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봉산 아무나 가나?
동료 최O석 형이 느닷없이 말을 건네왔다.
"점봉산이나 한번 가볼까?" 속으로 생각했다.
'이 형이 드디어 산달(?)이 다 되었나…….' ㅎㅎ
본인은 쉬는 날이면 혼자 자가용을 몰고 새벽 2~3시에 출발해 전국을 유유자적 누비는 낭만 여행객이라지만,
몸무게 90kg이 넘는 거구가 도전하기에 점봉산은 그리 만만한 동네가 아니다.
하기야, 84kg에서 여름 내내 풀 깎으며 80kg까지 내려온 나와도 도찐개찐이기는 하다.
2021년, 산림과에서 함께 근무했던 이O청 씨가 생각났다. 고대산만 300번 넘게 오른 '찐 산꾼'이다.
그가 점봉산에 가고 싶다고 하기에 나도 흔쾌히 OK!
이O청 씨 차량으로 새벽같이 오색에 도착해 점봉산을 올랐다.
오색 → 점봉산 → 망대암산 → 십이담골 → 주전골 → 오색.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내려왔던 산행이다.
최O석 씨에게 그때 다녀온 이야기를 살짝 전했더니, 다짜고짜 물어본다.
"야, 인터넷으로 예약하면 하루에 200명씩 들어간다는데 왜 굳이 오색으로 가?"
"거기는 점봉산 정상이 아니라 곰배령이에요."
"곰배령이 점봉산 아니야?"
"점봉산 자락에 있는 곰배령하고 점봉산 정상은 다르죠."
"그럼 정상은 왜 못 가게 하는 거야?"
이때다 싶었다.
예전에 캐이님에게 배운 산림생태학 지식을 총동원해 대대적인 '겁주기 작업'에 들어갔다.
"숲도 오랜 세월에 걸쳐 변화하잖아요. 햇빛을 좋아하는 소나무가 그늘에 강한 활엽수에 자리를 내주기도 하고요.
이렇게 숲이 변화하는 과정을 '천이'라고 하는데, 그 마지막에 비교적 안정된 상태에 이른 숲을 '극상림'이라고 해요.
한계령 남쪽 점봉산 일원이 바로 그런 극상림을 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시림이에요.
희귀식물과 다양한 산림유전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입산 통제도 엄격해요."
광합성을 위한 햇빛 경쟁에서 시작해 소나무와 활엽수의 세력 다툼, 산림 천이와 극상림에 이르기까지……
최O석씨는 그저 점봉산 한번 가보자고 했을 뿐인데, 졸지에 산림생태학 강의를 듣는 신세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쐐기까지 박았다.
"점봉산 정상은 아무 때나 올라가는 산이 아니에요. 우리 죽을 때까지 점봉산 정상은 못 가요!" ㅎㅎ
그렇게 한바탕 강연을 퍼붓고 나니 어느덧 점심 12시, 퇴근할 무렵이었다.
"그래서, 점봉산 갈 거예요?" 그러자 최O석 씨 입이 쏙 들어가 버린다.
가만히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겁을 줬나 싶어 살짝 미안해졌다.
사실, 당시 점봉산 산행은 나부터 반성해야 할 사연이 있는 산이다.
2021년 1월, 평소 준비 부족한 덜렁이답게 아이젠 하나 챙기지 않고 점봉산에 올랐다가 십이담골 빙판길에서 제대로 혼쭐이 났다.
내려가는 길이 꽁꽁 얼어붙어 한 발짝 떼기도 어려웠다.
미끄러지고, 버벅대고, 엉거주춤 엉덩방아까지 찧을 판이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O청 씨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아이젠 안 가져오셨어요?"
다행히 준비성이 철저한 이O청 씨가 여분의 아이젠을 챙겨온 덕분에 빌려 신고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그때 여분의 아이젠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유비무환과 담쌓고 살아온 나 같은 덜렁이는 산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게 문제다.
예전 몸 가벼웠던 시절만 생각하고, 빈 배낭에 단벌 신사 차림으로 산에 오르려는 유형이다.
수십 년 산을 다녔다고 하면서도 겨울 산행에 아이젠 하나 챙기지 않았으니,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최O석 씨는 어떨까?
이O청 씨처럼 여분의 장비를 챙겨줄 사람도 없고, 90kg 넘는 거구가 오색에서 점봉산까지 왕복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올라갈 때야 어떻게든 올라간다 치자. 문제는 내려올 때다.
산행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에게 자칫 체력 바닥나는 개고생을 시키는 건 아닐까 걱정이다.
그렇다고 점봉산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원을 매몰차게 꺾을 수도 없고……
이번 추석 연휴, 남는 게 시간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이 생각 저 생각이 다 든다.
최O석 씨 델꼬 가서 세월아 네월아 올라 원풀이라도 해줄까?
아니지, 자칫 다리라도 풀리면 90kg 넘는 형을 내가 업고 내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혼자 가지는 않을 테고, 혼자 점봉산에 갈 능력도 안 되니 결국 내가 동행해야 할 판인데, 어쩔까?
가자니 걱정, 말리자니 미안하고……
점봉산 한번 가보자는 말 한마디에 아침에 일어나 머릿속만 복잡해졌다.
정작 산에 가겠다고 한 사람은 입을 닫았는데, 가지도 않을 산을 놓고 나 혼자 아침부터 별별 궁리를 다 하고 있다.
이거야 원, 점봉산 산행도 시작하기 전에 내가 먼저 진이 빠지게 생겼다. ㅎㅎ
첫댓글 점봉산은 정말 국공 조심해야 하는 곳
겨울이라면 몰라도 추위가 없는 계절에는 2인 1조가 되어 정상까지 올라오더라구
십 수년 전 높산 캐이 등 2대의 차량 인원이 가는 고래골로 점봉산 정상 올라서 쉬고 있다가 덜컥,
곰배령 호랑이코빼기로 가려던 계획은 진동리로 내려오고 말았네
그리고 많은 일행들에게 전화해서 다들 뿔뿔이 흩어졌었지
고래골로 올라갔다가 정상에서 국공을 만나 일행들이 뿔뿔이 흩어졌던 사연을 들으니,
그때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까 싶네요.
'후일을 도모하자. 살아만 있어다오!' ㅎㅎ
예전에는 남설악 일대로 곰취도 제법 뜯으러 다녔지요.
십이담골 상류며 필례약수 쪽 계곡 상단도 온통 나물밭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점봉산 일대는 지역 자체가 다양한 식생의 보고가 아닌가 싶어요.
점봉산도 산꾼마다 자기 코드와 산행 스타일에 따라 접근하는 방향이 달라질 듯해요.
백두대간 마루금을 꼭 가야된다면 한계령에서 망대암산을 거쳐 점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생각할 테고,
남쪽으로는 단목령, 북암령을 거쳐 조침령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을 잇겠죠.
오색 방면의 옛 산길이나 서쪽 인제의 귀둔리, 진동리 골짜기를 좋아하는 산꾼도 있을 테고,
가칠봉과 작은점봉산, 곰배령 일대에서 나름의 산행 재미를 찾는 분들도 있을 테고요.
과거에는 대간길뿐 아니라 여러 골짜기와 능선을 통해 점봉산을 오르내렸지만,
지금은 정상으로 향하는 길 대부분이 출입 통제구역이니
옛날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다닐 수는 없는, 제도권 눈치를 봐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베이비부머들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무리하게 정상만 고집하기보다
각자의 체력과 산행 코드에 맞는 길을 찾아 즐기게 되니,
예전처럼 점봉산 정상을 향한 열정으로 찾아들던 산꾼들의 숫자도 점차 줄어들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