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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재림마을,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안식일교회 大논쟁1(1996년 8월호)
--문제제기--
기성교회가 안식교를 이단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삼경/ 예장(통합) 사이비이단문제 상담소장·<교회와신앙> 발행인
진용식/ 전주 성산교회(합동측) 담임목사·<교회와신앙> 편집위원
서론 : 안식교의 이단시비와 관련된 최근의 상황
기성 교회는 대체로 안식교를 이단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기성교회 안에 몇몇 사람들이 안식교를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안식교의 이단성을 모르는 사람들을 미혹되게 하는 일이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을 뽑는다면 주간지 <기독저널>의 발행인 이흥선 씨요, 또한 예장 통합측 소속 무학교회의 장로로서 교계에 찬송가 해설가로 잘 알려진 김경선 씨라고 본다.
이흥선 씨는 처음에는 이단의 범주에 통일교와 여호와의 증인과 안식교를 넣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안식교의 이단성을 재점검한다는 논지 하에 글을 쓰고 또 공개토론회를 열더니 결국 안식교마저 이단의 굴레를 벗겨 주었다. 그가 점검하기 전에는 안식교도 이단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이단이 아니라고 한 점을 볼 때,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도 그 이단성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고 혹 결과는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마저도 안식교처럼 이단이 아닐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이 왜 이단인지 아직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경선 씨는 자신의 ‘도서출판 여운사’를 통하여 안식교의 책들을 출판해 주고 안식교를 이단이 아니라고 함으로 안식교인들에게 기성교인들을 미혹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 사람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누구를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도, 이단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자유도 있다. 그것은 언론 또는 학문의 자유 내지는 종교의 자유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본호로부터 시작하여 10회의 논쟁이 이어지는 동안 저들의 잘못은 물론 왜 안식교를 이단이라 할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될 것으로 믿는다.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것은, 안식교는 자신들이 정통교회라고 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정통교회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기성교회란 이름을 사용하는 점을 독자들은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 동안 본지가 안식교와 논쟁을 벌여 온 과정
이번 논쟁이 있기 전에 이미 본지에서 안식교와의 논쟁이 있었다. 논쟁은 본지 94년 2월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안식교 측에서는 김상래 목사가 나섰으며 본지에서는 진용식 목사가 나섰다. 그런데 웬일인지 두 차례의 논쟁이 진행되다가 안식교 측의 김 목사가 일방적으로 논쟁을 중단함으로 진 목사는 다시 논쟁을 촉구하는 글을 두 번 게재하였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논쟁을 중단한 어떤 이유가 있는지 그 변명도 들어보아야 하겠지만, 이제라도 안식교 측에서 이렇게 지상 논쟁에 응한 것은 참으로 용기 있는 일이라 생각되며 진리를 밝힐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믿어 기쁜 마음으로 이 논쟁을 재개하는 것이다.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논쟁을 중단해 버렸던 안식교 측에서 얼마전에 웬일인지 이흥선 씨가 주최하는 토론회에 참여하라는 서신을 필자(최삼경)에게 보내왔다. 그래서 이흥선 씨가 개최하는 토론회는 인정할 수 없으며 또한 토론회는 먼저 충분한 지상 논쟁이 있은 후에 가능하다는 답신을 주었는데 그것이 본 논쟁의 문을 다시 여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어쨌든 안식교 측의 결단을 귀하게 여기는 바이다. 아무쪼록 본 논쟁이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기를 바라며 다음과 같은 점을 요구하는 바이다.
이번 논쟁은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1) 약속된 기간 전에 중단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 번에는 안식교 측에서 일방적으로 논쟁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만은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논쟁을 하여 한국교회에 유익한 기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논쟁은 힘의 싸움이 아니라 진리의 싸움이라고 믿는다. 자신이 믿는 진리가 참 진리라는 주관적인 확신만 있어도 진리를 숨기려는 자는 없을 것으로 믿는다.
2) 가능하면 많은 안식교인들도 이 논쟁을 지켜보기를 바란다.
분명히 기성교회 측이나 안식교 측이나 각각 이 논쟁을 하는 내적인 목적과 유익은 다를 것이다. 안식교 측에서는 중단한 논쟁을 재개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 하지 않으면 안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던지, 아니면 할 때 무슨 유익이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외적으로 공통점이 있다면 각각 자기 편에서 자신들이 믿는 신앙이 진리라고 여기고 있다는 점이요, 나아가 안으로는 자신들의 신앙의 우월성 내지는 진리성을 재확인시키자는 것이요, 밖으로는 잘못된 진리를 떠나서 참 진리를 따르게 하자는 목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안식교 측에서도 많은 교인들이 이 논쟁을 지켜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안식교 측에서 기성교회 목사들이나 성도들에게 자신들이 출판한 책자들을 임의로 보내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본지는 주로 기성교인들이 보는 책자이기 때문에 안식교에서도 이에 준하는 언론을 선정하여 똑같이 이 논쟁 내용을 게재하는 것이 평형에 맞는 일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필자는 안식교의 매체인 <교회지남>에도 이 논쟁 내용을 실어 주기를 요구하였다. 안식교 편에서 그렇게 할 용기가 있는지 지켜 볼 일이다. 필자는 안식교가 기성교회 편에서 볼 때 이단이라는 소신에 변함이 없기 때문에 기성교회 교인들이 본 논쟁을 많이 지켜보면 볼 수록 더 유익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안식교 편에서는 본 논쟁을 기성교회 교인들만 지켜보게 함으로 기성교회 교인들에게 안식교 교리를 소개하고자 하는 장으로만 이용할까 염려스러워 하는 말이다.
3) 핵심을 피해 가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 번 진용식 목사와 김상래 목사와의 논쟁에서 김 목사는 논쟁의 초점을 피해 가기에 급급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김 목사의 글을 보면 안식교가 기성교회보다 우월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기성교회 편에서 보아도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인지, 지금까지 안식교가 율법주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인지, 화이트가 잘못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기성교회가 안식교를 이단으로 보던지 말던지 상관 없이 안식교 편에서 볼 때 기성교회가 이단이 아니라는 말인지, 아니면 이단이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안식교 편에서 안식교가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본 논쟁의 핵심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옳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이나, 기성교회 편에서 보아도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는 논지가 핵심이 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본 논쟁에서는 이 점에 대한 선명한 입장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본론 : 왜 안식교를 이단이라 하는가?
먼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교단에서 안식교를 이단으로 규정한 내용을 소개하고 이어서 필자의 입장을 간략히 정리한 후 다음부터 항목마다 밀도 있게 왜 안식교가 이단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I. 예장 통합측에서 안식교를 이단으로 규정한 내용
1. 한국의 안식교 현황
미국에서 시한부종말론주의자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의 사상을 이어 받은 엘렌 지 화이트(Ellen G. White)로부터 시작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Seventh day Adventists 일명 안식교)는 1904년에 하와이로 이민 가던 한국인들이 일본 체류 중에 안식교인이 되어 되돌아와 포교를 시작하므로 한국에 유입되었다. 현재 전국에 800개가 넘는 교회와 120,000명이 넘는 신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 기관으로는 병원(위생병원)과, 교육기관(삼육 초·중·고·대학교, SDA영어학원)과, 출판사(시조사, 월간 「시조」 발행)와, 삼육식품 등이 있다.
2. 윌리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과 안식교의 출발
안식교는 1844년 10월 22일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윌리암 밀러의 소위 시한부종말론에서부터 그 뿌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불발로 끝난 윌리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인 엘렌 지 화이트가 계시를 받아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을 나름대로 재해석함으로 생겨난 종파가 모여서 소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Seventh day Adventists)가 만들어졌다.
3. 율법적인 구원관
안식교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고는 있지만 실상은 행함으로 얻는 구원을 주장하는 집단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하고 있고, 현세의 완전한 성화를 주장하고 있으며, 또한 품성의 변화를 위해서 부정한 음식과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강조하기 때문이다.(「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기본교리 27」 pp.85, 127-129, 265-266,.「대쟁투 상」 p.433).”
4. 안식일 문제
안식교의 주장에 의하면 안식교는 ‘남은 자손’으로서 참 교회요, 로마 카톨릭은 배도(背道) 했으며 개신교회는 성서 진리로부터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일요일에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닌 인간의 계명을 따르는 것으로 거짓 예배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는 예배가 될 수 없고, ‘짐승의 표’를 받으며, 가장 참혹한 심판을 초래한다고 주장함으로서 ‘안식일 준수’는 그들에게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기본교리 27」 pp.151-161, 238-241, 244).
5. 계시론
안식교에서는 비록 성경만이 모든 교리의 기준이며 하나의 신경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엘렌 지 화이트가 보았다는 환상이나 그녀가 쓴 책들 또한 그들의 특별계시이다. 특히 말세의 참 교회의 특징은 예언의 은사를 가진다고 주장하는데 바로 엘렌 지 화이트야말로 그 ‘예언의 신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로서 그가 받았다는 계시가 말세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시라고 주장함으로 안식교는 성경 계시 외에 다른 계시를 가진 자들이다.(「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기본교리 27」 pp.204-211, 156-157)
6. 영혼멸절의 문제
안식교는 여호와 증인의 주장과 같이 영원한 지옥과 사후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함으로 소위 영혼멸절설을 취한다. 즉 의인은 부활하여 영생하지만, 악인은 부활하여 불태워 소멸되기 때문에 지옥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기본교리 27」 pp.340-341)
7. 연구결론
안식교는 율법주의적 구원론, 토요일 안식일 문제, 엘렌 지 화이트의 계시론, 영혼멸절설, 영원지옥부재설, 또는 조사심판 및 2300주야 문제 등의 비성경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이단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건강문제를 앞세우고, 정통교회를 표방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 미혹성이 더 심각하다 할 수 있다.
II. 필자가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하는 이유
위의 내용은 교단의 공식적인 입장이고 다음은 그 근본적인 내용은 같지만 그것을 필자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다시 정리하고 요약 내지는 확대한 것이다.
첫째, 안식교는 시한부 종말론에 의하여 시작된 교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바르게 파악하는 데 있어서 그 역사적 배경과 동기를 살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안식교는 거짓된 시한부종말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그 태동부터 잘못된 이단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안식교는 윌리암 밀러(1782-1849)로부터 비롯되었다. 윌리암 밀러는 1844년 10월 22일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소위 ‘재림운동’을 했던 자인데, 안식교는 실패한 윌리암 밀러의 재림운동으로 시작된 교파이다. 이 재림운동은 한국 기독교 100년 역사에 가장 비극스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다미선교회 이장림의 시한부 종말론 운동(1992년 10월 28일 재림 주장)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런데 윌리암 밀러의 재림 날짜 예언을 믿고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정한 날짜에 예수님의 재림이 없자 실망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화이트라는 여자의 새로운 환상으로 규합해 교파를 창설하게 된 것이 바로 안식교이다. 안식교는 소위 조사심판 교리 또는 2천 3백 주야 교리를 자랑스럽게 주장해 오고 있는데, 이것들은 사실상 윌리암 밀러의 1844년 10월 22일 재림예언이 화이트에 의해 변형되어진 것이다.
안식교에서도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윌리암 밀러의 시한부 종말론 운동을 ‘성령운동’으로 주장하고 있다. 분명히 비성경적이요 적그리스도적인 운동으로 판명되었던 윌리암 밀러의 시한부 재림운동을 안식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성령운동이며 요한계시록 10장에 예언된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안식교 한국연합회, 성서기초교리, p. 299).
윌리암 밀러의 시한부 종말론 자체가 비성경적임이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그것을 첫째 천사의 기별 또는 성령운동으로 주장하고 있는 안식교는 사실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밀러의 예언이 실패하자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경영하신 일이라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다(위의 책, p. 303). 왜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렇게 할 때에 안식교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안식일 교회는 참 교회요, 주일 교회는 짐승의 표를 받은 교회라 주장하기 때문이다.
안식교가 개신교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 하나는 교회관 때문이다. 안식교에서는 말세에 유일한 교회는 안식교라고 주장하며(Uriah, 스미스, 다니엘과 계시록, p. 699; 성서기초교리, pp. 293-294, p. 296, pp. 296-297; 최대의 책 의 문답, p. 271), 일요일은 짐승의 표라고 한다. 즉 개신교에서 예배하고 있는 주일(일요일)은 거짓 안식일이며 태양신을 숭배하던 우상의 날로서 하나님의 인을 받으려면 토요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안식교의 주장을 이단으로 비판하지 않는다면 주일에 예배하는 기성교회는 짐승의 표를 받은 거짓 교회가 되고, 계시록에 나타나는 음녀 바벨론이라고 하는 안식교의 주장을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안식교의 주장대로라면 토요일을 지키는 안식교로 가야만 하나님의 인을 받을 수 있고, 주일을 지키는 기성교회에서는 결국 짐승의 표를 받게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인을 받아야만 구원받고 짐승의 표를 받으면 멸망이므로 결국 안식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안식교는 분명히 주일을 지키는 기성교회를 향하여 짐승의 표를 받은 자로 주장하고 또 그렇게 여기고 있으면서도 이단 논쟁을 하려고 할 때마다 사용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화이트가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되 모르고 진실히 지키는 자들에 대해 동정스런 언급을 한 일이 있는데 그것을 이용하여 기성교인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이 점은 추후에 집중적으로 취급하겠다.
셋째, 화이트를 마지막 선지자라 하고 그가 쓴 책들을 성경 외의 다른 계시라 하기 때문이다.
기성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신구약 성경은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서 가감할 수 없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러나 이단들의 특징 중 하나는 성경 이외에 다른 계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인데 안식교의 경우도 그렇다. 그 동안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안식교는 다른 부분에 대하여는 많은 변증을 하고 있지만 화이트의 예언과 화이트의 선지자 됨에 대하여는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이어지는 논쟁을 지켜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1. 화이트의 예언의 은사
안식교는 성경 이외에 화이트의 계시를 말세의 백성들에게 주신 계시로, 또한 화이트를 마지막 선지자로 믿고 있다. 요한계시록 12장 17절의 ‘예수의 증거’를 마지막 선지자의 계시로 해석하고 화이트를 마지막 선지자로 여기는데, 화이트가 받았다는 계시가 참 교회의 특징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성서기초교리, p. 328, 335). 그리고 말세의 참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예언의 은사이며, 이 예언의 은사인 계시가 화이트에게 임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화이트가 받은 계시는 성경 외에 다른 성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마지막 선지자 화이트
안식교는 사도와 선지자의 직무가 계속될 것을 주장하고 있다(성서기초교리, p. 329; 초기문집, pp. 143-144). 또한 화이트의 임무는 선지자의 사업을 포함할 뿐 아니라 그 한계를 넘어선다고 주장한다(가려뽑은기별 1권, p. 39). 물론 참 교회는 그 속에 예언의 선물이 나타나야 하고 그 예언의 선물을 화이트가 가졌다고 주장하면서도 화이트의 예언이 성서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 말로(A.L. 배켈, 성서진리총서 제45호, p. 335) 다른 계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변명하는 경우도 있다. 이 문제는 다시 밀도 있게 논쟁이 있을 것으로 안다.
넷째, 율법주의적 구원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구원 문제일 것이다. 모든 교리는 결국 구원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구원 문제가 근본적으로 다를 때 우리는 이단으로 취급한다.
일반적으로 기성교회에서는 안식교를 율법주의라고 비판하는데 반해 안식교는 자신들이 결코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고, 또 율법주의자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러면 왜 기성교회에서 안식교를 율법주의라고 하는가? 그 이유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①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시대의 소망 2권, pp. 21-23; 성서기초교리, p. 101).
②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최대의 책의 문답, p. 122; 가려뽑은 기별 1권, p. 272).
③ 현세에서 완전 성화(품성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쵀대의 책의 문답, p. 107; 실물교훈, p. 61; MH, p. 414; 교회에 보내는 권면 2권, p. 596).
④ 완전 성화 즉 완벽한 품성의 변화가 이루워져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성서기초교리, p. 102, 108; 최대의 책의 문답, pp.107-108).
⑤ 율법(십계명)은 창세 전부터 존재했고 영원까지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가려뽑은 기별 1권, p. 274).
⑥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 마지막 날의 구원을 얻기까지 성화(율법준수)를 통하여 유지되고 성숙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p. 440).
⑦ 폐해진 모세의 율법이나 규례들을 지키라고 하기 때문이다(음식문제 부정하고 정한 것, 토요 안식일 등).
다섯째, 여호와의 증인처럼 영혼불멸이 아닌 영혼멸절을 믿으며 지옥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기성교회는 죽음을 분리로 본다. 즉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육체의 죽음이라 하며, 하나님과의 분리를 영적인 죽음이라 하며, 이 육체의 죽음과 영적인 죽음이 합해지면 그것을 영원한 죽음이라 한다. 결국 구원받은 자는 영원한 천국에 거하나 불신자는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교는 사후의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며 영원한 지옥도 부인하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여호와의 증인의 것과 같은 교리이다(신계훈,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p. 182; 기본교리27, p. 323).
안식교인들은 안식교를 율법주의라고 공격하면 사력을 다해 항변하지만 이 내세관에 대하여는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성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다른 교리들도 이단이지만 안식교의 이단성을 확연하게 공언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내세관일 것이다.
안식교의 측면에서 보면 기성교회가 이단이어야 하고, 기성교회에서 보면 안식교가 이단이 된다. 아니, 안식교에서는 영혼불멸을 믿는 기성교회를 이단이 아니라고 한다 해도 기성교회 측면에서 보면 영혼멸절을 믿는 안식교는 이단일 수밖에 없다.
안식일교회측
상대적 이단과 절대적 이단
김 대 성
글을 열면서
기독교계 일부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약칭 : 안식일교회)를 이단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또 일각에서는 안식일교회를 성경에 매우 충실하고 건전한 정통 개신교회로 보고 있다. 안식일교회를 깊이 바르게 아는 사람들도 있고 잘 모르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10회에 걸쳐 본 지면에 연재되는 이 글은, 이단 시비에 대한 변증으로서 보다는 안식일교회를 좀더 바르게 알리는데 목적이 있음을 밝혀 둔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하여 특별히 이단성 시비가 많을 뿐 아니라 군소 교단들이 대형 교단들로부터 일방적으로 이단 언도(?)를 받는 일들이 좀 잦은 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예장 통합측에 속한 목사가 발행인으로 되어있는 월간 잡지 「교회와 신앙」이 공정한 입장에서 안식일교회측 목사와 공개적으로 지면 토론을 시도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지면 공개 토론이 교단 차원이 아니라 피차간 개인 자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서 양자간에 좀더 정확한 정보가 교환되고 보다 깊은 이해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상대적 이단과 절대적 이단
성경은 하나인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기독교 종파는 수백개에 달한다. 성경의 동일한 문맥을 두고 해석을 달리하는 인간의 아집과 편견과 무지의 결과일 것이다.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 각 교파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 자신이 속한 교회를 정통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결론은 아무나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며 함부로 내려서도 안 되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많은 종파들이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라고 하며 기독교회들 간에 심한 대립과 갈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피차간에 서로를 이단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소수의 집단이 더 이단처럼 보이는 양상을 띠고 있다.
이와 같이 어떤 한 교파가 자(自) 교파의 신조를 기준으로하여 신조를 달리하는 타(他) 교파를 이단으로 정했을 경우에 그것을 상대적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상대적 이단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이단인 것이다. 객관적 이단이란 성경을 기준으로하여 가려져야 하는 것인데,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과 기준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성경에 의한 절대적 이단을 분별하여 시비를 가리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깊이 음미해 보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2).
한국 교회의 이단 규정, 과연 정당한가?
1995년 9월 25일 대한 에수교 장로회(통합측) 총회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이단으로 결의했다고 한다. 어떤 절차를 거쳐서 무엇을 기준으로하여 이단이라는 결론을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안식일교회측과 한 마디 대화도 없이 상대를 이단으로 정한 것은 너무 경솔한 처사임이 분명하다.
중세 종교 암흑 시대에 종교 재판을 통해서 이단을 규정할 때에도 “먼저 이단으로 의심받은 사람에게 신앙을 고백하고 사면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다음 “피고가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그를 재판관 앞으로 끌고와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심문하고 형을 선고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브리태니커, 한글판, 제19권, 593). 물론 안식일교회가 피고의 입장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개방되고 현대화된 20세기 말에 한 교단이 다른 교단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이단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어차피 한국 교회의 이단 규정이 일방적이고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갑’이라는 교단이 ‘을’이라는 교단을 이단으로 정했다고 해서 ‘을’이 성서적으로 이단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단’이라는 말을 듣는 것 자체는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교단 ‘갑’이 ‘을’보다 그 규모가 크고 교인수가 훨씬 많으면, 기독교 언론 기관들의 편파적인 보도가 얼마든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서점을 통한 선교의 길도 차단되어 ‘을’은 막대한 피해를 보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므로, 이러한 지면을 통해서 양자간의 좀더 공정하고 올바른 인식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단 분별 기준의 문제
아무런 토의없이 일방적으로 상대를 이단으로 결정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가 이단을 규정하는 기준도 문제가 된다. 이단 감별사로 유명했던 T씨가 제시한 이단 분별의 기준을 보면, 그 첫번째가 “사도신경 신앙고백 여부”라고 되어 있다(탁명환, 기독교 이단 연구, 1990년판, 75쪽). 주기도문도 아니고 십계명도 아니고 성경에 명백히 나와 있지도 않은 사도신경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단으로 정하는 것이 과연 성서적인가?
이단을 규정하는 기준을 정하려면 철저히 성경적이어야 한다. 예들 들면, 성경에 명백히 나와 있는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요일 4:2,3)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행 4:12)기 때문에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길을 통해서 구원을 얻고자 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 명백히 제시되어 있는 죽은 자의 부활이나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으면 얼마든지 이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신경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교회를 이단이라고 정한다면 문제는 매우 심각해진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모체가 된 것은 서기 400년경 라틴어로 된 「로마교회 구 신조」(the Old Roman Creed)임이 밝혀졌으며, 그 뒤로 계속 수정되어 서기 700년경 지금의 것과 같은 내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제목은 사도신경으로 되어 있지만 사도들이 만든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도 아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를 만들었으며, 서기 900년경이 되어서야 동방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회들이 사도신경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럼 사도신경 신앙고백 여부가 이단 판별의 기준이 된다면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고 니케아 신조를 사용하는 동방의 모든 교회들은 우선 이단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단 판별의 기준으로는 합당치 않은 ‘사도신경 신앙고백 여부’
대체적인 내용이 성서적으로 구성된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원문)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타나 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가(he descended into hell)”.
이 문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단이 된 아리우스파의 신조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점차로 퍼져 나가다가 결국 8세기에 가서는 개정된 사도신경에 정식으로 삽입된 것이다. 이 표현을 사실대로 받아들이면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되어 계셨던 삼일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 나오는 “거룩한 공회”라는 말은 원래 “거룩한 가톨릭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되어 있는 것을 무리없이 번역해 놓은 것이다. 물론 ‘가톨릭’이라는 말을 ‘보편적’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모든 교회에 적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배경을 보면 그것은 가톨릭 교회를 구체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가톨릭 교회를 믿사오며”, 이러한 표현이 들어있는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는다고하여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또한, 신경(信經)의 내용 중에 “성도가 교통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 ‘교통’이라는 것은 그 문법적인 성격으로 보아 성만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교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교제’를 이 세상에 살아있는 성도들 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성자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와 역사적 배경 때문에 사도신경을 가장 옹호하고 두둔하는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이며, 성 토마스(St. Thomas)는 이 신경에 대하여 고의로 무지하게 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죄로 간주했다. 이러한 배경과 성격을 가진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서로 사용하지 않는다고하여 이단으로 정한다면 이미 이단의 판별 기준은 그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이단」이라는 말의 오용
교회사를 더듬어보면, ‘이단’이라고 하는 용어가 정당하게 사용되는 경우 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이 나타난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우선 성경 가운데서 ‘이단’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었던 사도행전의 예를 보자.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행 24:5,14).
신약 성경의 이단 시비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고수해온 인간적인 전통을 거부하고 그들과는 다르게 가르치는 나사렛 예수와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잘못 사용되기 시작한 ‘이단’이라는 말은 종교개혁의 역사에서도 재현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고수해온 전통적인 개념을 부인하고 트렌트 종교회의의 결정사항과 어긋나게 가르치는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이 저주받을 이단으로 정죄되어 생명까지 위협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진 것이다. 청교도의 정신으로 시작된 미국의 개신교 역사에서도 동일한 양상이 반복되었다. 로마 교황이나 국왕이 교회의 머리[首長]가 된 유럽 대륙과 영국에서 이단자로 정죄되어 더 이상 거처할 곳이 없게 된 회중파 청교도들이 미국 동부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들이,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에는, 정교일치(政敎一致)를 주장하는 저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침례교도와 퀘이커 교도들을 추방하거나 이단으로 정죄한 후 목매달아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이단’이라는 말이 자주 오용된 과거의 역사로 미루어보아, 그 말은 결코 함부로 사용할 용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단’이라고 하는 말을 남용하는 한국 교회의 풍토는 매우 우려할만한 상태가 되었다. 여러 ‘이단 감별사’(?)들이 인쇄물이나 방송 매체를 통해 앞다투어 ‘이단’ 보고를 하고 있다. 이미 언급된 바와같이 이단을 정하는 자(尺)가 틀려있기 때문에 그 자를 가지고 재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며, 사분오열되어 있는 한국 교회의 풍토에서 이단 시비를 가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교단 ‘갑’ ‘을’ ‘병’이 서로를 인정하여 정통이라고 자처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교단 ‘갑’이 교단 ‘정’을 이단으로 정했는데 교단 ‘을’이나 ‘병’은 ‘정’을 이단으로 정하지 않았을 경우, 그 관계가 매우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갑’이라는 교단이 한국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을 경우, 한국에서는 ‘갑’ 교단이 ‘정’ 교단을 이단으로 결정했는데 미국에서는 같은 ‘갑’ 교단이 같은 ‘정’ 교단을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모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기독교는 세계적 조류를 읽어야
이단 규정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예장 통합측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이단 판결을 내려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이단시하는 것은 중세의 교권 시대를 연상하게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140년에 가까운 역사를 통해서 전세계 209개국에 선교하여 900만명에 이르는 신자를 가지고 있는 세계적인 조직체인 안식일교회를 어떻게 그렇게도 쉽게, 단 한 번의 토의 과정이나 진의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노력도 없이 이단으로 단정해 버릴 수가 있는가?
안식일교회의 이단 여부에 대하여 질문을 받은 빌리 그래햄 복음 협회(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에서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내왔다(내용전문은 필자가 소장하고 있음).
“Dr. Walter Martin, in his excellent book The Kingdom of the Cults, includes a chapter on Seventh-day Adventism in which says, 'It is my conviction that one cannot be a true Jehovah's Witness, Mormon, Christian Scientist, Unitarian, Spiritist, etc. and be a Christian in the Biblical sense of the term, but it is perpectly possible to be a Seventh-day Adventist and be a true follower of Jesus Christ despite certain heterodox[unorthodox] concepts'."
“마르틴 박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관한 항목을 포함하고 있는 그의 명저 종파들의 왕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크리스찬 사이언티스트, 유니테리언, 강신술교도 등은 성서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없지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비록 저들이 약간의 이설적[비정통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 완전히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빌리 그래햄 선교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그의 저서를 인용할만큼, 마르틴 박사가 이단 사이비 문제에 대한 세계적인 권위자이기는 하지만, 그와 견해를 달리하는 학자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조류에 비추어 생각하면, 세계 기독교와 동일한 노선을 추구하고 있을 예장 통합측은 안식일교회에 대하여 너무 성급하게 이단 결정을 내린 것 같다. 몇몇 교리적인 측면에서 안식일교회가 일반 개신교회와 약간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제 앞으로 9회에 걸쳐서 설명이 되겠지만, 그 정도의 교리적 차이는 서로 정통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개신교파들 사이에도 얼마든지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1619년에 있었던 그 유명한 도르트(Dort)회의의 결과, 아르미니우스의 예지예정설(豫知豫定說)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정통파 칼빈주의는 구원에 있어서의 무조건적인 선택, 즉 예정설을 정통 교리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지예정설을 전부 혹은 일부라도 믿고 있는 감리교를 비롯하여 성공회, 감독교, 루터교, 일부 침례교, 오순절교회는 모두 이단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장로교회와 위에 열거된 여타의 교회들이 모두 함께 정통 기독교회로서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예정설과 예지예정설은 서로 상반되는 견해로서 사실상 공존이 불가능한 것이지만, 편의상(?) 혹은 서로가 대형 교단이기 때문에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안식일교회가 우세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러하듯이, 만약 한국의 안식일교회 교인수가 1000만명이 된다면 아무도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진리는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간에 서로 다른 견해가 발생할 수 있다. 대분분의 경우 성경 해석상의 차이에서 오는 불가피한 경우들이다.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비유와 상징과 은유로 말씀하신 부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성경을 유한한 인간들이 해석할 때 서로 간에 차이가 생기는 것을 피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도 없는 것이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의 다소(多小)로 진위를 가려서는 안 된다.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가 살던 시대에, 지고의 권세를 가지고 있던 절대다수의 교권이 「천동설」(天動說)을 주장한다고 해서 지동설 진리가 변경될 수 없었듯이, 지금도 교권이나 어떤 대형 교단이 정했다고 해서 비진리가 진리로 바뀌거나 진리가 비진리로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단’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해서도 안 되겠지만, 한 때 이단으로 정죄하다가 교세가 커지면 입장을 바꾸어 정통이라고 인정하는 일도 석연치 않은 점이다.
성경을 믿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구원관이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는 말씀이 기독교 구원관의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인정하여(요일 4:2,3), 그 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인간의 죄 사함과 구원이 이루어지고(롬 5:8-10) 그것을 믿음으로 영생한다는 구원의 도리(요 3:16; 행 4:12)를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 교리의 중추가 되는 것이다.
그 이외의 문제로 혹시 교회나 교파간에 어떤 이질적인 문제와 견해 차이가 발생하면 피차간에 자리를 함께하여 충분한 대화를 나누며 모든 것을 성경으로 검토·검증하여 견해 차이를 좁히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한 후에 마지막까지 해결점을 찾지 못하면 의견이 다른 하나의 분파로 보면 되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교파를 하나의 분파(cult 혹은 sect)로 간주하는 일은 있어도 ‘이단’(heresy)이라는 마지막 결론은 함부로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경우는 ‘이단’ 감별을 너무 쉽게 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단과 정통의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인간의 몫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진리에 대한 안식일교회의 자세
안식일교회는, 장로교, 회중교, 감리교, 제칠일침례교, 루터교 등 여러 교파로부터 나온 재림 신자들이 1844년의 대실망을 경험한 후, 여전히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신실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신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안식일교회는 각 교파로부터 나온 사람들이 진리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으로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한 결과로 탄생된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교회는 각 교회의 성서적 진리들을 모두 수용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루터교회로부터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정신을, 재세례파로부터는 성인(成人) 신자의 침례, 정교 분리의 원칙, 죽은 자의 무의식, 재림을 고대하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 등을, 메노나이트 재세례파로부터는 세족예식, 의료 봉사, 심령의 성결과 함께 육신의 성결을 위한 건강 생활, 그리고 금주, 금연 등의 절제 원칙을, 칼빈의 장로교회로부터는 성경적인 예배, 성경의 권위에 절대 복종, 율법의 복음적 기능, 장로제도 등을, 침례교회로부터는 물에 잠기는 침례, 회중의 교회 행정 참여(대의제) 등을, 제칠일침례교회로부터는 제칠일안식일 준수를, 웨슬레의 감리교회로부터는 중생과 성결, 성령의 사역, 예정론에 대응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론 등을, 구세군교회로부터는 구호봉사와 자선 사업 등을, 모라비아 형제회로부터는 지역 제한을 받지 않는 세계 선교의 정신을, 그리고 가톨릭교회로부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받아들여, 그야말로 성서적인 진리는 모두 수용하고자 하는 정신으로 교회의 기초를 놓게 된 것이다.
지금도 안식일교회는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현재 고수하고 있는 교리 중에 비성서적인 요소가 드러나면 즉시로 포기할 수 있는 준비와 새로운 성서적 진리가 밝혀지면 언제라도 수용하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가지고 오직 성경대로 올바른 신앙을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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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장, 목사
안식일교회 大논쟁2(96년 9월호)
--안식일교회의 구원론--
<교회와신앙>측
안식교의 구원론은 율법주의 구원론이다
공동집필/ 최삼경·진용식
I. 지난호 김대성 목사의 글에 대한 반증
본지 전호(1996년 7월호)에 김대성 목사의 ‘상대적 이단과 절대적 이단’이라는 글에 의하면, 안식교는 자신들이 성경적인 교회이며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안식교를 이단으로 규정한 한국교회의 시각은 안식교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 것이며 일방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즉 안식교는 성경적인 면에서 비판할 수 있는 절대적 이단이 아니라 교단간에 신조의 차이나 안식교를 잘못 인식하여 내려진 판단에 의한 상대적인 이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안식교 측의 주장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를 먼저 반증 및 비판하려고 한다.
1) 1995년 9월 25일에 통합측 교단이
안식교의 이단성을 밝힌 점에 대하여
김 목사는 ‘한국교회 이단 규정, 과연 정당한가?’라는 소제목 하에서, 1995년 예장 통합측 총회에서 안식교를 이단으로 결의한 데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들을 불러서 물어 보지 않고 이러한 결의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김 목사는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이러한 이의를 제기한 것 같다. 예장 통합측에서 1995년 9월 25일 총회 시 안식교의 이단성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그 동안 안식교가 이단인지 모르고 있다가 그제야 이단임을 결정한 것이 아니다. 이미 통합과 합동이 갈라지기 전에 안식교를 이단으로 결정했던 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내용성 있게 밝힌 것으로 안식교의 이단성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김 목사는 안식교를 이단으로 결의할 때 왜 당사자인 자신들을 불러서 물어 보지 않았느냐고 했는데, 이는 맞지 않는 말이다. 어느 교단에서든지 이단을 규정할 때 이단들을 불러서 물어 봐야 할 아무 의무도 권리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자가당착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안식교도 기성교회와 같이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를 이단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언제 그들을 불러서 물어 보고 이단이라고 했는가? 그리고 가톨릭이나 기성교회를 ‘바벨론’, ‘음녀’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언제 안식교가 기성교회나 가톨릭 관계자들을 불러서 물어 보고 했는가? 이는 대부분의 이단들이 하는 공통적인 소리로서 스스로 모순됨을 증명하는 꼴이다.
사실은 교리적인 면에서나 윤리적인 면에서나 기성교회가 안식교를 비판하는 강도보다 안식교가 기성교회를 비판하는 강도가 더 크고 잔악했음을 김 목사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2) 상대적 이단과 절대적 이단이라는 말에 대하여
김 목사는 상대적 이단이 있고 절대적 이단이 있다고 하였다. 상대적 이단은 어떤 교파가 자신들의 신조를 기준으로 하여 자신들과 다른 교파를 이단으로 정한 경우를 말하고, 절대적 이단이란 성경적으로 분별하여 규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김 목사의 말에 필자도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김 목사의 말은 안식교가 성경적인 이단이 아니라 교리적인 이단이 된 것처럼 하여 자신들의 이단논쟁을 피해가는 효과를 목적으로 하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김 목사는 다음과 같은 모순을 낳고 있다.
첫째, 누가 성경적으로 이단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성경에 대하여 해석적인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과 모든 신학자와 모든 교파가 다 마찬가지다. 모든 교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교리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다. 바로 자신이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그것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한 것을 교리라고 본다. 그러나 분명히 대칭되는 두 가지 사상이 있을 때 어느 하나가 성경적이라면 다른 하나는 반대로 성경적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객관적으로 어느 교리가 성경적이요, 어느 것이 비성경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서로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런 수평적인 논리로 속일 수 있는 것은 어린아이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이 말 속에는 기성교회 교리의 입장에서 보면 안식교는 이단이요, 반대로 안식교의 입장에서 보면 기성교회가 이단이라는 말일 것이다.
필자는 전호에서도 말했지만 안식교인들이 이단이 아니라는 주장은 자신들이 성경적이고 기성교회는 비성경적이라서 이단이 아니라는 말인지, 아니면 기성교회 편에서 보아도 안식교는 이단일 수 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안식교 편에서 볼 때 기성교회가 이단이라는 말인지, 심지어 단지 어떻게든 이단논쟁을 피해감으로 효과적으로 기성 교인들을 안식교로 끌어가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김대성 목사의 말에 의하면 기성교회 교리에 의하면 안식교는 이단일 수밖에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반대로 안식교의 입장에서는 기성교회가 이단이라는 말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본 이단논쟁의 초점은 선명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김 목사는 다음 호에 이 점을 수단적인 진실이 아닌 목적론적인 진실 속에서 선명하게 밝혀 주기 바란다.
우선 본호에서는 순서에 따라 안식교가 성경적으로 이단이라는 점을 기성교회의 보편적인 교리를 기준으로 밝히도록 하겠다.
3) 이단의 정의에 대하여
김 목사는 안식교 이단 규정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면서 이단의 정의에 대한 기준이나, 이단이라는 용어의 오용에 대하여 말하였다. 김 목사의 주장에 대하여 몇 가지를 비판하겠다.
첫째, 이단의 분별 기준에 대하여
김 목사는 T씨가 이단 분별 기준으로 말했던 사도신경의 문제를 비판하였다. 물론 이 사도신경 문제로 이단을 구별하려는 것은 기성교회의 하나의 기준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단논쟁의 핵심은 아니다. 그런데 김 목사는, 그의 본명도 밝히지 못한 채, 한 개인의 말을 인용해 놓고 비판했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첫째, 이름을 T씨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 둘째, 그것은 한 개인의 견해로서 그 사람에 대하여 비판할 문제인데, 이 논쟁에서 개신교가 안식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모든 기준인양 호도하는 것은 소나무 숲에서 전나무 한두 그루 보고 그 숲을 전나무 숲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기성교회가 안식교를 이단으로 보는 것은 사도신경의 문제만이 아니라 안식교가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사도신경 문제는 더 깊은 논쟁을 요하나 지면상 생략하겠다.
둘째, 진리는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에 대하여
김 목사는 진리는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김 목사의 말에 대하여 필자도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다수이기 때문에 진리가 되고 소수이기 때문에 이단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김 목사는 안식교가 기성교회에 비하여 숫자가 열세이기 때문에 이단이 된 것처럼 말하였다. 김 목사는 말하기를, “한국의 안식일 교회 교인 수가 1,000만 명이 된다면 아무도 안식일 교회를 이단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묘하게도 동시에 김 목사는 세계에 900만 명에 이르는 신자를 가지고 있는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우선 이단의 문제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옳은 말을 하면서 반면에 안식교의 숫자가 900만명이니 어쩌니 말하는 것은 네모난 삼각형 같은 모순된 소리다. 또한 안식교의 숫자가 적어서 기성교회가 안식교를 이단으로 했다면 안식교는 이단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숫자만 늘리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한국에서 안식교보다 적은 수의 교인을 가진 교단들이 많은데 그들이 그 이유로 이단 비판을 받고 있는가? 또는 안식교보다 더 많은 교인 수를 가지고 있는 교파인데 이단 비판을 받고 있는 경우는 없는가? 기성교회가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안식교의 수의 열세 때문이 아니라 비성경적인 교리 때문인 것이다.
셋째, 이단이라는 말의 출발과
이단이란 말을 오용하고 있다는 말에 대하여
김 목사는 예수님이나 바울이 그 당시 이단시되었던 내용을 가지고 이단이라는 말의 부정적인 의미를 부각시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러한 김 목사의 주장은 대부분의 이단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식교가 이단시하는 통일교와 천주교측에서 같은 형식의 말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리고 이단이란 말이 사도행전 24장에서는 유대교가 기독교를 이단이라고 함으로 그릇되게 사용되었지만, 성경에는 이단이란 말을 올바로 사용한 경우가 더 많은데도 김 목사는 왜 그 말은 하지 않고 바로 역사적인 문제로 비약하였는가? 성경에 보면 갈라디아 5:20에도, 디도서 3:10에도, 베드로후서 2:1에서도 이단이란 말을 적그리스도에게 사용하였다. 그런데도 김 목사가 성경에서 이단이란 말의 부정적인 사용만을 말하는 것은 위의 성구를 몰라서가 아니라 기성교회의 안식교에 대한 이단 결의를 부정적으로 보게 하려는 잘못된 목적에서 나온 고의적인 실수같이 보인다.
이단이란 말을 사용하고 이단을 규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충분히 옳은 것이요, 비록 교회사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지만 이는 교회사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이 정의된 용어인 것이다. 법을 나쁘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법이란 말을 쓸 수 없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넷째, 이단논쟁은 구원론과 기독론에 제한된다는 말에 대하여
이단논쟁의 핵심을 구원론으로 본 것은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김 목사가 이단논쟁을 기독론에 제한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기독론으로만 제한하여 이단논쟁을 피하려는 꾀같이 보인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단논쟁이 기독론에서 가장 많았지만 그 이유는 바로 구원론 때문이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이나 교회론이나 계시론이나 다른 교리에서도 이단논쟁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4) 안식교와 성경
김 목사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에 미혹되어 재림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다시 성경을 연구하여 당시의 여러 교파 교리들 중 좋은 점들을 편집 정리하여 안식교를 만들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안식교는 자신들이 가진 교리가 비성서적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언제든지 바꿀 수도 있으며 새로운 성서적 교리가 있으면 받아 드릴 수 있다고 그럴듯하게 말하였다. 이러한 김 목사의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할 수 있다.
첫째, 안식교의 교리가 여러 교파의 교리들을 편집해서 다른 개신교회들과 유사성이 있다고 해도 이단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안식교가 여러 교파로부터 어떤 교리들은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이단적인 교리들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들을 살펴 보면 자신들이 일으켰던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점, ‘오직 성경’ 대신 성경 외에 다른 계시인 화잇의 계시를 ‘대언의 영’이라고 주장하는 점, 성경의 근거 없는 ‘조사 심판’을 창작하여 주장하는 점, 오직 믿음 대신 율법주의 구원 교리를 주장하는 점 등이다. 이러한 안식교가 다른 개신교회들과 약간의 유사성이 있는 교리가 있다 하여 이단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둘째, 문제는 김 목사의 말처럼 성경이다.
김 목사는 안식교의 질문에 대한 빌리그래함 복음협회의 답변을 소개하면서 세계적인 조류는 안식교를 이단으로 보지 않고 있다고 변증하였다.
그러나 이 말도 자신이 주장한 ‘진리는 숫자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는다’는 말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누가 말했느냐보다 무엇을 말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칼빈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안토니 훼케마(Anthony Hoekema, 1963) 박사는 안식교를 세계 4대 이단 중 하나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물론 안식교를 이단으로 보지 않는 학자나 단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몇몇 개인이나 단체가 안식교를 이단으로 보지 않는다고 해서 정통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안식교는 비성경적인 교리들 때문에 이단으로 비판을 받는 것을 알아야 한다.
II. 안식교의 구원론은 율법주의 구원론이다
1) 율법주의와 화잇
율법주의란 무엇인가? “율법주의란 칭의나 구원의 수단으로써 인간의 선행과 율법의 준수를 주장하는 이론을 말한다”(성광문화사, 신학사전 p. 536). 기성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율법주의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정의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비추어 볼 때 안식교의 구원 교리는 한 마디로 율법주의이다.
화잇의 글을 직접 살펴 보자.
“그의 율법은 그의 품성의 사본인 동시에 모든 품성의 표준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지상 생애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표현한 것이니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가지게 될 때에 주께서는 저들을 하늘 가족을 구성할 만한 자들로 인정하시게 된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실물교훈, pp. 326-327).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부합된 것만이 심판 때에 능히 설 수 있다”(위의 책, p. 328).
“그리스도의 의는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죄라도 가리워 주지 않을 것이다”(위의 책, p. 328).
“율법은 여전히 우리를 그리스도께 나가게 하는 대리자로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게 한다”(알론조 제이 워너, 한국연합회, 성서기초교리, p. 101).
“율법은 모든 인류의 품성을 저울질하는 것이니 이 착오 없는 시험에 의하여 중량이 부족하다고 선고를 받는 자는 다 형벌을 받아야 한다”(위의 책, p. 102).
“심판에 설 준비를 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이 계명은 심판 때에 품성의 표준이 될 것이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쟁합, p. 484).
화잇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완전한 품성이며 완전한 품성의 표준은 완벽한 율법의 준수라는 말이다. 또 믿음의 의를 이루는 것도 율법의 준수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어찌 율법주의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왜 안식교를 율법주의라 하는가?
일반적으로 기성교회에서 안식교를 율법주의라고 비판하고 있으나 안식교 측에서는 결코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안식교는 율법주의라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이에 필자(진용식)는 안식교를 28년 동안 직접 경험했고 또 기성교회 목회자로서 양편의 주장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성교회에서 안식교를 율법주의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안식교는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엘렌지 화잇, 시대의 소망 2권, pp. 21-23).
② 안식교는 완전성화, 즉 완벽한 품성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알론조 제이 워너, 한국연합회, 성서기초교리, pp. 102, 108; 왕대아, 시조사, 최대의 책에서 얻는 문답, pp. 107-108).
③ 안식교는 현세에서 완전성화(품성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위의 책, p. 107; 엘렌지 화잇, 시조사, 실물교훈, p. 61; 교회에 보내는 권면 2권, p. 596). 완전한 품성의 변화란 율법의 완벽한 준수를 말한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대쟁투합본, p. 484).
④ 안식교는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가려뽑은 기별 1권, p. 272; 왕대아, 시조사, 최대의 책에서 얻는 문답, p. 122).
⑤ 안식교는 율법(십계명)은 창세 전부터 존재했고 영원까지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가려뽑은 기별, p. 274).
⑥ 안식교는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 마지막 날의 구원을 얻기까지 성화(율법준수)를 통하여 유지되고 성숙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신계훈, 빛과 소리,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p. 440).
⑦ 안식교는 폐한바 된 구약의 모세의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라고 하기 때문이다(부정하고 정한 음식을 가리는 문제, 토요 안식일 문제 등).
3) 안식교의 율법주의적 구원관은 무엇이 잘못인가?
살펴본 바와 같이 안식교는 율법주의의 구원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율법주의 주장들을 하나씩 성경적으로 반증해 나가면서 율법주의가 얼마나 비성경적이며 무서운 이단인가를 증명하겠다.
첫째,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안식교의 구원교리가 율법주의라고 하는 첫번째 이유는 비록 믿음을 말하고 있지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에서 이탈하여 구원받기 위하여 율법의 행위를 첨가시키는 데 있다. 이러한 안식교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1차 구원은 믿음으로 얻으나 재림 시에 얻는 구원은 행함으로 얻는 구원이라고 한다(계 22:12; 마 16:27; 약 2:19-22; 살후 2:8).
둘째, 은혜의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나 영광의 천국에는 법을 행한 자라야 들어간다고 한다(계 22:12; 마 7:21-23).
반증해 보자.
다음의 성구 자체로 충분한 변증이 될 것으로 믿는다. 로마서 3:20을 보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역시 갈라디아서 2:16에서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다.
둘째, 인간의 노력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는 주장은 바로 율법주의의 주장이다. 안식교의 이러한 가르침을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의 안식교의 가르침들을 먼저 화잇의 글을 통해 살펴 보자.
“구주의 순종의 생애는…인류가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으며…”(엘렌지 화잇, 시조사, 시대의 소망 2권, pp. 21-23; 성서기초교리, p. 101).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들은 다 의롭지 못하며 순종할 수가 없다는 ‘사단’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위와 같음).
“우리의 품성 가운데 점이나 흠이 있는 한 우리 중 아무라도 결코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할 것이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교회에 보내는 권면 2권, p. 596).
반증해 보자.
첫째, 인간의 노력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가 없다. 성경에 보면 분명히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롬 3:20)고 되어 있다. 사도 바울도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라고 고백하며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함을 탄식하고 있는데(롬 7:14-25), 안식교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으며 지킴으로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적인 주장을 하고 있으니 안식교인 중에 누가 율법을 완전히 지킨 사람이 있는가? 필자가(진용식) 28년 동안 안식교회에 있었으나 율법을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나 완전하게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자는 하나도 만나 보지 못했다.
둘째,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면 십자가의 구속이 필요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기에 우리의 죄를 구속하신 것인데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면 예수님의 구속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성경은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고 했다.
셋째, 생전에 완전성화(품성의 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세에서 완전성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안식교의 또 하나의 율법주의 주장이다. 현세에서 성화가 가능하다고 성화, 곧 품성변화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안식교의 가르침들을 화잇의 글에서 살펴 보자.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의 백성에게서 완전히 재현될 때에는 그는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강림하시게 되는 것이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실물교훈, p. 61).
특히 화잇의 이 말을 주의하여야 한다. 이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영원히 재림하시지 못하실 것이다. 아무도 생전에 완전성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현세에서는 인간으로서는 완전성화(품성변화)가 될 수 없음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현세에서 완전성화가 불가능함을 가르치는 성경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열왕기상 8:46, 잠언 29:9, 로마서 3:10, 야고보서 3:2, 요한일서 1:8 등이다. 또한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 20:9)라는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안식교인들은 완전성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자들로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계속 성화되어 가다 성화가 완성되는 때가 오는데, 주님의 강림하실 때로서 그때에 흠도 점도 없는 몸으로 순간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고전 15:16 하반절). 우리는 영광스러운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의 품성 가운데 점이나 흠이 있는 한 우리 중 아무라도 하나님의 인을 결코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화잇의 말보다 더 완벽한 율법주의가 어디 있겠는가?
넷째, 한번 얻은 구원은 상실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안식교에서도 믿음으로 얻는 의에 대하여 말하고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식교를 율법주의라고 하는 이유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어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고, 얻었던 영생도 상실하게 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안식교 목사 신계훈 씨의 변증서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구원과 영생을 약속 받았던 사람도(요 5:24)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 그 이름이 제외될 수 있는 것이다(마 10:32-33). 그러므로 사도 바울처럼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고전 9:27)하여 자신의 ‘몸을 쳐 복종’(고전 9:27)시키고 ‘날마다 죽는’(고전 15:31) 경험을 계속하는 사람, 곧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는 것같이 하리라’(계 13:22)는 최고의 영광이 주어질 것이다. ‘한번 구원받으면 언제나 구원받는 것’이라는 막연한 보증을 믿고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신계훈, 빛과 소리,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p. 440).
반증해 보자.
첫째, 한번 얻은 구원이 결코 상실될 수 없다는 믿음은 성경의 확고한 보증 위에 서 있다. 안식교인들은 받은 구원이 불완전하여 항상 넘어질까 불안해 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나 진정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성경의 확고한 구원의 보증에 의해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성경구절들은 이를 확실히 해 주고 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9).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
그 외에도 에베소서 1:12-14, 4:30, 베드로전서 1:3-5, 히브리서 10:14, 유다서 1:24-25, 요한복음 17:11, 12, 15, 로마서 5:8-10, 로마서 8:29-30, 고린도전서 10:13, 요한복음 6:35, 히브리서 12:28, 로마서 8:1 등에 같은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의 확실한 보증들을 막연한 보증이라고 하는 안식교인들이야말로 화잇의 거짓 계시를 막연하게 보증으로 믿고 있다가 불행한 결과를 당할 것이 분명하다.
둘째, 영생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구원은 상실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속죄함을 받고 얻은 구원의 생명은 곧 영생이다. 다시 죽는 생명은 영생이 아닌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요 3:3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마다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라고 하였다.
믿고 영생을 얻은 자가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 구원이 어찌 영생이라 할 수 있겠는가?
4) 안식교의 율법주의적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안식교는 율법주의 교리를 고수하다가 1870-1880년대에 와그너(Waggoner)와 존스(Jones)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를 받아들여(오만규, 재림교회사, pp. 127-140) 율법주의적인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안식교 측에서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안식교는 율법주의의 교회가 아니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진 교회라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안식교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성경적인 기성교회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는 전혀 다른 율법주의적인 칭의를 말하고 있다. 칭의는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의롭다고 선언받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나, 안식교는 비록 ‘믿음의 의’라는 용어를 말하고는 있으나 성경과 다른 것이요, 결국 율법주의적 믿음의 의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안식교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에 대하여 화잇의 글을 먼저 살펴 보자.
“그는 당신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때에…우리는 그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곧 그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실물교훈, p. 224).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당신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아담에게 요구했던 완전한 순종 곧 흠이 없는 의, 주님의 안목으로 보실 대 결점이 없는 상태를 요구하신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가려뽑은 기별 2권, p. 486).
“그리스도의 의는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죄라도 가리워 주지 않을 것이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실물교훈, p. 328).
안식교가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의롭다고 선언받는 칭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완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예수님의 도우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칭의란 무엇인가? 성경적인 칭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를 전가하여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칭의는 인간이 대가를 지불하고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이다(롬 3:20-24; 갈 2:16; 빌 3:9).
둘째,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롬 5:18-19).
셋째, 칭의는 즉각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롬 5:1).
안식교는 이러한 성경의 믿음의 의와는 반대로 믿음을 이용해서 점진적으로 흠도 점도 없이 예수님처럼 되려고 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교인들은 지금도 그 무거운 율법주의 교리에 눌려서 품성을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 3:11)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진리를 깨닫기를 늘 기도하고 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갈 3:9).*
(안식교측)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김 대 성
A. 지난호 「교회와 신앙」측 글에 대한 소견
그 동안 안식일교회는 본 교회를 향한 비판이나 이단성 시비에 대하여 변증을 하거나 교리적으로 투쟁하는 일을 가급적 자제해 온 편이다. 그러나 최근 안식일교회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케이블 텔레비전 기독교 방송에 주주로 참여하게 됨에 따라 기독교계 일각에서 안식일교회 참여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있어, 일반 기성교회에서 본 교회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을 바르게 알리고자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던 중에 이러한 지상 토론도 갖게된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한 시비를 가릴 때 한 쪽의 의견만 듣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때로는 양 쪽의 주장을 다 들은 후에도,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주관적 편견 때문에 공정하기가 결코 쉽지 않는 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공의가 요청될 경우에 공정한 판단보다는 어떤 형태로든지 소위 ‘힘’이 라는 것이 작용하여 한쪽으로 치우친 결론이 내려지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이라는 대원칙이 있으므로 보다 양심적이고 공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번 이 지상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독자들의 양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있기를 기대한다.
「교회와 신앙」측은 지난호에서 ‘기성교회가 안식교를 이단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제시하였다. 곡해된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세부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상세한 설명을 할 것이기 때문에 이번호에서는 변증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토론에 임하는 필자의 의도는, 지난호에 이미 언급한대로, 모두가 함께 상대적 이단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이단’성 시비를 가린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므로, 본 지면을 통해서 안식일교회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잘못 소개된 부분을 바르게 정리하여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B. 서론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는 구원론이다. 이 구원론이 잘못되어 있으면 다른 교리가 아무리 성서적이라도 그것은 이미 기독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안식일교회도 다른 어느 교회 못지 않게 모든 교리의 기초를 성경에서 찾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특히 구원론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런데, 혹자는 안식일교회가 십계명과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을 한다. 「교회와 신앙」측에서도 안식일교회 구원관이 율법주의라하여 계속적인 비판을 가해 왔다.
교회사 혹은 교리사를 더듬어보면 어느 교단이나 교파를 막론하고 한 교회가 형성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교리적 논쟁이 있게 마련이다. 성경은 변함이 없지만 교리는 수많은 논쟁과 회의를 통해서 수정되고 변형되어 현재에 이르는 것이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수정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교파의 교리를 비평하려면 ‘현재 무엇을 믿고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비평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 비평하는 척도는 자신이 속한 교회의 신학이나 교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경이어야 한다.
안식일교회도 역사적으로 교리적 논쟁이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1888년에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에서 있었던 교리 논쟁은, 그 이전까지 율법의 행위가 강조되던 구원론이 믿음을 강조하는 구원론으로 돌아서는 대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본 교회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믿고 가르친다. 기독교 서회에서 발간한 그리스도교 대사전(1972년판, 928쪽)에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대하여 “믿음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고 재림과 토요일 안식, 침례, 십일조 헌금을 강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C. 안식일교회의 구원관
신약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죄인이고 그래서 구원이 필요하듯이 구약 시대의 사람들도 죄인이었고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원리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는가? 구약 시대가 율법 시대이기 때문에 행위로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구약 시대에도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구약성경 하박국 2장 4절에는 분명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것이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구약의 인물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가 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구약의 구원관과 신약의 구원관은 그 근본 원리가 동일한 것이며 구원의 주체는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은 짐승의 희생이 드려지는 성소 제도를 통해서 그 모형적인 희생 제물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신약도 마찬가지로 구약의 상징적인 성소 제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 구원의 이치를 성경적으로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다(창 1:1; 2:7).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창조의 마지막 부분인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 분과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이 창조되전 까지의 모든 피조물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최적의 조건으로 만들어진 생활 환경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업은 사람을 만드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⑵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한 영생할 수 있었다(창 1:27,28).
사람의 창조에 대하여 창세기 1장 27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상’이라는 말에는 상당히 깊고 오묘한 의미가 있겠으나, 우선 단순하게 영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부여되었고 그 지향하는 방향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여 서로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생명과를 먹으며(창 3:22)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면서 영생할 수 있었다.
⑶ 그리고 사람에게는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다(창 2:16,17).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 즉 사람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인간의 선택적 의지에 달려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과 나무를 두신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이 자발적인 사랑을 표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었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그 관계를 포기할 수도 있었다.
⑷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죄와 죽음을 선택하였다(창 3:6,7,19).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끊어졌고 인간은 죄를 알게 되었다. 인간 세계에 슬픔과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천연계는 탄식하였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⑸ 하나님께서는 죽음에 처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언약을 맺으셨다(창 3:15).
인간이 비록 불순종하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었다. 범죄로 인하여 죽게된 인간을 다시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준비되었다. 그 계획은 우주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하나님의 법이 훼손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죽음에 내어주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뱀(사단)에게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하는 희생,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인간의 구원을 예고한 것이고 “머리가 상하”는 패배는 이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온 사단의 영원한 멸망을 선언한 것이었다.
⑹ 그 언약을 따라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성육신(成肉身)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마 1:18-21; 갈 4:4).
에덴 동산 어느 한 지점에서 죄인을 구원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언된지 수 천년이 지난 어느 날, 팔레스틴 지방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 드디어 그 “여자의 후손”이 태어났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⑺ 예수께서 인간이 받아야 할 죄 값(사망)을 대신 지불하셨다(사 53장; 눅 23:46; 롬 5:8).
인자가 되신 예수는 죄없이 사셨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친히 보여주셨다. 결국 예수님은 무죄하신 중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대속(代贖)의 역사를 완성하셨다. 사망이란 죄의 결과인데 죄가 없는 분이 돌아가심으로 죄값을 지불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죄인들이 살게 된 것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
⑻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죄가 용서되고 영생할 수 있다(요 3:14-16; 요일 5:12).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 용서와 구원의 필요를 느끼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영역에 들어오면 죄를 용서받고 죄의 결과인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6-18).
⑼ 믿음를 가진 자는 회개와 용서와 거듭남을 경험한다(행 2:37,38; 요 3:3-5).
믿음을 가진 자들이 갖게 되는 경험의 영역이 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믿음을 가진 사람은 우선 회개의 경험이 필요하다. 자신이 죽을 죄인임을 깨닫고 용서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용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준비되었음을 믿고 용서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죄가 용서되고 새 사람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의식이 바로 침례 예식이다. 세례라고 하는 의식도 있으나, 성경적으로는 물에 잠기는 침례 예식이 올바른 방법이기 때문에 안식일교회에서는 성경의 방법을 따라서 입교 의식으로 침례를 행한다. 로마서 6장 3-5절을 보면, 침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 의미를 모두 부여할 수 있는 침례가 성서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세례’라고 번역된 헬라어 ‘밥티스마’(βαπτισμα)는 “잠근다” “적신다” “빠지게한다”에서 나온 말이다.
⑽ 천국의 시민들은 천국의 법칙을 따라서 산다(빌 3:20,21; 마 7:21-2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늘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천국의 시민이 된 증거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인 것이다.
⑾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성장을 경험한다(딤전 4:7,8; 엡 4:14,15).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훈련 과정에서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성장 과정에서 실패와 좌절이 반복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다시 일어나서 전진한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⑿ 예수께서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데리러 다시 오실 것이다(요 14:1-3; 살전 5:23).
성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예수께서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데리러 오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준비 상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벧후 3:10-12). 이와 같은 모양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D. 믿음과 행함의 관계
기독교인들 중에 ‘믿음’과 ‘행함’(혹은 ‘율법’)을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을 살펴보면 믿음과 행함은 결코 상반되는 견해가 아니라 상호 보완하여 온전케 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구원의 경험을 말할 때에 ‘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행함’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극단(極端)이 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그 극단에서 조금만 더 지나치면 이단(異端)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적으로 보면 행함만을 강조하는 사람, 믿음만을 강조하는 사람, 모두가 이단으로 쉽게 빠질 수 있는 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갑’과 ‘을’ 두 성경절들을 비교해 보자.
<갑1>“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을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갑2>“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2:16).
<을2>“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24,26).
우리는 이 상반되는 듯한 성경절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린 것인가? 성경 말씀에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다만 성경이 기록될 당시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교리적 배경, 신앙의 습관들, 영적인 상태 등에 따라서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 특히 변론을 위하여 성경을 사용할 때에는 성경 전체의 흐름과 전후 문맥들간의 관계, 기록된 배경 등을 면밀하게 살펴서 인용할 때 편견과 실수를 줄일 수 있게 된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원리를 설명할 때에 아브라함의 예증을 사용하였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 4:3). 그런데 믿음과 함께 행함도 필요하다는 진리를 소개하는 사도 야고보도 아브라함의 예증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느 편에 손을 들어 주어야 마땅한가? 우리는 결코 상반될 수 없는 이 두 사실을 조화시켜야 한다.
믿음을 많이 강조한 바울은 그 믿음과 행함을 이렇게 조화시킨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 ”(고전 9:25,2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을 이렇게 조화시키고 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E.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을 율법주의라고 비판하는 내용에 대한 변증
일반적으로 안식일교회의 구원관을 율법주의라고 비평하는 사람들은, 행함과 순종을 강조하는 안식일교회의 가르침, 안식일 준수, 건강식 위주의 식생활 습관 등을 지적하고 있다. 안식일 문제나 건강식 문제는 별도의 주제로 다루어질 것이므로 그 때에 상세한 설명을 제시할 것이다.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혹은 자기의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율법주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본 교회에서 발행되는 서적들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마치 안식일교회가 극단적인 율법주의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 것 처럼 기독교의 복음은 분명히 믿음과 행함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가르침들 중에서 어느 한 쪽 면에 대한 기록만을 모으면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잠시 후에 언급하겠지만, 장로교회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행함을 강조하는 부분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 부분만 모아 인용하면 장로교회도 율법주의 구원관을 가진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 비판 자료 사용의 모순
비판자들은 주로 본 교회 엘렌 화잇(엘렌 화잇에 대하여는 다음 호에서 다룰 것임)의 글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는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의 근본 사상을 떠나서 독자적인 해석을 하지 않는다. 흔히 인용되는 다음의 인용문들도 다 성경의 개념에 근거한 것들이다.
▶ “심판에 설 준비를 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안된다. 이 계명은 심판의 때에 품성의 표준이 될 것이다”(대쟁투 합본, 484)
▶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의 백성에게서 완전히 재현될 때에 그는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강림하시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61).
▶ “우리의 품성 가운데 점이나 흠이 있는 한 우리 중 아무라도 하나님의 인을 결코 받지 못할 것이다”(교회에 보내는 권면 2권, 596).
이러한 부분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서 성화의 부분을 강조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칭의를 강조하는 다른 인용문들도 얼마든지 있으며 그것들만을 모으면 전혀 다른 개념도 성립될 수 있다.
▶ “죄인은 오직 범죄한 세상의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대속을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의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받을 자가 없다. 죄인은 다만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망과 부활의 공로를 통해서만 죄와 율법의 정죄와 범죄의 형벌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 믿음이야말로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며 신앙이란 믿는 것 뿐 아니라 신뢰하는 것을 포함한다”(가려뽑은 기별 1권 490).
▶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입혀지기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교회증언 5권, 219).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죄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인용문들이 풍부하게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매우 강조되고 있음에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화를 강조하는 부분의 인용문들만 사용하여 논리를 전개하면 사실이 왜곡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으며 자체 모순에 빠질 위험성도 다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한다면 성경에서도 율법주의적 구원론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도 심판을 강조하는 내용(신약에만 심판이라는 용어가 79회 나옴)이나 계명에 대한 순종과 행함을 강조하는 성경절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 계명에 대한 순종과 행함이 강조되고 있는 성경절들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 “…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율법과 심판
1950년 이래로 장로교회의 교리상 표준이 되어 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면 명백히 율법과 행함을 강조하는 내용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화, 율법, 심판에 관한 내용을 몇 가지 발췌하여 소개한다.
▶ <제13장 성화 1항>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 참된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 <제13장 성화 3항> “그 전쟁(육체와 성령사이-필자주)에서 그 남아있는 부패한 부분이 당분간은 상당히 우세할지 모르나 그리스도의 성결케 하는 영으로부터 힘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음으로써 중생한 부분이 이기게 되며, 그리하여 성도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
▶ <제19장 하나님의 율법 2항> “이 율법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도, 악에 대한 완전한 규칙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의 규칙으로,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십계명의 형식으로 두 돌판에 기록하여 전달해 주셨는데,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본분을 포함하고 있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본분을 포함하고 있다.” * 율법 3항에서는 십계명을 도덕법이라고 했음.
▶ <제19장 하나님의 율법 5항> “도덕법은,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영원토록 그것에 복종케 한다. …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으로 도덕법의 이같은 의무를 전혀 폐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화시킨다.”
▶ <제33장 최후의 심판 1항>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모든 심판하는 권세가 성부로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 날에 타락한 천사들이 심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살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자기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전말을 밝히고, 그들이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F. 결론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죄인에게 이르러오는 선물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러면 행함과 순종이란 무엇인가? 값없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식물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비와 햇빛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듯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롬 8:3,4) 하신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천국 백성이 된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을 의지할 때에만 그리스도인 생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우상 숭배를 하지 않기 위해 신사 참배를 거절하다가 끝내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우리는 율법주의자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십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을 율법주의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회의 분열상, 타락상, 이와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은 무엇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가? 물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들이 있겠지만, 한국 교회가 대체적으로 ‘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채 인본주의 신앙, 기복 주의 신앙에 기울어져 경건한 그리스도인 생활면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경시하여 순종하지 않은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열성이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한국의 교회들이 어서 속히 다시 한 번 거듭나서 순결한 교회, 경건한 생활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어, 이웃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발휘하는 개벽의 역사가 속히 일어날 것을 염원하는 바이다.
안식일교회 大논쟁3(96년 10월호)
--엘렌지 화잇과 안식일교회--
안식교의 창시자 엘렌 지 화잇은
거짓 선지자이다
공동집필/ 최삼경·진용식
전호의 안식교측 김대성 목사의 글에 대한 변증
1. 들어가는 말
이번에 <교회와신앙>에서 안식교 측과 지상토론을 가지게 된 것은 한 쪽의 견해만을 듣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안식교를 이단으로 보고 있는 개신교 성도들에게도, 반대로 개신교를 바벨론적이라고 보고 있는 안식교인들에게도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알게 하자는데 목적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개신교인들이 보고 있는 본 <교회와신앙>에만 이 논쟁의 내용을 발표하는 것은 평형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안식교인들이 많이 보고 있는 월간 <교회지남>에도 함께 발표될 수 있기를 기대했고 또한 요구했다. 그렇게 할 때 제삼자에게 공정한 논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고, 또한 안식교인들이 안식교가 참 진리 교회라고 믿고 있는 주관적인 진심에도 부합될 것이며, 나아가 진리는 옳은 편에서 승리한다는 확신에도 부합하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안식교 측은 <교회지남>에 이 논쟁 내용을 게재하지 않고 단지 이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사실만을 알리는 작은 광고을 <교회지남>에 내보내는 쪽을 택했다. 이는 안식교인들이 이 글을 읽으면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볼까 염려스러워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비록 <교회지남>에 광고를 하는 방법도 차선으로 가능하다고 합의하고 논쟁을 진행하기로 했지만, 필자(진용식) 편에서는 많은 안식교인들이 이 논쟁을 지켜보기를 바라는 아쉬운 마음이 있어 어떠한 방법으로든 실질적으로 많은 안식교인들이 이 논쟁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안식교 측에 다시금 요구해 본다.
2. 1888년에 안식교의 구원론이 율법주의적인 구원관을 벗어나는 대전환을 이루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안식교 측의 김 목사는 주장하기를, 원래는 안식교가 율법주의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1888년 미네아폴리스 총회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구원론으로 대전환되었다고 하였다. 김 목사는 적어도 안식교가 과거에는 율법주의였음을 시인한 것이다. 즉 과거의 안식교의 구원론은 율법주의였으나 1888년 이후의 구원론은 믿음에 의한 구원론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현재는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 목사의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점을 낳게 되고, 따라서 많은 비판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첫째, 김 목사의 말이 맞다면 1888년 이전의 율법주의적인 구원관은 어디에서 왔는지 밝혀야 한다.
필자가 볼 때 1888년 전에는 율법주의적이었으나 그후로 율법주의를 벗어났다는 김 목사의 말은 틀린 것이다. 그러나 일단 1888년 전에는 자신들이 율법주의였음을 시인한 점만 가지고 생각해 보자. 화잇을 중심해서 성경연구 대회를 만들었던 1848년을 안식교의 창시로 본다면, 약 40여 년간 안식교는 율법주의 속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누구의 가르침과 주장에 의하여 40여 년간 율법주의 속에 있었다는 말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화잇의 주장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도 화잇은 안식교의 선지자로 군림하고 있는 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김 목사는 그 율법주의적인 구원관은 화잇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화잇을 율법주의자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화잇을 율법주의자로 만들고 화잇을 버릴 것인가? 답을 기다려 본다.
둘째, 김 목사의 말이 맞으려면 과거의 잘못된 가르침을 확실히 공개하고 회개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김 목사는 주장하기를,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구원론이다. 이 구원론이 잘못되어 있으면 다른 교리가 아무리 성서적이라도 그것은 이미 기독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고 하였다. 김 목사의 말에 의하면 그렇게 중요한 안식교의 구원론이 1888년 이전에는 완전히 잘못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김 목사는 표현하기를 약간의 수정이 아니라 ‘대전환’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간에 잘못 가르쳐 왔던 구원론이 무엇이었는가를 공적으로 선언했어야 했고, 과거의 안식교가 이단적인 구원관인 율법주의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었다면 분명한 회개가 있어야 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안식교는 이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이나 회개가 없었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회개는 김 목사와 한국의 전 안식교인들은 물론 전 세계의 안식교인들이 다 회개해야 할 일일 것이다.
더욱이 필자는 두 가지가 의심스럽다. 첫째는 시작이 잘못된 안식교가 오늘날 어떻게 바른 교리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율법주의적인 구원관, 즉 이단적인 구원관에서 어떻게 바른 구원관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둘째는 그렇다면 안식교의 창시자요 선지자는 화잇이 아니라, 바로 화잇의 구원관을 뒤엎고 바른 구원관을 세운 와그너와 죤스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셋째, 김 목사의 말이 맞으려면 화잇의 계시인 예언의 신이 거짓 계시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안식교에는 자타가 부정할 수 없이 소위 예언의 신(계시)을 받은 선지자 화잇이 있다. 안식교의 거의 모든 교리가 화잇의 계시의 인도를 받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교리들은 조사심판, 2300주야 해석, 그리고 음식문제 등이다. 화잇의 계시는 교리뿐 아니라 안식일 시간, 교회운영, 심지어 옷차림에까지 관계된다. 안식교는 화잇의 계시인 예언의 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고 보존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성서기초교리, pp. 327-328). 그렇게 볼 때 김 목사의 말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화잇의 계시인 예언의 신이 1888년까지 안식교를 잘못 인도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약간의 수정을 하는 정도가 아니고 대전환을 해야 할 정도였다니(필자는 대전환이란 말을 김대성 목사에게서 처음 듣는다) 화잇의 계시는 어디서 온 것이었다는 말인가?
3. 현재 가르치는 교리를 가지고 비판하라는 말에 대하여
김 목사는 안식교의 교리가 과거의 것과는 많이 다르게 수정되었고 앞으로도 수정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현재 가르치고 있는 교리를 가지고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 목사의 주장처럼 사람들의 주장이나 교리는 수정되고 발전될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변할 수 없으며 하나님도 변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특히 그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도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수정될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계시인 성경 말씀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때문에 절대로 수정될 수 없음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교는 다른 교파의 창시자와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화잇이 있다. 그리고 그 계시를 예언의 신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 계시들에 의하여 안식교의 교리들이 세워진 것이다. 안식교인들은 화잇이 받은 계시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라고 믿고 있는데, 이는 화잇의 계시에 의한 교리들은 계시처럼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다. 화잇이 받은 계시가 수정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화잇의 계시성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화잇 자체를 포기해야 가능할 터인데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장로교는 칼빈의 교리를 수정할 수 있다. 칼빈의 주장을 계시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오늘날 칼빈의 구원관을 폐기하고 수정해야 한다면 마땅히 칼빈도 함께 폐기되고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4. 안식교가 율법주의로 보이는 것은 성화를 강조했기 때문이란 말에 대하여
김 목사는 주장하기를, 안식교의 구원교리를 비판할 때 안식교에서 성화를 강조하는 부분의 인용문들만을 사용하여 안식교를 율법주의로 비판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즉 안식교에서도 칭의를 강조하는 부분에는 전혀 율법주의적 요소가 없다는 말이요, 단지 성화의 문제를 칭의의 문제로 보기 때문이란 것이다. 김 목사는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성경이나 장로교회의 웨스트 민스터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성화와 계명을 강조하는 부분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필자나 기성교회가 율법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성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이다. 그러나 필자가 안식교의 구원교리를 율법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안식교의 칭의 교리와 구원론 자체가 율법주의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안식교가 말하는 칭의라는 용어는 개신교와 같으나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개신교에서 말하는 칭의는 안식교의 주장처럼 율법에 대한 완벽한 순종과 전혀 상관없이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값없이 입혀주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이다. 그러나 안식교 선지자 화잇이 주장하는 칭의는 어떤가? 다시 한번 화잇의 글을 인용해 보자. 이는 성화에 관한 부분의 인용문이 아니고 칭의에 대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화잇은 혼인 예복의 비유를 칭의로 소개하면서 말하기를, “그는 당신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때에 우리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안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드디어 우리는 그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곧 그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그리하면 주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그는 무화과 잎사귀의 옷이나 죄로 인하여 헐벗고 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의 완전한 순종을 의미하는 당신이 친히 주신 의의 두루마기를 보시게 된다.”(엘렌 지 화잇, 시조사, 실물교훈, p. 324)라고 하였다.
이러한 화잇의 칭의는 개신교의 구원론으로 말하면 성화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안식교의 화잇이 가르치는 구원과 칭의는 행위, 행실, 율법의 순종이 칭의에 조건이 되고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의 행실이 칭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화잇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의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모든 사람은 저희의 행실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품성은 우리가 행한 것으로 나타나고야 말 것이다”(위의 책, p. 325)라고 하였다. 화잇의 이러한 주장은 성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칭의 자체를 인간의 행실로, 율법의 완전한 순종으로 보는 율법주의적인 주장에서 나온 말이다.
독자들이 주의깊게 살펴보면 알겠지만 필자가 인용했던 화잇의 글들은 성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두 구원과 칭의에 관계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안식교의 율법주의적인 주장은 칭의의 문제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화 문제도 그러하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개신교의 성화는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화의 결과는 구원받은 자의 상급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성화가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교의 성화는 기성교회의 것과 다르다. 용어는 같으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른 율법주의적인 것이다. 안식교에서는 구원의 조건으로서 성화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잇은 말하기를, “우리의 품성 가운데 점이나 흠이 있는 한 우리 중 아무라도 하나님의 인을 결코 받지 못할 것이다”(엘렌지 화잇, 교회에 보내는 권면 2권, p. 596)고 하였다. 즉 완벽한 성화만이 하나님의 인을 받는 조건이라는 말이다.
또 화잇은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의 백성에게서 완전히 재현될 때에 그는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강림하시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p. 61)고 하였다. 이 말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이 완전히 재현된다는 말은 완전 성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완전히 성화된 품성을 찾으시려고 강림하신다는 말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성화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에서 이런 결론을 유추해 볼 수 있겠다. 김 목사는 분명히 구원은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했고, 안식교가 전에는 율법주의적이었음을 인정했으며, 나아가 화잇의 일련의 주장들은 구원 문제가 아니라 성화 문제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화잇의 주장들이 성화를 위한 문제인가, 구원 즉 칭의 문제인가 하는 점을 밝히는 일만 남게 되었으며, 만일 화잇의 주장 중에 칭의 문제를 율법주의적으로 주장했다면 김 목사의 입장에서도 화잇은 율법주의적인 이단임에 틀림이 없게 되었다. 김 목사는 다음 호에 필자가 제시한 화잇의 말들을 구체적으로 밝혀주기 바라며, 그에 따라 더 깊은 변증을 계속하겠다.
5.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을 인용하는 점에 대하여
김 목사는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에 대한 말씀을 인용하면서(약 2:17, 24, 26) 믿음을 강조한 구절들과 행함을 강조한 구절들이 서로 상반되거나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안식교도 그렇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야고보서의 말씀이 율법주의적으로 보이지만 율법주의적인 가르침이 아닌 것처럼 율법주의적으로 보이는 안식교의 가르침도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한 김 목사의 말과는 반대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많은 안식교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주의적인 구원관을 변호하는데 이 야고보서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야고보가 강조한 행함을 율법의 행위로 보기 때문에 자신들의 율법의 행위를 강조할 때마다 야고보서의 행함에 대한 구절들(약 2:20-26)을 인용하여 변증하는 것이 상례인 것이다.
일례로 안식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고인이 된 우필원 씨는 그의 책 ‘진리의 샘’ 108-109쪽에서 야고보서 2:20-26의 말씀을 율법의 행위로써 구원받는 증거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행함은 율법을 지키는 율법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에 나타나는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행함과 안식교인들이 강조하는 율법의 행위는 어떻게 다른가? 율법의 행위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며, 믿음의 행함이란 율법의 행위에 관계된 것이 아닌 믿음에 따라 나타나는 행함인 것이다. 예컨대 비가 올 줄을 믿었기에 우산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 우산을 준비하는 일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다. 비가 올 것에 대한 믿음에 따른 행함인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라합의 경우를 살펴보자(약 2:25).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했는데 라합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단 말인가? 그녀가 안식일을 지켰는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라합은 창녀였고 자기 민족을 속이고 적국의 첩자를 숨겨준 사람으로서 율법의 행위로 보면 오히려 정죄받아야 할 사람인 것이다. 라합이 인정받은 행함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다(약 2:21).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한 약속의 성취를 믿었기 때문에 이삭을 죽여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음으로(히 10:17-19) 이삭을 드렸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 4:21-22)고 하였다. 이는 율법의 행위나 율법의 순종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에 의한 행함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율법의 행위를 보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 행함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야고보서의 행함에 대한 강조는 결코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고 믿음에 의한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식교인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전히 안식교는 율법주의이다. 소위 예언의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화잇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바뀌거나 수정된 일이 없으며, 안식교는 여전히 율법주의적인 계시들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교의 율법주의적인 교리는 안식교가 화잇의 계시를 하나님의 계시로 믿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수정될 수 없기 때문에 화잇을 버리기 전까지는 율법주의인 것이다.
화잇은 거짓 선지자이다
1. 화잇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한다
화잇의 문제는 본 논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안식교가 바른 기성교회로부터 정직하게 이단이란 소리를 듣지 않기를 원한다면 화잇를 거짓 선지자로 인정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게 하면 안식교는 안식교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기성교회에서 화잇을 거짓 선지자로 비판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의 계시관이다. 개신교의 계시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완전무결한 계시로서 성경만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또 성경만으로 충분히 구원받고 믿음의 바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단들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안식교 역시 이단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엘렌 지 화잇을 예언의 신의 계시를 받은 자로서 말세의 마지막 선지자로 믿고 있고, 그의 글들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예언의 신의 증언’이라 하여 제2의 성경과 같이 믿고 성경의 해석, 교회정치, 예언해석 등 모든 교리의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안식교의 ‘성서기초교리’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 교회라 주장하는 교회는 그 속에 예언의 선물이 나타나야만 한다고 우리는 믿는 바이다. 우리는 화잇 부인이 그 예언의 선물을 가졌으며 그의 저서들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한 계시와 더불어 교회를 이끌어 성서에로 돌아가게 하지만 … 예언의 신이 주신 지시들을 쫓아야 한다. 이 시대를 위한 진리들을 사랑하고 순종하여야 한다”(한국연합회, 성서기초교리, p. 335)라고 하였다. 즉 화잇이 참 교회의 특징인 예언의 신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화잇의 계시들에 의하여 교리, 교회정치 등 모든 문제를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식교는 말하기를, “출애굽 운동을 첫 번째 지도하실 때 그것을 올바르게 인도하실 수단으로 여호와께서 그 속에 예언의 신을 허락하셨다. 그가 두 번째 그 손을 펴사 열 국에서 남은 백성을 이끌어 내시는 재림운동을 지도하실 때 그 것을 올바르게 인도하실 수단으로 예언의 신의 동일한 선물을 주시리라고 기대할 것이다. 남은 교회에 관한 예언은 바로 이 일을 요청한다”(위의 책, p. 327)고 하였다. 즉 모세가 계시를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했듯이 예언의 신의 계시가 말세의 남은 백성인 안식교를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교는 주장하기를, “예수의 증거를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전 시대에 그 백성을 인도하고 보존하신 예언의 신의 은사를 가진다는 뜻이다”(위의 책, p. 328)고 하였다. 즉 안식교는 예언의 신의 은사를 받은 화잇의 계시에 전적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성경 외에 다른 계시의 인도를 받고 있는 안식교를 어찌 이단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2. 안식교의 변증을 예상하여
이렇게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안식교를 비판하면 안식교는 다음과 같이 변증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래서 미리 안식교의 변증을 다음과 같이 예상해 본다.
첫째,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인 예언의 은사를 왜 부인하느냐?
둘째, 화잇의 계시들이 성경적이며 경건한 유익을 주는 것들이다.
셋째, 화잇의 업적들이 그의 계시성을 증거한다.
이러한 변증을 예상하여 미리 비판을 해보겠다. 안식교는 화잇의 계시에 대하여 비판할 때마다 여러 가지의 은사 중에 화잇의 계시는 하나인 예언의 은사일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렇다면 안식교가 화잇의 계시를 고전 12장의 여러 가지 은사중 하나의 수준으로 인정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안식교는 화잇의 계시를 예언의 신이라고 하여 참 교회의 특징으로 주장하고 있다.
안식교는 주장하기를, “참 교회라 주장하는 교회는 그 속에 예언의 선물이 나타나야만 한다고 우리는 믿는 바이다. 우리는 화잇 부인이 그 예언의 선물을 가졌으며”(위의 책, p. 335)라고 하였다. 참 교회, 남은 무리의 특징은 계시록 12장 17절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라고 했는데, 그 예수의 증거가 곧 대언의 영(예언의 신)이며(계 19:10), 그 대언의 영을 화잇이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잇의 계시는 남은 무리, 참 교회의 특징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교는 예언의 신의 계시가 여러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사로 보지 않고 화잇 한 사람에게 임한 계시로 보는 것이다.
안식교의 ‘성서기초교리’에는 “이 목적을 위하여 주께서는 당신의 대리자를 택하셨는데 이들은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대롱거리는 연약한 자 중 가장 연약한 자였다. 그 시기가 지난지 두 달이 못되어 메인 주, 포클 랜드에 사는 당년 17세의 엘렌 지 하몬양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이르렀다”(위의 책, p. 330)고 하였다. 이처럼 안식교는 화잇의 계시를 남은 교회의 특징으로 하나님의 특별히 주신 계시로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안식교는 방언의 은사, 특히 하나님께 하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은사(고전 14:2)나 통역, 영분별의 은사 등을 인정하고 활용하지 않으면서도 안식교가 화잇의 계시만을 예언의 은사로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안식교는 또 화잇의 계시들이 성경적이며 경건한 유익을 주는 것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변증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만으로도 완전무결한 계시가 분명한데 왜 하나님께서 또 다른 계시를 주셔야 한다는 것인가? 화잇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받아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교훈들을 가르치고 있다. 화잇은 성경에 용어조차도 없는 조사심판 교리,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 않는 채식교리, 비성경적인 시한부 종말론 교리 등의 계시를 받아 안식교를 만든 것이다. 안식교의 주장대로 화잇의 계시가 하나님의 계시라면 하나님께서 성경에 조사심판교리나 채식교리 등 미흡한 부분이 있어 화잇에게 새로운 계시를 주셨다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결국 성경은 완전하지 못한 계시가 되고 결함이 있는 계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 외에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화잇의 계시는 결코 예언의 은사가 아니고 비성경적인 사단의 계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안식교는 화잇이 참 선지자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의 예언의 성취(렘 28:9)를 들어서 변증한다. 그래서 필자는 화잇의 빗나간 수많은 예언들을 소개함으로 그의 사단성을 입증하고 싶다.
화잇은 1856년에 안식교 총회에서 계시를 보았는데 그 총회에 출석한 자들 중에 살아서 재림을 맞을 자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40년이 지난 지금 그 총회에 출석한 자들은 다 죽었다. 그래서 그 예언은 빗나가고 말았다. 또 재림 때까지 노예제도가 계속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도 빗나갔으며, 미국의 남북전쟁시 링컨을 비난하고 이 전쟁에서 링컨이 패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빗나갔다. 그외에도 많은 예언을 했으나 거의 빗나간 것들이었다(참조: 최반석 저, 화잇 부인의 거짓 예언들).
이처럼 화잇의 예언들이 빗나간 것들을 볼 때 화잇은 거짓 선지자가 분명하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기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신 18:21-22)고 하셨다.
어떤 예언은 맞고 어떤 예언은 틀렸을 때 분명히 그 계시는 사단의 계시라고 보아야 맞다. 성경의 말씀대로 적그리스도의 영으로도 기적과 이사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화잇의 빗나간 예언들은 그의 사단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믿는다.
다음으로 안식교는 화잇의 업적을 들어서 그녀가 참 선지자라고 변증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안식교는 주장하기를, “17세의 연약한 몸으로 재림운동에 참여하여 그 책임을 감당하게 된 이 여성의 펜에서 쏟아져 나온 수십 권의 책들만큼 높은 영적 수준에 있는 책들을 쓴 일이 없다. 그 저서들 자체가 증거한다”(위의 책, p. 336)고 하였다. 즉 화잇이 쓴 많은 저서들(약 46권)을 볼 때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가 참 선지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잇은 그가 받은 계시를 기록하여 많은 서적을 저술했는데 사실은 그 저서들의 내용중 80%가 표절된 것이었음을 폭로하는 기사가 미국 뉴스위크지(1981년 1월 19일 발행)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안식교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도 잘못되었지만 표절된 글들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고 있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또 안식교는 화잇이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참 선지자라고 변증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참 선지자라고 할 수 없다. 많은 이단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하고도 다른 교리에서 이단성을 드러내어 이단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3. 화잇은 성경에 예언된 거짓 선지자가 아니면 무엇인가?
성경은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에 대하여 예언하고 경계하고 있다. 그러면 화잇은 성경에 예언된 거짓 선지자가 아닌지 예언된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거짓 교사와 거짓 선지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딤전 4:1-5).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3:9).
이 본문들에 의하면 거짓 선지자나 거짓 교사들의 다른 교훈의 특징 중 하나는 음식을 금하는 것이다. 이 예언대로 안식교의 화잇도 음식물에 대한 계시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음식물에 관한 그의 계시를 기록한 저서들로 ‘가정과 건강’, ‘음식물에 관한 권면’ 등이 있다. 이 책들에 기록된 화잇의 계시들은 육식을 강력하게 금하고 채식을 강조하는 것들이다.
화잇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백성이 육식에 대항하여 굳게 서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게 내게 제시되었다. 하나님께서 만일 당신의 백성이 이 기별에 유의하기를 원하시지 아니 하신다면 저들이 깨끗한 피와 명석한 정신을 갖기 원할진대 육식의 사용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기별을 30년동안이나 그들에게 전하셨겠는가? 육식을 함으로써 동물적 성질이 강화되고 영성은 약화된다”(엘렌 지 화잇, 시조사, 교회에 보내는 권면 2권, p. 412)라고 하였다. 이렇게 화잇은 육식을 금해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고 30년 동안이나 그 교리를 전했다고 하였다. 채식교리는 성경에 없는 것이며, 주님께서도 육식을 하셨고(눅 24:42-43), 백성들에게도 친히 나누어 주셔서 먹게 하셨던 육식을(요 6:11) 금하고 채식을 주장하는 화잇이 성경에 예언된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엘렌 화잇과 안식일교회
김대성
지난 호 <교회와 신앙>측 글에 대한 소견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에 대하여 비판한 부분에 대해서는 지난 호 원고에 이미 설명이 되었으므로 재론할 의사가 없으며, 그 외의 문제로 지적한 부분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을 더하고자 한다.
① 이단을 규정하는 방식에 대하여
장로교 통합측이 총회에서 안식일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에 대하여 필자는 안식일교회측과 한 마디 대화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을 문제로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교회와신앙>측 필자는, “어느 교단에서든지 이단을 규정할 때 이단들을 불러서 물어 봐야 할 아무 의무도 권리도 없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안식일교회도 그런 방식으로 다른 교회를 이단시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물론 교회 자체 내에서는 교리를 달리하는 다른 교파를 이단시하고 어떤 통일된 견해를 정리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떤 공식적인 총회에서 결의를 하거나 그 결의된 사실을 공론화하고자 할 때에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논의되는 내용 중에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에 세계적인 종교학자 월터 마틴(Walter Martin)이 안식일교회의 이단성 여부를 연구하고자 할 때에 그 연구하려고 하는 분야에 대한 방대한 질문들을 본 교회 대총회에 보내왔고 본 교회는 그것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를 책으로 만들어 보낸 바 있다. 객관성 있는 연구를 위해서는 한 개인도 그러한 방식을 취하는데, 한 교단이 상대방의 교리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검토없이 표면적인 현상이나 단편적인 연구 결과에 의한 그릇된 정보를 가지고 총회에서 이단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 경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② 수(數)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
필자는 지난 호에서 “만약 한국의 안식일교회 교인수가 1000만 명이 된다면 아무도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형식으로 수에 대한 언급을 한 바 있다. 그 이전 문장들을 보면 왜 그러한 논리를 사용했는지 배경이 있지만, 수의 논리를 사용한 이유에 대하여 한 가지 부언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한때 장로교 통합측에서 순복음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했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입장을 바꾸어 그 결정이 취소되었다. 처음에는 어떤 이유로 순복음교회를 이단으로 정했는지, 그리고 나중에는 어느 편의 입장이 달라져서 무슨 명분으로 그 결의를 취소했는지 그 과정과 이유를 밝혀주기 바란다.
③ 「사도신경」문제에 대하여
필자는 지난 호에서 이단의 분별 기준으로 자주 사용되는 사도신경의 모순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교회와신앙>측에서는 그것은 한 개인의 견해이지 이단논쟁의 핵심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물론 그것이 이단 논쟁의 핵심은 아니다. 그러나 사도신경 고백 여부를 이단 판별의 기준으로 제시한 T씨는 한때 한국 기독교계 이단 사이비 문제의 권위자였고 지금도 서점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는 이단 문제 서적들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단 문제를 다루는 학자마다 견해 차이가 다르다면, 그리고 T씨의 기준을 한 개인의 견해라고 한다면, 예장 통합측에서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단 판별의 공식적인 기준은 무엇인가?
성경 외의 다른 계시는 존재하지 않는가
안식일교회를 이단으로 비평하는 사람들은 ‘안식일교회는 성경 외에 엘렌 화잇의 계시를 주장하여 화잇을 선지자로 믿고 있으니 이단’이라고 말한다. 성경 이외에 다른 계시나 선지자를 인정하면 이단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구약 요엘 2장 28절과 29절의 말씀을 살펴보자.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 29).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초기교회 오순절에 내린 성령의 역사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사실과 예언들이 이중으로 적용(예 : 구약에 나타난 수많은 메시야적 예언들, 겔 28장의 두로왕과 천사장 루스벨, 마 24장의 예루살렘 멸망과 예수의 재림 등)되고 있듯이, 이 말씀도 그리스도 교회가 탄생되는 시점인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와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가 마치는 시점에 있게 될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를 동시에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욜 2:23 참조). 베드로는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욜 2:28-31; 행 2:17)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베드로가 살던 그 당시를 ‘말세’로 본 것이다.
그리고 요엘 2장 31절은 성령의 큰 역사와 관련하여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피빛 같이 변”할 것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암시하고 있다.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실제로 해와 달의 변화를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로 묘사하고 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29).
다시 요엘 2장 23절의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이 이른 비와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예언하고 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여기에서 “이른 비”는 파종을 전후하여 내리는 비이고 “늦은 비”는 추수를 전후하여 곡식이 여물어 추수하도록 내리는 비이다. 따라서 주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또 한 번의 ‘말세’에도 성령의 큰 역사가 있을 것인데 이것을 “늦은 비”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이외의 계시나 예언의 역사를 무조건 배제하는 것은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태도라고 생각된다.
고린도전서 12장 8절부터 11절의 말씀을 보면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주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성경 말씀에 의하면 예언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하나의 은사인 것이 분명하다. 사도 바울은 계시와 예언을 관련시켜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만일 곁에 앉은 다른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30, 31). 이 문맥을 보면 성경 이외에는 다른 계시가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보내는 편지서에서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살전 5:19-21)라고 권면하였다. 물론, 안식일교회가 이러한 보편적인 예언의 은사나 계시를 엘렌 화잇에게 적용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 외의 다른 계시를 젼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비평가들이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내용을 피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무조건 부인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그러나 계시나 예언을 다룰 때에 그것이 성경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검증하고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일이다.
이러한 논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안식일교회는 ‘방언의 은사’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예언의 은사’는 인정하는가?”. 안식일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무조건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안식일교회는 초기교회의 사도들이 외국인들에게 전도할 때에 나타났던 방언의 은사가 언젠가는 나타날 것을 믿고 기대하고 있다. 현재 많은 보수적인 개신교회들도 고린도전서 14장의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수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엘렌 화잇은 어떤 사람인가
엘렌 하몬(결혼전 이름)은 1827년 미국 메인주 골햄에서 태어났다. 8명의 형제들이 있었고 전 가족들은 감리교회의 신실한 신자들이었다. 학교를 다니던 중 등교길에 만난 사고(코에 돌맞음)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3년간의 교육을 마지막으로 학업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초등학교 3년이 전부였다.
경건한 신앙을 위해서 항상 열심히 노력하던 엘렌 하몬은, 밀러의 재림 운동의 결과로 파생된 1844년 10월 대실망의 경험이 있은 지 약 2개월 후인 12월 어느 날, 경건한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남포틀랜드의 어느 한 가정에서 아침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예배 참석자들은 이전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현저한 임재를 느꼈다. 이때 엘렌에게 계시가 임하였다. 계시를 받는 동안 호흡이 끊어져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울기도 했으나 계시가 끝나면서 호흡은 다시 계속되었다.
그의 활동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1915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성경과 역사와 그리스도인의 생활 등에 관한 2,000여 회의 계시를 받아 교회의 발전과 교인들을 바르게 교육하는 일에 공헌하였다. 그가 저술한 책은 49권이며 5,000개 이상의 기사들을 각종 정기 간행물에 기고하였다. 그의 저술은 종교, 교육, 건강, 사회 문제, 예언, 출판, 영양, 절제, 경영, 가정 문제 등 광범위한 영역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를 다룬 책으로서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는 책 「정로의 계단」(Steps to Christ)은 13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1억부 이상이 보급되었다. 또한 그의 저서들 중 건강에 관한 개념들과 내용들은 당시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나 현대 의학과 과학이 발달되면서 그 모든 내용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과학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엘렌 화잇의 영감성과 표절시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배제하고 인간영감설을 받아들인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기자들, 즉 사람을 감동하시고 그들의 사상에 영감을 주시거나 계시를 주신 것이고, 기자는 그것을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배경을 토대로 하여 자기의 필치로 기록했다. 그래서 성경의 각 책들은 그 어휘가 다르며 기자의 교육과 교양을 반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엘렌 화잇의 글에 대해서도 글자 하나하나에 계시와 영감이 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를 자신의 언어와 필치로 기록해야 했고, 그의 영감된 사상을 글로 표현할 때 이미 다른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내용들 중에 자신이 기록하고자 하는 내용과 일치하는 글들이 있으면 그것을 차용해서 쓴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일은 그 당시 환경이나 시대적 배경에서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며 위법도 아니었다. 사실상 성경의 기자들도 영감 받은 사상을 기록할 때 이미 기록되어 있는 글들을 차용해서 쓴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모세 - 자기보다 250여 년 전에 존재한 함무라비 법전(CH)으로부터 여러 가지 개념과 문체를 차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령을 반포하였다.
② 솔로몬 - 잠언은 솔로몬 자신이 다 기록한 것이 아니고 여러 다른 계층의 사람들의 사상을 차용하여 수집한 부분도 많이 있다.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전 12:9, 10).
③ 이사야 - 이사야 2장 2-4절과 미가서 4장 1-3절의 평화운동 내용에 유사성이 있지만 누가 원저자이고 누가 복사자인가 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이사야 36-39장과 열왕기하 18-20장의 히스기야 시대 사건의 기록 내용도 유사하나 원저작자가 누구인지 문제시하지 않는다.
④ 역대상, 하는 사무엘상, 하와 열왕기상, 하의 내용과 상당 부분이 같은 내용들이다.
⑤ 복음서의 기자들 - 마가복음의 95%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누가는 복음서를 계시와 예언적 꿈을 통하여 저술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성령의 지도하에 다른 작품들을 연구한 과정을 거쳐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⑥ 유다서와 요한계시록 - 두 책보다 약 150여 년 전에 익명의 저자가 기록한 위경서인 에녹서에 나오는 자료를 사용한 부분이 있다(에녹서 1:9과 유 1:14, 15; 에녹서 40:1과 계 7:9; 에녹서 86:1과 계 9:1; 에녹서 90:26과 계 20:15; 에녹서 91:16과 계 21:1 등 비교).
성경의 이와 같은 예들을 살펴볼 때에 다른 사람의 글을 차용했다고 해서 영감받은 것이 아니라고 단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엘렌 화잇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나 문화적 상황으로 보아 다른 사람의 글을 차용한 것이 고의적인 속임수나 오늘날의 용어로 ‘표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표절’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작품에서 사상이나 기사 등을 취하여 자기의 것으로 삼는 행위”(웹스터 2판, 1087)로서 한 저술가가 의도적으로, 그리고 명예욕이나 재물 이득욕을 가지고, 다른 저술가의 문학적 자료들을 자신의 작품으로 전환시키는 위법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차용’이라는 것은 타인의 사상 또는 문체를 이용하거나 채택하는 행위로서, 저작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작품이나 단어를 공정하게 사용하였는지, 차용이라는 특수 목적에 부합되게 사용하였는지 하는 것을 문제로 삼는다. 이 문학적 차용은 표절과는 다른 것이다.
‘표절’ 시비 외에도 여러 방면으로 제기된 사소한 문제들이 있으나, 그러한 문제들에 대하여는 이미 1951년 리뷰 앤드 헤럴드사에서 발행된 「엘렌 화잇과 그녀에 대한 비평들」(Ellen G. White and Her Critics)이라는 책을 통해서 자세한 설명을 다 해 놓았다. 혹시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면 문제를 제시할 때 출처를 확실하게 밝혀 줄 것을 제안한다.
엘렌 화잇의 글들과 성경과의 관계
엘렌 화잇의 저술들은 결코 성경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글들은 성경과 같은 수준에 놓일 수 없다. 그의 모든 글들은 오직 성경의 기준에 의하여 판단을 받아야 하며 그것에 종속되어야 한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성경만이 모든 교리의 기초라는 종교 개혁의 원칙, 즉 “오직 성경만이”(Sola Scriptura)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엘렌 화잇은 본 교회의 주요 교리들이 성립되고 발전해 가는 동안 교회의 창시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모든 교리들은 성경 연구를 통하여 성경에 기초하여 나온 것이며 계시에 기초하여 교리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엘렌 화잇 자신도 성경이 교회의 최종적 규범이라고 믿었으며 또 그렇게 가르쳤다. 1851년에 출판된 그의 첫 번째 책에서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들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추천합니다”(초기 문집, 78).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다시 이렇게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인간에게 위탁하셨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권위 있고 확실한 계시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은 품성의 표준이요 교리의 계시자요 체험의 시금석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서문, ⅶ). 그는 평생동안 이러한 견해를 바꾸지 않았다.
엘렌 화잇 자신이나 안식일교회 교인들은 엘렌 화잇의 글들을 성경처럼 생각하거나 성경과 동등한 권위로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과 화잇의 저술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보는 것이 본 교회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그의 글들은 ① 사람들을 성경으로 바르게 안내하는 역할을 하며 ② 성경을 쉽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③ 성경의 원칙을 실 생활에 적용하는 일에 세부적인 가르침을 제공한다.
엘렌 화잇에 대한 객관적 평가
엘렌 화잇은, 여러 비평가들의 말이나 혹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비평가들의 말만 듣고 선입견을 갖게 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남의 책을 표절해 가며 거짓을 예언하거나 헛된 속임수로 사람들을 미혹하거나 교주처럼 행세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평범하고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다. 엘렌 화잇이 살던 당시의 많은 사람들과 그의 저술을 깊이 연구한 사람들이 그의 인격의 진실됨이나 그의 저술의 영감성을 증언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1878년 당시 미국의 한 저술가는 그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화잇 부인은 놀라우리만큼 잘 조화된 지적 구조를 가진 한 여성이다. 그의 관용성, 영성, 양심적 태도 그리고 이상적 면모는 뛰어난 특징이다. 그의 단순하고 성실한 개성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따뜻한 우의를 얻게하며 용기를 주었다”(American Biographical History of Eminent and Self-Made Men of The State of Michigan, Third Congressional District, A. P. 108, 1878).
전 역사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고고학자로 불리우는 윌리엄 F. 올브라이트 박사가 1950년대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던 시절, 그의 지도하에 박사 학위 공부를 하던 앨저 존스라는 학생으로부터 엘렌 화잇의 서적들을 소개받았다. 올브라이트 박사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 화잇 여사의 생애와 사업과 사상들을 직접 면밀하게 검토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주요 저서 중의 하나인 「석기 시대로부터 기독교까지」의 서론에서 최근 250년의 역사 동안에 그가 전정한 ‘선지자’로 간주한 다섯 명의 사람들 중의 하나로 엘렌 화잇을 거명하였다(cf. William Foxwell Albright,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 Monotheism and Historical Process [Baltimore, MD : The Johns Hopkins Press, 1957], 19; Roger W. Coon, A Gift of Light [Hagerstone, MD :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83], 52).
1960년에 미국 방송 회사(ABC, American Broadcasting Company)의 뉴스 해설자였던 폴 하비는 16문단으로 된 엘렌 화잇 특집 기사를 썼다.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다.
“옛날 옛적, 한 백 년 전에 엘렌 화잇이라는 이름의 한 젊은 여성이 살았다. 그는 아이처럼 연약했고 오직 문법학교 밖에 필하지 못했고(사실은 그가 초등학교 3학년도 다 마치지 못했다), 아무런 전문 교육을 받은 바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가면서 ‘건강한 생활’이라는 주제로 수많은 기사들과 책들을 기록하였다. 그의 시대로 말하자면 의사들이 아직도 손도 씻지 않은 채로 방혈(放血)을 하면서 수술을 하던 시절이었음을 기억하라. 이 때는 아직도 야만의 언저리를 맴도는 정도의 의학적 무지의 시대였다. 하지만 엘렌 화잇은 영양에 관하여 참으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저술했기 때문에, 그가 지시한 많은 원칙들 가운데서 두 가지만 제외한 모든 것들이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입증되었다”(Coon, 53).
폴 하비는 이렇게 말하면서 화잇 여사가 참으로 옳다는 사실에 관한 여러 가지 실례들을 열거했다. 그 후 9년이 지난 다음에 하비는 미국의 한 신문에 안식일교인들이 심장마비와 호흡기 질병과 암에 걸리는 비율이 낮은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 모든 것이 엘렌 화잇의 시대를 앞서가는 권면과 선지자적 지식의 덕분이라고 하였다.
컬럼비아 대학교 사범대학의 교육학 교수였던 플로렌스 스트레이트마이어 박사가 한 번은 워싱턴 D.C.의 안식일교회 교사들의 회의에 초청을 받아서 연설을 하였는데, 그때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래에 와서 엘렌 화잇이 저술한 「교육」이라는 책이 나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세기가 바뀔 때 기록된 이 책은 그 시대 보다 50년 이상을 앞서가는 책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이 학교 교육을 3년밖에 받지 못한 한 여인에 의하여 기록되었음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책의 철학이 가진 넓이와 깊이는 나에게 경탄을 자아냈다. 균형잡힌 교육, 조화있는 발달, 그리고 원칙에 입각한 사고와 행위 등에 대한 개념들은 참으로 앞서가는 교육적 개념들이다.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교육 목표, 부모의 책임을 가르치는 일, 어린 아이에게 자제를 강조하는 것 등은 세상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상들이다”(Coon, 55).
엘렌 화잇에 대하여 비평을 하려면 그의 사상이나 글들이나 그의 사업들을 좀더 면밀히 연구하고 검토한 후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지극히 피상적인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혹은 그 방대한 저술들 가운데 몇 가지 내용들을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비평하면서 거짓 선지자로 매도하는 일은, 미국 어느 한 시골 구석진 공항에 잠깐 내렸다가 돌아와서 미국을 비판하는 일과도 같은 것이어서 결코 올바른 비평이나 정상적인 결론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요즈음, 개신교회의 상당수 목회자들이 엘렌 화잇의 책들을 구입하여 읽고 설교에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부언해 둔다.
엘렌 화잇은 선지자인가
엘렌 화잇은 스스로 자신을 선지자라고 부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선지자라고 부를 때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선지자라는 직함과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의 청년 시절에 ‘당신은 선지자입니까’라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여호와의 사자(使者, messenger)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그런 직함을 주장해 본 적이 없다. 왜 내가 선지자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이 시대에는 자신을 선지자라고 대담하게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업에 치욕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며, 나의 사업은 ‘선지자’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A Messenger", Review and Herald, July, 26, 1906, p.8).
여기에서 화잇이 자신의 사업이 “선지자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성경의 선지자들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죄를 지적하고 깨우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호소하던 일반적인 개념의 선지자들이 하는 일보다는 그 사업의 범위가 훨씬 넓고 다양함을 뜻하는 것이다. 사실상 엘렌 화잇의 활동 범위는 이미 언급된 대로 종교, 교육, 의료, 건강, 출판, 가정, 경영, 사회, 영양 등 인간의 삶과 관계된 광범위한 분야를 포함하고 있어서 종래의 선지자들이 하던 활동 내용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요한계시록 12장 17절에 기록된 말씀에 기초하여 엘렌 화잇의 선지자성을 인정한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용(사단)의 최후 공격 대상이 될 여자(교회)의 남은 자손, 그들의 특징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고수하는 자들은 분명히 사단의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안식일교회는 하나님의 계명 속에 명시된 안식일을 포함하여 그의 계명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또 하나의 특징으로 주어진 “예수의 증거”는 과연 무엇인가? 계시록 19장 10절을 보면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Spirit of Prophecy)”이라고 하였다. ‘대언의 영’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예언(Prophecy)의 신(神, Spirit)” 혹은 “예언(Prophecy)의 정신(Spirit)”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마지막 시대에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려면 반드시 예언적 안목이 있어야 한다. “확실한 예언”은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벧후 1:19)은 것이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예언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은 세상 역사나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관심이기도 한 것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남달리 안식일을 포함한 하나님의 계명을 강조하며 예언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용(사단)의 마지막 공격을 받게 될 여자의 남은 자손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졌다고 하는 계시록 12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회가 보다 넓고 깊은 예언적 안목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엘렌 화잇의 저술을 통해 얻어진 결과라고 믿는다. 그래서 엘렌 화잇을 통해 주어진 저술들을 계시록 12장 17절에 기록된 “예수의 증거”(예수에 대한 증거, 예수께서 주신 증거)로 보며, 이것을 예언의 선물(혹은 예언의 신)이라고 한다. 본 교회에 있어서 엘렌 화잇과 그의 저술들은 구원론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교회론과 관련된 것이다.
<교회와신앙>측에서 혹시 이 부분에 대하여 비평할 의사가 있으면, 비평과 함께 장로교회에서 해석하는 계시록 12장 17절의 의미를 반드시 제시하여 줄 것을 당부한다. 대안이 없는 비평은 비평을 위한 비평에 불과한 것이다.
결론
기독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기초는 성경이다. 그리고 성경의 약 25%는 예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회에 있어서 예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거짓 선지자들이나 거짓 증인들이 나타나서 예언의 말씀을 오용한 결과 누적된 문제들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계나 일반인들이 ‘예언’이라는 말 자체에 대하여 거부감이나 이질감을 갖게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현대인들이 점성술사나 자칭 예언가나 점보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세상의 장래나 자신의 미래를 묻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회는 ‘예언’을 무시하거나 덮어 둘 것이 아니라 ‘예언’을 펼쳐서 불안한 세상의 장래일을 올바르게 조명하여 사람들에게 제시할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다음의 말씀을 주의하여 볼 것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요한계시록이라는 책 이름(아포칼룹시스) 자체가 “덮여져 있던 것을 벗겨낸다”는 뜻이다. 기독교회가 이렇게 예언서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계속 덮어두고 있거나 올바른 해석을 제시하지 못하면 문제가 매우 심각해진다. 지난 1992년 휴거 파동이 전국을 휘몰아칠 때에 기독교계가 적절한 대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던 것은 예언에 대한 확실한 안목이 결여된 결과였다. 그때에 안식일교회에서는 휴거의 잘못된 점들을 낱낱이 지적하여 전국 10대 주요 일간지에 전면 광고를 게재한 바 있다. 특별히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말세에 처한 기독교회는 예언에 대하여 좀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면밀하게 연구하여 시대적으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진리를 찾고자 하는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할 책임과 사명이 있는 것이다.
안식일교회 大논쟁4(96년 11월호)
--안식일 준수문제--
안식교의 안식일 개념을 비판한다
안식교인들은 안식일 문제에 대하여 논쟁하기를 좋아하고, 기성교인들을 미혹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논쟁으로 여기는 것같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안식일 개념이 옳다고 보고, 기성교회의 주일 개념에 약점이 많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안식교측의 김대성 목사는 다른 문제들은 1회의 논쟁으로 족하지만 안식일 문제에 대해서만은 2회에 걸쳐 논쟁을 하자고 제의해 왔고 필자들도 동의했다. 그 이유는 진리논쟁은 진리 자체의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종파든 모든 교리는 대부분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다. 안식교도 마찬가지이다. 율법주의적인 구원관 문제나, 2300주야 문제, 화잇의 선지자성 문제 내지는 계시 문제, 안식일 문제들은 서로서로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 문제는 그로써 다른 모든 것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렇게 자신있어 하는 안식교의 안식일 문제가 어떻게 명백하게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안식교인이나 기성교회 교인들에게 다 유익한 기회가 되리라 확신한다.
I. 전 호에 대한 반증
전 호에서는 화잇의 문제가 취급되었다. 기성교회측에서는 엘렌 지 화잇이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요, 안식교측에서는 선지자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하여 안식교측의 김대성 목사는 여러 가지 변증을 하였는데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 조용기 목사 문제에 대하여
대답할 가치가 별로 없는 질문을 김대성 목사가 물어 왔다. 그러나 물었으니 대답한다. 먼저 조용기 목사를 통합측에서 이단으로 규정했다가 해제했는데 어떤 이유로 입장을 바꾸어 취소했는지 입장을 알려 달라고 하였다(김목사는 통합측이 순복음교회를 이단으로 정했다고 언급했으나 정확히 하자면 조용기 목사에 대한 사안인 것이다).
오히려 김목사에게 몇 가지를 반문함으로 대답을 대신코자 한다.
첫째로는, 김목사는 통합측에서 조용기 목사를 이단으로 정했다가 해제했다고 했는데, 김목사는 어디에서 조용기 목사를 이단으로 했다고 들었으며 어느 책에 그렇게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는가? 둘째로는, ‘사이비’란 말과 ‘이단’이란 말의 뜻을 아는가? 적어도 이런 질문을 하려면 평신도도 아닌 목사가, 그리고 이런 논쟁을 하는 당사자로서 그 정도는 알고 물어야 할 일이라고 보기 때문에 반대로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죄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와 비교하여 말한다는 점을 아는가? ‘자신은 억울하다’느니 ‘자기보다 더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있다’는 등의 변명을 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만의 하나 통합측에서 조용기 목사를 잘못해서 ‘사이비성이 있다’고 했고 또 잘못해서 그 규정을 해제했다면 그것이 안식교가 이단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가? A란 사람에 대한 잘못과 B란 사람의 잘못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래서 안식교도 조용기 목사처럼 해제하라는 말인가? 자신들은 교리적인 이단일 뿐 성경적인 이단이 아니라면서, 김목사의 논리대로 하면, 성격적으로는 이단이 될 수밖에 없는 기성교회로부터 왜 교리적으로 이단이 아니라고 인정받으려고 하는가? 이단이 아니라고 인정받고 자신들의 교리가 기성교회보다 우월하다고 해야 기성교인들을 안식교로 끌어가기에 이롭기 때문인가? 그리고 안식교도 조용기 목사처럼 잘못을 시인할 수 있는가?
(2) 안식교는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인정한다는 말에 대하여
김목사는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계시’ 속에도 ‘표절’(김목사는 ‘차용’를 사용했다)이 인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왜 이렇게 주장하게 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야 화잇의 선지자성과 그의 계시가 인정될 것이요 따라서 안식교가 이단이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여러 이단들이 가지는 특징으로서 성경 외에 자신들의 계시를 성경과 같은, 또는 성경 위의 계시로 인정받기 위함이다. 기성교회는 안식교의 이러한 주장을 다른 이단들과 함께 이단시하고 있는 것이다.
김목사는 이러한 주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요엘서의 예언과 고린도전서 12, 14장의 은사들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김목사의 주장과는 달리 요엘서 2장의 예언이나 고린도전서의 은사들이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더욱이 화잇의 계시를 뒷받침해 주는 성경이 결코 아니다. 요엘서나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것은 성경 외의 다른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성령의 은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교에서 선지자로 믿고 있는 화잇의 계시는 보편적인 은사로서의 계시가 아니다. 안식교의 교리들은 성경의 계시처럼 화잇의 계시에 의하여 세워졌고 실질적으로는 성경 위의 계시로 작용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기성교회 중에도 성경의 유오성과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그릇된 신학자들도 있다. 그것이 이단들에게 자신들의 계시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화잇의 경우는 다르다. 우선 다음과 같은 점이 다르다.
안식교인들은 화잇의 계시를 ‘대언의 영’이라고 하며, 화잇을 말세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화잇이 마지막 선지자인가? 성경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은사로서의 예언이나 계시는 화잇의 계시가 있을 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요 그러나 화잇의 계시가 있은 후에는 다른 계시나 예언은 없느니라”고 말하고 있는가? 기성교회에서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잘못된 신학자들도 어느 특정인의 계시를 인정하기 위하여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안식교는 화잇의 ‘특별계시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으로 화잇의 계시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계시의 문을 열고 또 화잇 외에는 계시가 존재할 수 없도록 그 문을 닫아 버렸으니 얼마나 모순된 소리인가?
놀라운 사실은 안식교 역사에 화잇 후에 화잇처럼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식교에서는 그들을 다 잘못되었다고 하여 이단시하였다는 점이다(본 호의 지면상 증거는 다음 호에 제시하겠다). 이런 모순되고 불합리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왜 안식교에서는 화잇의 계시는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계시는 인정하지 않는가?
(3) 화잇의 표절계시 문제를 정당화하는 점에 대하여
김목사는 화잇의 표절 문제에 대하여도 변증하였다. 필자가 볼 때 김목사는 안식교인으로서 최초로 화잇의 표절 문제를 시인한 사람으로 보인다(물론 김목사는 ‘차용’이라는 용어를 동원했지만 필자는 ‘표절’이라는 용어가 맞다고 본다). 그 동안 안식교의 변증자들은 화잇의 표절성을 추호도 시인하지 않았으나 김목사가 지난 글에서 ‘차용’이라는 개념을 들어 시인하게 된 것이다.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고 보자기로 밤송이를 싸서 그 가시를 숨기려고 하다가 어리석음을 알고 손바닥과 보자기를 치워버린 격이라고 본다. 화잇이 표절한 계시들을 계시로 인정하자니 괴롭고, 인정하지 않자니 사실이 고통스러워 만들어 낸 최초의 변명이 된 셈이다.
지금까지 화잇의 표절성에 대하여 김목사 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그것 자체를 합리화하려고 시도한 경우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이 사실을 안식교의 평신도들과 목사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다.
김목사의 말에 의하면 화잇의 계시는 표절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영감’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다음 호에 김목사는 반드시 ‘축자영감’이란 말과 ‘인간영감’이란 말에 대하여 우선 정의해 주기 바란다. 기성교회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인간영감’이란 말을 하여 화잇의 거짓 계시를 적당히 합리화하려는 연막술같기에 하는 질문이다.
물론 성경에서는 때로 다른 사람의 문헌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이루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화잇의 표절과는 전혀 다르다. 화잇이 대부분 계시라고 말한 내용은 알프렡 이더솨임(Alfred Edersheim)의 글을 앞뒤를 바꾸어 가며 표절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계시는 화잇이 받은 것이 아니라 알프렡 이더솨임이 받은 것이요, 마지막 선지자는 화잇이 아니라 이더솨임이 되어야 할 것이다.
화잇의 표절문제를 기사화했던 미국의 뉴스위크지(Newsweek)는 “이 차용은 한 곳에서 한 문장을 옮겨 쓰고 다른 곳에서는 한 말을 옮겨 쓴 것이 아니고 그의 저서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화잇의 표절은 김목사의 주장과 같이 문학적인 차용이 아니고 철저한 표절이었다. 나아가 뉴스위크지는 “화잇의 저서 80%의 것이 초기 저작자들로부터 그대로 옮겨진 것”이라고 하였다(1981년 1월 19일자 종교란). 이 문제는 다음에도 계속 취급하기로 하겠다.
(4) 화잇의 글들과 성경과의 관계에 대하여
김목사는 화잇의 모든 글들은 성경을 대체할 수 없고 성경에 의하여 판단 받아야 하며 성경만이 최종 규범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형식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화잇의 계시가 성경과 정반대되는 문제가 많은데 이것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중에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화잇은 성경이 교훈하지 않는 채식교리의 계시를 받았는데 이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성경에 육식을 금한 적이 없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식을 하였으며, 선지자나 믿음의 조상들이 모두 육식을 했으며, 예수님도 고기를 잡수셨고(눅 24:42-43), 백성들에게 먹이셨고(요 6:11), 그리고 제자들에게 먹이셨다(요 21:9-10). 뿐만 아니라 성경은 이러한 교리를 가르치지 말라고까지 명령하고 있다(히 13:9). 이로 보아 화잇의 채식교리는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잘못된 것인데 김목사는 어떻게 변명할 것인다.
안식교는 말로는 성경으로 화잇의 글들을 판단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화잇의 글들로 성경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5) 화잇을 칭찬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는 점에 대하여
김목사는 화잇을 칭찬하는 몇몇 사람들의 글을 인용하여 화잇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라고 주장하였다. 우선 그 말이 두 가지로 모순되고 우스운 일로 보인다.
하나는 성경으로 증명하지 않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진정한 객관은 없다. 오직 하나님과 성경이 객관이다. 화잇을 칭찬하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객관적인 평가라면 화잇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칭찬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동시에 들어봐야 어느 정도 객관적이지 않겠는가? 이단자 문선명 교주도 그를 칭찬하는 사람들의 글들을 모은다면 화잇보다 더 많을 것이며, 그것은 사회주의자 마르크스(Marx)에게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들먹이며 객관이니 어쩌니 하는지 모르겠다.
(6) 그래도 화잇을 선지자로 보는 점에 대하여
김목사는 안식교가 화잇의 선지자성을 인정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화잇을 선지자로 믿는다는 것이다. 특히 김목사는 화잇이 성경의 선지자들보다 사업의 범위가 훨씬 넓고 다양한 선지자라고 주장하였다. 즉 화잇은 선지자로서 성경의 선지자보다 더 크고 많은 일을 하는 선지자라는 것이다. 안식교가 존재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식교의 주장대로 화잇이 선지자이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면 그의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어야 된다. 하나님의 계시는 1%도 오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자와 그 계시를 분별하는 시금석은 예언의 성취에 있는 것이다(신 18:22).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화잇을 평가해 볼 때 화잇은 거짓 선지자가 분명하다. 이는 화잇의 빗나간 많은 예언들이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살아서 재림을 맞을 자가 있다는 1856년 안식교 대총회의 예언(MWHC.p.102), 노예제도가 재림시까지 계속된다는 예언(Spiritual Gifte.p.193, EWP. p.276, EGWHC. p. 337), 미국의 남북전쟁시 아브라함 링컨을 비난하고 그가 패할 것이라고 한 예언(EGWHC. P. 118-124) 등 많은 실패한 예언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김목사는 이런 점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한 마디도 변증하지 못했음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특히 화잇은 계시 가운데 목성과 토성, 천왕성 등을 보았는데 목성에서 네 개의 달들을 보았다고 했으며, 토성에서 일곱 개의 달들을, 천왕성에서 여섯 개의 달들을 보았고, 토성에서 주민들을 보았는데 키가 크고 위엄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곱 개의 달을 가진 별에서(토성) 에녹을 보았다고 하였다“A Word to The little Fock p.22, The Great Second Advent Movement. p.260-261) 그런데 최근의 천문학은 목성과 토성이 화잇이 본 것들보다 더 많은 달들을 가지고 있음을 발표하였다(목성은 12개, 토성은 열 개). 화잇은 당시의 미개한 천문학에서 배운 대로 계시를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화잇의 계시가 거짓 선지자의 사단의 계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김목사는 어떻게 위의 엉터리 계시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변증을 해주기 바란다.
(7) 화잇의 표절된 글들을 대언의 영이라고 하는 점에 대하여
안식교는 화잇의 계시를 ‘대언의 영’, ‘예언의 신’이라고 부른다. 즉 화잇이 보통 선지자가 아니라 계시록 12:17과 19:10의 예언된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 12:17의 남은 자손이 안식교인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안식교인들은 계시록 12:17의 남은 자손의 특징인 하나님의 계명은 안식교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말하며, 예수의 증거는 화잇이 받은 계시를 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안식교의 성경해석과 주장은 아전인수, 비성경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 김목사는 기성교회가 비판하려면 계시록 12:17의 해석을 제시하라고 한다. 김목사의 이러한 주장을 보고, 한 때 안식교인이었던 필자(진용식)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아직도 안식교인들은 이 계시록의 해석을 자신들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김목사가 이렇게 요구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계시록 12장 17절을 해석해 보자.
1) ‘남은 자손’은 안식교인을 말하지 않는다.
본문에는 용(사단)이 공격하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 있다. 안식교는 이 ‘남은 자손’을 안식교라고 해석하였다(한국연합회, 성서기초교리 p.292-297). 김목사도 역시 그렇게 주장하였다. 안식교의 주장대로라면 말세의 남은 자손, 즉 참 교회는 안식교이며 참 교인이 되려면 안식교인이 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남은 자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의 남은 자, 남은 자손은 어떤 교파나 단체, 조직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은 유형적이 교회 속에 거듭난 하나님의 참 백성들인 무형적인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어느 시대나 남은 자는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남은 자 사상이 많이 있는데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어느 교회든지 하나님의 참 백성과 참 백성이 아닌 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도 알곡과 쭉정이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남은 자란 교파나 조직이나 교리에 남은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남은 자인 것이다. 이로 보아 안식교가 남은 자손이 아니라 모든 교회 중에 하나님께서 가지신 백성이 남은 자손인 것이다.
2) ‘하나님의 계명’은 십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은 자손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하였다. 안식교는 이 본문의 하나님의 계명을 십계명으로 해석하고, 특히 안식교가 강조하는 안식일 계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또한 안식교의 성경 해석의 오류이다. 본문의 계명이 십계명이라는 근거는 없다. 계명은 십계명을 말하는 때도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시 19:8, 계 1:2). 본문에서의 ‘계명’은 십계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은 계시록의 다른 구절에 나타난 표현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본문의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라는 표현을 1장 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고 했고, 1장 9절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라고 했으며, 6장 9절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본문의 ‘계명’은 말씀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남은 자손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다. 즉, 말씀에 순종하며 말씀을 수호하고 말씀을 세우는 사람들인 것이다.
3)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는 화잇이 아니다.
안식교는 본문의 남은 자손의 특징으로 나타난 ‘예수의 증거’를 화잇이 받은 계시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계시록 19장 10절의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는 말씀에서 ‘대언의 영’은 “한 선지자로 말미암아 행사되는 은사”(한국연합회, 성서기초교리 p. 328)라고 해석하여 그 한 선지자가 화잇이라는 것이다. 기성교인들이 볼 때 얼마나 억지스러운가? 실제로 안식교인들은 화잇의 책들을 ‘예언의 신’이라고 부른다. 즉, 남은 자손의 특징인 예수의 증거가 그들의 선지자 화잇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의 증거’는 무엇인가? 안식교에서 예수의 증거를 화잇의 계시라고 말하는 것이 그들의 이단성을 드러내는 요소 중에 하나이다.
사도 요한은 같은 책 14장 12절에서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하였다. 즉, ‘예수의 증거’를 ‘예수의 믿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안식교의 주장대로라면 화잇의 계시가 ‘예수의 믿음’이라는 말이다. 결국 안식교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화잇을 믿는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고 말하였다. 예수의 증거란 예수를 증거하는 복음을 말하는 것이며, 예수의 증거를 받은 사람은 영생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라”(요 5:39)고 하셨다. 예수의 증거는 절대로 화잇의 계시가 아니고 성경 말씀이요, 말씀의 핵심 내용인 예수를 증거하는 구원의 복음이다. 남은 자손의 특징은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이다. 즉, 예수를 증거하는 복음을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이다. 안식교는 화잇의 계시를 예수의 증거라고 주장하나 남은 자손은 사도들에 의한 성경계시를 주장하고 복음을 예수의 증거로 가진 자들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라”(요일 5:9).
예수의 증거인 성경의 복음이 아닌 화잇의 계시를 주장하는 그 자체를 볼 때 안식교는 성경이 말하는 남은 자손 속에 낄 수 없는 것이다.
4) 화잇의 표절된 계시는 결코 ‘대언의 영’이 될 수 없다.
안식교는 화잇이 받은 계시가 계시록 19장 10절의 대언의 영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안식교인들은 화잇의 글들을 ‘예언의 신(대언의 영)’이라고 부르고 있다. 김목사는 이러한 안식교의 잘못된 해석을 주장하면서 기성교회의 해석을 제시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대언의 영’은 성경에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안식교는 이 구절에 어떤 해석을 붙여서 화잇에게 꿰어 맞추어 오류를 범하고 교리를 만든 것이다.
‘대언의 영’은 무엇인가? 성경에 있는 대로 ‘성령’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본문의 뜻은 대언의 영(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에서는 “···예수를 증거하는 것은 대언의 영이다”라고 번역하였다. 이러한 명백한 말씀을 안식교는 ‘한 선지자를 말하는 것이며 그 선지자는 화잇’이라는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대언의 영은 한 선지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도 예수를 증거하는 모든 대언자(복음 전하는 자)들에게 계속 역사하고 계신다.
안식교는 화잇을 선지자라고 주장하지만 화잇은 참 선지자가 아니다. 그의 잘못된 예언들, 그리고 성경에 없는 교리, 표절 문제 등을 볼 때 화잇은 거짓 선지자가 분명하다. 성경은 성경 이후에 다른 선지자에 대한 예언은 없으나 말세에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많은 경고를 주고 있다(마 24:11, 딤전 4:1-4 등). 사단은 화잇 같은 거짓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단을 만들고 많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성도들은 이에 주의해야 한다.
Ⅱ. 안식교의 안식일 개념을 비판한다
안식교인들은 구약의 안식일을 지금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기성교회는 다른 모든 구약의 계명이나 율법들과 함께 그 의미는 인정하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성경적인 이유 때문이다.
(1) 안식일은 구약의 율법이며 그림자로서 신약시대에는 폐하여 졌다
구약에서 아무리 중요한 율법이라도 신약에 와서 폐한 것이라면 그것을 형식적으로 지켜야 할 의미는 없다. 안식일 문제가 그렇다. 구약에서는 중요하게 지켜졌지만 신약에서는 폐한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 준수는 더 이상 강조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약 시대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성, 속)의 구별이 없어졌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엡 2:11-22). 구약 시대에는 성·속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법이 있었다. 즉, 이스라엘과 이방인, 레위인과 일반인, 거룩한 곳, 부정하고 정한 것, 거룩한 날 등의 규례들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이러한 성·속의 구별이 모두 없어졌다. 구약에 구별했던 규례들이 폐한 지금 다시 구약의 규례들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율법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1) 신약 시대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어졌다(엡 2:11-19).
구약에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구별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외에는 이방인이라 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반열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구약의 이러한 법은 엄격하여 이방인과의 교제를 금하고 이방인은 기업을 얻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구별이 폐하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5, 18)고 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으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2) 신약 시대에는 레위인과 일반인의 구별이 없어졌다(벧전 2:9)
구약의 제사장은 아무나 할 수 없고 오직 구별된 레위인만이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구별은 엄격하여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레위인과 일반 백성이 구별되어 제사장은 언제나 레위인 중에서 아론의 자손만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없어지고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거듭난 성도는 누구든지 영적인 제사장이된다는 것이다(벧전 2:5-9). 또한 신약에서는 목사도(롬 15:16) 은사와 소명을 받은 자는 누구나 절차를 따르면 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영적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 것이다”(벧전 2:5).
3) 신약 시대에는 거룩한 곳, 즉 성전의 개념이 없어졌다(신 12:5, 11, 14, 마 18:20, 고전 3:16, 엡 2:21).
구약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곳(성전)이 따로 있어서 그곳에서만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드릴 수가 없었다(신 12:13).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게 되었고(마 18:20), 어느 곳이든지 성도가 모인 곳이 성전이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고전 3:16). 만약 지금도 거룩한 곳의 구별이 있다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말씀하셨다. 또한,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고 말씀하셨다.
4) 신약 시대에는 부정하고 정한 것에 대한 구별이 없어졌다(겔 36:17, 민 19:9, 레 5:3, 히 9:13, 롬 14:14).
구약에는 부정하고 정한 것의 규례들이 있어서 죽은 시체나 무덤이 부정하고, 경도 하는 여인이 부정하고, 출산한 산모가 부정하고, 짐승이나 물고기 등도 부정하고, 정결한 것이 따로 있었다. 이러한 규례들이 엄격하여 부정한 것은 먹거나 만질 수도 없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부정과 정결의 규례는 다 없어졌다. 만약 지금도 부정과 정결의 규례가 있다면 경도하는 여인은 부정하니 교회에 나오지 말아야 하며, 시체를 만진 자는 7일간 부정하니 정결의 규례를 행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고 함으로 성·속의 구별이 없어졌음을 선언했다.
5) 신약 시대에는 거룩한 날과 보통 날의 구별이 없어졌다(골2:16, 롬 14:6, 갈 4:10-11).
구약에는 거룩한 날(절기, 월삭, 안식일 등)과 보통 날을 구별했다. 이러한 날 중에 안식일에 대한 구별은 철저했다. 만일 안식일을 범하게 되면 돌로 쳐죽이라는 엄격한 법도 있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이러한 구별이 없어졌다. 거룩히 구별했던 안식일 구별도 다른 성·속의 구별이 폐한 것처럼 이미 폐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롬14:5)고 함으로써 날에 대한 성·속의 구별 없이 이 날이나 저 날이나 모든 날이 같다고 선언한 것이다.
(2) 구약에서조차 이미 안식일이 폐하게 될 것이 예언되었다
신약의 모든 중요한 사건들은 구약에 미리 예언되어 있다. 안식일에 대해서도 다른 모든 절기와 함께 폐할 것이 분명하게 예언되어 있다.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기를,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명절을 폐하겠고”(호 2:11)라고 분명하게 되어 있다. 이 본문에 폐할 것이 예언된 이 안식일은 제칠일 안식일을 말하고 있다. 절기, 월삭을 함께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 안식일이 안식교인들의 말처럼 만약 절기 안식일에 대한 것이면 ‘절기와 월삭’을 함께 쓸 리가 없다. 안식일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대로 신약 시대에 십자가에서 폐한 것이다. 지금도 성·속을 구별하여 안식일을 주장하는 안식교는 아직도 구약 시대의 율법주의 유대교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3) 실체가 이루어짐으로 모형과 그림자는 폐했다(히 4:1-6, 마 11:28)
참 안식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마 11:28). 참 안식의 그림자에는 안식년이 있었고 안식일이 있었다. 6년만에 1년을 쉬는 안식년이나,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는 안식일은 모두 다 참 안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모형인 것이다. 예수께서도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8)고 하시고,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심으로 예수께서 참 안식의 실체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안식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를 통하여 구속을 완성하심으로 안식년이나 안식일을 폐하게 된 것이다. 바울도 이점에 대하여 분명히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고 말했다.
(4)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셨다(마 12:1-8)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셨는가? 그렇지가 않은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확인할 수가 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자주 공격했다.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신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안식일에 대한 태도를 잘 알 수가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1-6).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지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두 가지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 하나는 다윗이 그 함께 한 자들과 제사장만이 먹게 되어 있는 진설병을 먹어서 규례를 어겼으나 죄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했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는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 안에 있는 제자들이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다윗이 그와 함께 한 자들과 같이 성전에서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먹었던 것처럼 안식일을 범한 것이다. 또한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범한 것처럼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하신 것이다.
(5) 제사장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마태복음 12장 5절에 보면,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고 함으로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신약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다 제사장들이기 때문에(벧전 2:9) 안식일 율법에 해당되지 않는다.
(6) 신약 성경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한 구절은 한 곳도 없다
안식일 교회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안식일이 하나님의 표징이며, 하나님의 인이며, 마지막 기별(세 천사의 기별)이며, 참 교회의 특징이며, 폐하지 않은 계명이라면 왜 신약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이 한 곳도 없는가? 또 지켰다는 기록도 없는가? 이것은 성경이 보여 주고 있는 바대로 안식일이 폐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안식일, 변경할 수 없는 성서적 진리
■ 지난호 「교회와 신앙」측 글을 보고
안식일교회를 비판하고 있는 「교회와 신앙」 측이 지난 3회에 걸쳐 내놓은 글을 보면서 느낀 점을 간단히 피력하고자 한다. 「교회와 신앙」측은 문제의 핵심이나 본질을 다루려는 의도보다 상대방의 표현 방식을 곡해시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상대방이 한 말을 인용하려면 문장을 있는 그대로 사용할 것이고, 혹시 변형하려면 자신의 의도를 따라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진실이 바르게 전달되도록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을 목소리에 비유한다면 「교회와 신앙」 측의 목소리가 약간 고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우선 ‘안식일교회’라고 하는 바른 이름 대신 ‘안식교회’라고 하는 틀린 이름을 굳이 사용하면서 상대를 경시하려고 하는 의도부터 감정이 섞여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냉철한 이성보다는 감정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듯한 인상이다. 앞으로 남은 지상 논쟁은 좀더 안정감 있고 신사적인 방법으로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이 논쟁이 시작되기 전 「교회와 신앙」측은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논쟁이 마칠 때까지 안식일교회에 관한 다른 기사는 일체 다루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지난 호(10월) 특집 「사진으로 보는 사이비 이단성 문제 종합」이라는 기사에서 안식일교회의 사진 4매를 게재하여 오도한 바 있다. 한 교회의 청소년 회관 사진을 가지고 ‘안식교 본부’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서울위생병원의 본 건물 대신 수위실을 찍어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본 지상 논쟁에 대하여 “안식교의 비성경성에 대한 변증을 통해 믿음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라고 이미 결론을 내려 놓았다. 물론 의도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본 논쟁 내용에 대한 일체의 결론은 독자들의 판단에 의해 내려질 수 있도록 좀더 공정성을 기해 주기를 바란다.
① 안식일교회는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논리에 대하여
「교회와 신앙」측이 종종 사용하는 왜곡 논리가 어떤 것인지 한 가지 예를 들어 본다. 안식일교회는 교회 역사 초기에 율법주의적 구원관을 가졌었기 때문에, 즉 시작이 잘못된 교회이기 때문에 오늘날도 바른 교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정당한 논리인가? 어떤 교회든지 교파든지 그 발전 과정에는 교리적 논쟁과 토론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장로교회의 경우, 1572년 스코틀랜드에서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장로교회 교리의 기초가 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완성된 것은 1647년이었다. 태동으로부터 약 75년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1967년에는 ‘미국 장로회 신앙 고백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884년부터 1893년 사이 한국에 장로교회가 소개되면서 처음으로 ‘예수교 장로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지금 100개 이상의 교파로 분열되어 있다. 분열의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으나, 그것이 교리상의 문제이거나 인간적인 문제이거나 간에 현재와 같은 교파들의 난립상은 결코 성서적이 아니다. 그리고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교회로부터 나온 것이며 개혁주의 교회는 루터교회로부터 나왔고 루터 교회는 가톨릭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와 신앙」측의 논리를 적용하면 가톨릭에 근원을 둔 모든 개신교회는 올바른 교리를 가질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와 신앙」측은 1888년 대총회까지 엘렌 화잇이 마치 율법주의적 구원론을 주도한 것처럼 이론을 전개하고 있으나 엘렌 화잇은 1888년 당시 존스와 와그너가 주장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를 적극 지지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② 구원론에 대하여
비안식일교인으로서 안식일교회에 대하여 가장 광범위하고 깊은 연구를 한 세계적인 종교학자는 월터 마틴(Walter Martin) 박사이다. 그는 그의 책(The Kingdom of the Cults, p.435)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 단체이든지 영원한 구원의 기초가 되는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칭의의 원리를 계속 부정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만일 안식일교회가 이러한 문제에 저촉이 된다면 분명히 그들은 이단적인 조직체로서 간주되어야 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 교인들은 그들의 책 「교리에 관한 질문들」(Questions on Doctrine)이나 기타 다양한 출판물을 통해서 수십회에 걸쳐, 구원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임을 확고히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본 교단은, 구원이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매우 확고하게 천명하고 있으며 세계의 유수한 학자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신앙」측에서 어떤 단편적인 연구 결과를 가지고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며 안식일교회가 율법주의적인 구원론을 가졌다고 그렇게도 고집스럽게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③ 엘렌 화잇에 대하여
엘렌 화잇에 대하여도 본 교단 스스로의 의견보다 마틴 박사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위와 같은 책에서 마틴은, 안식일교회가 엘렌 화잇의 글들을 또 하나의 다른 성경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한다고하여 이단시하는 훼케마(Hoekema) 박사에게 안식일교회의 공식적인 답변서 「교리에 관한 질문들」(Questions on Doctrine)을 진지하게 검토할 것을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만약 안식일 교인들이 화잇의 글들을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두거나 성경을 화잇의 글에 조명하여 해석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기꺼이 수용하여 그것을 저들의 입장으로 고수한다면, 훼케마 박사의 비평이 정당하다. 그러나 안식일 교인들은 그렇지가 않다. 훼케마 박사는 안식일 교회에서 나온 몇 몇 책자에 근거하여 자신이 내린 단편적인 결론 때문에 안식일 교인들이 화잇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공식적인 결론을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이나 엘렌 화잇 등에 대하여 비평을 하고자 하면 안식일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명시한 책자들을 깊이 연구한 후에 모든 문장들을 곡해된 부분없이 인용하여 줄 것을 당부한다.
■ 안식일과 관련된 쟁점들
필자는 일요일을 예배일로 준수하는 사람들로부터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일요일에 예배하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은 바 있다. 그러나 그 이유들은 언제나,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임시 방편으로 대답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 대표적인 몇 가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율법(십계명 포함)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
② 성경상 안식일은 제칠일 토요일이 맞지만, 그리고 그 날을 지켜야 마땅하지만 오늘날 사회 제도가 안식일을 지킬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안식일 대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것이다.
③ 십계명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이 들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그 안식일이 토요일이었지만 예수님 십자가 이후 신약 시대에는 주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이 안식일로 되었다.
④ 예수님은 안식일에 무덤에 계셨고 일요일에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이고 일요일에 예배하는 것은 산 예수를 믿는 것이다.
⑤ 안식일이란 구약 시대 유대인들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이 아닌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날이다.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이유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정답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능하다면 「교회와 신앙」 측에서, 안식일을 부인하고 일요일 예배를 시행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통일성있게 제시해 주기 바란다.
■ 웨스터민스터 신앙 고백과 「교회와 신앙」측 주장 사이의 모순
「교회와 신앙」 측은 그들의 서적(안식교는 왜 이단인가, 31쪽, 이하 왜 이단이라고 약칭함)을 통해서 안식일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토요일 안식일은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성일이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지된 율법주의적인 절기가 되었기 때문에(골 2:14-17; 갈 4:10-12) 신약의 성도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일(일요일)을 예배일로 하고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진술(왜 이단, 70쪽)을 통해서 십계명이 폐지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성경은 증언하기를 ‘전엣 계명이 연약하여 무익하므로 폐하고(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7:18-19)고 했습니다. 십계명과 의문의 율법이 다 포함된 율법과 계명이 폐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교 교리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하 「신앙고백」이라고 약칭함)은 「교회와 신앙」측 주장과는 전혀 다른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일정한 시간을 정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합당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적극적이고 도덕적이고, 영구적인 명령을 발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히 이레 중 하루를 안식일로 택정하여 하나님께 거룩하게 지키게 하셨다. 그 날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는, 한 주간의 첫째날로 바뀌어졌다. 성경에는 이 날이 주의 날(主日)로 불리워져 있다. 이 날은 세상 끝날까지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7항>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안식일이 첫째 날로 변경된 것이 성서적이 아님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명백한 설명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 위의 내용만 가지고 보아도 양자의 모순점이 나온다. 「교회와 신앙」측은 안식일은 폐했다는 것이고, 「신앙고백」은 안식일은 살아있고 날자만 일요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전자는 안식일이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고 있으며 후자는 일요일을 안식일로 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고 무엇이 틀린 것인지 분명한 답변이 있기를 바란다.
또한 이 「신앙고백」의 내용을 해설한 다음의 설명을 살펴보자.
“만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율법주의적이라고 한다면, 즉 모세 시대만을 위해서 제정된 의식적(儀式的)인 명령이라고 한다면, 모세 시대 이전의 안식일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게 되며, 첫째, 둘째, 여섯째, 그리고 기타의 계명들 또한 의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 남은 계명들은 분명히 의식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넷째 계명만을 의식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골든 H. 클락 지음, 나용화 옮김, 장로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1990년판, 262쪽>
■ 안식일의 기원과 역사
십계명의 넷째 계명으로 명시된 안식일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창세기 1장에서 지구와 인간의 창조 사역이 끝난 후, 창세기 2장을 보면 인간 사회에 처음으로 시작된 두 가지 제도가 나타난다. 하나는 제칠일 안식일 제도(창 2:1-3)요 또 한 가지는 결혼제도(창 2:24)이다. 안식일 제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결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작된 제도이다. 결국 인간은 이 두 관계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이 두 제도에 의해서 안정되고 행복한 관계를 유지해 가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유대인들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주장은 성경의 창세기를 읽지 않고 바로 출애굽기로 넘어간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안식일 준수를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요구하신 것이지 유대인이라고 하는 어떤 특수성 때문이 아니었다.
① 구약 시대의 안식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신 직후 하늘에서 내려지는 양식 ‘만나’와 관련하여 안식일 교육을 시작하셨다(출 16장).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선포(출 20장)하기 전이었다. 신명기 5장 15절에서는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구원을 받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제시하신 도덕율로 인정하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성별하여 준수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② 예수님 당시의 안식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이 끝나고 만나가 더 이상 내려오지 않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광야에서 지키던 안식일을 계산하여 계속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는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세계 각지로 흩어진 이후에도 그들이 “거하는 각처에서”(레 23:3) 안식일을 준수하였으며 지금까지도 그들은 세계 각지에서 제칠일(토요일) 안식일을 지킴으로 광야에서 하나님이 알려주셨던 안식일이 오늘날의 토요일임을 증거하고 있다.
안식일의 주인되시는 예수님(막 2:28)이 이 땅에 오셔서 당시의 제칠일 안식일을 그대로 준수하시며 참 안식일이 어느 날인지를 확인해 주셨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눅 4:16)셔서 하늘의 권세로 말씀을 가르치셨다.
「교회와 신앙」 측은 이 말씀을 가지고도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전도하시려고 ‘회당에 들어가신 것’이지 ‘안식일을 지키신 것’이 아니라고 반증을 하고 있다(왜 이단, 7쪽). 또 다른 곳에서는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지된 율법주의적인 절기가 되었기 때문에”(왜 이단, 31쪽)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대로 안식일 율법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면, 십자가 이전에 안식일을 준수한 것까지 구태어 부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임기응변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다른 국면에 가서 꼭 스스로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다.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신 것이나 “안식일을 지킨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는가? 「교회와 신앙」측은 더 이상 그렇게 왜곡된 논리를 가지고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란다.
③ 예수의 십자가 당시의 안식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시간은 금요일 오후 3시 였다. 성소에서 상번제를 드리는 시간이었고, 성경의 시간 개념으로 말하면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에(레 23:32) 안식일이 시작되려는 시간이었다. 성경은 그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눅 23:54-56).
「교회와 신앙」측은 이 말씀에 대해서도 “제자들이 안식일에 쉰 것은 유대인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서 우리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라는 상투적인 논리를 사용한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간음을 하지 않는 것도 살인을 하지 않는 것도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다 유대인의 관습에 포함되어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의무는 거의 다 무시되어도 괜찮게 되는 것이다.
④ 사도 시대의 안식일
안식일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는 “신약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일요일을 공휴일로 정하여 쉬고 있는 현 시대에 일요일을 공휴일로 하라는 말을 다시 새롭게 할 필요가 없듯이, 안식일을 지키며 안식일에 예배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던 신약 시대의 사회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다시 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오히려 신약 성경 어디에 안식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라는 말이 어디 있는지 묻고 싶다.
성경에는 단 한 번도 일요일 예배를 정당시 하거나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다는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개신교 신앙 원칙에 입각하여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경상 근거를 찾아 몇 가지 설명을 하고 있으나 진지한 성경 학도들에게는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이 문제에 대하여는 다음 호에서 철저히 밝혀 설명할 것임).
신약 성경에는 일요일 예배에 대한 흔적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도들이 안식일을 준수하며 선교 여행을 다녔던 기록들이 여러 차례 나와 있다. 물론 이러한 성경절들에 대해서도 「교회와 신앙」측에서는,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유대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모여있는 회당에 들어간 것이라고 변명할 것이다. 그러나 분별력이 있는 독자들은 다음의 성경절들을 보며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행 13:14) “저희는 …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행 13:42)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행 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하여 모이니”
(행 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위의 네 성경절들은 모두 예수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 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사도 바울은 여전히 그전에 해오던 습관대로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회당에 들어간 후의 결과적인 일이지 유대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 자체가 회당에 간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행 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위의 성경절은 회당이 없는 지역에서 사도 바울 일행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와 신앙」측은 이 성경절을 가지고도, 공동번역 성경을 인용하면서 사도 바울 일행은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유다인의 기도처가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강가”에 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들이 안식일이 되어 일단 기도처를 찾아 강가에 갔고, 그 다음에 ‘그리고’(카이, και)라는 접속사가 연결되어 있어, 강가에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도처를 찾은 것이 아니라, 기도처를 찾은 후에 전도를 하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약 성경에는 사도들이 안식일을 준수한 일들이 명백히 나타나 있지만, 그것을 일단 부인하려고 하다 보니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억지로 풀어 사람들을 혼란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18장 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신약 성경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및 중세 시대에 안식일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어떻게 지켜져 왔는지를 밝혀주는 수많은 문서와 기록들이 남아 있어서, 신약 시대에 들어와 안식일이 결코 페지된 것이 아님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 오해되고 있는 성경절 풀이
신약의 안식일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일단 십계명과 율법이 폐지된 것으로 간주하기 하기 때문에 몇몇 성경절들을 무리하게 해석하거나 억지로 풀어보려는 경향을 갖는다. 구체적인 성경절을 설명하기에 앞서 안식일을 포함한 십계명과 율법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를 다루어보자.
장로교의 「신앙고백」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도덕법과 의식법을 구분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9장>
1항)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한 율법을 행위 언약으로 주셨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완전하게, 정확하게, 그리고 영구적으로 순종할 의무가 있게 하셨고, 그 율법을 성취하면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것을 깨뜨리면 사망을 주겠다고 경고하셨으며,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그에게 부여해 주셨다.
2항) 이 율법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도, 의에 대한 완전한 규칙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의 규칙으로,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십계명의 형식으로 두 돌판에 기록하여 전달해 주셨는데,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본분을 포함하고 있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본분을 포함하고 있다.
3항) 일반적으로 도덕법이라 불리우는 이 율법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미숙한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식법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 그런데 이 모든 의식법들은 지금 신약 시대에는 폐기 되었다.
성경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하는 것은 위의 「신앙고백」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예표하고 있는 제사제도와 관련된 의식법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십계명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십계명이 폐지되었다면, 왜 일반적으로 찬송가나 성경 표지 안에 십계명을 기록해 두는가? 그리고 십계명이 폐지되었다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만들어 절해도 된다는 것인가? 불효,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탐심, 이 모든 죄들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것인가? 안식일이 걸린다고 해서 십계명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집안의 보일러 하나를 수리하기 위해서 집 전체를 허물고 다시 지으려고 하는 것과 같이 이치에도 맞지 않고 상식에도 합당치 않은 것이다.
① (엡 2:15)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 말씀을 과연 십계명이 폐지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폐지된 것은 위에 언급한 제사 제도와 관련된 의식법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십계명을 폐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마 5:17)라고 말씀하셨다.
② (막2: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 말씀의 본 뜻은 무엇인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안식일을 사람의 형편에 맞추어 안 지켜도 되고 아무 날이나 지켜도 된다는 것인가? 성경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지만 사람의 형편에 따라서 성경을 마음대로 변경하지 않듯이,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이 있다고 해서 안식일을 변경하라는 말이 아니다. 안식일은 사람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니 안식일을 가지고 사람을 괴롭게 속박하지 말고 안식일을 즐겁게 그리고 존귀하게 지키도록 하라는 권면의 말씀이다.
③ (골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성경에는 두 종류의 안식일이 언급되고 있다. 성경 시대에는 오늘날의 ‘공휴일’이라는 말을 ‘안식일’이라는 용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한 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제칠일 안식일과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명절이나 축일과 관련된 안식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레위기 23장을 읽어 보면 제7일 안식일은 별도로 언급(3절)되어 있고, 4절부터 “기한에 미쳐” 지킬 안식일(공휴일)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기한에 미쳐”라는 말은 어떤 명절이나 축일을 가리키고 있다(TEV, at the appointed times, KJV, in their seasons).
그런데 이스라엘의 절기나 명절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공휴일들(안식일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 무의미하게 된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요일 안식일) 외에 그들이 지키던 명절 안식일(날자 안식일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1월 15일 안식일(무교절 시작) ∙1월 21일 안식일(무교절 끝남) ∙3월 5일 안식일(오순절) ∙7월 1일 안식일(나팔절) ∙7월 10일 안식일(대속죄일) ∙7월 15일 안식일(초막절 시작) ∙7월 22일 안식일(초막절 끝남).
이러한 안식일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속 사업이 완성된 이후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들이므로 그러한 절기나 명절 안식일에 대하여는 논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④ (눅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신약에서 “율법과 선지자”라고 할 때는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구약 성경은 침례 요한때까지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이 폐지 되었다는 말도 아니고 율법이나 계명이 폐지되었다는 말도 아니다. 그래서 17절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 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⑤ (롬14:5)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안식일 무용론에 골몰하다 보면, 안식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 성경절도 안식일과 관련시켜 아무 날이나 지켜도 된다는 식의 이론을 전개할 수 있다. 이 성경절의 배경은 이렇다. 당시 로마에는 유월절파와 부활절파의 대립이 있었고 유월절파 내에서도 강건파와 온건파 사이에 유월절 양을 먹는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이 천사에게 예배하지 않는다. 천사도 피조믈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했을 때 천사는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 19:10)고 하였다. 예배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가장 정당하게 예배할 수 있는 시간은 창조의 기념일로 주어진 안식일이다.
인간은 이 중대한 법칙을 변경할 권한이나 이유가 없다. 하루(日)와 한달(月)과 일년(年)이 모두 해, 달, 지구의 공전이나 자전 주기와 관련된 것인데, 그러한 천체의 주기와는 무관한 1주 7일 제도가 창조 이후 지금까지 존속되어 온 것은 제칠일 안식일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인 것이다. 안식일이야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주어진 매우 귀중한 표시이며 각종 우상으로부터 격리되어 보호받을 수 있는 울타리와 같은 것이다. 다음의 성경절들을 음미해 보자.
(출 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겔 20:12)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겔 20:20)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줄 알게 하리라 하였었노라”
창조의 기념일로 주어진 안식일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죄로 인해 죽을 인생을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다시 살리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재창조(거듭남)의 역사를 기념하는 날이 된 것이다.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그리고 또한 안식일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인줄을 알게 하시려고 주어진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룩한 안식의 시간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성화의 경험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은 하늘까지 연결된 징검다리와 같은 것이다. 매 안식일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체험하는 것이다. 한 안식일, 한 안식일, 그리고 또 한 안식일을 딛고 또 건너서 마침내 영원한 안식,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안식일교회 大논쟁5(96년 12월호)
--주일성수문제--
안식교의 안식일 개념은
율법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전 호에 대한 변증
1. <교회와신앙> 측의 목소리가 고조된 느낌을 주며, 논쟁의 내용에 대한 일체의 결론은 독자의 판단에 의해 내려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에 대하여.
이같은 안식교 측의 주장을 보고 느껴지는 것은 한 마디로 내용적으로 불리해져 가는 자신들의 입장을 되지 않은 말로 희석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논쟁에서 자신의 결론 없이 독자들에게 결론을 유도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자기 결론 없는 논쟁을 하는 편이 이상한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결론을 가지고 논쟁을 하고 있고, 결국 각자의 결론을 독자로부터 평가받는 것이다. 김대성 목사도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결론을 가지고 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혹 김목사의 말대로 <교회와신앙> 측의 목소리가 고조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논쟁은 어차피 독자들의 판단을 전제한 논쟁이 아닌가? 그것마저도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김목사가 그만큼 논쟁 자체의 여유를 오히려 잃어 가는 증거로 보인다.
물론 이 논쟁에 있어 <교회와신앙> 측의 공정성 유지에는 문제가 없다고 보지만, 안식교 측의 김목사는 더이상 논쟁의 본질을 떠나 형식적인 면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내용에 더 충실해 주었으면 한다. 필자 편에서 볼 때 이 논쟁 글을 본지에만 게재하고 안식교측 언론에는 게재하지 못함으로 주로 기성교회 편에서만 본 논쟁을 지켜보고 있을 뿐 안식교 편에서는 그렇지 못하고 있음에도 진리 자체의 유익을 위하여 묵묵히 논쟁을 진행하고 있는 점도 유념해 주기 바란다.
2.마틴 박사의 글을 인용하여 안식교를 옹호하는 점에 대하여.
안식교 측은 스스로 성경적인 논쟁을 하겠다는 전제로 이 논쟁을 시작하였다. 마땅한 전제였다. 안식교가 율법주의인가 아닌가, 이단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마땅히 성경으로만 판단되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안식교 측은 사람들의 견해를 더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데 이는 자가당착적인 행위이다.
마틴 박사가 기성교회에서 이단 문제의 대가로 알려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도 실수할 수 있고 잘못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칼빈에게서도 많은 실수를 본다. 그러나 칼빈이 말했다고 해서 장로교인들이 칼빈의 실수까지 용납하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마틴의 입장을 반대하고 안식교를 이단으로 보는 다른 많은 학자들의 주장은 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가?
김대성 목사는 마틴 박사가 안식교에 대하여 가장 광범위하고 깊게 연구한 학자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자신들을 지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안식교를 지지, 옹호하는 학자는 안식교를 정확하게 보는 학자이고, 안식교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안식교를 바르게 보지 못했다는 논리는 심히 주관적이며 유치한 논리라고 생각된다.
마틴이 아니라 칼빈이 주장했다고 하더라도, 안식교에서는 화잇을 선지자라 하고 화잇의 계시를 ‘대언의 영’ 이며 ‘예수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성경적으로 용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화잇이 주장한 그 엉터리 계시들과 그 표절된 계시를 어떻게 ‘대언의 영’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즉 화잇이 ‘살아서 재림을 맞을 자가 있다’고 한 1856년 안식교 대총회의 사탄적인 예언, ‘노예제도가 재림시까지 계속된다’는 엉터리 예언, ‘미국의 남북전쟁시 아브라함 링컨을 비난하고 그가 패할 것’이라고 한 사기성 예언, ‘일곱 개의 달을 가진 별(토성)에서 에녹을 보았다’고 한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엉터리 예언들은 어떻게 하고 ‘마틴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성경과 원수된 화잇의 계시를 미화시키려 하는가?
3.안식교의 시작에 관한 변증에 대하여.
김목사는 안식교의 구원교리가 초기에는 율법주의였으나 1888년 와그너와 존스에 의하여 믿음의 의의 구원교리로 대전환하였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바 있다. 그래서 필자가 비판하기를, 김목사가 시인한 대로 인정한다면 40여 년간 화잇의 계시로 인도받은 안식교는 율법주의였다는 것이며 따라서 화잇의 계시는 잘못된 계시라는 말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안식교는 40여 년간 교리를 대전환해야 할 정도로 이단적인 교파였다는 말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율법주의 문제는 기독교 교리의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경이 이단으로 보는 핵심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안식교는 먼저 과거의 잘못에 대한 분명한 회개가 있었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김목사는 답변하기를, “<교회와신앙>측이 종종 사용하는 왜곡된 논리가 어떤 것인지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 ‘안식일 교회는 교회 역사 초기에 율법주의적인 구원관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날도 바른 교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면서 장로교의 교리도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였다.
우선 김목사는 중요한 말을 했다고 본다. 먼저 초기에 자신들이 율법주의였음을 다시 한 번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김목사는 회개의 개념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잘못이란 반드시 그것이 인정되고 회개되기까지는 고쳐지거나 변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점을 모르는 것같다. 안식교가 율법주의라는 무서운 이단 사상을 40여 년 동안이나 가르치고 주장했다면 분명한 회개가 있었어야 과거에는 율법주의였으나 지금은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인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이라도 이 논쟁을 통해서 과거 안식교의 율법주의 구원교리가 무엇이었으며, 1888년에 대전환을 이루었다면 어떤 내용들이 어떻게 대전환되었는지 명백하게 밝혀 주기를 바란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전환되었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단 교리를 회개없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냥 넘어갈 수 있는가? 안식교인들은 안식교를 율법주의라고 비판하면 과거에는 그러했으나 지금은 달라졌다고 하는데 무엇이 어떻게 언제 달라졌는지 밝혀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목사는 자신들이 현재는 율법주의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장로교는 로마 가톨릭에서 나오지 않았느냐고 역공을 시도했다. 김목사의 말대로 장로교는 잘못된 로마 가톨릭에서부터 나왔지만 그렇게도 많은 순교의 피를 뿌리면서 종교개혁을 하였다는 점은 상식이 아닌가? 지금도 장로교의 모든 교리는 가톨릭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잘못된 율법주의로 시작되었다가 아무런 회개도 없이 변했다고 주장하는, 그리고 아직도 노골적으로 율법주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또한 비록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율법주의적인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안식교인들이 대부분인데 어떻게 로마 가톨릭과 장로교를 비교하는 빈약한 논리로 자신들과 율법주의와의 고리를 끊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4.지난 호에 약속한 것들에 대한 증거.
필자는 지난 호에 두 가지 약속을 했다. 하나는 안식교 내에는 화잇 이후에 많은 계시가 있었는데 그들의 계시는 계시로 인정하지 않고 화잇의 계시만 계시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안식교 내의 다른 계시들을 소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화잇의 표절 문제에 대한 더 자세한 증거였다. 그러나 후자 문제는 지면이 하락하지 않아 역시 다음의 기회를 보기로 하고 이번에는 첫 번째 문제만 취급하겠다.
다음은 안식교인인 오만규 씨가 편저한 책 <재림교회사> 150~151쪽에 “거짓선지자들”이란 제목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대로 인용하겠다.
“1899년의 대총회 총회가 열리기 이전에 행한 한 설교에서 E.J 와그너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면 누구나 ‘예언의 영’까지 받아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권고가 유독 엘렌 지 화잇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냐 하는 문제는 진작부터 논란이 되고 있었다. 이미 1844년에 미시간 주(州) 페스토키(Petoskey)에 사는 안나 가르마이어(Anna Garmire)가 1884년 10월에 묵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화잇은 그 기별이 하늘에서 왔다기 보다는 안나의 아버지에게서 연유된 것 같다고 말했고 대부분의 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엘렌 지 화잇이 호주로 떠난 직후인 1890년대 기간에 열성적인 젊은 여신도인 안나 필립(Anna Philip)양이 묵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묵시의 분위기와 이 여인의 단순한 신앙 생활에 인상을 받은 A.T. 존스와 W.W.프레스콧트는 그녀를 하나님의 사자로 믿었다. 안나 필립양을 개인적으로 알고있던 스티븐 하스켈(Haskell) 목사까지도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인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엘렌 지 화잇은 이 문제에 대하여 필립양이 선의적이고 성실하긴 하지만 실수를 저질르고 있다고 다소 직접적인 논평을 하였다.
안나 필립 양의 역할을 둘러싼 혼란은 1894-1904년까지 베틀크릭 교단 본부에 가해진 대 재난의 전조가 되었다. 1893년까지만 하여도 교회에는 ‘늦은비 성령이 내려 큰 외침으로 기별이 전파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으며 쏟아지는 헌금은 미처 수습하기가 어려울 형편이었는데 불과 몇 년 못되어 혼란과 불신과 불안이 교회에 만연케 되었다.”
이처럼 화잇 이후에도 계시들이 많았는데 화잇을 위해서만 계시의 문을 열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 문을 닫아버리는 기준이 무엇인지 독자들은 이해가 되는가?
안식일과 주일 문제
1. 안식일은 폐한 절기이다.
안식교는 구약의 안식일을 지금도 지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기성교회에서는 구약의 율법주의적인 안식일을 예배일로 하는 것이 성경적이 아님을 믿고 주일에 예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안식일과 주일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과연 구약의 안식일이 폐한 것인가, 아니면 지금도 지켜야 할 규례인가에 대하여 성경이 어떻게 말하느냐이다. 그래서 먼저 안식일 폐지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을 살펴본다.
1) 성경에 안식일이 폐지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구약의 모든 규례들과 함께 안식일이 폐한 것임을 확실하게 하고 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버리사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치 못하게 하라”(골 2:14, 16).
이 본문은 안식일이 월삭과 절기와 함께 십자가에서 폐한 것임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구절중 하나이다. 그러나 김목사는 이 구절에 나오는 안식일은 제칠일 안식일이 아니고 절기에 속한 안식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구약 레위기 23장의 유월절, 무교절, 초막절 등 절기 기간 중에 안식일로 지켜야 할 날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절기에 속한 안식일들을 안식교측은 절기안식일이라고 하고 바로 위의 안식일이 그 절기안식일이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서 폐한 것은 절기이지 제칠일 안식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맞는 말인가?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골로새서의 안식일은 결코 절기안식일이 아니며 십자가에서 월삭이나 절기와 함께 폐한 안식일은 제칠일 안식일이 분명하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문에서 절기, 월삭, 안식일을 각각 구분해서 말했다.
안식교측의 논리대로 하자면, 본문에 언급한 안식일이 절기안식일이 아니고 제칠일 안식일이라면 제칠일 안식일은 폐해졌다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본문의 안식일은 절기가 아니고 제칠일 안식일이라는 분명한 증거는 이것이 언급될 때 안식일만이 아니라 이미 앞에 절기도 함께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절기안식일이라는 것은 절기와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절기 자체가 절기안식일이다. 즉 절기 따로 있고 절기안식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절기가 폐하면 절기안식일은 자동으로 폐해진 것이다. 절기만 있고 절기안식일이 따로 존재할 수는 없다. 절기가 있기에 절기안식일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절기만 폐하고 절기안식일은 폐하지 않는다든지, 절기안식일만 폐하고 절기는 폐하지 않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본문에 “절기나 월삭이나”라고 한 것은 해마다 돌아오는 절기 및 그 절기에 속한 안식일, 그리고 매월마다 돌아오는 월삭이 폐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이라고 했을 때 절기안식일은 “절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안식일”은 제칠일 안식일을 말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본문이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은 “절기나(해마다 돌아오는 절기 안식일), 월삭이나(매월마다 돌아오는), 안식일(매주마다 돌아오는 제칠일)” 이 세 가지가 다 폐한 것이다. 안식교측은 자신들의 잘못된 교리를 포기하지 않고 제칠일 안식일을 살리기 위하여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것이다.
둘째, 성경에는 절기 안식일이 ‘안식일’이라고 쓰여지지 않았다.
소위 절기안식일이라는 것은 유월절, 무교절, 초막절, 대속죄일 등에 속한 것으로서 레위기 23장에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니”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절기를 제정한 이후로 성경에는 절기에 속한 안식일은 “절기”라고 기록되었고, 따로 “절기안식일” 또는 “안식일”로 사용된 곳은 없다. 그래서 “안식일”이라고 기록된 곳은 모두 제칠일 안식일을 말하는 것이다. 김목사의 말처럼 “안식일”이라고 기록된 곳이 절기안식일을 가리키는 것인지 제칠일 안식일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구분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12장 8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구절에서 이 안식일이 절기안식일이냐 제칠일 안식일이냐를 따지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되겠는가? 성경 어디에도 절기를 소개하는 구절인 레위기 23장 외에 절기에 속한 안식일을 “안식일”이라고 기록한 곳은 없다. 성경에 단순히 “안식일” 이라고 기록된 것은 다 제칠일 안식일인 것이다.
절기안식일, 명절안식일이라는 등의 말은 안식교가 만들어 낸 작품이다. 그래서 본문 골로새서 2장 16절에 절기와 함께 언급된 “안식일”은 제칠일 안식일이 분명하다. 따라서 제칠일 안식일은 다른 절기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폐한 것이 분명한 것이다.
2) 성경은 안식일을 폐한 바 된 다른 절기나 규례들과 구별하여 언급하지 않고 항상 함께 언급하고 있다.
구약에는 안식일과 함께 많은 절기들과 규례들이 있다. 유월절, 무교절, 초막절, 월삭 등의 절기와 할례, 결례 등의 규례들이다. 이러한 절기 규례 등은 십자가에서 모두 폐지된 것들이다. 이것은 안식교도 인정한다. 그런데 안식교인들은 다른 규례와 절기는 폐했어도 안식일은 폐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절기나 규례와 안식일을 구별하지 않고 함께 말하고 있다.
레위기 23장을 보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레 23:2)고 하면서 계속해서 그 절기를 안식일, 유월절, 무교절 등을 따로 구별하지 않고 함께 말씀하고 있다(3-8절). 즉 구약에서부터 안식일과 다른 절기가 모두 여호와의 절기인 것이다. 그래서 다른 절기는 폐해지고 안식일은 폐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평형이 맞지 않는다.
역대하 2장 4절에는 안식일과 다른 규례가 함께 이스라엘에게 주신 규례로 기록되었다. “이제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여 구별하여 드리고 주 앞에서 향재료를 사르며 항상 떡을 진설하여 안식일과 초하루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절기에 조석으로 번제를 드리려 하니 이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규례니이다”. 이 본문에 안식일과 함께 언급된 모든 규례들이 폐하여졌다. 안식일도 역시 함께 폐한 것이다.
이사야 66장 22-23절 말씀에도 안식일이 월삭과 함께 취급되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서 경배하리라”. 이 본문을 인용하여 안식교인들은 천국에서도 안식일을 지킨다고 주장하는데 이 본문에 함께 언급된 월삭이 폐하면서 안식일도 함께 폐해졌다.
안식일은 구약의 다른 절기나 월삭, 규례 등과 함께 폐한 절기이다. 그래서 명백하게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이 폐해졌다고 골로새서 2장에 기록한 것이다.
3) 신약 성경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없다.
안식교인들의 주장처럼 안식일이 폐하지 않았고 그처럼 중요하여 하나님의 인이며 참 백성의 표징이라면 왜 신약에 주님이나 사도들이 한 번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을 하지 않았겠는가? 기성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구약에서의 안식일은 인정하지만 신약에는 폐지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안식교가 안식일 준수를 주장하려면 마땅히 신약에서 안식일 명령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안식교는 신약에서 안식일 명령을 도무지 찾지 못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 그렇게도 많이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다가 갑자기 신약 성경에 와서 안식일 명령이 전혀 없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안식일이 폐했다는 강력한 증거인 것이다. 구약 성경에 할례가 강조되다가 신약 성경에 전혀 그 명령이 없는 것은 할례 제도가 폐했기 때문인 것처럼 안식일도 폐한 것이다.
김목사는 이에 대하여 “안식일을 지키며 안식일에 예배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던 신약 시대의 사회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다시 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고 변증하였다. 김목사의 이런 주장은 궁색한 변명일 뿐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약에 유월절을 지키라는 명령이 없으니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는 말인가? 또 할례를 하라는 명령이 없었으니 할례가 당연시되고 있었다는 말인가? 반대로 구약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명령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시대에는 안식일이 당연시되지 않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인가? 아무리 변증해도 신약에서 안식일 명령이 없는 것은 안식일이 폐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는 안식일을 제외한 십계명의 모든 조항을 다 지키라는 교훈이 있다. 십계명의 조항이 다 도덕법이지만 안식일만이 절기에 관한 것이며 십자가의 모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안식교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먼저 안식일을 지키라는 신약 성경의 명령을 제시하기 바란다. 신약의 교회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생명이다. 날짜나 장소에 구원이 있거나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안식교인들은 허무한 날짜 타령을 그만 두고 복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0-1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1, 24).
4) 안식교의 주장처럼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회당에 들어갔다면 사도들이 율법주의자란 말이 된다.
신약 성경에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는 근거는 성경에 전무하다. 김목사는 사도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간 기록들을 들어서 초대 교회 성도들이 안식일을 지킨 근거라고 주장했는데 과연 그러한가? 이는 천부당 만부당한 말이다.
우선 김목사가 근거로 인용한 안식일 모임에 대한 성구들을 보면(행 13:14, 42, 44, 17:2, 16:13) 다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모임이었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특히 김목사는 사도행전 16장 13절의 ‘강가의 안식일 기도모임’을 예로 들었는데 오히려 김목사가 말한 접속사(카이και)는 그 모임이 초대 교회 모임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확증해 준다. 즉 그 강가의 모임은 유대인의 안식일 모임이었는데 그날 바울의 전도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이렇듯 사도들은 안식일을 지키려고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전도하기 위해 들어간 것이다.
신약 성경 어디에 초대 교인들이 안식일 예배를 드린 근거가 있는가? 안식교인들이 인용하는 신약의 구절들은 모두 유대인들의 유대교 회당 모임이었던 것이다. 사도들이 회당에 들어간 일은 안식일을 지키러 간 것이 절대로 아닌 것은 다음을 통해서도 명백해진다. 즉 만일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키려 했다면 어떻게 율법주의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의 안식일 모임에 갔겠는가 하는 점이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지키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초대 교인들끼리 따로 모여 예배를 드렸을 것이 아닌가?
그러함에도 김목사의 말을 따르면 무서운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사도들이 율법주의자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안식교의 안식일 개념은 결국 유대인의 율법주의적인 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런 재미있는 상상을 해볼 수 있겠다. 김목사는 아마 안식교회가 없는 지역에서 안식일이 된다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안식교에서조차 이단시하고 있는 ‘박명호 엘리야 집단’의 모임이나 ‘안상홍증인회 하나님의 교회’나 ‘참 예수교’ 등이 지키는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여 안식일을 지킬 수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한가?
2.주일 예배의 의미
1. 초대 교회의 예배일은 안식일이 아니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구약의 안식일은 폐한 것이 명백하다. 그러면 초대 교회는 어떤 날을 예배일로 했을까? 신약 성경에서 유대인의 모임이 아닌 초대 교인들의 모임은 어떤 날이었을까? 초대 교인들의 예배일은 결코 유대인들의 절기인 안식일(토요일)이 아니었다. 안식일이 폐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당시 초대 교인들은 유대교의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 증거는 초대 교회의 안식일 예배 모임의 기록이 신약 성경에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안식일은 변경된 것이 아니라 폐한 것이다. 안식교가 안식일이 폐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려면 구약 성경이나 유대인의 안식일 모임을 가지고 말하지 말고 신약에서의 안식일 명령이나 초대 교회의 안식일 예배를 신약 성경의 증거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안식교가 그 동안 유대인들의 안식일 회당 모임이나 구약 성경에 근거해서만 안식일 명령을 주장한 것은 안식일에 대한 성경적인 변증이 되지 못한 것이다.
2. 초대 교회의 예배일은 주일(일요일)이 분명하다.
안식일이 폐지된 후 어떤 율법이나 명령에서가 아니고 초대 교회의 예배일은 자연스럽게 주일에 드려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신약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부활이 주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활의 중요성은 다 말할 필요조차도 없을 것이다. 안식교에서는 주일을 지키라는 말이 성경에 어디 있느냐고 반문한다. 물론 여기서 ‘지킨다’는 의미에 있어서도 안식교에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의미와 기성교회가 ‘주일을 지킨다’는 의미는 다르다. 다음에 거론하겠다.
주일은 율법에 의에서가 아니고 자발적인 부활의 기념일이며 예배일로 드리는 것이다. 부모님의 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명령이나 법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러면 초대 교회에 주일에 모여서 예배드린 증거가 성경에 있는가? 그 증거는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초대 교회의 시작은 사도행전 1~2장에 있다. 초대 교회의 최초의 예배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예배이다. 그날은 주일이었고, 주일인 그날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신약교회가 구약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면 왜 하나님께서 성령 강림을 안식일이 아닌 주일에 주셨을까? 초대 교회의 최초의 세례식이 왜 안식일이 아닌 주일에 있었을까? 성령 강림한 주일인 그날은 초대 교회의 최초의 주일예배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초대 교회의 첫 주일에 있었던 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성령 강림이 있었고, ② 말씀을 증거하는 일이 있었으며, ③ 3천명에게 세례를 베푸는 일이 있었으며, ④ 거기서 초대 교회가 시작되고 주일예배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날을 예배일로 해야 마땅한가? 유대인의 폐지된 안식일을 지켜서 율법주의 망령을 불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초대 교회가 첫 주일을 예배하고 성령의 강림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주님의 부활하신 주일에 예배할 것인가? 당연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드리는 주일에 예배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보지 않는가?
3. 율법이 폐해졌다는 말과 완성되었다는 말의 의미
1. 성경에는 율법이 폐해졌다고도 하고 완성되었다고도 말하고 있다.
지금 독자들이 볼 때 논쟁의 핵심은 안식일로 구약에서처럼 토요일을 지켜야 하느냐 주일(일요일)을 지켜야 하느냐의 문제로 보일 것이다. 안식교는 구약의 안식일은 변할 수 없는 날로 지금도 토요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요, 기성교회는 구약의 안식일은 폐해졌으니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안식교에서의 지킨다는 의미와 기성교회에서의 지킨다는 의미는 다름을 앞에서 말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선결해야 할 것이 있다. 구약의 율법은 과연 완성되었느냐 폐해졌느냐의 문제이다. 폐해졌다고 하면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로 들리고, 반대로 완성되었다고 하면 지금도 그 계명의 요구가 유효한 것같이 보여 지켜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기성교회 편에서는 구약 시대의 안식일을 신약 시대에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폐해졌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고, 반대로 안식교 편에서는 구약의 안식일을 신약에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폐해졌다면 다 폐해졌느냐 아니면 부분적으로 폐해졌느냐 하는 문제도 있고, 역시 완성되었다면 다 완성되었느냐 부분적으로 완성되었느냐 하는 문제도 남는다.
그러나 웬일인지 성경에는 폐해졌다는 말과 완성되었다는 말을 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완성되었다는 말씀을 살펴보자. 먼저 마태복음 5장 17절 말씀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그리고 로마서 3장 31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이제 반대로 율법이 폐해졌다는 말씀을 살펴보자. 많이 있지만 세 개만 살펴보겠다.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는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했고, 히브리서 7장 18절에서는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라고 했고, 히브리서 10장 9절에서는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폐해졌다는 말과 반대로 완전케 했다는 말 내지는 굳게 세운다는 말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2. 율법은 폐해지기도 하고 완성되기도 하였다.
사실 폐해졌다는 말과 완성되었다는 말은 반대말 같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반대 개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한 사건에 대한 다른 표현인 것이다. 즉 율법은 은혜의 법에 의하여 폐해졌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또한 완성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어떤 한 설계도가 있는데 그 설계도에 의해서 건축을 했다고 해보자. 그랬을 때 그 설계도는 폐해진 것이냐 완성된 것이냐? 둘 다 가능한 말이 아닌가? 그 설계도는 집이 지어짐으로 결국 완성된 것이요, 또한 폐해진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 선생인 것이다. 결국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것이요, 그리고 또한 폐해진 것이다.
3. 구약에 많은 절기와 제도를 가리켜 ‘영원한 규례’라고 하였는데도 기성교회는 물론 안식교도(유대교를 제하고) 그중 아무것도 지키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증명하는데 좋은 말씀이 있다. 즉 구약 성경에는 ‘영원 규례’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있다. 그 말은 그 규례가 영원히 지켜져야 한다는 말로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영원한 규례하고 했는데 신약 시대에는 지키지 않는 것들이다. 이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유월절 내지는 무교절을 영원한 규례라고 하였고(출 12:14, 12:17), 제사장이 성막의 등불을 관리하는 것을 영원한 규례라고 하였고(출 27:21), 제사장 직분을 영원한 규례라고 하였고(출 29:9), 심지어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는 것을 영원히 지킬 규례라고 하였으며(출 30:21), 기름과 피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영원한 규례라고 하였고(레 3:17), 속죄일을 영원히 지킬 규례라 하였고(레 16:29, 29, 34), 그리고 암송아지의 재를 거둔자는 그 옷을 빨 것인데 이를 영원한 율례라고 하였다.
이중에 아무것도 그 형식적인 면에서 그 규례가 신약 시대에까지 이어지는 것은 없다. 우리는 유월절이나 무교절을 지키지 않는다. 성막 제도도 제사장의 제도도 지금 없다. 하물며 제사장직도 제사 제도도 영원하기는커녕 없어졌는데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는 것을 영원한 규례하고 할 수 있겠는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둔자가 옷을 빨아야 함이 어떻게 영원한 규례가 되겠는가? 아무것도 그 형식적인 면에서 영원한 규례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안식교의 안식일 준수의 논리로 하자면 그것도 지금 지키든지 아니면 그 의미만 영원하다고 하든지 할 것이다.
바로 그렇다. 비록 그 예법은 없어졌으나 그 영적인 의미가 영원하다는 말일 것이다. 이점은 안식교에서도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안식일도 그런 의미에서는 영원한 규례가 된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와 그 영적인 의미는 영원하지만 그 형식적인 규례로서는 영원하지 않다. 즉 폐해진 것이다.
결국 안식교에서 안식일만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같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이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하지만 율법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율법주의에서 나온 말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지면 관계상 이 점에 대하여 다음 호에 더 깊게 취급하도록 하겠다).
비성서적 일요일(주일)예배, 그 기원과 역사
■ 지난호 <교회와신앙>측 글을 읽고
글이 진행되는 중이지만, 이미 본 지상 논쟁 1회분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어차피 진정한 이단과 진정한 정통을 가리기 어려운 이 시대에 이단이라는 말을 듣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다. 특별히 지금 한국 교회의 상태는 서로가 다른 교단을 이단이라고 하여 「상대적 이단」의 집합체가 되어 있으며, 교인의 수(數)가 많는 교단이 일시적으로 정통의 기득권 행사를 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장로교 통합측이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이단이 아니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서 이러한 지상 논쟁을 시작한 것도 아니다. 다만, 장로교 통합측이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정할 때 좀더 깊이있는 연구를 하지 못한 채 매우 단편적이고 편협한 관찰에 의해, 세계적인 조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내린 왜곡된 결론을 바로 잡기 위해서 이 지상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논쟁은 안식일교회의 올바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 장로교 통합측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 둔다.
1. 순복음교회에 대하여
본 지면의 이단 논쟁을 통해서 필자가 순복음교회의 예를 든 것은, 타 교단을 이단 혹은 사이비로 규정하는 원칙과 과정이 무엇인지 의심스러워서 질문을 한 것이다. 장로교 통합측은 1986년 총회에서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사이비성을 이유로 이단 결정을 했으나 1994년 총회에서 다시 ‘해벌’(解罰)이라는 이상한 용어를 사용하여 이단 결정을 풀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그리고 이단 연구를 좀더 신중히 하라는 의미에서 질문을 한 것이지, 순복음교회를 사이비성 교회로 정했다가 ‘해벌’(解罰)한 것처럼 안식일교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 달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글을 비평할 때에는 문장의 앞 뒤를 살펴서 필자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 사용해 줄 것을 당부한다.
2. 엘렌 화잇 비판 부분에 대하여
1) 참 선지자, 성서적 계시는 다음의 기준으로 판별될 수 있다.
① (사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 참 선지자는 그들의 말하는 바가 성경 말씀에 맞아야 한다.
② (렘 28:9)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 - 참 선지자는 그들의 예언하는 바가 성취되어야 한다.
③ (마 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참 선지자는 그의 생활에 있어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④ (요일 4: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참 선지자는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인정해야 한다.
참 선지자, 혹은 성서적 계시는 성경이 제시하는 위의 네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고, 어느 것 하나라도 해당되지 않으면 참 선지자, 혹은 올바른 계시라고 할 수 없다. 안식일교회는 엘렌 화잇의 영감성을 판별할 때에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위의 네 가지 시금석을 기준으로하여 분별하고 있다.
<교회와신앙>측은 안식일교회가 엘렌 화잇의 글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고 계속 주장을 하는데, 어느 집단에서나 있을 수 있는 ‘극단적인 소수’의 견해를 가지고 그런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건전한 비판 태도가 아니다. 분명히 본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모든 신앙과 교리의 원칙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하며 엘렌 화잇의 어떤 글도 성경과 맞지 아니하면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채식을 강조하는 일이 성경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비판한 부분에 대해서는 본 지상 논쟁 중 채식 문제에 대하여 다루게 될 때에 상세히 설명할 것이므로 이번 호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2) “빗나간 예언”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에 대한 답변
① “노예 제도가 재림시까지 계속 될 것”이라는 말 - 이 내용은 원래 문장의 일부를 인용하여 만들어 낸 말이다. 문장 전체를 보면 충분한 배경 설명이 있으며, 그 마지막 문장도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반역을 일으킨 그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미국)를 파멸시켜 오던 노예 제도는 그 생명이 부지될 것이며 또 다른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교회증언 1권, 영문 255). “반역을 일으킨 그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을 삭제하고 뒷 부분만 인용하여 비평하는 것은 비양심적인 비평가들이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다. “비가 오면 나는 가지 않겠다”는 문장에서 “비가 오면”이라는 부분을 빼면 무조건 가지 않겠다는 뜻이 되어 원래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시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② 링컨을 비난하고 그가 패할 것이라고 했다는 비평 - 원래의 문장은 이것이다. “이 나라는 언젠가는 티끌에까지 낮아지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1권, 영문 259). 이 말(“humbled into the dust”)의 의미는 무엇인가? 남북전쟁에 있어서 링컨이 주도하는 정부군(북군)이 큰 모욕을 당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전쟁이 시작된 후 북군은 비교적 인구도 적고 약세인 남군에 의해 2년 동안이나 고전하였으며, 미국이 그렇게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당시 영국은 미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고려할 정도로 미국은 다른 국가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원래의 문장대로 한다면 빗나간 예언이 아니라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③ 1856년 총회에서의 발언 - 화잇은 당시 총회 대표자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살아서 맞이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성경에 나타나는 축복이나 저주는 조건적이다. “말씀에 순종하면” “순종치 아니하면”이라는 조건에 따른 결과로 축복과 저주가 임했던 것이다(참고 : 민 14:26-34; 욘 3:3-10 등). 엘렌 화잇은 1856년 총회 이후 10여 년이 지난 다음, 많은 사람들이 준비되어 있지 못하므로 재림이 지연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교회증언 2권, 영문 194). 재림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미래적이면서도 현재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재림을 기다렸고 사도 바울도 그러했다. 바울이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 4:15)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문장의 “우리” 속에는 바울이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자기 시대에 있을 것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예언도 빗나간 것인가?
④ 천체에 대한 언급 - 비평하는 사람들은 화잇이 직접 기록한 원전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인용하여 설명한 2차 자료를 사용하고 있다. 화잇이 어떤 별에 대한 이상을 말하고 있을 때 주위에 있던 사람이 그것은 목성에 대한 것이고 혹은 토성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었으며, 화잇이 직접 목성에는 달이 몇 개 있고 토성에는 달이 몇 개 있다고 하면서 별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어쩌면 독자들을 기만하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위와 같은 방식의 모든 비판에 대해서는 「엘렌 화잇과 그에 대한 비평들」(F. D. Nichol, Ellen G. White and Her Critics, 1951, R&H Publ., Assn.)이라는 책에 상세한 답변과 설명이 있음을 밝혀 둔다.
■ 주일 예배 논란
성경에는 창조의 기념일로 제정된 제칠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되어 있다. 지난 호에 이미 언급했듯이 성경상의 제칠일은 오늘날의 토요일이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토요일) 대신 주일(일요일)에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일 예배가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과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사회적 혹은 종교적 통념에 의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저 막연하게 아는 것은, 안식일은 구약 시대 유대인들이 지키던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으며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일요일에 예배한다는 것 정도이다.
안식일은 유대인이 생겨나기 약 2000년 전,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인류 전체를 위해서 제정하셨다는 것과,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경의 근거가 전무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뒷 부분에 상세한 설명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목사들이나 평신도들 사이에는 안식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매우 열성적으로 말씀을 연구하며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면 우선,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그 일요일 예배가 어떻게 시작되어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기원부터 알아 보겠다.
■ 주일(일요일) 예배의 기원
주일 예배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고 하는 많은 시도가 있었고, 또 몇 성경절들을 주일 예배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으나 모두 성경의 원뜻을 벗어난 것들이며 사실상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없으므로, 그 기원은 역사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1.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정책
2세기 초엽에 로마에는 하드리아누스라는 황제가 있었다. 유능한 정치가였고 로마의 많은 속국들과 화친 정책을 펴서 매우 안정된 정치를 하였다. 그 당시 반란이 심하던 유대인들과 화친 조약을 맺고 유대인들의 소원을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 재건 허가를 해 주었다(130년경).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을 위하여 막대한 자금을 거두었다.
얼마 후, 황제는 모든 속국들에게 자신을 신의 아들로 부르도록 하는 황제 숭배를 강요하였고 유대인들은 몹시 반발하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들이 시행하던 할례 의식을 금지시켰다. 전국 유대 랍비들의 격렬한 항의가 있었고 하드리아누스는 분노하여 예루살렘 성전 재건령을 취소하였다.
2. 유대인 2차 반란과 그 결과
서기 132년부터 135년 사이 발코체바를 주동으로 한는 유대인들의 대규모 반란이 있었다. 이미 거두어진 성전 건축 자금이 반란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황제는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당시 로마의 명장 세베리우스와 정예부대 22군단을 파견하였다.
전쟁과 반란에 능한 유대인들은 로마의 군대를 엥케리라고 하는 험한 골짜기로 유인한 후, 미리 매복해 있던 반란군들이 뛰어나와 로마의 정예 부대를 참패시켰다. 세베리우스 장군은 몹시 자존심이 상하여 군대를 재정비한 후, 유대인 마을들을 하나씩 포위하여 초토화시키는 작전으로 유대인의 마을 985개를 전멸시켰으며 약 100만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다시 세 가지 금지령<㉠ 토라(모세 오경) 사용 금지 ㉡ 할례 금지 ㉢ 안식일 예배 금지>으로 유대인에 대한 보복을 가하였다. 그리고 그 세 가지 금지령을 어기면 사형으로 다스렸다. 이 금지령에 때문에 교회 안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공존하고 있었고, 모두가 다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 반란으로 인한 금지령 속에 포함된 안식일 준수 문제는 기독교인들에게까지 해당되는 칙령이었다.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인들도 안식일을 지키면 유대인으로 간주하여 박해를 받게 되었는데, 당시 로마 제국의 위정자들은 그리스도교를 단순히 유대교의 또 다른 한 분파로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 유대인들이 신봉하는 같은 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 둘째, 두 부류가 모두 구약 성경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 세째, 모두가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점 등이었다.
3.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당시 교회를 대표하는 변증 교부들이 황제에게 보내는 서한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는 다르니 다르게 취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를 무시하고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결국, 교부들은 유대인들과의 차별화와 로마의 이교도들과의 동질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대인과의 차별화를 위해서는 구약의 하나님대신 신약의 하나님을 강조하며 이교도와의 동질화를 위해서는 안식일대신 당시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들의 예배일인 일요일 예배를 교회에 도입하게 된 것이다.
일요일 예배가 교회 안에 유입된 역사를 보면 영지주의 신학자들의 영향이 작용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그들은, 그리스도교에서 신봉하는 예수는 “의의 태양”(Sol Justitiae)이시므로 로마인들의 “불패의 태양”(Sol Invictus)인 미트라와 동신이명(同神異名)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리로 교회의 일요일 예배를 합리화 혹은 정당화한 것이다. 이들로부터 소위 일요일 신성론, 영혼 불멸설 등이 발생되었고 나중에는 크리스마스 경축제와 마리아 숭배 등이 교회로 도입된 것이다.
가장 유명한 교회 역사가 중의 하나인 유세비우스도 고대의 일요일 신성론 신학자들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 빛” 또는 “의의 태양”에 관련시켜서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태양의 날”을 상징학적 의미로 해석하여 일요일 준수를 정당화했다. 그는 그의 저술 「시편 주해」(Commentaria in Psalmos, chap. 92)에서 “이 빛의 날, 곧 첫째 날이요 ‘참 태양의 날’에 우리가 6일을 지낸 후 모두 모이는데 이 날을 우리가 성스럽고 영적인 안식일로 축제”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그는, 태양은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바로 태양신 아폴로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면서 “구주의 날…,이 명칭은 빛에서부터 파생된 것이며, 또한 그 태양에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말한다.
일요일(주일) 예배,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 부활 이후 안식일이 폐지되고 부활을 기념하여 지키기 시작했다고 하는 단순 논리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일요일 예배가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아 교회의 예배일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이교들과 로마의 황제들과 이교적 신학자들의 영향, 태양신과 관계, 그리고 엄청난 투쟁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비성서적인 제도임을 알아야 한다.
옥스포드 대학교 교회사 교수였던, 스텐리(A. P. Stanley, 1815-1881)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고대 태양신에게 부단한 충성심을 바친 자들이 그들의 종교 의식 자취를 남겨 놓았다. …지극히 거룩하며, 우주적인 이 그리스도교단에까지 그 흔적을 남겼다. 고대 우상 숭배자들이 명명한 ‘태양의 날’(dies solis)이라는 칭호의 존속은, 대개 우상 숭배교와 그리스도교의 절개가 서로 연합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Lecture on the History of the Eastern Church, 1884, p.184).
4. 콘스탄틴 황제의 일요일 휴업령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힙입어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는 마침내 321년 3월 7일에 일요일을 공식적인 휴일로 선포하게 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태양을 존경하는 날에 모든 관공리들과 각 도시의 주민과 제조 공장의 종업원들은 휴업하라. 그러나 농촌에서 경작에 종사하는 농민은 자유로이 노동할 수 있다. 이는 씨를 뿌리고 포도를 심는데 불리할까 염려됨이라”.
이 법령은 그리스도교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하는 기점이 되었다. 이 법령을 통해서 콘스탄틴 황제는 제국 내의 2대 종파, 즉 태양신 아폴로(Apollo)를 숭배하는 이교도들과 또 다른 태양신 그리스도(Kristos)를 숭배하는 그리스도교도들을 일요일(dies solis)로 묶어서 단일 종교로 융합해 보려는 야심적인 종교 정책을 시도했던 것이다.
콘스탄틴은 이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 자신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선포했으나 사실상 이것은 세상을 기만하는 전략상의 개종이었다. 삼성출판사에서 발행한 「대세계의 역사」 3권 211쪽에는 콘스탄틴의 개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신(神)을 버리고 새로운 신에게 귀의했다는 뜻의 개종은 아니다. 그의 신은 그 전과 동일한 신이었다. 다만 그 전과 동일한 그 신이 그리스도교의 교회에서 예배되고 있는 신이라고 교정된 점만이 옛날과 달랐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참다운 의미에서의 개종은 아니었던 것이다”.
5. 일요일예배에 대한 교회의 공식 결의
이와 같이 일요일 예배는 비성서적인 배경을 가지고 매우 인위적이면서도 이교적인 방법으로 교회에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가톨릭화 되어가는 종교, 정치, 사회적인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면서 마침내 교회에서도 일요일 예배를 합법화시키기 위한 몇 차례의 회의가 있었고, 성경의 권위가 아닌 교회의 총회를 통해서 결의를 하게 되었다. 364년에 열린 라오디게아 종교 총회에서는 결국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일요일 예배를 공식적으로 인준하기에 이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화하여 안식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하며, 그 날에 반드시 일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날(일요일)을 특별히 존중히 여겨, 그리스도인으로서, 가능하면 이 날에 일하지 말라. 그런데도 만일 그들이 유대화한다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1910년 1월 25일 교황 피우스 10세로 부터 “사도적인 축복”(Apostolic Blessing)을 받은 「회심자를 위한 가톨릭 교리 문답서」에서 아래와 같이 확인되고 있다. 문 : 어느 날이 안식일인가?
답 : 토요일이 안식일이다.
문 : 우리는 왜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는가?
답 : 가톨릭 교회가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 그 존엄성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옮겼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에서 개신교회를 향하여 직설적으로 증언하는 다음의 내용을 보면, 분명히 주일예배는 비성서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성경만을 따른다면 당신은 토요일(안식일)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날이야말로 하나님께 거룩히 지켜지도록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셨기 때문이다. 비가톨릭 신자들은 1800년간, 일요일을 키킴으로써 성경의 제도가 아닌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들처럼 토요일(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 점에서 그들의 덜미를 잡고 있는 것이다. 성경만을 신앙의 유일한 지침으로 주장하고 있는 개신교회는 일요일 준수에 대한 아무 보증이 없다.” <F. G. Lentz, The Question Box(NY:Christian Press Assn., 1900, pp.98,99) ; "The Question Box" , The Catholic Universe Bulletin, 69(Aug. 14, 1942, in the SDA Bible Student Source Book, 994>.
사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일요일 예배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과 같이 보편화되었는지에 대해서 그 정확한 배경을 인식하고 있는 교회는 개신교회가 아니라 가톨릭 교회이다. 개신교회는 ‘오직 성경으로’라는 정신을 가지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일요일 예배에 대한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고 무리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가톨릭은 성경보다 교회의 전통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성경에 근거가 없는 일요일 예배에 대하여 교회의 전통을 근거로 하여 매우 떳떳한 입장을 내세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의무의 예를 들어 보자. 이는 물론 신자의 가장 중대한 의무의 하나이지만 성서에서는 그에 대한 명백한 구절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성서의 안식일은 토요일이지 일요일이 아니다.” <기본스 저, 장면 역, 교부들의 신앙, 108>.
일요일 예배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고 무리한 시도를 하는 <교회와신앙>측은 먼저 가톨릭측과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경적 근거의 유무’에 대한 논쟁을 거치고 나서 안식일교회측과 대화를 계속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상반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양측의 주장 중에서 하나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위와 같은 역사적·객관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리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 개신교회는 일요일 예배에 대한 근거를 성서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몇몇 성경절들을 무리하게 해석하고 있다
■ 주일(일요일) 예배의 근거로 오해되는 성경절들의 올바른 해석
일반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예수님의 부활과 연관지으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부활한 사건과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일을 결부시키려고 하는 것은 매우 무리한 시도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요일은 분명히 일요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일요일 예배를 부활과 연관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요일이 안식일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지각없는 사람들의 논리는 더 이상 재고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사실, 그것은 물론 매우 귀중한 진리요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것이므로 날마다 그리스도인의 가슴 속 깊이 새겨져야 할 신앙의 기둥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활한 날에 예배를 드린는 것은 성서적으로 아무런 명분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요일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예수께서 돌아가신 요일도 중요하고 탄생하신 요일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사건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지 그 사건이 일어난 요일을 예배일로 정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시도인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성만한 예식(고전 11:26)을 통해서 기념하도록 되어있고, 부활의 의미는 침례 예식(벧전 3:21; 롬 6:5)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침례를 받은 뒤로는 세족 예식(요 13:10)을 통해서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는 몇 성경절들을 살펴보자.
1.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요20:19).
이 성경절의 배경을 보면, 모임의 목적이 예배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여인들이 전한 부활의 사실도 의심한 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 곳에 모여 문을 닫고 숨어 있는 장면이다. 이 구절을 가지고 ‘안식 후 첫 날’이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해서 일요일 예배의 근거로 삼는 것은 성경을 너무 가볍게 해석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런 사건이 일어난지 몇십년 후에 기록되었다. 그런데도 일요일을 여전히 “안식후 첫날”이라고만 기록하여 그 날이 성일이 아님을 확인한다.
2.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20:7).
이 성경절도 역시 ‘안식 후 첫날’이라는 보통의 용어가 사용됐다. 떡을 뗐다는 내용도 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해가 지면서 하루가 시작되는 유대식 계산법을 사용하였다(레 23:32; 눅 23:54). ‘안식후 첫날’은 토요일 해가 지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배경은 이런 것이다. 사도 바울 일행이 드로아에서 한 주일을 머물고 이제 다음 날 떠날 예정이었다. 때는 토요일 저녁이었다. TEV(Todaty's English Version)에는 이 시간에 대하여 ‘토요일 저녁’(On Saturday evening)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 날 저녁은 송별회 시간이었고 밤중 집회가 계속되었으며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다가 창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바울이 살리는 사건도 있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떡을 떼는 일이 흔했다(행 2:46). 그러므로 이것도 일요일 예배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성경절이 아니다.
3.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16:1,2).
이 성경절에서 ‘연보’라는 말과 ‘매주일 첫날’이라는 말을 연결시켜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사용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으나 분명히 성경을 잘 못 보고 있는 것이다. 우선 여기에서 ‘연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이나 헌금과는 구분되는 구제금을 가리키는 것이다. 연보는 수집, 모금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로기아(logia)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헌금(헬라어 dora, 눅 21:1,4)이라는 말과는 달리 쓰여지고 있다. 이 성경절은, 당시 기근으로 인해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기 위한 구제금 모금에 관하여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제안하는 내용이다. 갈라디아 교회에 제안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매 주일 첫날 일해서 번 돈은 개인을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따로 저축해 두었다가 다 함께 모아서 구제금으로 보내자는 것이다. 오히려 일요일에는 평일처럼 일을 했었던 당시 시대적 상황을 알려 주고 있는 성경절이다.
4.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
우선, 신약 성경 어디에도 일요일 예배에 대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시록의 ‘주의 날’을 주일로 적용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한 해석이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때와 거의 동시대에 같은 저자가 기록한 요한복음 어디에도 일요일을 ‘주의 날’로 부른 예가 없다. 그러면 왜 사도 요한은 다른 곳에서 사용한 일이 없는 ‘주의 날’이라는 표현을 계시록에서 쓰고 있는가? 당시 로마의 황제 도미시안은 자신을 신격화하여 황제 예배를 강요하였으며, 이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다. 도미시안은 자기를 ‘주와 하나님’(lord and god)으로 칭하도록 했다. 그리고 황제가 어떤 도시를 방문하면 그 날은 공휴일이 되었으며 동시에 황제 예배일(Imperial day - 황제의 날)이 되었다. 요한은 이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서 주님(Lord)이 주인이 되는 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친히 주인이라고 선언한 날은 언제인가?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8).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1장 10절의 ‘주의 날’(Lord's day)은 오늘날의 주일(일요일)로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는 안식일을 말하는 것이다.
주일 예배에 대한 성경에 근거가 전무하기 때문에 주일 예배를 옹호하기 위하여 초기 교회 교부들의 문서가 종종 사용되기도 한다. 성경 자체가 지지하지 않는 주일 성수를 교부들의 편지서를 가지고 뒷받침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합당치 않은 일이긴 하지만, 굳이 그것이라도 사용한다면 다음호에서 그 문제에 대하여 비판을 하겠다.
■ 구원받은 백성들이 여전히 지켜야 하는 안식일
히브리서 4장 9절과 10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9절에 나오는 ‘안식할 때’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 싸바티스모스(σαββατισμος)로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신약에 한 번 나오는 합성어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10절에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라는 문장에서의 ‘안식’이라는 말은 카타파우시스(καταπαυσις)로서 궁극적인 쉼, 즉 구원을 뜻하는 것이다. 10절의 의미는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쉰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쉬셨는가? 히브리서 4장 4절에 그 대답이 명백하게 나와 있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하나님의 참 백성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제 칠일(안식일)에 자기 일을 쉬신 것처럼 제 칠일을 안식일로 쉬며 그 분께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임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교회 大논쟁6(97년 1월호)
--2300주야와 조사심판--
안식교의 조사심판 교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화잇이 만든 조작물이다
지난호의 글에 대한 반증
1. 조용기 목사 문제에 대하여.
이런 무익한 논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김대성 목사는 ‘이단’이란 말과 ‘사이비’란 말조차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김목사가 모르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예장 통합측에서 순복음교회를 사이비성이 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조용기 목사를 사이비성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런 중요한 논쟁에서 모르면 조용히 있는 것이 낫다. 그리고 이단이라고 한 번 규정하면 절대로 해제할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안식교가 이단인 점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다시 말해 둔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네가 악하다고 내가 선하다는 증거가 아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도 도덕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모순이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통합측의 조용기 목사에 대한 사이비성 결의와 해제는 신중하지 못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김대성 목사 자신은 그보다 더 신중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누가 주도했는지는 몰라도 안식교에서는 김대성 목사와 함께 <기독저널>의 이흥선 씨를 초청해 안식교가 이단이 아니라고 확인하는 집회를 했으니 말이다.
이흥선 씨는 처음에는 - 그렇게도 한국교회의 이단연구가 신중하지 못하다며 소위 ‘재검증’ 작업을 하던 중에 -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러다가 이제 안식교를 이단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데, 이러한 수준의 한 개인의 처사는 신중하고 통합측의 처사는 신중하지 못하다고 보는 안식교 측의 기준은 무엇인가? 통합측에서는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중하지 못하고 이흥선 씨는 안식교를 이단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신중한가?
안식교인들은 베뢰아 아카데미의 김기동 씨를 이단이라고 보는 줄 알고 있다. 그런데 이흥선 씨는 김기동 씨를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누구의 ‘잣대’가 옳은가? 이흥선 씨가 안식교를 이단이 아니라고 보는 그 자만 옳고, 김기동 씨를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 그 자는 틀렸는가? 이제 안식교는 이단을 보는 척도를 이흥선 씨의 자에 맡겨 김기동 씨도 이단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2. 화잇의 빗나간 예언들에 대하여.
필자는 화잇이 했던 예언 중에 빗나간 계시 몇 가지를 소개함으로 화잇이 거짓 선지자인 것을 증명했다. 이에 대하여 안식교측은 화잇의 원래 문장이 그렇지 않다고 변증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호에 안식교 측이 반증한 몇 가지 예언들에 관해 재반증을 하려고 한다. 이 문제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대성 목사는 참 선지자에 대한 성서적인 기준으로 ① 성경 말씀에 맞아야 하며, ② 말씀이 실제로 응해야 하며, ③ 생활에 있어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어야 하며, ④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인정해야 한다는 네 가지를 제시했는데 사실 필요충분한 기준을 제시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예언 성취 여부에 따라 거짓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다는 김대성 목사의 전제를 그대로 인정하며 본 논쟁을 시작하겠다. 필자가 볼 때는 김대성 목사의 변증은 오히려 화잇이 거짓 선지자임을 더 명확하게 밝혀 주었다고 본다. 먼저 김목사에게 부탁이 있다. 이 논쟁 후에도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을 하기 원한다면 그가 말하는 원문을 충분히 밝혀 주기 바란다.
1) 노예제도가 재림시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예언에 대하여.
화잇은 노예제도가 재림시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없어짐으로 화잇의 예언은 빗나가게 되었고 화잇은 거짓 선지자가 된 것이다. 필자가 이 부분에 대하여 비판하자 안식교 측에서는 화잇의 노예제도 예언에 대하여 “···반역을 일으킨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을 붙여서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더라도 화잇의 예언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화잇의 노예 제도에 대한 예언이 한 곳에만 기록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김목사의 말처럼 조건을 붙여서 예언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 화잇이 노예제도에 대하여 어떻게 예언하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다음의 글을 통하여 확인해 보자. 다음의 글은 안식교인들에게 현재도 널리 읽혀지고 있는 것으로 안식교의 출판사인 시조사가 번역 발행한 <화잇의 초기문집>이라는 책의 내용이다.
“나는 노예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무지 가운데 가두어 둔 노예들의 영혼들에 대하여 책임 져야 할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노예들의 죄악들이 주인에게 전가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지 가운데서 타락하여 하나님과 성경에 관하여 아는 바가 없으며 주인의 채찍밖에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짐승보다도 더 낮은 수준에 있는 노예들을 하늘에 들이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정심 많은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하실 것이다. 반면에 주인들은 마지막 일곱재앙을 만날 것이며 둘째 부활에 다시 일어나 고통을 받다가 마지막 비참한 죽음을 당하여야 할 것이다”(엘렌 지 화잇, 시조사, 초기문집 p.283).
이 글에서 화잇은 크리스천으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무서운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첫째 문제는, 무지한 노예는 하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반인과 달리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기가 막히는 점은 노예들의 죄는 주인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화잇의 주장은 노예에게는 부활도 천국도 없다는 말인데 무엇을 평가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점에 대하여 김목사는 대답해 주어야 할 것이다.
둘째 문제는, 이 예언대로 한다면 노예제도가 일곱 재앙이 내릴 때까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안식교에서 말하는 일곱 재앙은 말세의 재림 직전에 있을 계시록의 7재앙을 말하는 것인데 아직도 안식교에서 말하는 일곱 재앙은 내리지 않았다. 화잇은 이 예언에서 노예의 주인들이 일곱 재앙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으니 이 예언이 성취되려면 일곱 재앙이 내릴 때까지 노예의 주인들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노예 제도는 폐지되었고 당시의 노예의 주인들도 다 죽었으나 아직 일곱 재앙은 내리지 않았으니 화잇의 예언은 빗나간 것이다. 화잇은 어떤 조건을 붙여서 예언한 것이 아니다. 화잇은 노예제도가 재림시까지 갈 것이라는 확신 하에 그런 예언을 한 것이다. 그러니 김목사는 원문을 인용하여 이렇고 저렇고 하느니 차라리 ‘화잇의 말은 성경이 뭐라고 하던지 사실이 어떠하던지 상관없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2) 살아서 재림을 맞을 사람들에 대한 예언.
1856년에 안식교 대총회에서 화잇은 그 총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살아서 재림을 맞이할 사람들이 있다고 예언했다. 이 점은 김목사도 인정했다. 실질적으로 김목사는 그 예언이 틀렸다고 인정한 셈이다. 그런데 김목사는 두 가지 점을 들어 빗나간 예언이 아니라고 했다. 첫째는 화잇이 그 대표자들의 순종을 조건으로 한 예언을 했다는 점이요, 둘째는 재림은 미래적인 것이지만 현재적인 것이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바울도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이러니 화잇의 예언이 잘못되었다면 바울의 예언도 빗나간 것이냐고 반문하였다. 김목사의 말은 다음과 같이 잘못되었다.
첫째, 우선 대표자들의 순종을 조건으로 한 예언이란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잘못이다. 예수님의 재림이 대표자들의 순종과 불순종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말이 웬말인가? 몇몇 사람의 순종이 예수님의 재림을 결정한다는 말인가? 이런 사탄적인 소리도 있는가?
둘째, 몇몇 사람의 순종을 조건으로 한 예언이란 말과 바울의 재림론을 동시에 인용하여 화잇의 거짓 예언을 변증하는 것이 모순된다. 화잇의 예언이 바울의 재림론으로 합리화될 수 있다면 순종을 조건으로 재림이 결정된다는 말은 불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주 강림 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 4:15)는 말은 바울이 재림 때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다. 이 구절은 단지 재림을 고대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화잇의 예언은 자신이 재림을 고대한다는 말이 아니며, 계시 중에 이 총회에 있는 사람들 중에 더러는 일곱 재앙을 만나고 더러는 살아서 재림을 맞을 자가 있다는 계시였다.
그리고 김목사처럼 바울의 말을 화잇의 거짓 예언을 합리화하는 말로 인용한다면 시한부종말론도 잘못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밀러의 1844년의 재림주장은 잘못되었다고 하는가?
셋째, 화잇의 예언의 본래 뜻은 김목사가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화잇의 말을 인용해 보자. 김목사의 말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이 총회에 출석한 무리들을 보았다. 천사는 말하되 더러는 인내의 밤이 되고 더러는 마지막 일곱 재앙의 대상이 되고 더러는 살아서 지상에 남아 있어서 예수께서 오실 때에 변화하게 될 것이다”(MWHC. p.102).
화잇은 그 총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더러는 인내의 밤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인내의 밤이 되기도 전에 다 죽었고, 더러는 일곱 재앙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일곱 재앙이 내리기도 전에 다 죽었다. 또 살아서 재림을 맞아 변화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다 죽었다. 한 마디로 화잇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다. 재림이 연기되었다는 김목사의 말은 하나님께서 연기될 것을 모르셔서 화잇에게 잘못된 계시를 주셨다는 말이 되고 만다. 즉 하나님께서 실수를 하셨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3) 천체에 대한 계시.
화잇은 계시 가운데 목성과 토성, 천왕성 등을 보았는데 목성에서 네 개의 달들을 보았다고 했으며 토성에서 일곱 개의 달들을, 천왕성에서 여섯 개의 달들을보았고 토성에서 주민들을 보았는데 키가 크고 위엄있는 사람들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곱 개의 달을 가진 별(토성)에서 에녹을 보았다고 하였다(A Word to The little Fock p.22, The Great Second Advent Movement. pp.260-261). 그런데 최근의 천문학은 목성과 토성은 화잇이 본 것들보다 더 많은 달들을 가지고 있음을 발표하였다(목성은 12개, 토성은 10개로 밝혀졌다). 화잇은 당시의 미개한 천문학에서 배운 대로 계시를 보았던 것이다.
필자가 이러한 화잇의 계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거짓 선지자의, 사단의 계시가 분명하다고 비판하자 김목사는 이에 대하여 변증하기를 화잇이 계시를 볼 때 주위 사람들이 목성 또는 토성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지 화잇이 직접 별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김목사의 말에 의하면 화잇을 거짓 선지자로 만들기 위한 사람들이 화잇의 계시를 각색한 것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김목사의 말대로 화잇이 계시를 볼 때 옆에서 “이는 목성이다! 토성이다!”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바로 화잇의 남편이었던 화잇 장로였고 또 한 사람은 제1차 재림 총회 발기인이었고 안식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죠셉 베이츠(Joseph Bates)였다. 특히 화잇의 남편인 화잇 장로는 화잇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만일 이 사람들이 계시를 잘못 이해하고 말한 것이었다면 계시를 본 화잇이 바로 이를 수정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화잇의 승인을 얻었기에 공식으로 그 말을 발표했던 것이요 그에 대하여 화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잇의 남편이요 대변자격인 화잇 장로는 1847년에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지난해 11월 톱샴(Top sham)회의에서 엘렌(자기 부인 화잇을 의미함: 필자주)은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세계들에 관한 묵시를 보았다. 그는 여러 유성들에 가 보았는데 목성, 토성 그리고 또 하나에 갔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상으로부터 깨어난 후에 그는 각 별들의 위성에 대하여 명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A Word to The little Flock p.22).
또 1891년 1월 27일 현장의 목격자인 트루스데일(M. Truesdall)부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가 목성의 달들을 큰 목소리로 센 다음에 이어서 토성의 달들을 센 후에 토성의 허리띠(rings)의 아름다운 모양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그는 말하였다. ‘주민들은 키가 크고 위엄 있는 사람들로서 지구의 주민들과는 아주 다르다. 죄가 이곳에 들어온 일이 없었다’ 라고”(The Great Second Advent Movement. pp.260~261).
이와 같이 현장의 목격자이며 화잇의 대변자격인 사람들이 발표한 내용이 분명하기 때문에 비록 화잇이 직접 발표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화잇이 이를 정정하지 않은 것이다. 화잇이 이에 대하여 정정하지 않았던 만큼 이는 화잇의 말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만의 하나 자기 남편이나 트루스데일(M. Truesdall)부인이 화잇의 계시를 잘못 이해하였거나 잘못 발표한 것이라면 그가 마땅히 밝혔어야 했을 것이다. 잘못된 줄 알고도 수정하지 않았다면 화잇은 인격적으로도 거짓된 사람이란 말이요, 남편이기에 잘못을 시정하지 않았다면 인정이 하나님의 계시보다 앞선다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선지자보다 크다고 생각하는 화잇이 어떻게 잘못 전달된 계시를 그냥 두고 볼 수 있다는 말인가?
또 화잇은 자신의 말로 유성들(Planets)에 가 보았다고 하였다. 유성이란 태양계를 도는 천체를 말하는데 태양계에 네 개의 위성, 일곱 개의 위성을 가진 별이 있는가? 토성과 목성외에 무엇인가? 화잇의 유성 계시는 당시의 미개한 천문학에 근거하여 목성과 토성에 대한 것을 계시로 본 것임에 분명하다(미국 남북전쟁에 관한 화잇의 빗나간 예언에 대하여는 지면 관계로 다음에 비판할 것이다).
안식교의 조사심판 교리는 성경적인가?
조사심판 교리는 기성교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지만 안식교 교리의 기초요 큰 기둥이 되는 것으로서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안식교의 교리 중 가장 큰 성경적인 오류 중 하나는 소위 2천 3백 주야와 조사심판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조사심판 교리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1844년 10월 22일까지는 하늘 성소에 계시다가 그날에 드디어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셨고 그때부터 그곳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조사하고 계신다는 교리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들어보지도 못한 1844년 10월 22일인가? 그것은 1844년 10월 22일에 예수재림을 주장했던 밀러라는 사람의 시한부 재림 운동이 거짓임이 밝혀지자 실패한 그 재림 운동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화잇이 교묘히 만들어 낸 교리이기 때문이다. 이 교리를 주장하기 위한 성경 구절로는 다니엘서 8장 14절의 2천 3백 주야의 예언이다. 안식교는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2천 3백주야(일)를 2,300년으로 계산하고, 계산의 기산점을 주전 457년으로 잡고 거기에다 2,300년을 더하니까 소위 1844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식교의 핵심이 되는 2천 3백주야 문제 즉 조사심판 교리는 시한부종말론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부정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인가?
1. 연대 계산이 잘못되었다.
예언의 1일을 1년으로 계산하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오류이다. 안식교에서는 “예언의 하루라고 한 것은 1년을 상징한 것임을 알았다”(민 14:34, 겔 4:6)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오류이다. 예언의 1일을 1년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적 근거가 없다.
안식교는 민수기 13장 34절과 에스겔 4장 6절을 성경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으나 본문들의 내용은 예언의 1일을 1년으로 계산하라는 뜻이 아니다. 민수기 14장 34절은 이스라엘 정탐꾼이 땅을 탐지한 날수대로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할 것을 말한 것이지 예언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또 에스겔 4장 6절도 이스라엘이 범죄한 날수대로 에스겔 선지자가 1년을 1일로 계산하여 고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각성시키고 있지만 그것이 예언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라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성경의 어느 곳도 예언의 1일을 1년으로 계산하라고 언급한 곳이 없다.
2) 성경의 어느 예언도 1일을 1년으로 계산되어 성취된 것이 없다.
안식교의 주장대로라면 성경에 이미 성취된 예언들도 ‘1일=1년’으로 해석하는 원칙에 따라 1일이 1년으로 성취된 사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 예언의 모든 연대의 성취는 1일을 1년으로 성취된 사실이 없다.
실제 성경의 예언과 성취를 살펴보자. 홍수 직전의 7일간과 40일의 강우예언(창 7:4)은 1일을 1년으로하여 성취되지 않았고 실제 40일간의 홍수로 성취되었고, 아브라함 자손의 400년간의 유리표박 예언(창 15:13)에서도 1일을 1년으로하여 성취되지 않고, 떡 맡은 관원장,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의 3일간(창 40:12-20)의 예언도 실제 3일에 성취되었으며, 바로의 7년간의 기근 예언(창 41:25-31)도 1일은 1년이 아닌 7년간으로 성취되었으며, 70년간의 포로 기간의 예언도(렘 25:11) 실제 70년이었다.
성경의 어느 예언도 1일이 1년으로 계산되어 성취된 것이 없다. 누가 예언의 1일을 1년으로 해석하라고 했는가? 안식교의 모순을 살펴보자. 안식교는 다니엘서 4장 16절의 ‘일곱 때’의 예언은 7년으로 해석하면서 다니엘서 7장 25절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3년 반으로 계산하지 않고 1,260년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일곱 때도 2,520년으로 계산을 하던지 아니면 “한 때, 두 때, 반 때”를 3년 반으로 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 아니겠는가?
2. 기산점이 잘못되었다.
안식교는 2천 3백 주야와 70이레의 예언의 기산점을 에스라 7장의 아닥사스다 왕이 명령을 내린 기원전 457년으로 잡는다. 이것은 아닥사스다가 내린 명령(스 7, 457년)의 시기를 예루살렘 성전 중건의 역사 속에 다니엘 9장에 예언된 예루살렘 중건영의 시기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식교의 해석을 안식교 선지자 화잇 부인의 글을 통하여 먼저 확인해 본다.
“그러나 에스라 6장 14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바사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건축되었다고 하였다. 곧 최초로 조서를 내리고 다음에 이를 계승하고 또는 이를 완결한 세 왕으로 말미암아 성전이 낙성되었은즉 세 번째 조서를 내린 때로서 2천 3백 년의 기점을 삼는 것은 예언의 당연한 요구일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조서가 내린 서기전 457년을 기산점으로 잡는 때에는 70주일에 관한 예언에 포함된 모든 사건이 다 성취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화잇, 대쟁투 합본, p.366).
이와 같이 안식교는 세 번의 성전 건축영 중에 에스라 7장의 세 번째 아닥사스다의 건축영(기원전 457년)으로 성전이 완공되었으므로 2천 3백 주야의 기산점을 기원전 457년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A.D. 457년을 기준으로 하여 2천 3백주야에서 나온 2,300년을 더하여 1844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토록 중요한 2천 3백주야 문제가 그 기산점부터 잘못된 점을 살펴보자.
1) 예루살렘 성전은 서기전 516년에 완공되었다(스 6:15-18).
안식교의 선지자 화잇은 기원전 457년에 아닥사스다가 내린 영으로 성전이 낙성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의 성전중건 역사를 살펴보면 성전은 다리오왕 육 년 아달월 삼일(주전 516년)에 분명히 완공되었다(스 6:15-18). 즉 안식교가 말하는 성전 중건영이 내린 해인 기원전 457년보다 59년 전인 기원전 516년에 이미 성전은 완공된 것이다. 화잇의 명백한 오류이다.
2) 안식교가 말하는 예루살렘 중건영 에스라 7장 즉 아닥사스다의 조서는 예루살렘 중건영이 아니다.
안식교는 2천 3백 주야의 기산점을 에스라 7장의 아닥사스다의 영으로 주장하고 있다. 즉 이 명령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 중건영도 성읍 중건영도 결코 아니다. 누구든지 성전 건축령이라고 하는 에스라 7장을 읽어보라. 그 내용 자체가 성전 건축령(예루살렘 중건영)이 아님을 확일할 수 있다. 아닥사스다(주전 457년)의 조서는 성전 건축령이 아니고 이미 중건된 예루살렘에 돌아가도 좋다는 ‘귀환영’인 것이다. 예루살렘의 중건영은 에스라 1:1-4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의 예루살렘 중건의 역사를 살펴보면 안식교의 오류를 쉽게 알 수 있다. 예루살렘 중건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 기원전 536년 예루살렘 중건영(고레스 원년, 스 1:1).
◇ 기원전 535년 성전 건축 중단.
◇ 기원전 520년 재차 중건영(다리오 2년, 스 4:24, 6:11).
◇ 기원전 516년 성전 완공(다리오 6년, 스 6:15-18).
◇ 기원전 458년 에스라 귀환영(아닥사스다 7년, 스7:7).
◇ 기원전 445년 성벽 건축령(아닥사스다 20년, 느 2:1).
◇ 52일만에 완공(느 6:15).
사실 주전 516년에 이미 성전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안식교인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다 보면 화잇이 거짓 선지자가 되고 안식교의 모든 교리가 흔들리게 되니까 다음과 같은 임기응변적 변명을 하게 되었는데 살펴보자. 안식교의 학자인 신계훈 씨는 그의 안식교 변증서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하였다.
“기억할 것은 파괴된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건영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城)과 거리 등을 포함한 예루살렘 성읍의 재건영임을 본문에서 확인해야 한다”(신계훈,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p.406).
신계훈 씨는 안식교의 교리적인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재빨리 성전 건축령이 아니고 성읍 재건영이라고 변명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가 살아 생전에 현재의 안식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우필원 목사의 입장과도 같다. 이는 오히려 안식교의 모순된 교리를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안식교의 창시자인 화잇은 성읍이란 말은 아예 하지 않았으며 분명히 성전 건축령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다음 화잇의 주장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자.
“그러나 에스라서 6장 14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이(성읍이라고 하지 않았다: 필자 주) 「바사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건축되었다고 하였다. 곧 최초로 조서를 내리고 다음에 이를 계승하고 또는 이를 완결한 세 왕으로 말미암아 성전이 낙성되었은즉 세 번째 조서를 내린 때로서 2천 3백년의 기점을 삼는 것은 예언의 당연한 요구일 것이다”(화잇, 대쟁투 합본, p.366).
“성전의(역시 성읍이 아니다: 필자 주) 중건 봉사에 관한 칙령은 세 차례에 걸쳐서 내려졌다. 그러나 그 명령이 지시한 일은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이 반포되기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사실이므로 우리는 이 기간의 인정이 기원전 457년에 비롯한다는 것을 안다”(성서기초교리, p.208).
이와 같이 화잇이 성전이라 했으니 화잇을 인정하면 안식교의 변증자 신계훈 씨의 변증은 변증으로서의 가치가 없게 된다. 즉 안식교인에게 이렇게도 중요한 교리에서 화잇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게도 기성교인들을 미혹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신계훈 씨의 변증서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는 가짜가 된다. 그러나 반면에 만일 신계훈 씨의 주장을 인정하면 화잇 부인을 스스로 거짓 선지자로 만드는 것이 되고 만다. 안식교인들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에스라 7장의 조서 내용을 누구든지 직접 읽어보라. “거리 성읍 등을 포함한 성읍 재건영”이라는 흔적은 아무데도 없다.
3) 연대 기산점을 성전 건축령으로 해도 모순되고 성읍 재건영으로 해도 모순된다.
안식교 목사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데 누구의 주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김대성 목사도 어떤 주장을 할지 모르겠다. 안식교인들은 다니엘 9장의 예루살렘 중건영을 성전 건축영으로 보기도 하고, 성읍 재건영으로 보기도 한다. 필자가 안식교의 연대 기산점 기원전 457년의 모순을 지적하자 안식교 목사 신계훈 씨는 다니엘서의 예루살렘 중건영은 성전 건축령이 아니고 성읍 재건영이라고 주장했고, 고인이 된 우필원 목사도 같았다.
그러나 같은 안식교의 목사인 김상래 씨는 또 위의 사람들과는 달리 성전이나 성읍 재건영이 아니고 성전과 성읍 재건영이 포함된 것이어야 한다는, 전에는 화잇에게서도, 신계훈 씨에게서도, 우필원 씨에게서도 전혀 들어보지 못한 말을 했다. 김상래 씨의 말을 들어보자.
“위에서 살핀 것을 요약하면 이 ‘예루살렘 중건영’은 ‘예루살렘 회복과 건축령’이 된다. 그러면 이 ‘예루살렘’의 범위는 어떻게 되는가? 성전만인가? 성읍만인가? 이것은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파괴될 때의 상태를 살펴보면 그 범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파괴된 것을 회복하고 건축하라 했으니 무엇이 파괴된지를 알면 그 범위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열왕기하 25장 8-1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으며 빈천한 국민을 그 땅에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이 때 파괴된 것은 ‘성전, 왕궁, 성읍’ 등 모든 예루살렘 도성내 건축물뿐 아니라 그 국민의 자치권마저 파괴된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중건영’은 이 파괴된 모든 것을 포함하여 ‘성전, 성읍, 왕궁, 자치권’이 모두 ‘회복되고 재건되는 영’이어야 한다”(김상래, 또 기록되었으되, p.199).
그런데 또 화잇의 이론을 따라 쓰여지고 안식교 한국연합회에서 발행한 <성서기초교리>에서는 분명히 성전 중건영이라고 주장하였다.
“성전의 중건과 봉사에 관한 칙령은 세 차례에 걸쳐서 내렸다. 그러나 그 명령이 지시한 일은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이 반포되기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사실이므로 우리는 이 기간의 인정이 기원전 457년에 비롯한다는 것을 안다”(성서기초교리, p.208).
이와 같이 같은 안식교 안에서도 각기 다른 주장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러면 과연 안식교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안식교가 말하는 예루살렘 중건영은 성전에 대한 것인가, 성읍에 대한 것인가? 그토록 중요한 교리에 왜 이토록 각기 다른 주장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누구의 주장에 초점을 맞추어 비판해야 할까? 그것은 당연히 안식교 선지자 화잇의 주장에 맞추어야 할 것이다. 화잇의 주장은 또다시 살피더라도 분명히 성전을 말하고 있다.
“에스라서 제7장에 이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곧 서기전 457년에 바사왕 아닥사스다로 말미암아 포고된 조서는 그 가장 현저한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서 제6장 14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바사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건축되었다고 하였다. 곧 최초로 조서를 내리고 다음에 이를 계승하고 또는 이를 완결한 세 왕으로 말미암아 성전이 낙성되었은즉 세째번 조서를 내릴 때로써 2천 3백년의 기점을 삼는 것은 예언의 당연한 요구일 것이다”(화잇, 대쟁투 합본 p.366).
이와 같이 화잇은 분명히 성전 건축령이라고 말했고, 화잇이 인용한 에스라서 6장 14절의 본문 자체가 기원전 516년의 성전 봉헌식에 성전 건축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3. 1844년과 조사심판 교리가 잘못되었다.
안식교는 2천 3백 주야의 예언의 끝을 1844년으로 해석하여 그때부터 조사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때에야 비로소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성소 봉사 즉 조사심판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안식교는 “이 해는 곧 주후 1844년이니 하늘 성소가 깨끗하여 지기 시작한 해이다. 예수께서 1844년에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사 조사심판을 시작하셨다”고 하였다.
안식교의 이 교리를 두 가지로 정리한다면, 첫째는 예수께서 1844년까지 하늘 성전의 성소에 계시다가 1844년에야 지성소에 들어가셨다는 것이며, 둘째는 1844년 이후 예수께서는 하늘의 지성소에서 성도들의 죄를 일일이 조사하는 조사심판을 하시는 중이라는 것이다. 기성교인들에게는 생소한 이 교리가 안식교의 기둥같은 교리인 것이다. 이 교리의 오류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로 반증해 보자.
첫째, 이 교리는 성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 화잇의 환상에 근거하였다.
이 교리는 2천 3백 주야의 잘못된 해석과 화잇의 환상에 근거하여 주장되는 교리로서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신구약 성경을 망라하여도 1844년에 예수께서 지성소에 들어가셨다는 말이나 조사심판이라는 말은 한 군데도 없다. 다만 화잇이 만들어낸 교리일 뿐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 즉시 지성소에 들어가셨다.
안식교는 1844년에 예수께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하나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1844년에 지성소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승천 즉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다고 명백히 기록되었다. 살펴보자.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20).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이 본문에 나오는 성소는 지성소를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다. 그 이유는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이미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래서 <현대어 성경>에서는 지정소라고 번역하였다. 성경은 이렇게 분명하게 예수께서 승천 즉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셨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2300주야와 조사 심판
j-5
지난호 <교회와신앙>측 글에 대한 소견
토론이나 논쟁이라고 하는 것은 피차간에 별 소득이 없는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였지만, 그래도 이번만은 성경을 중심으로 목사들이 하는 지상 토론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대감을 가지고 출발하였으나 역시 토론은 토론임을 깨닫게 된다. “목소리가 고조되었다”는 말에 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나, 성경절을 가지고 분명하게 설명해놓은 부분은 제쳐두고, 설명을 위해서 덧붙인 말을 가지고 비평하는 형식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매월 주제에 대하여 충분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여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교측은 사람들의 견해를 더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하는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설명은 이미 9월호 지면에 충분히 제시되었다. 11월호에서 월터 말틴의 말을 인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미 소개된 대로 월터 말틴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적 종교학자이다. 그는 안식일교회의 교리를 장기간에 걸쳐 매우 깊이 연구하였으며, 안식일교리, 영혼문제, 2300주야 등 여러 문제에 대하여 신랄한 비평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의 최종적인 결론은, 안식일교회가 일반 개신교들과 교리상 차이점들이 있기는 하나 정통 기독교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이다.
본 지상 토론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모든 증거 자료들을 제시하겠지만, 대다수 저명한 학자들의 견해나 세계적인 조류는 안식일교회를 결코 이단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와신앙>측에서는 소수 학자의 견해와 그릇된 정보에 기초한 단편적인 연구를 통하여 내린 결론을 좀처럼 고치려들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쉬운 일도 아니고 기대하는 바도 아니지만, 장로교 통합측은 세계적인 분위기와 흐름을 분명하게 파악해 보기를 바란다.
분명한 답변을 기대하는 질문들
1. 안식일이 폐지된 것인가? 안식일은 살아있으나 요일만 변경된 것인가?
<교회와신앙>측은 11월호에서 안식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구약에서는 중요하게 지켜졌지만 신약에서는 폐한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 준수는 더 이상 강조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 교리의 근본이 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항 7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일정한 시간을 정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합당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적극적이고 도덕적이고, 영구적인 명령을 발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히 이레 중 하루를 안식일로 택정하여 하나님께 거룩하게 지키게 하셨다. 그 날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는, 한 주간의 첫째날로 바뀌어졌다. 성경에는 이 날이 주의 날(主日)로 불리워져 있다. 이 날은 세상 끝날까지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부가되어 있다.
“만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율법주의적이라고 한다면, 즉 모세 시대만을 위해서 제정된 의식적(儀式的)인 명령이라고 한다면, 모세 시대 이전의 안식일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게 되며, 첫째, 둘째, 여섯째, 그리고 기타의 계명들 또한 의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 남은 계명들은 분명히 의식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넷째 계명만을 의식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골든 H. 클락 지음, 나용화 옮김, 장로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1990년판, 262쪽>.
이 상반되는 두 내용 중 어느 것이 장로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인지를 밝혀주기 바란다. 그리고 안식일이 폐지되었다면, 십계명이 모두 폐지된 것인지 안식일 계명만 폐지된 것인지도 분명히 밝혀주기 바란다.
2. 일요일 예배의 기원을 좀더 확실하게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밝혀주기를 바란다.
<교회와신앙>측은, 주일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발적인 부활의 기념일이며 예배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매우 애매한 주장이다. 일요일을 주일로 옹호하는 대표적인 현대 신학자 주이트(Jewett)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첫날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가는 아직도 문제로 남아 있다. … 모든 학자들은 한 가지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첫 날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부활의 기념일로 축하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일요일을 지키는 것은 부활 사건에다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발생과정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용이하지 않다. 옛부터 인정되고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일요일 예배와 관습이 그 정확한 기원에 대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폴 주이트, 주일의 참 뜻, 옥한음 역, 36>
이 ‘이상한 일’에 대한 확실한 답변이 있기를 바란다.
3. 다니엘 8장과 9장의 2300주야를 장로교회측에서는 어땋게 해석하는가?
이번호에서 <교회와신앙>측은 안식일교회의 2300주야와 조사심판에 대하여 비평을 할 것이다. 집을 짓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남이 지어논 집에 들어가 흠를 잡기는 매우 쉬운 일이다. 이번호에서 2300주야에 대한 장로교회의 공식적인 해석이 함께 다루어지기를 기대하나, 혹시 그렇지 못하면 다음호에서 꼭 다루어 줄 것을 당부한다. 상대방의 해석이 틀리다면 바른 해석을 제시해야 마땅한 것이다.
2300주야란 무엇인가?
구약성경 다니엘서에는 많은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다. 2장에서는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꿈에서 본 신상을 통하여 세속적인 인간 나라의 역사가 끝나고 돌나라(하나님의 나라)로 종결되는 인류의 역사를 예언하고 있다(2:44). 다니엘 7장에서는 네 짐승과 열뿔, 그리고 작은 뿔의 상징을 통하여 교회와 관련된 세계 역사와 함께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정체를 밝히면서, 그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날 것을 밝히고 있다(7:26, 27). 그리고 8장에서는 작은 뿔이 하는 일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 작은 뿔, 즉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조직적으로 훼방하고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혼란케 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 계시 중에 다니엘은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듣게 된다.
“내가 들은즉 거룩한 자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자가 그 말하는 자에게 묻되 이상에 나타난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때까지 이를꼬 하매”(단 8:13).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다니엘 8장 14절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
성경은 다시 “이 이상(異像)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단 8:17)고 말한다. 정리하자면, 2300주야에 대한 이상은, 이 세상 역사의 끝에 전개될 하나님의 심판과 적그리스도의 세력의 멸망에 관한 것이다.
2300주야 해석
다니엘은 이 이상을 본 후에 수일을 앓았고, 다시 금식 기도를 하던 중, 2300주야에 관한 예언의 세부적인 면들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1. 2300주야의 실제적 기간은 얼마인가?
2300주야(晝夜)는 2300일(日)을 나타낸다. 그러면 묵시 가운데 나타난 2300일은 실제 역사적 기간에서는 얼마나 되는가?
성경에는 예언에 나타난 역사적 기간을 산출하는데 있어서 1일을 1년으로 환산하는 원칙이 있다. 민수기 14장 34절에는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 40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라는 언급이 있고, 에스겔 4장 6절에서는 “내가 네게 사십일로 정하였나니 일일이 일년이”라고 하였다. 물론 성경의 모든 하루를 1년으로 하라는 말은 아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역사적 서술” 부분이 있고 “상징적 예언” 부분이 있다. 심지어는 다니엘서와 같은 예언서에도 그러한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에 대하여 “3년을 기르게 하였”(단 1:5)다든가 또 그들의 식생활을 “열흘 동안 시험”(단 1:12)한 일이라든가 느브갓네살 왕이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단 4:16)를 지나겠다는 것은 역사적 서술 부분이므로 그러한 날들을 1년으로 환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2300주야에 대한 것은 “상징적 예언”에 속하는 부분이므로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성소정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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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0주야(=2300년)
성경에 기초한 이러한 계산법은 안식일교회에서만 사용하는 원칙이 아니라, 성경의 예언들을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대부분 학자들이 사용하는 보편적인 원칙이다. 안식일교회의 예언 해석을 비평하는 사람들이 종종 사용하는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다니엘서 9장 27절의 “한 이레(7일) 동안의 언약”이라는 말을 “7년 계약”이라는 말로 번역해 놓았다.
그러므로, 2300주야라는 기간은 실제 역사에는 2300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2. 2300주야는 언제 시작되는가?
“2300주야 까지니”라는 말에는 반드시 그 시작점을 말하는 “부터”가 나와야 해석의 실마리가 잡히는 것이다.
다니엘 9장 24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2300주야 기간 중에 유대인을 위한 기간이 70이레로 정해졌다.
2300주야(=2300년)
70이레(490년)
▷- - - - 유대인을 위한 기간 - - -◁
어떤 사람들은 그 70이레와 2300주야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다니엘에게 전하기 위하여 내려온 가브리엘이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단 9:23)고 말한 것을 보아, 분명히 직전에 보았던 2300주야에 관한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면 2300주야의 시작점이 될 유대인을 위한 기간은 언제 시작되는가?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9:25).
유대인을 위한 기간, 즉 2300주야의 시작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1) 예루살렘 중건 명령은 언제 내려졌는가?
구약 성경 에스라를 보면,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다음과 같이 세 번 내려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 보완 관계에 있음 을 보게 된다.
① 주전 537년 : 고레스의 조서(에스라 1:1~4; 5:13; 6:3; 역대하 36: 22, 23).
② 주전 520년 : 다리오의 조서(에스라 6:1,8~11).
③ 주전 457년 : 아닥사스다의 조서(에스라 7:7~26).
위의 세 가지 조서 중에서 어느 것이 다니엘 9장 25절에 해당하는 중건 명령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위의 명령은 예루살렘 성전 중건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 전체를 중건하는 일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중건령이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위하여 정해 주신 기간이므로 유대인들에게 행정적 자치권이 부여된 이후라야 하는 것이다.
① 고레스가 조서를 내렸을 당시 스룹바벨과 세스바살의 인도로 유대인들 42000여 명이 귀환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예언한 70년간의 포로 생활이 일단 끝난 것이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우선 성전 건축에 착수했으나 사마리아인과 주변 이방인들의 방해로 완성을 보지 못했다.
② 다리오 Ⅰ세(522~486 BC)의 조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에 의해 고레스의 조서를 확인한 후(스 6:1~12) 공사 재개를 위해 조서를 내린 것이다. 그리하여 주전 516년에 중건 공사를 끝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예루살렘 성 전체를 복구하는 일이나 정치, 행정, 종교의 완전한 자치권은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③ 아닥사스다(465~423 BC)의 조서(스 7:17, 12~26)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행정적 자치권을 부여하는 명령이었으며, 이로부터 유대 민족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신정 체제의 자치(自治)를 실시하게 되었다. 신앙과 정치의 회복을 이루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귀환령과 함께 돌아온 에스라와 그 일행은 성읍을 건축하고 지대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는 일을 계속하여 성전이 아닌 성읍 재건을 마무리하게 된다(스 4:12, 13 참조).
그렇다면, 유대인을 위한 70이레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는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은 주전 457년 아닥사스다가 내린 조서에 의한 것임이 확실하다.
3.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의 출현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단 9:25).
2300주야(=2300년)
70이레(490년)
▲
457BC 예루살렘 중건령
70이레(=490년)
7 이레(49년)
62 이레(434년)
1 이레(7년)
457BC 408BC 27AD(메시야 출현)
주전 457년으로부터 일곱 이레(49년)가 지나면 주전 408년이 되고, 408년에서 다시 62이레(434년)가 지나면, 주후 27년이 된다.
▶ 질문1 : 434년에서 408년을 빼면 26년이 되는 것이 아닌가?
▶ 대답1 : 수자에는 영(0)이 있기 때문에 직접 빼면 정답이 나오지만, 연대에는 영(0)년이 없기 때문에 뺀 후에 1을 더해 주어야 정답이 나오게 된다.
▶ 질문2 : 그러면 주후 27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가 일어났는가?
▶ 대답2 : 예수께서 만 30세 되시던 해인 주후 27년에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강림하시어,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로서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셨다.
▶ 질문3 : 예수의 탄생으로 서력 기원이 시작되었다면, 예수님의 나이가 만 30이 되는 해는 서기 31년이 되어야 하는데 왜 27년이며 4년의 차이는 무엇인가?
▶ 대답3 : 서력기원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즉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나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로마의 건국 연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예수님 탄생 이후 약 520년이 지난 후, 엑시구스라는 학자가 매년 돌아오는 부활절 축제일 날자를 미리 계산하다가, 예수님 탄생을 1년으로 하면 편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예수 탄생을 기원으로 하는 연대가 만들어졌는데, 예수의 탄생을 로마건국 연대 754년으로 보고 그 해를 서기 1년으로 시작한 것이다. 약 700여 년이 지난 서기 1200년경 로저 베이컨이라는 학자가 도서관에서 옛 역사를 연구하던 중, 예수님 당시 헤롯 왕이 로마 건국 연대로 750년에 죽은 기록을 발견하였다. 그렇다면, 예수 탄생은 로마 건국 754년이 아니라 750년이 되는 것이고, 그 동안 사용하던 역사적 연대에 4년의 차질이 생겨 매우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연대를 그대로 두고 예수의 탄생을 주전 4년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주전 4년에 탄생했다면 서기 27년에 만 30세가 되는 것이므로, 2300주야 기간 중에 포함된 메시야의 출현 예언은 매우 정확한 성취를 이룬 것이다.
4. 메시야의 죽음과 예루살렘의 멸망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 9:26).
유대인을 위하여 정해진 70이레 중에 7이레와 62이레, 즉 69이레가 지난 후에는 그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고, 예루살렘 성(城)도 멸망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면 그 메시야의 죽음은 언제 있을 것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까지 지상의 성소에서는 수많은 제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짐승들의 희생과 죽음이 있었다. 그 제사와 예물이 언제 끝이 났는가?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단 9:27).
위의 성경절에서 ‘그’가 누구인가? 이전 성경절 중에서 나온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인칭 대명사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거나 “한 왕의 백성”일 것이다. “한 왕의 백성”이라는 말 에서 주체는 “백성”이지 “한 왕”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백성’을 받는 대명사일 수가 없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그 이레(한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다는 것은 무슨 뚯인가? 우선 70이레 중에서 남아 있던 한 이레의 절반이 언제인지 아래의 도표를 살펴보자.
70이레(=490년)
7 이레(49년)
62 이레(434년)
1 이레(7년)
457BC 408BC 27AD 31 34
나머지 한 이레의 절반에 해당하는 시간은 서기 31년이다. 서기 27년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메시야로서 사역을 시작하신지 3년 반이 되는 서기 31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때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제사를 계속 드려오던 성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마 27:50, 51).
예수께서 운명하시던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다. 성소 제도와 제사가 끝난 것이다. 더 이상 예물을 가져올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한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에물을 금지”할 것이라는 예언이 정확히 성취된 것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한 이레”를 따로 떼어서 지상 역사의 마지막에 두고 휴거로 시작되는 전 3년반 환란과 후 3년 반 환란 기간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우선 연속되는 기간 70이레 중에서 한 이레를 따로 떼어서 아무 성경적 근거도 없이 멀리 밀어낸 것도 문제이며, 1일 1년 원칙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그 한 이레(7일)를 7년으로 계산하는 것도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유대인을 위해서 따로 정해진 70이레는 어떻게 끝이 났는가? 위의 도표를 보면 70이레는 서기 34년에 끝이 난다. 서기 34년에 어떤 일이 있었으며 그것이 70이레의 종결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사도행전 7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경건한 집사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순교 사건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된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 8:1, 4).
서기 34년에 있었던 스데반 순교 사건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넘어 다른 민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육적 이스라엘을 위해 정해진 70이레 기간(490년)은 끝이 나고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후 서기 70년 로마의 타이터스 장군과 그 군대들에 의해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되고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1948년 독립하기까지 길고도 고달픈 유랑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2300주야의 종결과 성소정결의 의미
그러면, 예루살렘 중건령과 함께 시작된 2300주야(년)는 언제 마쳐지는가? 이미 언급한 대로 영(0)년이 없는 연대 계산법에 따르면, 주전 457년에 시작된 2300주야는 주후 1844년에 마쳐지게 된다(2300-457+1=1844).
2300주야(=2300년)
70이레(490년)
457BC 유대인을 위한 기간 34AD 1844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다니엘 8장 14절의 말씀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 2300주야가 끝나면 “성소가 정결하게” 되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의미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구약의 성소제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제한된 지면에 성소 문제를 충분히 다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기본적인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매일 드리는 제사 - 성소의 주요 기능은 제사이다. 제사는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또 한 가지는 해마다 드리는 제사이다. 매일 드리는 제사는 제사장이 날마다 정한 시간에 드리는 상번제와 백성들이 속죄를 위해서 드리는 번제들이 있다.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레 6:12, 13).
제사를 드릴 때에는 제물을 태우는 일과 함께 제물의 피를 받아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에 피를 뿌리는 의식을 행하게 된다. 사실상, 속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레 4:4, 14, 15, 24, 29) 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성소의 장(帳) 앞에 일곱 번을 뿌리”(레 4:5-7, 16-18, 25)는 의식을 거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의 휘장은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뿌려지는 피 때문에 항상 더럽혀져 있는 것이다.
2. 해마다 드리는 제사 - 이와 같이 더럽혀진 상태를 1년에 한 번씩 정결케하는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년에 1차 드리는 제사이다.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며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이는 너희의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년 일차 속죄할 것이니라”(레 16:33, 34).
일년 일차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날은 7월 10일 대속죄일이다. 이 날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1년간 성소로 옮겨진 온 이스라엘의 부정과 지성소와 회막과 번제단을 정결케하는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레 16:16~19).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회개하지 않은 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려내어(심판하여) 진밖에서 돌로 쳐 죽임으로 백성 중에서 끊어버리는 일을 하였다.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부정한 자들을 가려내는 일을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2300주야가 마쳐지면서 성소가 정결하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조사 심판의 의미와 시작
2300주야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성경에도 없는 「조사 심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부터 문제를 삼는다. 그런 논리로 하면, 「삼위일체」라는 말이나 「칭의」라는 말이나 다 성경에 직접 언급된 용어가 아니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용어는 성경의 개념을 정리하여 만든 성서적 단어들이기 때문에 용어 자체를 가지고 문제를 삼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조사심판」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양과 염소, 혹은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는 성경에 나타난 심판의 개념을 하나의 단어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용어를 「재림전 심판」이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심판 개념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①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므로 모든 것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며 행한대로 갚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② 심판의 시기가 정해져 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행 17:31).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계 14: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
그리스도의 성소 사역과 조사 심판
2300주야가 종결되면서 시작되는 조사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있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욥 34:23)기 때문에 심판에 긴 시간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성소 정결이 이루어진 1844년 이후로는 언제라도 예수께서 재림하실 수 있는 시기이며, 지금의 이 시기는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유예 기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조사 심판 개념은 성소 제도와 직결되어 있다. 성소에는 죄인이 어떻게 죄를 해결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서 함께 살게 되는지에 관한 인간 구속의 원리가 명백히 나타나 있다. 그리고 지상 성소의 제사장의 봉사를 통해서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찾아낼 수 있다.
지상 성소에 있어서 제사장의 봉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뜰에서의 번제단 봉사와 성소에서의 중보 사업, 그리고 지성소의 심판의 국면을 들 수 있다.
하나의 모형으로 진행되던 성소 봉사는 성소의 실체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실제적인 국면이 전개된다.
① 예수님의 뜰(번제단) 봉사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② 예수님의 성소 봉사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 12).
③ 예수님의 지성소 봉사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단 8:14).
이미 언급한 대로 성소의 정결은 지성소 봉사, 즉 심판의 국면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구속 사업을 위하여 마련된 성소의 원형, 즉 하늘 성소에서 지성소의 봉사를 수행하고 계시며, 조만간 지성소 봉사를 마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데려가시기 위해 재림하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1~13).
안식일교회 大논쟁7(97년 2월호)
--영혼불멸과 영혼멸절--
안식교의 내세관(來世觀)은
여호와의 증인의 것과 유사하다
지난 호들의 글에 대하여
A. 형식적인 측면에서
논쟁이 여러 번 진행되었다. 주의를 환기시키는 의미에서 형식적인 측면 몇 가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1. 김대성 목사는 고증(考證)을 선명하고 친절하게 하지 않고 있다
김대성 목사의 글을 보면 자신의 주장의 근거가 기록되지 않은 곳이 많고, 있어도 그것이 안식교 학자의 책에서 인용한 것인지, 아니면 일반 역사에서 가져온 것인지, 기성교회 학자의 주장인지 선명하지 않다. 그리고 중요한 주장에 대하여 너무 짧게 인용하고 있어서 의미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것을 선명하게 밝혀주어야 그것이 입장의 차이인지, 아니면 자료의 문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건인 르네상스에 대한 기독교적인 입장과 일반 학자의 입장은 전혀 다르지 않던가?
본 논쟁에서 실예를 몇 가지만 들겠다. 김목사는 96년 11월 호에서 마틴과 훼크마의 논쟁 중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을 인용하면서도(125쪽) 어디에 기록된 내용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12월호 “비성서적 일요일(주일)예배, 그 기원과 역사”라는 글에서는 더욱 그렇다. 초대교회 교부들이 “유대인과의 차별화를 위해서는 구약의 하나님 대신 신약의 하나님을 강조하며 이교도와의 동질화를 위해서는 안식일 대신 당시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들의 예배일인 일요일 예배를 교회에 도입하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152쪽). 그런데 이렇게도 중요한 말에 어떤 교부가 언제 어디에서 그런 해괴한 소리를 했으며, 그리고 그 기록은 어떤 책에 있는 내용인지 밝히지 않았다. 필자가 알고 있기에는 교부들이, 이교도들이 태양신을 섬기고 있기에 태양을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고 태양신을 섬기는 미트라의 축제일인 12월 25일을 일부러 예수님의 탄생일로 만든 것이라는 일반인의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런 해괴망측한 글을 인용하면서 고증도 없는 글을 사용해 사람들을 적당히 미혹하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일반 학자의 잘못된 견해 내지는 안식교 학자가 지어낸 조작품일 것으로 사료된다. 다음 호에서 밝혀주기 바란다.
또한 콘스탄틴 황제가 321년 3월 7일에 태양신을 섬기는 날로서 일요일을 휴업하도록 명령했다고 고증을 들었는데 그 근거도 밝히지 않았다(153쪽). 실수인지, 김목사의 상습인지, 아니면 머리 속에서 나온 작문인지 알 수가 없다.
2. 자신들의 교리로 비판해도 된다고 말한 공식문서는 소위 <기본교리 27>(시조사 발행)이란 책인데 자신은 그 책을 중심해서 변증하지 않고 있다
안식교 목사들은(김대성 목사를 포함해서) 기성교회에서 자신들의 교리적인 잘못을 비판할 때마다 한 말이 있다. 다른 책으로 하지 말고 자신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책, 즉 <기본교리 27>을 근거로 해서 비판해 달라는 것이다. 장로교 교리를 일개 장로교인이 쓴 어떤 책을 근거로 해서 비판하면 되겠느냐고 역공을 한 자들이 안식교인들이었다. 심지어 화잇의 글도 안식교의 교리를 비판할 공식적인 자료가 아니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대성 목사는 지금까지의 논쟁에서 <기본교리 27>를 한 번도 인용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전호의 조사심판 교리에서도 <기본교리 27>에 의하면, 다니엘서 9장 25절에서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라고 해 놓고 그것이 예루살렘 성전 중건영인지, 예루살렘 성읍 중건영인지, 그것도 중건영이 내려진 때인지, 완성된 때인지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김대성 목사는 이 교리서에 대해서는 하나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니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
3. 아직도 자신들이 옳아서 이단이 아니란 말인지, 필자가 자신들을 몰라서 이단이 아니란 말인지, 기성교회 기준으로도 이단이 아니란 말인지 도무지 선명하지 않다
김대성 목사의 글을 읽어 보면, 그는 본 논쟁의 초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이 논쟁은 안식교가 이단이냐 아니냐는 것을 따지는 장이다. 기성교회에서는 안식교가 이단이란 것이요, 안식교에서는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식교는 기성교회를 음녀라고 하고 있고, 기성교회는 안식교를 이단이라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식교 편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길외에 논쟁의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즉 자신들이 옳아서 이단이 아니라든지, 또는 상대방이 이해를 잘못해서 이단이 아니라든지, 아니면 이해도 바르게 했고 자신들과 기성교회가 다른 점도 사실이지만 기성교회의 교리적인 기준에 의해서도 이단이 될 차이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김목사의 글에는 이 점이 언제나 선명하지 않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세 가지 입장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어떻게든지 기성교회로부터 이단이 아니라는 말만 듣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래야 효과적으로 기성교인들을 미혹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B. 내용적인 측면에서
1. 화잇의 거짓 계시에 대하여
지난 호에 부족감이 있어 화잇의 거짓 계시 몇 가지를 더 밝히고 싶다.
1) 링컨의 남북 전쟁에 대한 예언
화잇은 링컨이 남북 전쟁에서 패배할 것에 대해서 예언을 하였다. 필자가 화잇의 이러한 빗나간 예언에 대하여 비판하자 김목사는 영문 <교회증언> 1권 259쪽의 문장을 인용하여 변증하였다. 그러나 이는 단편적인 문장 하나를 소개한 것으로 화잇이 말한 예언은 그런 것이 아니다. 먼저 이에 대한 화잇의 예언들을 살펴보자.
“나는 하나님의 백성 곧 그의 특수한 보배인 그들이 이 혼란한 전쟁에 관여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 대개 이 전쟁은 모든 점에 있어서 그들의 신앙과 반대되는 까닭이다”(영문 교회증언 1권 361쪽).
“영국이 선전 포고를 할 때에는 모든 국가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하여 참가할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 전쟁(General Confusion)이 일어날 것이다”(위의 책 259쪽). “전쟁은 승리로 인도하기는 불가능 한 것같이 보인다”(위의 책 256쪽).
“우리 민족이 연합해 있었더라면 강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분리하였으니 그는 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위의 책 260쪽).
이와 같은 화잇의 예언과는 달리 링컨은 그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영국은 선전포고를 하지도 않았으며, 전체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고, 미국은 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왕성하여 세계 최대 강국이 되었으니 화잇의 예언은 완전히 빗나가 성취되지 않았다.
화잇의 잘못된 계시를 하나 더 소개하여 화잇이 사기 예언가였음을 선명히 하고 싶다.
2) 돼지고기에 대한 화잇의 계시
안식교는 레위기 11장에 있는 부정한 음식을 철저히 금하고 있다. 부정한 음식을 금하는 교리도 역시 화잇의 계시에 의하여 주장된 것이다. 특히 안식교인들이 금하는 부정한 음식의 대표적인 것은 돼지고기이다. 화잇은 돼지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받은 계시가 있었다. 그것을 살펴보자.
안식교는 처음부터 부정한 음식을 금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안식교인들도 부정한 음식들을 먹었고 화잇도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말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1859년에 안식교 내에 돼지고기를 금해야 한다는 A씨 부부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화잇은 계시를 받고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즉 “나는 그대들이 자양분 있는 식물을 섭취하기를 거절함으로써 그대들의 몸을 괴롭히는 일에 관하여 그대들이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영문 교회증언 1권 205쪽)고 하였다. 즉 화잇은 자양분 있는 돼지고기를 금하는 것이 그릇된 관념이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말이다. 화잇이 선지자이며 위의 계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안식교인들이 자양분 있는 돼지고기를 금하는 것은 그릇된 관념임에 분명하다.
화잇은 돼지고기에 대하여 그가 받은 계시를 계속해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음식에 관하여 극단적으로 가고 있다”, “나는 돼지고기에 관한 그대들의 견해가 이를 그대들 자신에만 적용한다면 손상되지 않을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대들의 판단과 의견에 의하여 그대들은 이 문제로써 (믿음의) 표준을 삼았다”(위의 책 206~207쪽)고 하였다. 즉 화잇의 계시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교리를 믿음의 표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안식교가 화잇을 선지자이며 그의 계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돼지고기를 금하는 교리를 믿음의 표준으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안식교인들은 대부분 돼지고기 문제에 있어서 화잇이 이런 계시를 말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과연 먹어라는 교리인가, 먹지 말라는 교리인가?
2. 토요일 안식일 문제에 대하여
필자 편에서 볼 때 김대성 목사가 토요일 안식일이 옳다고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기성교회의 주일개념이 정리되지 않았다, 둘째, 역사적으로 태양신을 섬기는 날로 주일을 삼았다, 셋째, 성경에 주일을 지키라는 근거가 없고 오히려 신약 성경에서도(히 4:9 등)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씩 변증해 보자.
1) 기성교회의 주일개념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
분명히 안식교인들이 제일로 자신 있어 하는 부분이 이 점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시 더 많은 지면과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논쟁할 필요를 느낀다. 필자가 보기에는 넓은 의미에서 율법의 완성과 폐해짐의 문제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점으로 보인다.
기성교회의 주일개념이 정리되지 않았다고 하는 안식교측의 지적 중에 맞는 말이 있다. 기성교회 교인들 중에는 구약의 안식일이 아예 주일인줄로 아는 성도도 있다. 그리고 안식일과 주일 관계에 있어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연속성이 있는지, 또는 없는지도 모르고 있는 교인들도 많다. 그래서 안식교를 통해 주일개념을 정리하도록 하는 것으로 믿는다. 마치 초대교회 수많은 이단들의 자극에 의하여 정통 신학이 형성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성교회 편에서 보면 이단은 정통 신학을 형성시켜 주는 부정적인 도구인데 안식교에 대하여 같은 마음이다. 그러나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①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말과 폐해졌다는 말은 다 맞는 말이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폐해졌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
② 그런 점에서 안식일이 폐해졌다는 말도 맞고, 완성되었고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말도 맞다.
③ 오늘의 주일은 분명히 안식일 개념에서 온 부분도 있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 중심의 종교가 주일 중심의 종교로 바뀌었다고 보아야 더 맞다고 본다.
④ 그렇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의미와 방법은 안식교가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와 방법과는 다르다. 안식교가 안식일의 ‘날’을 강조하는 의미와 목적은 아무래도 율법주의에서 왔다고 본다. 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몽학선생에 매여 있는 것이며, 육체의 예법에 매여 개혁의 법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1주일 중에 하루가 주의 날이 아니라 7일이 주의 날인 것이다.
이 점은 분명히 안식교 측에서 다시 논쟁을 하기를 원할 것으로 보인다. 그때 보아서 깊이 있게 취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본다.
2) 역사적으로 태양신을 섬기는 날로 주일을 정했다는 문제에 대해서
필자는 이 점에 대하여 안식교가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교부들에 의해서 복음이 우리에게 전수되었고 또 기독교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안식교는 그렇게 보지 않지만). 왜 안식교는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직접 들은 교부들이 태양신을 섬기기 위해서 주일을 정했다는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장을 하는 것일까?
김대성 목사의 두 가지 모순과 잘못을 지적해 보자.
① 역사를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이교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주일 문제와 성탄절 문제는 다른 부분이 있지만 주일도 태양신에서 왔고 성탄절도 태양신에서 왔다고 같은 주장을 하기 때문에 성탄절에서 실예를 들어보자. 분명히 12월 25일은 미트라를 섬기는 날이었다. 그러나 교부들이 태양신을 섬기기 위하여 예수님의 생일을 12월 25일로 정했다는 주장은 무지한 소치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은 정반대라는 점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태양신을 섬기기 위하여 성탄절을 만든 것이 아니라 태양신을 섬기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것을 일반 학자의 의견에 의하여 증명해 본다. 이 점이 콜롬비아 물리학 교수였던 찰스 패너티란 사람이 쓴 <세계문화 벗겨보기>(이형식 옮김, 도서출판일출, 1996)라는 책에 잘 나와 있다.
패너티에 의하면 12월 25일 성탄절은 교부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후에 콘스탄틴에 의해(337년)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부들이 태양신을 섬기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태양신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태양을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고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86~87쪽). 그래서 320년의 한 신학자는 “우리는 태양신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교도와는 달리, 태양을 만드신 이를 축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날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정반대가 아닌가. 이 점을 김대성 목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로마인들이 일요일에 태양신을 섬겼다는 이유만으로 주일을 지키는 것이 태양신을 섬기기 위하여 이 날을 정한 결과라고 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런 논리가 가능하다. 안식교인들이 지키는 토요일은 토성신을 섬기는 날이다. 로마에서도 역시 토성신을 섬겼다. 그렇다면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토성신을 섬기기 위함인가?
② 스스로도 모순된 논리이다.
누구나 자기를 재는 자와 다른 사람을 재는 자가 같아야 한다. 안식교의 조사심판이니 2300주야 문제는 밀러가 만든 1884년 10월 22일의 시한부종말론에서 나온 것으로 화잇이 그 의미를 바꾸어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도 밀러가 말한 날짜와 같고 상당한 부분에 있어서 성경해석이 같으면서도 그 의미를 조금 바꾸었다고 하여 안식교가 시한부종말론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안식교이다. 그런데도 주일이, 이방인들이 태양신을 섬기는 날과 같다는 점과, 불신자들인 일반 역사가들이 보는 견해에 의하여 교부들이 태양신을 섬기기 위해 주일을 만들었다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펴고 있으니 참으로 자가당착이 아니고 무엇인가?
3) 성경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옳다는 말에 대해서
김대성 목사가 성경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열거한 성경구절 중에 대답할 필요와 가치가 있는 것은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사도행전 20장 7절이요, 다른 하나는 히브리서 4장 9절이다. 하나씩 대답해 본다.
① 사도행전 20장 7절의 “안식 후 첫날”이 토요일 저녁부터라는 말에 대하여.
본문의 “안식 후 첫날” 시점을 토요일 저녁으로 보는 김대성 목사의 성경 해석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다른 성구의 해석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만일 이 날이 토요일 안식일에 모였다가 그 밤에 떡을 떼고 말씀을 강론한 날이라고 한다면 마태복음 28장 1절, 마가복음 16장 2절, 누가복음 24장 1절, 요한복음 20장 1절의 똑같은 안식 후 첫날도 토요일 저녁부터라는 말인가? 그러면 아마 이런 말이 될 것이다. “안식 후 첫날 즉 토요일 저녁이 되려는 미명에”(마 28:1).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즉 토요일 저녁 새벽에”. 참으로 이상한 말이 되고 말지 않는가.
왜 위의 본문에서는 안식 후 첫날을 토요일 저녁부터라고 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김목사의 말대로 토요일 저녁부터라고 치더라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모였다가 떡을 떼었는지 주일을 지키려고 토요일 날 모였는지는 본문이 말하고 있지 않고 있다. 사도들이 주일을 지키려고 모였다고 하면 큰 일이 나니까 그것만을 막아보려고 고안해 낸 억지 해석이 아니겠는가?
둘째, 이 문제에도 자가당착적인 요소가 있다. 안식교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다. 그런 의미로서 토요일 해진 후 그 밤부터가 안식 후 첫날이라는 안식교의 기준에 의하면 바로 이 날은 안식일이 아닌 것이다. 안식일은 이미 지난 것이다. 안식교의 기준에 의해서 보더라도 ‘안식 후 첫날’은 주일인 것이다.
결코 토요일 안식일을 지킨다는 사실만으로 기성교회가 안식교를 이단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율법주의적으로 그 날 지키기를 고집하고, 구원의 조건처럼 하고, 주일 지키는 것을 음녀라고까지 비판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안식교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② 히브리서 4장 9절에 나오는 “안식할 때”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에 대하여.
안식교인들의 의식으로서는, 그리고 문법적인 구조 속에서는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주의깊게 연구하지 않고 선입견에 의해 해석하기 때문에 생긴 잘못이다.
첫째, 사실 문법적으로 보아도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 안식일에 해당되는 헬라어 ‘사바톤’(sabbaton)은 구약 히브리어 ‘사바트’(shabbath)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사바트’는 ‘안식일’로도 되어 있고 ‘안식’으로도 되어 있다. 많은 곳에서 주로 안식일로 되어 있지만(출 16:25; 20:8, 10, 11; 31:13; 레 16:31; 19:3; 23:11, 32, 38; 민 15:32; 28:9, 10; 신 5:12, 15 등등), 그러나 얼마든지 ‘안식’으로 되어 있는 곳도 많다. 레위기 25:2; 25:4; 26:34, 35, 43; 신 5:14 등에서 ‘안식’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는 ‘안식일’로 번역해도 문맥이 통하는 곳도 있지만 거의 안식으로 번역해야만 되는 것들이다. 다 안식일로만 번역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 히브리서 4장 9절의 ‘사바티스모스’(sabbatismos)도 얼마든지 안식일이 아닌 안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에서도 ‘사바톤’을 ‘안식일’로 번역하지 않고 ‘안식’으로 번역한 것이다(마 28:1; 막 16:2; 눅 24:1; 요 20:1).
둘째, 문법적으로는 물론 더욱이 신학적으로는 그런 해석을 할 수 없다. 성경을 언어학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언제나 신학적인 해석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의 안식을 안식일로 해석하면 앞뒤의 말이 맞지 않는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안식은 우리가 누릴 미래의 영원한 안식을 뜻하고 있다. 김목사의 말대로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를 “안식일을 지킬 때가 남아 있도다”라고 한다면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 때까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안식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데 그리고 수 천년 동안 안식일을 지켜왔는데 아직도 안식일을 지킬 때가 남아 있다고 하니 문맥상, 신학상, 시제상, 어느 것도 맞지 않는다. 안식교인들은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킬 날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보다 만일 위의 ‘안식’을 ‘안식일’로 해석하면 역시 자가당착적인 해석이 되고 만다는 점이다. 똑같은 ‘사바톤’으로 되어 있는 골로새서 2장 16절의 안식일은 토요일 안식일이 아닌 절기 안식일로 해석하고, 여기 히브리서 4장 9절의 ‘사바티스모스’(sabbatismos)는 토요일 안식일로 보니 얼마나 자가당착적인 해석인가. 골로새서 2장 16절을 문법적으로 해석하려면 히브리서 4장 9절도 문법적으로 해석하여 토요일 안식일이라 해야 할 것이고, 골로새서 2장 16절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려면 히브리서 4장 9절도 신학적으로 해석해서 안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3. 2300주야 문제에 대하여
1) 1일 1년의 문제
김목사는 역사적 서술의 연대는 그대로 이지만 상징적 예언은 하루를 1년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증인들이 다니엘서 4장의 느부갓네살의 일곱 때 예언을 역시 1일 1년 설에 의하여 계산해서 예수님이 1914년에 오셨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그 꿈의 내용은 모두 상징적인 것이다. 큰 나무, 철과 놋줄로 동이는 것 등 모두가 상징적이다. 그리고 그 연대 역시 예언적인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을 인정하려는가, 아니면 1일 1년 설에 의하여 느부갓네살 왕의 일곱 때가 무엇인지 해석해 주기 바란다.
2) 기산점 문제
김목사는 기산점을 457년에 맞추기 위하여 다니엘 9장 25절의 ‘예루살렘 중건영’은 성전 건축영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 전체를 중건하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목사가 선지자로 신봉하는 화잇은 성전 건축영이라고 말했으니(대쟁투 합본 366쪽) 누가 옳은가?. 화잇의 말대로 성전 건축영이라고 하면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기 때문에 맞지 않게 된다. 그러나 김목사의 말대로 성 전체를 중건하라는 영이라면 화잇이 거짓 선지자라는 것을 시인하고 성전 건축에 관련된 에스라 6장 14절을 인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조사심판 문제
안식교는 다니엘 8장 14절의 ‘성소 정결’을 대속죄일의 성소 정결의 의미로 해석하여 조사심판의 교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의 정결은 대속죄일의 정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속죄일에 사용된 정결은 ‘타헤르’(taher)로서 “이 날에 너희를 속죄하여 정결(taher)케 하리니 너희가 여호와 앞에서 정결(taher)하리라”(레 16:30)고 되어 있다. 그 외에도 속죄의 뜻으로 쓰여진 정결(taher)은 민 8:6, 겔 43:26, 레 14:11 등이 있다.
그러나 다니엘 8장 14절의 성소 정결은 ‘타헤르’가 아닌 ‘짜다크’(tsadaq)로서 대속죄일이나 심판의 의미가 아닌 ‘복구’, ‘회복’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본문의 성소 정결을 공동 번역, 현대어 성경 등에서는 ‘복구’로 번역하였다. 왜 이러한 다니엘 8장 14절의 성소 정결을 대속죄일의 정결로 보는지 모르겠다. 안식교의 성경 왜곡 기술이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김목사는 1844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안식교의 조사심판 교리를 지지한다는 성경 구절들로 전 12:14, 고후 5:10, 히 9:27, 행 17:31, 계 14:7, 벧전 4:17 등을 제시했는데, 이 구절들은 안식교가 말하는, 1844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조사심판에 대한 것들이 아니다. 성경 어느 구절이 1844년부터 조사심판이 시작될 것이라고 했는가? 이 구절들은 재림과 함께 있을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4) 다니엘 9장 27절의 잔포한 자 문제
김목사는 70이레의 예언을 안식교의 해석에 맞추기 위하여 본문의 ‘그’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였다. 이는 안식교의 비성경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그’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인가 살펴보자. 본문에서 ‘그’는 첫째 한 이레 동안 언약을 굳게 정하였으며, 둘째 제사와 예물을 금지시켰고, 셋째 잔포했으며, 넷째 미운 물건 즉 우상을 세울 것이며, 다섯째 황폐케 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러한 ‘그’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누구와 한 이레 동안 언약을 굳게 정하였는가? 예수님께서 언제 제사와 예물을 금지시켰는가? 매일 드리는 성전의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도 계속되다가 로마의 ‘타이터스’가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잔포한 자였는가? 예수님께서 언제 우상을 세웠는가? 예수님이 황폐케 하는 자인가?
비성경적인 안식교의 내세관
이제 본호의 본론인 내세관 문제를 생각해 보자. 안식교의 내세관은 기성교회와 상반된다. 아니 안식교의 내세관은 영원 지옥을 부인하고, 인간의 육과 영의 분리에 대해서도 부인함으로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물론 그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영혼 멸절의 문제와 영원 지옥의 문제를 살펴보자.
A. 영혼은 멸절되고 없어지는가?
안식교에서는 ‘영혼’을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의 사상과 같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영혼도 죽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과 같이 지옥을 부정한다. 기성교회의 주장과는 달리, 육이 죽고 영혼이 살 수 없으며 인간의 죽음이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는 것도 부인하는 것이다. 안식교의 이러한 주장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하시겠느냐는 논리를 깔고 있다.
이러한 안식교의 주장이 맞는 소리인지 이제 성경을 통해 살펴보자. 누가복음 8장 55절에 야이로의 딸은 영혼이 떠났다가 영이 돌아오니 곧 살아났다. 사도행전 7장 59절을 보면 스데반이, 육신이 죽으면서 “내 영혼을 받으소서” 라고 기도했다. 육신이 죽을 때 영혼도 함께 없어진다면 어떻게 영혼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도 “내 영혼을 받으소서” 라는 기도를 드렸다. 살아 있는 생명 자체가 영혼이라면 육신의 생명이 끊어질 때 영혼도 없어지는 것인데 무슨 영혼을 받아 달라는 부탁이 필요하겠는가? 분명히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다.
B. 영원 지옥은 있는가?
영원 지옥에 대해서 안식교는 부정한다. 성경은 분명히 ‘영원한 불’(마 18:8), ‘예비된 영영한 불’(마 25:41), ‘영원한 불의 형벌’(유 7) 등으로 영원 지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안식교는 이러한 본문들에 나오는 ‘영원한’ 이라는 단어가 ‘아이오니오스’(aionios)로서 한도 끝도 없는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한 ‘세상’, 한 ‘세대’를 표현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영원 지옥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신계훈,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202~203쪽). 안식교의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영영한(aionios) 불’에 들어가라고 하였고(41절), 역시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aionios)생’에 들어가라고 하였는데 같은 ‘아이오니오스’(aionios)가 쓰여졌다. 여기에서 ‘아이오니오스’(aionios)를 한 ‘세대’나 한 ‘세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얻을 영생 ‘아이오니오스’(aionios)도 한 세상으로 끝나는 영생이 되고 말 것이다. ‘영(aionios)생’이 한이 없는 생명을 말하듯이 ‘영(aionios)벌’도 한이 없는 영원 지옥을 뜻한다(41절).
또 마가복음 3장 29절에서 성령 훼방죄는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했을 때에도 ‘아이오니오스’(aionios)를 사용함으로 한 세대나 한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같은 의미의 말씀을 마태복음 12장 32절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따라서 ‘아이오니오스’(aionios)가 어떤 때는 안식교의 말대로 한 세상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했으나, 지옥을 표현할 때의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분명 영원 지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교가 ‘아이오니오스’(aionios)를 한 세대로 해석하여 영원 지옥을 부인하는 것은 얼마나 성경을 자신들의 선입견으로 보고 있는가를 밝혀 주는 내용들이다.
‘아이오니오스’(aionios)가 사용된 구절들을 좀더 살펴보자.
요한복음 10장 28절에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aionios)을 주노니”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4장 17~18절에서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aionios) 영광의 충만한 ···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aionios)이니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aionios)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으며,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에서는 “영원한(aionios)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했으며, 디모데후서 2장 10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aionios)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했으며, 히브리서 9장 15절에서는 “영원한(aionios) 기업의 약속을 얻게하려···”라고 했으며,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서는 “영원한(aionios)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라고 했으며, 베드로후서 1장 11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원한(aionios) 나라에 들어감을···”이라고 했으며, 그리고 유다서 1장 7절에서는 “영원한(aionios)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라고 했다. 안식교는 이렇게 많은 성구들을 다 어떻게 하려는가?
만일 안식교의 주장대로 ‘아이오니오스’(aionios)를 한 ‘세대’나 한 ‘세상’으로 해석하여 영원 지옥을 부인하게 된다면 우리의 구원받은 영생 또한 영원한 것도 아니고, 하늘 나라도 영원하지 않으며, 우리가 받을 영광도 영원하지 않다는 말이 되고 만다. 성경을 조금만 주의깊게 연구하면 알 수 있는 것을 얼마나 자신들의 교리의 자로 보고 있으면 이런 자가당착적인 실수를 하겠는가? 우리가 받을 영광이 영원한 것처럼 지옥의 형벌도 영원한 것이다.
성경을 연구할 때 성경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 정도는 성경 전체의 원문을 면밀히 분석하고 글을 썼어야 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지옥을 없애려고 천국의 영원을 한 세대로 바꾸겠는가? 아니면 천국을 살리기 위하여 지옥을 영원한 지옥으로 바꾸겠는가? 신계훈 씨가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는 책에서 그가 말하는 어둠이 빛이고 그가 말하는 빛은 어둠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면상 안식교의 영혼멸절 문제와 지옥 부재설에 대하여 충분한 변증이 되지 못한 것 같다. 다음 호에서 다시 취급할 것이다.*
이교 철학 사상에서 유래된 영혼 불멸 신앙이
기독교의 교리가 될 수 있는가?
<교회와신앙>측 지난 호 글을 보고
사실상 지난 1월호의 반증 부분에서는 12월호의 주제였던 주일 예배 문제가 다루어졌어야 마땅하다. 필자는 12월호에서 일요일 예배가 어떻게 유래되었으며 그것이 왜 비성서적인지, 그리고 장로교 측에서 주일 예배의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절들이 어떻게 잘못 해석되고 있는지에 관해 비교적 상세한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교회와신앙>측에서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반증을 못하고, 이미 답변이 제시된 엘렌 화잇 문제를 또다시 거론하며 상당한 지면을 사용하고 있다. 지면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물론 필자의 자유 의사에 속하는 것이지만,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주제와 문제의 핵심을 좀더 성실하게 다루어 줄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앞으로 남은 토론에서는, 씨름판의 주위를 맴돌며 시간만 보내는 형식을 지양하고 논쟁의 중심을 보다 충실하게 다루어 주기를 바란다.
1. 엘렌 화잇에 대하여
엘렌 화잇에 대하여 문제를 삼으려면 사용하고자 하는 내용의 출처를 좀더 확실히 밝혀주었으면 한다. 예를 들어, <교회와신앙>측은 “화잇은 노예제도가 재림시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고 계속 주장하는데, 그러한 내용이 어느 책 몇 페이지에 있는지, 그리고 원문(영어)의 표현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밝혀주기 바란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system of slavery, which has ruined our nation, is left to live and stir up another rebellion”. ‘예수님 재림’이라는 말은 있지도 않을 뿐더러, 전후 문맥을 통하여 내용의 핵심은 살펴보면, 당시 남북 전쟁에 참여했던 북군(北軍)들의 심리적 상태와 시대적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화잇의 <초기 문집> 283페이지에서 인용한다는 “나는 노예의 주인들은 … 마지막 비참한 죽음을 당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은 원문에도, 번역본에도 없는 것이니, 다시 한 번 확인하여 정확한 출처를 제시해주기 바란다.
1856년 총회에서 화잇이, 그 총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살아서 재림을 맞이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배경과 결과에 대하여 이미 96년 12월호에서 설명을 했으나 97년 1월호에서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교회와신앙>측은 먼저 다음의 성경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주기 바란다.
[하나님의 약속 1]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출 6:6~8).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분명한 약속을 하셨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매우 악화되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감당할 만큼 준비되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약속 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 14:26~30).
하나님의 예언이 빗나간 것인가? 아니면 예언이 성취될 수 있는 상황이나 조건이 바뀐 것인가? 분명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당시의 갈렙과 여호수아만 가나안 땅에 데리고 가실 계획은 아니었을 것이다.
2. 통합측의 입장과 이흥선 목사의 입장
<교회와신앙>측은 계속 조용기 목사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필자의 질문은, 장로교 통합측에서 조용기 목사가 사이비성이 있다고 규정했다가 해벌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단’이나 ‘사이비’나 어떤 용어라도 상관없다. 조용기 목사의 사이비성에 대하여 조용기 목사가 입장을 바꾼 것인지 통합측에서 입장을 바꾼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흥선 목사가 안식일교회를 이단시하다가 입장을 바꾼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목사는, 기독교 케이블 텔레비전 프로그램 공급업체로 참여한 안식일교회는 이단이기 때문에 반드시 배제시켜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발표하였다(기독저널). 그의 논조가 지나칠 정도로 강렬했기 때문에 안식일교회측에서는 이목사에게 안식일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좀더 깊이 연구해보도록 관련 자료들을 제공한 바 있다. 이 목사는 양심적으로 안식일교회 교리서들을 연구한 끝에,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이 성경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언론인으로서 기존의 입장을 바꾼다는 것이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목사는 기독교인의 양심으로 원래의 입장을 바꾸어 안식일교회가 이단이 아님을 천명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를 가지고 <교회와신앙>측은, K 씨를 거명하며 이단 판별의 ‘잣대’론을 제기하고 있다. 논리를 너무 비약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나오는 법이다. 어떤 사람의 말 중에 한 가지가 틀렸다고 해서 나머지 모든 말이 무조건 틀리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가? <교회와신앙>측에서 지금까지 다룬 이단 판별 내용이 객관적으로, 혹은 하나님 보시기게 항상 정확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장담할 수 없다면 그 ‘잣대’는 무엇에 해당하는 것인가?
영혼은 불멸인가?
대한예수교 장로교 총회에서 발행한(1994년) 교리교육 지침서 352, 359페이지에는 영혼 불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육체의 생명이 끝난 후에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의 물음에 직면한다. 육체의 생명과 함께 영혼도 끝나는가, 그렇지 아니하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존속하는가 등의 물음에 직면한다. 이에 관하여 그리스도교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계속 존속함을 주장한다. 이것을 우리는 영혼 불멸이라 한다. …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나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간다. 거기서 그들은 빛과 영광 가운데서 마지막 날에 그들의 육체까지 완전한 구원을 얻을 날을 기다린다. 이와는 달리 예수를 믿지 않고 거역한 사람들의 영혼은 음부에 던저져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최후 심판을 기다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죽는 즉시 그 영혼이 천당에 가거나 지옥에 떨어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 죽지 않고 영원히 탄다고 생각한다. 이 해괴한 사상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왜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그 근원을 우선 살펴 본 후에, 영혼 불멸 사상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성경에 맞지 않는 지극히 인간적 혹은 철학적 추측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제한된 지면 관계로 상세히 다룰 수는 없겠으나, 중요한 부분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인간의 본질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사람을 만든 재료는 흙과 생기이다. 인간의 창조 과정에서 영혼은 어디에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인간의 이러한 창조 과정에 대하여 한신대 김이곤 교수가 설명한 견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창세기 2장 7절에 의하면 인간은 ‘땅 표면의 먼지(아파르 민 하아다마)’ 속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형성된 ‘생명체(네페쉬 하야)’로 정의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분명하게 규정되고 정의내려질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본질을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 사상은 영혼을 육체보다 더 가치있는 것으로 보거나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보는 이분법적 요소가 전혀 없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보는 견해는 구약 성서의 구원사적(救援史的) 문맥과는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고, 영혼은 육체보다 가치있는 ‘신과 유사한 영적인 것(호모이오시스)’이며, 죽을 때 그 둘은 비로소 분리되어 육체는 썩어지고 영혼은 불멸을 누린다는 희랍적 사고는 창세기 2장 7절의 히브리적 인간 이해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즉 사멸적인 육체 속에 불멸적인 영혼을 하나님이 불어넣으셔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유형의 논조는 여기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 7절에서, 인간 생명은 절대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귀속되었다는 그 귀속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의미 이상을 도출하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목회와 신학, 96. 8월호, 157쪽).
영혼 불멸설의 유래와 역사
1.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다음 그들이 거하는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 실과를 따먹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그 과일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단은 뱀을 통해서 하와를 유혹할 때에 그 과일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하였다. 서로 상반되는 이 두 말 중의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 과일을 먹었고 결국 그들은 죽었다. 사단의 말이 거짓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또 하나의 거짓을 만들게 되었다. 몸은 죽었지만 ‘혼’은 죽지 않았다는 사상을 사람들에게 불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단의 속임수를 사람들에게 전파한 매개자들이 성경에 나온다.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을 하는 자, 무당 등(신 18:10)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사울 왕이 매우 다급한 상황에서 엔돌의 무당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했을 때 무당이 주문을 외우며 사무엘을 불렀고 사무엘이 나왔다(삼상 28장). 그가 과연 사무엘의 영혼인가? 사무엘이 무당에게 불려다니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몸은 죽어도 혼은 죽지 않는다는 사상을 인간들에게 퍼뜨리고 있는 사단의 속임수임에 틀림없다.
2. 이집트의 영혼 불멸 사상과 헬라 철학
이와 같은 사단의 거대한 속임수로 인해 영혼의 불멸 사상은 인간 사회와 인류 역사에 매우 깊이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특별히 이집트 사람들은 영혼 불멸 사상을 대단히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분리된 영혼이 다시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무수한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으나 지금까지 떠나간 영혼이 되돌아와 다시 살아난 미이라는 단 하나도 없었다.
영혼 불멸에 기초하여 윤회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기원전 6세기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였다. 기원전 5세기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집트를 방문하며 영혼 불멸 사상을 더욱 깊이 확인하게 되었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과 육신의 분리를 죽음이라고 보았다”(그리스도교 대사전, 대한 기독교 서회, 1118면). 죽음 직전에 처한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침착성은 영혼 불멸의 신앙과 관련이 있다. 이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의 수제자 플라톤은 마침내 영혼 불멸 사상의 가장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으며, 그의 논집(論集)인 파에돈은 영혼 불멸 사상의 교과서가 되었다.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철학자의 영혼은 사후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갈 것이며, 신들과 더불어 축복 가운데 살 것이다. 그러나 육체를 사랑하던 사람의 영혼은 묘지를 왕래하는 귀신이 되어 이리나 독수리와 같은 신체 속에 들어갈 것이다. 참다운 철학자만이 죽어서 하늘로 간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어서 선한 영혼은 천국에, 악한 영혼은 지옥에, 그리고 중간적인 영혼은 연옥에 간다고 결론짓는다”(상동).
3. 영혼 불멸 사상이 교리로 만들어지기까지
① 플라톤(Plato, 427~347 BC) - 영혼 불멸 사상을 체계화시켜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해 놓았다. 최대의 헬라 문화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는 고대 이집트 종교를 흡수한 플라톤의 철학에 동양의 신비 사상을 혼합한 신플라톤 철학(Neoplatonism)이 기원전 3세기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로마 전역에 퍼져나갔다.
② 필론(Philo, 20 BC~AD 47) -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로서, 몸과 영혼을 분리시킨 플라톤의 헬라 사상을 신플라톤주의 형태로 유대교에 끌어들이는 데 앞장 섰다. 1세기 최대의 유대 역사가인 요세프스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③ 오리게네스(Origen, c.185~254) - 알렉산드리아 신학교에서 교장을 지낸 3세기 초의 천재적인 교사로서 헬라 사상을 신플라톤주의 형태로 받아들여 그것을 그리스도교계에 소개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 영원하고 불멸인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불멸이라고 했으며, 자신은 영혼불멸을 믿는 진정한 신플라톤주의자라고 자처하였다.
④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m, c.160~240) - 플라톤과 같은 영혼 불멸을 주장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인의 영혼은 지옥불에서 영원히 탄다고 하는 영원지옥(永遠地獄)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다.
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354~430) - 북아프리카 히포 출신으로 당대의 최대 신학 교부였다. 그의 가르침은 중세 가톨릭 교리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과 터툴리안의 영원 지옥설을 확증하는 한편, 플라톤의 철학 개념을 빌려 연옥설을 만들어 냈으며, 대교황 그레고리는 서기 528년 그것을 교리로 인정하여 드디어 성경에도 없는 연옥 교리가 생겨난 것이다.
⑥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확인된 영혼불멸 사상과 영원지옥, 그리고 연옥의 신앙은 13세기 스콜라 철학자요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중세 가톨릭 교회의 확고한 교리로 집대성되었다.
⑦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 - 신곡(神曲)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영혼 불멸 사상에 입각한 지옥, 연옥, 천국을 민속신앙으로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이 이교 철학 사상으로 전해지던 영혼 불멸 신앙이 그리스도교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자 1513년 교황 레오 10세는 제 5차 라테란 종교회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교서를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들이 이성적인 영혼의 속성에 관하여 그것이 죽음과 더블어 죽게 된다고 감히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거룩한 공회의 동의로써, 영혼은…불멸이라고 한 교황 클레멘트 5세의 종규에 따라, 지성적인 영혼은 죽게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배척하며, 이와 같은 그릇된 주장에 집착하는 모든 사람을 멀리 할 것과 이단으로 징벌하여야 할 것임을 명하는 바이다”(H. J. Schroeder, Disciplinary Decrees of the General Council, 1937, 483, 487).
영혼 불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게 된 위와 같은 배경과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있다면, 영혼 불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울러 영혼 불멸 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누구의 편에서 외치는 소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4. 칼빈의 ‘혼수론’과 개신교의 영혼 불멸 사상
이렇게 이교적인 영혼 불멸 사상이 중세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1517년). 프랑스의 젊은 가톨릭 신자 칼뱅이 1532년 개신교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그가 개종한지 2년만인 1534년, 25세의 나이에, 영혼불멸을 반대하고 죽음을 잠과 같은 무의식으로 가르친 재세례파 그리스도인들을 신랄히 비평하고 이단으로 정죄하는 최초의 신학 논문인 ‘혼수론’(魂睡論)을 써서 오늘날 일반 개신교회들의 영혼 불멸 신앙을 정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칼뱅에 앞서 성서에 입각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 위클리프, 틴덜, 독일의 루터 등이 이미 중세교회의 영혼 불멸설 교리가 이교적인 사상임을 공공연히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교 사상이 개신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해되고 있는 성경절 풀이
영혼 불멸 신앙이란 이렇게도 비성서적인 이교의 철학 사상에서 시작하여 형성되고 발전되어 굳어진 교리이지만 성경을 보면 마치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성경절들이 도처에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일차적인 문제는 히브리 사상을 헬라 사상으로 변형하려고 많은 시도를 한 ‘70인역’(희랍어 역본) 성경에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다시 한신대 김이곤 교수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히브리어 구약 성서는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하나님의 ‘모양’(데무트)을 단순히 동의적 평행법으로 반복 병렬시키면서 그 뜻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랍어 역본은 오히려 ‘에이콘’(형상)과 ‘호모이오이스’(모양) 사이의 엄격한 질적 차이를 강조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희랍어 역본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호모이오시스’ 즉 하나님의 신적인 본질과 ‘비슷한 것’(호모이오시스)은 소실되고, 단지 인간적인 것, 즉 ‘에이콘’만 남게 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창세기 3장의 타락설화 이후에 나오는 ‘호모이오시스’(모습)라는 표현은 모두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 대신 ‘에이콘’(창 5:1) 또는 ‘이데아’(창 5:3)라는 표현으로 대치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희랍역본은 구약성서가 인간을 플라톤주의적으로(플라톤의 파에돈처럼) 이해하여 인간이 죽을 때는 마치 영혼과 육체가 나누이는 것처럼, 또는 영혼은 육체보다 더 우수한 신적 본질에 속하는 것처럼 생각한 것으로 오도(誤導)하였던 것입니다”(목회와 신학, 96. 8월호, 156, 157쪽).
히브리적 인간 개념을 헬라적 인간 개념으로 변형시켜 번역된 ‘70인역’ 성경의 영향 때문인지, 각종 번역본에서 ‘영혼’에 대한 많은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루아흐 하야’(살아있는 영, 생령)로 되어 있지 않고 ‘네페쉬 하야’(살아있는 존재, 생명체, Living being)로 되어 있으나 우리말 번역에는 ‘생령’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다시 김이곤 교수의 설명을 들어본다.
“문제는, 희랍적 영향 때문인지(?), 이 ‘네페쉬’라는 말이 우리말 성서(개역)를 포함하여 영어, 독어, 불어 등의 성서에서, 희랍역도 그렇게 하지 않은(‘프쉬케’라고 번역하고 ‘프뉴마’로 번역치 아니한) 번역인 ‘영혼(영)’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에서 시적 은유로 사용한 것이나 출애굽기 23장 9절, 욥기 19장 2절 등의 어떤 특수 문맥 이외에서 ‘영혼’이라는 말로 ‘네페쉬’를 번역한 것은 명백한 - 혹은 의도적(?) - 오역(誤譯)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상동, 158쪽).
이와 같은 오역으로 인해, 많은 성경 독자들은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천당이나 지옥에 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그렇게 보여지는 성경절들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표적인 몇 성경절들에 대하여 간략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1.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여기에 ‘영혼’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헬라어로 ‘푸쉬케’이다. ‘푸쉬케’라는 단어는 영혼, 목숨, 생명, 마음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번역상 가장 적절한 낱말을 선택하려면 문장의 전후 문맥을 면밀히 살피는 작업이 먼저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10장은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교훈하시는 말씀들이다. 전도하면서 당할 여러 가지 시련과 핍박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에 대하여 사람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하는 핍박은 최악의 경우 몸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 선교하는 정신은 사람이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푸쉬케’라는 말은 다른 여러 경우(행 15:24; 엡 6:6; 골 3:23 등)에서처럼 ‘마음’으로 번역해야 합당한 것이다.
그리고 신약이나 구약 성경에 ‘생기’ ‘호흡’ ‘신’ ‘영’ ‘영혼’ ‘생명’ ‘목숨’ ‘생물’ ‘마음’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 헬라어(푸뉴마, 푸쉬케)와 히브리어(루아흐, 네페쉬, 네솨마) 단어가 1658회 나오지만 불멸하거나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영혼의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영혼’이라는 말은 마음과 몸을 포함한 사람 전체를 묘사할 때 쓰이는 말이다. (겔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눅 1:46).
2.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옆에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마치 강도가 그날 당장 낙원에 간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다. 위 성경절에서 ‘오늘’이라고 하는 부사는 원래 “내가 오늘 네게 말하노니”라고 했어야 할 부분인데, 편견을 가진 번역자들이 본래의 헬라어 원문에는 있지도 않는 쉼표( , )를 ‘오늘’ 앞에 찍어 넣음으로 문장을 이해하는 데 혼란이 온 것이다.
우선 강도의 요청 내용을 정확하게 살펴보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공동번역 성경은 이 성경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강도의 요청은 당장 영혼을 구원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자기를 구원하여 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의 구원을 그날 바로 약속하신 것이지 그날 그의 영혼을 낙원으로 데려가신 것이 아니다. 강도의 실제적인 구원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돌아가신 그날 낙원에 가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신 다음의 말씀을 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3. (눅 16:19~31)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
이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되풀이하지는 않겠다. 영혼 불멸을 믿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실화로 생각한다. 이 비유를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실화로 생각할 경우에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하게 된다. 다음의 몇 가지 문제점들과 함께 이 이야기의 실상을 살펴보자
① 아브라함의 품 - 구원받은 의인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면, 아브라함 이전의 의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고통받는 악인들이 아브라함에게 탄원을 해야 하는가?
② 눈, 손가락, 혀 - 영혼이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영혼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탈 것이 없다. 뜨거움을 느끼는 감각도 없다. 몸이 아니기 때문에 눈이나 손가락이나 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이야기다. 영혼이 지옥에서 탄다는 말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매우 허망한 이야기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③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 사이 - 그 두 장소 사이의 거리가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 줄 수 있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리라면 부모나 배우자나 형제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아브라함의 품도 생지옥에 불과할 것이다.
④ 실화가 아닌 비유 - 이것은, 이집트에서 발견된 한 파피루스를 통해서, 예수님 당시 민중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이집트의 민속 설화였음이 발혀져 있다. 사실 누가복음 15장과 16장은 잃은 양, 잃은 은전, 탕자, 청지기, 부자와 나사로 등의 여러 가지 비유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 있다.
⑤ 나사로라고 하는 이름 - 설화나 우화 속에 이름이 들어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화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이다. 흥부와 놀부 이름이 있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실화가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 때문에 소설이 실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눅 16:14).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당시 부자들의 고정관념, 즉 부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축복의 결과이므로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생각을 고쳐주시려고 한 것이다.
지옥과 꺼지지 않는 불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이란 무엇인가? 신약 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낱말로 가장 많이 번역된 ‘게헨나’라고 하는 말은 12회 나타난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3, 48).
여기에 기록된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게엔나’이다. 히브리어로는 ‘골짜기’를 뜻하는 ‘게’와 사람 이름인 ‘힌놈’이 합성되어 ‘게힌놈’이라고 쓰고 있으며, 의미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남쪽 비탈에 위치하고 있는 “힌놈의 골짜기”가 어떻게 지옥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을까?
이스라엘의 배도와 타락이 극도에 달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방신에게 분향하고 몰렉신에게 자식들을 불살라 제사드리며 온갖 추악한 일을 자행하였다(대하 28:1-3; 33:1-6; 왕하 23:10).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골짜기는 처형당한 죄수들의 시체와 죽은 짐승들의 사체를 버리고 온갖 오물을 버리는 장소가 되어 그 쓰레기를 불태우는 연기가 밤낮 타오르고 있었으며,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서식하고 악취가 풍기는 불쾌한 곳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힌놈의 골짜기” 곧 ‘게헨나’는 장차 그리스도를 거절한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아 유황불로 멸망당할 곳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지옥을 묘사할 때 불이 꺼지지 않고 구더기가 있다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을 묘사할 때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타오르고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불타는 시간의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타서 멸망당한 결과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다. 유다서 1장 7절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 불이 문자적으로 영원한 불이라면 옛날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곳에 지금도 불이 타오르고 있어야 마땅하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렘17:27). 예루살렘은 서기 70년에 멸망했다. 그 불이 아직 꺼지지 않고 있는가?
장차 악인을 멸망시킬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란, 불타는 시간의 영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끌 수 없는 불, 불타서 멸망당한 결과의 영원성을 묘사하는 표현인 것이다.
결 론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출신의 탁월한 언어학자요,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개혁자로서 헬라어 신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후에 순교당한 틴덜(W. Tyndale, 1490~1536)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대들은 몸을 떠난 영혼들을 천국이나 지옥, 연옥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와 바울이 입증한 부활의 논증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 참된 믿음은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매시간 바라보도록 깨우치고 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교리와 철학자들의 인간적인 교리를 함께 결합시켜 놓았으나 이것들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일치할 수가 없고 그리스도인 한 사람 안에서 성령과 육신이 더 이상 역할 수가 없다. … 내게 다시 말해 주시오. 만약 영혼들이 하늘에 있다면 그들이 왜 천사들의 경우와 같지 못한가? 그런 뒤에 새삼스럽게 부활이 있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최근 영원 지옥설에 부정적 견해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993년 11월 15일자 타임(TIME)지와의 인터뷰에서 불타는 영원 지옥설을 부정하였다. 영국 성공회도 그간의 지옥 개념을 수정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지옥을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고통과 징벌의 불구덩이’로 묘사한 기독교의 전통적 견해는 잘못된 것이며 지옥은 다만 ‘신이 함께 하지 않는 총체적 부정과 무(無)의 상태’이다. … ‘가학적으로 표현된’ 전통적 지옥관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심리적 상흔을 남겼으며, 신을 학대를 즐기는 괴물로 만들었다”(동아일보, 1996. 1. 13).
독자들은 다음의 성경절을 깊이 음미하면서 정통적 기독교 성서관에 입각한 올바른 신앙을 소유하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인간의 가르침이나 사상, 혹은 교회의 전통보다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믿고 따라갈 때에 우리는 안전하게 하늘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안식일교회 大논쟁8(97년 3월호)
--안식일교회의 음식문제--
안식교의 음식물교리는 화잇의 거짓 계시의 산물이다
지난 호에 대한 반증
화잇의 거짓 예언 문제에 대하여
안식교 측에서는 화잇의 거짓 예언 문제에 대하여 상당히 곤혹스러워 하는 것 같다. 화잇을 선지자로 보기 때문에 그가 무너지면 안식교 자체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안식교측 김대성 목사는 지금까지 여러 번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하여 “원문의 뜻이 그렇지 않다”, “원문에는 그 단어가 없다”는 변명을 했다. 불행하게도 필자는 원문이 없어서 역본을 의지하고 있다(후에 영문 원본을 구하게 되면 김목사가 문제 삼은 부분을 다시 변증하겠다).
그래서 본지에서는 전화 상으로 김목사에게 그들이 말하는 <교회증언> 영어 원문을 요구하였다. 필자에게는 영문 책이 없고 김목사가 인용한 부분이 너무 짧아서 그 의미를 알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김목사는 자신들도 영문 책자를 미국에서 신청하여 보고 있다면서 필요하다면 구해주겠노라고 답했다. 그러나 한 달이 넘도록 해당 책에 대한 소식이 없어 이렇게 다시 정식으로 <교회증언> 영문판을 주문하는 바이다. 미국 주문이 어렵다면 가지고 있는 책이라도 빌려 주기 바란다.
그런데 김목사가 이번에는 노예 문제에 대하여 필자가 제시한 문장이 원문에도 번역본에도 없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며 그 증거까지 요구했다. 김 목사의 말을 들으면 마치 독자들은 필자가 없는 것을 만들어서 공격하는 사기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원문에도 역본에도 없다는 김목사의 글을 보고 할 말을 잊는다. 필자가 초기문집에서 인용하여 “노예의 주인들이 일곱 재앙을 받게 될 것”이라는 화잇의 거짓 예언을 소개하였더니 이는 원문에도 번역본에도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변증한다.
첫째, 우선 위의 내용이 원본이나 역본에 분명히 있다면 화잇은 거짓 선지자라는 주장을 인정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 말이 사실로 확인되어도 문제가 없다면 그런 소리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혹 김목사에게 위의 책 역본이 없다는 말 같이 들리는데, 필자에게 영문이 없음보다 김목사에게 위의 역본이 없다는 말은 천 배나 만 배나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필자는 처음부터 위의 내용이 <초기문집> 283쪽에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원문에도 변역본에도 없다고 하니 독자들은 이 말이 이해가 되는가? 물론 필자는 그 내용이 영어 원본에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확인해도 안식교의 시조사에서 발행한 책에 한자도 틀림 없이 그대로 있다. 필요하면 공증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분명한 것은 김목사에게 영문본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영문본에는 위의 내용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사기꾼이 원본에 없는 말을 역본에다 번역해 놓은 모양이다. 그것도 안식교의 시조사에서, 그리고 어떤 안식교인이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누구인지, 왜 그랬는지 이 문제는 김목사 편에서 밝혀주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흥선 씨 문제에 대하여
필자는 본지 97년 1월 호에서 이흥선 씨의 이단판별 기준이 의심스럽다고 지적하였다. 이유인즉 그는 안식교에서 이단시하고 있는 김기동 씨를 이단이 아니라고 한 자인데, 그가 안식교를 이단이 아니라고 하니 그 기준이 의심스럽다는 취지였다. 그랬더니 김대성 목사는 “어떤 사람의 말 중에 한 가지가 틀렸다고 해서 나머지 모든 말이 무조건 틀렸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였다. 다음과 같이 중요한 대목이 있다.
먼저, 안식교 김목사의 말에는 자가당착적인 요소가 있다. 그는 통합측에서 조용기 목사에게 사이비성이 있다고 하였다가 해제한 것을 가지고 이단 비판의 기준을 문제 삼았다. 그렇다면 안식교에서 이단시하는 김기동 씨를 이단이 아니라고 한 이흥선 씨의 이단 비판 기준을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기성교회측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교측이 아닌가?
둘째, 김목사는 이흥선 씨가 김기동 씨를 이단이 아니라고 본 것을 나무의 잘못된 한 가지 정도로 비유했지만, 김기동 씨에 대한 이흥선 씨의 이단 비판 기준이 틀렸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시인한 셈이 됐다는 점이다.
필자가 이흥선 씨에게 문제를 삼은 것은 지협적인 것이 아니다. 누구를 이단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는 결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신학과 신앙의 핵심 중에 핵심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 비유로 말하니 안식교가 얼마나 급한 입장인가를 느끼게 한다. 형식적으로는 차라리 이흥선 씨의 말처럼 안식교에서도 김기동 씨에게 잘못이 없다고 하는 편이 쉽지 않겠는가? 그러나 안식교에서는 ‘영혼멸절’을 주장하는데 김기동 씨는 ‘죽은 자의 사후의 영이 귀신이 되어 공중에 떠다니며 우리 몸에 붙어 질병을 일으킨다’고 하니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안식교에서는 이흥선 씨를 불러 안식교가 이단이 아님을 견고히 하는 집회를 한 것으로 듣고 있다.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이씨가 안식교를 정통교회라고 주장했던 기독저널 신문을 전국 여기저기에 뿌린 것 또한 알고 있다.
이흥선 씨는 한국교회의 이단연구가 신중하지 못하다고 격렬히 비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단연구의 신중론을 그렇게도 외치던 이흥선 씨 자신은 애초에는 정작 아무런 연구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신문에서 안식교가 이단이라고 여러 차례 맹비난을 했었다. 그러던 그가 몇 개월 후에 안식교에 대해 재검증을 한다고 10회에 걸쳐 파격적인 지면을 마련하더니 끝내 안식교는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실상 이흥선 씨의 소위 안식교 재검증 연구라는 것이 대부분 ‘기성교회의 비판에 대해 항목별로 변증해 놓은 안식교 신계훈 씨의 책’을 필요에 따라 축약·선별·짜집기하여 발표한 것이었다는 점이다(교회와신앙 96년 6월호 122~123쪽 참조). 이러한 점을 이흥선 씨에게 자료를 제공한 안식교측의 핵심인사는 물론이요, 신계훈 씨의 책과 이흥선 씨의 신문을 읽어 본 안식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독자들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것으로 믿는다.
한국교회의 이단연구가 부정직하고, 신중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고 비난하면서도 자신은 애초에 아무런 연구도 없이 안식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비판한 사람이었는데, 그나마 몇 개월만에 다시 안식교가 정통교회라고 자신의 기존 결론을 180도로 뒤바꿀 때에도 스스로의 연구가 아닌 안식교측의 변증서 내용을 마치 자신의 연구결과인양 그대로 활용했다는 점을 주관적으로 객관적으로 정직한 행사라고 보는지 묻고 싶다. 이를 두고 안식교측은 ‘양심적인 연구’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으니 필자는 안식교측에서 말하는 그 ‘양심’과 이흥선 씨의 ‘양심’은 같은 수준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안식교는 ‘그런 수준’에서 이단이 아닐 것으로 믿는다.
영혼멸절 문제에 대하여
안식교측에서는 영혼멸절 교리가 이교 철학 사상에서 왔다고 비판하였다. 심지어 나사로 비유도 애굽의 민속설화에서 왔다는 것이다. 얼마나 불신앙적이요 무지한 소리인지 모르겠다. 이런 소리는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며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무식한 이방인이나 하는 소리다.
성경으로 기록한 시기와 하나님이 계시를 주신 시기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분명히 모세가 성경을 기록하기 전에도 수많은 사람에게 수많은 계시를 주셨다. 그러나 후에 그것도 아주 훗날 모세를 통하여 그 계시를 기록하지 않았는가? 또한 성경의 많은 부분이 하무라비 법전과 유사하고 심지어 불교의 경전과도 유사한 교리가 많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예수님이 석가모니의 제자라고 얼마나 떠들었는가? 김목사의 말대로라면 기독교는 하무라비 법전 내지는 불교의 소산일 것이다.
그러한가? 아니다. 비록 유사한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먼저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와전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창조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성경계시로 특별히 선택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요한복음에는 다른 공관복음과 달리 헬라의 철학적인 요소가 많은데 이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어떤 이교도적인 학자의 말처럼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철학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가? 분명히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철학적인 요소가 많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이 선택한 계시이다.
일요일은 로마의 태양신을 섬기는 날과 같으니 태양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에서 왔다고 하고, 영혼불멸은 이교 철학 사상과 유사하다고 거기서 왔다고 한다면, 다시 묻거니와 토요일은 토성신을 섬기는 날인데 안식교의 안식일은 토성신을 섬기는 신앙에서 왔는가? 그렇다면 또한 안식교의 채식교리가 불교의 채식의식과 유사한데 안식교의 채식교리도 불교에서 왔는가?
아무래도 김목사는 성경적인 입장이 아닌 이교도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김목사는 성경을 기준으로 논쟁을 하자고 해 놓고 이교 철학 사상이나 학자들의 견해 등을 더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영혼멸절 교리가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것이 이교 철학 사상과 유사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눅 16:19-31)
안식교에서는 이 내용은 실화가 아니고 비유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이것은 이교도인 이집트의 민속 설화였다는 것이다. 안식교의 이런 입장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이교도의 설화를 비유로 말씀하셨으니 성경적인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이교도의 설화를 삽입시켰으니 성경에서 제거하자는 말인가?
비유건 아니건 상관이 없다. 예수님은 절대로 비유든지 실화든지 거짓된 비유로 참된 진리를 교훈하시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이 내용이 이교도인 이집트의 설화와 유사성이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계시가 와전되었는지, 아니면 유사한 내용을 하나님께서 취하셨는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제일로 중요하다. 사후의 영혼이 없고 지옥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실 수 없는 것이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말씀을 하나씩 살펴보자.
①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22절): 사후의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이러한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사후의 영혼이 성경에 없는 이교도의 교리라면 예수님께서 이교도의 사상을 가졌다는 말인가? 이 말은 분명히 사후의 영혼이 천사들에게 받들려 가는 성경의 교훈이다.
②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22절): 천국을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묘사하셨다. 이 말씀을 보면 먼저 안식교의 주장처럼 이 내용이 이집트의 민속설화가 아니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인들에게 아브라함의 품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김목사는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했으니 아브라함 이전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느냐고 반문했다. 유치한 질문이다. 아브라함의 품이란 믿음으로 가는 나라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 묘사한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아무래도 안식교는 성경을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 같다.
③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고서”(24절): 안식교 측은 본문에 손가락, 혀, 등(눈)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영혼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육체가 없는 영혼이 눈이 있고 손가락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도 유치할 뿐이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성경에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묘사하지 않았는가?(시 8:3, 8:6, 10:12, 14, 11:4, 15:4, 17:7, 32:4, 34:15 등등).
④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있어”: 천국과 지옥은 왕래할 수 없다는 것을 묘사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천국과 지옥, 현세와 내세가 구분되어 있어서 서로 왕래할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안식교측에서 말하기를, 이 본문처럼 두 장소에서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면 아브라함의 품도 생지옥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안식교측의 말대로라면 천국에도 사단이 있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욥기에 보면 하나님과 사단이 대화를 하기 때문이다(욥 1:6~12).
영혼(헬라어:푸뉴마, 푸쉬케, 히브리어:루아흐,네페쉬,네쇠마)
안식교측은 영혼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들이 영혼 불멸이나, 몸과 영혼의 분리의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는 한 번도 없다고 하였다. 무지가 이렇게 용감하게 하였다고 본다. 이 단어들이 육체와의 분리의 의미로, 불멸의 영혼으로 사용된 것을 살펴보자.
특히 마태복음 10장 28절의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의 구절에서도 분명히 몸과 영혼의 분리에 대한 말씀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안식교측에서는 이 구절에서의 영혼(푸쉬케)을 정신이나 마음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식교의 이러한 주장은 맞지 않다. 몸이 죽으면 마음도 정신도 죽는 것이지 어떻게 몸만 죽고 마음이 남아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이 본문의 영혼(푸쉬케)을 안식교식으로 ‘정신’으로 번역해 보자. 이렇게 된다. “몸은 죽여도 정신(푸쉬케)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정신(푸쉬케)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안식교의 말로 하면 육체와 구별되는 정신이 따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몸은 죽어도 죽지 않는 정신이 있나보다. 몸이 죽으면 정신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구절(39절)의 푸쉬케를 안식교식으로 ‘마음’으로 번역해 보자. “자기 마음(푸쉬케)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마음(푸쉬케)을 얻는 자는 잃으리라.” 전혀 의미가 통하는 말이 되지 않는다.
영혼(프뉴마)이 육체와의 분리의 개념으로 사용된 구절들도 많다. 눅 23:46에 예수님의 “내 영혼(프뉴마)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경우와, 행 7:59에 스데반이 순교를 당할 때 “주 예수여 내 영혼(프뉴마)을 받으소서”라는 말씀이 있으며, 눅 24:39에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영(프뉴마)은 살과 뼈가 없으되”라고 하셨다. 안식교측은 영혼은 살아 있는(살과 뼈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안식교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준다.
그리고 안식교는 불멸의 존재로서의 영혼이 쓰인 경우가 없다고 했는데 이 역시 반대이다. 우선 성령님에 대하여 (프뉴마)가 쓰였다. 안식교의 말대로 프뉴마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면 프뉴마가 성령으로 번역된 수백 구절이 있는데 성령님은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실 때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셨는데(눅 23:46) 이 때도 프뉴마를 사용하셨다. 안식교의 이론을 따르면 프뉴마가 멸절될 것이니 예수님도 멸절되었다는 말로서 이는 마귀왕 바알세불의 주장일 것이다.
영원 지옥의 개념
안식교측에서는 성경에서 지옥(게헨나)이라는 용어가 예루살렘의 남쪽에 있는 시체와 쓰레기 버리는 곳인 힌놈 골짜기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지옥의 불은 꺼지지 않는 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격’이라는 말이 원래 ‘가면’이라는 말에서 왔으니 인격이란 그 사람의 내적 본질과 상관이 없이 뒤집어 쓰는 가면과 같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단’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가치가 부여되지 않은 의미로서, 즉 ‘분파’라는 말에서 왔다. 그렇다면 안식교에서 이단이란 말에 그리 열을 올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록 지옥이란 말이 게헨나란 말에서 왔지만 이는 사후에 갈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영원한 지옥을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에 해당되는 의인들은 영(아이온)생에, 염소에 해당되는 악인들은 영(아이온)벌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다(마 25:46). 의인이 들어가는 영생이 영원한 것이라면 악인이 들어가는 지옥도 영원하다는 말이다. 특히 악인이 들어가는 영벌을 묘사하기를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고 하셨다. 여기 ‘영원한’이란 말은 ‘영원하지 않은’ 영원인가?
안식교의 음식물 교리는 화잇의 거짓 계시의 산물이다
안식교의 음식 문제의 교리는 두 가지의 부분이 있는데 하나는 부정한 음식은 먹지 말라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채식을 하라는 교리이다.
부정한 음식에 대한 교리
안식교는 레위기 11장에서 부정하고 가증하다고 하는 음식을 금하는 것을 교리로 가르치고 있다. 즉 구약에서 부정하고 가증하다는 음식은 지금도 부정하고 가증하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증해 보자.
① 부정과 정결의 규례는 폐지되었다.
레위기 11장의 부정과 가증의 규례는 구약의 규례이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십자가의 구속으로 이 모든 규례가 폐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에서 명백하게 증거하기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너희를 폄론치 못하게 하라”(골 2:16-17),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고 했다. 이처럼 구약의 부정하고 가증한 모든 규례는 다 폐지된 것이다.
구약에는 부정하고 가증한 것에 대한 여러 가지 규례가 있다. 시체를 만지는 자는 7일간 부정하고(민 19:11:), 경도하는 여인이 부정하고(레 12:5), 출산한 산모가 부정하다(아들 33일-레 12:4, 딸 66일-레 12:13). 이러한 규례들은 구약의 규례들로서 신약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안식교의 주장대로 이러한 구약의 규례들이 지금도 적용된다면 시체를 만진 자는 7일간 교회에 나오지 말아야 하며 모든 부정한 환자들은 정결 예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부정과 정결의 규례들은 십자가에서 폐한 것들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골 2:14-19).
② 모세 율법 이전에 있던 규례도 폐해졌다.
안식교는 부정한 음식의 규례가 모세 율법 이전에 제정된 것이므로 폐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영문교리문제 부정한 음식). 즉 다른 부정의 규례는 모세의 율법에서 규정한 것이지만 부정한 음식에 관한 것은 모세 이전에 있었던 것이므로 모세의 율법은 폐했어도 이것은 폐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모세 이전에 있던 규례는 폐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할례의 규례는 분명히 모세 이전에 제정되었지만(창 17:5) 분명히 폐했고, 제사 제도도 모세 이전에 있었으나(창 4:4-5) 이 또한 분명히 폐했다. 부정의 규례도 마찬가지로 폐했음을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골 2:16, 딤전 4:4, 롬 14:14, 20, 고전 10:25, 골 2:17).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히 9:10)고 한 말씀을 보아도 분명하다. 이로 보아 모세 이전에 있었던 규례이기 때문에 폐하지 않는다는 안식교의 주장은 오류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성경의 말씀을 굳이 부인하고 구약의 부정과 정결의 규례를 지키겠다는 안식교와 같은 율법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15),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롬 14:20)라고 하셨다.
③ 베드로의 환상(행 10:9-22)을 통해 증거된 바도 마찬가지다.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의 환상 역시 부정과 정결의 규례가 폐하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방인을 꺼리는 사도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내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부정한 음식을 깨끗케 하신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셨다. 베드로에게 환상 중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시더라”(행 12:10-12)고 하셨다. 이는 이방인을 꺼리는 베드로에게 부정과 정결의 구별이 없어진 것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졌으니(엡 2:11-18) 거리낌 없이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교훈을 주신 것이다.
화잇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교훈에 모순되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 부정한 것을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일이 분명하므로 이런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이다. 부정과 정결의 규례는 확실히 폐하여진 것을 이 환상이 더욱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롬 14:20)라고 하였다.
④ 신약에서는 부정한 음식을 금하지 않았다.
안식교가 말하는 것처럼 세상 끝까지 부정한 음식을 금해야 한다면 반드시 신약성경에 언급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언급이 없다. 사도행전 15장에 이방인 가운데 믿는 성도들에게 요긴한 몇 가지의 금해야 할 규례를 전하는 내용이 세 번 언급되었나(15장에 두 번, 20장에 한 번) 부정한 음식에 관한 언급은 없다. 부정한 음식의 규례가 초대 교회에 있었다면 당시의 이방인이 개종했을 때 가장 시급한 것은 이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도 이러한 금지 규정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부정한 음식의 규례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이다.
⑤ 건강에 대한 법칙도 폐해진 것이다.
안식교는 건강에 대한 모든 법칙은 세상 끝가지 필요하므로 건강법인 부정한 음식의 규례도 폐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 주장이다. 구약의 건강에 대한 법칙도 다 폐해졌기 때문이다. 구약의 건강에 대한 법은 부정한 음식에 관한 것 외에도 씻는 법(레 15:27), 문둥병의 결례(레 13), 유출병의 결례(레 15), 할례 등 많은 건강법이 있었다. 안식교식으로 말하면 이런 규례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법만은 세상 끝까지 폐해지지 않는다는 안식교의 주장은 성경과 맞지 않다. 안식교인들은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써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3:9)라는 말씀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안식교의 채식교리
안식교는 구약의 부정한 음식에 대한 문제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육식을 금지하고 채식을 강력히 주장하고, 심지어 육식 문제를 구원 문제와도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이 하나의 건강의 문제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화잇의 거짓 계시에 의해 교리가 된 점이다. 화잇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백성이 육식에 대항하여 굳게 서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게 내게 제시되었다. 하나님께서 만일 당신의 백성이 이 기별에 유의하기를 원하시지 아니하신다면 저들이 깨끗한 피와 명석한 정신을 갖기 원할진대 육식의 사용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기별을 30년 동안이나 그들에게 전하셨겠는가? 육식을 함으로써 동물적 성질이 강화되고 영성은 약화된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교회에 보내는 권면 2권 412쪽), “유지(동물의 기름)을 넣지 않고 가능한 원상을 살려서 준비한 곡물과 과실은 승천하기 위하여 준비한다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의 식탁에 차려질 음식이다”(위의 책 398쪽), “고기를 먹으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빛과 조화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음식물과 식생활에 관한 권면 442쪽)고 말한 점을 유의해야 한다. 반증해 보자.
① 육식은 하나님께서 직접 허락하신 것이다(창 9:2-3).
육식은 사람이 스스로 먹기 시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직접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안식교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변명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인류의 수명을 단축하기 위하여 육식을 허락하셨다는 것과, 또 하나는 홍수 후에 식물이 부족해서 일시적으로 육식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화잇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긴 인류에게 동물성 음식을 먹도록 허락하시어 그들의 죄스러운 생애를 단축하게 하셨다”(위의 책 432-433쪽)고 했다. 또한 “홍수후 지상의 모든 초목이 멸절될 때까지 인간은 육식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위의 책 452쪽), “고기를 허락하신 때는 홍수 바로 후 식물이 심히 부족한 그때이다”(위의 책 452쪽)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우선 인간의 수명을 단축하기 위하여 육식을 허락하였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는 위의 말씀을 주실 때 저주로서 주신 것이 아니라 복으로서 허락하신 것이란 점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창 9:1)라고 되어 있다. 안식교식으로 하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저주하여 (육식을 허락하셨다)”라고 해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이 육식을 하여 인간의 수명을 짧게 살도록 하셨다면 그렇게 짧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노아 전에는 인간의 수명이 900세까지에도 이르렀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을 이렇게 단축하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런데 안식교인들이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하여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된다. 채식이 건강과 장수를 우상화하는 현대인들에게 매혹적인 이슈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기독교의 교리가 될 수는 없다.
셋째는 사실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하면 인간의 수명이 노아 전과 같이 수백 년을 사는가? 채식을 했을 것으로 믿어지는 화잇 역시 100세도 넘기지 못하고 80대에 죽었다. 왜 노아 전처럼 살지 못하고 이렇게 빨리 죽었는가? 몰래 고기를 먹었는가? 안식교가 말하는 것처럼 홍수 전의 900세의 인류 수명이 채식의 효과이며, 홍수 후의 120세로의 수명 단축이 육식의 영향이라면, 채식하는 안식교인들이나 채식하는 산 속의 승려들 중에 수백 년 이상의 수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김목사는 안식교인들이 육식을 하는 건강법을 좇는 사람보다 더 산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그러나 실제로 세계적인 장수촌인 러시아의 코카서스 지방이나 일본의 오끼나와 지방의 장수자들은 육식을 하고 있다. 육식을 하는 건강법에 의해서도 130세에 도전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인간의 수명 단축은 육식이 아니라 죄악의 영향이며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창 6:3).
홍수 후에 식물이 부족해서 일시적으로 육식을 허락하셨다는 말에는 이런 모순이 생긴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을 기만하는 분이라는 말이 된다. 선을 위해서 악을 허락하신다는 말이다. 둘째, 식물이 부족해서 육식을 하라고 했다면 하나님은 전능자가 아니시다. 광야 40년 동안 200여 만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을 다 먹이셨던 분이 하나님이시다. 더욱이 고기가 아닌 채소도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신데도 메추라기 고기로도 먹이셨다. 안식교식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빨리 죽이려고 메추라기를 주셨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먹을 식물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육식을 허락하셨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셋째, 역시 계시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복이라고 주신 계명에도 복이 아닌 계명이 있는지 의심을 하면서 성경을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이라고 하시며 주신 육식이 인간을 빨리 죽게 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② 육식이 도덕적, 지적 특성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안식교는 육식을 금하는 이유를, 육식이 도덕적·지적 특성을 약화시켜서 경건 생활에 장애를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식교가 선지자로 믿고 있는 화잇은 말하기를, “육식은 성질을 변화시키며 동물적인 수욕을 강화시킨다. 우리 몸은 우리가 먹는 것으로 형성되는데 고기를 많이 먹는 것은 지성의 활동을 감소시킬 것이다”(위의 책 452쪽), “만일 고기를 끊는다면 종교적인 생활이 보다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며 지속될 수 있다. 왜냐하면 육식하는 것이 색욕의 성향을 활동하도록 극도로 자극하며 도덕적 및 영적인 특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고기를 습관적으로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지적 도덕적 민감성을 무디게 한다”(위의 책 454쪽)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식이 사람을 도덕적으로 더 약해지게 하고 해로운 것이라면 하나님의 신실성과 도덕성에 의심이 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롭고 악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안식교인들은 그런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③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기를 주셨다.
안식교는 채식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민수기 11장을 인용하여 광야에서도 고기를 금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원대로 고기를 주셨으나 고기를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재앙을 내리셨다고 해석하고 있다. 화잇은 말하기를,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광야에서 고기를 주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러한 음식을 먹으면 질병과 불순종이 일어날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성격을 부드럽게 하고 더욱 고상한 정신력을 민활하게 활동시키기 위하여 주님께서 죽은 동물의 고기를 그들에게서 제거하셨다”(위의 책 435쪽)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식교의 주장은 성경을 주의 깊게 보지 않고 화잇의 거짓 계시에 의하여 선입견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수 없었던 것은 고기만이 아니고 만나 외에는 채식도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기만을 구한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먹었던 식물(채식을 포함한)을 포함하여 구했다. 그래서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 값없이 생선과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민 11:5)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들이 재앙을 당한 것은 고기를 먹었기 때문이 아니고 애굽의 식물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다(민 11:34).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기를 금하신 적이 없다. 그 증거로,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릴 때마다 고기를 먹어야 했다(레 6:26, 29). 안식식교인들이 보는 성경에는 고기를 먹는 제사장들이 재앙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제사장들이 육식을 함으로 동물적인 성격과 질병을 계속 겪었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④ 우리의 모본이신 예수님도 육식을 하셨다.
육식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해로운 것이며 금해야 한다면 우리의 모본이신 예수께서 채식만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 당시 백성들에게 고기를 주셨다(요 6:11). 예수님 자신도 생선을 잡수셨다. 그것도 부활 후에 말이다(눅 24:42-43).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고기를 주셨다(요 21:9-10). 바울도 분명히 고기를 먹은 흔적이 있다(고전 8:13).
구약에서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친히 고기를 주셨다(왕상 17:6).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도 고기를 먹었다(창 18:6-8).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마다 고기를 구워 먹으라고 명령하셨다(출 12:8-9). 구약의 제사장들도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레 6:26-29).
우리의 모본되시는 예수님도 잡수셨으며,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도 먹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허락하셨던 육식을 화잇은 왜 금하라 하는가? 거짓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교회와신앙>측 지난 호 글에 대한 소견
<교회와신앙>은 여전히 내용의 핵심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며 표현의 기법이나 임기응변식의 답변과 비판으로 독자들을 오도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우선 지난 호의 제목을 “안식교의 내세관은 여호와의 증인의 것과 유사하다”는 것으로 정한 것을 보면, 독자들로 하여금 안식일교회가 여호와의 증인과 유사한 집단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려고 하는 의도가 보인다. 모든 교파마다 공유하는 교리가 있고 상반되는 교리가 있는 것인데,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장로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는 안식일교회의 것과 같다”는 식으로 표현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대성 목사는 고증을 선명하고 친절하게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을 소제목으로 부각시켜 놓았는데, 필자는 그 동안의 모든 인용문에 대하여 충실하게 출처를 밝혀 놓았다. 출처를 밝히지 않는 두 부분 중, 한 가지는 필자가 서적들을 통해서 역사적 사건들을 연구하면서 개인적 판단으로 쓴 글인데, 출처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콘스탄틴 황제의 일요일 휴업 명령인데, 어느 정도 상식에 속하는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에 출처를 밝히지 않았으나 그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여기에 그 출처를 밝혀 둔다(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3, 380).
그 정도로 상대방의 정확성을 요구하려면, <교회와신앙> 1997년 2월호 126쪽에 “안식교는 처음부터 부정한 음식을 금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안식일교인들도 부정한 음식들을 먹었고 화잇도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말도 있다”고 한 부분에 대한 출처와 증거를 제시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1859년에 안식교 내에 돼지고기를 금해야 한다는 A씨 부부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이름은 1860년에 명명(命名)되었고 1863년에 조직되었으므로 1859년에는 안식일교회라는 이름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때였다.
글에 좀더 신중을 기해 줄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분별력이 없는 독자들을 오도하기 위하여 말을 임의로 만들어 사용하는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안식일교회측에서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일요일예배나 크리스마스, 부활절 축제 등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이교의 제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와신앙>은 그것을 이렇게 왜곡 표현하고 있다(2월호 128쪽). “왜 안식교는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직접 들은 교부들이 태양신을 섬기기 위해서 주일을 정했다는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장을 하는 것일까?” “교부들이 태양신을 섬기기 위하여 예수님의 생일을 12월 25일로 정했다는 주장은 무지한 소치에서 나온 말이다”. 안식일교회는 일요일예배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일요일예배나 크리스마스 축제의 목적이 태양신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그 방법이 잘못되어 문제가 생긴 것이지 그가 다른 신을 섬긴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노예에 대한 화잇의 견해에 대하여
1월호 논쟁에서 <교회와신앙>측이 엘렌 화잇이 저술한 책 초기문집 283쪽의 내용이라고 하며 노예 제도에 대하여 추가적으로 언급한 부분이 있었다. 확인한 결과 원문이나 번역본 283쪽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기에, 2월호에서 정확한 출처를 다시 요청한 바 있다. 필자가 다시 그 책(1993년판)을 앞뒤로 살펴본 결과 그러한 언급이 279, 280쪽에 있어서 여기에 그 답변을 제시한다. 그 내용 전체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다. ① 주인들의 무자비한 학대 속에서 자신의 의지나 양심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던 노예들은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행 4:12)를 영접하지 못했으므로 구원을 받지는 못할 것이지만, 그 노예의 상태는 자신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간주하여 불로 멸망당하는 일이 없게 하실 것이다. ② 노예를 짐승처럼 다루며 학대한 주인들은 멸망을 당할 것이다. 주인들이 일곱 재앙을 만날 것이라는 언급은,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한 대로, 일곱 재앙과 그리스도의 재림이 현재에서 볼 때에는 언제나 미래적인 사건이지만 그것을 항상 현재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준비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인 표현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3).
히브리서 4장 9절 ‘사바티스모스’의 해석에 대하여
히브리서 4장 9절을 보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전히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는 뜻으로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여기에서 ‘안식할 때’라고 하는 말은 이미 지난 호에서 설명한 대로 헬라어 ‘사바티스모스’라는 말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합성어이다. 박창환 편 헬라어 사전에 나온 이 단어의 뜻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안식일의 휴식 Sabbath rest, 안식일 준수 Sabbath observance 히 4:9. 이렇게 명백한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신학적 해석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 단어를 억지로 ‘안식’(혹은 휴식)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양심적인 성경 학도의 자세가 아니다. 성경에 나타난 분명한 의미를 신학적으로 해석한다고하여 천주교 신학, 장로교 신학, 감리교 신학 등이 각각 해석을 달리하기 시작하면 성경은 하루 아침에 변질되고 말 것이다.
다시 한 번 분명한 답변을 요청한다
본인은 1월호에서 분명한 답변을 기대하는 세 가지 질문을 한 바 있다. 그런데 답변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첫째, 안식일이 폐지된 것인지, 아니면 안식일 자체는 변동이 없고 요일만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된 것인지를 질문하였다. 그러나 <교회와신앙>측은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말과 폐해졌다는 말은 다 맞는 말이다. … 그런 점에서 안식일이 폐해졌다는 말도 맞고, 완성되었고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말도 맞다. … 오늘의 주일은 분명히 안식일 개념에서 온 부분도 있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 중심의 종교가 주일 중심의 종교로 바뀌었다고 보아야 더 맞다고 본다”(2월호 127쪽)고 말하면서 분명한 답변을 내리지 못한 채 횡설수설하고 있다. 심지어는 “1주일 중에 하루가 주의 날이 아니라 7일이 주의 날인 것이다”(상동)라는 말까지 사용하면서, 일요일이 주의 날(주일)이라고 하던 종래의 주장에 대해서도 스스로 흠집을 내고 있다.
둘째, 일요일예배의 기원을 성서적으로 역사적으로 밝혀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성경적 근거없이 “교부들에 의해서 복음이 우리에게 전수되었고 또 기독교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상동)는 말로 대치하고 있다. 일요일예배에 대한 확실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여 주기 바란다.
셋째, 장로교에는 다니엘 8장과 9장의 2300주야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답이 없다. 다른 교파의 어떤 교리를 비판하려면 그 비판한 부분에 대한 바른 해석과 정통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마땅한 것이다. 변두리에서 맴도는 표현들을 자제하고 핵심적인 문제로 들어가 2300주야에 대한 장로교회측의 분명한 해석을 제시해 줄 것을 다시 한 번 요청한다.
그리스도인과 음식물
육식의 해독과 채식의 이로움이 백일하에 드러나 있는 이 문명 시대에 육식과 채식 문제를 가지고 율법주의 운운하며 논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한심스럽고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것을 굳이 문제로 삼겠다고 하니 적절한 변증을 제시하고자 한다.
노아 홍수 이전까지의 식물(食物)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먹어야 할 식물을 정해 주셨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아무것이나 자기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식물의 범위 안에서만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체에 필요한 식믈이 무엇인지를 가장 정확히 알고 계시므로, 사람은 그 분이 정해 주신 것만 잘 섭취하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원래의 식물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 1:29; 2:16). 사람의 원래 식물(食物)은 식물(植物)이었다. 채소류, 견과류, 곡류, 과일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섭취하는 음식들이었다.
노아 홍수 이후의 식물
노아 홍수로 온 세상의 식물들이 죽거나 파묻혀서 먹을 식물이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육식을 하도록 허락하셨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창 9:3,4). 그러면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가족들은 어떤 고기를 먹었을까?
방주가 완성되고 홍수의 시간이 다가올 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새들과 짐승들이 줄을 지어 방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것은 종족 번식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창 7:2,3).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식물(植物)이 없는 상황에서 처음에 고기를 먹을 때 정결한 짐승 중에서 먹었을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종족 번식을 위하여 그것들은 남겨 두어야 했던 것이다. 얼마 후에 식믈이 자라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식물과 정결한 짐승의 고기를 함께 먹으며 살았을 것이다. 노아 홍수 이후에 육식의 결과로 사람의 수명이 급격히 짧아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에 대한 레위기 11장의 구분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중다한 무리로 번성한 후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애굽을 탈출하여 나왔다. 그들이 광야로 나와서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하는 동안 그들을 한 나라로 이 땅에서 번성하며 발전해 나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여러 가지 법규들과 제도들을 마련해 주셨다. 구약성경 레위기 1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음식물에 있어서까지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물고기 중에서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여 주셨다. 육축 가운데서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된 것은 소나 양처럼 발굽이 두 쪽으로 갈라져 있으면서 되새김질을 하는 것들이며 이들은 모두 초식 동물이었다(11:4-7). 물고기 중에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들이 정결한 고기로 구분되었는데, 생태가 정결한 것들이었다(11:9). 새에 대한 구분도 있고(11:13-19) 곤충에 대한 구분도 있다(11:20-23). 족제비나 쥐, 도마뱀, 악어 등 기어다니는 것은 모두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11:42). 이러한 구분 끝에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 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 11:44).
하나님께서 왜 어떤 것들은 먹으라고 하시고 또 어떤 것들은 먹지 말도록 금하셨는가? 그 백성들의 상태를 건강하고 거룩하게 유지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건강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러한 구분을 해 주셨다면, 레위기 11장의 구분은 지금도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규칙인 것이다.
신약의 식물(食物)은 구약의 식물(食物)과 다른가?
구약 시대에 살던 사람과 신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다른가?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 건강이 필요했다면 신약의 사람들도 건강해야 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해야 했다면 신약 시대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해야 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인간의 체질은 동일한 것이며 구약 시대 사람들에게 해로운 음식은 신약 시대 사람들에게도 해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음식법이 신약 시대에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하는 견해는 상식 밖의 주장이거나, 성경의 원칙과는 맞지 않는 자신의 현실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밖에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구약의 모든 율법이 폐지되고 음식도 아무것이나 먹도록 허용된 것인가? 우선 다음의 성경절을 깊이 음미해 보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 10:11~15).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이야기의 배경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이 때 사도 베드로는 욥바에 있었다. 시간이 제 6시(정오)이기 때문에 배도 고팠고 사람들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시에 베드로가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다가 환상을 보게 되었다. 환상 중에 한 보자기에 각양 짐승과 새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먹으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 때 베드로는 그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자기 생활 습관과 관계되는 실제적인 대답을 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십자가 이후의 시대지만 베드로는 부정한 음식들을 먹지 아니하는 식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먹으라고 한 것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직후 베드로는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종들이 이미 집 앞에 와 있음을 보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가서 이방인 백부장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성경절을 가지고 모든 부정한 음식을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다고 하여 아무것이나 먹어도 괜찮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는 것인지 매우 염려스럽다.
오해되고 있는 성경절에 대한 바른 해석
오늘날 성경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오히려 질병의 예방과 건강을 위하여 식생활 개선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에 있다. 그러나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몇 개의 성경절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식습관을 자위하며, 오히려 건강한 식생활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경시하거나 율법주의라고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문맥상으로 오해되기 쉬운 몇 성경절들에 대한 바른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막 7: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주변에 모였다가 그 분의 제자들이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고 저들의 유전에 비추어 제자들을 비난하였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온갖 죄악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 중 한 대목이 바로 이 말씀이다. 먼지나 때가 조금 묻은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사람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속 마음 때문에 사람이 더러워지는 것이니 마음을 정결케 하라는 교훈의 말씀인데, 이것을 가지고 건강상 좋지 않은 음식을 먹어도 되는 이유로 삼는 것은 성경을 너무 편협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도 이렇게 알아 듣지를 못하느냐?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냐? 모두 뱃 속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뒤로 나가 버리지 않느냐? 그것들은 마음 속으로 파고 들지는 못한다’ 하시며 모든 음식은 다 깨끗하다고 하셨다”(막 7:18, 19).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다”(막 7:19)는 말은 우리가 먹는 식물 자체는 더럽지 않다는 말이지, 그 동안 부정하게 취급되던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고 다시 선언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롬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이 당시 로마에는 여러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이교로부터 개종한 그리스도인들,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 기독교인이면서 절기를 계속 고수하는 사람들 등 갖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고 저들 나름대로의 분파들이 있어서 서로 비난하며 분쟁하는 일이 많았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며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한 고기까지를 포함해서 아무것이나 먹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채식과 육식을 가리지 않고 함께하는 식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 14장 21절의 말씀을 빌리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된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14장 1절의 ‘모든 것’이란 고기와 포도주 등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가능하면 그러한 것들을 먹지 않음으로 형제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롬 14:5, 6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이 때 로마에는 유대인의 절기와 관련하여 세 개의 파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요시하는 유월절파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요시하는 요제절파, 그리고 아무 파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월절파는 1월 14일을 중요시했고 요제절파는 1월 16일을 중요시했다. 물론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 날이나 같게 여겼다.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논쟁은 단지 날짜뿐만 아니라 단식에 관한 실행 성격에 대해서도 그랬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하루를 단식해야 한다고 했으며, 다른 이들은 이틀을,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은 그 이상 더 단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참조: 윤대화, 주일론, 중권, 계림문화사, 1988, pp.159-173 ). 위의 성경절은,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로마의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롬 14:14, 20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로마서 14장에 기록된 ‘음식물과 믿음’ 문제는 로마서보다 약 1년 뒤에 기록된 고린도전서 8장에 다시 언급되어 나온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8장은 우상의 제물에 관한 것이다. 서기 1세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우상의 제물’ 문제는 대단히 심각했다. 각종 이방신들에게 드려졌던 고기와 포도주들이 시장으로 흘러 들어왔기 때문에 시장에서 고기를 사 먹으면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일 가능성이 많았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시장의 고기를 일체 사 먹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고전 8:4)라고 생각하면서 그러한 고기들을 먹었다.
고기 자체가 속된 것은 아니며, 우상이 아무것도 아닐진대 우상의 제물로 드려졌다고 해서 고기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니 먹어도 지장이 없다는 믿음으로 먹은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이러한 생각과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고전 8:7), 어떤 사람들은 양심에 꺼려서 그러한 고기를 먹지 못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기들을 속되게 여기는 자에게는 속된 것이므로 양심이 허락지 않으면 먹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양편을 모두 다 정죄하지 않고 서로 이해하며 살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은 분명히 밝혀두었다.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 결국 사도 바울은 양편 모두를 이해하면서, 로마서 14장에서는 고기 같은 것을 먹지 않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8장에서는 고기 먹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영원히 먹지 않겠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서로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딤전 4:1-5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성령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모두 떠나간 후에 나타날 이단들에 대하여 미리 말씀해 주셨다. 실제로, 사도들이 모두 사라진 2세기 초부터 영지주의를 비롯하여 마르시온파, 몬타니즘 등의 각종 이단들이 맹렬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 이단들은 한결같이 육체와 물질 세계를 경멸하며 금욕주의를 권장하였다. 특히 마르시온파는 혼인을 통한 성교(性交)와 육식을 철저히 금하고 있었으며 몬타니즘은 “독신, 금식, 일체의 육식으로부터의 절제 등을 내용으로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 생활을 강조”하였다(워커, 세계 기독 교회사, 대한 기독교 서회, 1978, p. 49-54).
따라서, 지금 이 시대에 위의 성경절을 인용하여, 적절한 음식물을 통한 건강 기별을 전하는 사람이나 교회를 ‘미혹케하는 영’으로 간주해 버린다면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 당시 이단들의 특징은 식물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혼인을 금하는 문제와 항상 연계되어 있는 것도 주의해서 살펴야 하는 문제이다. 만약 음식 문제만 따로 떼어서 생각한다면 혼인 문제도 별개로 해석하여 오늘날 천주교나 불교의 성직 제도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위의 성경절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함께 좀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성경절이다. 사도 바울은 위의 성경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식물을 비롯한 모든 물질 세계를 죄악시하는 이단들의 미혹과 금욕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과 의미에서 식물을 폐하며 극단적인 금욕을 가르치는 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고, “식물은 하나님의 지으신 바니” 감사함으로 먹을 것을 사도 바울은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히 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떤 새로운 가르침을 들으면 쉽게 동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시에도,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확고부동한 진리를 깨닫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 음식물과 관련된 그릇된 교리에 빠져 끌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음식을 교리화하거나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삼을 때는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음식은 하나님의 성전된 몸을 건강하게 보존하고 관리하는 차원에서 순리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주제이며, 그것을 어떤 의무감이나 교리적인 문제로 다루면 유익이 없는 것이다. 건강한 식생활 문제는 본인이 부담을 가지고 억지로 실천해도 별로 유익이 없고, 아직 연약한 믿음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지워주는 방법으로 권면해도 유익이 없는 것이다. 음식 문제는 본인의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스스로의 선택이 이루어지도록 가르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성경의 부정한 음식과 육식의 문제
음식에 관한 문제는 교리적인 차원이나 이단의 시비를 가리는 어떤 항목으로 취급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음식은 어디까지나 위생이나 건강에 관련된 문제이며 개인의 양심과 의지, 그리고 전인적인 건강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이성과 상식으로 판단하고 수용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부정한 고기 먹는 것을 금하시는가? 좀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왜 최초의 식물로 채소와 과일을 주셨을까? 최신 과학은 그 이유를 너무도 상세하고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현대 의학과 과학이 밝혀 놓은 사실에 의하면 짐승의 피는 일반적으로 노폐물에 의하여 오염되어 있으며 그 속에는 뇨, 요산, 담즙, 크레아틴, 크리닌, 아미노산, 탄수화물, 락틴산, 콜레스테롤 등의 해로운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Abraham White, Philip Handler & Emil L. Smith, 생화학의 원리, p. 802). 또한 동물성 지방은 퇴행성 심장병을 높이고 동맥경화, 뇌졸증, 당뇨병, 암 발생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이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져 있다(I. Fisher, The Influence of Flesh-Eating on Endurance, Yale Med. 1906-1907). 레위기 11장에 금기된 동물들, 새들, 땅에 기는 것들은 특별히 콜레스테롤치가 높아서 성인병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암, 신장염, 통풍, 심장병, 골연화 및 골다공증, 동맥경화, 고혈압, 당뇨병 등 기타 여러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Jay M. Hpffman, The missing Link, 1981. 등 다수의 서적에 기록됨).
전 연세대학교 교수이며 감리교회의 명예 장로인 이길상 박사는 그의 저서 “성서에서 본 식생활 건강법”(기독교문사, 1994) 23쪽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기 같은 동물성 단백질과 기름을 많이 섭취하면 체내에서의 이들 식물의 분해 과정에서 아주 무서운 황산, 인산, 요산, 젖산 등과 같은 유독한 산이 형성되어 피를 산성화 시킨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혈액의 산독화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육식의 해독과 채식의 이로움이 여러 분야에서 입증되고 밝혀지는 이 문명 시대에, 해로운 음식 삼가하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건강하게 살라고 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율법주의 운운하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일이다.
전인(全人) 회복의 복음 원리와 육체적 건강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인간회복’이다. 죄로 인해 병들고 연약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을 죄짓기 전의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죄인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질병 없이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일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참된 신앙은 인간의 전인적 회복을 추구해야 마땅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 상태나 성격이 체질(體質)과 관계있다는 것과, 체질은 섭취하는 음식물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과학적 사실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1983년도 11월호 89쪽에 ‘음식도 뇌 기능에 영향을 준다’는 제목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요즘 들어 뇌가 영양소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우리들의 기분, 긴장도, 기억력, 그리고 심지어 아픔을 느끼는 감각까지도 우리들이 먹는 음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과학자들은 밝혀냈다.”
1931년 J. B. 오르 씨와 릴케 씨는 “동물성 단백질인 육식과 성격의 포학성에 관한 두 민족에 대한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발표에 의하면, 육식과 돼지 피와 우유와 푸딩을 먹는 마사이족(族)이 채식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키쿠유족(族)을 약탈하고 죽이는 참상이 자꾸 일어나고 있었다. 계속 피해를 입던 키쿠유족은 식생활을 바꾸어 고기와 피를 먹기 시작했고 얼마의 세월이 흐른 후 키쿠유족은 매우 호전적인 사람들이 되어서 마사이족뿐만 아니라 아무 사람이나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이는 검은 살인 집단 ‘마우마우’를 형성하여 온 세상을 떨게 했다는 것이다(이길상, 성서에서 본 식생활과 건강법, 1994년판 25쪽).
이와 같이 성경이 금하는 동물, 해물, 그리고 지방질과 피를 먹을 때 각종 질병의 문제와 성격상의 문제들이 야기된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생각해 볼 때, 성경에 나타난 복음의 핵심인 ‘인간회복’과 ‘전인(全人)건강’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과 함께 건강의 기별을 전하고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구약의 율법에 얽매여 있는 율법주의로 오해받고 있는 것은 무모한 편견과 왜곡된 신앙적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사전 중의 하나인 브리태니카 사전(Medical & Health Annual Encyclopeadia in Britannica, 1978, p. 82)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이라는 소제목하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건강한 생활습관의 유익한 효과에 대해 관찰하고자 멀리 산 속에까지 여행할 필요가 없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교인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그 연구에 의하면, 그들은 캘리포니아의 인구 전체의 동일한 연령 및 성별 계층에 비하여 각종 질병으로부터의 사망 위험이 낮다는 것이다. 재림교인들은 흡연과 음주와 육식을 삼가한다. 그들은 흡연이나 음주와 직접 관계되는 질병으로부터 오는 사망율이 현저하게 낮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질병들에 걸리는 비율도 낮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1983년 4월호에도 ‘암을 예방할 수 있는 식생활’이라는 제목과 함께 동일한 기사가 게재된 바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사는 제칠일안식일교도들은 다른 미국 사람들보다 결장암이나 직장암에 걸리는 비율이 훨씬 낮다.” 이와 같은 특수한 결과들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자 최선을 다해 온 결과인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3:16, 17; 6:19, 20).*
안식일교회 大논쟁9(97년 4월호)
--밀러의 재림운동과 안식일교회--
<교회와신앙>측
안식교는 시한부종말운동으로부터 출발된 집단이다.
지난 호에 대한 반증
돼지고기와 안식교
부정한 음식을 금하고 있는 안식교인들에게 초기에는 부정한 음식을 먹었다는 것과 화잇에게 돼지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뜻의 계시가 있었다는 점은 대단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김대성 목사는 화잇의 돼지고기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은 못하고 안식교의 이름이 1860년도에 명명되었고 1863년에 조직되었기 때문에, 그 때는 안식교의 이름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안식교 내에서 돼지고기를 금해야 한다는 A부부에 대한 책임이 안식교에는 없는 것처럼 말하였다. 돼지고기를 먹었던 그 시대나 화잇이 돼지고기에 대한 계시를 받은 그 때는 안식교가 아니었다는 말인 것 같다.,다음과 같은 잘못이 있음을 지적한다.
첫째는, 안식교의 시작을 안식교란 이름이 명명되고 조직되었던 해로 한다면 안식교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1860년이나 1863년보다 앞서 받은 화잇의 계시들에 의해서 안식교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안식교는 이미 그 전인 1842년에 제1차 재림총회가 있었고(오만규, 재림교회사 61쪽), 화잇은 1844년부터 계시를 받았다(성서기초교리, 328쪽). 1847년에는 화잇이 안식일에 관한 성소의 계시를 받았다(오만규, 재림교회사 64쪽). 김목사의 그런 논리로는 안식교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화잇이 1860년이나 1863년 전에 이미 받은 계시들 위에서 안식교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둘째는, 화잇의 계시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문제는 화잇의 계시이다. 안식교는 화잇의 계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요, 이미 앞에서 김대성 목사가 밝혔듯이 화잇의 계시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으며, 모든 안식교인들이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교가 공식 명칭인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 교회’라는 이름이 1860년에 명명되었다고 해서 그 전에 받은 화잇의 계시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화잇의 그 전 계시들 중에 어떤 것이 참 계시이며 어떤 것이 참된 계시가 아닌지 밝혀야 할 것이다. 1860년 전의 화잇의 계시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누구보다도 안식교인들이 스스로 안식교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노예제도에 대한 화잇의 계시 문제
노예제도가 재림시까지 있을 것이라는 <초기문집> 283쪽(1976년판)의 화잇의 계시에 대하여 김대성 목사는 원문이나 번역본에도 없다고 주장했다가(97년 2월호) 한 달 뒤인 3월호에서 1993년판 번역본에 그같은 내용이 있다고 시인했다. 그런데 원문에 관한 언급은 피한 채 역본에 그 내용이 있음을 늦게 시인하면서 노예 문제와 노예의 주인 문제에 대하여 나누어서 대답을 하였다. 노예는 자신의 의지나 양심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기에 불로 멸망당하는 일이 없게 하신다는 것이요, 그리고 주인들이 일곱 재앙을 만난다는 것은 미래의 사건을 현재로 내다보고 한 말이라는 것이다. 문제점이 무엇인지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역본에는 있음을 시인하였는데 원문에도 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역본에 있다는 말인지, 어떤 역본에는 있고 어떤 역본에는 없다는 것인지 말하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밝혀주기 바란다.
그런데 원문에 있느냐 없느냐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 김목사가 처음에는 출처의 문제를 삼았다가 이제는 그 내용은 있지만 하자가 없다고 변증하고 있음이 이상한 일이다. 인간이란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다. 김목사가 그렇게 자신있게 “원문에도 역본에도 없다”고 했다가 이제 있다고 한 실수를 이해한다. 그러나 출처의 문제를 제기하려면 그 내용에 하자가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출처가 확인되니 이제는 그래도 화잇의 계시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니 이는 화잇의 모든 말과 글은 무엇이든 절대로 틀림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한 변증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둘째, 노예는 무자비한 학대 속에서 자신의 의지나 양심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으니 불로 멸망당하는 일이 없게 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화잇과 김대성 목사의 인간관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노예는 양심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이다. 노예는 예수 믿을 양심이 없다는 말이다. 누구의 영혼이 누구에게 예속될 수 있는가? 이 땅에 어느 정도 자유가 있어야 예수를 믿을 양심을 소유하는가? 지금도 형식적으로는 노예가 없는지 몰라도 옛날의 노예보다 더 학대받으며 살아가는 현대판 노예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양심의 자유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점은 구원이 이원화된다는 점이다. 지배하는 자의 구원과 지배받는 자의 구원이 달라질 것이다. 김대성 목사의 말에 의하면 노예들은 어차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양심도 없으니 결국 불로 심판을 받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화잇이 보는 노예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인간인 모양이다. 화잇이 보는 인간에게는 양심의 자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나누어지는가? 아니면 인간 자체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인간도 있고, 있는 인간도 있는가? 구원과 심판이 이원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과 어긋나는 사단적인 소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셋째, 김목사는 화잇이 당시 사람들이 살아서 재림을 맞이할 것처럼 말한 것은 미래적인 사건들을 현재적인 것으로 말하고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며 마태복음 10:23을 그 증거로 들었다. 우선 화잇의 사단적인 계시를 먼저 놓고 생각해 보자. “나는 이 총회에 출석한 무리들을 보았다. 천사는 말하되 더러는 인내의 밤이 되고 더러는 마지막 일곱 재앙의 대상이 되고 더러는 살아서 지상에 남아 있어서 예수께서 오실 때에 변화하게 될 것이다”(MWHC. 102쪽).
이는 한 마디로 논리적인 평형도 신학적인 평형도 맞지 않는 말이다. 화잇은 그 당시 일곱 재앙이 자신이 살아 있는 그 때를 기준으로 조만간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안식교에서 이해하는 일곱 재앙이란 말세에 재림 직전에 있을 사건으로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이라고 보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우선 미래의 사건을 현재로 표현했다면 ‘일곱 재앙’이란 말과 ‘살아서’라는 말의 시기가 같아야 한다. 오늘날의 시점으로 볼 때 ‘일곱 재앙’이란 말의 시제는 미래이고 ‘살아서’라는 말의 시제는 과거이니 미래의 사건을 현재로 내다보고 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나는 과거이고 하나는 미래이거나, 하나는 상징이고 하나는 실제라면 개 몸에다 소 다리를 붙여놓은 것과 같고, 쇠와 나무를 붙여 놓고 전기를 통하려고 하는 것과 같고, 그림 위에 그려진 벌판에도 궁전을 짓겠다고 쇠기둥을 세우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마태복음 10:23의 내용은 화잇의 글을 그렇게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 김목사의 말로 한다면 이 땅의 모든 시한부종말론도 잘못될 것이 없게 된다. 미래의 사건을 현재로 말한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안식일 문제의 질문에 대하여
필자는 안식일 문제에 대하여 96년 11월호에서(140-142쪽) 안식일이 폐지된 것이라는 점을 여러 측면에서 변증하였다. 그런데 김목사는 계속 ‘안식일이 폐지된 것인지 요일만 변경된 것인지’ 답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 문제는 전호의 글들을 잘 살펴보기 바라고, 필자 편에서도 기성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주일개념에 대하여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율법과 안식일에 대하여 더 상세히 논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데 지면상 원고지 200매까지 쓰기로 한 종결편인 다음 호에서 자세히 취급하고 싶다.
히브리서 4장 9절 ‘사바티스모스’의 해석에 대하여
필자가 볼 때 김목사는 안식일 부분에 대하여 가장 열을 올렸다고 본다. 그 중에도 위의 본문에 대하여 열을 올리는 것은 이 말로 헬라어를 잘 모르는 기성교인들을 미혹하는데 재미를 보고 또 안식교인들로 토요일을 지키는데 용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 호에서 필자는 이 단어의 언어적인 해석이 ‘안식일’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안식’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를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충분히 제시했다. 그런데도 김목사는 구체적인 변증도 없이 양심적인 성경해석이 아니라는 등의 말을 늘어 놓았다. 다음과 같이 다시 변증한다.
우선, 성경의 어떤 단어든지 언어적이고 문법적으로 해석할 수는 있어도 신학적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종말이 자신이 살아서 이루어질 것으로 말한 화잇의 사단적인 계시를 미래를 현재로 보고 한 말이다는 김목사의 그 말은 신학적인 해석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음으로, 필자가 이 말을 ‘안식’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시한 다른 성경과의 비교와 이유 중에 어떤 것이 틀렸는지 하나만이라도 구체적으로 밝혀주기 바란다.
본문의 문맥을 보면 ‘안식일’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린 가나안을 참 안식의 모형으로(3:16-19), 창조시의 안식일을 참 안식의 모형으로(4:4-5) 말씀하면서 참 안식을 말하고 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참 안식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안식교의 주장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마음의 안식을 말하는 것이다(4:2-3). 즉, 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는 것은 복음을 듣고 구원의 안식을 얻을 때가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개역 성경은 ‘안식할 때’, 공동 번역은 ‘참 안식’, 흠정역(K. J. V.)에서는 ‘한 안식’, 현대어 성경에서는 ‘완전한 안식’, 그리고 새번역에서는 ‘안식하는 일’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바로 이만큼 안식교와 기성교회가 다른 것이다.
다시 한 번 분명한 답을 요한다
그 동안에 안식교 측은 여러 부분에서 답을 회피하고 지나온 것들이 많다. 물론 마지막 호에 다시 한 번 다루겠지만 이 논쟁이 끝나기 전에 회피하지 말고 답해 주어야 할 것이 있다. 안식교 측은 96년 9월호에서 구원론에 대하여 주장하기를, 1888년 안식교 총회에서 율법의 행위가 강조된 구원론이 믿음을 강조하는 구원론으로 대전환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10월호에서 필자는 안식교의 구원 교리가 무엇이 어떻게 대전환되었는지에 대하여 물었으나 지금까지 함구하고 있다. 이 논쟁이 끝나기 전에 대전환된 안식교 교리가 무엇인지 꼭 밝혀주기를 거듭 촉구하는 바이다.
음식물 문제에 대하여
1) 채식과 육식의 문제
안식교측은 채식교리에 대하여 두 가지로 변증하였다.
첫째는 ‘사람이 아무 것이나 자기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식물의 범위 안에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식교는 이러한 주장이 옳다면 왜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지정하신 육식을(창 9:3-4) 금하는가? 육식은 사람이 스스로 취한 식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지정하신 식물이므로 육식을 금하는 안식교의 교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짓이다. 안식교가 여호와 하나님의 믿고 있고 성경의 계시를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한 것을 먹지 말하고 금하는 마귀적인 교리를 빨리 없애야 할 것이다.
둘째로 시대는 바뀌어도 식물은 바뀌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즉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사람이 같기 때문에 식물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교는 자신들의 논리와도 모순되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구약 시대에도 육식을 하였고 신약시대에도 육식을 하였다. 창세기 9장에서 육식을 지정하신 이후에 신약시대에도 바꿔지지 않았으며, 구약의 아브라함으로부터 믿음의 선조들과 제사장 선지자들이 다 육식을 하였고, 신약시대에 예수님도 육식을 하셨으며, 고기를 먹이시기도 하셨는데 거짓 선지자인 화잇의 계시에 따라서 육식에서 채식으로 식물을 바꾸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잘못된 교리인 것이다.
2) 부정한 음식에 관한 문제
안식교측은 부정한 음식을 금하는 문제에 대하여도 두 가지로 변증을 했는데 그 첫째의 내용이 사도행전 10장 11-15절의 베드로의 환상의 내용이다. 이 환상은 부정한 음식의 규례에 대한 폐지를 확실히 증명하는 내용인데도 안식교는 오히려 부정한 음식을 신약시대에도 금하라는 내용으로 해석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자. 이 환상을 주신 배경은 무엇인가? 십자가 이후에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이 무너지고(엡 2:14) 복음은 이방인에게도 전해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방인을 성경에서 먹지 말라고 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과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그런 사상을 가진 베드로에게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기 위하여 바로 이런 환상을 보여주신 것이다. 얼마나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과 이방인을 싫어했으면 하나님께서 세 번이나 말씀하셨는지 짐작이 가는 것이다.
안식교인들로 이 환상이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의미의 환상임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이 환상에서 음식은 먹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요 복음은 이방인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부정한 음식은 금하시면서 이방인에게 복음은 전해져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더러운 방법으로 깨끗한 교훈을 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기만하신다는 말이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불합리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실 수 있는가? 얼마든지 바른 방법으로, 오해도 없는 방법으로 교훈하실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김목사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역시 화잇의 마귀계시를 합리화 하기 위한 전제론적 성경해석으로부터 나온 결과라고 본다.
둘째로는 부정한 음식이 건강 문제이기 때문에 폐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하지만 교리적인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안식교의 주장도 비성경적이고, 또한 안식교인들의 실제 주장과 다르다.
우선 그렇게 주장하면 먼저 성경과 달라진다. 레위기 11장의 부정한 음식의 규례는 건강 문제가 아니란 점이다. 레위기 11장에는 먹지 말아야 될 음식을 소개하면서 그 이유는 부정하고 가증하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건강하기 위해서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하고 가증하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이 건강 문제라면 음행도 건강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사야는 스스로 입술이 부정하다고 했는데(사 6:5) 입술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우상숭배가 가증하다고 했는데(신 7:25) 그것도 건강 문제란 말인가? 구약의 음식 문제는 분명히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교리의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정한 음식에 대한 교리는 폐하신 것이다. 만일 안식교의 말대로 음식의 부정하고 가증함의 규례가 신약시대에도 살아 있다면 지금도 경도하는 여인도 부정해야 하고, 출산한 여인도 부정해야 하며, 시체를 만진 사람도 부정해야 할 것이다. 구약의 부정하고 가증함의 문제는 건강 문제만이 아니고 교리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안식교가 음식 문제를 건강 문제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교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식교의 교리 문답과 같은 <최대의 책에서 얻는 문답>이라는 책 425면의 12문에서 “예수님의 재림시에 어떠한 사람들이 멸망당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그 답으로 이사야 66장 15-17절로 대신해 놓았다.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당할 자가 많으리니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즉 돼지고기나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고도 또 음식 문제는 교리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모든 안식교인들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안식교에서 음식 문제는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임을 증명하는 실례이다.
이 점은 채식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안식교의 선지자 화잇이 그렇다. 화잇은 채식 문제를 계시로 받은 기별인 것이다. 비록 사단의 계시이지만 화잇이 받았다는 계시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백성이 육식에 대항하여 굳게 서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게 내게 제시되었다. 하나님께서 만일 당신의 백성이 이 기별에 유의하기를 원하시지 아니하신다면 저들이 깨끗한 피와 명석한 정신을 갖기 원할진대 육식의 사용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기별을 30년 동안이나 그들에게 전하셨겠는가? 육식을 함으로써 동물적 성질이 강화되고 영성은 약화된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교회에 보내는 권면 2권, 412쪽). “유지(동물의 기름)를 넣지 않고 가능한 원상을 살려서 준비한 곡물과 과실은 승천하기 위하여 준비한다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의 식탁에 차려질 음식이다”(위의 책 398쪽). “고기를 먹으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빛과 조화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엘렌지 화잇, 시조사, 음식물과 식생활에 관한 권면, 442쪽).
위의 주장이 교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먹는 문제인 채식교리가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지 않는가! 즉 채식 문제가 구원문제화 되어 있는데 이것이 교리가 아니고 건강 문제라면 무엇이 교리 문제이고 무엇이 건강 문제인가? 안식교의 채식교리는 교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비성경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교리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더 위선적이고 정직하지 못한 변증이 아닐 수 없다.
비성경적인 시한부종말론으로부터 시작된 안식교
밀러의 재림운동(Millerite Movement)
군 대위 출신의 농부였던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ite, 1782-1849)는 2년간의 개인 성경 연구 끝에 다니엘 8:14의 2천3백 주야에 대한 예언을 잘못 해석하여 재림의 날짜를 정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재림 시기를 1844년 3월 21일로 정했으나 후에 1844년 10월 22일로 확정하게 되었다. 이런 해괴망칙한 날짜가 나온 근거는 다니엘 8:14의 2천3백 주야를 1일 1년 설을 취하여 2천3백년으로 해석하고, 그 기점을 457년으로 하고(에 7장), 유대력의 속죄일을 현대력으로 바꾸면 10월 22일이라 함으로 1844년 10월 22일에 예수 재림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밀러를 추종했던 자는 약 12만 명이나 되었다. 이 운동은 최근에 한국에서 문제가 되었던 92년 10월 28일 재림을 주장했던 시한부 재림운동(다미선교회 이장림 등)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한 1844년 10월 22일에 아무 일도 없게 되자 크게 실망을 하게 되었다. 다른 이단운동이 그러하듯이 이 재림운동에 가담했던 자들은 주로 기성교회에서 나온 자들이었는데 재림운동의 실패 후 자신들의 과오를 회개하고 기성교회로 돌아오지 않고 여러 집단으로 분리되어 새로운 교파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 중의 대표적인 한 분파가 여호와의증인이요 또한 다른 분파가 소위 안식교회(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멸절설에 대한 교리에 있어 여호와의증인이나 안식교가 같은 것이다.
먼저 밀러와 안식교의 관계를 말하기 전에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비판해 본다면 한 마디로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은 비성경적이며 이단적이며 사단의 역사이 일으켰던 종말론 운동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먼저는, 첫째 재림의 날자를 정했다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인 것이다. 성경에 분명히 그 날과 그 시는 하나님의 권한에 있음으로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했는데(행 1:7) 자신이 재림의 날짜를 알아냈다고 선포했으니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그 날짜를 모르므로 그 날을 기다리라는 것인데 그 날자를 정해 놓고 기다리라는 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종말신앙이 필요치 않은 것이 됨으로 성경의 종말사상과는 정 반대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실제적으로 밀러가 예언한 그 날에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거짓 예언, 거짓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선지자는 그 예언한 바가 성취되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밀러의 재림 운동은 거짓 선지자의 사단 운동이다. 화잇이 비록 밀러의 사상을 그대로 다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밀러의 잘못된 시한부종말론 운동에서 발생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안식교는 정통교회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과연 시한부 재림설이 하나님의 기별인가?
안식교는 분명히 밀러의 시한부 재림운동에 의하여 시작된 교파이다. 그러나 안식교인들은 주장하기를 밀러의 재림운동 후에 안식교가 조직되었으니 밀러의 재림운동을 안식교가 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살펴보자. 안식교에서는 자신들이 전파하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교리를 ‘세 천사의 기별’이라고 한다. 그래서 안식교의 업체에서 만들어 내는 상품에다 세 천사의 마크를 붙여 사용할 정도이다. 그런데 안식교의 세 천사의 기별 중에 첫째 천사의 기별이 바로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잇은 밀러의 1844년 10월 22일 시한부 재림설이 하나님의 기별이었다고 주장하고 가르쳤다. 따라서 화잇을 거짓 선지자로 여길 수 없는 안식교로서는 윌리암 밀러의 재림운동이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화잇의 글을 직접 살펴보자.
“윌리암 밀러와 그의 동역자들에게 미국에서 이 기별을 하라는 사명을 주셨는 바 이 나라는 대재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기에서 첫째 천사의 기별에 나타난 예언은 가장 명백하게 성취되었다”(첫째 천사의 기별이란 밀러의 재림운동을 말한다: 필자주). “그 기별이 모든 교회로부터 일반적으로 거절을 당할 때에는 천사들은 슬픔으로 물러갔다”(화잇, 시조사, 대쟁투합본, 415-518쪽).
무슨 뜻인가? 화잇은 이 밀러의 사단적인 시한부 재림설을 하나님의 주신 기별로, 그것도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기별을 당시의 교회들이 받아 들였어야 했다고 하면서 그 기별을 거절할 때 천사들이 슬픔으로 물러갔다고 마귀의 아비 같은 소리를 하였다.
그러나 밀러의 재림운동이 실패한 지 1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식교는 윌리암 밀러의 시한부 재림운동이 하나님의 기별이며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화잇의 글 외에도 안식교의 여러 문헌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특히 한국연합회 목회부 발행 <성서기초교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 때에 천사는 ‘남은 때가 없으리라’고 외쳤다. 이 얼마나 엄숙한 선언인가! 이 때는 무슨 때를 말하는가? 오직 이 예언적 시기는 1844년을 넘어서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 힘있는 천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도다’하는 기별로 땅을 일깨운 것은 이 때, 곧 1844년이었다. 이 기별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만드신 분에게서 온 기별이었다”(한국연합회, 성서기초교리, 299쪽).
화잇과 안식교의 주장이 옳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먼저는, 어떤 종말론도 문제가 될 것이 없게 된다. 92년 10월 28일 시한부종말론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이장림 씨의 종말론도 재림에 대한 경각심을 준 것은 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거짓 운동을 일으키고 그것을 믿도록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이장림의 시한부 재림운동이 마귀의 운동이었던 것처럼 윌리암 밀러의 시한부 재림운동도 마귀의 재림 운동임에 분명하다. 오히려 이들에 의해 참된 종말신학과 종말신앙이 파괴되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시한부 종말론의 잘못이 시한부 종말을 주장한 밀러에게 있지 않고 그것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다는 말이 된다. “그 기별이 모든 교회로부터 일반적으로 거절을 당할 때에는 천사들은 슬픔으로 물러갔다”(엘렌 지 화잇, 시조사, 대쟁투합본, 415-518쪽)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말의 뜻은 밀러의 재림 예언이 잘못된 것을 시인하지 않고 그 기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말인데, 그렇다면 이런 우스운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잘못된 예언을 믿고 농락당한 12만명은 잘못이 없고 그 사기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어서 천사들이 슬픔으로 물러갔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짓말을 전하게 하시면서 또 그것을 믿기를 원하시는 모순된 하나님 내지는 거짓된 하나님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안식교의 이 엉터리 신학을 받아들인다면 어쩌면 종말이 여러 번 변경될 수 있을 것이요, 아니 영원히 종말이 오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종말을 받아들이지만 않으면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안식교에서는 그러면서도 화잇의 재림운동이 안식교가 조직되기 전에 있었으니 밀러의 재림운동은 안식교가 했다고 할 수 없다고 한다는 점이다. 무엇이 문제이기에 이렇게 주장을 하는가? 필자가 보기에 아마 천사의 첫째 기별을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안식교인들이 밀러의 재림운동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천사를 슬프게 하던 그 사람들보다 몇 천배나 더 천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밀러의 시한부 종말론 운동이 계시록 10장의 예언성취인가?
안식교는 밀러의 실패한 시한부 종말론 운동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요한계시록 10장 8-11의 예언의 성취라고 주장한다. 즉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입에는 꿀 같이 다나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10)는 말씀이다. 이 말씀대로 밀러의 시한부 종말론 운동을 전할 때는 기쁨으로 했으나 재림운동의 실패가 입에서는 달고 배에서는 쓰다는 예언을 성취시켰다는 것이다(성서기초교리, 301-303쪽). 그래서 결국 잘못된 시한부 종말론 운동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주장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속이고 농락하신 사건이 안식교의 첫째 천사의 기별이었다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안식교의 이러한 주장을 화잇의 글로 직접 확인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그 지혜로 당신의 백성이 실망을 당하도록 경영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주의 오심을 기리노라고 고백하는 이들의 마음이 드러나고 참 성격이 계발되도록 하셨음을 우리는 굳게 믿는다”(교회증언 1권 53쪽, 성서기초교리 303쪽). 도대체 시한부종말론을 말한 밀러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하나님에게 잘못이 있다는 말인지, 하나님께서 밀러를 속여서 계시를 주시고 또 날짜를 연기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어느 쪽도 하나님의 거룩성과 전능성을 믿는 성도로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 역시 밀러의 날짜 계산에 의해 조사심판교리를 만들어 낸 안식교로서 밀러를 다 부정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화잇의 괴변이요 궁여지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월리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과 안식교의 관계
안식교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 기초가 되어 발생한 종파이다. 그러기에 바로 안식교의 이름을 지금도 재림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재림교회란 이름을 넣었다고 재림신앙을 가졌고, 넣지 않았다고 재림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교회 이름에다 예수님의 탄생이나, 십자가나, 받고 받을 구원을 넣지 않았다고 그것들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러한 안식교가 밀러의 시한부 재림운동이 비판을 받으면 밀러는 안식교 이전의 사람이요 안식교인이 아니었다고 발뺌을 하려고 하는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가?
안식교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에서 나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시한부종말론에서 유래된 집단이란 사실을 부인한다. 그렇다고 안식교가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밀러의 시한부 재림 운동을 비판하고 나온 것이 아니다. 안식교는 지금도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 안식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인 하나님의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장림의 시한부종말 운동에 대해서는 비판하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그러나 안식교와 같이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에서 나온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은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잘못된 것으로 주장하는데 재미있는 일이다.
필자가 월리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안식교 교리인 소위 ‘첫째 천사의 기별’이 되었기 때문이다. 안식교가 밀러의 시한부 종말 운동이 사단의 운동이었으며 비성경적인 것이었다고 시인한다면 필자는 이런 비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안식교가 어떻게 첫째 천사의 기별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안식교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화잇이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이것은 현재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1) 월리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은 안식교의 가장 중요한 첫째 천사의 기별이다(안식교 한국연합회, 성서기초교리, 299쪽).
2) 월리암 밀러가 시한부종말론을 연구할 때 천사가 깨닫게 해주었다(엘렌 지 화잇, 시조사, 대쟁투합본, 360쪽).
3) 월리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이 계시록 14:6의 영원한 복음이다(위의 책, 397, 411쪽).
4) 하나님은 월리암 밀러에게 시한부종말론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상동).
5) 재림의 일, 시를 정하는 일에 반대한 당시의 목사들이 잘못된 사람들이었다. 벧후 3:3-4의 예언의 성취이다(위의 책, 413-414쪽).
6) 밀러가 시한부종말론을 전할 때 사람들이 밀러를 죽이려고 했으나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밀러를 붙들어 피하게 하였다(위의 책, 377쪽).
7) 밀러의 시한부 재림운동은 성령의 운동이었다(위의 책, 411-416쪽).
8)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속임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실망당하도록 경영하셨다(한국연합회, 성서기초교리, 303쪽).
안식교측에 답변을 요청하는 질문들
1) 재림의 일, 시를 정하는 시한부 재림설이 성경적인가?
2) 재림의 일, 시를 정하여 예언했으나 실패한 월리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 성령의 운동인가? 아니면 사단의 운동인가?
3)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께서 거짓운동을 일으키셨다는 것이 어떻게 성경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
4) 재림의 일, 시를 정하는 것이 비성경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성령께서 비성경적인 운동을 일으키셨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5) 하나님의 천사가 거짓 것을 깨닫게 해 주실 리가 없는 일인데, 밀러에게 천사가 시한부종말론을 깨닫게 해 주었다고 한다면 그 천사는 사단의 사자가 아닌가?
6) 밀러의 시한부 재림운동이 비성경적이라면 밀러의 시한부 재림운동을 성령의 운동이라고 주장한 화잇은 거짓 선지자요 그 운동을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가르치는 안식교는 사단의 기별을 전하는 종파가 아닌가?
7) 안식교에서는 계시록 10:9-10의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라는 예언이 월리암 밀러의 시한부 재림운동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재림운동의 실패를 예언한 것이라고 억지로 맞추는데 ‘배에는 쓰다’는 말이 복음을 전할 때 받는 반대와 핍박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거짓 예언을 하여 실패한 것을 말하는가?
김대성 목사의 성실한 답변을 기다린다.*
안식교측
안식일교회는 종교 개혁의 정신을 계승한
정통 복음주의 교회이다.
지난 호에 대한 반증
노예 문제에 대한 화잇의 언급에 대하여
「교회와 신앙」측은 주제와 논리가 빈곤한 탓인지 계속 엘렌 화잇의 문제에만 골몰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교회와 신앙」은 1월호에서 엘렌 화잇의 책 「초기 문집」 283쪽을 인용하여 노예와 그 주인에 대한 화잇의 견해를 비판하였고, 필자는 초기 문집 283쪽을 확인해 본 결과 그러한 내용이 없어서 영문 283쪽을 살펴보았으나 그곳에도 없기 때문에 출처를 다시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교회와 신앙」측은 마치 여러 날 굶주린 사자가 무슨 대단한 먹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황당한 주장” “사기꾼” 등등의 표현을 사용해가며 크게 흥분하고 있다. 필자는 그후, 시간을 내어 「초기문집」(1993년판)을 앞뒤로 살펴본 결과, 279, 280쪽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지난 3월호에서 그 내용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였다. 중요한 인용문에 대해서는 그 글이 기록된 책의 출판 연도를 밝히는 것이 상식인데, 「교회와 신앙」측에서 그 연도를 밝혀두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와 신앙」측은 엘렌 화잇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노예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 말에 대하여 매우 노엽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하겠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가 못받는가?” 못 받는다면 엘렌 화잇의 말이 맞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면, 기독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는가?
조용기 목사 문제에 대하여
필자가 장로교 통합측에서 한 때 조용기 목사를 ‘사이비’로 규정했다가 나중에 ‘해벌’한 내용과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한 바 있다. 「교회와 신앙」측은 이 질문에 대하여는 직접적인 대답을 계속 회피하면서, 이제와서는 이흥선 목사의 안식일교회에 대한 입장을 거론하고 있다. 이흥선 목사는 분명히 한 때 안식일교회를 이단시했다. 그러나 그가 안식일교회 「기본교리 27」과 변증서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를 연구한 결과,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이 일반 기독교의 구원론과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여 안식일교회가 정통 기독교회임을 천명한 것이다.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을 밝히 이해하게 된 것이 이흥선 목사가 입장을 바꾼 근본 원인이다. 그렇다면, 장로교 통합측은 조용기 목사의 어떤 면이 ‘사이비’성으로 판단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변화로 ‘해벌’을 하게 되었는지도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그것을 밝히지 않고 계속 다른 쪽으로 대화를 끌어가는지 모를 일이다.
수준 이하의 변증논리
「교회와 신앙」의 변증 논리는 일과성 내지는 임기응변식이다. 현재의 상황만 어떻게 넘겨보자는 식이다. 필자는 2월 호에서 영혼 불멸 사상이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교회 안에 스며들게 되었는지 비교적 상세를 설명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교회와 신앙」은 이러한 부분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반론이나 변증을 제시하시 못하고 다음과 같은 말로 독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안식교측에서는 영혼멸절[‘영혼불멸’이라는 말을 잘못 기재한 것 같음] 교리가 이교 철학 사상에서 나왔다고 비판하였다. 심지어 나사로 비유도 애굽의 민속설화에서 왔다는 것이다. 얼마나 불신앙적이요 무지한 소리인지 모르겠다. 이런 소리는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며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무식한 이방인이나 하는 소리다”(3월호, 128쪽).
「교회와 신앙」은 이러한 방식의 논리를 가지고 상대방이나 독자들의 감성에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지 말고, 독자들의 수준을 존중하여 좀더 이성적인 논리로 대처해 줄 것을 당부한다.
안식일교회 배경 이해를 위한 기독교 역사
말틴 루터의 종교 개혁과 교파의 발생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그 대학의 성서 신학 교수였던 말틴 루터가 당시 가톨릭에서 시행하고 있던 면죄부 판매를 비롯한 여러 가지 교리의 부당성을 지적한 95개 조항이 발표되면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의 원래 의도는 다른 교파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 내의 개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반박한 루터의 95개 조항은 종교 개혁과 개신교회를 탄생시키는 불씨가 되었다.
종교 개혁이 시작되면서, 중세 종교 암흑 시대 동안에 가톨릭의 교권에 의해서 변질되고 변형되었던 수많은 교리들이 성경으로 밝혀지고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성경으로 판단하자(sola scriptura)는 것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정신이었다. 그 결과 많은 교리들이 성서적으로 정리되었고 올바른 교리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종교 개혁의 여파로 또 다시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성경의 새로운 교리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각기 다른 주장을 가진 개신교 교파들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경이 하나이기 때문에 개신교회는 하나의 교회로서 발전되어 나갔어야 마땅한 것인데, 여기에도 인간적인 이기심들이 작용하여 교파의 난립 현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다음의 도표는 이런 모양으로 발생된 개신교 주요 교파들의 발생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1517)루터교-성경의 권위, 믿음의 의
종 (1787)감리교-사랑실천, 성령, 성화
교 (1534)성공회-회심체험, 속죄, 재림
(1612)침례파-유아세례부정,침례,성찬식
(1520)개혁파-성서,교회강조,예정론,장로제
개 (1560)장로교-하나님의 주권,장로제도
혁 (1525)재침례파-유아세례부정,정교분리,유무상통
이와 같이 분산된 각 교파들이 강조하는 주요 가르침들은 물론 성경을 중심으로 개혁된 교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분이시고 성경이 하나이므로 교회도 하나로 발전되어 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잠 4:18)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의 원만한 광명으로 세상에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주요 기독교 교파는 300개 이상으로 난립되어 있으며, 한국의 경우, 장로교회 교파만 하더라도 100개 이상을 헤아리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분립의 원인인가? 교리인가, 아니면 인간의 감정, 혹은 권력 다툼의 결과인가?
세상에 이렇게도 많은 교회와 교파가 서로 대립된 상태로 존재하여 서로 자신의 교회가 진리와 정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다. 모든 교회들이 비성서적인 부분을 포기하고 성서적인 부분을 수용하여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비성서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천주교회가 하나이듯이, 순수한 성서적 진리로 만들어진 개신교회도 하나이어야 한다.
19세기 초 유럽의 정세와 재림 운동
당시 유럽 지역의 정세는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9세기 초반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구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는 대변동의 기간으로 여러 가지 기대와 불안이 교차되는 상황이었다. 또한 일부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예언과 새로 시작될지도 모르는 복천년의 상관성를 찾아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특히 1798년 나폴레옹의 부하 베르띠에 장군에게 교황 비오 6세가 프랑스로 잡혀가 옥사하는 사건은 당 시대의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이기도 했다.
천주교회가 세상을 지배했던 그 종교암흑시대라고 하는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성경상의 명백한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적 재림 사상은 상당히 퇴색되어 있었다. 심지어 오리게네스나 아우그스티누스 등과 같은 교부들은 재림을 정신적인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1천년 이상 계속되던 종교암흑시대가 끝난후, 인쇄술의 발달과 성서공회의 설립으로 성경이 대량으로 출판되어 자유롭게 읽혀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성경에 300회 이상 언급되어 있는 재림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별히 재림과 관련된 성서의 예언에 대하여 많은 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였다.
“1800년대의 많은 개신교 성경 주석가들은 1260년간의 교황권 시대가 1790년대 안에 이미 끝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예언적인 관심은 성경상 최대의 예언 기간인 2300일 문제로 이동되고 있었다”(오만규, 재림교회사, 20,21). 다니엘 8장과 9장의 2300주야 문제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사람들로는, 독일의 칼빈파 개신교 목사인 요한 페트리(Johann Petri)를 비롯하여 아일랜드 평신도 한스 우드(Hans Wood), 독일의 목사 요한 벵겔(Johann Bengel)등 여러 명이 있었다.
1790년대에 가톨릭 ‘예수회’에서 추방당한 승려 마누엘 라쿤자가 저술한 책자 “영광과 위엄 중에 임하는 메시야의 재림”은 저자가 사망한지 10년이 지난 1812년에 스페인에서 출판되어 남부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 상당한 선풍을 일으켰다. 영국의 교회들도 라쿤자의 저서에 영향을 받아 1820년대부터 재림 운동이 일어났다. 영국의 재림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로는 죠셉 울프(Joseph Wolf)와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을 들 수 있다.
유럽 내륙에서도 제네바의 가우센(S.R. Gaussen), 독일의 리히터(J. Richter), 켈버(L. Kelbler), 루츠(J. Lutz) 등에 의해 재림 기별이 전파되었다. 스웨덴에서는 국교회 목사들이 재림에 대하여 무관심한 반면, 평신도들이 개인들의 집이나 숲속 집회를 통해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의 재림을 증거하였다. 특히 1842년과 1843년에는 6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포함된 청소년들이 재림 기별을 전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여 많은 어른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기도 했다. 호주에서는 플레이포드(T. Playford)에 의하여, 그리고 인도에서는 윌슨(Wilson)에 의하여 재림 신앙이 고취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재림 운동들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거리였던 2300주야 예언에 대한 해석이 여러 방향(1837년, 1843년, 1844년, 1847년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결집된 힘으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유럽에서도 이미 2300주야 예언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초 미국에서의 재림운동
19세기로 접어들 무렵, 미국에는 개신교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럽보다 청교도적이고 경건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경향이 다분하였다. 미국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의 원칙과 유럽으로부터의 이민 증가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종교의 다원화 현상과 함께 신생 종교운동을 촉진시켰다. 거의 모든 종파가 미국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당시 미국의 종교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후복천년설’, 즉 복천년이 지난후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고 하는 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그리고 그 복천년이 미국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1789년 북미 대륙에서는 죠지 와싱톤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미국은 그때로부터 1829년 앤드류 잭슨 대통령 취임까지를 “호의의 시대” 혹은 “초기 국민 시대”라고 부른다. 이미 언급한대로 낙관적인 ‘후복천년’ 사상이 당시 미국의 기독교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미국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미국 개신교의 행동주의는 신앙 부흥운동, 사회개혁 사업, 평화 및 절제운동, 인도적인 구호사업, 일요일 준수 운동, 교육 개혁 사업 등으로 나타났다”(오만규, 상동, 28).
그러나 1830년대에 들어오면서 “호의의 분위기”는 점차로 약화되고 논쟁적 분위기가 서서히 감돌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 개신교도들의 복천년설에 대한 기대감은 다음의 네 가지 요인들 때문에 중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① 미국내의 분파주의적 대립 - 당시 미국내의 분파주의의 긴장은 지역감정, 노예제도, 반(反)가톨릭적 민족주의, 연방 정부와 주(주) 정부와의 대립 등으로 더욱 날카로와 지고 있었다.
② 경제공황 - 1837년에 몰아닥친 경제 공항은 복천년을 기대하는 미국 개신교도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요소였다.
③ 개인주의의 발전 - 호의의 시대에 활발히 전개된 신앙각성운동 및 신앙부흥운동은 국민의 개인주의를 발전시켰다. 신앙부흥운동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난 사실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경적 진리이며, 국교주의건 비국교주의건 간에 개인의 양심과 결단이 소속 교단의 신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개인주의적 신앙이 많이 강조되었고 그 결과 신생 종교 운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④ 재림에 대한 성경 연구 - 유럽의 프랑스 혁명은 개신교회의 종말론적 사상에 자극을 주었다. 유럽에서 시작된 이 종말론적 자극은 예수 재림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으며, 얼마 후에 미국에서도 그러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재림 연구에 종사한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매우 임박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복천년이 지난 후에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후(後)천년설’을 부인하고, 복천년이 시작되기 전에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전(前)천년설’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전천년설’의 유력한 대변인 중의 하나가 바로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였다.
윌리암 밀러의 재림 운동
윌리암 밀러가 2300주야를 해석하기까지
윌리암 밀러는 1782년 2월 15일 미국 마사추셋츠 핏츠필드의 한 경건한 침례교회 가정에서 16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대학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상당한 식견을 가진 독서가였으며 매우 규모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 때 볼테르(Voltaire), 페인(Paine), 흄(Hume) 등의 자연신론에 쏠려 청소년 시절의 종교적 확신을 상실하였다.
그는 군(軍) 생활을 통하여 여러 가지 인간사들을 경험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그 결과 자연신론적인 확신도 흔들리게 되었다. 그가 참전했던 영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과부인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로우 햄튼(Low Hampton)으로 돌아갔다. 아직 종교적 확신은 없었으나 어머니를 생각해서 외삼촌이 목회하는 시골 침례 교회에 정규적으로 출석하였다.
1816년 10월 12일, 밀러는 교회의 한 집사의 요청으로 이사야 53장을 주제로한 설교문을 낭독하던 중에 참을 수 없는 강렬한 감동을 경험하고 정식으로 교회에 입교하였다. 그후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조롱하는 친구들에게 적절한 답변을 제시하고 자기 신앙의 기초를 든든히 하고자 하는 결심을 가지고 조직적인 성경 연구에 착수하였다. 2년에 걸친 집중적인 성경 연구 끝에 밀러는 예수의 재림은 복천년 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년기가 시작되기 전에 있을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다니엘 9장의 70주일은 다니엘 8장의 2300일 기간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2300주야 기간은 주전 457년에 시작하여 1843년 마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2300주야가 마치는 1843년, 즉 성소가 정결하게 된다(단 8:14)는 것을 예수의 재림으로 해석하여 적용한 것이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밀러의 예언 해석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매우 치밀하게 전개되었으나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고 하는 마지막 부분의 적용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2300주야에 대한 예언 해석은 이미 1월호에 게재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밀러의 재림운동 전개(1831년~1842년)
밀러가 2300주야에 대한 예언을 해석한 뒤, 그 기별을 전해야 된다는 책임감이 계속 그의 양심에 부담을 주었으나 농부라고 하는 자격지심과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13년간이나 내면적인 갈등을 겪으며 살았다. 그러다가 1831년 자신의 서재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만약 어떤 곳에서든지 강연 초청이 오기만 하면 가서 전하겠다”고 하나님과 약속을 했다. 그는 비록 하나님과 약속은 했지만 아마도 55세나 된 자기에게 강연을 부탁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마음으로 의자에 않은지 30분이 채 못되어, 그 동안 성경연구에서 발견한 재림 기별을 전해달라는 처남의 전갈을 가지고 조카가 찾아왔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하였다. 그날 오후 드레스덴(Dresden)으로 떠나 다음 날엔 누이 집 부엌에서 이웃의 가정들을 모으고 재림의 기별을 증거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재림 운동의 시작이었다. 첫 집회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주민들의 요청으로 한 주일을 더 체류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한 결과 12가정이 주님께 헌신하였다.
그 부흥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집 근처 포울트니(Poultney) 침례 교회로부터 강연 초청장이 와 있었다. 그때부터 사방 각지에서 강연 초청이 쇄도하였으며, 1833년 9월에는 그가 사는 지역의 한 침례 교회가 그와 상의도 없이 그를 목사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그는 목사로 호칭되는 것을 거절하였다. 1834년 이후 밀러는 그의 모든 시간을 재림 기별을 전파하는 일에 바쳤다. 이리하여 재림을 위한 개인적 준비에 비중을 두는 초교파적 재림 운동이 전개되었고 여러 교회로부터 밀러를 좇는 무리가 나타났는데, 이들을 “밀러주의자”(Millerites)라고 부른다.
밀러 운동은 단순한 시기파 집단의 운동이 아니었다. 재림의 시기가 중요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2차적인 문제였고 1차적인 문제는 백성들로 하여금 재림을 맞을 준비를 갖추게 하는 신앙부흥운동이었다. 그리하여 이 초교파적인 운동의 결과, 1844년에 감리교회는 4만명, 침례교회는 4만 5천명의 새 신자를 얻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재림운동의 위기와 절정
1843년이 가까이 올수록 밀러주의자들의 선교적 노력은 한층 강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들에 대한 기성교회의 반대와 탄압도 강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 운동의 지도자들은 동료 신도들에게 각자 자기가 속한 교회에 충실히 다니면서 재림 기별을 전파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재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성교회의 탄압이 더욱 커지게 되어 결국 재림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출교되거나 이탈해 나오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예상했던 재림의 때가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밀러주의자들은 다각적인 방법으로 구체적인 재림의 날자를 정하고자 시도하였다.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서, 1843년 2월 10일설, 4월 3일설, 10월 24일설 등 여러 날자가 정해졌었다. 얼마 후에는, 주전에서 주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영(0)년이 없는 것을 감안하지 않았음이 밝혀져 2300주야가 끝나는 해는 1843년에 1년을 더하여 1844년이 된다는 결론을 다시 얻었다. 그리하여 다시 재림의 날자가 1844년 3월 21일과 4월 18일로 정해졌으나, 그 두 날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재림을 기다리던 신자들에게 상당한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일어나 임박한 재림의 날을 계속 연구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회중교회 평신도였던 사무엘 스노우가 유대의 대속죄일인 7월 10일이 태양력으로 10월 22일에 해당함을 연구하여 재림의 날자가 1844년 10월 22일이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스노우의 이와 같은 주장은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게 되었고 급기야는 ‘제칠월 운동’이라는 종교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844년 10월 22일이 되기 직전에 거의 모든 밀러주의자들이 제칠월 운동에 가담하였다. 장사를 하던 밀러주의자들은 상점문을 닫았으며 직장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직업을 포기하였다. 야영회에서는 자복과 기도가 그치지 않았으며 가난한 신도들이 빚을 갚는 데 쓰도록 하는 거액의 희사금이 들어오기도 했다. 시골에서는 일부 농장들이 추수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으며, 도시에서는 출판물을 준비하여 나누어주는 일에 바빴다. 그 당시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대망’ ‘출판’ ‘준비’ ‘헌신’, 이 네 가지 요소가 그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나, 1844년 10월 22일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지나갔다. 재림을 기다리던 무리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대실망을 겪어야 했고 비통하고 쓰라린 가슴을 안은 채 무엇인가 형용할 수 없이 난처한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누가 재림의 시기를 정했는가
1843년과 1844년에 절정을 맞았던 이 재림 운동에는 200여명의 목사와 5만여명의 평신도가 가담하였다. 교단별 분포율을 보면, 감리교회가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침례교회가 4분의 1, 그밖에 회중교회, 그리스도교회, 장로교회, 감독교회, 루터교회, 화란개혁교회, 퀘이커 교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상의 내용은, 「오만규, 재림교회사, 1980, pp.18~49」에서 발췌·요약된 것임을 밝혀둠>
일반적으로 안식일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안식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분명히 믿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1차 재림은 1844년에 했고, 지금은 이제 제 2차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박영관, 이단종파비판1, 1990년판, 259).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였다고 확실히 믿기 때문에 재림교파라고 한다. 예수님의 1차 재림은 1844년에 했고, 지금은 제 2차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김순명, 이단 종파들의 정체, 1986년판, 43). 이러한 비판들은 역사에 대한 식견이 없는 비판자 자신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를 깊이 연구하지 않은 평범한 기독교인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재림의 날자가 정해진 상태에서 재림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당시에는 안식일교회는 아직 이 땅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때였다. 그리고 재림의 날자를 정했던 일단의 무리들은 위에 열거된 여러 교파들에서 나온 것이다.
안식일교회는 물론 윌리암 밀러가 확신을 가지고 전파했던 예수의 재림 사상을 매우 중요시하며 전파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안식일교회가 재림의 날자를 정했다고 하는 논리는, 마치 천주교의 삼위일체를 같이 믿는 개신교회가 중세 시대에 종교 박해를 했다는 논리와 같이 당치도 않는 이론이며 전후가 맞지않는 괴변에 불과한 것이다.
안식일교회의 발생 과정
실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
안식일교회의 역사는 1844년 대실망의 경험을 딛고 일어선 진지한 성경연구가들로부터 시작된다. 밀러주의자들이 비록 재림의 날자를 정하는 과오를 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의 재림을 준비하며 기다렸던 경건한 신앙인들이었고, 특별히 성경을 연구하는 데 남다른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1844년 대실망 이후 많은 사람들이 재림 신앙을 포기했지만, 여전히 성경을 연구하며 재림을 기다리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다시 진지하게 연구하였으며 예언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였다.
그들 중 대표적인 몇 사람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죠수아 하임스(감리교, 목사), 죠시아 릿치(감리교, 목사), 죠셉 베이츠(크리스챤, 선장), 찰스 핏치(장로교, 목사), 하이람 에드슨(감리교, 목사), 제임스 화잇(크리스챤 컨넥션, 목사), 토마스 프레블(침례교, 목사), 엘렌 화잇(감리교, 평신도), 레첼 프레스톤(제칠일 침례교, 평신도), 사무엘 스노우(회중교, 평신도). 이 밖에도 성공회, 루터교, 청교도 등 각 교단의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연합하여 범교단적으로 성서적인 교리들을 찾아 한 단체가 형성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모체가 된 것이다.
안식일교회의 기본 교리들
안식일교회는 이렇게 다양한 교파에서 여러 사람들이 나와 형성된 무리들로부터 발단이 되었기 때문에, 각기 다른 교파들이 가지고 있는 주옥같은 성서적 교리들을 인간적 편견없이 하나로 모으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주교회가 안식일교회를 비판하는 부분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7일 재림교인 안식교의 교리를 보면, 여러 교회의 교리를 한두 가지씩 따다가 잡채를 만들어 놓았다는 느낌을 준다. 즉, 가톨릭 교회에서는 구원을 위한 각 개인의 협력의 필요를, 유다교에서는 토요일 안식일과 수입의 십분의 일 헌금과 돼지고기 금식 등을, 개신교로부터는 성서 유일 규범주의를, 뱁티스트파로부터는 유아 세례 부정과 침례 등을, 현대 위생학에서는 담배 커피 차 술의 배척 등을 따왔다”(기본스 저, 장면 역, 교부들의 신앙, 1990년판, 458).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안식일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피흘리며 찾아서 다듬어놓은 다음과 같은 성서적 진리들을 믿고 있다(신계훈,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pp. 500,501 참조).
① 루터의 개혁의 핵심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개혁 신앙을 실천하며, 교회의 머리로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인정하고 조적적 불멸과 부활 신앙을 받아들인다.
② 재세례파 개혁의 유산인 성인(成人) 신자의 침례, 정교분리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 수호, 죽은 자의 무의식, 재림을 고대하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 평화 애호의 신앙을 받아들여 실천한다.
③ 메노나이트 재세례파의 세족예식을 성서적 의식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의 양심적인 평화 애호 신앙에 입각한 의료 봉사를 본받으며, 나아가 심령의 성결과 함께 육신의 성결을 위한 건강 생활을 위해 성경적인 위생법칙과 금주, 금연, 등 모든 분야의 절제를 강조한다.
④ 칼빈의 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성경적인 예배, 성경의 권위에 대한 절대 복종, 율법의 복음적 기능, 장로제도 등을 수용한다.
⑤ 회중파 청교도들의 값진 유산인 성경에 일치한 신앙과 경건한 생활, 정교분리,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신앙 양심을 존중하며 실천한다.
⑥ 침례교의 유산인 성인(成人)의 물에 잠기는 침례를 실천하고, 회중의 교회 행정 참여를 대의제를 통하여 반영한다.
⑦ 제칠일침례교의 값비싼 유산인 제칠일안식일을 준수하며 물에 잠기는 신자의 침례를 그대로 실천한다.
⑧ 웨슬리의 감리회 운동의 유산인 중생과 성결을 필수적인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며 성령의 사역 강조와 칼빈의 모순된 예정론을 성서적 신앙으로 대응한 것에 동감한다.
⑨ 구세군의 구호 봉사와 자선 사업을 통한 사회 참여를 본받는다.
⑩ 모라비아 형제회의 선교 신앙을 받아들여 지역의 제한이 없는 세계 선교 사엄을 추진한다.
⑪ 사도 시대 이래, 중세 교회를 거쳐 정통 개혁 신앙으로 이어진 바, 하나의 통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영원히 함께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⑫ 종교개혁을 마무리짓는 재림운동의 유산을 성서적 신앙으로 받아들여,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대속죄일 봉사를 확신하며, 지성소 봉사의 종결과 함께, 공개적으로 단번에 있게 될 그리스도의 재림을 인류의 마지막 유일한 소망으로 확신한다.
⑬ 구속의 역사를 종결시키기 위하여 일으키신 재림 운동을 인도하기 위하여, 주시기로 약속한 예언의 은사를 남은 교회에 주신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예언된 대로 복음의 확실한 승리와 구속의 신속하고도 영광스러운 종결을 확신한다.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
인간의 편견과 무모한 교권주의는 상대방의 장점을 좀처럼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자기 교단이 가직고 있는 권리를 포기하면서 다른 교단에 수용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생리인 것이다. 수용은 고사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도 쪼개어 나누어서 끊임없이 교파를 만들어가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인간의 아집과 편벽된 경향을 감안해보면, 만약 1844년의 대실망의 경험이 없었다면, 이와같이 여러 교파들이 가지고 있는 성서적 진리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일을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0장에는 이러한 국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계 10:9~11)
재림 운동 당시, 재림 신자들에게 매우 확고한 희망을 가져다 준 근거는 다니엘 8장과 9장의 2300주야 예언에 대한 해석이었다. 그것을 저들이 처음 받아들였을 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꿀맛 같은 기별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저들은 쓴 맛을 경험하게 되었다. 1844년의 대실망은 재림 신자들에게 참으로 견디기 힘든 쓰라린 경험이었다.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하는 계시록 10장의 마지막 절과 이어지는 계시록 11장 1절에 보면, 다시 예언하는 일이 ‘성전’과 관련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1,2). 그 쓰디쓴 경험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이, 성소 문제를 토대로 하여 성경 예언을 다시 연구하여 실망의 이유를 찾아내었다. 성소의 정결 사건은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 전에 있게 될 심판의 국면을 나타내고 있음을 깨달은 재림 신자들은 다시 재림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재림 기별을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언 해석에 대하여 분명히 「교회와 신앙」측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날자를 정하여 재림을 기다리다가 실패하는 일을 경영하시겠느냐’고 하면서 매우 심한 비판을 할 것이다(비판을 하려면 반드시 대안-장로교측의 해석-을 제시하기 바람).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주 인간의 위기를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하시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험한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그들이 배워야 할 수많은 공과들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거대한 여리고 성을 점령한 그들이 조그만 아이성을 치는 일에 실패하도록 방치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불의와 함께 하실 수 없다는 교훈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1844년의 대실망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편견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진리를 하나로 모으기 위한 섭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교리적 발전을 계속하던 중 1860년, 제칠일 안식일을 존중하며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선교를 위한 조직체로 설립된 것은 1863년의 일이다. 따라서 안식일교회는 다른 어떤 교단보다도 예언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진실한 신앙인들을 향하여 곧은 기별과 함께 예언의 기별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에 대하여 거의 무관심한 일반 교회들과는 달리 안식일교회가 예언의 말씀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이유는 다음의 성경절에 근거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7,10).
may-25
안식교는 정통교회가 될 수 없다
최삼경·진용식
본호로 10회의 논쟁을 마치게 된다. 우선 형식적인 면 내지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하여 변증하고, 다음으로 지난호에 대하여 변증하고, 그리고 전반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주제별로 총정리하겠다.
형식적인 면 또는 구조적인 면에서
먼저 감사한 마음으로
무려 10회에 걸쳐 진행된 논쟁을 마치려 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지만 먼저 감사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한국교회 역사이래 없었던 논쟁을 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한국교회 앞에 진리를 밝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논쟁이란 그것 자체가 어려워 잘못하면 계획과는 달리 감정 싸움으로 마치는 경우가 많은데 별다른 사고 없이 본 논쟁이 진행되었음도 감사한다.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끝까지 논쟁에 응해 준 안식교측 김대성 목사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바라기는 본 논쟁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리에 이르는 초석이 되기를 원하며, 혹 이번 논쟁으로 부족했던 점들은 후에 다른 방법으로 보완되기를 바란다.
안식교측에서 본래 약속을 어긴 점에 대하여
안식교측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는 반면 유감스런 점도 있다. 우선 안식교측에서 본 논쟁을 진행하기 전에 했던 중요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즉 본 논쟁을 시작한 이유 중에 하나는 기성교회 교인은 물론 안식교 교인까지도 함께 본 논쟁을 지켜봄으로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알게 하자는 것이었다. 먼저 쌍방간에 한 약속에 의하면 본지는 물론 안식교의 월간지 <교회지남>에도 같은 내용을 동시에 게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혹 그렇지 못하면 매번 <교회지남>에 본 지상논쟁에 대한 광고를 게재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안식교측에서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본 논쟁을 <교회지남>에 게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광고 또한 아주 작게 단 두 번밖에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본 논쟁은 기성교회 교인들만 지켜본 셈이 됐다. 기성교인들만 지켜보아서 억울하다거나 분하다는 것은 아니다. 안식교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숨은 이유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이제 본 논쟁을 마치면서 다시 요구하는 바이다. 가능하면 이제라도 <교회지남>에 본 논쟁을 하나씩 게재하기 바란다. 분명히 안식교측에서는 자신들이 본 논쟁에서 이겼다고 자평할 것이다. 그것이 안식교편의 주관적인 진실이라면 <교회지남>은 물론 안식교의 모든 언론을 다 동원해서 본 논쟁을 게재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교회와신앙>과 <교회지남>은 ‘언론의 평형이 맞지 않아서 함께 낼 수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 변명일 것이다. 본 논쟁을 <교회지남>에 게재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속으로는 본 논쟁을 안식교인들이 알기를 원치 않는 것외에 없을 것이라고 본다.
안식교는 최근 들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안식교가 이단이 아님을 기성교인들에게 선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식교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한 진리가 승리했다고 자평할 것은 당연한 일인데 자신들이 이긴 논쟁을 자기 교인들에게 숨길 이유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안식교인들은 진리 논쟁에는 물러서지 않는다고 알고 있고 또한 김대성 목사가 본 지상논쟁을 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교회지남>에 게재하지 못하는 것은 본 논쟁 속에는 안식교인들이 알아서는 안 될 내용이 있다는 것외에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정 언론의 평형 때문이라면 <교회지남>에 맞는 기성교회 언론은 어떤 것인지 말해 주기 바란다. 그 언론과 협의하여 양 언론에 함께 게재하는 방법을 다시 연구할 수도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김대성 목사가 안식교측 언론에 본 논쟁을 게재하는 용기는 없다고 해도 적어도 <교회지남>에 남은 8회 광고만은 꼭 낼 수 있는 진실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2회 광고 이후부터 안식교인들이 알면 알수록 불리한 논쟁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이라고 본다. 성품 성화를 통해 구원을 이루고 그러기 위하여 육식까지 금하는 자들로서 약속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진리의 사람이기는커녕 인간적으로도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안식교측에서는 이흥선 씨가 기성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도 되는 듯 그를 동원하여 안식교가 이단이 아니라고 내외에 선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단인 예장 합동측 노회에서 제명당한 목사로부터 이단이 아님을 증명받으려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객관적인 논쟁을 통하여 이단이 아님을 증명받는 편이 더 유익하지 않겠는가?
김목사는 약속대로 <교회지남>에 8회의 광고만은 계속해서 낼 것으로 믿는다. 단 이제 지나간 <교회와신앙>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교회와신앙>측과 협의한 후 대신 본 논쟁을 단행본으로 담아서 나올 그 책을 8회 이상 광고해 주어야 할 것으로 본다. 필자는 그럴 수 있는지 없는지 신앙인의 양심으로 지켜 볼 것이다.
공개 토론회를 제안한다
이제 본 논쟁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제의한다. 공개토론회로 마무리 하자는 것이다. 본 논쟁을 시작한 이유가 그것이었던 것으로 안다. 처음부터 공개토론회를 하면 객관적이고 효율적인 논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지상논쟁을 먼저 하고 다음에 공개토론회를 하자고 했던 점을 김목사는 기억하리라고 본다.
공개토론회 장소는 두 곳에서 각각 두 번 하는 것이 좋겠다. 한 번은 삼육대학에서 하고, 한 번은 장로회 신학교나 총신 중에서 허락을 받는 대로 했으면 한다. 방법은, 먼저 일정 시간 동안 주제 강의를 하고, 그리고 미리 질문한 질의를 20개 내외로 정하여 서면으로 묻고 거기에 대하여 각각 지정된 시간만큼 대답을 하고, 그 다음에 합의된 사회자를 두고 일정 시간 동안 직접 묻고 대답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쌍방 합의에 의하여 본 논쟁을 하고 난 후에 안식교측에서도 단권으로 책을 만들어 보급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리라고 본다(물론 그럴 용기가 있는지 지켜 보아야 하겠지만). 즉 같은 내용의 두 권의 책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편 공개토론회 장소에서 자기편에서 출판한 책을 보급하되 어느 한 편이 출판을 하지 못했을 때에는 상대측에서 출판한 책을 보급하기로 하면 좋겠다. 어디에서 먼저하고 누가 먼저 발표하면 좋을지는 각각 제비를 뽑아서 하되 두 번째는 첫 번째의 반대순으로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본다. 기성교회편에는 필자가 둘이지만 할애된 시간은 같음으로 평형에 어긋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아니면 안식교편에서 김대성 목사와 함께 이흥선 씨가 나온다면 허락하겠다. 이흥선 씨가 못 나올 이유도, 이흥선 씨를 못 나오게 할 이유도 없다고 믿는다. 본 지상논쟁을 하게 된 동기도 이흥선 씨의 공개토론회에 의해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기타 부족한 점은 서로 만나 조절할 수 있으며, 바라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공개토론회만은 피하지 않기를 거듭 바란다.
먼저 밝혀야 할 진실
문제의 발단은 진용식 목사가 안식교의 교리를 비판한 책을 출판한 데서 시작된다. 진목사는 1993년 3월에 <안식교의 5대 오류>(국종출판사. 1993, 서울)라는 책을 출판하여 안식교의 이단성을 지적함으로 기성교인이나 안식교인들에게나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국 이에 대하여 안식교측에서는 홍명관 목사(전 안식교 한국연합회 선교부장 : 지금은 그의 후임으로 김대성 목사가 맡고 있다)를 대표자로 하여 처리하도록 한 것으로 안다. 어쨌든 어떤 절차와 이유에 의하여 진목사와 홍목사는 1993년 10월 4일자로 소정의 합의서를 쓰고 진목사는 남은 책값으로 1천만 원을 받고 책들을 안식교에 넘겨주었다. 이 약정을 할 때 그 자리에는 진용식 목사와 홍명관 목사는 물론 최삼경 목사와 김대성 목사도 같이 있었다.
“회수 및 파기에 관한 합의약정서”의 핵심적인 내용은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비록 그 책을 파기하지만 그것이 진목사가 안식교 비판을 포기하거나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요, 그리고 안식교측에서 남은 책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진목사에게 1천만 원을 책값으로 주었는데 이것을 언론에 이용하지 않기를 약속하고 만일 안식교측에서 그 약속을 어겼을 시 법적으로 진목사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안식교에서는 본래의 약속과 달리 위의 합의서를 유출하며 진용식 목사가 그 책에 대하여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했다느니 또는 책을 파기하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여 1천만 원을 받았다고 함으로 안식교인 중에 기성교회로 개종을 하려는 사람이나 또는 기성교회에 다니다 안식교로 가려는 사람 중에 진목사의 글을 보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의 실례로, 안식교편에 서서 안식교를 옹호해 준 <기독저널>의 발행인인 이흥선 씨가 필자(최삼경)에게 내용증명을 보내온 일을 들 수 있다. 이흥선 씨는 이 사건을 가지고 마치 큰 일이나 난 것처럼 기자회견과 함께 자신이 발행하고 있는 <기독저널>에 보도하겠다고 한 일이 있다(1996. 6. 21).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위의 내용증명을 보내 오고 그 후에 아무 말도 없었으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런 유언비어가 이용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필자편에서 부득이 그 진실을 밝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밝힐 수밖에 없는 책임은 모두 안식교 편에 있다고 보나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본 합의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이유에 의하여 작성되고 실행된 것이다.
첫째, 책을 파기한 것은 안식교의 간절한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 당시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또 이 문제에 있어서 진목사에게 조언을 했던 사람은 필자(최삼경)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 당시 안식교는 어떻게든 진목사의 책이 출판되지 못하게 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보였다. 오히려 진목사는 그 책에 적지 않은 구조적, 논리적 약점이 있지만 법률적으로 불리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진목사가 결국 책을 안식교에 넘긴 것은 그렇게 해도 불리할 것이 없다고 판단됨으로 안식교의 요구에 응했을 뿐인 것이다.
만일 안식교편에서 이 점을 부정한다면 먼저는 안식교인의 양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란 점을 외적으로 내적으로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내적인 문제는 본 글에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외적으로도 증명할 충분한 근거를 필자(최삼경)는 가지고 있다. 만일 이 점에 대해서 필자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필자를 세상 법정에 제소해도 좋다. 세상 법정에 서는 것은 싫으나 이 방법이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힐 수 있는 최선의 길일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둘째, 다음으로는 1천만 원의 책값을 받은 것도 안식교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위의 합의서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책값을 준 사람을 비난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책값을 받은 사람을 비난할 수 있다. 먼저 진목사는 왜 이단으로부터 책값을 받았느냐고 비난을 받을 수 있고, 반대로 안식교는 무슨 약점이 있어서 진목사에게 돈을 주었느냐고 비난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목사가 책값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안식교편에서 책값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진목사는 책값을 요구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도 필자(최삼경)에게는 외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적 증거에 의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단지 진목사는 책을 다시 쓰기 위하여 안식교에 책을 넘겨주고 그 책값을 받은 것이다.
셋째, 진목사 편에서 책 폐기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책값을 받은 경유는 이렇다
위에서 밝힌 것처럼 필자(최삼경)가 보기에 안식교에서는 어떻게든 그 책을 파기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안식교측에서는 책의 추천서를 써주신 분들에게 연락하여 회유를 하고 있을 때 필자(최삼경)가 책을 면밀히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책에는 적지 않은 약점이 있었다. 내용상 큰 전제는 옳았지만 진목사가 처음 쓴 책이기에 구조나 형식상 적지 않은 약점이 있어 오히려 본질이 흐려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진목사에게 책을 다시 썼으면 좋겠다고 조언을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책을 수정하여 출판하기로 결정하고 안식교의 간절한 요구가 있어서 남은 책을 안식교에 넘겨주고 책값으로 1천만 원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약정서에 파기 합의서로 되어 있지만 책을 진목사가 스스로 파기한 것이 아니라 안식교에서 가져다가 파기한 것이다. 그런데 안식교측에서는 그 후 2-3개월이 지나지 못해서 약정서를 유출하여 진목사로 인하여 흔들리는 안식교를 방어하는 데 활용한 것이다. 최근에는 이 점이 더 노골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간단한 폐기 절차와 이유였다. 이제 이에 대하여 유행하는 말을 열거하고 하나씩 변증하겠다.
① “진용식 목사가 그 책에 대하여 잘못했다고 빌었다”는 말에 대하여
우선 빌었다는 말이 거짓인 것은 그 제목이 그것을 증명한다. 제목은 “회수 및 파기에 관한 합의약정서”라고 했지 “사과문”이라거나 “용서를 바랍니다”가 아니다. 이런 사과문도 있는가?
다음으로 진목사가 책값을 안식교에 준 것이 아니라 안식교에서 진목사에게 책값을 주었다는 것이 진목사가 빌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비는 자가 돈을 주어야 옳지 비는 자가 돈을 받는 법도 있는가? 진목사가 잘못했다고 빌었다고 하면서 진목사가 돈을 달라고 해서 주었다고 한다면 잘못은 진목사가 한 것이 아니라 안식교측에서 한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돈은 진목사가 주어야지 어째서 안식교에서 돈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차라리 눈물로 빌어서 불쌍해서 주었다고 하면 몰라도 말이다.
그리고 진목사가 빌었다면 다시는 안식교를 비판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지 계속해서 비판할 수 있도록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안식교인이 그 책이 파기된 후 진목사가 자신들에게 용서를 빌고 책을 파기했다고 하기에 그렇다면 왜 안식교에서 진목사에게 책값으로 1천만 원을 주었겠느냐고 했더니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머지 않아 위의 책이 다시 출판된다. 만일 빌었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의 책이 가졌던 약점을 다 보완하여 다시 출판하게 되는데 그것이 진목사가 안식교에게 빌지 않았다는 충분한 답이 될 것으로 믿는다.
② 진목사가 돈을 달라고 해서 주었다는 말에 대하여
우선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진목사가 빌었다는 말과 모순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안식교에서는 돈을 달라면 주는가? 무슨 잘못이 안식교에 있지 않고서야 돈을 줄 리가 없을 것이다. 진목사에게 이단으로부터 책값을 받았다는 비난을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진목사가 잘못을 빌었다거나 돈을 달라고 해서 받았다는 말은 거짓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합의서 내용과도 모순된다. 안식교의 말이 맞으려면 안식교측에서는 진목사로 하여금 다시는 안식교를 비판하지 못하도록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은 그 책을 파기하는 것이 안식교 비판을 중단하는 의미가 아님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역시 필자(최삼경)는 이에 대해서도 증거를 가지고 있다. 후에 안식교의 반응을 보고 필요하다면 교계 기자들에게 자료를 제시할 수도 있다.
아직도 안식교는 기성교회와 같아서 이단이 아니란 말인지 아니면 다르지만 옳아서 이단이 아니란 말인지 의심스럽다
필자가 여러 번 지적한 것처럼 안식교는 무조건 이단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을 뿐 안식교가 기성교회와 같아서 이단이 아니라는 말인지 아니면 다르고 기성교회는 틀렸고 자신들이 옳아서 이단이 아니라는 말인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기성교회 안에는 많은 교파가 있지만 이단시하지 않는 것과 같이 기성교회와 안식교의 차이는 기성교회 안의 교파들간의 차이 정도라고 말하였지만, 논쟁을 진행해 가는 동안 안식교는 기성교회와 완전히 다르지만 기성교회가 틀리고 안식교가 옳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는 쪽으로 논쟁이 흘러갔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모든 이단들이 그렇듯이 밖으로 기성교인들에게는 이단이란 소리를 듣지 않음으로 기성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미혹하자는 것이요, 또한 안으로 안식교인들에게는 자신들의 교리가 우월해서 이단이 아니라고 함으로 우월감을 가지게 하고 최근 들어 기성교회로 돌아오는 사례가 많은 안식교인들을 단속하자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것을 증명해 보자.
우선 안식교인들에게 최대의 변증자로 주목받는 신계훈 씨가 쓴 책의 제목이 무엇인가?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신계훈, 빛과소리, 1993)는 것이다. 여기 어둠은 기성교회를 의미하고 빛은 안식교를 의미한다. 그런데 김대성 목사는, 안식교는 종교 개혁의 정신을 계승한 정통 복음주의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교회와신앙, 97년 4월호 152쪽 이하). 물론 김대성 목사가 제목은 그렇게 붙였지만 내용에서는 윌리암 밀러의 재림운동을 계승한 점을 변호했을 뿐 기성교회와 안식교가 같다는 점을 언급한 곳은 없었다. 이 점은 지난 10회 동안 변증한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목사는 형식적으로는 안식교가 기성교회와 같아서 이단이 아니라고 말하였지만 내용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김목사의 말이 맞다면 본 논쟁에서 기성교회와 안식교가 같다는 점들을 들어가며 변증했어야 하고 아니면 혹 오해된 부분들만을 밝히면 족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이단논쟁에 속한 논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같은 기성교회 안에서 심지어 한 교단 안에서도 논쟁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주의 교리만은 기성교회에서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한 유일한 교리일 뿐 그 외의 모든 교리에서는 자신들이 옳아서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논리가 성립된다. 빛이라고 믿는 안식교가 어둠이라고 보는 기성교회를 통해 이단이 아님을 인정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어둠에게 인정받으려는 빛도 빛인가? 그것은 결코 빛이 아니다. 그것은 어둠보다 더 어두운 빛일 것이다. 바로 안식교의 빛이라고 믿고 있는 그 빛이 이런 빛이 아니겠는가?
김대성 목사의 인격을 의심한다
여기에서 또 밝히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김대성 목사의 인격을 의심케 하는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김목사는 ‘96년 여름 중서합회 장막 부흥회’라는 연합집회에서 “우리도 변화되자”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한 바가 있는데 그 강의 내용은 녹음 테이프로 제작돼 배포되었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김목사는 많은 부분에서 거짓말을 했다. 그러한 거짓 강의에 거기 있었던 안식교인들이 아멘을 연발한 것을 듣고 그 안식교인들의 감격해 하는 우매함보다 청중을 속이는 김대성 목사의 인격에 실망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김대성 목사가 거짓말을 한 때가 <교회와신앙>과 지상논쟁을 시작한 후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이 크다. 그 강의 내용 중에 여러 가지 거짓 내용이 있지만 필자(진용식)와 <교회와신앙>에 대한 부분만을 다루고자 한다.
필자(진용식)는 <교회와신앙> 96년 7월호에 “김경선 장로님께 묻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바 있다(107-115쪽). 그런데 김목사는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했다. 강의 내용을 직접 들어보자.
“상황이 많이 바뀌어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던 신문, 잡지, 방송이 거의 멎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안식일교회를 이단시하고 기사를 쓰고 있는 잡지가 <교회와신앙>이라는 잡지인데 그 잡지가 장로교 통합측의 이단사이비 대책위원회 상담위원장(정확하게 하면 상담소장이다 : 필자주)인 최삼경 목사라는 분과 진용식 목사가 둘이 힘을 모아서 아주 끈질기게 안식일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 얼마전 그 잡지에 김경선장로에게 묻는다 하고 이제 기사를 냈는데 그 끄트머리에 가서 무엇이라고 썼는가 하며는 이흥선 목사님이나 김경선 장로님이 거기서 무슨, 물론 ‘님’자를 안 붙혔습니다. 이흥선 목사나 김경선 장로가 그 동안 그렇게 기독교에서 이단시하던 안식일교회 편에 손을 들고 나서고 있으니 그 동안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던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이건 교단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문제를 제의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이 두 분(김경선과 이흥선) 하나님의 사자들을 위해서 늘 기도하시고 늘 관심을 가지시고 이 두 분 하시는 일에 협력이 되어서···”(설교 테이프 록취).
그가 한 거짓말은 다음과 같다.
우선 형식적인 문제에 있어서의 거짓이다. 필자가 위의 글에서 김경선 장로에게 ‘님’ 자를 안 붙혔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 그 글에는 정중하게 붙여져 있다. 제목에서부터 정중하게 ‘김경선 장로님께 묻습니다’라고 하여 ‘님’자를 붙혔으며 그 내용 전체 처음부터 끝까지 ‘님’자를 한 번도 빼지 않고 붙여서 글을 썼다. 그리고 이흥선 목사에 대해서는 전혀 거론조차 한 바가 없다.
그런데 김목사는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무의식적이었을까, 의식적이었을까? 그것은 김대성 목사만 알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사려깊고 정직한 인격을 가진 일반 사람이라도 그렇게 쉽게 들통날 거짓말을 할 수 없는데 성품성화를 힘쓰는 목사가 그렇다는 점에서 더 실망스런 것이다. 안식교는, 자신들은 부정하지만, 율법주의적 구원론을 가지고 성화의 삶을 강조하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성화된 사람, 품성이 변화된 사람의 특성 중 하나가 진실됨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안식교의 연합회 선교부장으로서 그의 성품성화 수준이 이런 수준이라면 짐작되는 바가 크다.
그리고 김대성 목사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필자 진용식의 글의 끝에서) 이흥선 목사나 김경선 장로가 그 동안 그렇게 기독교에서 이단시하던 안식일교회 편에 손을 들고나서고 있으니 그 동안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던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이건 교단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문제를 제의하고 있어요”라고 했다.
이흥선 목사와 김경선 장로가 안식교에 손을 들고 나섰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들은 안식교에 백기를 들고 항복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동안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던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이건 교단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하고 있다’는 말은 김대성 목사가 글짓기를 한 내용이다. 김목사가 말한 내용은 글 끝머리에도 없고 첫 머리에도 없는 것이다. 김대성 목사가 조작한 작문이다. 김대성 목사가 진실한 사람이라면 이 점에 대하여 사과를 해야 할 것으로 본다.
<교회와신앙> 96년 7월호의 ‘김경선 장로님께 묻습니다’의 끄트머리의 글은 이렇게 되어 있다. “안식교의 이단적인 교리에 대하여는 질의할 것들이 많으나 중요한 것 몇 가지만 먼저 묻습니다. 장로님께서 안식교의 교리를 잘 모르고 하시는 일인지, 알고도 이단 교리에 미혹되어 하시는 일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바라건대 장로님께서 잘 알지 못해서 착오를 일으키셨다면 지금 안식교를 위해서 하시는 일을 중지하시고 한국교회 앞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장로님께서 안식교를 옹호하시고 그들의 책을 출판하는 등의 일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교회에 큰 영향을 주는 일인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의 있는 답변을 요망합니다.”
김목사의 거짓말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먼저 김목사가 한 말을 들어보자. “이목사님께서(이흥선 목사를 말함 : 필자주) 하신 일 중에 신문도 중요하지만 공개토론회를 주선하셨죠. 공개토론회는 기독저널 신문기사를 좀더 객관성 있게 평가받고자 하신 것인데 공개토론회 광고를 내보내고 목사님께서 여러 사람에게 편지를 냈습니다. 공개토론을 할테니 그 동안 당신이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공개토론에 나오시오 하는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편지서를 여러 장 보내셨죠. 여러 장 보냈는데 거의 다 안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대답은 나가 봐야 우리가 그저 이론으로 알 뿐이지 그 사람들과 실전을 하면 우리가 불리하니 안 나가겠다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들의 대답이었습니다. 혹시 나오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세 사람을 세우려 했으면 우리가 세 사람이 나오고, 나오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들에게 목사님이 자료를 보냈어요. ‘오직 성경만이 판단 기준이다’ 뭐 기본, 이런 책을 보내서 안식교가 이런 걸 주장하고 있으니 준비를 하시오. 그 책을 받아서 그런지 뭐 어떠해서 그런지 그 책을 받은 뒤 얼마 있다가 다시 전화(가) 온댑니다. ‘못 나가겠다’고, 그래서 하여간 공개토론회를 하는, 한 삼사일 전까지도 사람이 정해지지 않은 거예요. 나올 사람이 없어 가지고 심지어 그 안식교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서적을 가장 많이 쓰던 사람 중에 한 사람, 세 사람이 그런데 두 사람은 돌아가셨고 이제 한 사람 박영관 목사님이 계신데 그 분에게도 목사님이 전화하셨죠?(이흥선 씨 : 예). 전화 하셔서 나오시라고 했더니 ‘아이고 내가 뭐 그 동안 글을 몇 개 쓰기는 했지만 나가면 뭐 잘 모른다’고 ‘진용식 씨 내보내라’고 그러드래요. 진용식 씨는 중서합회에서 다 아시죠? 어떤 분인지 다 아십니다. 지금 기독교회가 안식일교회 비판하는 일에 최고의 권위자를 진용식으로 내세웁니다. 그 정도로 안식일교회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진용식한테도 목사님 연락하셨나요?(이흥선 목사에게 물음). 진용식도 우리를 알기 때문에 못 나오겠다는 거예요. 이래저래 안 나오겠다고 하다가 결국 두 사람이 최종 선발되었는데 여러분이 그 테이프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실례가 되지만 이 말을 좀 써야 되겠습니다. 우리말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어요. … 중략 … 그렇게 해서 안식일교회를 이단시하던 사람들의 설 자리가 오므러 들어서 설 자리가 거의 없도록까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과 김경선 장로님, 이흥선 목사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박수)”.
이 내용에서 박영관 목사에 대한 문제나 다른 문제는 관여하지 않겠다. 그러나 필자(진용식)에 대하여 한 말에는 대답을 하겠다. 필자는 이흥선 목사가 주선하는 공청회에 나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목사의 말대로 안식교와의 실전이 두려워서 못 나간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필자가 나가지 않겠다는 말이나 나가겠다는 말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글이나 근거가 있으면 밝혀주기 바란다.
이흥선 목사가 필자(진용식)에게 공개토론회에 나올 것을 제의한 일이 있다. 제의를 해 놓고 허락에 의하여 공개토론회를 가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열겠다고 해 놓고 나오라는 것이다. 그런 상식에 맞지 않는 공개토론회를 주선한 무례함은 그만두자. 그러나 필자는 이흥선 씨가 교단으로부터 또는 기성교회 이단연구가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고 지목받는 사람들을 비호하는 모습을 적지 않게 보아왔다. 그런 그가 공개토론회를 며칠 앞두고 팩시밀리를 통하여 공개토론회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온 것이다. 그 후 그가 전화를 걸어 왔는데 통화 상태가 안 좋아서 다음에 통화하기로 해 놓고 그는 더 이상 전화하지 않았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필자가 공개토론회에 나가겠다거나 안 나가겠다거나 한 사실은 글로도 말로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안 나가겠다고 했다는 말이나 두려워서 그랬다는 말은 웬 말인가? 어쨌든 김대성 목사의 작문 실력은 알아주어야 할 것 같다.
하나씩 변증해 보겠다.
우선, 두려워하는 사람이 지상논쟁은 할 수 있는가? 필자(진용식)는 94년 2월부터 <교회와신앙>에서 안식교의 이단성을 지적해 오던 중 김상래 목사와 지상논쟁을 한 바 있는데 웬 일인지 김목사가 논쟁 중에 꼬리를 내리고 논쟁을 중단함으로 끝을 맺지 못하고 마친 일이 있다. 그것도 지상논쟁이 안식교 편에서 요청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필자가 요청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미 김상래 목사와 지상논쟁을 하다가 안식교편에서 중단해 놓은 상태가 아니었는가?
그리고 이흥선 씨가 공개토론회를 하자고 하기 전에 이미 필자가 안식교측에 지상 공개토론을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김상래 목사가 일방적으로 논쟁을 하다가 중단함으로 정식으로 안식교 한국 연합회에 공개토론을 요청했던 것이다(교회와신앙, 95년 5월호). 이흥선 씨의 공개토론회에 나가지 않은 것이 두려워서 그랬다고 한다면 어떻게 공개토론을 하자고 할 수 있겠는가? 이흥선 씨가 주선하는 공청회라도 사전에 방법을 합의하여 객관성 있게 상식적인 수준의 공개토론회라고 인정됐다면 얼마든지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좋다. 그렇다면 앞에서 요구한 것처럼 다시 공개토론회를 요청하는 바이니 이흥선 씨와 함께 꼭 공개토론에 나와줄 것으로 믿는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요청하는 공개토론회는 나오지 못하고 어쩌고 저쩌고 한다면 목사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그 인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공개토론회를 거절할 어떤 명분이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성경에 보면 사단은 거짓말쟁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이단의 특성이 아닌가 생각하며,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안식교 선교부장이 그 정도라면 나머지도 짐작되는 바가 있다.
공식문서를 인용하여 비판해 달라는 말은 어떻게든 안식교의 모순을 피해보자는 취지에서 나온 자가당착적인 말이었다
안식교인들은 자신들을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에게 습관적으로 하는 주문에 속한다. 즉 공식문서에 의해서 비판해 달라는 것이다(김대성, 교회와신앙, 96년 11월호 126쪽; 김상래, 교회와신앙, 94년 5월호 164-165쪽, 등). 예를 들어 칼빈주의를 오해하고 있는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 칼빈주의를 비판한다면 되겠느냐는 것이다. 백번 천번 맞는 말이다. 그러면서 안식교측에서는 심지어 화잇의 글도 안식교라는 이름으로 비판할 수 있는 핵심 자료가 아닐 수 있다고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어떤 것이 공식문서인지는 말이 아닌 글로 정확히 밝히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김상래 씨는 밝혔으나). 그러나 구두로 그들이 제시하는 공식문서란 것은 바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기본교리 27>(편역인 천세원, 발행인 심태섭, 시조사)라는 것이다. 영문으로는 <Seventh-day Adventists Believe... A Biblical Exposition of 27 Fundamental Doctrines>라는 책이다. 그러나 이 말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비판을 막아보자는 임기응변적인 논리라는 점이다. 이를 증명하겠다.
우선 안식교가 이단이 아니라고 변증하는 소위 안식교의 변증자들은 대부분 이 책을 인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모순된 소리인가? 다른 사람에게는 이 책이 “우리의 핵심적인 사상이니 이 책으로 비판해 달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교리를 소개할 때나 자신들을 변호할 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모순 중에 모순이요 나아가 사기라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우선 그 동안 김대성 목사의 변증에서 바로 위의 책을 단 한 번이라도 인용한 일이 있는가? 없다. 다른 책을 중심해서 비판한 것이 안식교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비판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면 안식교인들이 믿고 있는 교리와 진리에 대한 변증 또한 안식교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점에 있어서 신계훈 씨도 별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는 책에서도 위의 책이 별로 인용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책 전체에서 단 9번밖에 인용되지 못하였다. 그것도 핵심적인 내용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다. 신계훈 씨는 무려 800회가 넘게 참고문헌을 인용했다. 그 중에 자신들의 교리서라고 하는 책은 9번밖에 인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씩 살펴보자. 안식일 문제에 있어서 한 번, 영혼멸절 문제에서 한 번, 예정교리에서 두 번, 성서적인 재림과 비밀 휴거에서 한 번,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기에서 한 번, 교파의 기원 문제에서 한 번, 부록인 김순명 목사에 대한 변증에서 두 번이 전부이다. 결국 부록의 문제를 제하면 핵심교리 부분에서 7번밖에 없는 셈이다. 위의 책이 안식교의 핵심교리서라면 종횡무진하게 인용되어야 할 것이다. 안식교의 핵심교리인 조사심판 문제나 2300주야 문제에서는 한 번도 인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안식교인들도 이 책을 자신들의 교리서로 인정을 하지 않던지 아니면 인정하더라도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안식교측의 논리대로라면 신계훈 씨가 쓴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는 책자도 공식문서가 못 된다. 공식 변증서도 못 된다. 이 책은 신계훈 씨 개인이 변증한 서적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도 시조사에서 출판한 책도 아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짐작된다. 신계훈 씨를 통하여 변증의 효과를 보고 그의 변증에 약점이 생기면 그것은 그 개인의 실수로 돌려 안식교를 보호하자는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런데도 실제적으로 이 책을 안식교의 공식변증서인양 이용하고 있다는 점 또한 아이러니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영문으로 나온 연대는 1988년이요 그것이 한국에 번역된 연대는 1990년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나오기 전의 안식교는 무엇을 믿었는가 하는 점이다. 전에는 교리가 없었다는 말이요, 또한 혼돈의 시대인 사사시대의 사람들처럼 자기 소신에 옳은 대로 믿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삿 21:25). 그렇다면 100여 년이 넘도록 안식교는 자신들의 정리된 교리가 없었다는 말이요, 이제 9년 전에야 교리가 정리되었다는 말이요, 그것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7년 전에야 알려졌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날 안식교인들 중에 진정한 의미의 안식교 교리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심스럽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핵심적인 교리에 대하여 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이다. 즉 2300주야 문제에 있어서 그 기산점을 “기원전 457년, 곧 아닥사스다왕 제7년에 해당한다”(299쪽)고만 할 뿐, 왜 그 날로 잡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 의해서는 아무런 비판을 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공식적인 교리서이기에 그렇게 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는 변증적인 내용이 없는가? 아니다. 있다. 교리서라는 책에 기성교회에 대한 변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어쩌면 교리서로서 품위가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바로 주일 문제이다. 주일 문제에 대하여는 자신들의 안식일 문제에 관해서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기성교회의 주일 문제에 대하여 비판까지 가하고 있다(241쪽).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책에 의해서는 안식교를 바르게 또는 필요한 만큼 알 수도 없지만 더욱이 비판의 서적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안식교인들이 이 책에 의해서 비판해 달라는 말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혼미케 하려는 연막술에 불과하다. 그 대표적인 문제가 2300주야 문제의 기산점 문제이다. 기산점을 457년으로 잡아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도 안식교 학자들마다 입장이 다 다른데 누구의 말을 따라서 비판하라는 말인가? 안식교인들은 화잇의 이론을 성경과 같이 진리의 전제로 보고 교리를 진행시키기 때문에 생긴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이 있다. 자신들은 시조사를 자신들의 교단 인쇄물의 공식 발행소이자 보급소로 보기를 주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교회지남, 96년 11월호). 거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시조사 편집부장 천세원의 이름으로 된 “교회 내의 출판물 유통과 검열에 관하여 협조를 당부하며”라는 글이다. “시조사는 지난 88년 동안 교단의 공식 출판사로서 복음 전도를 위한 병참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 시조사는 교단 인쇄물의 공식 발행소이자 보급소로서, 교단 서적의 독립적 배포권을 갖는다”라고 되어 있다. 한 마디로 시조사에서 발행하는 책들은 안식교의 공식문서가 된다는 말이다. 비판을 피하려 할 때는 공식문서를 한 권의 책에 국한시키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시조사에서 발행한 책들을 공식문서로 보도록 한다는 말이니 안에서의 얼굴과 밖에서의 얼굴이 지킬과 하이디처럼 다르다는 말이 아닌가?
변증서 출판을 통해 안식교를 옹호해 주고 있는 김경선 장로의 글도 이의 연장선에서 보면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신계훈 씨의 책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를 제호만 바꾸어 재출판한 <오직 성경만이 판단 기준이다>의 출판서문에서 김경선 장로는 다음과 같이 상반된 두 가지 말을 했다.
“안식일교회에는 그들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7」이라는 책이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안식일교회를 교리적으로 비평하려면 어떤 개인들이 저술한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하지 말고 그 책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우리가 이단이라고 규정한 부분에 대하여 너무나도 상세하게 그 대답을 끝내놓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대답에 대하여 다시 어떤 문제를 제시하지 못했을 뿐이다. 안식일교회는 1991년도에 삼육대학 교수인 신계훈 박사가 저술한「오직 성경만이 판단 기준이다」라는 저서를 내 놓고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 책을 통해서 그들은 모든 문제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역사적으로 명쾌한 변증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본교리 27>을 안식교의 공식문서라며 그 책을 들어 비판하라고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식교에서 신계훈 씨의 책으로 상세하게 변증해 놓고 기성교회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며 마치 신씨의 책이 안식교의 공식적인 변증서인양 말하고 있으니 자가탕착도 보통 자가당착이 아닌 것이다. 안식교에서 그렇게도 내세워 의지하고 있는 이흥선 씨 역시 같은 맥락의 말을 했으니 자가당착의 도미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호에 대한 반증
그래도 화잇의 빗나간 거짓 예언을 성경적이라고 변호할 것인가?
안식교는 화잇을 말세의 선지자로, 남은 교회의 특징으로 믿고 주장하고 있음은 이미 충분히 밝혀졌다. 그러나 필자는 화잇이 거짓 선지자임을 여러 가지로 비판하였다. 화잇을 거짓 선지자라고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예언이 비성경적이며, 성취되지 않은 빗나간 예언이 많다는 것이었다. 김목사는 본 논쟁 중에 예언이 성취되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라는 점을 형식적으로는 인정을 하면서도 화잇의 빗나간 예언의 의미를 교묘한 말로 변호하였다.
그 중에 하나를 예로 들어보면, 노예제도가 재림시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필자가 <교회와신앙> 96년 11월호 137쪽에서 화잇이 노예 제도가 재림시까지 계속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비판을 하자 안식교측에서는 96년 12월호 149쪽에서 변명하기를, ‘반역을 일으킨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을 붙여 예언한 것인데 그 부분을 삭제하고 뒷부분만을 가지고 원래의 의미를 왜곡시켜 비판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97년 1월호 151쪽에서 화잇의 노예제도에 관한 예언을 초기문집 283족의 문장을 소개하면서 조건을 붙여서 예언했다고 하는 안식교측의 변명이 거짓말이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랬더니 안식교측은 97년 2월호 134쪽에서 변명하기를, 그 내용은 원문에도 번역본에도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안식교측은 원문에도 역본에도 없다고 잡아떼던 그 내용을 그 책 93년도판 179-180쪽에서 발견했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 내용은 미래적인 사건을 현재적으로 예언한 것이라고 97년 3월호 117쪽에서 변명을 하였다. 필자가 제시했던 책은 76년도판인데 93년도 책과 페이지가 달라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97년 3월호 126쪽에서 원문에 없는 내용이 어떻게 역본에 있는지 답변을 요구하자 안식교측은 이에 대해서는 답을 못하고 필자가 그 책의 출판 연도를 밝히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였다. 그리고 요청한 <교회증언> 원문도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고 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안식교는 재림시까지 존재한다는 노예제도에 대한 화잇의 예언이 원문에 ‘반역을 일으킨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을 붙여 예언한 것이라고 했다가, 다음에는 아예 원문에 없다고 함으로써 화잇이 그러한 예언을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변명하였다가(그 내용이 있으면 거짓 선지자가 됨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결과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처음에 ‘반역을 일으킨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면’이란 전제 조건이 있었다고 했던 말에 대한 변증은 ‘옳다 그르다’는 말도 없이 그냥 안개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미래적인 사건을 현재적으로 예언한 것이라는 말로 변명하고 말았다.
화잇의 거짓 예언에 대한 안식교의 변명은 이런 식이었다. 이것은 화잇에게는 절대로 잘못이 없다는 전제 때문에 발생한 결과라고 본다. 이래도 저래도 화잇의 거짓 예언에 대한 답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반역을 일으킨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면’이란 말은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필자가 보기에 김대성 목사가 필자보고 화잇을 잘 모른다고 했는데 그 동안 횡설수설한 점을 볼 때 화잇을 잘 모르는 것은 필자가 아니라 김대성 목사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화잇의 노예제도의 예언에 대하여 취급하려 한다.
“나는 노예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무지 가운데 가두어 둔 노예들의 영혼들에 대하여 책임 져야 할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노예들의 죄악들이 주인에게 전가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지 가운데서 타락하여 하나님과 성경에 관하여 아는 바가 없으며 주인의 채찍밖에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짐승보다도 더 낮은 수준에 있는 노예들을 하늘에 들이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정심 많은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하실 것이다. 반면에 주인들은 마지막 일곱재앙을 만날 것이며 둘째 부활에 다시 일어나 고통을 받다가 마지막 비참한 죽음을 당하여야 할 것이다”(엘렌 지 화잇, 시조사, 초기문집 283쪽).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첫째, 노예의 구원이 일반인과 다르다는 것이다. 무지한 노예는 하늘에 들어갈 수 없으나 하나님의 동정심으로 일반인과 달리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예의 죄를 주인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노예가 나오지만 이러한 말씀은 없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와 정반대의 사단적인 이론이다. 빌레몬서에 나오는 노예 오네시모는 분명히 구원받은 노예였다. 이로 보아 화잇의 노예에 대한 예언은 성경과 맞지 않다. 이에 대하여 김대성 목사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가 못 받는가? 못 받는다면 엘렌 화잇의 말이 맞는 것이다”라는 짧은 말로 넘어가려고 하였다(교회와신앙, 97년 4월호 152쪽). 노예의 영혼은 주인에게 예속되는 것처럼 하는 말이 불신자가 불신에 대한 책임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과 어떻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화잇의 주장은 ‘옳다 그르다’ 하는 논쟁은 그만두더라도 근본적으로 기성교회의 인간관과 다르다는 점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둘째, 이 예언대로 한다면 노예제도가 일곱 재앙이 내릴 때까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식교에서 말하는 일곱 재앙은 말세의 재림 직전에 있을 계시록의 7재앙을 말하는 것으로 안식교인들은 아직도 일곱 재앙은 내리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화잇은 이 예언에서 노예의 주인들이 일곱 재앙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으니 이 예언이 성취되려면 일곱 재앙이 내릴 때까지 노예의 주인들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노예제도는 폐지되었고 당시의 노예의 주인들도 다 죽었으나 아직 일곱 재앙은 내리지 않았으니 무엇을 의미하는가? 차라리 비록 미국의 노예 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지금도 내적으로 노예와 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김목사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 마디도 답변하지 못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째서 영원의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영원한 ‘아이오니오스’(aionios)요 영벌의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한 세대의 ‘아이오니오스’(aionios)인가?
필자는 97년 2월호에서 안식교의 내세관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특히 안식교가 영원지옥을 부인하면서 영원(aionios)이라는 단어 “아이오니오스(aionios)”가 한 세대, 한 세상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영원한 지옥도 한도 끝도 없는 영원한 지옥이 아니라는 주장(신계훈,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202-203쪽)에 대하여 필자는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영영한 불(aionios)에 들어가라고 하였고(41절) 역시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aionios)생에 들어가라고 하여 같은 ‘아이오니오스’(aionios)가 쓰여졌음을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아이오니오스’(aionios)를 한 ‘세대’나 한 ‘세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얻을 영생 ‘아이오니오스’(aionios)도 한 ‘세상’으로 끝나는 영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신계훈 씨의 말처럼 영(aionios)생이 한이 없는 생명을 말한다면 영(aionios)벌도 한이 없는 영원 지옥을 말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적, 문법적인 결론이 된다(41절). 또 마가복음 3장 29절의 성령 훼방죄가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했을 때도 ‘아이오니오스’(aionios)가 사용되었는데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한 ‘세대’나 한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12장 32절의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김대성 목사는 이에 대하여도 유구무언이었다.
<교회와신앙> 97년 2월호 140쪽에서 “헬라어(푸뉴마, 푸쉬케)와 히브리어(루아흐, 네페쉬, 네쇠마) 단어가 1658회 나오지만 불멸하거나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영혼의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는 한 번도 없다”는 안식교측의 새빨간 거짓말에 대하여 97년 3월호 130쪽에서 누가복음 23장 46절과 사도행전 7장 59절의 몸과 분리의 개념으로 사용된 푸뉴마와, 누가복음 24장 39절의 “영(푸뉴마)은 살과 뼈가 없으되”를 인용하여 반증하였다.
김대성 목사는 이에 대하여도 역시 유구무언이었다. 김목사는 오히려 97년 4월호 153쪽에서 필자의 변증을 가리켜 ‘수준 이하의 변증 논리’라고 하였는데 수준 높은 논쟁을 했던 김목사는 왜 수준 높은 대답을 못하고 있을까?
그래도 안식교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에서 태어난 사생아가 아닌가?
김대성 목사와 논쟁을 하며 생각나는 옛 말이 있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는 말이다. 재림의 시기를 정하여 시한부 재림설을 전파한 사단적인 밀러의 종말 운동에 대해서도 안식교는 옹호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안식교 외에도 그 간에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잘못했다고 시인하고 회개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는 점과, 또한 밀러가 존재하지 않고는 화잇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과, 화잇이 존재하지 않고는 안식교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과, 그리고 안식교가 존재하지 않고는 김대성 목사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으로 볼 때 백 번 이해가 된다.
그러나 밀러의 시한부 재림설과 시한부종말론 운동에 대한 안식교의 변명은 스스로 모순에 빠져 버렸다.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에 대하여 안식교측은 두 가지로 변명하고 있는데 열거하고 비판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밀러가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했을 때는 안식교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때이기에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은 안식교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요, 둘째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 비록 실패했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성령운동이었고 첫째 천사의 기별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 안식교와 무관한 것이라면 왜 안식교는 굳이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이 성령의 기별이었다고 변명해야 하고, 또 한 편으로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하면서도 자신들과 무관하다는 모순된 주장을 할 수밖에 없는가?
안식교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과의 관계를 개신교와 천주교의 관계에 비유하여 자신들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개신교와 천주교와의 연속적 내지는 불연속적인 관계와 밀러와 안식교와의 연속적 내지는 불연속적인 관계는 유사성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안식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개혁자들은 천주교의 그 교리를 비판하여 피를 흘리며 개혁을 하고 나왔지만 안식교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비판하고 개혁해서 나온 무리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사단적인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성령의 운동이었다고 찬양하고 첫째 천사의 기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밀러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점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에 의해서도 쉽게 시한부종말론을 말하면 밀러가 거론되고 그 후손으로 안식교가 꼽히는 것이다. 즉 쉽게 일반인들은 밀러의 운동에 대한 비판을 똑 같이 안식교에 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에 참여했다가 나온 ‘여호와의 증인’들은 비록 이단이지만 전혀 밀러와 관련시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안식교처럼 그것을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제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은 안식교가 공식 명칭하에 조직되기 전의 일이기 때문에 안식교가 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안식교의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로 비판받을 수 있다.
첫째로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은 안식교의 핵심교리라는 점이다. 안식교의 교리를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세 천사의 기별이다. 세 천사의 기별 중에 첫째 천사의 기별이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밀러는 첫째 천사의 기별을 전한 기별자가 되는 것이다. 만일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 안식교와 무관한 것이라면 안식교의 기별은 세 천사의 기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식교는 자신들의 교리를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포함해서 세 천사의 기별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밀러는 안식교의 첫째 천사의 사자로서 안식교의 사상적인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역사를 볼 때 대한민국이 있기 전에 조선, 고려, 신라, 백제, 고구려, 고조선 등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나라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앞의 나라들은 우리 나라가 아니란 말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조선 시대의 이순신 장군은 남의 나라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나라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상식이다.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은 안식교(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에서 한 일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하는 한 그리고 2300주야 문제나 조사심판 교리가 살아 있는 한 화잇은 밀러파라고 하는 것은 상식이 아니겠는가?
하나 더 예를 들어 보자. 역사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는, 그리고 직접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상이 같으면 같은 범주 안에 두는 것은 상식이다. 예컨대 영지주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고 또 영지주의자들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어도 어떤 사람의 사상이 영지주의와 같을 때 그를 영지주의자라고 하는 것이다. 하물며 밀러의 재림 운동의 영향권 내에서 그리고 그 사상을 벗어나지 못한 안식교를 어떻게 밀러와 다른 교파라고 할 수 있겠는가?
둘째,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은 분명 비성경적인 사단의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화잇은 밀러가 성경을 연구할 때 천사가 가르쳐 주었다고 했는데(엘렌 지 화잇, 시조사, 쟁합 360쪽) 이는 엄청난 문제를 야기시킨다. 즉 성취되지 않은 시한부종말 예언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이다. 즉 거짓 예언도 하나님이 시켜서 천사가 했고 또 그것을 실행하지 않게 한 것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짓 영으로 만드는 것이다.
김대성 목사는 참선지자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4가지 기준을 말하면서 그 둘째가 예언 성취 여부라고 하였다(교회와신앙, 96년 12월호 148쪽). 그렇다면 김대성 목사의 말에 의하면 밀러는 사단의 영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의 기별은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한다면 어떤 엉터리 예언도 다 합리화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는가? 안식교에서 지난 1992년 10월 22일의 시한부종말론에 대하여 많은 비판을 하는 것을 보았다. 밀러의 1884년의 기별이 첫째 기별이 될 수 있다면, 과연 1992년의 기별이 넷째 기별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도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더라(계 10:10)는 말씀이 밀러의 종말론을 가리키는 것인가?
안식교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 잘못된 거짓 운동이었다고 하지 못하고 있으며 할 수가 없다. 김목사는 <교회와신앙> 97년 4월호에서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라는 말로 밀러의 시한부종말 운동을 ‘인간의 위기’라고 표현하였으며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기회’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성경으로 변명하려고 했는데 바로 계시록 10장 10절의 말씀이다. 즉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 가운데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으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는 말씀이다. 이 구절을 밀러가 시한부종말론을 깨닫고 전할 때는 기쁨으로 했으나 그 예언한 것이 맞지 않아서 실망하게 될 것을 예언한 구절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밀러의 시한부종말 운동의 실패가 이 구절의 예언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우선 이 말씀은 밀러의 사단적인 재림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라고 되어 있다. 누가 보아도 여기 ‘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입에서는 달고 배에서는 쓰더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는 꿀같이 달지만 그 말씀을 적용해서 말씀대로 살게 될 때 받는 핍박과 고난, 시련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밀러의 재림 예언이라고 하는 성경 해석이 바로 이단들이 하는 성경해석 방법이다. 계시록의 감람나무를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나, 엘리야가 자신이라고 하거나, 요한이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나, 본문을 밀러의 예언과 관련시켜 해석하는 것은 유사한 방법의 성격해석이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시한부종말론 운동은 어느 때 어떤 운동이든지 비성경적인 것이며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재림의 시한을 정하는 것, 예언된 재림 날짜를 정하는 것 자체가 어떤 궤변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없다.
안식교의 말대로 시한부종말론 운동의 실패가 계시록 10장 10절의 예언한 쓴 맛의 경험이라면 그간에 모든 시한부종말론도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장림의 92년 10월28일 시한부종말론 운동도, 여호와의 증인의 수차에 걸쳐 실패한 시한부종말론 운동도, 안식교의 분파인 시기파들의 시한부종말론 운동도 다 같이 쓴 맛이라고 하면 된다.
장로교가 분파됐다고 비판하는 점에 대하여
김대성 목사는 한국의 개신교가 100개 이상으로 난립되어 있는 실정을 들면서 그 원인을 교리 문제가 아니라 감정 혹은 권력 다툼의 결과라고 보고 비판하였다(교회와신앙, 97년 4월호).
이 부분에 대해서도 먼저 안식교에 묻고 싶다. 안식교는 기성교회와 다른 교파인가 아닌가? 그 동안 자신들도 기성교회 안의 다른 하나의 교파와 같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안식교도 기성교회란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도 기성교회를 공격하는 것은 바로 안식교가 기성교회와 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이 문제가 자신의 문제라고 본다면 비판하면서도 반성하고 아파하고 함께 회개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고 교파가 난립되는 것을 옳다고 하는 것도 아니요 그리고 다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다른 모든 이단들이 기성교회를 비판하면서 그 반사이익을 누리며 살아가듯이 안식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실제로 안식교인들은 기성교회 교인들을 절대로 형제로 보지 않는다는 점은 안식교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를 비판하려면 그 비판의 대상이 누구였든지 그 기준은 같아야 한다. 세상에서도 두 개의 저울과 두 개의 자를 사용하는 자는 악한 자이다. 그렇다면 김대성 목사가 볼 때 이흥선 목사는 예장 합동측으로부터 제명을 당하고 안식교로 들어가지도 않고 기성교회 이름으로 자신이 또 교단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는 안식교를 옹호해 주는 사람이니 이 비판의 대상에서 예외인가?
그보다 더 모순된 점이 있다. 안식교 안에는 얼마나 많은 분파가 있는가? 열거해 보자.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 개혁운동이 있고, 제칠일안식일 예수교 안성 새중앙교회가 있고, 엘리야 복음선교회가 있고, 안상홍증인회가 있고, 시기파가 있고, 절기파도 있고, 그리고 경배파도 있다. 안식교인 15만 명에 이렇게 많은 분파가 있다는 점에서 결코 교인 500만 명이 넘는 기성교회의 분파를 비판할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옛말에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를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분파에는 두 가지가 있다. 비난을 받아야 하는 분파요,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분파도 있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롯과 갈라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어떻게 감리교와 장로교를 하나로 합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리교와 침례교를 합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서로 존경하고 잘 조화있게 지내고 있지 않은가? 서로 이단이라고 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그 동안 논쟁의 총정리
이번을 포함해서 그간에 안식교와 10회에 걸쳐 논쟁을 해 왔다. 이번 논쟁을 통하여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식교에서 초점을 흐리게 하자는 말장난 때문일 뿐 자세히 살펴보면 안식교 교리의 상당 부분이 밝혀졌고, 기성교회의 교리와 어떤 점이 다른가와 왜 안식교가 이단인가에 대해서도 밝히 알 수 있다고 본다. 안식교는 그간에 안식교에 대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 구체적 내용을 지적하지도 못하면서 안식교 교리에 대하여 잘 모르고 비판한다는 말을 상습적으로 해 왔다. 그러나 필자 편에서 보면 오히려 김대성 목사가 안식교를 안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식교를 잘 모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번 논쟁 이후에는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번 논쟁을 통해서 자신들의 교리를 충분히 들어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안에만 갇혀 밖으로 나가서 보지 않고서는 그 위치나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간 안식교와 논쟁했던 내용들 중에 필요한 부분들을 요약 정리하고 보충하는 형식을 취하겠다.
그래도 안식교가 상대적인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필자는 논쟁을 시작하며(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왜 안식교가 이단인가를 밝히고 안식교측에서는 ‘상대적 이단과 절대적 이단’이라는 제하로 이단의 분별 문제를 취급했다. 이 글에서 김대성 목사는 어떤 교단의 결정이나 의견으로 이단으로 결정되었을 때 상대적 이단이며, 성경으로 분별해서 성경에 맞지 않는 교리를 가졌을 때 절대적 이단이라고 하는데 안식교는 상대적 이단이지 절대적인 이단이 아니라고 하였다(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즉 이단이냐 아니냐의 분별을 성경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한 안식교는 성경 외에서 논쟁을 많이 하였고 반대로 성경적인 변증은 별로 하지 못했다. 필자는 어느 학자의 의견을 거의 참조하거나 인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식교의 주장대로 안식교의 교리에 대하여 성경으로 비추어 볼 때 왜 이단인가를 계속 밝혀왔다. 그러나 안식교는 자신들이 주장해온 바와는 모순되게 빌리 그래햄 복음 협회가 이단이 아니라고 했다느니, 마틴 박사가 이단이 아니라고 했다는 등(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111쪽) 무슨 단체나 학자들의 견해를 근거로 해서 이단이 아니라고 변증하기를 힘썼다.
그리고 최근 안식교 옹호자 김경선 장로의 책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에서도 안식교가 이단이 아니라는 변증을 하면서 ‘세계의 주요 교단과 단체들에서 이단이 아니라고 했으니 안식교는 이단이 아니다’는 식의 변증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김경선 장로의 책을 면밀히 조사해 보니 아전인수격으로 말한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안식교를 가리켜 ‘이단이 아니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이단이다’고 말하지 않으면 ‘이단이 아니다’고 했다는 식으로 한 부분이 많이 있다. 이 또한 후에 다른 방법으로 취급하도록 하겠다.
이런 김대성 목사의 논리로 비추어 볼 때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이와 같이 ‘이단’이라는 말이 자주 오용된 과거의 역사로 미루어 보아, 그 말은 결코 함부로 사용할 용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단’이라고 하는 말을 남용하는 한국교회의 풍토는 매우 우려할 만한 상태가 되었다. 여러 ‘이단 감별사’(?)들이 인쇄물이나 방송 매체를 통해 앞다투어 ‘이단’ 보고를 하고 있다.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이단을 정하는 자(尺)가 틀려 있기 때문에 그 자를 가지고 재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며, 사분오열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이단 시비를 가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교단 ‘갑’ ‘을’ ‘병’이 서로를 인정하여 정통이라고 자처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교단 ‘갑’이 교단 ‘정’을 이단으로 정했는데 교단 ‘을’이나 ‘병’은 ‘정’을 이단으로 정하지 않았을 경우, 그 관계가 매우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갑’이라는 교단이 한국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을 경우, 한국에서는 ‘갑’ 교단이 ‘정’ 교단을 이단으로 결정했는데 미국에서는 같은 ‘갑’ 교단이 같은 ‘정’ 교단을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모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110쪽).
이 논리에 안식교(갑)와 이흥선 씨(을)와 김기동 씨(병)를 대비시켜 보자. 안식교(갑)에서는 영혼멸절을 주장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된다는 김기동 씨(병)의 귀신론을 이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흥선 씨(을)는 김기동 씨(병)를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하고 있다. 안식교(갑)에서는 그런 줄 알면서도 이흥선 씨(을)를 의지하여 안식교(갑)를 옹호하도록 하고 있다. 자신들(갑)이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병)을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 그 자로 재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야말로 김목사의 말처럼 ‘모순’스런 일이 아닌가? 김목사는 이것을 하나의 가지로 비유하였다. “어떤 사람의 말중에 한 가지가 틀렸다고 해서 나머지 모든 말이 무조건 틀리다고 결론지울 수 있는가”(교회와신앙, 97년 2월호 136쪽)라고 하였다.
이 말은 더 ‘모순’된 말이다. 김대성 목사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이단논쟁은 성경논쟁이라고 하였다. 적어도 안식교(갑)에서 이흥선 씨(을)를 의지하여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받고 보호받기를 원하고 있다면 이흥선 씨(을)가 이단이냐 아니냐를 성경에 입각하여 바르게 보고 있다는 전제가 가능할 때에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급하다고 도둑질해서 먹을 수 없고, 도둑잡는다고 아무 칼이나 휘둘러 죽일 수 없으며, 화난다고 서방질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흥선 씨를 통해 옹호받으려는 그 자세가 바로 상대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오히려 교단의 학자들에 의하여 규정된 이단규정은 상대적이라 하고, 상대적인 두 개의 자를 가지고 이단을 재고 있는 이흥선 씨의 이단옹호는 절대적이란 논리가 안식교의 논리인가?
과연 안식교는 율법주의가 아닌가?
안식교의 구원론은 율법주의 구원론임을 성경적으로 그리고 그들 스스로의 모순점을 들어서 비판하였다. 그러자 김대성 목사는 그 동안 들어보지도 못했던 아주 중요한 말을 하였다. 안식교가 처음에는 율법적인 구원론을 가졌으나 1888년 안식교 총회에서 믿음의 의를 받아들여서 구원 교리가 대전환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변증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형태의 말을 사석에서 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즉 ‘옛날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안식교인들이 말하는 옛날은 1888년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분명히 고인이 된 우필원 목사가 안식교에 최고의 영향을 미쳤던 사람으로 그의 ‘큰 구원’과 ‘영원한 구원’ 문제에 대해서도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논쟁을 통해서 김대성 목사가 그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최초의 말이라고 보인다. 어떤 의미로든 놀라운 일이다. 진정으로 안식교가 이단적인 율법주의를 버리고 전환하였다면 안식교에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말이 가능하다.
먼저는 안식교의 시작은 화잇이 아니라 1888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고 저주의 포문을 넓히기에 주저하시지 않으셨던 율법주의를 버리고 이신칭의 사상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도 중요한 말이 왜 그 동안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도 남은 문제는 화잇의 책임이다. 누가 안식교를 1888년 전에는 율법주의로 만들었는가? 화잇일 것이다. 1888년 전이든 뒤든 화잇의 계시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안식교이다. 그런데 그 구원교리가 대전환되었다면 화잇의 계시가 거짓 것이란 말이다. 만일 화잇의 사상에는 율법주의가 없었는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면 1888년 전의 안식교인들에게는 화잇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바보들만 모였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래도 화잇의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고 본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율법주의자인지 아닌지 그녀는 알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1888년의 대전환 사상을 김대성 목사 한 개인의 실수로 돌려버릴 소지가 많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김대성 목사 외에 안식교를 변호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신계훈, 이흥선, 김경선 등)에 의해서도 이 점이 시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김 목사의 말과는 달리 안식교의 공식적인 입장이 ‘안식교 교리는 1888년 전이나 후나 같다’고 한다면 그 책임은 바로 김대성 목사에게 돌아간다. 김목사가 안식교의 율법주의를 임기응변적으로 숨기려다 저지른 실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안식교편에서나 기성교회편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실수라고 본다. 안식교편에서는 자신들이 율법주의였음을 인정하는 큰 실수가 될 것이요 기성교회편에서는 한 개인의 실수만으로 묻어둘 수 없는, 안식교의 진실을 알게 하는 정직한 실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남는다. 김대성 목사의 말이 맞으려면 대전환되기 전의 안식교의 구원교리가 무엇이었으며, 무엇이 어떻게 대전환되었는지에 대하여 선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반복하여 질문하였건만 김목사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까지도 유구무언인데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는가?
안식교의 토요일 준수는 율법주의의 산물이다
그간의 논쟁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가장 길게 이어온 문제가 안식일 문제일 것이다. 안식일 문제는 안식교측에서 가장 자신있게 생각했던 문제이고, 기성교인들을 미혹하는 데 재미를 보아온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다른 문제만은 1회로 끝냈는데 김대성 목사의 특별한 요구에 의하여 안식일 문제만은 2회나 논쟁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안식일 문제의 논쟁에서 안식교는 필자의 비판과 주장을 변증하지 못하고 계속 피하여 간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그간의 안식일과 주일 문제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필자는 <교회와신앙> 96년 11월호 140-143쪽에서 구약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음을 성경적으로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증거하였다. 그리고 안식교측에서는 역시 96년 11월호 127-133쪽에서 안식일이 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96년 12월호 141-144쪽에서 필자는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증거하였다. 이 때 나온 핵심적인 사상은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의 안식일이 ‘절기 안식일’이 아니요 ‘제칠일 안식일’이라는 문제요, 또한 안식교측이 초대교회에서 안식일을 지켰다고 주장했던 부분(행 13:14, 42, 44, 17:2 등)에 대하여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려 간 것이 아니요 전도하려고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다는 문제로 압축되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안식교측에서 주일에 예배한 근거가 성경에 없다고 한 주장에 대하여도 충분히 변증하였다(교회와신앙, 96년 12월호 145쪽).
그러나 안식교측은 안식일이 폐지되었다는 96년 11월호 필자의 성경적 증거들에 대하여 12월호에서는 한 마디 답변도 못하였다는 점을 독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이단논쟁은 성경적인 논쟁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일반 역사에 의해서 주일이 로마의 콘스탄틴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등의 말로 성경 밖에서 논쟁을 하자고 하였다.
김대성 목사가 전혀 변증을 시도조차 하지 못한 내용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교회와신앙> 96년 11월호의 안식일 문제의 반증을 못하였으며, 골로새서의 ‘안식일’이 ‘절기 안식일’이 아니라 ‘제칠일 안식일’이라는(96년 11월호 141쪽) 주장에 대하여도 하나도 반증하지 못하였으며, 또 초대교회의 첫 주일 예배인 오순절 다락방의 모임에 관하여도 아무런 답변도 못하였다. 이것을 유구무언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안식교측은 다시 97년 1월호에서 ‘안식일이 폐지된 것인가 요일만 변경된 것인가’를 물었다. 이 질문은 안식교편에서 기성교회를 가장 어지럽히기 좋은 호재로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율법이 신약에서 폐해졌다는 말과 완성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못 알아듣는 데서 나온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주일 개념은 구약의 안식일 개념에서 연속적인 요소가 없지 않다. 그러나 또한 폐해진 것이다. 전자의 의미가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에 속하는 것이요 후자의 의미가 율법이 폐해졌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다. 또 안식교는 일요일 예배의 기원을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밝혀 달라고 물었는데 96년 12월호 145쪽을 다시 살펴보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안식일과 주일 문제에 대한 논쟁을 다시 요약해 보면 안식교측은 안식일이 폐하지 않았고 초대교인들은 주일이 아닌 안식일에 예배하였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의 겉옷은 벗었는데 속옷은 벗지 못한 증거이다. 안식교의 주장이 맞다면 신약성경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있거나 초대교인들이 안식일에 예배한 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없다. 안식교측에서는 신약성경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나 안식일에 초대교인들이 예배하였다는 기록을 단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안식일이 폐했다는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였고 사도행전 2장에서 초대교인들의 분명한 주일 예배의 근거를 밝혔다. 안식교가 지금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신약성경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나 초대교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다는 근거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안식일 문제의 논쟁은 결국 안식일이 폐지되었다는 것과,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날이며 초대교회의 첫 예배일이었으며 성령 강림일이었던 주일에 예배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확실히 밝혀준 것이었다. 인도의 도마교도 이집트의 꼽트교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고 있다는 점도 역사적으로 초대교회는 주일을 지켰음을 입증하는 것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
그 후 김목사는 억지로 큰 호재라도 잡은 듯이 들고 나온 것이 히브리서 4장 9-10절이다. 거기 “안식할 때”가 원문에 의하여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교회와신앙, 96년 12월호 156쪽). 그리하여 이 점을 연구하여 이것이 문법적으로, 논리적으로, 성경 상호간의 유기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충분히 다 지적하였다(97년 2월호, 129쪽). 즉 구약의 ‘사바트’는 ‘안식일’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안식’도 의미함을 밝혔고, 그것은 신약에도 마찬가지이며, 신학적으로는 더욱 그러하며, 만일 안식일로 번역한다면 아직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을 때 가능하다는 논리적 모순을 지적했으며, 끝으로 왜 안식교에서는 같은 단어로 되어 있는 히브리서 4장 10절과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히브리서의 안식은 안식일로 해석하고 골로새서의 안식일은 토요일 안식일이 아니라 절기 안식일이라고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구체적인 언급은 한 마디도 없이(유구무언) 박창원 편 헬라어 사전의 언어학적 의미롤 한 마디 하고 심지어 ‘양심’까지 운운하며 ‘양심’ 없는 소리를 하고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97년 3월호, 117쪽).
2300주야 교리와 조사심판 교리는 안식교의 최고의 교리이자 최고로 엉터리 교리이다
2300주야와 조사심판에 대한 문제는 이번 논쟁에서 안식교의 교리가 얼마나 비성경적인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문제였다고 본다. 우선 2300주야에 대한 연대 기산점도 엉터리요,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는 방법도 그 결과도 엉터리이다.
김목사는 어떤 문제를 변증하지 못했는가 살펴보자.
우선 2300주야에 대한 연대해석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안식교는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2300년이라고 해석하는데 이 해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간단히 비판할 수 있다. 이 예언은 다니엘 8장 9-1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작은 뿔의 횡포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안식교에서는 이 작은 뿔을 로마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안식교의 해석대로 하면 2300년 동안 작은 뿔인 로마가 횡포를 부렸을 때 맞는 말이다. 그러면 안식교의 말대로 기원전 457년부터 1844년까지 2300년 동안 로마가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미친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주장을 하지 못할 것이다. 로마는 기원전 457년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다음으로는 기산점이 틀렸다. 안식교는 예언의 기산점을 457년으로 하기 위하여 그 이유는 기원전 457년에 성전 건축령이 내려졌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성전은 그보다 59년 전인 516년에 이미 완공되었기 때문이며 그 전에 성전 건축령이 여러번 내려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1844년에야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조사심판을 시작하셨다는 조사심판 교리는 더욱 엉터리이다. 성경은 이미 예수님이 승천 즉시 지성소에 들어가셨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6:20, 9:12).
필자가 여러 가지로 비판했지만 안식교의 김대성목사는 이에 대하여도 한 마디도 반증하지 못하였다(역시 유구무언). 97년 1월호에서 조사심판에 대한 비판을 받았으면 2월호에서 그 답변이 있어야 했음에도 김대성목사는 한 마디의 반증도 하지 못했다. 다만 비판만 하지 말고 그 해석을 보여 달라고 하는 말을 하였다. 우선 비판에 대하여 대답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결국 이번 논쟁에서 2300 주야와 조사심판 교리에 대한 비판에 관한 안식교의 답변은 듣지 못하였다.
기성교회의 해석을 보여 달라고 하는 말에 동정심마저 들지 않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에 대하여 다 알지 못한다. 특히 계시에 대하여는 조심하고 알지 못하면 모르는 대로 두는 것이 인간이 계시에 대하여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이다. 안식교처럼 엉터리로 해석을 하려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안식교는 성경을 다 알고 해석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교만의 극치이다. 그리고 네가 대답을 하지 못하면 내 답은 무조건 맞는다는 전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무지한 질문이요 그리고 마치 내가 도둑놈이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네가 도둑놈인 것을 증명하려는 것과 같다. 내가 도둑이 아니면 네가 도둑되고, 내가 도둑이면 네가 도둑이 아닌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도둑놈이라도 너도 도둑놈일 수 있고, 내가 도둑놈이 아니라도 너도 도둑놈이 아닐 수 있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안식교의 2300주야 문제와 조사심판 교리가 틀렸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과 상관없이 필자의 입장을 알려주겠다.
2300 주야의 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다니엘 8장 14절의 2300 주야에 관한 해석의 순서는 먼저 작은 뿔이 무엇이냐라고 본다. 작은 뿔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작은 뿔을 알기 위해서는 또한 본문 8절의 수염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수염소는 헬라라고 21절에 해석하고 있다. 본 예언에 나타나는 수양 수염소 등은 나라들을, 그리고 그 뿔들은 왕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수염소(헬라)의 큰 뿔은 첫째왕 곧 알렉산더를 예언한 것이며(21절) 이 뿔이 꺾이고 네 뿔이 난 것은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 네 왕이 일어날 것에 대한 예언이다.
그런데 이 네 뿔 중에 한 작은 뿔이 날 것이 예언되었는데 이 작은 뿔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안식교는 그 작은 뿔을 로마로 해석했으나 맞지 않는다. 작은 뿔은 짐승에게서 나온 뿔이 아니라 뿔 중에서 나온 뿔이다. 그래서 이 작은 뿔은 또 다른 나라의 출현으로 볼 수 없고 한 왕의 출현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해석이 23절부터 25절까지 나와 있다. 이 작은 뿔은 네 나라 마지막 때에 일어날 한 왕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23절).
그런데 이 작은 뿔을 의미하는 왕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작은 뿔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패역자들이 가득할 즈음에 일어날 왕이다(23절).
2. 그 얼굴은 엄장하며 궤휼에 능하다(23절 하).
3. 권세가 강하나 자기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24절 상).
4. 비상하게 파괴를 행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멸할 것이다(24절 하).
5. 평화한 때에 많은 무리를 멸할 것이다(25절).
6. 만 왕의 왕을 대적할 것이다(25절 중).
7. 결국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지 않고 깨어질 것이다(25절 하).
또한 작은 뿔이 행할 횡포는 이렇다.
1. 남편과 동편과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커질 것이다(9절).
2. 하늘 군대의 별을 떨어뜨리고 짓밟을 것이다(10절).
3. 군대의 주재를 대적할 것이다.
4. 매일 드리는 제사를 중지시킬 것이다(11절).
5. 성소를 헐어버릴 것이다(11절하).
6. 진리를 땅에 던질 것이다.
7. 그 기간은 2300 주야가 될 것이다.
8. 2300 주야 후에 무너진 성전이 회복될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예언대로 행했던 왕이 누구인가? 이 예언에 적중한 왕이 바로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 왕이었다. 그는 네 뿔인 네 나라의 마지막 때에 패역자들이 가득할 때 태어났다(마카비 1:1-15). 그는 궤휼에 능한 자였으며(마카비서 1:11) 그는 파괴를 행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하였다(마카비서 1:20-24). 평화한 때 많은 무리를 멸하였으며(마카비서 1:30), 만왕의 왕을 대적하였으며(마카비 1:40-50), 또는 그는 사람의 손을 말미암지 않고 급사했다(마카비 6:7-13).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예언대로 그 세력이 이스라엘 즉 영화로운 땅까지 미쳤고 예루살렘을 침략하였으며(마카비 1:16-24), 하늘 군대의 별인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를 죽였으며 제사를 중지시켰으며(마카비 1:44-50), 성전을 헐고 진리를 땅에 던져버렸으며(마카비서 1:44-52), 그리고 그의 이러한 횡포는 주전 167년 12월 25일부터 주전 164년까지 2300일 동안 계속되었다.
이렇게 명백한 해석을 무시하고 안식교의 교리를 만들기 위해서 작은 뿔을 로마로 해석하여 조사심판 교리를 억지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안식교의 2300 주야의 해석과 조사심판 교리는 명백한 오류였음이 확실히 밝혀진 것이다.
안식교의 선지자 엘렌 지 화잇은 사단의 선지자이다
이번 논쟁에서 또한 직간접적으로 안식교가 이단 사교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진 내용이 있다면 화잇의 거짓 선지자 문제였다. 성경은 분명히 가감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계시의 종결성을 말하고 있는데 안식교는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교회와신앙, 96년 10월호 150-151쪽). 이는 기성 교회는 성경만이 완전 무결하고 유일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라고 믿는 반면, 모든 이단들은 성경 외에도 다른 계시를 가지고 있는 것이 그 특성인 것처럼 안식교도 이단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 요소이다.
이단들이 성경 외에 다른 계시나 선지자를 주장하는 이유는 성경에 없는 다른 교훈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충분한 진리이다. 다른 계시나 선지자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안식교 역시 화잇의 계시를 통하여 성경에 없는 다른 교훈(이단교리)을 많이 만들어 냈는데 그 중 하나가 음식물에 관한 문제이다.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이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서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3:9). 안식교는 성경 외에 다른 계시와 선지자를 주장하여 성경 외에 다른 교훈(이단교리)을 가지고 있는 한 이단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안식교는 계시록 12장 17절의 말씀에 기초하여 화잇의 선지자성을 인정한다고 주장하였는데(교회와신앙, 96년 10월호 156쪽) 안식교가 제시한 그 구절(계 12:17)에는 화잇이 선지자라는 말이나 뜻은 전혀 없다. 특정한 성경 말씀을 놓고 이를 살아 있는 누구 누구를 상징한다고 하는 것은 이단들이 피할 수 없는 성경해석법이다.
김대성 목사는 식물에 대해서도 변증하지 못하였다
성경에 이단들이 주로 가르치고 미혹하는 교리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음식물에 관한 문제이다. 즉 안식교와 같이 음식물에 대한 교리로 미혹하는 이단이 나올 것을 미리 예언하여 경계하고 있음을 볼 때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롬 14:20),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1-5),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3:9).
위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볼 때 안식교는 음식물로 생겨난, 이미 성경에 예언된 이단임에 분명하다. 필자는 안식교가 구약의 부정한 음식의 규례를 주장하는 것이 비성경적이며, 화잇의 계시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하신 육식을 금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교리라는 것을 97년 3월호를 통하여 비판하였으나(131-135쪽) 이 역시 다음 호인 4월호에서 아무런 반증을 하지 못함으로(여기서도 유구무언이었다) 김대성 목사야말로 ‘수준이하’의 논쟁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계획을 변경한 것처럼 화잇의 예언도 그렇다고 말한 점에 대하여
화잇은 1856년 안식교 총회에서 총회 대표자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살아서 맞이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대성 목사는 필자가 그 동안 줄기차게 지적해온 화잇의 거짓 선지자성 부분에 대하여 다른 것은 되든 안 되든 변명이라도 하였지만(특별히 노예제도 문제에 있어서) 그러나 1856년 총회의 예언에 대하여는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였을 뿐 제대로 변명을 하지 못하였다. 이 예언이 있은 후 그 당시 사람들이 이미 다 죽고 없음을 볼 때 이것만으로도 화잇은 거짓 선지자임을 필자가 비판하였다(교회와신앙, 96년 10월호 147쪽; 11월호 137쪽). 그러자 김대성 목사는 두 번에 걸쳐 대답을 하였다(96년 12월호, 97년 2월호).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세 가지가 된다.
첫째는 비록 화잇의 예언이 틀렸지만 10여 년이 지난 다음 화잇이 “많은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못하므로 재림이 지연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교회증언 2권, 영문 194)”는 것이다(96년 12월호 150쪽)는 것이다.
둘째는 바울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자기 시대에 있을 것을 기대하였던 것처럼(살전 4:15) 화잇도 그렇다는 것이다(96년 12월호 150쪽).
셋째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했는데(출 6:6-8), 결국 20세 이상된 자들을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신 것처럼(민 14:26-30) 화잇의 재림 예언도 그렇다는 것이다(97년 2월호 135쪽).
필자는 이렇게 불경스런 말은 세기적으로 들어본 일이 없다. 비판해 보자.
먼저 화잇이 10년 후에 재림이 지연되었다는 것을 말했으니 그가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는 말이 되는가? 그런 예언은 천하의 사기꾼도 그리고 천하의 멍청이도 할 수 있는 예언이다. 해보고 틀리면 하나님의 계획이 변경됐다고 하면 되니까 말이다. 오히려 그렇게 말했다는 점이 그녀가 인간적으로도 정직하지 못한 사기꾼 선지자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땅에 시한부종말을 예언한 사기꾼 예언가 중에 그 예언이 틀렸을 때 회개하고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거의 없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위의 말은 화잇에게는 어떤 잘못도 있을 수 없다는 전제 속에서 가능한 말이다.
다음으로 바울의 재림 대망사상과 화잇을 비교한 문제이다. 먼저 종말신앙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의 마땅한 신앙의 윤리이다.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는 언제라로 주님이 오시기를 바라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원하는 진정한 종말신앙이다. 시한부 내지는 시한부적 사상에 의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자기 시대에만 종말신앙을 필요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진정한 종말신앙을 파괴하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 시대에 주님이 오시기를 원하고 그 가능성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지 오신다고 예언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바로 김대성 목사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시한부종말론으로부터 생겨난 안식교인으로 어쩔 수 없이 숨어 있는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과 화잇을 동등한 선상에서 말하는 것 자체도 불경스런 일이라고 본다.
끝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경륜과 화잇을 비교하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 하신 말씀이 거기서 나온 사람들은 무조건 기계적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고 하는 예언은 아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광야에서 한 사람도 죽지도 않는다는 예언이 아니었다. 언약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그 언약이 파기되었는가? 아니다. 비록 불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죽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셨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김대성 목사의 말로 하면 이 땅에 어떤 시기꾼 예언가의 예언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없어진다. 예언을 해 놓고 틀리면 그것을 하나님의 계획 변경과 동일시해버리면 되니까 말이다. 안식교인은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화잇을 믿는 것인가? 그런 엉터리 예언을 말한 사람이 화잇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비판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역시 이 말은 화잇을 하나님과 같은 경륜자로 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대하여 이해가 안 될 때에 그 뜻을 알기는 원하지만 그 주권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기 전에 신앙의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논쟁을 계속해 오는 동안 안식교인들은 화잇을 신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정상적인 장로교인이라면 칼빈을 존경하지만 칼빈의 실수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칼빈을 숭배하거나 믿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는 윌리안 부스에 대한 구세군의 입장이나 웨슬리에 대한 감리교인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바로 안식교인들이 화잇을 그렇게 보는 것이 화잇이 적그리스도요 안식교인들이 이단인 것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감히 어떻게 화잇의 예언이 빗나간 점과 주권자로서 인격으로서 그 계획을 변경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언약과 비교할 수 있다는 말인가?
표절과 차용에 대하여
화잇은 생전에 수많은 계시를 받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쓴 책의 상당 부분이 다른 사람의 글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화잇의 표절 문제는 안식교인들이 가장 아파하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도 표절이란 비신사적인 일로 세상에서도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인데 기독교인이란 사람이, 그것도 선지자란 사람이, 그것도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이 남의 책을 보고 책을 쓰고 그것을 계시라고 했으니 말이다. 더욱이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사실을 밝히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필자가 이 점을 드러내자 안식교에서는 변명을 해보려고 하다가 김대성 목사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말이 그것은 ‘표절’이 아니고 ‘차용’이라는 말을 하였다(96년 10월호 152-153쪽). 성경에 하무라비 법전의 개념과 문체가 있었다는 점과, 솔로몬이 아가서를 다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과, 이사야서의 일부와 미가서의 유사성과, 역대상·하서가 사무엘상·하와 또는 열왕기상·하와 상당 부분이 같다는 점과, 사복음서가 상당 부분 같다는 점과, 유다서와 요한계시록이 에녹서에 나오는 자료를 인용했다는 점을 들어서 화잇은 차용을 한 것이지 표절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의 내용을 하나씩 비판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김목사 식으로 한다면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의 어떤 표절도 차용이란 말로 합리화될 수 있다. 김목사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하고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다. 세상에서는 김목사가 말하는 ‘차용’을 바로 ‘표절’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남의 책을 80% 이상이나 표절을 해놓고 그것이 차용이니 어쩌니 하는 비상식적인 말이 종교인의 입에서 가능한 말인가? 바로 이단이기에 가능한 말이다.
이것도 화잇을 신봉하고 화잇의 글을 성경과 같은 수준에서 놓고 보기 때문에 나온 엉터리 변증으로 보인다. 화잇이 한 행동이나 말은 무엇이든지 다 신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일반적인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고 차용이라고 하면 안식교인들에게 용납될 수 있겠는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안식교인들은 화잇의 신격화를 겉으로는 부정하고 화잇의 계시를 성경이라고 보지 않는 것처럼 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화잇은 숭배의 대상이거나 화잇의 글은 성경과 동등한 내지는 그 이상의 계시로 여기고 있는 증거라고 본다.
결론: 안식교는 정통교회가 아니다
금번 안식교와의 논쟁을 통하여 안식교측의 주장하는 교리들이 비성경적이며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임이 명백하게 밝혀졌다고 본다. 안식교측은 자신들의 교리를 소개할 뿐 그 비판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부분을 구체적으로 답변하지 못하였다. 필자는 그것을 유구무언 씨리즈라고 하고 싶다. 그나마도 변증한 부분에 있어 어떤 부분은 전혀 성경적이고 교리적이기보다 형식적이고 세상적인 변증을 한 부분이 많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안식교의 교리가 대부분 성경에 근거한 것처럼 할 뿐 사실은 화잇의 계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기성교회는 안식교를 정통교회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may-26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세계 교회가 인정하는
성경에 충실한 정통 복음주의 교회이다
<교회와신앙>의 수용성과 용기를 높이 평가한다
10회에 걸쳐 계속된 안식일교회와 <교회와신앙> 사이의 교리 논쟁이 일단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다수를 점령하여 교권을 남용하는 교단들이 어떤 상대방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이단 결정을 내린 다음, 그들의 변증이나 항변을 수용하려 들지 않는 한국 기독교계의 현실에서 <교회와신앙> 측이 상대의 반론권을 최대한 보장한다고 하여 이러한 논쟁을 수용하는 일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한 수용적인 태도와 용기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주로 이단 사이비 문제를 다루는 <교회와신앙> 측에 대하여 노파심에서 꼭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정통과 이단 문제는 어떤 면에서 사람의 영원한 생명과 멸망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결코 경솔히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불완전한 사람이 성경 해석의 왜곡된 결론이나 자신의 선입견에 기초하여, 더 성서적이요 진리에 충실한 교회일지도 모르는 상대방을 이단 사이비라고 결론지어 매도하는 일은 천국문을 막고 서서, 자기도 못 들어가고 다른 사람도 못 들어가게 방해하는 두려운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와신앙> 측은 이단 사이비를 만들어 내는 무슨 사명이라도 부여받은 것처럼, 혹은 자신들은 결코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완전한 성서학자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나 함부로 이단 정죄를 하고 있다. 자신들과 다른 견해와 입장을 밝히는 일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근거를 가지고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은 영적으로 사형을 선고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므로 그러한 일에 좀더 심사숙고하며 자제해 줄 것을 촉구한다.
<교회와신앙>의 논리 전개 방식을 비판한다
<교회와신앙>의 논리 전개 방식에는 특이한 면이 있다. 좀처럼 논쟁의 핵심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상대방의 표현 방식이나 사용된 단어를 가지고 흠집을 내어 독자들을 오도하는 일에 매우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그 사용하는 용어나 표현이 매우 거칠고 비신사적이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좀더 그리스도인 다운 면모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론을 성경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자신들의 이론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성경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논쟁에서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정직한 양심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와신앙> 측은 성경을 순리대로 해석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96년 11호 143쪽에서는 마태복음 12장 5절의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라는 말씀을 “제사장은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성경에는 분명히 ‘안식을 범하여도’라고 되어 있는데, ‘안식일을 범하여도’라고 한 것이다. 제사 제도가 실시되고 있는 동안 제사장들은 모든 백성들이 쉬는 안식일에도 성전 안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해야 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성경절은 분명히, 안식일 자체를 지킬 필요가 없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있는 안식일에 안식(쉼)하지 못하고 일할 수밖에 없는 제사장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는 날로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마 12:8)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97년 3월호 132쪽에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영적인 의미로 베드로에게 내려주신 환상(부정한 음식을 먹으라)을 아무 음식이나 먹어도 된다는 실제적인 의미로도 해석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사도행전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물건을 내가 언제나 먹지 아니하였”(행 10:14)다고 한 것을 보면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식생활 습관이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성경절(행 10:15)은 누가 읽어 보아도 명백하게 상징적인 것인데, 실제적인 것으로 해석하여 건강에 해로운 부정한 음식을 포함하여 아무 것이나 먹어도 된다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성경절로 보는 <교회와신앙> 측의 성서해석법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교회와신앙> 집필자 중의 하나인 진용식 목사는, ’94년 8·9월호(113쪽)에서 율법과 계명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갈라디아서 3장 19절을 인용한 바 있다. 그런데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 부분을 생략하여 다음과 같이 사용하였다. “그런즉 율법이 무엇이냐 …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여기에는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라는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범법함을 인하여 더해진 법이 율법이고 그것은 약속한 자손,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폐지된 법은 그 분의 십자가 희생을 상징하는 제사제도와 관련된 의식법들을 말하는 것이고, 그 원래의 법, 즉 십계명은 살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성경의 중간 부분을 생략하는 것은 정직한 성경학도의 양심이 아니다.
논쟁의 핵심보다 말꼬리 잡아 흠집내려고 하는 논법을 고쳐야 한다
이미 몇 차례 언급하였듯이 <교회와신앙>은 주어진 논제를 깊이 다루면서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진지한 태도없이 논쟁을 위한 논쟁을 일삼고 있다는 인상을 매우 강하게 주고 있다. 독자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의도인지는 몰라도, 필자가 이미 답변을 충분히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서도 그 답변들을 외면한 채 똑같은 비판에 거듭 매달림으로써, 정작 다루어야 할, 합의한 주제에 대하여는 너무나 적은 지면을 할애하는 불성실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한 예로, ’97년 2월호에서 다룬 주제는 「영혼불멸과 영혼멸절」이었으나, <교회와신앙> 측은 총 10쪽의 지면 중 이미 답변된 문제들에 대한 비판에 지면을 8쪽이나 소모하였으며 정작 다루어야 할 주제에는 2쪽의 지면만 사용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필자뿐만 아니라 <교회와신앙> 측과 이단 논쟁을 하는 「윗트니스 리의 지방교회」 측에서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그러한 느낌을 토로하고 있다. “최삼경 목사는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식의 언급을 중단하고 진리를 토론하는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오기를 요청한다. … 저자의 의도를 무시한 채 최목사는 일부분의 내용을 왜곡하여, 윗트니스 리가 기독교를 ‘저주’하고 ‘욕’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독자들의 증오를 유발시키는 최목사의 태도에서 순수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의 자세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 문제는 최삼경 목사가 윗트니스 리가 쓴 책의 본문 내용을 문맥과 관계 없이 떼어 내어 자기의 제한되고 잘못된 이해로 인해 왜곡한 데 있는 것이다”(교회와신앙, 97년 3월호 136~138쪽).
97년 1월호 논쟁에서 <교회와신앙>측은 초기문집 283쪽(출판연도는 밝히지 않았음)에 있다고 하는 노예문제에 대한 화잇의 언급을 거론하였다. 필자는 번역본과 원본의 283쪽을 살펴 보았고 그 곳에 해당 내용이 없기에, 해당 내용이 원본에도 번역본에도 없으니 다시 한 번 확인하여 정확한 출처를 제시하여 줄 것을 2월호에서 요청하였다. 그 후 필자는 스스로 초기문집의 앞뒤를 다시 살펴본 결과 283쪽이 아닌 289, 290쪽에 해당 내용이 있음을 확인하고 3월호에 그 내용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교회와신앙>은 4월호에서 그 일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상당한 억지를 쓰며 필자가 무슨 거짓말이라도 한 것처럼 독자들을 오도하고 있다. “노예 제도가 재림시까지 있을 것이라는 <초기문집> 283쪽(1976년판)의 화잇의 계시에 대하여 김대성 목사는 원문이나 번역본에도 없다고 주장했다가(97년 2월호) 한 달 뒤인 3월호에서 1993년 번역본에 그같은 내용이 있다고 시인했다. 그런데 원문에 관한 언급은 피한 채 역본에 그 내용이 있음을 늦게 시인”했다. 번역본에 있으면 원본에도 당연히 있는 것을 가지고 원문에 관한 언급을 피했다고 하는 표현을 쓰는 의도가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잡지의 품위를 생각해서라도 좀더 성실하고 정직하기를 바란다
<교회와신앙> 측은 자신들의 주장를 내세우거나 변증을 할 때에 임기응변식의 논리를 자주 사용한다. 우선 대강 넘어가고 보자는 비양심적인 동기가 엿보인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① <교회와신앙> 측은 97년 1월호 논쟁을 이렇게 마치고 있다(147쪽). “결국 안식교에서 안식일만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같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이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하지만 율법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율법주의에서 나온 말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지면관계상 이 점에 대하여 다음 호에 더 깊게 취급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교회와신앙> 은 그 이후에 약속했던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② 또한 <교회와신앙> 측은 “안식교에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의미와 기성교회가 ‘주일을 지킨다’는 의미는 다르다. 다음에 거론하겠다.”(교회와신앙, 96년 12월호 145쪽)고 하였으나 아직도 거론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책 146쪽에서 “안식교는 구약의 안식일은 변할 수 없는 날로 지금도 토요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요, 기성교회는 구약의 안식일은 폐해졌으니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안식교에서의 ‘지킨다’는 의미와 기성교회에서의 ‘지킨다’는 의미는 다름을 앞에서 말하였다”고 말하였지만 그 어디에도 말하지 않았다. 145쪽에서는 다음에 거론하겠다고 해놓고는 146쪽에서는 앞에서 말하였다고 하는 <교회와신앙> 측의 토론 자세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③ <교회와신앙> 측은 이 논쟁 5회에서 “초대교회의 예배일은 자연스럽게 주일에 드려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신약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부활이 주일에 있었기 때문이다”(96년 12월호 145쪽)라고 말하였으나, 97년 2월호 127쪽에서는 “1주일 중에 하루가 주일이 아니라 7일이 주의 날인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한 번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즉 일요일이 주일이라고 하였다가, 다른 곳에서는 일주일의 7일 모두가 주의 날이라고 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교회와신앙> 측의 말대로라면 일요일이 주일이 아니라 날마다 주일이 되는 것이다.
설명하기가 곤란한 문제에 부딪치거나 답변이 궁한 경우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선 넘겨버리든지 아니면 앞과 뒤가 맞지 않는 논리를 서슴치 않고 전개하는 습성은 잡지의 품위를 생각해서라도 시정해야 할 것이다.
<교회와신앙> 측이 제기하는 문제들의 낙후성
지난 9회에 걸쳐서 진행되는 지상 토론에서 <교회와신앙> 측이 주로 제기했던 문제들 가운데는 엘렌 화잇의 노예 제도에 관한 언급, 미국의 남북 전쟁에 대한 화잇의 견해, 표절 시비, 돼지고기 문제, 음식 문제 등 매우 지엽적이고 낙후된 문제들을 상당히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문제들은 이미 1930~40년대에 제기되었던 문제들이고, 그 모든 문제들은 1951년에 발행된 <엘렌 화잇과 그에 대한 비평들>(F. D. Nichol, Ellen G. White and Her Critics, R&H Publ., Assn.)에서 말끔하게 해결된 상태이므로 그러한 문제들을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것은 피차간에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을 계속 문제삼는 것을 보면, 오래 전에 안식일교회를 다니다가 개인적인 사유로 장로교회로 옮겨 목사가 된 진용식 씨의 서재에 꽂혀있는 낡은 책들에서 소재를 만들어 내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을 준다. 한국의 장자교단이라고 자칭하는 장로교 통합측이 장로교의 학문적인 배경이나 장로교 신학에 의존하지 못하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본 교회를 떠난 진용식 씨를 앞세워 이단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교단의 형편이 매우 어려운 모양이다.
<교회와신앙> 측이 아직도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들
필자는 <교회와신앙> 측의 질문에 대하여 꾸준히 답변을 하였으나, <교회와신앙> 측은 필자가 어떠한 답변을 하든지 또 다시 지엽적인 문제를 들고 나와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시간만 지연시키면서 독자들을 오도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왔다. 그런데, 자신들은 필자의 질문에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는 것들이 많다. 대답할 만한 가치가 없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러한지 아니면 대답할 말이 없어서 피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 논쟁의 3회 째부터 <교회와신앙> 측에 제시한 질문에 대하여 아직도 답변이 없는 것들이 많다. 당시 필자의 질문을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교회와신앙> 측의 분명한 답변을 재차 촉구한다.
조용기 목사의 사이비성 규정과 해벌에 대한 이유를 밝혀 달라
“한때 장로교 통합측에서 순복음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했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입장을 바꾸어 그 결정이 취소되었다. 처음에는 어떤 이유로 순복음교회를 이단으로 정했는지, 그리고 나중에는 어느 편의 입장이 달라져서 무슨 명분으로 그 결과를 취소했는지 그 과정과 이유를 밝혀주기 바란다”(교회와 신앙, 96년 10월호 149-150쪽).
필자의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교회와신앙> 측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김목사는 통합측에서 조용기 목사를 이단으로 정했다가 해제했다고 했는데, 김목사는 어디에서 조용기 목사를 이단으로 했다고 들었으며 어느 책에 그렇게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는가?”(’96년 11월호 134쪽).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다음과 같이 진술의 내용을 바꾸었다. “예장 통합측에서 순복음교회를 사이비성이 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조용기 목사를 사이비성이 있다고 한 것이다”(97년 1월호 150쪽).
“필자의 질문은, 장로교 통합측에서 조용기 목사가 사이비성이 있다고 규정했다가 해벌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단’이나 ‘사이비’나 어떤 용어라도 상관없다. 조용기 목사의 사이비성에 대하여 조용기 목사가 입장을 바꾼 것인지 통합측에서 입장을 바꾼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교회와신앙, 97년 2월호 135쪽).
“필자가 장로교 통합측에서 한 때 조용기 목사를 ‘사이비’로 규정했다가 나중에 ‘해벌’한 내용과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한 바 있다. <교회와신앙>측은 이 질문에 대하여는 직접적인 대답을 계속 회피하면서, 이제 와서는 이흥선 목사의 안식일교회에 대한 입장을 거론하고 있다. 이흥선 목사는 분명히 한 때 안식일교회를 이단시했다. 그러나 그가 안식일교회 <기본교리 27>과 변증서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를 연구한 결과,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이 일반 기독교의 구원론과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여 안식일교회가 정통 기독교회임을 천명한 것이다.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을 밝히 이해하게 된 것이 이흥선 목사가 입장을 바꾼 근본 원인이다. 그렇다면, 장로교 통합측은 조용기 목사의 어떤 면이 ‘사이비’성으로 판단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변화로 ‘해벌’을 하게 되었는지도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그것을 밝히지 않고 계속 다른 쪽으로 대화를 끌어가는지 모를 일이다”(97년 4월호 152-153쪽).
장로교의 공식적인 이단판별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단 문제를 다루는 학자마다 견해 차이가 다르다면, 그리고 T씨의 기준을 한 개인의 견해라고 한다면, 예장 통합측에서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단 판별의 공식적인 기준은 무엇인가?”(교회와신앙, 96년 10월호 150쪽).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발행한 <정통과 이단>(이형기 지음, 1997년판)에는 전통적인 교단들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루터교, 성공회, 로마 가톨릭교회를 들고 있다. 그리고 이단들로는 문선명의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모르몬교, 그리고 국내 신흥 사이비 신앙 운동과 이단 종교 집단들로 다음과 같은 단체들을 열거하고 있다. 권신찬 집단의 이단시비, 김기동의 귀신론, 밤빌리아 추수꾼 집단, 박윤식의 대성교회, 박명호의 엘리야 복음선교원, 이장림의 다미선교회, 지방교회(회복교회), 이초석의 한국예루살렘교회, 이명범의 레마선교회. 이상스럽게도 안식일교회는 어떤 범주에도 들어있지 않다. 그런데, 가톨릭까지 전통적인 교단들에 포함시켜 놓은 그 전통과 이단의 기준이 무엇인가? 위의 책 <정통과 이단> 142, 143쪽에 나와있는 다음의 내용을 살펴보자.
“우리가 논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루터교, 성공회, 로마 가톨릭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해서는 일치된 신앙을 지니고 구원론에 관하여는 루터교가 전적으로 ‘이신칭의’의 입장을 고수하고, 장로교는 이 ‘이신칭의’에 이어 곧바로 이어서 ‘성화’를 역설하고, 감리교와 성결교는 ‘성화론’을 강조한 나머지 구원의 조건으로 하는 경향(성결교가 감리교보다 ‘성결’을 더 강조하지만)이고, 침례교는 ‘중생과 성화’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못박았고, 성공회는 장로교의 구원론보다 역시 감리교의 그것에 가깝고,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은 개신교의 이신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면서 이 7교파 중에서 가장 공로주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하겠다.… 우리 개신교파들은 피차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른가에 유의하기 전에 너와 나 사이에 공통분모가 무엇인가를 의식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견해만 같을 뿐 구원론조차 각기 다른 일곱 개의 교단을 정통교회로 인정하는 이 분별없는 기준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장로교회의 최삼경, 진용식 목사는 안식일교회가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율법주의이며 그래서 이단이라고 주장하는데, 같은 장로교회에서 발행된 <정통과 이단>이라는 책에서는 성화를 구원의 조건으로 하는 경향(?)을 가진 감리교와 성결교, 그리고 ‘중생과 성화’ 없이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침례교, 심지어는 공로와 구원을 연관시키고 있는 가톨릭을 정통교회라고 보고 있으니, 누구의 어떤 기준이 올바른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장로교회의 공식적인 이단 판별의 기준이 무엇인지 꼭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다니엘 8장의 2300주야에 대한 장로교의 공식적인 해석을 제시해주기 바란다
필자는 97년 1월호에서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한 바 있다. “이번호에서 <교회와신앙>측은 안식일교회의 2300주야와 조사심판에 대하여 비평을 할 것이다. 집을 짓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남이 지어 놓은 집에 들어가 흠을 잡기는 매우 쉬운 일이다. 이번호에서 2300주야에 대한 장로교회의 공식적인 해석이 함께 다루어지기를 기대하나, 혹시 그렇지 못하면 다음호에서 꼭 다루어 줄 것을 당부한다. 상대방의 해석이 틀리다면 바른 해석을 제시해야 마땅한 것이다”(141쪽).
그리고 2월호에도 또 다시 동일한 질문으로 답변을 요청하였다. “본인은 1월호에서 분명한 답변을 기대하는 세 가지 질문을 한 바 있다. 그런데 답변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첫째, 안식일이 폐지된 것인지, 아니면 안식일 자체는 변동이 없고 요일만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된 것인지 질문하였다. 그러나 <교회와신앙>측은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말과 폐해졌다는 말은 다 맞는 말이다. … 그런 점에서 안식일이 폐해졌다는 말도 맞고, 완성되었고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말도 맞다. … 오늘의 주일은 분명히 안식일 개념에서 온 부분도 있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 중심의 종교가 주일 중심의 종교로 바뀌었다고 보아야 더 맞다고 본다’(2월호 127쪽)고 말하면서 분명한 답변을 내리지 못한 채 횡설수설하고 있다. 심지어는 ‘1주일 중에 하루가 주의 날이 아니라 7일이 주의 날인 것이다’(상동)라는 말까지 사용하면서, 일요일이 주의 날(주일)이라고 하던 종래의 주장에 대해서도 스스로 흠집을 내고 있다. 둘째, 일요일예배의 기원을 성서적으로 역사적으로 밝혀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성경적 근거없이 ‘교부들에 의해서 복음이 우리에게 전수되었고 또 기독교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상동)는 말로 대치하고 있다. 일요일예배에 대한 확실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여 주기 바란다. 셋째, 장로교에는 다니엘 8장과 9장의 2300주야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답이 없다. 다른 교파의 어떤 교리를 비판하려면 그 비판한 부분에 대한 바른 해석과 정통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마땅한 것이다. 변두리에서 맴도는 표현들을 자제하고 핵심적인 문제로 들어가 2300주야에 대한 장로교회측의 분명한 해석을 제시해 줄 것을 다시 한 번 요청한다”(97년 3월호 117-118쪽).
장로교 헌법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입장을 달리하는 <교회와신앙>
필자는 <교회와신앙> 측에게 안식일이 폐지된 것인지 아니면 안식일은 살아있고 요일만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된 것인지에 대하여 질문을 한 바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교회와신앙>은 4월호에서 “필자는 안식일 문제에 대하여 96년 11월호(140-142쪽)에서 안식일이 폐지된 것이라는 점을 여러 측면에서 변증하였다”고 답변을 하고 있다. 안식일이 분명히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 신앙과 교리의 기초가 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일정한 시간을 정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합당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적극적이고 도덕적이고, 영구적인 명령을 발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히 이레 중 하루를 안식일로 택정하여 하나님께 거룩하게 지키게 하셨다. 그 날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는, 한 주간의 첫째날로 바뀌어졌다. 성경에는 이 날이 주의 날(主日)로 불리워져 있다. 이 날은 세상 끝날까지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7항>.
이 내용을 보면 분명히, 안식일은 폐지되었다고 하는 <교회와신앙> 측의 주장과 상반된다. 그렇다면 <교회와신앙> 측은 그 신앙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인가? 심지어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발행한 헌법과도 상반된 견해를 서슴치 않고 주장하는 <교회와신앙>의 정체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장로교 헌법(1997년판) 48쪽에는 안식일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고 있다.
문 59. 이레 중 어느 날을 하나님께서 정하셔서 매 주간에 안식일을 삼으셨습니까?
답 세상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하나님께서 한 주간의 일곱째 날을 정하여 매 주간의 안식일을 삼으셨으며 그 후부터 세상 마지막까지는 한 주간의 첫날을 안식일로 삼으셨습니다. 이 날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입니다.
다시 한 번 <교회와신앙>측에 묻는다. 장로교 헌법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상반되는 안식일 폐지론을 끝까지 주장할 것인지, 아니면 종래의 주장을 시정할 마음이 있는지 꼭 밝혀주기를 바란다. 또한 십계명의 제 4계명인 안식일이 폐했다면, 나머지 계명들도 모두 폐한 것인지 아니면 제 4계명만 폐한 것인지도 아울러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일을 지키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좀더 명확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교회와신앙>측은, 주일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발적인 부활의 기념일이며 예배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매우 애매한 주장이다. 일요일을 주일로 옹호하는 대표적인 현대 신학자 폴 주이트(Paul Jewett)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첫날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가는 아직도 문제로 남아 있다. … 모든 학자들은 한 가지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첫날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부활의 기념일로 축하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일요일을 지키는 것은 부활 사건에다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발생과정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용이하지 않다. 옛부터 인정되고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일요일 예배와 관습이 그 정확한 기원에 대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폴 주이트, 주일의 참뜻, 옥한흠 역, 36). 이 ‘이상한 일’에 대한 확실한 답변이 있기를 바란다”(교회와신앙, 97년 1월호 141쪽).
안식일교회의 구원론 문제
<교회와신앙> 측은 안식일교회는 율법주의 구원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리고 그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안식일교회 서적에서는 성화와 행위를 강조하는 인용문만을 사용하고, 성경에서는 믿음을 강조하는 성경절들만을 찾아서 사용한다. 그러나 안식일교회의 서적들 중에도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이 얼마든지 있고 성경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성경절들이 얼마든지 있다.
<교회와신앙> 측은 필자가 “안식일교회도 역사적으로 교리적 논쟁이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1888년에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에서 있었던 교리논쟁은, 그 이전까지 율법의 행위가 강조되던 구원론이 믿음을 강조하는 구원론으로 돌아서는 대전환점이 되기도 했다”(교회와신앙, 96년 9월호 121쪽)고 한 말을 매우 집요하게 붙잡고 오도한 바 있다. 필자는 분명히 “율법의 행위가 강조되는 구원론”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교회와신앙> 측은 “원래는 안식교가 율법주의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라는 말로 변형시켜 안식교가 과거에는 율법주의였음을 시인한 것이라고 쾌재를 부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잇을 중심해서 성경연구 대회를 만들었던 1848년을 안식교의 창시로 본다면, 약 40여 년간 안식교는 율법주의 속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누구의 가르침과 주장에 의하여 40여 년간 율법주의 속에 있었단 말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화잇의 주장 때문이다”(교회와신앙, 96년 10월호 140-141쪽)고 비난하였다.
엘렌 화잇은 1888년 이전에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다음의 글은 엘렌 화잇이 1882년 3월 28일에 캘리포니아 힐즈버그에서 기록한 것이다. “그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만일 그대가 실수가 많고, 속절없고, 정죄받은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 만일 그대가 자아를 높이고 영화롭게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 …그대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한 교회와 이룬 그대의 연합, 형제들이 그대를 대하는 태도는 전혀 쓸모가 없다, 그 분에 관하여 믿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대는 그 분을(in Him) 믿어야 한다. 그대는 그 분의 구원의 은혜를 완전히 신뢰해야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다. …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천세원 역, 교회증언 제5권, 1995년판, 57, 58쪽).
<교회와신앙>은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을 비판할 때 엘렌 화잇의 서적들 중에 행위를 강조하는 글들만을 모아서 사용한다. 그런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면 성경에서도 오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그[하나님]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또 그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계 22:14, 한글 킹제임스 성경).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러한 성경절들만 모아 놓으면 율법준수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엘렌 화잇이 말한 다음의 내용은 어떤가? “죄인은 오직 범죄한 세상의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대속을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의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다. … 믿음이야말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며, 신앙이란 믿는 것뿐만 아니라 신뢰하는 것을 포함한다”(가려뽑은 기별 1권, 389쪽).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이 문제에 관하여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을는지 모르나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인간의 구원을 가능케 할 수 있으며, 이 의는 하나님의 은사이다”(상동, 331쪽).
<교회와신앙> 측은 더 이상 안식일교회의 구원론에 대하여 억지 논리로 사람들을 미혹하지 말기를 바란다. 구원받은 이후의 성화 문제에 대해서는 장로교 헌법에도 안식일교회의 입장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칭의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성화의 생활이 계속된다. 칭의의 은총은 일회적이나 성화의 생활은 일생을 통하여 계속된다”(장로교 헌법, 171쪽). 엘렌 화잇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화는 하루나 한해동안의 사업이 아니라 평생의 사업이다”(교회증언 3권, 325쪽).
영혼불멸의 문제점
이 문제에 대한 장로교의 공식 견해는 다음과 같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나,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눅 23:43; 고후 5:1,6,8; 히 12:23). 거기서 그들은 빛과 영광 가운데서 마지막 날에 그들의 육체까지 완전한 구원을 얻을 날을 기다린다. 이와는 달리 예수를 믿지 않고 거역한 사람들의 영혼은 음부에 던지어져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최후 심판 날을 기다리게 된다(눅 16:23-24; 벧전 3:19; 유 6-7). 그리스도가 주관하시는 마지막 심판대에서 모든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된다(마 25:31-32; 행 10:42; 롬 14:10; 고후 5:10). 거기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으로 옳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영광의 처소로, 옳지 못하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고통의 처소로 가게 된다(단 12:2; 마 25:46; 요 5:29; 10:28; 롬 2:7)”(장로교헌법, 179-180쪽).
한글 사도신경에는 삭제해 버렸지만 영어 사도신경에는 예수께서 십자가 희생 후 부활하실 때까지 지옥(Hell)에 내려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박영관 박사는 그의 저서 「이단종파비판(I)」(기독교문서선교회, 1991년판) 347쪽에서 예수님은 “그의 육체가 무덤에 있을 동안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느것이 옳은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이 영혼 불멸설은 많은 문제점들을 수반하고 있으나 우선적인 모순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세상의 법정에서도 피의자에 대하여 검·경의 수사와 조사를 거쳐 법정에서 변론과 증언 등의 조사절차를 거친 후 유죄 혹은 무죄가 결정되며, 유죄의 경우에는 실형 선고의 절차를 거친 후에 형을 집행한다. 그런데 「장로교헌법」의 기술을 보면, 사람이 죽자마자 영혼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께로 또는 음부(고통의 장소)로 가 있다가(형벌 또는 상급의 집행), 최후 심판날에 옳은 사람과 옳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는 조사를 하게 된다. 납득할 수 없는 심판 순서이다. 죽을 때 이미 그 운명이 결정된 사람들을 다시 불러내어 조사한다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이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도 위배되는 불합리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백보좌 심판」이라는 것은 예수님 재림 후 천년 되는 시점에 실시되는 심판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심판은 악인들의 행위가 기록된 책을 펴 놓고 실시하는 일종의 조사심판이다. 악인들이 죽으면 아무런 조사 없이 일단 고통의 장소로 보내어 형벌부터 먼저 받게 하고, 수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불러 내어 조사를 한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되는 터무니없는 교리임에 틀림없다.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독자는 본 잡지 97년 2월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교회와신앙> 측이 제시한 이단 사유의 허점
<교회와신앙>측은 본 논쟁의 첫회에서, 자신들이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는 이유를, ① 안식교는 시한부종말론에 의해 시작된 교회이기 때문에, ② 주일(일요일)교회를 짐승의 표를 받은 교회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③ 화이트를 마지막 선지자라고 하기 때문에, ④ 율법주의 구원관을 가지고 있기 대문에, ⑤ 영혼불멸이 아닌 영혼멸절을 믿으며 지옥을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들은 한결같이, 이단이라고 전제한 후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불합리한 사유에 불과한 것들이다. ① 안식일교회는 밀러의 재림운동으로부터 태동이 되기는 했으나, 그 운동에 참가한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이해한 점을 바로 잡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② 두 번째로, <교회와신앙> 측은 안식일교회가 “일요일을 드높이는 것은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안식일교회는 이단이라고 했다. 성경은 다니엘서 7장 25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를 괴롭게 하는 그 작은 뿔이 하나님과 관련된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라고 기록하였으며, 요한계시록 14:9-12에서는 ‘짐승의 표’를 받으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 두 성경 말씀을 종합해 보면, 콘스탄틴에 의해 로마 정부의 법으로 강요되고(321년 일요일 휴업 제도 시작), 성경이 아닌 교회법(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결의)에 의해서 준수되기 시작한 일요일 휴무와 예배 제도는 하나님의 계명에 의한 것이 아니며, 안식일 계명을 변경시킨 법이다. 십계명 중에서 개신교회가 변경하여 지키고 있는 법은 넷째 계명뿐이다. 계시록 14:9-12에 의하면 ‘짐승의 표’는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며 예수 믿음도 아니다. 그러므로 일요일 준수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 상징된 짐승의 권위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표시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강제성을 띤 법률로 효력을 갖게 되면 ‘짐승의 표’로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엘렌 화잇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인류 사이의 하나의 표로서, 또는 저들의 충성의 시금석으로 안식일을 사람들에게 주셨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빛을 받고도 계속적으로 불순종하며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큰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보다 인간의 율법을 높이는 자들은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이다”(마지막 날 사건들, 214쪽). “일요일 준수가 아직은 짐승의 표가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 우상 안식일[일요일]을 경배하는 법령이 내리기 전까지는 짐승의 표가 아니다”(상동, 214쪽).
<교회와신앙>측은 끝내 일요일 예배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배경이나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요일 예배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고 하는 안식일교회 측의 주장을 가지고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③ <교회와신앙> 측이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보는 이유 중 세 번째 이유는, 거짓 선지자인 화잇을 마지막 선지자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잇의 예언은 틀림이 없었으며, 그의 글들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있다. 화잇은 과연 선지자인가? 엘렌 화잇이 1915년 7월 16일에 주 안에서 잠들자「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수많은 언론들이 그녀의 죽음을 보도하였다. 뉴욕의 유명한 월간지「인디펜던트」(Independent)지는 1915년 8월 23일자 사설에서 엘렌 화잇을 “미국의 한 여선지자”로 해설하고 있다. 그 사설은 화잇에 대한 소개와 함께 그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그녀는 그녀가 받은 계시로 그녀의 믿음 안에서 절대적으로 정직하였다. 그녀의 생활이 그 계시들의 가치를 나타내 주었다. 그녀에게서는 그 어떤 영적 자만을 볼 수 없었으며, 부정한 이득을 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훌륭한 여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미국의 후손들이 가장 본받아야 할 삶을 살았다.”
④ 안식일교회가 율법주의 구원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하는 주장은, 비판자들이 성경에서는 믿음에 관한 말씀만 인용하고 안식일교회의 서적들에서는 율법준수에 관한 진술들만 골라서 인용하는, 비양심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⑤ 안식일교회를 이단으로 보는 마지막 이유로 영혼불멸을 믿지 않으며 지옥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안식일교회는 지옥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안식일 교인들이 믿는 지옥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가서 고통을 받는다는, 영원히 죽지도 못하고 고통을 받는다는 그러한 지옥이 아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의 지옥, 거기에서 악인들이 영원히 고통을 받는 장소로서의 지옥, 그것은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속성을 곡해시키고자 하는 사단의 속임수이다. 성경이 말하는 지옥은 마지막 때 악인들이 형벌을 받아 죽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계 20:9). 마지막 불은 악인을 영원히 태우는 불이 아니고 악인들과 죄의 세력을 소멸시키는 불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27개 기본 교리
필자가 본 지상 토론을 통해서 몇 차례 언급했듯이, 어차피 상대적 이단 개념이 한국 기독교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단이냐 정통이냐를 묻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일부 분별없는 이단 사이비 관련 목사들에 의해서 너무나 크게 곡해되어 있는 안식일교회의 참 모습을 조금이나마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 본 지상 토론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편협한 한국 기독교계를 향해서 안식일교회에 대한 세계적 평가를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토론이란 어차피 상대방의 이론을 수용하려 들지 않는 속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무슨 승부가 가려진다든가 상대를 감동시킨다든가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필자는 이제 본 지상 토론을 마치면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성경에 근거하여 믿고 있는 기본 교리들을 27개로 요약하여 제시한 후에 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말씀
성경, 곧 구약과 신약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고 기록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을 통하여 신적인 영감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인간에게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오류(無誤謬)의 계시이다. 성경은 품성의 표준이요 경험의 시금석이며, 교리들에 대한 권위 있는 계시자요, 역사 속에서 활약하시는 하나님의 행동들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다(관련 성경절 - 벧후 1:20, 21; 딤후 3:16, 17; 시 119:105; 잠 30:5, 6; 사 8:20; 요 17:17; 살전 2:13; 히 4:12).
2.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곧 함께 영원하신 세 신격의 통일체이신 한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불멸이시고, 전지 전능하시고, 만유 위에 계시고, 항상 존재하신다. 그 분은 무한하시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분이시면서도 그 분의 자기 계시를 통해 알려지신다. 그 분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원히 경배와 숭배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관련 성경절 - 신 6:4; 마 28:19; 고후 13:14; 엡 4:4-6; 벧전 1:2; 딤전 1:17; 계 14:7).
3. 아버지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의 창조주, 근원, 유지자, 통치자이시다. 그 분은 공의롭고 거룩하며, 자비롭고 인자하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변함없는 사랑과 진실하심이 한량없는 분이시다. 성자와 성령 안에 드러난 성질과 능력들은 아버지에 관한 계시이기도 하다(관련 성경절 - 창 1:1; 계 4:11; 고전 15:28; 요 3:16; 요일 4:8; 딤전 1:17; 출 34:6, 7; 요 14:9).
4. 아들 하나님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 그 분을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품성이 계시되었고, 인류의 구원이 성취되었으며,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 영원토록 참 하나님이신 분이 참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 그 분은 인간으로서 생활하셨고 유혹을 당하셨으나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완전하게 예증해 보이셨다. 그 분은 당신의 기덕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이심이 증명되셨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 대신 자발적으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우리를 위해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신다. 그 분은 당신의 백성을 최종적으로 구원하고 만물을 회복하고자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관련 성경절 - 요 1:1-3, 14; 골 1:15-19; 요 10:30; 14:9; 롬 6:23; 고후 5:17-19; 요 5:22; 눅 1:35; 빌 2:5:11; 히 2:9-18; 고전 15:3, 4; 히 8:1, 2; 요 14:1-3).
5. 성령 하나님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은 창조, 성육신, 구속 사업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활동하셨다. 그 분은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셨다. 그 분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능력을 충만케 하셨다. 그 분은 인간들을 이끄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이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신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항상 함께 하시도록 성부와 성자에 의해 파송되신 그 분은 영적 은사들을 교회에 부여하시며, 교회에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시고 성경과 조화를 이루어 교회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관련 성경절 - 창 1:1, 2; 눅 1:35; 4:18; 행 10:38; 벧후 1:21; 고후 3:18; 엡 4:11, 12; 행 1:8; 요 14:16-18, 26; 15:26, 27; 16:7-13).
6. 창 조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성경 속에 당신의 창조 활동에 관한 권위 있는 설명을 계시하셨다. 엿새 동안 주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지상의 모든 생물을 만드셨으며 그 첫 주일의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이렇게 그 분은 당신께서 창조 사업을 마친 것에 대한 영구적인 기념물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첫 남자와 여자는 창조의 극치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세상을 다스리고 그것들을 보호할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이 다 창조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었으며 “심히 좋았”다(관련 성경절 - 창 1; 2; 출 20:8-11; 시 19:1-6; 33:6, 9; 104; 히 11:3).
7. 인간의 본질
남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으며, 개성과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부여받았다. 비록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각 사람은 육체, 정신, 혼의 불가분적인 통일체로서 생명과 호흡,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우리의 시조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들은 그 분께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부인했으며, 하나님 아래에 있는 그들의 고귀한 지위에서 타락했다. 그들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었고 그들은 사망에 예속되었다. 그들의 후손은 이런 타락한 본성과 그 결과를 물려받았다. 그들은 연약성과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통회할 때 그들 안에 조물주의 형상을 획복시키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간에 사랑하며 자신의 환경을 돌보도록 소명되었다(관련 성경절 - 창 1:26-28; 2:7; 시 8:4-8; 행 17:24-28; 창 3; 시 51:5; 롬 5:12-17; 고후 5:19, 20; 시 51:10; 요일 4:7, 8, 11, 20; 창 2:15).
8. 대쟁투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품성과 그의 율법과 우주를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대쟁투에 관여되어 있다. 이 싸움은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은 한 피조물이 자기를 높이려다 하나님의 원수 곧 사단이 되었을 때 하늘에서 시작되었고, 하늘 천사의 일부를 반역하도록 만들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가 죄에 빠지도록 함으로 이 세상에 반역의 정신을 들여왔다. 이러한 인류의 죄는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그러지게 하고 창조된 세계의 질서를 파괴해서, 전 세계적인 홍수 때에 무서운 황폐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 세상은 모든 피조물이 지켜보는 우주적인 싸움의 전장(戰場)이 되었고, 이 투쟁에서 결국 사랑의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옹호받으실 것이다. 이 대쟁투에 가담한 그의 백성을 돕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충성스런 천사들을 보내사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구원의 길에 서 있는 그들을 지원하신다(관련 성경절 - 계 12:4-9; 사 14:12-14; 겔 28:12-18; 창 3; 롬 1:19-32; 5:12-21; 8:19-22; 창 6-8; 벧후 3:6; 고전 4:9; 히 1:14).
9.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고난,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한 유일한 속죄의 수단을 마련하셨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이 속죄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생을 얻을 수 있고,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의 무한하신 사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완전한 속죄는 하나님의 율법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성품의 자비스러움을 옹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죄를 정죄하고 우리를 위한 용서를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대리적, 보상적, 화해적 및 변형적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의 세력을 이긴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요, 속죄를 받아들인 이들이 결국 죄와 죽음을 정복하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분 앞에 하늘과 땅에 있는 자들이 다 그 무릎을 꿇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권을 선언하는 것이다(관련 성경절 - 요 3:16; 사 53; 벧전 2:21, 22; 고전 15:3, 4, 20-22; 고후 5:14, 15, 19-21; 롬 1:4; 3:25; 4:25; 8:3, 4; 요일 2:2:2; 4:10; 골 2:15; 빌 2:6-11).
10. 구원의 경험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자비와 사랑 가운데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를 삼으심으로 우리가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자각하고, 우리의 죄악성을 인정하고, 허물을 회개하며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 대치물과 모본으로 믿는 믿음을 행사하게 된다.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 믿음은 거룩한 말씀의 능력에서 나오며,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며 죄의 세력에서 구원을 얻는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거듭나고 성화된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기록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거룩한 생애를 살 능력을 받는다. 그의 안에 거함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고 현재와 심판 때에 구원에 대한 보증을 얻는다(관련 성경절 - 고후 5:17-21; 요 3:16; 갈 1:4; 4:4-7; 딛 3:3-7; 요 16:8; 갈 3:13, 14; 벧전 2:21, 22; 롬 10:17; 눅 17:5; 막 9:23, 24; 엡 2:5-10; 롬 3:21-26; 골 1:13, 14; 롬 8:14-17; 갈 3:26; 요 3:3-8; 벧전 1:23; 롬 12:2; 히 8:7-12; 겔 36:25-27; 벧후 1:3, 4; 롬 8:1:1-4; 5:6-10).
11. 교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승하여 우리는 세상에서 불러내신 바 되었고, 예배와 친교, 말씀의 교훈과 성만찬의 거행, 온 인류에의 봉사와 전세계적인 복음의 선포에 동참한다. 교회는 그의 권위를 성육신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받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며 교인들은 그 분의 자녀로 입양되었다. 교인들은 새 언약의 기초 위에서 산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신앙 공동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성결하게 하고 깨끗케 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신부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자로 다시 오실 때 그 분은 당신의 피로 사셨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모든 시대를 통하여 충성을 다한 영광스러운 교회를 맞아들이실 것이다(관련 성경절 - 창 12:3; 행 7:38; 엡 4:11-15; 3:8-11; 마 28:19, 20; 16:13-20; 18:18; 엡 2:19-22; 1:22, 23; 5:23-27; 골 1:17, 18).
12. 남은 자손과 그 사명
세계적 교회는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었지만, 마지막 시대 즉 배도가 만연한 시대에, 한 남은 자손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도록 불러냄을 받았다. 이 남은 자손은 심판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전하고, 그 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선포한다. 이 선포는 요한계시록 14장에 세 천사로 상징되어 있다. 그것은 하늘에서 심판하시는 사업과 동시에 일어나며, 땅 위에서 회개와 개혁 사업을 완수한다. 모든 신자들은 이 전세계적인 증거 활동에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요청을 받고 있다(관련 성경절 - 계 12:17; 14:6-12; 18:1-4; 고후 5:10; 유 3, 14; 벧전 1:16-19; 벧후 3:10-14; 계 21:1-14).
13.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연합
교회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들 가운데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로 구성된, 많은 지체를 가진 한 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사이에서 민족, 문화, 학문, 국적 등의 구별이나 높은 자와 낮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간의 차별이 분열의 요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 상호간을 하나의 친교에로 결속시키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 우리는 편견이 없이 솔직하게 서로 섬기고 또 섬김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같은 신앙과 소망을 나누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별을 가지고 나아간다. 이러한 연합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 삼위 하나님이 일체가 되신 것에 근원을 두고 있다(관련 성경절 - 롬 12:4, 5; 고전 12:12-14; 마 28:19, 20; 시 133:1; 고후 5:16, 17; 행 17:26, 27; 갈 3:27, 29; 골 3:10-15; 엡 4:14-16; 4:1-6; 요 17:20-23).
14. 침례
침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신앙을 고백하고, 죄에 대하여 죽고 새 생활을 살려는 우리의 의도를 나타내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서 인정하여, 그 분의 백성이 되고 교회의 일원이 된다.
침례는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연합, 우리 죄의 용서, 성령을 받아들임에 대한 상징이다. 이 예식은 물에 잠그는 방식으로 행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죄를 회개한 증거가 확인될 때 베풀어진다. 침례는 성경을 가르쳐서 그 가르침들을 받아들인 후에 시행된다(관련 성경절 - 롬 6:1-6; 골 2:12, 13; 행 16:30-33; 22:16; 2:38; 마 28:19, 20).
15. 성만찬
성만찬은 예수를 주와 구주로 믿는 믿음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그 분의 몸과 피의 상징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만나시고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이러한 성만찬에 참여하신다.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그 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쁨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성만찬 예식의 준비에는 자기 성찰, 회개, 고백이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정결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와 같은 겸손으로 기꺼이 서로 섬기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사랑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이 연합되도록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셨다. 성만찬 예식에는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이 참여할 수 있다(관련 성경절 - 고전 10:16, 17; 11:23-30; 마 26:17-30; 계 3:20; 요 6:48-63; 13:1-17).
16. 영적 은사와 봉사의 직무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를 통하여 당신의 교회의 모든 교인들에게 영적 은사를 주사 교인 각자가 교회와 인류의 공동 유익을 위한 사랑의 봉사 사업에 사용토록 하셨다. 이 은사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 분의 뜻대로 각 교인에게 나누어 주어졌으며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임무들을 수행하는 데 교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재능과 봉사의 직무들을 공급해 준다. 성경에 의하면, 이런 은사들에는 믿음, 병고치는 일, 예언하는 일, 복음 전도, 가르치는 일, 다스리는 일, 화목시키는 일, 동정을 베푸는 일, 백성들을 도와주고 격려하기 위한 자기 희생적 봉사와 사랑 등이 포함된다. 어떤 교인들은 봉사의 일을 위해 준비시키고, 교회를 영적으로 성숙케 하며,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지식의 일치를 가져오는 일에 특히 필요한 목회 사업과 복음 전도 사업과 사도직과 가르치는 직무를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성령의 은사를 받아 교회가 인정하는 임무에 종사하게 된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성실한 청지기로서 이러한 영적 은사들을 사용할 때 교회는 거짓 교리의 파괴적인 감화로부터 보호를 받고 하나님의 육성 하에 성장하게 되고, 믿음과 사랑 안에 굳게 서게 된다(관련 성경절 - 롬 12:4-8; 고전 12:9-11, 27, 28; 엡 4:8, 11-16; 행 6:1-7; 딤전 3:1-13; 벧전 4:10-11).
17. 예언의 선물
성령의 은사들 중에 하나는 예언하는 것이다. 이 은사는 남은 교회임을 확인하는 표징이며, 그것은 엘렌 G. 화잇의 봉사를 통해 나타났다.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의 저술들은 지속적이고도 권위있는 원천으로서 교회에 위로와 인도와 교훈과 교정을 제공한다. 또한 그의 저술들은 성경이 모든 가르침과 경험들을 시험하는 표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관련 성경절 - 욜 2:28, 29; 행 2:14-21; 히 1:1-3; 계 12:17; 19:10).
18. 하나님의 율법
하나니의 율법의 위대한 원칙들은 십계명을 통해 구체화되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예시되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뜻 그리고 인간의 행위와 관계들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의 표현이며 각 시대의 모든 인류가 지킬 의무가 있다. 이 교훈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의 기초가 되며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 표준이 된다.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것들은 죄를 지적하며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얻는 것이요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다. 이같은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계발시켜 주며 행복감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의 증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은 생애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전도를 힘있게 해준다(관련 성경절 - 출 20:1-17; 시 40:7, 8; 마 22:36-40; 신 28:1-14; 마 5:17-20; 히 8:8-10; 요 15:7-10; 엡 2:8-10; 요일 5:3; 롬 8:3, 4; 시 19:7-14).
19. 안식일
자애로우신 창조주께서는 엿새 동안의 창조 후 쉬셨으며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창조의 기념일로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율법의 넷째 계명은 이 제칠일 안식일을 쉼과 예배와 안식일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교훈과 실천에 조화되게 봉사하는 날로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즐겁게 교제하며 인간 상호간에 교제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구속의 상징이며 우리의 성화이 표징이요 우리의 충성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왕국에서 누리게 될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백성 사이에 맺은 영원한 언약에 대한 영구한 표징이다. 이 거룩한 시간을 저녁부터 저녁까지, 즉 해질 때부터 해질 때까지 즐겁게 준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행위를 경축하는 것이다(관련 성경절 - 창 2:1-3; 출 20:8-11; 눅 4:16; 사 56:5; 6; 58:13, 14; 마 12:1-12; 출 31:13-17; 겔 20:12, 20; 신 5:12-15; 히 4:1-11; 레 23:32; 막 1:32).
20. 청지기 직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간과 기회와 재능과 재산과 세상의 축복들과 그 자원들을 위탁받은 그 분의 청지기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정당하게 사용해야 할 책임을 그 분께 지고 있다. 우리는 그 분과 우리의 동료 인간들을 위하여 성실하게 봉사하며 그 분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분의 교회를 유지하며 발전시키기 위하여 십일조를 드리고 헌금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청지기 직분은 자애로운 품성을 계발하고 이기심과 탐욕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다. 청지기는 자신의 충성됨의 결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르러오는 축복들을 즐거워한다.
(관련 성경절 - 창 1:26-28; 2:15; 대상 29:14; 학 1:3-11; 말 3:8-12; 고전 9:9-14; 마 23:23; 고후 8:1-15; 롬 15:26, 27).
21. 그리스도인의 품행
우리는 하늘의 원칙들과 조화되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경건한 백성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우리 주님의 품성을 재창조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생애에 그리스도와 같은 순결과 건강과 기쁨을 낳게 될 일들에만 관계한다. 이것은 우리의 오락과 여흥이 그리스도인의 취향과 아름다움의 최고 표준에 맞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문화적인 차이점들은 인정할지라도, 우리의 의복은 단순하고 정숙하고 산뜻해야 하며, 그들의 참된 미가 외양을 꾸미는 데 있지 않고 없어지지 않을 부드럽고 유순한 정신을 가꾸는 데 있는 자들에게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육체가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그것을 현명하게 돌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적절한 운동 및 휴식과 더불어 가능한 한 건강에 가장 유익한 음식을 취해야 하며 성경에 명시된 부정한 식품들을 삼가야 한다. 주정 음료, 담배 및 마약과 마취제의 무책임한 사용은 신체에 해가 되므로, 우리는 그것들도 삼가야 한다.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육체가 우리의 건강과 기쁨과 선량함을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훈육에 부합되게 하는 일에는 무슨 일에나 참여해야 한다(관련 성경절 - 롬 12:1, 2; 요일 2:6; 엡 5:1-21; 빌 4:8; 고후 10:5; 6:14-7:1; 벧전 3:1-4; 고전 6:19, 20; 10:31; 레 11:1-47; 요삼 2).
22., 결혼과 가정
결혼 제도는 에덴에서 신성하게 제정되었으며,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사랑의 교제로 맺어지는 평생 동안의 연합임을 예수님도 확증하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혼 서약은 배우자에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서약하는 것이므로 동일한 신앙을 가진 남녀간에만 결혼이 이루어져야 한다. 상호간의 사랑과 신의와 존경과 책임은 결혼 관계의 바탕이 되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당신의 교회 사이의 사랑과 신성함과 친밀함과 영원한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혼에 관하여, 예수께서는 음행 외에 배우자와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비록 어떤 가족 관계가 이상에 못 미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배우자들은 성령의 인도와 교회의 훈육을 통하여 사랑의 연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축복하시며 가정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도와 완전한 성숙에 이르기를 바라신다. 부모는 그의 자녀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이르기를 바라신다. 부모는 그의 자녀들이 서로를 도와 완전한 성숙에 이르기를 바라신다. 부모는 그의 자녀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본과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이르기를 바라신다. 부모는 그의 자녀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본과 말로써, 그리스도는 그들로 당신의 몸인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며, 언제나 자애롭고 관심을 베푸시는 사랑의 훈육자이심을 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가족간의 유대를 향상시키는 것이 마지막 복음 기별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관련 성경절 - 창 2:18-25; 마 19:3-9; 요 2:1-11; 고후 6:14; 엡 5:21-33: 마 5:31, 32; 막 10:11, 12; 눅 16:18; 고전 7:10, 11; 출 20:12; 엡 6:1-4; 신 6:5-9; 잠 22:6; 말 4:5, 6).
23.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
하늘에는 성소, 곧 여호와께서 지으시고 사람이 짓지 아니한 참 장막이 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봉사하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단번에 드리신 당신의 속죄의 희생의 은혜가 믿는 자들에게 효력을 나타내게 하신다. 그 분은 승천하시자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시고 중보의 봉사를 시작하셨다. 그 분은 2,300주야의 예언 기간의 끝인 1844년에, 그 분의 속죄 봉사의 두 번째요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셨다. 그것은 모든 죄의 최종적 처리에 해당되는 조사 심판의 사업이며, 고대 히브리 성소가 대속죄일에 정결케 되는 의식으로 예표되었던 것이다. 이 예표로서의 의식에서는 동물의 희생 제물의 피로 말미암아 성소가 정결케 되었지만, 하늘의 것은 예수님의 피의 완전한 희생으로 정결케 된다. 조사 심판은, 죽은 자들 중에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가를 하늘의 주민들에게 계시해 준다. 그것은 또한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고 있고, 그러므로 그 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도록 승천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이 심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충성해 온 자들이 하늘 나라를 얻을 것을 선언한다. 그리스도의 이 봉사가 끝나면 재림 전에 인간을 위한 은혜의 기간도 끝난다(관련 성경절 - 히 8:1-5; 4:14-16; 9:11-28; 10:19-22; 1:3; 2:16, 17; 단 7:9-27; 8:13, 14; 9:24-27; 민 14:34; 겔 4:6; 레 16; 계 14:6, 7; 20:12; 14:12; 22:12).
24.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스도의 재림은 교회의 복스러운 소망이며, 위대한 복음의 절정이다. 구주의 오심은 실제적이며, 직접적이요, 가시적(可視的)이며, 세계적이다. 그 분이 오실 때, 죽었던 의인들은 부활하여 살아 있는 의인들과 함께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하늘로 승천할 것이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은 죽을 것이다. 세상의 현실적 상태와 함께 거의 모든 예언들의 성취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임박했음을 알려준다. 재림의 시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권면을 받고 있다(관련 성경절 - 딛 2:13; 히 9:28; 요 14:1-3; 행 1:9-11; 마 24:14; 계 1:7; 마 24:43, 44; 살전 4:13-18; 고전 15:51-54; 살후 1:7-10; 2:8; 계 14:14-20; 19:11-21; 마 24; 막 13; 눅 21; 딤후 3:1-5; 살전 5:1-6).
25. 죽음과 부활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나 유일한 불멸의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받은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그 날이 되기까지는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의식 상태가 된다. 우리의 생명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 있는 의인들은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공중으로 끌어올려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둘째 부활, 즉 불의한 자들의 부활은 1,000년 후에 있게 될 것이다(관련 성경절 - 롬 6:23; 딤전 6:15, 16; 전 9:5, 6; 시 146:3, 4; 요 11:11-14; 골 3:4; 고전 15:51-54; 살전 4:13-17; 요 5:28, 29; 계 20:1-10).
26. 천년기와 죄악의 종말
천년기는 그리스도와 그 분의 성도들이 첫째와 둘째 부활 사이에 하늘에서 1,000년 동안 통치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에 죽은 악인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지구는 완전히 황폐되어 산 거민들이 없고, 사단과 그의 사자들이 거처할 뿐이다. 그 기간의 끝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성도들과 거룩한 성과 함께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실 것이다. 그 때에 죽은 악인들이 부활하여 사단과 그의 사자들과 함께 그 성을 포위할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그들을 태우고 지구를 정결케 할 것이다. 이리하여 우주는 죄와 죄인들에게서 영원히 해방될 것이다(관련 성경절 - 계 20; 고전 6:2, 3; 렘 4:23-26; 계 21:1-5; 말 4:1; 겔 28:18, 19).
27. 새 땅
의가 거하는 새 땅에 하나님은 구속받은 자들을 위한 영원한 본향과 하나님 면전에서 영원히 살고, 기뻐하고, 배울 수 있는 완전한 환경을 마련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과 친히 함께 거하실 것이며, 고난과 죽음은 사라질 것이다. 대쟁투는 끝나고 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생물이나 무생물을 막론하고 만물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다. 아멘(관련 성경절 - 벧후 3:13; 사 35; 65:17-25; 마 5:5; 계 21:1-7; 22:1-5; 11:15).
권위있는 종교/종파 분류 기준
다음에 제시하는 도표는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 Zondervan Publishing House 출판사에서 세계 선교와 선교사들을 위한 기도 지침서로 매년 발행하는 OPERATION WORLD(1993년판)라는 책에 나타난 종교와 종파 분류 기준이다. 이 도표를 보면 정통 개신교회와 비정통 교회가 어떻게 분류되고 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본 도서에서는 200여 나라의 모든 종교 통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많은 종교와 종파가 밀집되어 있는 미국의 예(563, 564쪽)를 들어본다. 종교 분류는 어느 나라나 똑 같은 형식으로 나뉘어져 있다.
Non-religious/Other 8.7%
Jews 2.4%
Muslim 1.8%
Buddhist 0.4%
Hindu 0.2%
Baha'l 0.02%
Christian(기독교) 86.5%
Protestant(개신교) 51.3%
Church
Nat Baptist Conv USA
Evangelist Lutheran Church
Charismatic Pships
Nat Bapt Conv of Am
Church of God in Christ
Presbytarian Church(장로교회)
African Methodist Epistles
Lutheran Church Missouri Synod
Episcopal Church
American Baptist Churches
Assemblies of God
United Church of Christ
Churches of Christ(non-insti)
Christ Churches/Churches of Christ
Christian Church(Disciples)
Seventh-day Adventist(안식일교회)
American Baptist Association
Church of the Nazarene
Church of God(Cleveland)
Salvation Army
Reformed Church in American
Free Will Baptist Church
General Association of Reg Baptists
Conserv Baptist Association
Chr & Miss Alliance
Pentecost Holiness Church
Christian Brethren
All Other(1,158)
Roman Catholic(로마 가톨릭)28%
Other Catholic(기타 가톨릭)0.2%
Orthodox(정교회)3%
Foreign Marginal(기타) 4%
Mormons(몰몬교회)
Jehovah's Witnesses(여호와의 증인)
All Other(356)
위의 도표를 보면 종교는 무교(無敎), 유대교, 모슬렘교, 힌두교, 바할교, 기독교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기독교는 다시 개신교, 로마 가톨릭, 기타 가톨릭, 그리이스 정교회, 기타로 나뉘어 진다. 세계적인 종파로서 이단적인 요소가 있는 몰몬교회나 여호와의 증인은 기타에 속해 있다. 그러나 안식일교회는 개신교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책 전체를 통해서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유력한 종파로서 활동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안식일교회에 대한 세계 기독교의 견해들
안식일교회가 일반 개신교회들과 교리상에서 보여지는 차이점들이 있다. 일요일 대신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문제, 영혼 불멸대신 영혼 멸절 혹은 조건적 불멸을 믿는 것, 심판 개념, 엘렌 화잇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교리들은 성경에 기초하여 제정된 것이며, 항상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진지함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이다. 이러한 모든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개신교회들은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물론 외국의 학자들 중에는 안식일교회를 다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세계의 흐름은 안식일교회를 정통 기독교회로 보고 있다. 안식일교회를 이단적인 교회로 간주하는 것은 세계 교회의 흐름에 무지하거나 고의적으로 도외시하는 한국 기독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다.
다음의 공문서들은 최근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의 김경선 장로와 그의 아들(현수)이 안식일교회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하여 세계 여러 기독교 공기관들에게 안식일교회에 대한 견해를 묻는 서신을 보내어 받은 회신들이다.
영국 성서 공회 답변서
친애하는 김형제에게
1995. 11. 24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 관한 서신 감사합니다. 이 독특한 교회는 비록 그들의 창시자의 저서들을 존중하고는 있지만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성경을 그들의 신앙규범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의 주요 신조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마음을 같이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삼위일체의 위격에 관하여 어떤 특별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영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교인들은 그들이 식생활법(dietary arrangements) 등에 관한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거 한때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인들과 분리시켜서 그들의 조직체에 속한 사람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누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요행 그것은 영국에서는 과거지사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제시하는 몇 가지 고찰이 어떤 도움이 되셨기를 바라며 좀더 자세한 것을 아시기 원하시면 요청해 주시면 기꺼이 답해 드리겠습니다.
경구
영국 성서공회
선교 및 신학국장
목사 마틴 로빈슨 박사
빌리 그레이엄 복음 전도협회 답변서
김경선 씨
친애하는 친구에게
그레이엄 박사에게 편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를 대신해서 이 회답을 드리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진정한 기독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진정으로 인간적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떤 교회나 가르침의 제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죄의 용서와 영생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근원이신 예수께로 우리를 향하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수 없느니라”(요 14:6)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질문하는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아 들이지 않는 교리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엘른 G. 와잇은 초기 저자들과 그 운동의 지도자들 중의 하나이고,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여선지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개신교 교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지요. 월터 마틴 박사는 그의 탁월한 저서 「이단 왕국(The Kingdom of the Cults)」에서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 관하여 한 장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나의 확신으로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크리스챤 싸이언스, 유일교도, 신령파(Spiritist) 등은 성서적 해석으로 볼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으나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비단 어떤 것은 비정통적인 개념이 있으나 완전하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책은 대개의 기독교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당신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믿어지는 책자들을 보내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복을 내리시기를 빕니다.
여부비례
빌리 그리이엄 복음 전도 협회
그리스도인 인도국
웬델 R. 앤더슨 목사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답변서
김현수 씨
7월 23일자 귀한에 답하여 다음 사항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미국의 복음주의 루터교회는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DA)에 대하여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바는 없습니다. 우리 실무선의 생각으로는 그 교회는 기독교의 우리(fold) 안에 들어 있다고 봅니다. 중요하게 유의할 것은 루터교 세계 연합(Lutheran World Federation)(5,500만명의 루터교도로 구성된 전세계 122개 교단들로 구성)과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간에는 서로가 성서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에 관하여 더 자세한 것을 아시기 원하신다면 다음 주소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진 브랜드 박사
세계루터교 연합회 부총무
P.O. Box 2100
피니 150가
1211 제네바2
스위스
경구
다니엘 F. 마텐슨
국장 및 총주교 보좌 올림
세계 루터교 연합 답변서
김현수 씨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에 관한 귀한이 간단한 여름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와 있더군요.
세계 루터교 연합은 루터교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자체가 교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세계 루터교회 연합을 통하여 세계의 루터교회들이 제7일재림교회와 신학적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1994년 탐문대화가 있었고, 처음에 세 번의 연차대화가 그 해 여름 토론토 지역에서 열렸습니다. 동봉하는 이들 두 모임에 관한 공보 기사를 보시면 우리가 무엇을 시도하려고 했었는지를 귀하는 아시게 되실 것입니다.
만약 세계 루터교 연합이 재림교도들이 참으로 전세계적인 기독교 교회들 공동체 일원이라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런 대화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참으로 우리의 첫 대화는 우리들이 복음 증거에 관하여 공통으로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연속적인 대화를 마치기 전까지는 귀하의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할 수 없군요. 그 시점에 가면 확실히 어떤 종류의 책자가 나올 것이요, 그 책자에는 공동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발견할 것이며, 그 때까지 합의 못한 것들은 어떤 것들이라는 것이 명시될 것입니다.
이 답변이 귀하의 목적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편지 답장에 포함된 자료는 나의 최상의 지식으로 말씀드린 것으로 완전하오나 본 서신은 세계 루터교 연합의 공식 문서는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캘리포니아에서와 한국에서의 귀하의 하시는 일에 행운이 깃드시기를 빕니다.
유진 L. 브랜드
교회일치 사업
부총무
세계 교회 협의회(W.C.C) 회신
김경선 장로 귀하
1996. 9. 27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SDA)에 관하여 문의한 편지를 캘리포니아 라 카나다 김현수 씨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답장을 귀하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다음 사항을 귀하에게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1. WCC는 SDA를 비기독교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WCC는 그의 전세계적 대표기구인 대 총회와 우호적이고 형제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WCC의 신앙과 질서 위원회 사역에 참여하고 있고 총회와 중앙 상임위원회와 같은 WCC주요회의에 정규적으로 오브저버를 보내고 있습니다.
2. 우리는 과거에 SDA를 결코 이단이라고 특징지은 적이 없습니다.
3. SDA와 일반 개신교 교리간의 주요 차이점들이란 종말론 분야와 물론 안식일 해석입니다.
만약 김현수 씨가 말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 SDA를 비기독교 이단이나 분파로 여긴다면 한국교회들과 SDA는 서로가 더 잘 알기 위한 목적으로 상호 대화를 통한 그들의 차이점 해결을 모색해야 하리라고 우리는 제안하고 싶습니다.
경구
허버트 반 빅
교회와 에큐메니칼 관계국
실행 총무
사본 김현수씨
4837 Hill St., La Canada, Ca91011
김동완 목사
한국 NCC 총무
또한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옥스포드 기독교 사전(1974년판, 1266쪽)에서는 안식일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성서는 신앙과 행위의 무오의 법칙을 제시하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 예정일을 정하지는 않지만 그 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믿고 있는 충실한 개신교 조직체이다. 인간의 육신은 성령의 전임을 강조하며(고전 6:19), 그 교인들에게 금주와 금연은 필수사항이고, 차와 커피와 육류까지도 가급적 삼가는 엄격한 절제 생활을 요구하고 있다. 교인들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의 안식일을 준수하며, 일반적인 헌금 외에도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삼위일체 교리와 함께 오직 믿음을 통한 은혜로만 구원받는 교리를 고수하고 있다. 그들은 몸을 완전히 물에 잠그는 침례의식을 행한다.”
10회의 글을 맺으면서
한 달 주기가 몹시도 빨리 빨리 돌아왔다. 글을 쓴다는 것, 특히 논쟁하는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작업인가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글을 쓰는 동안 마음 한 쪽에서는 괴로움의 고동 소리가 있었다. 논쟁을 하는 어느 한 쪽도 고의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거나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미혹하는 사람들은 아닐텐데, 서로를 비방하고 틀렸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글을 쓰면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속절없는 죄인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글을 쓰는 동안 서로간에 마음이 상한 일들이 있었다면, 속히 잊혀지기를 기대한다. 마지막 10회분 원고지 200매가 실리는 5월호 <교회와신앙>이 나오면 최삼경 목사와 진용식 목사와 만나 식사라도 함께 나누면서 한 번 웃어보고 싶은 것이 지금의 솔직한 심정이다. <교회와신앙>측이 요구했던 아홉권으로 된 영문 교회증언은 미국에 주문을 해 놓았다. 도착하는 대로, 그 동안 열린 마음으로 안식일교회의 글을 실어준 <교회와신앙> 측에 선물로 전달하겠다. 양쪽 교회 교인들이 모두 진실하게 살다가 하늘에서 함께 만나기를 기원하면서 10개월에 걸친 지상 논쟁의 펜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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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제칠일 안식일교회가 우리나라에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외국에서는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결론이데.. 그러면 제칠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이단이아니라는 결론이네요...맞죠?? 그럼 이제부터라도 안식일교회 이단이라고 판단하고 비판하지 맙시다..부끄럽습니다.
왜 안식일 교회가 이단이 아니예요 제 칠을 안식교가 얼마나 잘못됬는데요
그럼 우리는 삼단인가요??아니면..일단...??말씀해보세요.. 외국어디나라에도 제칠일 안식교회가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데 왜 우리나라는 그렇게 비판을 하는지... 참 부끄럽습니다. 외국유명한 학자들도 정통교회라고 인정하는데 왜 우리나라만 비판을 하는지..이해못하겠삼... 당췌 이해못해..
사랑으로 하든 싸움으로하든 전파되는것은 예수님의 구원이니 우리 모두 천국갑시다. 거기가서는 싸으라해도 챙피해서 못싸울텐데
안식일교회가 이단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직접 교회에 찾아가 보시면 이단이아니라는 걸 알수 있을 겁니다 이단이라고 잘알지도 못하는 말씀 하시지말고 우선 교회에 가보세요 그순간 당신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재림교인이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