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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를 작곡했던 안익태는 순흥안씨(2파) / 안원군파이다.
안문개(安文凱,1273~1338) - 안천서(安千瑞) - 안원기(安原起) - 안처(安處)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순흥안씨(2파) 8세 안원군(安原君) 안처(安處)를 중시조로 하는 순흥안씨(2파)의 지파가 ‘안원군파(安原君派)’이다.
출처 : 시사IN Live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575&dable=30.1.3
안익태의 일제시기 행적 밝혀지다
일제 때 안익태의 행적을 알 수 있는 1950년대 글이 발굴되었다.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엘리트 에하라 고이치가 쓴 글이다. 에키타이 안(Ekitai Ahn=あん えきた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安益泰; 1905~1962)의 또 다른 얼굴을 볼 수 있다.
[423호] 승인 2015.10.28 03:07:50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 webmaster@sisain.co.kr
일본의 음악잡지 <음악지우(音樂之友)>는 1942년 10월호에서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경축행사가 1942년 9월15일의 경축식전을 중심으로 최고조에 달했다고 전하고 있다. 만주국의 신국가 제정을 비롯해 일본에서 건너온 음악사절 등이 참여한 수많은 연주회가 줄을 이었다. ‘대동아 음악 건설’의 기치를 내건 이 경축행사에는 9월21~23일 신경(현 창춘), 하얼빈, 봉천(현 선양) 등지에서 개최된 만주국의 ‘맹방’ 독일,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의 경축곡 연주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베를린에서도 만주국 건국 10주년 행사는 열렸다. 1942년 9월18일 오후 8시, 곡은 <만주국>, 지휘는 ‘일본 지휘자’ 에키타이 안(안익태)이었다. 마지막 4악장에 합창이 포함된 이 대편성 축전곡의 합창 대본을 작성한 이가 바로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다. 안익태보다 열 살 정도 위였던 그는 하얼빈시 부시장을 거쳐 주독 만주국 공사관의 참사관을 지냈다. 당시 공사는 여의문(呂宜文)이었다. 여의문은 일본 메이지 대학 출신으로 만주국 국무총리의 비서관과 통화성장을 지낸 뒤 만주국 공사로 임명된 사람이다. 당시 만주국의 정부조직 체계가 그러하듯, 에하라가 여의문 공사의 아래인 참사관이었지만 사실상 실세였다고 보면 되겠다. 에하라는 패전 후 소련군의 보호하에 모스크바를 거쳐 일본으로 귀국한 뒤, 도쿄에서 변호사로 활동한다. 반면 만주국 공사 여의문은 귀국 후 친일파, 곧 한간(漢奸)으로 재판에 회부돼 총살되었다.
1942년 9월18일 베를린 <만주국> 공연장의 에하라 고이치.
아래 사진 속 인물이 1942년 9월18일 베를린 <만주국> 공연 현장의 에하라다. 당시 이 공연은 기록영상으로 제작되어 추축국을 중심으로 배포되었는데, 이 사진은 그 한 장면을 갈무리한 것이다. 프랑스 국립시청각연구원이 소장한 당시 파리의 전쟁뉴스 영상 일부를 편집한 에키타이 안의 영상자료는 유튜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에하라는 1950년대 초 일본 음악잡지에 기고문을 세 편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안익태군의 편모>이고, 다른 하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추억>이다. 세 번째는 모차르트에 관한 거라 안익태와는 직접 연관이 없다. 세 편 모두 이번에 처음 발굴된 것이다. 그래서 앞의 두 글을 통해 지금까지 안익태 연구에서 투명하지 않았던 부분을 좀 더 뚜렷하게 조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대개의 회고록이 그렇듯이 에하라의 후일담 역시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사사화(私事化)하면서 제국주의 엘리트로서 그의 역할이 생략되어 있음은 주지할 만하다. 또 당시 시점에서 10년도 더 된 과거를 회고하는지라 부분 부분 오류도 섞여 있다.
이번에 발굴된 <안익태군의 편모> 원고.
에하라의 기억에 따르면, 1941년 일본 4대 명절 중 하나인 명치절 11월3일 아침 루마니아 일본 공사관에서 식순에 따라 기미가요를 제창할 때 피아노 반주를 하던 안익태, 아니 에키타이 안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안익태의 베를린 시절 집주소는 에하라의 사저였다. 그런데 지금껏 어떻게 해서 안익태가 에하라의 집에 기거하게 된 건지는 의문이었다. 한데 이 회고록에 “에키타이가 나(에하라)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해, 그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를 내 집에 살게 해주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더군다나 에하라의 동생도 도쿄 음악학교를 비슷한 시기에 다녀 에키타이를 동생처럼 여겼다고 한다. 아직까지 에키타이 쪽의 진술은 없다. 나치가 망할 때까지도 에키타이의 집 주소는 에하라의 집이었다. 구스타프 프라이탁 가 15번지, 베를린 반(Wann) 호숫가에 있는, 지금도 쾌적한 고급 주택가다.
1941년 11월3일 저녁 부카레스트, 자신의 음악회에 에하라를 초대한 에키타이는 <조선(코리아) 환상곡>의 ‘자기 표절’이라 할 <교쿠토(극동)>와 일본 궁중아악을 변주한 <에텐라쿠>를 연주해 호평을 받았다. 이 연주회가 성공적이었음을 당시 루마니아 공사는 본국 외무성과 아울러 조선총독부에도 보고했다. 대략 1941년 말~1942년 초 무렵부터 에하라의 집에 기식한 것으로 보이는 에키타이는 이 집에서 <만주국>을 만들어 1942년 9월 무대에 올렸다. 에하라는 이 곡의 마지막 4악장 가사를 자신이 썼다고 확인해주고 있다. 오족협화(일본이 만주국을 건국할 때의 이념으로, 5족은 일본인·한족·조선인·만주족·몽고인을 가리킨다)를 칭송하는 가사 내용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리고 <만주국>이 중국의 멜로디를 따왔다고 말하는데, 이는 만주국 국가에도 사용된 ‘소무목양(蘇武牧羊)’의 멜로디로 보인다.
일반적 추측과 달리 에하라는 오히려 안익태가 슈트라우스와 자신의 만남을 주선한 것처럼 말한다. 에키타이가 일본 황기 2600년을 경축하는 슈트라우스의 작품 <일본축전곡>을 지휘한 직후인 1942년 3월14일, 지금도 영업 중인 빈의 유명한 레스토랑 ‘드라이 후사렌’ 별실에서 슈트라우스 부부, 에하라 그리고 에키타이가 저녁을 같이했다. 이 자리에서 에하라는 슈트라우스가 그의 첫 오페라 <군트람> 재공연을 위해 그해 6월 베를린에 방문할 때 자신의 집에 유숙할 것을 제안했고 슈트라우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열흘 가까이 에하라의 집에 머무는 동안 슈트라우스는 생일을 맞았다. 극소수가 에하라의 집 생일파티에 초대되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나치 선전성 음악국장 하인츠 드레베스였다. 괴벨스의 신임을 받던 그는 사실상 나치 독일의 음악정책을 총괄하는 실세였다.
안익태의 베를린 시절 거처는 에하라의 사저로 돼 있다.
위는 그 위치를 구글 어스로 갈무리한 것. ⓒ구글어스 갈무리
임정이 ‘혈전’ 결의할 때 안익태는 어디 있었나
에하라-안익태 커넥션은 그 자체로 하나의 블랙박스 같은 것이었다. 당시 드문드문 국내에 들려오는 그의 소식은 대개 과장되어 있었다. 그 시절 안익태의 유럽 활동 현장에 조선인이 접근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 조건에서 안익태는 ‘스폰서’ 에하라를 통해 일신상의 편익뿐 아니라 신분상의 안정, 음악적 커리어 구축 등에 상당한 이익을 취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에하라 참사관 또한 만주국의 국책사업이었던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사업에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주국>은 그 결과물이라 하겠다.
1940년 12월20일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이승만이 장악한 대한인국민회가 요구한 안익태 작곡 애국가의 신곡보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했다. 그 1년 뒤인 1941년 12월10일 임시정부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한다. 임정은 이를 통해 “왜구(倭寇)의 완전구축”을 위해 “혈전”을 결의했다. 바로 그 시점 안익태는 에하라의 베를린 사저, 스스로 일컫기를 ‘편안하고 안락한’ 그 호숫가 빌라로 가고 있었다.
국내 친일파의 경우, 당시에나 해방 이후에나 법적 청산은 아니지만 도덕적 비난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이에 비해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에키타이 안으로 살아간 안익태의 파열된 정체성은 철저히 은폐된 채 반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일부 알려지게 된다. 사적인 정체성 장애는 그렇다 치더라도, 애국가가 담긴 <코리아 환상곡>과 <만주 환상곡>의 정체성 문제는 이어져 지금도 만주가 한국인지, 한국이 만주인지 집단적 정체성 장애를 앓고 있다. 그것이 2015년을 살고 있는 바로 우리의 얘기이고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안익태(安益泰, 스페인 이름: Eak-tai Ahn, 1906년 12월 5일 ~ 1965년 9월 16일)는 스페인 시민권자 신분이었던 한국의 작곡가,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로,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현재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안익태는 190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평양종로보통학교와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 1921년에 일본으로 유학,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다. 1926년에는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했고, 1930년 졸업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했다. 신시내티 음악학교과 커티스 음악학교, 펜실베이니아 주립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 등을 배웠고 한인 교회 등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1936년에 처음 유럽을 방문했고, 이때 파울 힌데미트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만나 음악 활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때부터 친일 행적을 시작했다고도 알려지고 있다. 1937년에 펜실베이니아 주립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뒤 1938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지휘했다. 이후 헝가리에 머물면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졸탄 코다이와 에르뇌 도흐나니 등에게 작곡을 배웠고, 종전 직전까지 독일과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지휘 활동을 했다. 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 4월에 파리에서 베토벤 축제 연주회를 마친 직후 중립국인 스페인으로 피난했으며, 그 해 12월에는 그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필 악보를 완성했다. 1946년에는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했고,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에서 지휘했고, 1955년 3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1962~1964년까지 3년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했고, 런던 교향악단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도쿄 교향악단 등을 객원지휘했다. 1965년 7월 4일에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직후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고, 9월 16일에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타계했다.
안익태의 1940년대 유럽 활동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김경래와 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기록된 자료로 전해져 왔으나, 최근에 진행된 연구들에서 이들 자료의 잘못된 정보와 왜곡 사례를 지적하고 있어 상당한 파문이 예상되고 있다. 유럽 체류 시절 안익태가 관변 단체였던 '일본-독일 협회' 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일본의 가가쿠를 주제로 한 '에텐라쿠' 와 일본제국에 의해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세워진 일을 기념한 '만주국 축전곡' 등을 작곡했다는 기록도 발표되었다. 2000년에는 음악연속간행물 '객석'의 베를린 통신원이었던 진화영이 안익태의 베를린 필 지휘에 대한 기록이 종전의 1940년이 아닌 1943년이며, 단 한 차례 뿐이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같은 해 발굴되었다는 안익태의 지휘 모습이 담긴 기록 영화가 2006년에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송병욱에 의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 녹화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내 음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06년 11월 19일에 송병욱의 강연회를 통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기록 영화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 상영되었으며, 2007년에는 음악학자 이경분이 독일과 스위스 등지의 문서 보관소 등에서 찾아낸 자료들로 안익태의 1938-44년 활동상을 정리한 책이 출간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 안익태의 명단 포함에 대해 안익태기념재단 측은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안 선생은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이 명단의 군 부문에는 형인 안익조도 포함되어 있다. (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