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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관심이 지대하게 높은 지점이어서 그들끼리는 밀도가 높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관심과 거리가 멀고 그러다 보면 또 어렵게 다가오는 것이 '역사' 그 자체인 듯싶습니다. 하지만 이 지점을 우리가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지점은 되짚고 넘어가야 할 반복의 반복이므로, 지금 살펴보지 않으면 리스크로 남을 것 같아서 살펴보았습니다.
역사 연구자들 또는 일반적인 일상을 사는 우리들 모두 앞으로는 역사를 더 세밀하게 파고들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여깁니다. 차뿐 아니라 어느 분야든 다 마찬가지이겠지만요. 그냥 우리는 그런 시대에 던져진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 받아들일 수밖에요.
차를 하는데 차역사를 등한시할 수도 없고, 하자니 시간 소요가 너무 크고, 끝이 없는 게임 같고, 그렇다고 세밀하게 다 할 수도 없고, 해서..., 대략적으로만 살펴보았습니다. 하나씩 모이다 보면, 언젠가는 역사의 재구성이 이루어지겠지요.
공부라는 것이, 하나의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자료 역시 검색으로 살피고 또 살피고, 찾고 또 찾고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역사는 분명 존재하지만, 자료는 희박하기 때문이겠지요. 그것을 찾으려면 단서와 단서를 찾아서 연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자료를 읽고 찾아야 하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지요. 하지만 대체로 어떤 자료를 찾는 이유는 어떤 연결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적 연결들은 때로는 검색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차문화와 차역사는 아직 거기까지도 정리가 안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해서 불충한 지점들과 희미한 부분들은 가설과 상상으로 채우고 그런 후에 증명으로 나아가는 과학의 방법처럼, 차역사 공부도 어느 정도는 그러한 진행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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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색으로 표기된 (주1), (주2), (주3)은 이 글과 연계된 논문 본문에 표기되어 있는 주석입니다. 제가 달아 놓은 것입니다. 그 부분을 따로 떼내어 자료 설명 형태로 올리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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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도종 = 천우황제
도종(道宗/야율홍기耶律洪基/생몰 1032 ~ 1101, 재위/1055 ~ 1101)이다. 시호는 인성대효문황제(仁聖大孝文皇帝)이다. 즉위 후 이듬해인 1056년에 천우황제(天佑皇帝)라는 존호를 받았고, 1065년에는 존호를 가상하여 ‘성문신무전공대략광지총인예효천우황제(聖文神武全功大略廣智總仁睿孝天佑皇帝)’라고 하였다.
1055년 아버지 제 7대의 ‘흥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1056년 사카야무니 탑을 건설하였고, 1066년에는 요 태종이 사용하였던 '대요'라는 이름을 부활시켰다. 선대와 마찬가지로 불교에 심취해서는 불교의 트리피타카를 모방해서 요나라에 만들었고, 산스크리트어에 능숙했다고 한다. 선대인 요 흥종에 이어 이 시기에도 요나라는 내란이 끊이질 않아 사실상 멸망의 길을 걸었다고 하며, 정부는 부패하였고 군대는 흩어졌다. 아들 야율준(耶律濬)은 간신 야율을신의 모함을 받아 20살에 요절하였다. 1101년에 사망하여 손자 ‘천조제(야율아과/천조황제天祚皇帝)’가 제9대 황위를 계승하였다. 천조제에 이르러 요나라는 멸망하였다. 그리고 그 무렵에 ‘야율대석(천우황제)’이 ‘서요’를 건국한다. 서요는 ‘카라 키타이’이며 ‘대거란’이란 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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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북요北遼와 덕종德宗(야율대석耶律大石)
북요(北遼, 1122년 ~ 1123년)는 1122년 3월에 건국된 요나라 북부의 잔존국이다. 초대 황제는 야율순이다.
1122년 천조제가 도망가자, 야율대석이 ‘야율순’을 초대 황제로 옹립하였으나 야율순은 얼마 못 가 죽고, 야율정이 황제에 올랐으며 덕비 소보현녀가 섭정을 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금나라가 수도 연경(燕京)을 점령하자 소보현녀와 야율대석은 천조제가 있는 곳으로 가서 천조제에게 항복하고 ‘야율정’은 금나라 군대에 붙잡히고 만다.
소보현녀는 천조에게 주살 당하고, 야율대석은 남은 군사들을 규합하여 서쪽으로 갔다. 북요의 야율아리 등이 끝까지 금나라에 저항하며 북요를 유지시키려 하였으나 북요의 마지막 황제인 야율출렬이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고 금 태종이 침입하자 결국 1123년에 멸망한다. 북요는 대락 ‘1년 정도’ 유지되었다.
요나라의 9대로 이어진 황제의 계보는 9대 황제 천조대가 마지막이었고, 천조대는 1128년에 죽었다. 북요는 4대까지만 이어졌으며, 서요는 6대까지였다.
중국에서 요나라에 대한 정의는 요나라, 북요, 서요를 모두 통틀어서 하나의 왕조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서요의 1대 황제 덕종을 14대로 표기한다. 반면에 같은 혈통으로 유지된 왕조는 맞는데, 서요의 지리적 위치는 동아시아에 직접적 영향을 끼칠만한 지리적 위치는 아니었다고 보인다.
의천대사 입적하신 지 22년이 되는 해인 1123년은 북요가 멸망하던 해이고, 야율대석은 그때까지는 아직 황제가 아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요나라를 총체적으로 정돈할 수 있는 사람이기는 하였던 것 같다. 경전과 그밖에 물품을 고려에 보냈다는 것은 요나라가 가지고 있던 어떤 정수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쩌면 황실 물품을 정리하면서 그 물품을 잘 보관할 수 있는 나라로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급박한 상황에서 불경을 고려로 보낼 생각을 했던 야율대석이 새롭게 다가온다.
* 덕종德宗(야율대석耶律大石/ 생몰 1087 ~ 1143, 재위/1132 ~ 1143) : 서요의 초대황제이자 요나라의 제14대 황제. 멸망한 요나라의 황족이자 ‘요’ 태조 ‘야율아보기’의 8 세손이며, 묘호는 덕종德宗, 시호는 무열황제武列皇帝, 존호는 천우제天祐帝, 자는 중덕, 서요의 명칭으로는 ‘구르 칸’이다. *존호에 대해서는 자료가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 중국 역사는 서요를 북요를 이은 '요나라'의 왕조로 보고 있다. 그리고 '북요'는 1년여 정도만 유지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북요가 있던 위치와 서요가 존재했던 위치는 분명히 차이가 난다. 요나라 역사에서 북요와 서요가 서로 같거나 다르거나를 떠나서, 고려의 역사에서 보자면, 요나라가 급속하게 수축하였고 금나라가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형국이었기에, 아마도 외교 상황의 위기였을 것이다.
고려와 요나라(거란)와의 큰 전쟁은 거란의 3차 침입으로 마무리되었다. 거란의 3차 침입을 막아냄으로써 고려는 불교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 기간은 대략 120여 년이다. 헌종이 3차 침입을 막아내면서부터는 그 이후로 자잘한 침입들이 있었으나 국가적으로 볼 때 큰 문제는 아니었다고 보인다. 헌종- 덕종 - 정종 - 문종 - 순종 -선종 -숙종 -현종 -예종까지가 고려 문화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고려사에 있어서 그나마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고 보인다. 의천 대각국사의 아버지인 '문종'은 그 중심에 있었고, 고려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주변국들과의 전쟁에 일부러 참여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요나라가 송나라를 견제하면서 고려를 계속 압박했기 때문인 듯싶고, 그러한 시기에서 의천은 자신의 계획을 이행하였는데, 그때가 아무래도 요나라의 정치력이 약해지던 시기였고, 요나라의 황제 도종은 불교적인 세계관을 가진 황제였던 것 같다. 도종은 고려에도 의천에게도 상당히 우호적이었다고 보인다. 고려의 외교는 송나라와 무역은 하지만 외교사절단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것 자체가 요나라를 자극하는 일이었기에, 어느 정도는 은밀성도 있었던 것 같다. 이래저래 외교 하기에 참으로 피곤한 시기였던 것 같다. 균형을 잡아야 하니까. 이러한 역사적 사실성에 비추어 보면 의천은 진취성과 열망이 있었던 것 같다. 비록 국제정세가 변화하는 시기여서 호기로운 시기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의천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던 듯싶다.
우리가 흔히 고려의 문화와 차문화를 말할 때는 바로 이 황금의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고려는 서쪽으로는 북송, 북쪽으로는 거란족(요나라)과 여진족(금나라) 세력과 인접해 있었다. 전쟁과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의천과 요나라의 도종이 교류하던 시기는 고려와 요나라의 평화의 시기였다. 더구나 도종은 불교를 숭상하던 왕이었다. 도종에게 의천은 하나의 모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종은 불교와 문화를 넘어서서 정치에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요나라의 영역을 금나라(여진족)가 계속해서 차지해 간 상황에서, 북요는 남쪽을 거의 잃고 북부만 남은 상태에서 멸망하였다. '야율대석(덕종)'은 남은 세력을 규합하여, 몽골고원과 신장 동부 일대를 차지하며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금나라의 압박이 심해지자 몽골 고원을 버리고 중앙아시아 쪽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그 지역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그 후에 서요는 몽골군에게 멸망했다. 요나라의 잔존 세력은 동요, 후요 등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역사에서 사라졌다. 어쨌든 그들은 거란의 후예라는 정체성이 있었던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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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지도와 송나라와 고려의 지도 1>
* 사진은 검색으로 캡처함(공부 차원으로 한 것이니, 양해를 바랍니다. 출처는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용> 거란은 916년 나라를 세운 지 10년 만인 926년에 만주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던 발해를 공격해 무너뜨려 만주 지역을 장악한 후 곧이어 인접한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942년에 사신과 함께 낙타 50 필을 선물로 보냈다. 그러나 후삼국 통일을 이룩하며 고려의 위치를 굳건히 한 태조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국가로 인식]하여 그 사신들을 섬으로 모조리 유배 보내고, 낙타는 모두 개성 만부교 아래에서 굶어 죽게 만들었다. 이 '만부교 사건'으로 인해 고려와 거란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고, 고려에서는 태조 이래로 거란에 대한 적대노선을 계속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아직 이때까지는 본격적인 전란으로까진 이어지지 않았는데, 거란 입장에서는 중원에 자리하고 있던 송나라를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 후방의 안정을 도모해야 했고, 아직 '정안국' 같은 발해 부흥 세력들도 거란을 상대로 저항하고 있던 판국이었기 때문에 그 후방에 있는 고려와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고려는 당시 멸망한 발해의 잔존세력을 계속해서 흡수하여 국력을 키워나가고 있었으므로 그들 때문이라도 정치적 역학관계상 거란과 우호관계를 맺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려는 이후에도 북진 정책과 왕건의 훈요 10조를 충실히 따라 거란을 배척하는 한편 송(북송)과의 친선을 도모했고 '광종'대에는 960년에 본격적으로 송나라와 통교하기 시작했다. 이때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북방에 주둔 중이던 거란에 대한 경략을 시도했고, 발해 유민들이 세운 국가인 '정안국'도 송나라와 화친하면서 거란에 대항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타개하고자 986년 '정안국'으로 쳐들어가 그곳을 멸망시키고는 만주 전체를 장악한 다음 고려에 송과 친교를 끊고 거란에 화친할 것을 요구해 왔다. 결국 993년, 10월 요나라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출처 : 나무 위키>
이렇게 거란이 고려를 3차까지 침입하면서 마침내, 서로 화친하기에 이르렀다. 1019년 8월부터 사신 왕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송나라는 계속 거란(요나라)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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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지도와 송나라와 고려의 지도 2>
* 이때는 북송이 약진하던 시기였다. 요나라가 멸망하고 금나라가 급부상하던 시기였다. 기존의 힘의 역학 관계가 깨지던 시기였다. 그러다 금나라가 요를 물리치고 북방을 차지하자 북송은 남쪽으로 후퇴한다. 고려는 이러한 시기에 잦은 외세 침략과 외교의 기지를 발휘해야 했다. 1123년은 의천 대사가 입적하신 지 22년째가 되는 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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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과 금나라, 그리고 서요와 고려의 지도 3>
그 당시의 국경의 지도가 모두 변한 가운데 고려는 그대로이다. 세상이 요동치는 가운데 고려는 그대로 건재하다. 현상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금나라의 압박이 거세어지던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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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요의 이동경로/야울대석(덕종)의 이동 경로 지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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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덕종(야율대석)이 보냈다고 하는 '여러 물품들'에 관하여
요나라 천후황제(도종) 타계한 후 22년이 지나서, 북요北遼의 14대 황제 ‘덕종’(서요西遼의 1대 황제/1087 ~ 1143, 재위/1132 ~ 1143/ 천우제)이 《대장경》과 여러 종류의 소초 6천9백 권, 금과 비단 등을 고려로 보내 고려로 보내왔다고 한다. <논문 본문 인용>
아마도 이때는 요나라가 금나라와 전쟁 중인 상황이었고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가 금나라와의 전쟁에 지고 도망을 간 상태에서 ‘야율대석(훗날 덕종)’이 북요를 건립하였기에, 1018년(현종 9)에 고려를 침범했던 것에 대한 화해(사죄) 친교의 의미 또는 금나라를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일 수도 있겠다.
또 한편으론, 의천대사 입적하신 지 22년이 되는 해인 ‘1123년’은 ‘북요’가 멸망하던 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야율대석이 서쪽으로 남은 군사들과 이동하면서 북요 또는 요나라에서 간직하던 것을 고려에 보낸 것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역사적 미스터리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나만의 미스터리인가?
어쨌든 역사적 기록을 연대별로 대입해 보면, 서요의 덕종(야율대석/천우제)이 북요의 14대 황제라는 것도 뭔가 모순이 있는 듯하고, 북요가 망하던 시기에 고려에 보낸 물품이 대장경과 소초와 금과 비단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아마도 이 물품들은 ‘도종(천우황제)’이 소유하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북요(요나라)를 떠나는 덕종(야율대석)이 고려에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금나라에 전쟁에 지고 남은 군사들을 규합해 요나라를 떠나서 서쪽 원정을 떠나는 그 자신이 가지고 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 되었을 것이다. 요나라에 놓아둔다 하여도 불경은 소실 위험이 크다. 도종과 의천의 인연을 생각해서 고려로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훗날 몽골 침입(1232년/고종 19년)으로 ‘초초대장경과 속장경’이 소실되었다. 부인사에 보관하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된 후 1236년(고종 23)부터 1251년(고종 38)까지 재조(再雕)대장경을 완성시켰다. 이 팔만대장경에 야율대석(서요의 덕종)이 보냈던 불경 역시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목적이 어디에 있던지 간에 요나라(거란)에 있던 불경이 한반도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 불경이 훗날 몽골 침입으로 인해 소실된 고려 ‘초초대장경과 속장경’에 속해 있던 불경이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 서요(西遼) 혹은 카라 키타이(Kara Khitai) : 요의 왕족인 야율대석(西遼의 德宗)이 ‘요遼’가 멸망한 후 당시 요의 주요 군인 계층이던 위구르의 지원을 받아 몽골 서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이다. '카라 키타이'는 국호로 ‘대거란’이라는 의미이다. '서요'는 중국식 국호이다. 1124년에 건국되고 1132년에 야율대석이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했으며 수도는 "호사알이타(虎思斡耳朵)"이다. 1211년 나이만 부족의 쿠츨루크에게 멸망하였다. 쿠즐루크가 서용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나이만'은 칭기즈 칸 군대에게 멸망한다. 이후 서요의 잔여 세력은 지금의 이란 땅에서 키르만 왕조를 세우고 이슬람화 되어가다가 셀주크 왕조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페르시아인에게 복속되었다. 서요는 나이만의 쿠즐루크 포함하여 94년간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