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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치수재악궁
낙양의 남쪽 이수가 분지로 흘러드는 곳에 이궐용문이 있다.
여기에는 북위의 효문제가 낙양에 천도한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석굴이 만들어졌다.
이귈용문은 동서로 나누어져 있는데 서산의 규모가 훨씬 컸다.
황하를 흐르는 이수가 이 지점에서 동서 양쪽의 암산에 의하여
급격히 좁아져서 급류가 흐르므로 용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경 무렵.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다만 들리는 것이라고는 용문의 급류가 세차게 흐르는 음향뿐이었다.
쿠쿠쿠쿠…… 쿠우우우웅……!
지축을 울리는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굽이치는 격랑은 천하의 무
엇이라도 집어삼킬 듯했다.
이때 돌연 짙은 어둠을 뚫고 나타난 한 명의 인영이 있었다.
인영은 머리에 풍모를 눌러쓰고 등뒤에는 보도를 맨 소년이었다.
소년은 마치 유령처럼 기이한 신법을 전개해 눈 덮인 용문을 올라갔
다. 물 찬 제비인 양 날렵한 그의 신법은 절묘하다 못해 아름답기까
지 했다.
소년은 눈 깜박할 새 용문의 석굴 앞에 당도했다.
하나 수천 수백 개나 뚫린 석굴을 보자 소년은 난감한 듯 걸음을 멈
추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용문의 석굴은 대소 천여 개에 달하는 엄청
난 숫자였던 것이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강 소제인가? 이쪽으로 오게."
소년이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석굴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오며 소
곤거리는 것이 아닌가?
소년, 강옥봉은 그 음성이 귀에 익음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인영이 서
있는 석굴로 날아갔다.
석굴 앞에 서 있는 인영은 체구가 건장하고 눈쌥이 짙은 흑의경장인
이었다.
강옥봉은 반색을 하고 그에게 달려갔다.
"여 대협! 오래간만입니다."
여풍운은 빙그레 웃으며 반갑게 그의 손을 잡았다.
"과연 왔군. 우선 안으로 들어가세."
그는 강옥봉의 손을 잡고 석굴 안으로 들어갔다.
석굴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오륙 장쯤 걸어 들어가자 하나의 석실이
나왔다.
석실의 한 쪽에는 유등이 켜져 있었으며 다른 한 쪽에는
침상과 탁자, 의자 등 가구가 있었다. 뒤에는 부엌도 있었는데 마른
고기들이 많이 매달려 있었다.
강옥봉은 신기해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용문석굴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한데 임 대협은 어디 가
셨습니까?"
여풍운은 탁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대형은 알아볼 일이 있어 잠깐 나가셨네. 곧 돌아오실 걸세."
두 사람은 탁자에 마주앉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풍운은 강옥봉의 모습과 그가 등뒤에 매고 있는 천룡보도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미소 지었다.
"이제는 아주 어엿한 무림인 냄새가 나는군."
강옥봉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도 멀었습니다."
"하하…… 그게 무슨 소리인가? 몇 달 안 본사이에 자네가 무영신룡
단혼도라는 어마어마한 명호를 가진 절세고수가 되었다는 걸 내가 모
르는 줄 아나?"
강옥봉은 계면쩍은 웃음을 떠올렸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 일부러 이름도 밝히지 않고 얼굴도 가렸는데
……"
"하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가 어찌 그 일을 모를 수 있겠나?
나는 강호에 기이한 도법을 지닌 소년영웅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즉시 그 소년영웅이 자네임을 짐작했지. 과연 우리의 예상대로 자네
는 그 족자의 비밀을 풀고 절세의 무공을 익혔군그래."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두 분의 덕분입니다."
이어 그는 자신이 어떻게 천애무아도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를 소상
하게 밝혔다.
여풍운은 연신 감탄성을 발하며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걸 두고 보물은 인연이 있는 사람만 얻을수 있다는 거로
군. 나는 몇 달 동안이나 그것을 곁에 두고도 아무것도 알아 내지 못
했는데 자네는 불과 보름 사이에 그 안에서 절세의 도법을 찾아 내다
니…… 역시 자네의 재지는 내가 본 대로 절세무쌍일세."
"이 도법은 원래 대협의 물건이니 제가 대협께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풍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 도법이 그토록 신비한 방법으로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비밀을 푼 자만이 도법을 익힐 수 있다
는 선인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 분명하네. 비록 운이 좋아 내
가 그것을 얻었다 해도 익힌 사람은 자네이니 자네가 곧 그것의 주인
일세."
강옥봉은 내심 여풍운의 호쾌한 태도에 크게 감읍했다.
절세의 무공비급을 남에게 선뜻 내준다는 것은 웬만한 결단력을 가지
지 않고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강옥봉은 감사와 진정이 충만한 눈으로 여풍운을 바라보았다.
여풍운은 그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자네가 말한 도법의 위력으로 보아 그것은 처음의 짐작대로 우내칠
대무학의 하나인 천애도임이 틀림없는 것 같네. 만약 그렇다면 자네
에게는 무림의 흉인들을 제거하고 정의를 뿌리내릴 막중한 임
무가 주어진 셈이네. 이 점을 잊지 말고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
도록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때 돌연 밖에서 옷자락 스치는 경미한 음향이 들려 왔다.
강옥봉은 흠칫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나 여풍운은 태연한 안색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대형께서 오신 모양이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과연 두 사람이 불쑥 석실 안으로 들어왔
다.
앞에 선 사람은 얼굴에 검상이 있고 등에는 금창을 맨 금창수
임표였다.
"임 대협!"
임표를 본 강옥봉은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달려가 포권을 했다.
임표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 동안 자네의 활약상은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네. 과연 우리의
기대대로 훌릉하게 커주었군."
"모두 두 분 대협의 덕분입니다."
"하하……"
이때 임표와 함께 석실로 들어온 인영이 강옥봉을 보며 의미 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어떻소, 공자? 내 신복이 틀림없지 않소?"
강옥봉이 놀라 쳐다보니 그 인물은 다름 아닌 금화루에 나타났던 청
삼문사가 아닌가!
청삼문사는 여전히 오른손에 책상자를 든 채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귀하였군요?"
강옥봉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여풍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하하…… 인사하게. 이분은 강호무림에서 제일지자로 손
꼽히는 치수재 악궁, 악 대협일세."
"아! 이분이 바로……"
강옥봉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삼문사를 바라보았다.
치수재 악궁은 행적이 신비하고 재주가 많은 기인 중의 기인이
었다.
그는 그야말로 만사무불통지라 할 만큼 다방면에 걸쳐
박학 다식하여 무림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청하
려 한번만이라도 만나기를 소원하는 인물이었다.
하나 그의 성격이 워낙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고 남한테 얽매이는 것
을 싫어하는지라 그를 만나기란 거의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처럼 힘
이 들었다.
"나와 악궁은 막역한 사이지. 이번에 금화루에서 자네를 만나기로 했
을 때 마땅히 우리가 직접 나가야 했지만 우리는 이미 얼굴이 남들에
게 알려져 있고 뒤를 쫓는 무리들이 있어 할수 없이 악궁에게 자네를
만나달라고 부탁을 한 걸세."
여풍운의 말을 듣고서야 강옥봉은 악궁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악궁은 세 가닥으로 꼰 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강옥봉을 향해 물었
다.
"공자께선 그 사람을 만나 보았소?"
여풍운과 임표는 때안닌 그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하나 총명한 강옥봉은 단번에 그가 묻고 있는 것이 조금 전에 누남광
을 만나라고 부탁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늦지 않게 당도하여 부탁을 들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자라는 말은 제게는 과분합니다. 그냥 소제라고 불러 주십시
오."
악궁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그렇다면 나도 여풍운처럼 자네를 강 소제라고 부르겠네.
누남광은 지금 어디 있는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이수강변에 정박하고 있습니다. 한데 악 대협께
서는 어떻게 누 노인이 중독당해 쫓기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까?"
악궁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여풍운이 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우리도 좀 알면 안 될까?"
악궁이 웃으며 여풍운과 임표에게 누남광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원래 나는 누남광과 약간의 친분이 있었지. 한데 얼마 전에 우연히
주루에서 탁천신수 진조영과 회의중년인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지."
강옥봉은 진조영이라는 말에 조금 움찔했다.
"성심장의 팔대빈객 중 하나인 그 진조영 말입니까?"
악궁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바로 그렇네. 한데 자네는 어떻게 진조영이 성심장의 팔대빈객 중
한 명임을 알고 있나? 나도 얼마 전에야 간신히 안 일인데……"
강옥봉은 일전에 운가장에 갔다가진조영을 만난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그제서야 악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어쨌든 호기심에서 나는 염치 불구하고 두 사람
의 말을 엿들었는데 그때 우연히 그들의 입에서 배교의 전대
교주였던 누남광이 칠대금용암기 중의 하나인 흑갈자를 맞은
채 그들에게 쫓기고 있음을 알게 되었네. 그래서 마침 여풍운에게서
자네가 의술이 매우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자네를 그곳으로 보낸 걸
세."
강옥봉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악 대협께선 혹시 진조영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그 회의중년인
의 얼굴을 기억하실 수 있으십니까?"
악궁은 이미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기억력 하나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지. 자네가 궁
금 하다면 알려주지. 그 회의중년인은 매부리코에 눈빛이 기이하게도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네. 그리고 입술이 얄팍해서 아주 잔인한 느
낌을 불러일으켰지. 그런데 진조영의 말을 들어 본즉 회의중년인은
보기차는 달리 나이가 이미 고희를 넘은 노인이고, 별호는 천
잔마사이고 이름은 육기라고 하더군."
강옥봉은 자신의 짐작대로 회의중년인이 육기임을 알고는 마음이 무
거워졌다.
"과연 그자였군요. 혹시 그자가 성심장 내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는지 아십니까?"
"진조영이 그자를 대하는 태도는 몹시 정중하면서도 예의바른 것이었
네. 물론 나이가 진조영보다 훨씬 많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자존심
강한 진조영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팔대빈객보다
는 조금 더 높은 지위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이것보다
더 자세한건 아직 모르겠네."
듣고 있던 여풍운이 불쑥 한마디를 내뱉었다.
"자네도 모르는 게 다 있군그래."
악궁은 껄껄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 나라고 항상 전지전능할 수 있겠나? 웬만한 강
호의 일이라면 제법 안다고 자부하겠는데 성심장은 워낙 갑작스럽게
등장한 문파라서 아직 그들의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지는 못하네. 하
지만 곧 알게 되겠지."
그의 말에는 묘한 뜻이 담겨 있었다.
여풍운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눈을 크게 떴다.
"자네의 말은 성심장 내에 자네의 측근이 숨어 있다는 뜻인가?"
악궁은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천기는 누설할 수 없는 법일세. 그렇게만 알고 있게."
여풍운은 괜한 걸 물어 봤다 싶어 입맛을 다셨다.
"제길……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괜히 신비스러운 척하지 말게."
악궁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때 여풍운이 갑자기 생각난 듯 급히 임표를 바라보았다.
"아참, 대형! 나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임표는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언제 그걸 물어 보나 기다리고 있었네. 마침내 옥정검
이 있는 곳을 알아 냈다네."
여풍운은 반색을 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옥정검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낙양에서 제일 큰 표국인 위원표국의 국주, 팔괘만승
도 범중립의 집에 손님으로 와 있는 하장청
이라는 청년이 가지고 있네."
"하장청? 그는 범중립과 무슨 관계랍니까?"
"숙질간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자세한 내막은 확실히 모르겠네. 우선
은 더 늦기 전에 그곳으로 가보세."
강옥봉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옥정검이 대체 무엇입니까?"
여풍운이 자신의 머리를 탁, 치며 싱겁게 웃었다.
"내 정신 좀 보게. 자네는 아직 그 일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지?"
"그 일이라뇨?"
"내가 천천히 얘기해 주지. 일전에 우리는 자네가 말한 대로 유령고
전에 적힌 지도를 따라 유령동부를 찾아갔다네."
여풍운은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을 이었다.
여풍운과 임표는 우선 의형제인 일양검 막철룡의 행방을 은밀히 수소
문했으나 도대체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강옥봉이 말한 대로 우선 유령동부를 찾기로 했
다.
한데 어떻게 알았는지 익호 사천홍을 비롯한 몇 명의 고수들이
그들의 뒤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사천홍과 고
수들은 모두 심장의 인물들이었다.
여풍운과 임표는 그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유령고전에 새겨진 대로 황
산으로 갔다. 하나 황산 근처에서 다시 그들에게 행적이 노출되어 다
시 쫓고 쫓기는 숨 가쁜 추격전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그들은 황산의 어느 이름 모를 계곡에서 유령동부로
추측되는 기이한동굴을 발견하개 되었다. 될 듯이 기뻐한 그들은 무
작정 그 동굴로 뛰어들었다.
하나 그들은 곧 대경 실색하고 말았다
동굴을 조금 들어가자 어디선가 기이한 음한강기가 불어와
그들의 몸을 꽁꽁 얼려 놓는 것이 아닌가? 설상가상으로 동굴 속에서
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독각괴수가 달려나와 그들을 잡아먹
으려 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기절 초풍하여 간이 콩알만해졌다. 그들은 젖 먹
던 힘까지 짜내 간신히 음한강기를 물리치고 다시 동부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들의 동작이 조금만늦었어도그들은 독각괴수의 밥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나중에 악궁에게 들어서 안 사실이지만 우리가 쏘였던 음한강기는
바로 광한쇄골풍이라는 것으로 지하의 깊숙한 곳에서 뻗
어 나오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고 하네."
여풍운은 그 당시를 생각하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그 독각괴수는 전설로만 알려진 독각응룡으로 전
신이 금철불입의 강신으로 이루어진 데다 입으로는
불을 내뿜어 처치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마물일세."
강옥봉은 여풍운의 말에 거듭되는 놀라움을 느꼈다.
"그렇다면 유령동부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사지란 말입니
까?"
"우리도 한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려 했지. 한데 악궁의 말이
몇 가지 기보를 구할 수만 있다면 광한쇄골풍과 독각응룡을 물
리치고 유령동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세. 그래서 우리는 다시 희망
을 가지고 그 기보들을 구하기로 했지."
"아! 그렇다면 옥정검이 바로……"
"그렇네. 옥정검이야말로 독각응룡의 입에서 뿜어 나오는 화기
를 제어하고 도검불침의 강신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신병일
세."
강옥봉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자신이 등뒤에 매고 있던 천룡
보도를 풀어 내보였다.
"제가 우연히 입수한 이 칼도 상당히 예리한데 이것으로 독각응룡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천룡보도를 향했다.
악궁은 천룡보도를 유싱히 살피다가 감탄성을 발했다.
"정말 훌륭한 보도로군. 이 칼이면 충분히 독각응룡의 강신을 뚫을
수 있네. 하지만 독각응룡이 뿜어 내는 지독한 화기를 피하기 위해서
는 아무래도 옥정검이 있어야 하네. 옥정검에서 흘러나오는 옥정지기
만이 독각응룡의 화기를 억제할 수 있지."
강옥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천룡보도를 등뒤에 매었다.
"독각응룡은 그렇다치고 그 광한쇄골풍은 또 어떻게 막습니까?"
"광한쇄골풍은 지하의 가장 아래에서 뿜어 나오는 극한지기
이기 때문에 아무리 공력이 높은 사람도 일 각 이상을 쏘이게 되
면 견딜 수가 없네. 하지만 한 가지 기보가 있다면 광한쇄골풍을 맞
고도 견딜수가 있지."
"그 기보가 무엇입니까?"
악궁은 의미 심장하게 말했다.
"바로 천양금환이라네."
강옥봉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것은 바로 운가장의 가보가 아닙니까?"
"그렇다네, 바로 회서방에서 노리고 있는 그 물건이지."
강옥봉은 운가장의 천양금환이 광한쇄골풍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을 듣
자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회서방에서도 천양금환의 그런 묘용을 알고 그것을
노리는 걸까요?"
악궁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럴 가능성도 있네. 그들이 그것을 노리는 시기가 너무 공교롭거
든."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그걸……"
"여풍운과 임 대협이 유령동부를 찾았다면 그들을 뒤쫓았던 사천홍
등도 찾지 말라는 법은 없네. 무림에 유령동부의 위치가 황산의 절영
곡이라고 알려진 것만 보아도 틀림없이 두 사람 외에 누군가가 유령
동부를 발견했을 걸세. 그렇다면 그들도 그 안에 광한쇄골풍이 불고
독각응룡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겠지. 아울러 그것들을 물리칠 방
법도 연구했을 테고……"
"아……!"
강옥봉은 악궁의 말에 내심 감탄을 발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안색이 변해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옥정검 또한 노리는 자들이 있겠근요?"
이 말을 듣자 여풍운과 임표의 안색 또한 크게 변했다.
"미처 그걸 깨닫지 못했군."
그들은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다. 더 늦기 전에 어서 손을 써야지……"
그때 악궁이 그들을 제지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소."
여풍운이 눈을 부라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다가 옥정검이 회서방이나 성심장의 인
물들에게 들어간다면 우리는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이 아닌
가?"
하나 그가 서두를수록 악궁의 모습은 태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은 채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이미 회서방과 성심장의 인물들은 그
곳에 와 있을 거요."
"그렇다면 더욱더……"
"내 말을 들어 보시오. 물건은 하나인데 노리는 자들은 여럿이니 필
시 그들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있을 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 아니오?
회서방과 성심장은 하나같이 강호독패를 꿈꾸고 있는 거대
세력들이니 쉽사리 물러서지는 않을 게요."
그제야 악궁의 말뜻을 깨달은 여풍운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렇다면 자네의 말뜻은……"
"우리는 그저 느긋하니 앉아 그들의 싸움이나 구경하다가 그들 중 어
느 한 쪽이 승리했을 때 그들에게서 옥정검을 슬쩍하면 되는 거요."
여풍운은 감탄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자네의 머리는 놀랍군. 이제야 왜 사람들이 서로 자네를 끌어
가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지 알 것 같네."
"하하…… 치켜세우는 건 좋지만 공치사는 물건이 수중에 들어온 다
음에 해도 늦지 않소. 그보다 나는 강 소제에게 조용히 할말이 있는
데 두 분은 괜찮겠소?"
악궁의 말은 여풍운과 임표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는 뜻이었다.
여풍운과 임표는 모두 노련한 인물들인지라 단번에 그의 말뜻을 알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지 우리는 먼저 위원표국으로 가서 싸움 구경이나 하고 있을 테
니 두 사람은 천천히 오도록 하게. 하지만 너무 늦지는 말게."
악궁은 고개를 끄덕 였다.
"늦지 않게 당도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보다 두 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싸움에 끼여들거나 해서는 안 되오."
여풍운은 장난스럽게 히죽 웃었다.
"자네는 모르는 모양인데 원래 자신이 싸우는 것보다 남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게 훨씬 더 재미있는 법일세. 그런데 우리가 미쳤다고 위험
을 무릅쓰고 싸움에 끼여들겠나?"
"하하…… 어련하시겠소?"
여풍운과 임표 두 사람은 낄낄거리며 먼저 석실을 빠져 나갔다.
석실에 악궁과 둘만 남게 되자 강옥봉은 악궁을 향해 정중하게 물었
다.
"악 대협께서는 소제에게 달리 하교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악궁은 웃으며 탁자를 가리켰다.
"하하…… 우선 자리에 앉은 후 이야기를 하세."
강옥봉이 자리에 앉는 것을 기다려 악궁은 점잖게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를 따로 보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자네에게 한마디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일세."
"세이경청하겠습니다."
"하하…… 심각하게 생각할 건 없네. 내가 말하려는 건 자네가 비록
무공이 뛰어나고 재지가 탁월하지만 아직 강호의 경험이 일천하여 자
칫 남에게 암산을 당할지 모른다는 걸세. 무림이라는 곳이 원
체 흉험하고 귀계가 난무하는 곳인지라 무공만 가지고는 제대
로 활동할 수가 없는 법일세. 그래서 말인데……"
악궁은 품에서 얄팍한 책자를 한 권 꺼냈다.
"이것은 역용술에 대해 기록된 책자일세. 비록 절세의 무공
이 수록된 비급은 아니지만 익혀 두면 자네가 강호를 행도하는
데 있어 커다란 도움이 될 걸세."
강옥봉은 크게 기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악 대협. 이 은혜는 기필코 잊지 않겠습니다."
악궁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변변치 않은 걸세. 하지만 자네가 무림 정의를 위해 힘써 준다면 나
로서는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을 것이네."
강옥봉은 설레는 마음으로 책자를 받았다.
악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옥봉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이제 어서 가보세. 아마 모르긴 해도 여풍운이 우리를 기다리느
라 코가 한 자나 빠져 있을 테니까…… 하하……"
"하하하……"
강옥봉도 따라 웃으며 악궁과 함께 석실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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