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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배교대법
이수는 낙수의 지류 중 하나로 낙양의 남쪽을 흐르고 있었다.
탕왕을 보필한 명재상 이윤이 태어난 곳이 바로 이수 근
처이다.
이수의 물결은 굽이굽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간간이 크고 작은 얼
음 조각들이 물결을 타고 남으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이수를 중심으로 남쪽 양지바른 곳에는 십여 호의 민가가 옹기
종기 모여 있었다 겨울바람이 세차기 때문인지 민가의 지붕은 모두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강옥봉은 민가를 지나 강가를 거닐었다.
과연 멀지 않은 남쪽 강변에 커다란 뗏목하나가 정박해 있는 것이 눈
에 들어왔다.
뗏목 위에는 삼각형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사방이 개방되어 있는 천
막 속에는 한 명의 장한이 울적한 신색으로 앉아 있었다.
장한은 눈썹이 유난히 새카맣고 눈이 큰 사나이였는데 짧은 단삼
을 입은 모습이 틀림없는 무림인이었다. 사나이의 얼굴에는 우수
의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는데 두 눈에는 이슬이 가득 맺혀
반짝였다.
강옥봉은 잠시 그 사나이를 살펴보다가 훌쩍 몸을 날려 뗏목으로 날
아갔다.
시름에 잠겨 있던 사나이는 웬 소년이 뗏목으로 날아오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누구요?"
신속하게 몸을 회전시켜 돌아선 사나이는 강옥봉을 보자 흠칫 놀랐
다.
너무나 영준한 강옥봉의 모습에 놀란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수년 동
안 강호를 유람했지만 이처럼 영준하고 기개 넘치는 소년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첫눈에 소년이 악의를 품고 뗏목 위로 날아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기분이 상했다는 뜻을 상대에게 보이기 위해 눈썹을
약간 치켜 올렸다.
"소협은 무엇 때문에 이곳으로 온 거요?"
강옥봉은 미소 띤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불초는 귀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필시 무슨 어
려운 일을 당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도움이 되어 드렸으면 해서 온 것
이니,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강옥봉의 차분한 말에 사나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소협의 호의에 감사를 드리오. 그러나 내가 당한 어려움은 소협이
도울 수 없을 것이니 이만 돌아가 주시오."
"귀하는 어찌 불초가 도움이 될 수 없다고 단언을 하십니까?"
사나이는 이 질문에 일시 말문이 막혀 답변을 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억지로 웃음을 띠며 말을 꺼냈다.
"정히 그러시다면 소협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으니 말씀드리겠소."
이어 그는 천막 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누워 계시는 분은 바로 나의 주인님이시오. 병에 걸리셨는데
별의별 약을 다 써보았지만 이제까지 아무런 효력이 없었소. 그러므
로 소협께서 아무리 의술에 깊은 조예가 있다 하더라도 역시 아무런
도움이 되어 주지는 못할 거요."
그 말에 강옥봉은 천막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과연 한쪽 구석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인이 누워 신음을 하고 있었
다.
강옥봉은 청삼문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내심 놀랐다.
'그자는 내가 의술에 능통하다는 걸 알고 이런 부탁을 한 걸까?'
그는 궁금한 생각이 들었으나 꾹 참고 사나이에게 물었다.
"귀주인의 연세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여든일곱이오."
"언제부터 무슨 병을 앓고 계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사나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폐주인께서는 비록 연세가 많기는 하지만 평상시 어떤 젊은이 못지
않은 정력가이셨소. 그런데 어느 날 외출하셨다가 저녁 늦게 뗏목으
로 돌아오셨는데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소. 주인께선 곧장 침상으로 가서 누우시며, '내가 죽
을병에 걸렸으니 그리 알라'고 하시면서 이제까지 치료하시는 것조차
좀처럼 응하시려 하지 않았소."
"신통한 의술은 죽어 가는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겁니다. 어찌
하다가 무슨 병에 걸리셨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얘기해 주십시오."
사나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잘모르오. 나는 이곳에서 약 백여 리 정도 떨어진 상류에서 명
의를 초청하여 주인의 병세를 진찰하도록 했었소. 그런데 주인
께서는 웬일이신지 진찰을 거부하시고 의원을 돌려보낸 다음 내게 시
키지 않은 짓을 했다고 불호령을 하셨소. 나는 근심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졸이며 여기까지 왔는데 얼마 전 주인의 상세가 갑자
기 악화되었소."
돌연 천막 속에서 노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진호! 너는 누구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느냐?"
진호는 갑자기 흠칫 놀랐다.
"예, 저…… 지나가는 소협 한 분과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진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강옥봉은 자세를 낮추어 천막 안으로 들어
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한쪽 구석에 초췌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노인의 얼
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은백색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은 퍽 온화
한 얼굴이었는데 지금 몹시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옥봉은 가까이 다가가 미소 떤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노인장, 불초가 한번 진찰을 해보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이때 진호가 뒤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왔는데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가득했다. 그는 암암리에 진기를 가득 끌어올리고 강옥봉이 이상한
행동만 하면 즉각 처치하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노인은 처음에는 가슴이 섬뜩함을 느졌는지 한차례 몸을 떨었다.
하나 이내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띠었다.
"귀하가 만약 명을 받고 나의 목을 베러 왔다면 어서 손을 쓰시
오."
강옥봉은 아연 놀란 표정을 금치 못했다.
"노인장, 너무 성급하게 추측하지 마십시오. 불초는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노인장의 수하가 몹시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기에 연유
를 물어 혹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찾아온 것뿐입니다."
노인은 가슴속에 맺힌 한을 토해 내기라도 하듯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노부는 암습을 받아 머지않아 곧 목숨을 잃게 될 몸이오. 적은
몹시 무서운 인물이니 소협은 괜한 시비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말고
속히 이곳을 떠나시오."
강옥봉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불초는 미력하나마 제 한 몸 지킬 힘은 있으니 제 걱정은 마십시오.
노인장을 구할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한번 진찰을 해보고 싶으니 허
락해 주십시오."
노인은 희멀게진 눈동자를 돌려 강옥봉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는 준수하면서도 탈속한 듯한 강옥봉의 용모에 내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눈빛이 아주 맑으면서도 기이한 신기가 담겨 있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보아하니 이 소년의 내공은 이미 극고의 경지에 이른 게 분명
하구나. 대체 이 소년이 누구이기에 아직 약관도 안 된 나이에 내공
이 화경에까지 접어들었단 말인가?'
그는 내심 놀라움을 감추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노부의 나이는 이미 구십에 가까웠소. 당장 죽는다 해도 아무 여한
이 없는 나이요. 하지만 소협의 호의를 저버릴 수가 없구려. 자, 노
부의 오른쪽 어깨 뒤쪽을 살펴보시오."
그제서야 강옥봉은 노인이 왼쪽으로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마 똑바로 눕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강옥봉은 노인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오른쪽 어깨 부분의 옷을 찢었
다. 오른쪽 어깨 뒤쪽 부분이 자색으로 변한 채 퉁퉁 부어 있
었다.
"노인장께서는 극독이 묻은 암기에 맞으셨군요."
"그렇소.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하고 나중에야 알았는데 이미 때가 늦
은 것 같소."
"이런 상처는 약물로도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살을 도려
내어 수술을 가할 수도 없고…… 원래 독은 금시 피부로 스며들어 누
구든지 중독되면 곧 목숨을 잃게 마련입니다. 다행히 노인장께서는
내공이 심후하여 아직 목숨을 보존하고 계신 겁니다."
이때 뒤에 서 있던 진호가 무뚝뚝하게 한마디 툭 내쏘았다.
"그런 말은 잔소리에 지나지 않소."
강옥봉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돌아다보았다.
진호는 강옥봉의 칼날 같은 시선을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
다. 그제서야 그는 강옥봉이 보기와는 달리 내공이 절정
에 달한 고수임을 깨닫고 안색이 변했다.
다시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린 강옥봉은 아주 신속한 동작으로 노인
의 오른쪽 어깨 부근에 산재해 있는 십여 군데의 혈도를 찍었다.
그 솜씨가 어찌나 빠르고 정확했는지 보고 있던 진호는 자신도 모르
게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강옥봉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진 대협, 수고스럽겠지만 뗏목을 강 중앙으로 끌고 가십시오. 불초
가 치료를 할 때 방해를 받으면 큰 사고가 발생하게 되니 말입니다."
진호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띄엄띄엄 말했다.
"소협은…… 주인을 구할 자신이 있소?"
강옥봉의 음성은 담담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보는 도리밖에 다른 방도는 없습
니다. 빨리 치료를 받을수록 목숨을 구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는 거
지요. 진 대협께서 정말 노인장의 목숨을 구할 생각이 있다면 어서
제말을 따라 주십시오."
진호는 급히 천막 밖으로 뛰쳐 나갔다.
하나 못내 불안한지 몇 번이고 천막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강옥봉은 진호가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조
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의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알 수 있었
기 때문이다.
강옥봉은 자신의 오른손을 노인의 명문혈에 갖다 붙이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물결이 세차게 흐르는 소리와 함께 핏목은 물결을 따라 흘러 내려갔
다. 진호는 짓목을 조종하면서도 수시로 천막 안을 들여다보떠 강옥
봉의 일거일동을 관찰했다.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 무렵.
"으음……"
갑자기 노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면서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진호는 신음 소리에 깜짝 놀라 천막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하나 노인
의 얼굴에 차츰 혈기가 감도는 것을 보고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다시 반 시진 정도 흐르자 노인이 갑자기 생기에 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호, 어서 나가서 깨끗한 수건 몇 개를 준비해 가지고 오너라. 이
상처에서 독수가 흘러나올 것이니 미리 준비해 두었던 수건으
로 닦아 내거라."
진호는 그의 음성이 힘찬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곧 진호는 수건 몇 개를 가지고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와 묵묵히 노
인의 상처를 주시했다.
이내 상처에서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노란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
다.
진호는 급히 다가가서 흘러나오는 노란 물을 수건으로 연신 닦아 냈
다. 한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퉁퉁 부어 올랐던 노인의 상처가
모두 가라앉고 자색으로 변해 있던 살갗이 차차 원상으로 회복해 갔
다.
그제서야 강옥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노인의 명문혈에 바싹 붙였던
손바닥을 떼었다.
이어 품속에서 조그마한 단도를 꺼냈다. 싸늘한 광채가 번뜩이는 날
카로운 단도였다. 강옥봉은 날카로운 단도의 끝 부분을 상처에 갖다
대더니 요령있게 살금살금 움직여 상처를 도려 냈다.
노인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엄습해 왔지만 꾹 참고 어금니
를 악물었다.
도려 낸 피 묻은 살덩이에는 실낱같이 가느다란 세 개의 독침이 박혀
있었다.
독침의 끝에는 마치 낚싯바늘 같은 갈고리가 달려 있어 한번 박히면
도저히 빠지지 않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독침 자체도 거무튀튀한 광
채를 띠고 있어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야말로 칠대금용암기 중 하나인 흑갈자인 것이다
강옥봉은 흑갈자를 살덩이에서 헤쳐 집어 내며 길게 탄식을 했다.
"어떤 자의 짓인지는 모르지만 흑갈자를 세 개씩이나 쏘아 보내다니,
실로 악독한 놈이군요."
노인은 감격에 찬 시선으로 강옥봉을 응시했다.
"소협, 이 은혜를……"
강옥봉은 급히 노인의 말을 가로챘다.
"노인장께선 지금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다시 품속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작은 약병에는 이상하게 생긴 고약이 들어 있었는데 강옥봉은 가운데
손가락에 고약을 찍어 노인의 상처에 발라 주었다.
진호는 코끝에 야릇한 향기가 맴도는 것을 느끼고 혼자 중얼거렸다.
"실로 좋은 약인 모양이구나."
강옥봉은 진호를 힐끔 바라보더니 빙긋 웃으며 다시 품속에서 알약
한 개를 꺼내 노인에게 복용시켰다.
"노인장, 편히 쉬도록 하십시오. 삼 일 후에는 자유로이 행동할 수가
있을 겁니다."
이때 돌연 천막 밖에서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누남광! 목숨을 내놓아라!"
진호는 깜짝 놀라 번개같이 밖으로 뛰쳐 나갔다.
강옥봉은 강적이 나타났음을 직감하고 뒤따라 밖으로 나갔다.
한 척의 조그만 배가 옆쪽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뱃머리에는 세 명의 금의경장 차림에 눈에서 홍악한 살기가 폭사되어
나오는 사나이들이 우뚝 서 있었다. 조그만 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뗏목가까이까지 다가왔다.
세 명의 경장차림의 사나이들은사뿐히 뗏목위로 뛰어 올라왔다. 그들
의 신법이 영활한 것으로 보아 내외공을 겸비한 고수들임이 분명했
다.
진호는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채 불문곡직하고 그들에게 덤벼들려 했
다.
그때 강옥봉이 재빨리 그를 제지했다.
"잠깐! 손을 쓰지 마시오."
이어 그는 세 명의 경장대한들을 바라보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벌건 백주 대낮에 도적들이 나타나다니 실로 너무도 당돌한
일이구려,"
세 명의 경장 차림의 장한 중에서 얼굴이 검은 사나이가 눈을 부라리
며 외쳤다.
"이 애송이 녀석아.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우리들이 어째서 도적이
란 말이냐?"
강옥봉은 태연 자약하게 웃었다.
"물건을 강탈하려고 온 도적이 아니라면 불초를 노리고 온 것이 틀림
없구려? 그런데 불초는 세 분과 언제 어디서 원한을 맺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구려,"
얼굴이 검은 사나이는 음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대꾸했
다.
"네놈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우리는 이 뗏목의 주인을 찾으
러 온 것이다."
강옥봉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불초가 바로 이 뗏목의 주인이오."
이 말에 세 명의 장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검은 사나이는 내심 분노가 솟구쳐 올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
지 않고 싸늘하게 웃었다.
"흐흐…… 우리는 하삭삼귀라 불리는 어른들이시다. 네가
의협심을 발휘해 나서려는 모양인데, 원래 무림의 일이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법이니 너는 괜히 쓸데없는 시비에 끼여들지 말고 냉큼 꺼
져라!"
강옥봉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귀하의 말이 납득이 가지 않는구려. 불초는 이제 막 강호
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기 때문에 무림인과는 전혀 교분이 없소. 그
러나 불초는 불의를 보고 그냥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오."
동시에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꾸아앙!
순간, 무서운 기류의 광풍이 일어나 조그만 배에 남아 있는 한 사나
이를 향해 매섭게 휘몰아쳐 나가는 것이 아닌가?
획!
사나이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그대로 물속에
풍덩 빠져 버렸다. 물속에 빠진 사나이는 수면 위로 두어 번
솟아오르더니 끝내 물속에 빠져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조종할 사람
을 잃게된 조그만 배는 물결을 따라 잠시 밀려가더니 소용돌이에 휩
싸여 서서히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제야 세 명의 장한은 눈앞의 준수한 미소년이 무서운 무공을 지닌
절세고수임을 깨달았다.
얼굴이 검은 장한은 섬뜩함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우리는 누남광이라는 친구를 만나러 온 것일 뿐, 너와는
원한을 맺은 적이 없다. 그런데 네가 끝내 우리와 아무런 이유도 없
이 싸우려 한다면 우리도 목숨을 걸고 사생결단을 내겠다."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기꺼이 상대해 주겠소. 모르긴 해도, 아마 당신들 세 사람
중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요."
이때 얼굴이 검은 장한의 옆에 서 있던, 머리가 노란 사나이가 분노
를 참지 못하고 강도를 뽑아 들었다.
창!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강도를 쁩아 든 노란 머리의 사나이는 번개와
같이 강도를 휘두르며 강옥봉을 향해 무작정 짓쳐 들어갔다. 강옥봉
은 원래 천하절세의 천애도를 연성한 데다 우연히 노승으
로부터 태극흔원신공을 전수받아 생사현관이 타통된 후로는 무공에
새로운 눈을 떠서 능히 강호를 오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사나이의 어설픈 공격을 두려워할 리가 없었다.
"흥!"
강옥봉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허리를 살짝 굽혀 옆으로 피하면
서 전광석화와 같이 빠른 동작으로 상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상대의 손목을 잡기가 무섭게 강옥봉은 손아귀에 힘을 가하면서 비틀
었다.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나이는 돼지 멱따는 비명을 토하며 몸
을 축 늘어뜨렸다.
강옥봉은 귀찮다는 듯이 움켜잡았던 상대의 손목을 놓으며 아랫배를
발길로 걷어찼다.
쾅!
"크악!"
처절하게 마지막 비명을 지른 사나이는 그대로 강물에 풍덩 빠졌다.
삽시간에 벌어진 광경에 나머지 두 사나이는 질겁을 했는지 몸을 부
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미 동료를 잃은 두 사나이의 눈에서 원한의
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얍!"
"죽어라 이놈!"
그들은 마치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양쪽에서 성난사자처럼 일제히 덮
쳐 왔다. 강옥봉을 향해 덮쳐 가는 그들의 모습으로 보아 자신들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이었다.
스슷!
강옥봉은 슬쩍 두 걸음 옆으로 비켜 섰다. 그러자 두 사나이의 공세
는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그 순간 강옥봉은 벽력과 같이 쌍
장을 교차시켰다.
와릉!
노도와 같은 경력이 목표를 잃고 허둥대는 두 사나이를 횝쓸어 버렸
다.
"크악!"
"케에엑!"
처절한 두 마디의 비명과 함께 두 사나이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허공
으로 높이 떠오르더니 강물로 떨어졌다. 두 사나이가 떨어진 강물에
는 붉은 피가 번지기는 했지만 끝내 수면 위로 시체가 떠오르지는 않
았다.
바로 이때, 돌연 남쪽에서 아까 나타났던 배와 흡사하게 생긴 조그만
배가 마치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무서운 속도로 미끄러져 오고 있
었다.
뱃머리에는 청색 장포를 입고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한동안 청색 장포를 입은 노인을 바라보고 있던 강옥봉은 진호를 힐
끔 돌아보았다.
웬일인지 진호의 안색은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 겁을 먹은 탓인지 아
니면 분노에 차 있는 탓인지 몸마저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옥봉이 의아함을 느끼고 그를 부르려 할 때,
"우우--!"
갑자기 우렁찬 장소성이 고막을 찢는 듯하더니 한 줄기 인영이 유성
처럼 뗏목 위로 가볍게 날아왔다.
바로 청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었다.
청포노인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강옥봉을 응시하다가 분노에 찬 음성
을 토해 냈다.
"노부의 수하들을 모두 강물에 처박은 수법을 보아하니 실로 악랄하
구나!"
강옥봉은 침중한 음성으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불초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괜히 불초에게 시비를
걸며 먼저 악독한 수법으로 공격을 가해 왔소. 불초는 정당한 방위를
했을 뿐인데 귀하는 어찌 불초를 책망하려 하시오?"
청포노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노부는 네가 배교의 문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너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시비에 끼여드는 거
냐?"
배교라는 말에 강옥봉은 움찔 놀랐다.
배교는 강호상에서도 극히 신비한 문파인지라 견문이 얕은 강옥봉도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배교는 극히 기이한 대법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배교대법
은 신묘하고도 기이하기 짝이 없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고수
라 할지라도 막기가 어려웠다. 배교의 문하는 비록 그리 많다
고 할 수 없지만, 그들의 배교대법이 워낙 현묘한지라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강옥봉이 순간적으로 멈칫거리자 청포노인은 더욱 기세 등등하여 진
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놈은 배교의 수하로서 누남광의 행방을 알고 있다. 만약 노부의
추측이 틀림없다면 누남광은 필시 저 천막 속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는 돌연 진호를 노려보며 외쳤다.
"진호! 어서 누남광을 내놓거라!"
진호는 마치 석상처럼 우뚝 서 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본 청포노인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배교의 엄격한 규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진호가 자신의 추상
과 같은 명을 따르려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강옥봉은 이미 마음을 가라앉히고 빙그레 웃었다.
"노인장의 말대로 진호가 배교의 제자라면 당신은 배교의 교주
라도 된단 말이오?"
청포노인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너는 노부가 누구인지 아느냐?"
"아까도 말했지만 불초는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지 얼마 되지 않기 때
문에 친분이 있는 무림인은 한 사람도 없소. 마찬가지로 당신이 아무
리 이름이 있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전혀 알지 못하
오."
청포노인의 안색이 철갑을 두른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녕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로군. 누남광은 분명 천
막속에 있으니 너는 방해하지 말고 어서 물러나거라. 만약 네가 끝내
노부의 일을 방해하고 나선다면 곧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강옥봉도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불초가 충고하겠소. 지금도 때가 늦지 않았으니 어서 돌아가시오."
"흥!"
냉랭하게 코웃음을 친 청포노인은 강옥봉의 옆을 스치고 천막 쪽으로
다가갔다.
강옥봉은 신속하게 몸을 돌리면서 쌍장을 휘둘렀다.
쿠아앙!
굉음과 함께 엄청난 장력이 청포노인을 향해 휘몰아쳤다.
그 일장을 보자 청포노인은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강호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으므로 단 일 장에 상대의 실력을
능히 간파할 수가 있었다. 단 일 장인데 자신의 일곱 군데 요혈이 압
박을 당하게 되자 청포노인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이 섬뜩함을 느긴 청포노인은 신경질적으로 쌍장을 휘저으며 옆
으로 살짝 비켜섰다.
쾅!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경력에 유도되어 강옥봉이 날린 장력은 애꿎
은 강물만 강타하고 물보라를 일으켰다. 놀라운 이화접목
의 수법이었다.
하나 청포노인은 강옥봉의 장력을 완전히 소화해 내지 못하고 자신의
몸이 은은하게 진동됨을 느끼고 크게 경악했다.
'이놈은 대체 누구의 제자일까? 아직 나이도 어린 놈의 공력이 나를
능가할 정도라니…… 만약 이놈이 누남광의 동조라면 이제까지의 계
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겠구나.'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굴린 청포노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누남광은 선인이 아니니 너는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다. 노부는 악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천릿길을 멀다 않고 여
기까지 쫓아왔는데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다. 이제부터 노부가 만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네게 구경시켜 줄 테니 구경하고 난 다음
에 순순히 물러가도록 해라."
말을 마친 청포노인은 품속에서 대나무 조각 한 개를 꺼냈다.
강옥봉은 청포노인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몰라 얼떨떨했다.
청포노인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노부가 타고 온 배를 보았느냐?"
그제서야 강옥봉은 청포노인이 타고 온 배를 자세히 보았다.
배에는 확실히 조종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커다란 풍랑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뗏목에 바싹 붙어 있었다. 시종일관 뗏목에 붙어서 떨어지
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강옥봉이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을 때 청포노인은 조그만 대나무 조
각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가했다.
순간,
우두둑!
대나무는 십여 개의 토막으로 부서졌다.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뗏목에 바싹 붙어 있던 조그만 배가
산산조각이 되어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강옥봉은 단번에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배교대법임을 알
고 가슴이 섬뜩했다.
그는 청포노인이 배교 내에서도 수뇌급 인물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암암리에 진력을 돋우었다.
하나 안색은 오히려 더욱 천연덕스러웠고 입가에는 미소마저 감돌고
있었다.
"방금 노인장이 과시한 그 수법은 비록 절묘하기는 하지만 아직 신
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소. 저기를 보시오. 배가 파손되기는 했
지만 중요한 부분은 조금도 파손되지 않았소."
그의 음성과 표정이 너무나 태연한지라 경험이 풍부하고 약삭빠른 청
포노인도 깜빡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청포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눈길을 돌렸다.
강옥봉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번개보다 빨리 천룡보도를 뽑아 휘
둘러댔다.
청포노인은 방금 자신이 과시한 수법으로 인해 필시 상대가 겁을 집
어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녕 커다란 착
각이었다. 강옥봉은 오히려 상대가 강호에서 경험이 풍부하고 또 노
련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기회를 틈타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파파파팟!
빛살 같은 도기가 허공을 가득 수놓았다.
청포노인은 사색이 된 채 허둥지둥 상체를 숙이며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크윽!"
청포노인은 왼팔이 싹둑 잘려진 채 피를 뿌리며 비틀거렸다.
청포노인의 얼굴이 경악과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순간,
쇄액!
강옥봉은 그림자처럼 다가가며 천룡보도를 섬전같이 내뻗었다.
켁!
천룡보도는 한치의 착오도 없이 청포노인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
어 놓았다.
"억!"
청포노인은 헛바람을 출이마시는 듯한 음향을 토해 내며 눈을 부릅떴
다. 그의 가슴에는 사발만한 구멍이 뚫려 검붉은 선혈을 마구 토해
내고 있었다.
청포노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이 가득 찬 눈으로 강옥봉
과 그의 손에 들린 천룡보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까지 무림에서 이토록 빠르고 무서운 도법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었다. 강옥봉의 천애도법은 그의 생사현관이 타통됨으
로 해서 본연의 위력을 발휘하여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
다.
"이…… 이렇게 빠르고 절묘할 수가…… 너는 혹시 무영신룡단혼도가
아니냐?"
강옥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포노인은 강옥봉의 준수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탄식을 토했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욱 어리군. 그리고 더욱 무섭고…… 나는
원래 꾀를 많이 썼기 때문에 끝내 내 스스로 무덤을 판 모양이다. 이
제 후회한들 때는 늦었으니……"
청포노인은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검붉은 선혈을 울컥 토해 내더니
쿵! 하고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뗏목 위를 붉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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