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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1:12~21. 도리어 이런 일이 진보를 이루었으니. 2024. 9. 15.
어떤 분이 일본의 생활을 정리한 이후에 그간의 심경을 표현하셨는데 지난날이 너무나 후회가 되고 지워버리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혹시 살아온 인생가운데 혹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이 있으신가요? 여러분, 삶은 항상 화창한 날만 있는 것은 아니고 사시사철의 변화가 있으며 웅덩이와 높고 낮은 곳이 있습니다. 안전의 울타리가 무너지는 때도 있고 풍랑이 일어나는 고난도 있습니다. 마14:24-25.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항해할 때 갑자기 풍랑을 만납니다. 밤 사경이었는데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그렇습니다. 두렵고 혼자인 것처럼 느껴질 때와 고난을 만날 때,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 걸어오셨습니다. 막6:8에.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다가오시는데 지나가려고 하시매. 이표현의 의미는 그냥 옆을 지나가는 표현이 아닙니다. 헬라어의 의미는 어떤 중요한 의도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오경에 하나님이 모세를 지나가려 하심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모세의 옆을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모세를 만나기 위하여 간섭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때로는 폭풍이 몰아치고 그 가운데 괴로워하며 노를 저을 때가 있습니다. 후회가 되고 지우고 싶은 시간이 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깝고 안타까운 그런 시간들이 있습니다. 한 두 해도 아니고 무려 3,4 년쯤 되는 세월이 있고, 10년이 넘는 긴 세월을 보낸 사람도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야 어떤 실수와 실패를 공부했다고 여기면 될 일이지만, 불혹의 나이가 지난 이후에 그런 시간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때에 시작을 못 하고 결단하는데 몇 년 걸린다면 후회가 되겠지만 그러나 그때 겪었던 이런 저런 경험들이 꼭 해롭지 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을 겪지 않았다면 경제적 약자들이나 이렇다 할 인맥 없는 사람들의 고충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만약 그때 그런 시간이 없었다면, 빚진 사람이나 일 없는 사람들의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은 절대 모르고, 만약 그때 그런 시간이 없었다면 소망도 없고 기다릴 미래가 없는 사람들의 막연하고 암담한 심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에 있어서 별 의미가 없는, 지우고 싶었던 시간들이 오히려 약이 될 때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일과 시간이 있지만 그렇게 낭비했고 기억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얼마나 예기치 않은 상황과 생각도 못한 일들을 겪었습니까? 꿈이면 좋겠다 싶은 일, 다시는 오지 않길 바라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물론 이런 시간들이 없기를 바라지만, 크든 작든 그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신앙 안에서의 태도와 시각입니다. 오늘 본문은 영오의 몸이 된, 감옥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적을 기뻐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에 처하는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믿음의 눈으로 고난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내게 올 때 그 고난이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그대로 두실 기도 합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관점에서 고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고난 가운데 임한 어려운 환경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각과 너무나 다른 것들을 사용하시고, 다른 여건과 환경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출애굽을 위하여 강력한 무기를 주시지 않고 냄새 나는 인생의 지팡이, 80노인을 지탱해주는 지팡이를 사용하셨습니다. 거인 골리앗과 싸울 때에 다윗에게 날카로운 칼과 창을 주시지 않고 물맷돌 몇 개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골리앗의 칼로 골리앗을 제거하게 했습니다. 주님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른 바울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충실한 사람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공회원이요,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죄수로 보내시고 지하 감옥에서 쇠사슬과 착고에 메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빌립보 교회를 세운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성도들이 얼마나 걱정을 했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12절, 형제들아 걱정 그만해라. 나의 당한 이일,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매인 이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 내가 자유롭게 로마 시내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큰 진보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바울이 당한 이 일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감옥에 있는 상황입니다. 옥중에서 처음 유럽 땅을 밟으면서 세웠던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감옥에 갇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감옥에 갇히게 되면 복음을 전할 수 없잖아요. 자유롭게 복음 전하며 다니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지요. 그것도 재판 없이 2년간이나 그 곳에 갇혔습니다. 빨리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시간이 별로 없는데~ 하면서 노심초사했습니다. 한 두 달도 아니고 2년씩이나 갇혀 있었으니 얼마나 갑갑했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옥에서 나갈 한 가지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합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이 있었습니다. 원래 로마시민은 재판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나 구금을 당하지 않습니다. 로마시민의 권리이고, 로마인의 특권입니다. 지배계급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굳이 로마 시민인 것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만약 황제에게 상소를 하면, 그 로마시민인 죄수는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도록 법이 정하고 있습니다. 일단 상소를 하면 그 죄수는 무조건 로마까지 압송해야 합니다. 바울의 계획은 그냥 소박하게 가이사랴 빌립보 감옥을 나가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일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 또한 평탄치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그가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중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납니다. 지중해를 따라 가다가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나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거의 보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고, 호송하던 배는 다 깨져서 수많은 양식까지 바다에 던져야 됐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뱃길에서 살아남아 로마에 도착하게 되고, 그 로마의 감옥에서 다시 2년이란 세월을 보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지금 거의 4년에서5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 상황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쓴 옥중 편지입니다. 무척 답답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긴 세월 동안 감옥 문을 열어주시지 않는 것일까? 왜 풀어 주시지 않을까? 언제 감옥의 문이 열릴지, 그 감옥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될 지 아무런 기약이 없습니다. 막막한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괴로웠습니다. 내일이 확실치 않았고, 사형당할 징후만 더욱 짙어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주 귀한 고백을 하는데, 당한 일이 복음 전파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참 억울하고 한심한 옥살이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자기의 당한 일이 자기의 꿈을 이루고 비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걱정하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가 내 일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오히려 이 일로 복음 전파에 놀라운 진전과 진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중요한 단어와 표현이 나옵니다. 진보, 메임, 그 밖의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진보와 메임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가요?
1. 진보, 헬라어 프로코페 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진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었는데요, 진전과 진보와 전진, 모두 프로코페입니다. 그 뜻은 나무를 찍어가면서 앞으로 전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군대용어로 공병대가 장애물을 제거하고 길을 놓거나 다리를 놓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로마군은 어디를 가든지 길을 뚫고 도로를 냈습니다. 말이 끄는 전차가 자유롭게 통행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프로코페입니다. 로마의 도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된 것 때문에 모든 길은 로마로 라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이태리와 스코틀랜드 바로 아래부터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갈리아 지방, 지금의 영국, 독일, 프랑스지요- 그리고 동쪽으로는 옛 유고연방, 헝가리, 그리스 등 동유럽 전체와 나아가서 터어키와 이스라엘, 시리아, 요르단, 유프라테스 강 바로 전까지 로마의 도로를 프로코페 했습니다. 유럽의 고속도로가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닦아놓은 로마가도를 포장만 해서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의미가, 바울의 당한 일이, 후회 스러운 일이, 지우고 싶은 나날들이 바로 그 길처럼 로마의 광활한 지역을 모두 프로코페했다는 뜻입니다. 감옥에 갇히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절대로 생길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요? 13절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복음의 새로운 영지는 시위대이었습니다. 시위대는 황제의 경호를 맡는 친위부대입니다. 유력한 집안의 자식들이었고, 로마정신에 투철한 사람들입니다.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키는 경호부대이었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받았고, 좋은 조건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해서 원로원 의원들이나 상권을 쥐고 있는 자식들은 하나같이 이 시위대에 뽑혔습니다. 이 부대를 처음 조직한 황제가 바로 그 유명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이었고, 그 수는 만 명 정도입니다. 아무나 시위대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로마 정치의 핵심이요, 로마의 사상과 정신에 투철한 사람이었고, 최정예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 가운데 바울이 들어갔습니다. 바울의 꿈과 비전이 이루어지도록 로마황제의 최 측근까지 프로코페 했습니다. 당한 일을 통해서, 지우고 싶은 일을 통해서, 후회 스러운 일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이룰 수 없는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나온 세월과 당한 일을 통해서 반드시 여러분의 꿈과 소망과 비전이 이루어지도록 여러분의 길을 프로코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메임입니다. 메임은 시위대 병사들이 지키던 로마의 감옥에 들어가게 된 바울의 상황입니다. 여기서 그냥 매임이라고 하지만 엡6:20절과 행28:20절에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쇠사슬에 메인바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메임이 아니고,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는 쇠사슬입니다. 사방팔방 막혔습니다. 땅은 저절로 막히고 동서남북 사방과 하늘이 전부 막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이 메임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쇠사슬에 매였다는 이것이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와 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는 중 죄수를 가둘 때 간수 두 사람이 죄수의 양쪽 팔에 각각 손을 같이 묶어두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탈옥을 방지하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만의 하나 있을지 모르는 죄수의 자살을 막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양쪽에서 손끼리 묶어두었을 뿐 아니라 감옥 문 앞에는 별도로 두 명의 간수가 지켰습니다. 한 사람의 중죄인을 지키기 위해서 네 사람의 시위대 병사들이 배당되었는데 하루에 여섯 시간씩 4교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곁에는 하루 최소한16명의 시위대 군인들이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때 사도 바울이 무엇을 했을까요? 바울이 무엇에 미쳤습니까? 행전21, 22, 23장을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의 일이 나옵니다. 바울은 성전 안에서 결례, 즉 씻는 예식을 하다가 성난 군중들에 의해서 린치를 당합니다. 이 때 예루살렘 치안을 맡고 있던 로마의 천부장이 부하들을 풀어 사태를 진정시키고 몰매를 맞아 죽기 직전까지 갔던 바울을 구해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다시 천부장에게 부탁해서 유대인들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을 하고 유대인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 놓았더니, 힘겹게 일어나서 또 예수님을 이야기입니다.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파합니다. 바울은 언제나 프로코페입니다. 바울은 매일 때나 자유할 때나 언제, 어디서든지 푸로코페 했는데 복음이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감옥에 갇혀서 시위대 군사들과 함께 쇠사슬에 묶여 있을 때 무엇을 했을까요?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어요? 하루 종일 얼굴을 마주보면서 아무 할 일도, 아무 할 이야기도 없는 사람들을 두고, 시위대, 젊은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으로서 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는지, 왜 그 분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지, 그 분이 이 땅에서 하셨던 일은 무엇이며, 나중은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인지, 행복은 어디 있으며, 천국과 영원한 나라는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했습니다. 시위대 병사들은 근무가 끝난 중에도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바울이 파렴치범이 아니라, 양심수 같은 사람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예수 믿게 된 동기와 왜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왜 당시의 최고학부를 나오고서도 그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렸는지, 왜 로마시민권을 가지고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해들은 시위대 병사들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렸습니다. 로마를 움직이고, 로마의 정신이며 사상을 대표하던 젊은이들의 중심으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은 로마의 중심부에 들어가서 로마를 움직이던 사람들을 강타하고, 복음은 이 조그만 감옥에서 2년 동안이나 쉴 새 없이 로마의 정신을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갇혀있던 감옥은 두 평도 채 되지 않는,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그저 작고 침침한 방입니다. 하지만 그 조그만 방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 복음을 들은 누군가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것은 그 가족에게로 들어갔고 그 복음은 황실의 친척에게로 들어갔고, 그의 친구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황제의 아주 지척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네로 황제의 삼촌과 친척들이 예수를 믿었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어머니와 딸들도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에는 로마의 온갖 고위관리들이 함께 했습니다. 로마의 법정은 피고가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울이 무엇을 했을까요? 로마법이 잘못 되었으니 공정한 법 집행을 요구했을까요? 아니면 목숨이 아까워서 살려 달라고 했을까요? 나는 지금 당신들의 배려로 나를 변호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를 위하여 변호할 아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이나 죽음이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성실로 나를 기소했습니다. 나도 나의 성실로 이 법정에까지 오게 하신 예수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원로원 의원이신 분이나 여러분의 자녀와 황제폐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토록 찾아 해매는 평정과 파라다이스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주 예수만이 오직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 재판정에서 나를 죽이자고 판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 육체는 죽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죽일 수 있는 것은 그 뿐입니다. 내 영혼은 여전히 살아서 예수를 전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 죽음을 두고 걱정하겠지만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여러분입니다. 나는 내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계속해서 증거할 것이고, 그 일을 마치기까지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다. 이제 결정은 여러분의 몫이지만 다시 한 번 호소합니다. 예수 안에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세계를 경험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바울의 모습을 눈여겨본 많은 귀족들이 감옥으로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주후 60년경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시위대와 로마의 고관대작들에게 복음을 전한 지 불과 250년 만에 그 거대하던 로마 제국은 나사렛의 목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무너집니다.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이 되고 주후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는 오직 하나의 종교, 기독교만을 선포했습니다. 결국 시위대부터 시작한 복음이 로마의 황궁과 제국 전체에 전파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임은 이런 것입니다. 메임 때문에, 당한 일 때문에, 지우고 싶은 일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그리고 여러분의 비전을 이루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란 무슨 표현입니까? 확장과 영향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고정되거나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메임이 시위대 뿐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감옥 생활이 이런 복음의 진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빌4장 끝에,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마지막 문안인사를 하는데 "모든 성도들이 - 로마교회 교인들이- 너희에게 -즉 빌립보 교인들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의 집 사람 중 몇이니라. 여러분! 여기서 "가이사의 집 사람 중 몇"이라는 말이 누구를 지칭합니까? 가이사, 시저 로마의 황제입니다. 그 황제의 친척들과 황궁에 있던 고위관료들입니다. 그들 중에 몇 명이 목숨을 내놓을만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당한 일, 바울이 당한 일 뒤에 숨어있던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시위대 병사들에게, 법정에서, 자기를 찾아 온 고위관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감옥에 몇 년간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4, 5년 동안 감옥에 두셨던 이유를 깨달았고 알았습니다. 복음의 진전이 이루어진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롬8: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래서 사랑하는 디모데에게는 유언처럼 말을 했습니다. 딤후2: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메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메이지 아니 하니라. 여러분, 오랜 시간 동안 어려운 환경 때문에 답답하고 실망이 되십니까? 왜 이런 어려움이 계속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막힌 감옥처럼 절망이십니까? 원인을 알면서도 내 힘과 능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앞에서 한숨이 나오십니까? 인간관계와 삶의 여력 때문에 심장이 터지십니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어려운 환경과 역경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입니다. 메임이 복음의 진전을 가져온 것처럼 여러분의 역경과 고난은 여러분의 인생을 한 걸음 더 전진하게 할 것을 믿으십시오!!! 물론 지금은 그 당하는 일의 이유를 모를 수 있습니다.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바닥에 그 이름을 새겨놓은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피로 구원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냥 두시겠습니까? 세밀한 주의 음성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아! 너희가 당하는 일을 통해서 이루려는 계획과 뜻이 있는데 힘을 내라! 용기를 내라! 내가 옆에 있잖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있고 너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이 어려운 때에 어떻게 이겨나가나 보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당한 일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전이 되었노라! 나의 당한 일이 내게 복된 일이 되었노라! 나의 당한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복이 되었노라! 이렇게 외치시며 승리하시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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