수들의 눈을 피해 도망치면서 언덕 위에 누워 계신 두 분의 시신을 보았지만----, 시신을 수습할 수는 없었다. 쫓기는 와중이었고---. 바로 며칠 전까지 난 계속 숨어 지내야 했단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쉽게 돌아가실 분이 아닌데--?"
"천궁 옥형진이 칠호라는 자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어?"
"듣긴 했지만--, 믿어지지가 않아."
"사실 나도 그래. 하지만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인의 등에 업혀 도망치던 그날 언덕 위에 쓰러져 계신 어머니의 모습과 아버지의 모습을--."
소구는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어쩔 거야 형? 홍방이라는 단체는 그들 스스로 해체하고 숨어버렸는데---."
"나는 이제서야 숨어살던 처지에서 벗어난 것뿐이다. 나 역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못한 몸을 하고 있고--. 이제 네가 책임을 지거라. 난 이제 쉬고 싶다."
"나보고 이 백초당과 청방을 운영하라는 말이야?"
"그래."
"싫어!"
소구의 싫다는 말에 침상 위에 누워 있던 방종구는 그렇지 않아도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더욱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이놈아, 난 할 만큼 했어!"
"내가 운영하면 백초당이건 청방이건 몽땅 말아먹을 걸, 그리고 저 성가시고 사람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누나들까지 내가 책임지라고 하는 거 아냐?"
"이제 네 책임이다. 너도 보다시피 내 몸이 이 모양이야. 복수심으로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만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 몸을 이끌고, 언제까지 그들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싸우는 일은 내가 맡을 테니까, 집안 일하고 누나들 일은 형이 처리해. 빨리 시집을 보내서 집에서 치워버리든지 해야지. 숭산에서 이곳 개봉까지 오는 동안 잠 한 번 제대로 못 잤다고---. 수련 누나가 좀 예쁜 건 나도 인정해. 그래서 어중이떠중이들이 파리 때처럼 달라붙는 거 처리하고, 앞길에 매복해 있던 무리들 누나들이 잠든 사이 처리하는 것까지는 참을 만 했는데---."
소구의 말을 들으면서 방종구는 또 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다. 알어.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 모든 일을 네게 시켰겠지. 나도 내 동생들이라지만--빨리 시집이나 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말도 말라고. 내가 잠에서 좀 늦게 일어난다고 수련 누나가 음공을 사용해서 내 잠을 깨우면서 말들이 놀라 도망치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날 노새 취급하더라니깐---."
"소구야, 이야기가 좀 이상한 데로 빠진 거 같다. 우린 복수를 위한 의논을 해야 하지 않겠니?"
"밤에는 밤대로 잠 못 자고, 낮에는 낮대로 누나들 성화에 잠을 못 이루고----."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혼자 흥분해서 말하던 소구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이런 내가 좀 흥분했나봐."
"그래, 오는 동안 수련이하고 화련이가 네가 없는 동안의 이야기를 다 떠들었을 테고---, 네 이야기나 해 봐라."
"뭘?"
"소림사에서 이십년 전에 실종된 뒤부터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침상 옆으로 의자를 바짝 붙여놓고 앉은 소구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소림사에서 날 대리고 가신 분은 혼천문의 구정문 사부였어."
"혼천문이라--? 네가 절대쌍천의 무공을 얻었구나."
"그리고 중간에 구정문 사부가 죽고 난 계곡 속에 갇혀 있었어. 무공을 터득하지 못하면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서--, 거길 탈출하는데 이십년이나 걸렸지---."
"그게 다냐?"
"응. 이게 다야. 정말 지독한 곳이었어. 먹을 것도 하나 없고 비축된 벽곡단은 떨어져 가고--. 굶어 죽기 싫으면---, 탈출을 위해서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무공을 어느 정도 터득해야 했거든. 그래서 이십년 동안 잠을 잘 수 없었고----."
"고생이 심했구나."
"형에 비하면 그래도 난 사지가 멀쩡한 상태니---."
"이십년이나 잠을 자지 못했다는 말이 정말이니? 너 같은 잠꾸러기가?"
"살아 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 먹을 것도 최대한 아껴서 먹어야 했고--."
"그래, 밖으로 나와서 수련이하고 만난 부분부터는 아까 네가 잠든 사이 화련이하고 수련이가 말해 주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뭐?"
"이놈아 네가 그러고도 방씨 집안 아들이냐? 돈을 뺏지는 못할 망정 뺏기다니?!"
방종구의 입에서 갑자기 성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그건----."
말을 못하고 더듬거리는 막내를 바라보며 방종구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나중에 반드시 회수할 방법을 생각해 둬라. 방씨 집안의 명예가 걸린 일이다."
낮고 잔잔한 음성이었지만 무척이나 음산한 음성이었다. 소구는 형의 말을 들으면서 갑자기 소름이 오싹 돋았다.
"알았어. 반드시 회수하도록 노력할게. 정 안되면 다 죽여서라도 뺏어올게."
"죽여서 뺏으면 그게 상인이냐? 강도지. 이놈아 합법적으로 회수할 생각을 해."
"끄응, 무지하게 힘든데----."
"근데 그 등봉현의 관리들에게 뺏긴 돈이 정확히 얼마냐?"
"잘 몰라."
"네가 숨겨 놓은 돈의 액수도 모르냐?"
"그게 그러니까--, 소림사에 올라갔을 때 내 피 값이라며 받은 돈이 꽤 많았었어. 왕 포졸 기억나? 왕발이 말이야. 그 포졸한테 준 돈 상자에 든 것은 정확하게 만칠천이백삼십이냥이었는데, 귀찮아서 다른 상자에 있는 돈은 얼마나 들어왔는지 안 세고 말았어. 그때 내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구 형."
"자랑이다. 아무리 어릴 때라지만, 이놈아 돈 세기가 귀찮아서 자기가 가진 것이 얼마나 있는 지도 모르다니--."
"헤헤, 그래도 군것질 할 거 사오라고 포졸들에게 준 돈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소구를 바라보는 방종구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처럼 너한테 이 백초당과 청방을 맡겼다간 정말 말아먹겠구나--."
"그래서 아까 말했잖아."
그 말을 끝으로 형제는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만 나가서 자라. 너도 피곤할 테니."
"나중에 말하자고."
그 말을 끝으로 소구가 나가고, 이제 방에 혼자 남게 된 방종구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지금의 상황에서 죽은 뒤의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초당이 계속 존속하려면--, 소구로는 안돼. 운룡회 놈들이 홍방을 해체하고 잠적했지만 내가 죽은 뒤에 그들의 홍방이 부활한다면 백초당은---, 죽어도 그 꼴은 못 보지. 그렇다면 수련이나 화련이의 남편감이 백초당을 맡아야 한다는 말인데--. 화련이는 절대로 재혼하려 들지 않을 테고--, 수련이의 신랑감을 빨리 골라야겠다. 아주 똑똑하고 이재에 밝은 놈으로 골라서--, 상인의 전쟁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무림의 전쟁은 소구 녀석에게 맡겨 놓으면 되겠지.'
방종구가 앞으로의 일을 결정하고 계책을 꾸미기 위해 생각에 잠긴 사이 시간은 자정이 넘어 새벽으로 달리고 있었다.
'따가닥 따가닥'
새벽 안개가 자욱히 깔린 관도 위에 말발굽소리가 규칙적으로 퍼져 나갔다.
일행 중에 맨 선두에 서서 말을 몰고 있는 사람은 황제의 밀명을 받고 자금성을 떠난 근보였다.
'천하에 백초당이 왜 이리도 많은 걸까? 무림계의 전쟁이 상계까지 퍼지다니---, 폐하가 말한 그 분을 찾을 수 있을까? 개봉부에 있는 백초당에서는 그분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근보는 한시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품속의 밀서는 그 누구도 보아서는 안돼는 것이었고, 뒤에 따라오고 있는 서양인 화가 또한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정을 장악한 보정대신 오배의 부하들이 황제의 밀서를 노리고 추적하는 상황에서 근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자신뿐이었다.
뿌연 안개 사이로 저 멀리 개봉의 성문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황제의 밀명을 받고 백초당과 취홍녀라 불리는 한 여자를 찾기 위해, 동으로 서로 개발에 땀나듯 돌아다녀야 했던 근보 일행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이탈리아의 화가 조기라르디니였다. 모든 것이 낯선 이국 땅에서 정신없이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중인 그는 한마디로 죽을 맛이었다.
"총관 나리, 언제까지 그 분을 찾아 돌아다녀야 하는 겁니까?"
근보의 옆으로 말을 몰아서 나란히 서게 된 서양의 화가가 질문을 던졌다.
"폐하가 말한 그분을 찾을 때까지는 멈추지 못하오."
"에구, 도대체 얼마나 예쁜 여자이기에 황제께서 그림을 그려 오라 하는 것인지 원--."
서양의 화가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근보는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서양의 화가는 뭔가 오해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 오해를 풀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황실의 가장 중대한 비밀을 한낮 이방의 화가에게 말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문에 듣자하니 백초당의 주인인 방종구라는 상인이 개봉에 있다고 하니, 이번에는 틀림없을 거요."
"그 소문만 믿고 들린 곳마다 허탕을 치지 않았습니까?"
서양의 화가는 지치고 피곤한 상태에서 계속 노숙을 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일에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였다. 그래서 그의 말에도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조금만 참으시오. 이제 곧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으---, 도대체 언제까지 참으란 말입니까? 내가 이역만리 중국 땅에 온 것은 이렇게 고생을 하러 온 것은 아닙니다."
"이제 개봉부에 다 왔소. 조금만 참으시오."
말을 하는 사이 그들을 싣고 있던 말들은 어느새 개봉부의 성문 앞에 이르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술잔 위로 술이 흘러내렸다.
술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방화련은 멍하니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동생들과 만나고 이제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은 잠시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다시 죽어버린 남편과 만날 수 없는 자식에 대한 생각으로 젖어 들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창 밖으로 하얗게 변한 새벽의 달이 보이고 있었다.
"달아, 그 때나 지금이나 너는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이구나."
나직하게 달을 바라보며 속삭이던 그녀는 술잔을 들어올렸다. 달을 벗삼아 자작하면서 그녀는 시름을 달래면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하늘 높은 곳에서 그런 방화련을 내려다보고 있던 달도 점점 날이 밝아오면서 모습을 감추고 붉은 해가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백초당의 건물 앞에 근보 일행이 도착한 것은 새벽이 지나고 날이 완전히 밝아올 그 무렵이었다.
말에서 내린 근보는 아직 문이 닫혀 있는 백초당의 정문 앞에 섰다. 아직 이른 새벽인지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고, 아침 안개도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닌 아주 이른 아침이었다.
"실례합니다!"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는 근보로 인해 아침의 고요함이 흔들리고, 백초당의 문지기 노인 엽관이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백초당 주위에 잠복해서 적들의 침입을 대비하고 있는 홍방의 무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고, 홍방의 지도자인 방종구가 개봉의 백초당 건물에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방종구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내던질 각오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근보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가 움직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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