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 金奉奎 (미상 ~ 1908)】 "나는 모진 귀신이 되어 너희들을 모조리 죽이리라,”
생년월일은 알 수 없으나, 전라남도 광산군(光山郡)이 출생지이다. 자는 공삼(公三)이고,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895년 (음)8월 20일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기삼연(奇參衍)이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1896년 전남 장성(長城)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종질(從姪) 기우만(奇宇萬)이 연합 의병을 추진하고 있던 전남 광주(光州)로 이동하여 합류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 보낸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과 이겸제(李謙濟)의 설득에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이후 기삼연과 왕래하면서 의병 봉기에 대해 논의하고, 뜻있는 선비들과 연락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였다. 또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마저도 해산되자 같은 해 9월 기삼연이 재차 의병을 일으켰고 이에 동참하였다. 기삼연은 수록산(隨錄山) 석수승암(石手僧庵)에서 회맹하고,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어 각지에 격문을 돌려 일본에 부역하는 자의 처단 및 재산 몰수를 경고하였다. 이처럼 기삼연이 호남창의맹소의 대장으로 활동을 시작하자, 이철형(李哲衡)과 함께 중군장에 임명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수물자를 주선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기삼연 의병장이 호남창의맹소의 군무를 맡기고자 하였으나 “나는 가문이 높지 않으므로 백성이 따르지 않을 것이요. 모든 일을 보좌하는 데 있어서는 나의 힘에 못미치는 것”이라고 자신을 낮추어 사양하였다. 그러고는 기삼연 의병장의 손발이 되어 일본군을 정탐하고, 의병 모집 및 군수물자 확보에 전념하였다.
1907년 9월 23일에는 선봉장 김태원(金泰元)과 전남 고창(高敞) 문수암(文殊岩)으로 이동해, 일본군을 기습하여 타격을 입혔다. 12월 7일에는 전남 법성포(法聖浦) 순사주재소를 소각시킨 후 창곡(倉穀)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7년 12월 27일 전남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노숙하던 병사들이 내리는 비로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일본군의 포위공격을 받았고,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며 크게 패하였다. 이때 기삼연 의병장과 탈출하였으나 기삼연 의병장은 큰 부상을 입었다. 이후 기삼연 의병장은 순창 복흥(福興) 산중의 재종제인 기구연(奇九衍)의 집에서 부상을 치료한 후, 부하들에게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지시하였으나, 일본군에 붙잡혀 1908년 (음)1월 2일 전남 광주(光州)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총살당하였다.
기삼연 의병장의 사망으로 호남창의맹소가 해산 위기에 처하자, “내가 담당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룰 수 없겠다. 국가의 일을 어찌하며, 성재의 원수를 어찌 갚으랴” 하면서, 박도경(朴道京) 등과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였다. 의병장에 추대되자 “모든 의병은 기삼연 장군과 죽음을 같이하기를 약속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기삼연 장군이 참혹하게 화를 당하였는데도 원수 갚을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의(義)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의병장으로 취임하여, 박도경을 포사장(砲士將)에 임명하는 등 부대를 재정비하였다.
의병부대의 재정비를 마친 다음에는 의병부대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현재 의병들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그 수가 1,000명에도 이르지 못하고 총도 100자루에 미치지 못하니, 연합을 통해 일본군을 상대해야만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각지에 통문을 보내 모이도록 하였으나, 김영엽(金永燁) 의병부대만 이에 응하여 연합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일본군을 공격하는 등 주요 군사작전이 실시될 때 연합하여 활동하고, 다시 흩어져 유격부대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첫 작전으로 전남 광산(光山)을 공격하기로 모의하였다. 그런데 1909년 2월 12일 장성(長城)의 운문암(雲門庵)에서 김영엽 의병장이 유종여(柳宗汝)에게 살해되었다. 김영엽 의병장은 유종여가 무뢰배(無賴輩)들을 의병이라고 모아오고 사적으로 재물을 탐한다고 생각하는 등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 결과 의병부대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한 유종여에게 살해된 것이었다.
김영엽 의병장의 죽음으로 광산 공격 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이에 군사들에게 “김영엽 의병장이 처사를 명백히 하는 것은 우리들이 함께 아는 바인데, 불측한 화를 당했으니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이다”라고 다짐하였다. 그러고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손룡산(巽龍山)으로 들어가 유종여를 유인하여 결박하고, 하수인 2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유종여는 처단하고자 하였으나, 결박을 풀고 도주해 버렸다.
광산 공격 계획이 무산된 후 의병부대를 손룡산에서 장성으로 이동하여, 그곳을 의병 근거지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준(金準) 등 주요 의병장들이 사망하면서, 전남 일대 의병부대의 활동은 더욱 위축되었다. 일본군은 ‘남한대토벌작전’을 펼쳐 주민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산과 들을 뒤지고 불을 지르는 등 무자비한 의병 탄압을 자행하였다. 결국 1909년 말 박도경과 일본군에 붙잡혔다.
이후 지독한 고문에도 ‘의(義)’를 지키고자 하는 데 탄복한 일본군이 회유하려 하자 “나는 네놈들을 먹고 네놈들의 가죽을 벗겨서 깔고 잠자려 하다가 일이 틀어졌다. 하물며 네 놈의 술을 마시며 네 놈의 찬을 먹고 하루라도 살기를 바라랴”하면서 물리쳤다. 모진 고문을 받은 후 광주를 거쳐 대구로 이송되었다. 대구에 수감되어 있을 때에도 일제는 그의 절개를 꺾고자 회유하였다. 일제 관리가 “머리를 숙이면 용서하겠다”라고 회유하자, “신민(臣民)으로 국가가 망하는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찾으려 하였으니, 이것은 천지간의 바른 도리이다. 어찌 의(義)를 굽혀서 개, 염소의 무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한단 말이냐. 죽음이 있을 뿐이다. 속히 나를 죽여라. 나는 모진 귀신이 되어 너희들을 모조리 죽이리라”라고 꾸짖었다. 사형을 선고받고 죽은 다음, 성 밖에 묻혔다가, 모양(牟陽, 고창군)의 인사들이 돈을 모아 고향에 옮겨 묻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