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는 최근 한국의 매일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회에서 윤석열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것에 대해 “한국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라 면서도 “탄핵 안 가결 만으로 민주주의의 위기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진단했습니다.
샌델교수는 “미국과 유럽의 많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한국 또한 정치적 분열이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분노와 극단, 비난과 욕설이 아닌 예의와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진정한 공론의 장을 마련해야만 민주주의를 쇄신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샌델교수는 “이것이 바로 도전이며, 여당과 야당을 포함한 정치권의 책임이기도 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샌델교수는 한국의 비상계엄 소식에 “많은 사람이 그랬듯 나 역시 이사태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 놓으며 계엄선포를 “민주의 규범에 대한 심각한 공격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지난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탄핵안이 국회에서 찬성 204대 반대 85로 가결됨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 재판소에서 국회의 탄핵청구에 대한 최종판결이 있을 때까지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되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12월 12일 “비상계엄 발동경위를 설명하는 국민께 드리는 말씀”에서 “탄핵하든, 수사하든 이에 당당히 맞설 것”이라며 “거대 야당이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해 퇴진과 탄핵선동”을 획책하고 있다고 불편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리고 부정선거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서 “국방장관에게 선관위 전산시스템의 서버를 복사 하라고 지시했다”고 했습니다. 특히 “비상계엄 선포권행사는 사법심사대상이 되지 않은 통치 행위” 라고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주장 펼치기도 했습니다.
또 윤석열 대통령은 12월 14일 탄핵안 가결 후 “국민께 드리는 말씀”에서는 “지금 잠시 멈춰 섰지만, 지난 2년반 국민과 함께 걸어온 미래를 향한 여정은 결코 멈춰 서서는 안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토로했습니다.
“말과 사슴, 그리고 사냥꾼”이라는 이솝 우화는 아래와 같이 전개됩니다.
말과 사슴이 싸움을 벌였다. 말은 사냥꾼을 찾아가 사슴에게 복수하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사냥꾼은 한가지 조건을 달았다. ‘정말로 복수하고 싶거든 내가 고삐로 널 조종할 수 있도록 입에 마구를 채우고, 사슴을 쫓는 동안 내가 편히 앉도록 등위에 안장을 얹어야 해.’ 말은 기꺼이 동의했다. 결국 말은 사냥꾼의 도움을 받아 사슴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말은 사냥꾼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내려와요. 입과 등에 채운 것도 풀어주세요.’ 하지만 사냥꾼의 대답은 이랬다. ‘이봐,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이제 막 마구를 채웠 잖아. 난 지금 이대 로가 좋단 말이야.’
돌이켜 보면 윤석열 검사는 문재인 전대통령 시절 특검의 수사 반장으로 적폐청산이라는 하명을 받고 보수 인사를 기소하여 형사처벌 하는데 앞장섰던 전력이 있습니다. 그는 문전대통령에 발탁되어 중앙지검장 그리고 검찰총장으로 승승 장구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재임시 당시 윤석열 검찰 총장은 살아 있는 권력에 무소불위로 수사권을 휘두르다 당시 추미애 법무장관과 불화로 검찰 총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강골 검사 이미지로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던 당시 국민의 힘은 윤석열 전검찰 총장을 보수 진영의 대통령후보로 영입하여 우여곡절 끝에 정치신인 윤석열을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하였습니다.
위 이솝 이야기에서 비유하자면 윤석열 대통령의 역할은 보수진영(말)을 돕는 사냥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2022년 대선에서는 더불어 민주당의 대선후보 이재명을 간신히 물리치는 데는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문재인 전대통령의 실정이 성공의 더 큰 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적으로 지금의 윤석열 대통령은 여러모로 국민의 힘에게 오히려 큰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윤대통령은 지난 12월 3일 심야 비상계엄령 선포는 입법권을 남용하는 야당에게 경고하기 위해 고도의 통치권 행사 차원에서 공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비상계엄 선포는 사법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자신의 행위를 난해한 법리로 변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대통령이 주장하는 그러한 고도의 통치권 행사가 헌법과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적법하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또다른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엄연한 법치 국가입니다. 비록 계엄선포가 고도의 통치행위에 속한다 하더라도 헌법과 관련법이 정한 테두리내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헌법이나 법의 테두리내에서 행사되지 않는 비상계엄 선포는 적법한 행위가 아니므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필자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퇴보 현상은 아래와 같이 단계적으로 전개된다고 관찰했습니다:
첫째, 국가적 위기 사태에서 국민은 조속한 위기극복을 약속하는 카리스마형 지도자에게 표를 몰아준다.
둘째, 이렇게 집권한 지도자는 쉴 새 없이 가상의 적들을 만들어 내고 공격한다.
셋째, 집권세력의 가고자 하는 길을 가로 막는 독립적인 기관들(특히 사법부와 언론)등의 발을 묶거나 거세한다.
넷째, 언론을 장악해 여론을 조작하거나 선거법의 개정 등을 통해, 국민이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기 어렵게 만든다.
이솝우화 “말과 사슴 그리고 사냥꾼”에 나오는 사냥꾼과 같은 전제주의 잠재성향을 예측 할 수 있는 네가지 주요 전조(前兆)는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거부(혹은 규범준수에 대한 의지 부족)예컨대 헌법을 부정 하거나 이를 위반할 뜻을 더러 낸 적이 있는가?
둘째, 정치 경쟁자에 대한 부정. 예컨대 정치경쟁자를 전복세력이나 헌법질서의 파괴자라고 비난한 적이 있는가?
셋째, 폭력에 대한 조장이나 묵인. 예컨대 개인적으로 혹은 정당을 통해 정적에 대한 폭력 행사를 지원하거나 부추긴 적이 있는가?
넷째, 언론 및 정치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성향. 예컨대, 상대 정당, 시민단체, 언론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는가?
위자료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32쪽에서 가져왔습니다.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지브랫 지음(어크로스, 박세연 번역)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정당이 공직 후보를 낼 때 전제 주의적 잠재성향이 있는 사람을 분리해서 솎아 내는 작업(gate keeping)을 정직하게 해야 만합니다. 비록 자신들의 당이 선거에 일시적으로 상대당에게 패배하더라도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민주주의 생태계를 파괴하면 복원하는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당파의 이해 관계를 떠나 공직후보를 선별하는 작업(gate keeping)은 꼭 지켜야 할 규범(norm) 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이념적대립의 양극화로 진보와 보수는 정신적 내전상태에 있다고 최근 원로 헌법학자 이신 이석연 선생님이 진단하셨습니다.
당파싸움이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필자는 우리사회에서 선동하는 문화를 추방하는 운동을 전개하자는 제안을 드리는 바입니다. 보수는 진보를 향하여 선동의 달인이라고 하고 진보는 보수를 향하여 “사돈 남 말 한다”고 빈정댑니다.
선동의 작동원리를 알면 보수도 진보도 선동으로부터 자신이 자유롭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동의 작동 원리 여섯 가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선동은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우리와 그들로 나눠 양극화한다.
2. 선동은 정책 자체가 아닌 집단 정체성과 동기에 대해 논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선동은 우리편과 상대편에게 똑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불필요하거나 우리편에게 안 좋은 것으로 취급한다.
4. 선동은 진짜 진실은 인식하기 쉬운 반면 현실의 복잡한 사정이나 애매모호함은 비겁하고 우유부단하다고 평가한다. 또한 지나친 숙고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5. 선동은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 투사, 비일관적인 전제에 대한 호소, 개인적 신념으로부터의 주장 등의 논리적 오류를 자주 저지른다.
6. 선동은 그 표현이 반드시 가정적이거나 격렬하지 않아도 우리편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암묵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위협한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공동의 삶을 함께 걱정하고 서로 생산적이고 정직하게 반대하면서 하나의 공동체로서 행동 할 수 있다고 전제 합니다. 선동은 그런 실용적 수용을 거부하고, 심지어 확실성과 순수성의 세계를 위해 반대를 평가 절하하고 침묵시킵니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상대편의 선동가 혹은 그의 추종자들을 정화 함으로서 선동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선동적인 해결책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합니다.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그저 또 다른 선동가를 얻게 될 뿐입니다.
여기에 인용한 선동의 작동원리와 선동의 관한 여러가지 이론적설명은 “선동은 쉽고 민주주의는 어렵다(페트리샤로버츠-밀러 지음,힐데와소피 김선 옮김)” 에서 가져왔습니다.
오늘날 대한 민국의 고질병인 공동체의 이념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리사회의 선동하는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고 결론적으로 생각합니다. 공동체 상대 편의 몇몇 선동가 혹은 그의 추종자들을 정화함으로서 선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미봉책에 불과 합니다.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거듭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가? 많은 정치 평론가들은 헌법에서 위안을 찾으려 한다. 그들은 미국헌법이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선동가를 제어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14쪽)
대한민국의 헌법학자들에게 묻습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어떤 극단주의자나 선동가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제어할 수 있도록 설계 되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