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진국(발해)의 두 영웅 대중상과 대조영
1. 대조영의 부친 대중상의 후고구려 건국
조대기 왈
朝代記에 曰
개화 이십칠년 구월 이십일일 평양성 함락시
〈開化 二十七年 九月 二十一日에 平壤城이 陷落時에
진국장군 대중상 수서압록하
振國將軍 大仲象이 守西鴨綠河라가
문변 수솔중주험 노경개원
聞變하고 遂率衆走險하여 路經開原하니
문풍원종자 팔천인
聞風願從者가 八千人이라.
조대기라는 역사책
조대기에 왈. 조대기란 책은 여러번 나왔는데요. 발해가 망하고 저도 자꾸 입에 익이서 발해라고 하는데, 대진국이 망하고 대진국의 유민들이 고려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망명을 해 옵니다. 대진국의 태자인 대광현이 태자가 망명을 해올 정도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망명을 해오는데 그 사람들이 책을 가져오는데그 중 한권이 조대기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보면 이건 전부 중국 사람이 쓴거나 아니면 후세 우리나라에서 썼다. 그래도 중국사람이 쓴 역사서를 베껴놓을 뿐인데 대진국사람들이 그들의 의식을 가지고 쓴 책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일하다면 조대기가 아니겠느냐 발해의 유민이 망명을 해올 때 가져온 책이기 때문에 그들의 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입장에서 유일하게 쓴 책이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에 이런 조대기는 그런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화 27년9월21일에 개화는 보장제의 연호입니다. 보장제가 642년에 연개소문이 영류제를 죽이고서 반란을 일으켜가지고 보장제를 세우지 않습니까? 642년부터인데 즉위년부터를 1년으로 따져요 그러니까 668에서 642를 빼면 26년이 나오는데 그 해까지 치니까 플러스 1을 하면 27년이 되죠. 개화라는것은 고구려 마지막 임금 보장제의 현호입니다. 개화 27년 668년 음력 9월 21일 날 평양성에 함락시에 이건 해석할게 없죠? 당나라의 이적과 신라의 연합국에 의해서 평양성이 함락할 때 진국장군 대중상이 여기서 진국이라 되있지만 진국은 이것의 같이 쓰는 글자로 봐야합니다.
진국장군 대중상이 그런면 고구려의 성은 고씨인데 이분은 대씨 아닙니까? 대씨나 고씨나 그 당시에 성씨를 중시했는지 바꿔쓸 수 있는지 그것도 모르겠구요. 중자를 보면 둘째라는 개념이 있거든요. 우리가 공자가 중리다. 형님이 있었잖아요? 둘째를 중자라 쓰는데 그래서 이런데서 보장제의 둘째 아들이 아니겠느냐 추측을 해보는데 근거가 없습니다.
수서압록하라. 압록강 많이 나오죠. 북한과 중국의 국경 압록강만 생각하는데 요하의 서요하를 우리가 압록강이라 얘기합니다. 요하를 압록강이라 그랬어요. 그중에서도 동요하와 서요하가 만나서 심양을 거쳐서 발해만으로 흘러가거든요. 그 서요하가 서압록강입니다. 여기가 바로 고리땅이기 때문에 고구려 해모수 고향도 거기고 고구려 명칭이 거기서 시작되잖아요. 우리 고구려 본기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바로 고리땅입니다. 고리!
서압록하가 문변하고 평양성이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솔 중주험하여 드디어 무리를 거느리고 험난한 곳으로 도망을 가서 노경개원하니 길에서 개원땅을 지나니 그러니까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는겁니다. 저 서압록하에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오다 보면 심양위에 개원시가 있습니다. 동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개원시가 있는데 그게 바로 44대 궁을 단군께서 아사달이거든요. 중국지도를 보면 머리에 확들어오는데 개원땅을 지나니 문풍원종자 그런 문풍을 듣고서 대중상이라는 분이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무리를 거느리고서 지금 동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얘기를 듣고서 고구려 유민들이 소문을 듣고서 쫓기를 원하는 자가 8천인이었다. 우리가 환단고기 보면 동방목의 기운이 나오는데 첫째 환웅천왕께서 제세핵랑군 3천명을 거느리고 백두산에 천강을 하시잖아요. 단군성조께서 처음으로 시작할 때 8백명 그 다음에 8천명 전부 동방 목기운을 가지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10:27
내동귀. 그래서 그들과 함께 돌아가서 동족으로 가서 지동모산 동모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의 돈화시에 있습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가 대여섯시로 되어있는데 거기서 백두산에서 정북쪽으로 올라가면 돈화시가 있습니다. 돈화시에 동모산에 이르러가지고 거하고 자리를 잡고 견벽자보하여 성벽을 굳게 쌓고 스스로를 보전해서 칭국 후고구려오.. 후고구려라고 칭했습니다. 668년 9월 21일날 평양성은 함락했지만 대중상이 무리를 이끌고 돈화에 가서 후고구려라고 그 해에 일컬었습니다. 현대 국사에서는 전혀 언급도 못하는 내용이죠.
그리고 건원 중광이라 연호를 세웠습니다. 연호를 세워 중광이라 그랬습니다. 고구려의 광명을 거듭 발한다. 후고구려죠. 고구려를 계승해서 고구려의 영광을 거듭 빛낸다. 이런 뜻이예요. 전격소도에 경문을 전해서 이르는 바에 경문을 보낼 거 아닙니까? 고구려의 영토가 넓으니까 각 고을고을마다 당나라 세력이 미치지 못하잖습니까. 경문을 전해서 이르는 바에 원근제성이 가깝고 먼 모든 성들이 귀부자 후 고구려에 귀순해서 붙는 자가 중이라 아주 많아지게 되었다.
유이복구토로 위기임이라가. 오직 복구토 이게 순 우리말로 다물이죠. 옛 영토를 회복한다. 옛 영토를 회복한다는 것으로써 위기임 자기 책임으로 삼다가 중광삼십이년이면 669년이 됩니다. 668더하기 32를 해서 거기다 플러스 2를 해야되요. 당해년부터 치기 때문에 669년 5월에 붕하니 천자가 돌아가시는 것을 붕이라 그러죠. 산이 무너진다는 의미에서 붕하시니 묘호왈세조요 시호왈진국열황제라. 묘호가 있고 시호가 있는데요. 우리가 조선시대에 태조이성계다, 정종이다, 태종이다, 세종이다, 그걸 묘호라고 합니다. 묘호란 것은 종묘에다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잖아요. 묘는 사당묘자 종묘묘자니까 종묘에 제사지낼 때 붙여놓는 묘호예요. 그러니까 태종태세문단세 전무 묘호예요. 그거 말고 무슨 대왕, 무슨 대왕 이런 것이 있는데 우리는 그걸 잘 안배워서 모르죠. 그걸 시호라고 합니다. 시호는 진국열황제라 그랬구요. 묘호는 세조라고 했습니다.
출처 : 환단고기 대진국본기 중 일부 강독 (윤창렬 교수) 2005년 증산도 사상연구소
2. 대중상의 아들 대조영의 옛 고구려 영토 회복과 대진국 건설
내동귀이동 지동모산이거
乃同歸而東하여 至東麰山而據하고
견벽자보 칭국후고구려
堅壁自保하여 稱國後高句麗오
건원중광 전격소도 원근제성 귀부자중
建元重光이라 傳檄所到에 遠近諸城이 歸附者衆이라
유이복구토 위기임
惟以復舊土로 爲己任이라가
중광 삼십이년 오월 붕
重光 三十二年 五月에 崩하시니
묘호왈세조 시호왈진국열황제
廟號曰世祖오 諡號曰振國烈皇帝라〉
태자 조영 종부사
太子 祚榮이 從訃使하여
자영주계성 솔중지 즉제위
自營州薊城으로 率衆至하여 卽帝位하시고
축홀한성 천도 모군십만 위성대진
築忽汗城하여 遷都하고 募軍十萬하니 威聲大振이라
태자 조영이, 태자 대조영이 종부사하여 부사라는 것은 부고를 전하는 사신이죠. 부고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을 부고를 전하는 사신을 따라서 자영주계성으로 영주는 북경을 중심으로 해서 동서쪽으로 3~4백리 굉장히 넓은 을 영주라고 했어요. 굉장히 넓은 땅이었어요. 계헌이 있습니다. 아마 거기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북경하고 붙었어요. 계성이. 거기까지 고구려의 대진국의 영토가 미쳤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영주의 계성으로부터 솔중 무리를 거느리고 지하여 어디에 이르렀어요. 돈화시에 이르렀습니다.돈화시에 이르러서 즉제위하시고 제위에 나아가시고 나아갈 즉자죠. 임금의 자리에 나아갔다. 그러면 대조영이 임금님이 천자가 된 것은 669년인데 지금 전부 역사에서 668년이라하고 있어요. 이것도 잘못된 겁니다.
20:24
축홀한성하여 천도하고 홀한성을 쌓아가지고 천도했습니다. 바로 홀한성이 상경 용천부입니다. 지금의 목단강시 영하년 발해진에 있는 지금의 중국놈들이 당나라 식으로 발해의 왕궁을 복원한다 해가지고 신문에도 났었죠. 성을 제1궁 제2궁 제3궁 제4궁 제5궁을 중국식으로 복원한다고 하는 데가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입니다. 거기가 홀한성이죠. 홀한성을 쌓아서 천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돈화시에 도읍을 하고 있었고 걸궐중상은 대중상은 그 아들 대조영은 그 위에 거기서 동북쪽으로 가면 지금의 발해진 영화년 발해진에 상경용천부가 있는데 거기가 홀한성입니다. 거기에 홀한성을 쌓고서 천도를 하고 모군십만하니 군사 십만을 보집하니 위성대진이라 그런 위강과 명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내정책입제 항당위적 복수자서
乃定策立制하여 抗唐爲敵하고 復讐自誓할새
여말갈장 걸사비우 계란장 이진영 악수연병
與靺鞨將 乞四比羽와 契丹將 李盡榮으로 握手聯兵하여
대파당장 이해고어천문령 분제장 치수군현
大破唐將 李楷固於天門嶺하고 分諸將하여 置守郡縣하며
초무유망 주호정착 대득민망 만강유신
招撫流亡하여 周護定着하니 大得民望하여 萬綱維新이라
국호 정위대진 연호 왈천통
國號를 定爲大震하고 年號를 曰天統이오
거유고구려구강 척지육천리
據有高句麗舊彊하여 拓地六千里라.
내정책입제하여. 이에 정책을 수립했어요. 정책을 정하고 그다음에 제도를 설치해서 항당위적하고 당나라에 대항하여 당나라를 적으로 삼고 대적을 삼고 복수자서할세.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하는 것을 복수할 것으로 스스로 맹세할대 여말갈장 말갈의 추장인 걸사비우와 말갈이라는 것은 숙신에 물길 숙신 음루 물길 말갈 여진 이렇게 내려온다 하는데요. 이게 사실은 고조선의 혈통을 가지고 쭉 내려오는 그러한 사람들인데요.
지금 말갈과 고구려가 과연 구별이 되는거냐? 나는 사실 구분이 안된다고 봅니다 고구려가 말갈이고 말갈이 고구려인데 중국 역사가들의 특유의 논법으로 동북지방에 있는 우리 민족을 비하하기 위해서 말갈이라썼던 것이라 보고있지 그게 구별이 안된다고 봅니다. 말갈이라는 것을 물길, 원래 물가라 그래요. 물길 물가. 그러니까 송하강 강변에서 살던 사람을 말갈족이라고 물가에 사는 송하강가에 사는 그런 부족이다. 이런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갈장 걸사비우와 거란장 이진영으로 이게 중국식 사료에서 이런 식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걸 가져다 쓰는 거죠. 거란장 이진영으로 악수연병하여 악수를 하고 군대를 연합가지고 대파당장 이해고어천문령 하고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해서 완전히 초토화 시켜버렸습니다. 대파해버렸어요. 이 전쟁에서 걸사비우는 전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나라는 후고구려에 대해서 지금 이 일은 후고구려의 마지막에 있었던 일로 추측이 되는데 지금 여기서는 대조영시대에 갔다 놨는데 지금 그 시대에 이 전쟁이 일어났는데 사료가 없으니까 이게 대중상에 난 전쟁인지 아니면 대조영때 난 전쟁인지 확실치가 않습니다. 여기는 대조영으로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대중상 때 사건이 아니냐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이해고를 보내는데 만세통천중이었는데 이거는 669~697년 2년만 썼거든요. 그때는 669년이 대중상이 돌아가신 해이기 때문에 그 전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진영과 걸사비우와 후고구려가 연합해서 이해고를 천물령 해서 깨뜨린 사건이 언제 있었느냐 하는 것도 조금 더 고증이 필요합니다. 천문령이 어딘지를 몰라요. 지금도 천문령이 고증이 안됩니다. 분제장하여 그래서 여러 장수를 나누어서 치수구련하며 구련에다가가 태수를 두었습니다. 장군들을 각 고을에 가서 고을을 다스리라고 수는 태수란 말이죠. 태수로 삼아가지고 구련에다가 배치를 하며 초무유망하여 흘라다니고 도망다니는 사람을 부를 초 어루만질 무 그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을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정착을 할수있도록 해 주어서 주호정착하니 그들을 두루두루 보호해서 정착하게 하니 대득민망하여 크게 백성들의 바람을 얻어서 명망을 얻어가지고 만강유신이라 일만가지의 기강이 새롭게 바로 잡히게 되었다. 유신이라는 것은 과거와는 달리 환골탈퇴해서 유신이라고 합니다. 시경에 주수구방이나, 기명유신이다. 그 용어를 따다가 일본에서 명치유신을 하고 우리도 흉내를 해서 시월유신이라해서 유신이라는 말을 썼죠.
국호를 정위대진하고 국호를 바꿨네요 그러니까 대중상시대에는 대중상을 걸궐중상이라고도 하는데요. 걸궐중상 때는 후고구려라 했고 대조영이 호란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이제는 대진이라고 국호를 바꿨습니다. 그러니까 이사람들이 그들 스스로는 대진인데 왜 우리는 맨날 발해라고 부르는지 말이 안되는거예요. 연호를 왈천통이다. 중광 천통이요. 이건 하늘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뜻이 있을 것 같아요. 통이라는 것은 법통 혈통이라는 뜻이 있을것 같아요. 하늘의 법통을 계승한다. 천통이요. 거유고구려구강하여 고구려의 옛 강토에 운거해서 탁지유천리라 육천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척지 육천리라.
출처 : 환단고기 대진국본기 중 일부 강독 (윤창렬 교수) 2005년 증산도 사상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