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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전에 발표했던 작품인데 다시 교정하여 올립니다.
<소설>
단감나무
박귀주
하굣길에 나선 동이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한길 가의 코스모스는 여린 몸 위로 꽃봉오리를 받쳐 들고 선선한 바람이 불때마다 몸을 흔들며 까르르 웃는다. 오른쪽 어깨 위에서 왼쪽옆구리까지 대각선으로 휘감아 가슴께에서 묶은 책보자기가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몇 자루의 연필이 양철 필통 속에서 주인의 헤까운 발걸음을 나무라듯 떨렁댄다. 작은 누나가 부엌칼로 연필을 깎아 양철 필통에 넣어주며, 뛰면 연필심이 다 동강이 나는데 애가 망아지나 똑같다며 나무라는 말이 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저절로 장단 맞춰 뛰는 발걸음을 어쩌지 못하였다.
동이는 며칠 전에 귀가한 큰 누나가 무척이나 좋았다. 잔소리꾼인 작은 누나나 심통쟁이 막내 누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선 큰누나는 꽃처럼 예쁘다. 하얀 피부에 오뚝한 코, 훤칠한 키, 그리고 동이를 보면 항상 방긋 웃으며 반겨주는 품이 북암절 관음 보살상 같기도 하고 하늘에 산다는 천사 같기도 하다. 동네에서도 소문이 났다. 용산댁 큰 딸은 어찌 예쁜지 영화 배우감이라고. 그리고 큰누나는 집에 올 때마다 선물을 사 온다. 특히 동이의 선물은 잊지 않고 사온다. 학용품은 기본이고 옷이며 장갑이며 양말을 사오는데 하나같이 귀한 것이다. 작년에 누나가 사다준 모자 달린 털옷은 정말 좋았다. 언덕아래 쌓인 눈에 굴을 뚫고 놀 때 땀이 날 정도로 따뜻했다. 뿐만 아니다. 이번에 장갑과 양말을 사왔는데 장갑이 꼭 맘에 들었다. 벙어리장갑만 끼다가 동이의 작은 손에도 꼭 맞는 손가락장갑을 사왔기 때문이다. 또 누나는 공부도 많이 했다. 집안이 넉넉지 못하여 서울 공장에 취업했는데 야간 학교에 입학하여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다. 덕택에 이번에 서울에 올라가면 더 좋은 곳으로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엄마는 큰누나의 손을 잡고 연신 내 딸 장하다고 말씀하시며 눈물지었다. 상삼, 중삼, 하삼 부락을 합한 삼삼리에 팔십여 호가 살지만 상삼에 용산댁 큰딸이 제일 예쁘고 욕심나는 큰 애기라고 한 샘터 논실 아짐의 말이 떠올랐다. 동이는 ‘아머, 우리 누나가 최고지’ 속으로 되뇌며 어깨까지 으쓱여 보는 것이었다.
“ 야, 동이야, 니 칼 좀 빌려 주라. 내 연필 좀 깎자”
좀 전에 학교 앞 문방구점에 들러 요한이가 연필을 사는 것을 보고 동이는 연필 깎기 칼을 샀다. 사실은 연필 보다는 팽이를 곱게 다듬기 위해 산 것이다. 큰누나가 쥐어준 용돈을 가지고 큰 맘 먹고 샀다.
“ 안 된다. 내 마수도 안 했는데 니를 빌려주나”
“ 관둬라, 니 칼 필요 없다. 춘석이 시켜 낫으로 깎으면 되지”
옆에서 듣고 있던 용이가 끼어들었다.
“ 춘석이가 니 꼬붕이냐.”
“ 치, 니는 어제 자치기 만들어오라고 시켰잖아.”
“ 야, 근데 요즘 춘석이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 걔가 동이 큰누나 보고 홀려서 그라잖냐?”
“ 글쎄 그것이 동이 누나만 보면 헤벌레하는 것이 암소 쳐다보는 수소 같더라!”
그 말에 동이가 용이를 보고 벌컥 화를 냈다.
“ 뭐야, 오늘 내 그 자식 몽둥이로 막 패 줄 거다.”
“ 야, 사람 보는 것도 죄냐?”
“ 그래, 사람 쳐다본다고 쥐어 패면 조실 아짐이 니를 가만 안 둔다.”
춘석이는 동이의 이웃집에 사는 백치이다.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실댁 막내딸인 명순이 누나가 시집을 가서 아일 낳았고 춘석이가 그 집의 맏이라고 하니까 줄잡아 삼십은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네 아이들은 춘석이의 나이가 몇 살이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덩치만 컸지 아이들하고만 어울려 놀고 성격이 순하여 손아래 동생 다루듯 했다. 춘석이의 나이는 제가 말한 대로 아홉 살이 제격이다.
몇 년 전에 마을 뒷산에 큰 산불이 났다. 아이들이 나무하러 갔다가 낸 불이었다. 그 속에는 춘석이도 끼어 있었다. 서리해온 고구마와 미리 잡아둔 메뚜기며 개구리 뒷다리를 구워 먹기 위해 바위틈에 불을 지폈다. 물론 성냥은 춘석이를 시켜서 가져왔다. 문제는 바람이었다. 불똥이 튀어 인근 풀더미에 옮겨 붙자 아이들이 소나무 가지를 꺾어 끄려 했지만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불이 번지니 겁에 질려 모두 동네를 향하여 줄행랑을 놓았다. 인근의 동네 사람들이 일제히 일손을 멈추고 산불을 진화하는데 하루 밤낮이 걸렸다.
경찰서에서 방화자를 찾기 위해 조사를 나왔다. 아이들은 모두 춘석이에게 떠 넘겼다. 동네 어른들도 춘석이가 범인으로 몰리는 데에 대해 별 이의가 없었다. 드디어 춘석이는 경찰 아저씨 앞으로 끌려 왔다.
“ 당신 담배 피요?”
“ 아, 예 ”
얼떨결에 대답은 하였지만 기실 춘석이는 담배를 피지 않는다. 예전에 아이들이 마른 호박잎을 말아 빨도록 시키면 한 모금 마시고 연속 쿨럭 거리며 기침을 하는 바람에 놀림감이 되었다.
“ 당신 이름은 뭐요?”
“ 김-춘-석-”
“ 나이는?”
“ 아홉 살이요”
“......”
그 때부터 동네 이장님께서 나서서 일처리를 하셨다. 다행히 춘석이는 징역을 가지 않았다. 이장님께서 춘석이를 위해서 잘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장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놀다가도 이장님만 뵈면 모두 큰 소리로 ‘안녕하십니까?’ 이구동성으로 인사를 하였다. 그 중에서도 춘석이가 가장 공손하게 절을 하였다.
춘석이는 말뚝박기 놀이에서 가장 튼실한 말이다. 가끔 엉덩이를 너무 치켜들어 뛰어 오르기가 힘들지만 문제는 금방 해결된다. 뛰어오르려는 아이가 술래 측 말뚝이를 향하여 ‘야, 춘석이가 또 엉덩이를 치켜 올렸어’라고 불평스럽게 소리치면, 이어 술래 측 말뚝 아이의 ‘춘석아, 무릎 꿇어’하는 소리가 들리고 춘석이는 순순히 무릎을 꿇어 넓적하고 평평한 말 등이 되었다. 물론 춘석이는 항상 술래 측이었다. 가끔 저도 올라타겠다고 떼를 쓸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이들이 ‘그럼, 너는 빠져’라고 하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 춘석이지만 동네 아이들과 다른 아니, 틀린 구석이 딱 한 곳이 있다.
동이가 사는 동네는 삼삼리 저수지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산등성이에서 큰 산자락 하나가 거북 발처럼 뻗어 나와 그 끝에 하삼 마을이 있고 발목에는 중삼, 가장 안쪽에 있는 마을이 상삼이다. 마을 뒤편에는 김 씨 문중의 제각과 넓은 묘지 터가 있다. 위쪽으로 항상 단정히 깎인 무덤들과 묘석들이 줄지어 있고 그 아래로 넓은 잔디밭과 솔밭이 연이어 있다. 묘지터 옆으로 큰 개울이 흐르고 멀리 보이는 넓은 들머리에 다랑지 논들이 층을 이루는데 그 꼭지에 길고 가파른 둑이 솟아 있는 곳이 저수지이다.
솔밭과 묘지 터는 아이들이 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때때로 제각을 지키는 철용이 아버지가 나타나 아이들에게 호통을 치곤 했지만, 아이들이 저수지 쪽으로 슬금슬금 달아나 보이지 않으면 으레 뒷짐을 지고 총총히 떠나기 마련이고, 아이들은 다시 되돌아 와 하던 놀이를 계속하였다.
나이먹기놀이를 할 때는 우선 사람 수를 두 편으로 가른다. 솔밭에는 누구나 아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그리고 각기 한 그루씩 차지하고 상대편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일종의 진지인 셈이다. 만약 상대편이 칩입하여 내편의 소나무에 손이나 발을 대고 만세를 외치면 상대편 나이가 모두 다섯살씩 올라간다. 그러나 야구에서 베이스를 밟고 주자에게 먼저 손이 닿으면 죽듯이 소나무 뿌리를 밟고 상대편에게 먼저 손이 닿으면 공격자는 죽게 되고 게임이 끝날 때까지 참여하지 못한다. 진지밖의 싸움은 더 치열하다. 모두 처음 나이는 다섯 살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가면 열 살이 된다. 진지밖의 싸움은 나이가 많은 쪽에게 잡히면 자신은 죽고 상대가 그 나이만큼 더 먹게 된다. 그래서 나이가 작은 상대를 쫓다가도 더 많은 상대편이 쫓아오면 자기편이나 진지로 줄행랑을 놓는다. 게임은 같은 편 모두가 회갑을 맞으면 승리로 끝나고 상대편이 회갑잔치를 차려주어야 한다. 회갑잔치라야 이긴 측에서 팽감을 치고 앉으면 진쪽에서 큰절을 올리는 것이다. 상대방이 아무리 어려도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하니 일종의 굴욕인 셈이다.
춘석이도 끼워달라고 하지만 수가 부족할 때가 아니면 대개는 구경꾼이다. 행동이 굼뜬데다 눈치가 없어 같은 편이 불리하기 때문이다. 나이 먹기에 싫증이 나면, 비석치기, 자치기, 구슬치기, 말뚝박기 등 놀이는 얼마든지 있다. 이것저것 돌아가며 놀다가 지친 아이들은 흙투성이가 된 몸을 끌고 개천을 따라 올라가 저수지에 이른다. 아이들이 노는 곳은 둑 반대편의 산골물이 드는 곳이다. 물은 수정처럼 맑고 깨끗하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아이들은 검부적같은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저수지 가로 뛰어들며 아우성을 쳤다. 저학년 아이들은 땅 집고 헤엄을 치고 고학년 아이들은 개구리헤엄이나 개헤엄으로 좀 더 깊은 곳까지 나아가지만 금방 되돌아 왔다. 동이도 제법 개헤엄을 쳐서 나아가지만 깊은 물에 들어가면 물귀신이 다리를 죽- 잡아당긴다는 어머니의 말이 떠올라 금방 돌아섰다. 아무리 더워도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면 살갗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소름이 돋아 닭살이 될 때쯤이면 물가 바위 위에 엎어져 몸을 덥혔다. 깨복쟁이 아이들은 물가에서 서로의 고추를 보고 히히거리지만 오그라들 대로 들어 대개 흰 밤톨처럼 붙어 있기 마련이다.
춘석이는 헤엄을 칠 줄 모른다. 그리고 물을 무서워한다. 옷을 입은 채로 옅은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어린 아이처럼 땅을 짚고 물장구를 치는 것이 고작이다. 동이의 무리가 왁자지껄 물장구를 치고 물싸움을 하자 춘석이도 물가에서 흐흐 웃으며 첨벙대고 있었다. 그 때 미리와 저만치에서 목욕하던 두 사람이 저수지의 한 귀를 가로지르며 경주라도 하듯 이쪽으로 헤엄쳐 왔다. 중학교에 다니는 철용이와 같은 또래의 원표였다. 일명 도치와 몽키라고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서 알아주는 악동이다. 도치는 앞뒤꼭지가 유난히 튀어나와서 몽키는 커다랗고 빼곡한 이빨이 앞으로 튀어나와 붙여진 별명이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철용이가 싸울 때 박치기 한방으로 상대를 때려 눕혔다거나 원표가 이빨로 자물쇠를 끊어버렸다는 등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지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아이들보다는 춘석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춘석이에게 뭐라고 꼬드기며 자꾸 물속으로 끌어들이더니 어기적 일어서 주춤거리는 춘석이의 바지를 대뜸 끌어내려 버렸다. 춘석이는 화들짝 놀라 물속에 넘어지고 바지는 어느새 원표의 손에 더 끌어 내려져 발목에 걸렸다. 그는 그저 겁에 질려 깊지도 않은 물에서 넘어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섰던 동이는 깜작 놀랐다. 춘석이의 커더란 덩치가 뒤로 넘어져 허우적거리는 꼴보다는 벗겨진 아랫도리의 비밀 때문이었다. 동이의 눈은 한곳에 고정되었다. 시커먼 털북숭이 속에 덜렁거리는 거시기를 처음 본 것이다, 어른이 되면 붓꽃이 나고 그것도 도끼자루만큼 커진다는 말을 들었지만 설마 춘석이가 그러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문득 춘석이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토요일 방과 후에는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가장 길다. 특히 장날이 겹치는 날이면 아이들은 장 구경을 하기 위해 5일장에 들리는 경우가 많다. 볼거리가 많고 혹여 서커스단이라도 찾아온 날이면 운수 대통이다. 용이를 비롯해 친구들은 가다말고 자연스레 장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동이만 무리에서 빠져 곧장 집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서는데 큰누나가 일찍 들어오면 문지를 부쳐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문지는 부추나 파릇한 어린 쪽파를 가지고 부치기도 하지만 동이는 달걀에 그냥 밀가루를 풀어 노릇하게 부쳐낸 것을 좋아했다. 대여섯 마리의 암탉이 달걀을 낳았지만 어머니는 일일이 챙겨 모아 두었다가 장수가 오면 내다 팔았다. 혹여 깨진 달걀이 있으면 달걀전을 먹을 수 있었지만 흔치 않은 일이었다. 큰누나에게 달걀전을 부쳐달라고 조르면 되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매미산을 돌아들어 하삼을 지나고 굽이진 시냇가로 신의대가 우건진 중삼 언덕을 넘으니 언덕 아래 포근히 안긴 20여 호의 초가집이 보였다. 산골물 한 자락이 마을 샘터에 이르고 샘터에서 한 굽이 돌아 마을을 싸안고 흘러 솔천으로 흘러내린다. 집들은 모두 개울을 향해 옆으로 줄지어 있었다. 동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냇가의 빨래터에서 큰누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빨래터 옆의 미나리 깡에 미나리가 군데군데 짙푸르다. 미나리깡 위쪽으로 길게 축대를 쌓아 언덕 위에 두세 겹 집들이 가로 누워 있어 앞집 마당에서 보면 빨래터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그 중에서도 동이의 집과 춘석이의 집이 빨래터에서 가장 가까웠다. 큰 누나를 보며 달려가던 동이가 고개를 들어 집 쪽을 바라보다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저 자식이!”
춘석이가 축대 담장에 기대어 큰 누나를 사뭇 내려다보고 있었다. 춘석이네 집터는 동이의 집보다 더 넓었다. 뒤꼍으로 감나무가 여러 그루 있고 앞마당 쪽에도 두 그루가 있다. 집 앞 담장의 한 가운데를 뚫고 굵게 솟아있는 큰 단감나무는 뿌리가 축대의 바위까지 휘감았는데 마을 감나무 중에서는 최고로 친다. 여름이면 앞마당에 시원한 그늘을 늘여 놓고 가을이면 굵은 골감을 생산해 냈다. 동이의 주먹보다도 더 큰 골감이 달고 탐스러워 장수들이 달걀만큼이나 서로 달라고 하니 조실댁은 감나무 관리에 정성을 다했다. 밑동이 한 아름을 넘어 튼실해도 태풍이 올 때쯤이면 장대로 가지의 곳곳을 받쳐주고 거리에서 개똥이든 소똥이든 주워다가 나무 밑에 묻어주곤 했다. 동네 아이들이 떨어진 감이라도 주우려고 마당가로 살금살금 접근하다, 어느새 나타난 조실댁의 꾕과리같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오면 기겁을 하여 달아났다. 조실댁은 사나운 불도그처럼 무서웠다. 동이 어머니는 그런 조실댁을 보고 일찍 남편을 여의고 춘석이 같은 아들을 두었으니 독을 품지 않으면 어찌 살겠냐며 두둔하는 듯 말하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가끔 이 일급품인 감 맛을 볼 수 있었다. 춘석이를 잘 꼬이면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 조실댁은 단감나무에 다른 사람은 얼씬도 못하게 했지만 춘석이에게는 달랐다. 단감을 따서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했고 또 나무에 오르는 것도 허용했다. 그는 늦여름 때부터 감맛을 보기 시작했다. 태풍이 한 차례 지나면 물속에서 우려낸 감을 들고 다니며 먹기 시작하였다. 가을철이면 장대를 하나 들고 단감을 꺾어내어 두 손에 들고 다니며 먹었다. 이 때쯤이면 춘석이도 아이들의 놀이에 곧잘 끼어들 수 있었다. 상급반 아이들 중에는 춘석이를 같은 편에 끼워주는 대가로 노골적으로 단감을 요구하는 아이도 있었다.
동이가 씩씩거리며 빨래터까지 오자 큰 누나는 일손을 멈추고 웃음 지으며 말했다
“우리 동이 일찍 왔네, 그런데 왜 화날 일이 생겼니?”
“아니, 저 자식이 계속 누나를 보고 있잖아, 내가 쫓아가서 혼내줄 거야”
하며 춘석이를 향해 손짓했다.
“호호호, 아니, 우리 동이가 누나 흑기사네”
“...... 흑기사가 뭔데?.....” 하다 말고, 다시 담장 쪽 춘석이를 향하여
“춘석이 너, 죽어” 하며 소리쳤다.
“동이야, 그럼 못써. 사람 보는 것도 죄라든. 자- 가자, 집으로”
동이가 물 채운 바가지를 들고 누나의 뒤를 따르며 춘석이를 노려보는데 그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튿날이었다. 아침을 먹고 솔밭으로 놀러 나가는데 길모퉁이에서 춘석이가 동이를 보고 기다리고 있었다. 동이는 마침 잘 만났다는 듯
“야, 임마, 인자 니하고는 안 놀아, 흥”하고 시비를 걸었다.
춘석이는 머뭇머뭇 다가서더니 호주머니에 무얼 감추어 놓은 듯 만지작거리다 불쑥 꺼내 들었다. 단감이었다. 이제껏 본 중에서 이렇게 큰 것도 있었나 싶게 굵고 탐스러웠다. 두 손에 하나씩 들고 내밀면서 춘석이는 애원조로 말을 꺼냈다.
“야, 동이야, 이것 줄게, 니 누나하고 바꾸자”
“......”
손을 내밀어 감을 만지려던 동이의 손길이 다시 허리춤으로 가 안짱걸이를 하였다. 동이는 고개를 젖혀 한참을 노려보며
“뭐, 너 뭐라고 했어, 이까짓 감을 가지고...... 안 먹어, 다시 그런 말 하면 너 죽어”
그러고 침을 착 뱉고 돌아서자 춘석이는 졸졸 따라오며 감을 내민다. 동이는 감을 받아 땅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감이 두 쪽이나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춘석이에게 발길질을 하며
“저리 안 가! 이 개자식아”
춘석이는 고개를 마구 흔들어대며 괴성을 질렀다. 까마귀가 우는 듯한 불길한 소리와 몹시 아픈 듯 기괴한 표정이었다. 놀란 동이는 슬슬 뒷걸음질 쳐 집으로 돌아왔다.
동이가 혼자서 동구밖에서 마을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을 날씨치고는 여름날씨처럼 후텁지근한데 동네 사람들은 모두 어디를 갔는지 마을안이 텅 빈 듯하다. 오직 저 건너 솔밭에 두사람이 술래잡기라도 하듯 쫓기며 쫓고 있었다. 동이는 그 모양을 한참 들여다 보다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다름 아닌 누나와 춘석이었다. 누나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로 달아나는데 춘석이가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그런데 놈은 바지도 입지 않고 검은 털이 난 아랫도리 그대로였다. 지난 여름 보았던 그 흉물스러운 것을 덜렁대며 누나를 쫓아 가고 있었다.
잠시 얼어붙은 듯 바라보던 동이는 온 힘을 다해 달려 나아갔다. 달리면서 큰 짱돌을 줍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 따라 그 흔한 돌맹이 하나 보이지 않는다. 누나가 제발 이 놈을 피해 동이 쪽으로 오면 하는데 자꾸 산으로만 쫓겨간다. 숨이 꽉 차올라 악을 쓰는데도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춘석이 놈은 엉거주춤 굼뜨던 때와는 달리 누나를 향해 집요하게 쫓아가고 있었다. 눈빛을 번들거리며 흐흐거리고 침을 흘리는 꼴이 영낙없이 덩치 큰 수캐 모양이다. 마침 저만치 큰 차돌이 보인다. 동이는 달려가 차돌을 움켜지고 힘껏 던졌다. 그러나 허공만 가를 뿐이다.
누나의 치마 폭이 춘석이의 손에 잡혔다.
동이는 입으로 물어뜯어야겠다 싶어 이를 악물고 뛰었다. 발에 뭔가 걸린다 싶었다. 풀매듭이었다. 사정없이 앞으로 넘어져 뒹굴었다. 코가 깨졌는지 피가 흐른다. 그 사이 춘석이가 누나를 덮쳐 들었다. 예전에 커다란 춘석이네 집 검은 수캐가 희고 예쁜 동이네 집 암캐와 대를 붙었었다.
“안 돼! 안 돼! 이 개자식아”
소리지르며 일어서려 해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온 몸을 뭔가 짓누르듯 꼼작할 수 없어 동이는 몸부름 치다 엎어진 채로 엉엉 울었다.
아침에 날이 새자 동이는 큰누나에게 곧장 갔다. 지난 밤의 악몽으로 늦잠을 자 학교에 늦을 수도 있었지만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누나!”
“응, 무슨 일 있니?”
“춘석이가 글쎄……. 이 나쁜 놈이 글쎄......”
“너를 때렸어?” 큰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이를 살펴보았다.
“아니......”
“그럼?” 누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동이의 손을 잡고 차분히 이야기해 보라고 하였다. 동이는 어제 저녁에 겪은 일을 그대로 말하였다. 그러자 누나는 까르르 웃으며
“왜 그 아까운 것을, 그냥 받아오지 않고 ” 하며 배꼽을 잡고 웃는다.
대수롭지 않아 하는 누나의 태도에 동이는 머쓱해졌다.
“그래도 난 걱정이란 말이야”
“그럼 우리 동이가 날 지켜주면 되지.”
누나는 귀여운 듯 동이의 빰을 토닥거렸다.
그런 일이 있고 하루가 지난 아침이었다. 동이가 일어나 세수를 하고 돌아오는데 춘석이가 자기 집에서 나와 동이네 집 절구통에 무엇을 넣고 쏜살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급히 절구통 안을 살펴보니 깨진 바가지에 단감이 소담스럽게 담겨져 있었다. 동이는 곧장 이 일을 작은 방의 큰 누나에게 일러 바쳤다. 큰 누나는 미소 지으며
“맛있겠다. 이리 가져와라”
“싫어!”
“괜찮아, 그렇잖아도 단감이 먹고 싶었는데......, 춘석이가 누나가 좋아서 주는 감인데 되돌려 주면 서운하잖니” 큰누나의 말에 작은 누나까지 나서
“바보, 내가 가져올게” 하며 냉큼 절구통에서 단감을 가져왔다.
그날 누나들은 좋아났다. 그러나 동이는 그러는 춘석이가 괘씸하고 괴이하여 감을 먹지 않고 휭 나가 버렸다. 이후 사흘 동안 동이는 춘석이와 집 앞에서 마주쳐도 외면하며 휙 지나가 버렸다.
이번 주말이면 큰누나가 집을 떠나 서울로 간다.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숙제를 하려던 차에 누나들 방에서 동이를 불렀다. 누나들은 까르르 웃으며 뭔가 재미나 죽겠다는 표정이다. 동이가 들어서자 큰누나가 웃음을 멈추고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동이야, 춘석이한테 감 좀 더 달래라.” 동이가 시큰둥하자 큰누나는 달래듯 말한다.
“서울에 가면 누나 친구들에게도 우리 동네 맛있는 감을 자랑하고 싶어 그래”
“왜 꼭 춘석이네 감이야. 다른 집 감도 있는데.”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게 그 집 단감이잖니? ”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누나하고 바꿔 준다고 하면 되지 뭐”하며 막내누나까지 세 자매가 까르르 웃었다.
“난 그런 말하는 춘석이가 싫단 말이야”
그러자, 작은 누나가 나서며
“바보야, 바꿔준다는 말은 언니가 요 다음에 네 선물을 사가지고 올 때 춘석이 선물도 사가지고 온다는 뚯이야”
큰누나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게 좋겠다. 다음에 올 때 춘석이 선물도 사오지 뭐”
“그렇지만 춘석이가 누나를 쫓아가면 어떻게?”
“춘석이를 소포로 부치면 몰라도 버스나 탈 줄 알다던?”
하며 또 세 사람이 까르르 웃는다.
“그래두 난 싫어!”
“그래, 그럼, 관둬라. 내가 이야기 하지 뭐”
저녁때 작은누나는 골목에 나온 춘석이에게 뭐라고 한참 이야기를 하였다.
이튿날 춘석이는 단감나무 밑에서 서성대며 감나무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실댁이 일을 나간 후 춘석이는 나무에 올라 갔다. 보다 더 굵고 탐스럽고 잘 익은 감을 따기 위해 점점 더 높이 올라갔다. 휘청거리는 가지 끝이라도 감만 좋으면 안간힘을 다하여 따려고 했다. 축대 아래에는 바위 덩이가 몇 개 있었다. 평상시에 조실댁이 주의를 주어서 그 쪽 가지의 감은 손을 타지 않아 큰 감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은 위태로움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따고 싶은 목표물이 정해지면 위태한 곡예를 하며 필사적으로 따내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 좋은 감이 눈에 띄었다. 동이 누나의 몸매처럼 골이 깊고 둥근 감이었다. 순간 춘석이의 눈이 빛났다.
동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큰누나는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썩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동이를 보고 애써 미소를 짓지만 슬픈 표정이었다. 동이도 슬펐다. 집을 떠나 서울로 가면 한동안 큰누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일 년이면 두세 번 집에 들렀다. 그나마 올 가을이 가장 오래 머물다 가는 것이다.
“누나 이제 가면 언제 와?”
“글쎄, 동이가 보고 싶으면 오지 뭐”
“치, 거짓말”
“그래, 그전에는 어렵고, 설 때는 꼭 올게”
동이는 누나 곁에 바짝 다가서 귀에 대고 말을 했다.
“춘석이가 감 가져왔어?”
그러자 누나는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쉬-’하며
“아니......”
“치, 그럼 선물도 사오지 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동이의 손을 잡아끌며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동이야, 감하고 누나하고 바꾸쟀다는 말은 절대 비밀로 해야 돼”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자기도 모르게 동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쉬- 다행이구나, 네가 말하지 않았으며 됐어”
누나는 다시 입에 손가락을 대고, 보다 차갑게 말했다.
“어제 밤에 했던 말은 일체 없었던 것으로 해”
“......”
그리고 다시 다짐을 받듯
“동이야, 누나 말 잘 알아 들었지?”
“응, 알았어. 걱정 마, 누나”
“그래, 우리 동이는 똑똑하니까”
이튿날, 누나는 서울로 떠났다.
누나가 떠나고 며칠이 지나서 조실댁이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춘석이는 다시 볼 수가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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