寒食(한식)
韓翃(한굉)
春城無處不飛花(춘성무처부비화)
寒食東風御柳斜(한식동풍어류사)
日暮漢宮傳蠟燭(일모한궁전납촉)
輕煙散入五侯家(경연산입오후가)
봄날 성에는 꽃이 날리지 않는 곳 없고
한식날 동풍에 궁궐 버들이 휘날린다.
날 저물어 한궁(漢宮)에서 초를 전하니
가벼운 연기 오후가(五侯家)로 흩어져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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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釋] 봄날 장안성에는 곳곳마다 꽃이 날리고, 한식날 봄바람이 불자 궁궐의 늘어진 버들가지는 바람 따라 흔들린다. 날이 저물자 궁궐에서는 납촉(蠟燭)을 하사하는데, 그 납촉은 가벼운 연기를 피우며 오후(五侯)와 같이 부귀한 권세가의 집에 전해진다.
○ 이 시는 한 편의 풍자시로, 한(漢)나라의 일을 가지고 당(唐)나라의 일을 비유하였다. 《서경잡기》에 보면, 한나라 때 한식날에는 전국이 모두 불을 금하였지만 황제가 오히려 제후 등 귀족에게 납촉을 하사하여 불 밝힐 것을 특별히 윤허함으로써 은총을 보였다고 한다. 이 시는 곧 옛일을 빌려 오늘을 비유함으로써, 황가(皇家)의 은택이 상층부에만 미쳤음을 나타내었으니, 생활 속의 작은 일도 그들에게 특권을 갖게 해준 것이다.
[解題] 이 시는 한식을 소재로 하여 그날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납촉을 하사하는 일을 가지고 당나라 숙종(肅宗)‧대종(代宗) 이래 환관(宦官)들이 정권을 천단한 것을 풍자하고 있다.
앞의 1‧2구는 한식날 장안성의 풍경을 그렸는데, ‘春城(춘성)’, ‘飛花(비화)’, ‘寒食(한식)’, ‘東風(동풍)’, ‘御柳(어류)’ 등의 시어가 봄의 이미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중 2구는 ‘寒食’이라는 제목을 노출시킴과 동시에 ‘御柳’라고 하여 장안성에서 궁중으로 시적 공간을 집약시켰다. 이러한 배경 묘사를 바탕으로 3‧4구는 그날에 궁중에서 행해지는 일을 서술하였다. 즉 3구는 漢宮에서 초를 전해주는 일을 말하고, 4구는 한식 때 나눠주는 초가 오후가(五侯家)에게만 하사됨을 표현하였다. 여기서 4구는 단지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지만, 당시 환관들이 총애를 받고 있는 것을 풍자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당나라는 숙종(肅宗) 연간 이후부터 환관(宦官)들이 권력을 천단하였고, 덕종(德宗) 때에는 더욱 심하였는데, 君平(한굉)의 이 시는 풍자한 것이 완곡하면서도 지극하다. 덕종 때에 지제고 자리가 비었는데, 한굉을 낙점하였다. 아울러 이 시를 써서 중서사인(中書舍人)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 시를 한굉에게 주어라.”(당시 조정에 두 명의 한굉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또한 이 시를 보고 깨달은 뜻이 있어 특별히 그를 채용한 것일 것이다.
역주
역주1> 寒食(한식) : 절기명으로, 《荊楚歲時記(형초세시기)》에 “동지로부터 105일째인데, 이때는 바람이 거세고 비가 와서 한식이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또 불에 타 죽은 진(晉)나라 개자추(介子推)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은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한다. 〈寒食卽事(한식즉사)〉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역주2> 春城(춘성) : 봄날의 장안성을 말한다.
역주3> 御柳(어류) : 궁궐 안의 버드나무를 지칭한다.
역주4> 漢宮傳蠟燭(한궁전랍촉) : ‘漢宮(한궁)’은 한대(漢代)의 궁궐인데, 당시(唐詩)에서 ‘漢’은 唐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따라서 여기서의 ‘한궁’은 당나라 궁궐을 말한다. ‘傳蠟燭(전랍촉)’은 《西京雜記(서경잡기)》에 “한식은 불을 금하는 날인데, 제후의 집에 초를 준다.[寒食禁火日 賜侯家蠟燭]”는 기록이 보인다.
역주5> 輕煙(경연) : ‘靑煙(청연)’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역주6> 五侯家(오후가) : 《漢書(한서)》 〈元后傳(원후전)〉에 “한(漢) 성제(成帝)가 같은 날에 왕담(王譚)을 평아후(平阿侯)에, 왕상(王商)을 성도후(成都侯)에, 왕립(王立)을 홍양후(紅陽侯)에, 왕근(王根)을 곡양후(曲陽侯)에, 왕봉시(王逢時)를 고평후(高平侯)에 봉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五侯(오후)’는 동시에 侯에 봉해진 다섯 사람을 지칭하는데, 역사적으로 五侯는 상당히 많다. 여기서는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던 환관(宦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西京雜記(서경잡기)》에 “한식은 불을 금하는 날이기 때문에 제후 집에 납촉을 준다.”고 하였다. 또 《漢書(한서)》에 “성제(成帝)가 여러 외삼촌을 봉하여 왕담(王譚) 등 다섯 사람이 같은 날 侯가 되니, 세상에서 이들을 오후(五侯)라 하였다.”라고 하였고, “환제(桓帝)가 환관들을 봉하여 단초(單超) 등 다섯 사람이 같은 날 후가 되니, 세상에서 이들 역시 오후(五侯)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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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굉[韓翃] : 당나라 등주(鄧州) 남양(南陽, 河南에 속함) 사람. 자는 군평(君平)이다. 천보(天寶) 13년(754) 진사에 급제했다. 시를 잘 지었고, ‘대력십재자(大曆十才子)’의 한 사람이다. 안사(安史)의 난 이후 후희일(侯希逸)이 치청(淄靑)을 지킬 때 불러 종사(從事)로 삼았다. 그 후 사직한 뒤 10년 동안 한거(閑居)했다.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이면(李勉)이 다시 불러들여 막료로 삼았다. 덕종(德宗) 건중(建中) 초에 시로 덕종 이적(李適)의 칭찬을 받았고, 가부낭중(駕部郎中)으로 지제고(知制誥)에 발탁되었다. 당시 한굉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은 자사(刺史)였다. 재상이 누구를 말하느냐고 물으니 황제가 시인 한굉을 가리켰다고 한다. 관직은 중서사인(中書舍人)까지 이르렀다. 원래 문집이 있었지만 전하지 않고, 명나라 사람이 편집한 『한군평집(韓君平集)』이 있다. 『전당시(全唐詩)』에 시 3권이 수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굉 [韓翃]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이회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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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寒食) : 동지로부터 105일 째의 날이다. 양력으로 4월 5일 또는 6일에 해당한다.
한식에는 술·과일·국수·떡·탕·포 등 여러 음식을 만들어 산소에 가져가서 제사를 지낸다. 또한 보자기에 싸간 낫으로 풀을 베거나(이것을 벌초(伐草)라 한다) 무덤의 잔디를 새로 입히기도 한다.
<한식의 유래>
중국 춘추 시대 진(晋)나라에 문공이란 왕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죽고 나라 안이 어수선해지자 여러 나라를 떠돌게 되었다. 문공의 충성스런 신하 개자추는 문공의 허기를 채워 주기 위하여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내어 구워 먹이기도 하였다. 나중에 임금이 된 문공은 개자추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문공이 개자추를 불렀으나 개자추는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으나 그래도 개자추는 어머니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불타 죽었다. 문공은 너무 가슴이 아파 해마다 이날이 되면 불에 타 죽은 개자추의 충성심을 기리고자 불을 때지 말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한식날이 되면 개자추의 넋을 위로하고자 불을 지펴서 따끈한 밥을 해 먹지 않고 찬밥을 먹는다고 한다.
한식은 양력으로 대개 4월 5일이나 6일쯤 되므로 식목일과 비슷한 때이다. 이 무렵은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기에 알맞으므로 특별한 놀이를 하지 않고 조상의 묘를 찾아 차례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면서 조용히 하루를 보낸다. 비가 잘 내리지 않는 건조기인데도 개자추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비가 내리는 한식을 '물한식'이라 하며, 이날 비가 내리면 그해에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위키백과>
개자추(介子推) : 중국 춘추 시대의 은인(隱人)(?~?).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공자(公子)일 때 19년 동안 함께 망명 생활을 하며 고생하였으나, 문공이 귀국하여 왕이 된 후 자신을 멀리하자 면산(緜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문공이 잘못을 뉘우치고 자추가 나오도록 하기 위하여 그 산에 불을 질렀으나, 나오지 않고 타 죽었다고 한다.
[출처] [당시삼백수]한식(寒食) - 한굉(韓翃)
[출처] [당시삼백수]한식(寒食) - 한굉(韓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