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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의 좋은 설명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을 받으면 마음과 행실이 선해집니다. 그 선한 행실로 어둔 세상의 빛이 되고 이를 통해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지요.
이처럼, 성령의 열매는 마음에만 맺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선한 것들이 반드시 행함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도들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되구요.
오늘 설명할 여섯 번째 성령의 열매 양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선의 열매가 마음에 온전히 맺히면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이 발해집니다. 그래서 많은 영혼들이 여러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지요.
양선(良善)을 글자 그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입니다. 이
양선의 열매가 온전히 맺히면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한 주님의 마음이 되지요. 종종 성령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 중에도 나름대로 선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때 세상 사람들이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은 양심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양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양심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혹은 악하다
분별하고 평가합니다. 스스로 양심에 비춰 거리낌 없이 살았다면 나름대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하지요. 그런데 이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양심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양심이란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가, 또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 등에 따라 달라지지요.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태어나면서부터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가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서 악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정직을 중요하게 교육받은 아이는 작은 거짓말을 하고도 양심에 가책이 되어 어쩔 줄을 모릅니다. 늘 거짓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자란 아이는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도
태연하지요.
양심이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정도로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는 것이지요. 또 똑같은 부모와 환경 속에 교육을 받아도 아이들이 교육을 받아들이는 결과는
다릅니다. 어떤 아이는 부모가 가르치는 대로 잘 순종하지만 어떤 아이는 자기 주장이 강해서 가르치는 대로 순종하지 않으려 하지요. 그렇다면 같은 부모 아래서 자랐다 해도 이 두
아이의 양심은 다르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본성이 다를 뿐 아니라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도 교양과 지식, 가치관이 다릅니다. 어떤 가치관 아래에서 성장하는가에 따라서도
사람들의 양심은 달라집니다. 이 사회와 저 사회의 가치관이 다르며 100년 전과 50년 전, 또 오늘날의 기준이 다르지요. 나라마다 다르구요.
예를 들어, 노예를 부리던 시대에는 노예에게 매질을 하고 강제로 일을 시켜도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또 3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요즘처럼 몸을 다
드러내는 복장으로 방송에 나오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양심은 사람마다, 지역과 시대마다, 서로 달라집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양심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결국 자기 보기에 선한 것을 추구할 뿐이지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이라 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선악과 시비를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 기준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아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지요.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해서 양선의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선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 마음이 행함으로 드러나야 열매가 맺혔다 할 수 있지요.
마태복음 12장 35절 전반절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낸다" 했습니다. 또 잠언 22장 11절에는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처럼 진정으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외면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 나옵니다.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선한 말과 선한 행실로 덕과 사랑을 베풀지요. 그래서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양선한 사람에게서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여러분이
잘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으로 들어가기를 사모하여 영적인 사람들을 열심히 따르며 개인적인 사귐도 갖기를 원합니다. 진리를 듣고 배우기를 즐겨하며 은혜도 잘 받고 감동의 눈물도 잘 흘리지요.
그러나 이런 사모함만 있다 해서 영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보고 듣고 배웠으면 그것을 반드시 자기 마음에 이뤄야 하고 직접 영적인 행함을 실천해야 하지요.
예를 들어 선한 사람 가까이에 있는 것만 좋아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은 멀리 한다면 이것이 정말 선을 사모하는 마음일까요?
혹은 선에 대해서 듣기는 열심히 듣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우치기도 하는데 막상 선을 행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면 정녕 선을 사모한다 할 수 있겠는지요? 혹여 여러분 중에 선을 사모한다
하면서 직접 선을 쌓아가는 모습은 부족하지 않은지 잘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선을 좇는 양선이 어떤 것인지 지금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양선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지요. 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선이시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 전반에 그 선이 배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양선의 향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구절 중에 하나가 빌립보서 2장 1~4절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주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내 생각과 내 성품에 안 맞는 일에도 마음과 뜻을 모아줍니다. 겸손하고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거나 인정받으려 하는 허영심도 없습니다. 자신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일까지도 마음을 써 줍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길에 강도를 만나므로 거의 죽어 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한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이렇게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을 보았지만 제사장은 그냥 피해서 가 버렸습니다. 한 레위인도 그를 보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렸지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는 사람들입니다. 백성들보다 율법을 많이 알고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이들은 정작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
그 행함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물론 돕지 못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겠지요. 그러나 양선의 마음이 있다면 자신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고 가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후에, 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다가갔고 상처를 싸매 주었지요. 그리고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데려가 돌봐 준 후에 주막 주인에게 그를 돌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비용은 자신이 돌아오는 길에 지불하겠다고 약속까지 하면서 떠났지요. 사마리아 사람이 이기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갈 길도 바쁜데 관계도 없는 사람의 일에 끼어들었다가는 자기 시간과 물질을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대략적인 치료는 해 줄
수도 있지만 굳이 앞으로의 비용까지 대겠다고 하면서 주막에 부탁해야 할 책임도 없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양선의 마음이 있었기에 죽어 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물질이나 시간에 손해를 본다 해도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해도 내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차마 버리고 갈 수는 없었지요. 자기가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라도 돕고자 했습니다. 만약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해서 그냥 지나쳤다면 이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는 그 일이 두고두고 무거운 짐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 다친 사람은 어찌 되었을까,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를 구해 주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 그럴 수 있었는가," 이렇게 계속 자책하게 되지요. 마치
누군가가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선을 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 그래서 범사에 선한 것을 택해 나가는 마음 바로 이것이 양선입니다.
양선의 빛깔이 강하게 드러나는 또 다른 성구는 마태복음 12장 19~20절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 예수님의 양선에 대한 내용이지요. 먼저 19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흔히 "저 사람은 참 착하다, 참 선하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을 보면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히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말씀처럼 "거기
있는 줄도 몰랐다" 할 정도로 조용하여 다투는 일도 없지요.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드러내어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다음으로 20절에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한다"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무나 화초를 키울 때 상한 잎이나 가지가 매달려 있으면 깨끗하게 잘라 내어
버리기 마련입니다. 또한, 심지가 꺼져 갈 때는 그 빛도 밝지 않고 그을음이 심해집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아예 불을 꺼 버리지요. 그러나 양선의 마음이 있으면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의 하나라도 회생할 가능성이 있다면 차마, 단호하게 그 생명을 끊어버리지 못하므로 어찌하든 살 길을 열어 주고자 하지요.
여기서 상한 갈대란, 영적으로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악으로 심하게 물들어서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고 있는 사람 이지요. 이런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기
쉽지요. 예수님 당시에도 그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며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지요.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종종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사는 사람,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하므로 시험 환난에 넘어져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교회 안에서 어떤 악을 행하고 나서 스스로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양선의 마음이 있으면 이런 영혼들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기 원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 오히려 악을 발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의 사랑받는 사람들, 영적으로 앞서 가는 사람들을 시기하여 그들을 비난하거나 험담하지요. 또 자신이 주도하는 일이 아니면 마음을 함께 모아 주지 않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려
들기도 합니다. 이럴 때도 양선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이런 악을 발하는 사람들을 품어 줍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상대를 꺾어 버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을 녹이고 오히려 감동을 주는 것이 양선이지요.
물론 상대가 너무나 악하므로 내 편에서 아무리 선하게 대해도 결국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도 내 편에서 먼저 여기까지만 참자 하는 한계를 두고 그 선을
넘으면 외면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는 것이 양선의 마음이지요. 마지막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까지는 어찌하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회를 주고 소망 중에 바라봐 주는 것입니다.
성 여기까지 들으시면서 조금 혼동이 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양선이 다른 영적인 덕목들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이해가 잘 안 가는
것이지요. 곧 앞서 설명한 내용 중에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구제와 긍휼의 마음이 아닌가, 또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는다면 화평과 겸손의 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다 양선에 포함되는가 이런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구제와 긍휼도, 자비, 화평, 겸손도 이 각각이 결국 선에 포함되는 덕목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은 하나님의 속성 자체이기 때문에 그 영역이 광범위하지요. 그러나 양선에서 더 부각되는 측면은 그러한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실제로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상대의 어려움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선의 마음을 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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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는 것은 물론 화평의 마음이요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양선에서 설명하는 것은 선하기 때문에 상대와 화평을 깰 수 없는 마음, 인정받으려고
들레기보다는 내가 낮아지더라도 겸비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선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 충성을 한다 해도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어느 한 분야만 아니라 온 집에 충성하게 됩니다. 만약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분야 중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잘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지요. 선한 마음이 있으면 스스로 불편해서라도 이렇게 놔둘 수가 없기 때문에 어찌하든 온 집에 다
충성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 밖에 여러 가지 항목들도 다 이렇게 적용하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악을 발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힘들게 한다 해도 일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뤄내야 평안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이와 반대입니다. 오히려 선을 좇지 못했을 때는 자기가 손해를 본 것보다 더 불편하며 두고두고 마음이 쓰이지요.
그래서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고 내가 좀 불편하더라도 규칙을 지키려고 합니다. 내가 고기 먹을 믿음이 된다고 해도 상대를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바울의 고백에서도 이런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일도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면 내가 누리지 않는 편이 더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민망한 일을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자기 안의
성령께서 탄식할 일은 도무지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악을 행하겠습니까? 이렇게 범사에 선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 바로 양선의 열매를 맺은 사람입니다.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면 우리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소자를 실족시키거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외면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다 온전해지지요. 누가 봐도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을 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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