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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
염 상 섭
1
한나절은 인적이 끊일 만큼 조용한 동리의 뒷길이었다. 국민학교 일 학년의 입학 번호를 검정 양복의 가슴팍에 붙이고 앞서 가는 막내를 따라가던 숙영 이는 무심코 지나치려던 옆 골목에서 자취도 없이 살그머니 나서는 여승을 보고 발을 주춤하였다.
이즈막에는 서울 거리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여승이기도 하지마는, 힐끗 눈앞을 스쳐간 그 모습에 순영이는 놀란 것이었다.
"……응? 정임이 아닌가?"
순영이는 기연가 미연가하면서도 찬찬히 앞을 서 가는 여승의 뒷모양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염색을 했을까말까한 몇 물이나 빨아 다린 무명 홑두루마기에 빡빡 깎은 파란 머리에는 아무것도 안 쓰고 목을 바지 위로 올려 신은 버선과 고무신도 깨끗하였다.
"어머니, 여자두 중 있어?"
인호가 어머니를 치어다보며 소곤거렸다. 인제야 국민학교에를 들어가는 인호는 입때껏 여승이라는 것을 못 보았던 것이다. 순영이는 입을 닥치라고 막내의 어깨를 꾹꾹 지르며, 앞에 선 이 여승에게 알은 체를 할까 말까 잠깐 궁리를 하는 것이었다.
잠깐 눈에 스친 예쁘장한 얼굴이라든지 자그마한 키에 날씬한 어깨집이 아무래도 정임이가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순영이는 이십 년 가까이 되는 ― 그때 일이 어렴풋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그때 언니에게 들은 이야기대로 여승이 된 정임이를, 우연히도 앞에 세우고 걷는 것이 퍽 신기하고 반가운 생각이 드는 한편, 가엾고 쓸쓸히도 보였다.
언니 동무인 정임이가 시집을 가서 남편의 소원대로 옥동자를 났다하더니, 어린애의 돌도 못 되어서 갈라섰느니, 절로 들어가서 중이 되었느니 하는 소문에, 시집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 하고 처녀적 순영이를 겁을 집어먹게 하던 정임이었었다. 그러나 이렇게 불의에 길가에서 딱 마주쳐 여승의 차림을 한 것을 눈앞에 보니, 자기와 어울려 놀던 동무는 아니지마는 모른 체하고 지나치기가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어제같이 앞으로 다가오며, 머리를 층충 땋고 다니던 그때 시절의 정임이가 눈앞에 나서는 것이었다.
"나 좀 보세요, 스님 !"
순영이는 한 걸음 다가서며 말을 걸고야 말았다.
"네?"
저편에서도 뒤에 오는 이 일행에 마음이 쓰였던지 홱 돌아서며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 알아보시겠어요? 순영이에요."
순영이는 얼굴은 낡고 찌들었지마는, 예전에 정임이가 언니를 찾아다니던 그때처럼 처녀의 마음으로 생긋 웃어 보였다.
"누구시던가?……"
승은 순영이를 말끔히 치어다보며 경계하는 태세를 취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못 알아볼지? 좀 딴전을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난영이 형님 아시겠죠? 동생예요."
하고 순영이는 좀 머쓱하여졌다.
"아, 누구시라구! 몰라뵙겠구먼. 그래 형님은 안녕하슈?"
분명히 반가운 기색이면서도 그 기색을 감추려는지? 시기지 않게 알은 체를 해준 것이 귀치않다는 눈치인지 알 수 없었다.
"형님, 조 아래서 사시는데 좀 안 가 보시겠어요?"
순영이는 예전에 자기 집에 놀러다니던 정임이나 다름없는 반가운 생각으로 흉허물없이 꺼내는 말이었다.
"요담 가죠. 오랜만에 이 꼴을 보여서 놀래러 갈 거야 뭐 있겠어요. 이렇게 만나니 반갑군요."
속으로는 반가운지 몰라토 건성 나오는 인사이었다.
두 여자는 걷기 시작하면서,
"앤 몇째요? 입학하였구나!"
하고 스님은 인호에게 알은 체하여 주었다.
"막내랍니다."
"무얼 벌써? 맏아이는 올에 몇이게?"
이 말을 물을 제 이 여승의 낯빛은 좀 달라지는 것같이 보였으나 순영이는 무심히,
"열여덟이죠. 이번에 고둥학교 이학년이 된답니다. "
하고 자랑삼아 대꾸를 하다가 선뜻 마음에 걸리는 생각이 들어서 멍멍히 저편의 눈치만 쳐다보았다. 이 스님의 옥동자가 생각난 것이다. 그러나 차마,
"그애 잘 자라요?"
하고 물어 볼 수는 없었다. 아마 집의 맏놈보다는 한 살 위거니 싶었다. 그렇게 된 뒤에는 그때 소식은 들어 본 일도 없고, 언니한테 물어 본 일도 없지마는, 정임이가 옥동자를 낳았다던 이듬해에 순영이는 시집을 갔던 것이요, 스물넷이나 되어서 시집을 간 정임이보다 순영이는 네 살인가 다섯 살 아래이었었다.
이 스님도 일생에 연이 끊긴, 보지 못하는 자식의 헛그림자를 눈으로 쫓는지, 다시는 대꾸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다. 얼굴이 감중히 걸으니만큼 빡빡 깎은 머릿속이 유난히 새파랗게 햇볕에 번쩍였다.
순영이는 그때 사정을 어젯일같이 빤히 알고 있느니만큼 여승이 된 모양을 보고 무어라고 위로할 말도 나오지 않아서,
"그래 지금 어디 계세요?"
하고 돌렸다.
"조기 저 산 너먼데……."
정임이의 얼굴에는 울분을 참는 뒤틀린 검은 빛이 살짝 떠오르다가 꺼졌다. 수도(修道)하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울분과 원망을 참아야 하겠다는 자제(自制) 의 단순한 반성으로이었다.
"우리 집이 여긴데 좀 들어가서 쉬었다 가세요."
순영이는 큰길로 빠지는 길모퉁이에서 발을 멈추며 또 한번 정임이를 끌어 보았다.
"어서 들어가슈. 내 또 오죠."
정임이는 합장을 하려다 말았다.
순영이는 아들을 입학시켰다는 기쁨보다도 옛날의 언니 동무 정임이를 만났다는 흥분과 정임이에 대한 동정으로 자기 집을 지나쳐 차츰차츰 정임이를 따라 전찻길까지 배웅을 나갔다가 그 길로 바로 언니의 집에를 갔다.
"언니, 정임이를 만났어. 바루 저기서 헤졌는데 데리구 오려두 안 오는구면."
"응? 승이 됐는데 어떤 꼴이던가?"
난영이는 마루끝에 나와 앉으며, 인호의 입학 치하를 할 새도 없이 눈이 커다래졌다.
"인제는 바스러져 늙어 가는 승이더군요. 저 너머 탑골 승방에 있는 모양이에요."
"응…… 서울로 와 있구면."
순영이는 한층 걸러 언니 동무건마늠 반갑고 언찌않고 한데, 언니야 감개무량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였다.
"호 ―그때는 뚝 떨어져 경상도로 내려갔다는 말만 들었는데, 늙어가니까 역시 제 고장이 그리워서 다시 찾아 들었구면!"
난영이 역시 그때 시절이 그립고 회상이 되어서 한탄하듯 이런 소리를 하며 맥을 놓고 앉았다.
"그래, 그애 누구래든가? 어떻게 됐어요?"
정임이의 아들 말이다. 이십 년 가까이 까맣게 잊은 듯이 입초에도 오르지 않던 형철이의 생각이 새삼스레 나서 묻는 것이다.
"잘 자라지. 의외루 제 고모가 부자요, 또 당자가 학교에서두 재주꾼이어서 그 집에˙가서 붙여서 지금 고둥학교 삼학년이나 됐는지?"
이러한 대꾸를 하는 순영이 형은 자기 팔자의 기박한 것을 속으로 한탄하는 것이었다.
오십이 가까운 이 나이가 지금 세상에서는 아직 젊다면 젊겠지만, 환도 후에 남편을 여의고 쓸쓸한 집속에서 손주새끼를 둘이나 데리고 시달리다가, 며느리가 저녁 때 들어와서 툴툴거리며 해주는 밥이나 얻어먹고 앉았는 자기의 신세를 생각하면 승이 된 정임이가 부럽기도 하였다.
『자식야 그립겠지. 허지만 이십 년 가깝게 지낸 지금야!』
난영이는 무심히 이런 생각도 하였다. 딸 하나는 시집을 보냈으니 더 바랄 것도 없고, 그 다음의 아들놈은 일선에 나가서 통신대로 몇 해 구는 동안에 휴전이 되었어도 입때껏 아니 돌려보내고 있다.
"그래두 오래간만에 만나니 반갑더군요. 어디 있는 데를 알았으니 한번 찾아가 봐 주세요."
동생의 말에 난영이는 잠자코 앉았다. 난영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만큼 늙어가는 얼굴이기도 하였다.
2
난영이는 찾아가 보아 주라는 동생의 말에 금시로 마음이 적이 움직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애는 어찌됐수? "
정임이의 아들애가 그저 학교에를 잘 다니는지? 숨어서라도 모자가 만나 보는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팔려 갔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친정집들이 예전대로 한 동리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끔 소식을 들을 수 있었지마는, 난영이 오라버니가 이사를 한 뒤로는 정임이의 친정과도 멀어졌고, 더구나 사변 후에는 어떻게들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오죽했어야 자식을 버리구 절루 들어갔으련마는 그애가 지금 자라서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할꾸?"
순영이도 무럭무럭 커 가는 맏아들을 생각하며 그애에게 저절로 동정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팔잔 걸 어떡하나! 젖두 안 떨어져서 헤진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구 말구가 있겠기에!"
"하지만 얼굴은 몰라두, 기른 정은 없어두 『어머니』란 것은 평생을 두구 그리워할 게 아닌가."
난영이는 거기에는 더 대꾸를 하지 않았지마는 동생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모자들이 입때껏 대면을 못하고 지낸다면 이번 기회에 어떻게 만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토 와락 드는 것이었다.
"아무튼 첩으로 들여보내기가 잘못이지. 다 찌부러져 가는 판에 무슨 덕을 보겠다구……."
순영이는 코웃음을 쳤다.
"그때 시절만 해두 보통학교쯤이나 다닌, 들어앉은 처녀가 스물넷이라면 시집을 보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데, 이편은 지체 없구 구차한데 저편은 부자요 양반이라니 솔깃이 끌리기가 예사지. 지금은 그렇지 않기에! 손 노는 집에서 아들 낳겠다구 첩 얻기가 일쑤지."
"그러기루 사내란 모두 도둑놈이지. 자식 나 주니까 들것질을 해서 내쫓다니 옛 이야기 같지. 그런 인심이 어디 있수."
"그리게, 오죽 분해야 중이 됐을까!"
순영이 형제는 그때도 온 집안이 두고두고 뇌까렸을 이런 이야기를 이십 년 가까이 지낸 오늘에 새삼스러이 또 주거니받거니 하는 것의었다.
정임이는 운명할 때까지 딸의 시집보낼 걱정을 하던 모친을 여읜 뒤로 늙은 아버지의 조선옷 뒤를 거두어야 하고 인쇄소에 나가는 오라비와 학교에 가는 두 동생을 맡아서 살림꾼이 되고 말았었다.
종로(鍾路) 지물전(紙物廛)에 나가는 부친은 아이들보다 일찍이 일어나서 국이면 국, 김치면 김치 하나로 학교 가는 아이들과 함께 자시고 나가니 별 시중이 없지마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꼭 조선버선을 신다가 인제는 하는 수 없이 혼자 고생하는 딸이 가엾어서 양말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이 노인의 조선옷 뒤를 거두기가 제일 뼛골이 빠졌었다. 상점에 나가는 부친과 공장에 가는 오라비, 그리고 동생 남매를 차례차례 내보내고 집을 치우고 나면 제 치장을 할 새도 없이 빨래에 얽매였고, 아랫방 마님과 동무 삼아서 다듬이질 바느질에 얽매였던 정임이었다. 보통학교적 동무들이라야 다 떨어져 가고 한 동리에 사는 난영이가 누구보다도 그 사정을 알고 가엾다고 자주 찾아다니곤 하였었다. 난영이는 그때 벌써 시집을 가서 제법 어른티가 박여 갔었다.
그러기를 사 년이나 지나서 혼처라고 나선 것이 박대신이 조카라는 팔난봉꾼이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정임 자신은 무언지 어리둥절하였다.
이야기의 시초는 아랫방 아주머니이었었다.
아랫방 아주머니란 오십이나 된 안존한 마나님으로서 바느질 품팔이를 하여 가며 영감과 두 식구가 살아가고 있는데, 그 바느질 품팔이로 드나들던 박대신 집에서 들은 말로 연줄이 닿은 것이었다. 대신이라야 옛날 이야기요, 박대신이라야 벌써 이 세상 사람은 아니나 그 떠서리가 박대신 이름을 언제나 파는 것이었다.
"간단한 예식이라두 하구 싶지마는 떠벌인댔자 별수 있느냐구, 한 이천 원 보내 드릴 거니 대강 차려서 보내시라는 구먼요."
이야기가 웬만큼 익어가니까 아랫방 아주머니는 이런 전갈을 부친에게 와서 하였던 것이다. 그때 돈에 이천 원이라면 눈이 번쩍 띄는 액수였다. 영감은 지전에 소일삼아 나가는 거나 다름없으니 몇 푼 나오는 것이 없고, 오라비가 벌어 오는 것으로 살림을 하느니나 다름없으니 목은 돈이라곤 단 백 원도 여축이 없는 살림에, 이천 원이라면 부자가 버는 것의 넉 달치나 되는 것이었다.
첫째 며느리를 보아야 딸을 내놓겠으나, 단돈 천 원이라도 목은 돈을 잡아야 엄두를 낼 텐데 그 구처가 막연해서 애를 쓰는 판에 눈이 번해졌다. 단 일곱 간 집이나마 마누라의 병구완과 초상에 지우고 간 빚 무리 구럭에 일번 저당을 하였으니, 며느리 보자고 그나마 팔고 셋방살이로 나가는 수가 없으니 입때껏 머무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천 원이면 딸 치행해 보내고 아무렇게라도 며느리를 뭉뚱그려 오게 될 것이다. 정임이의 부친은 의논할 데도 없었지마는 더 버틸 힘도 없었고, 정임이 역시 그 치다꺼리에 뼛골이 빠지고 찜증이 난 끝이라, 그렇지 않기로 부친 앞에서 싫다 좋다가 없을 것이라지마는, 첩이고 뭐고 가릴 나위 없이 잘살고 양반이라니 부엌데기를 면하고 올라 앉아 살게 되겠거니 하여 좋기도 하였던 것이다.
"딸 팔아 며느리 사들였구면!"
지금은 기억에 어렴풋한 그때 일을 옛이야기삼아 듣고 있던 순영이가 비웃듯이 한 마디 하니까,
"그럼 어쩌나, 아들 아이가 확실해서 살림이 훨씬 늘었지. 그 영감은 해방 후까지두 정정하더니 지금은 어찌됐었는지, 아마 돌아갔을 거야."
하며 난영이는 늙어가는 사람의 추억의 흥으로 말을 끊으려 않는다.
"그래두 첫서슬에는 의가 좋았다누. 애초에는 첩이란 말은 입밖에도 안 내고 예식은 떠벌리지 않아도 집안 잔치나 하고 유처취처로 대접은 하마던 것이, 웬걸 들어가 보니 시아버지는 없어도 홀시어머니 시하에, 본댁이 첫날부터 눈을 곤두세우고 쳐다보고, 집은 본집이지만 한집 속에 그렇게 살 줄은 몰랐던 거지. 어쨌든 의가 좋은 눈치니 볶이긴 더 볶였을밖에……."
"그야말로 이천 원에 팔려 간 여종이었군요. 지금 세상에두 해방 후에두 그 지경을 당하구 살 여자가 있을라구?"
순영이는 처첩이 한집에 살았다는 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없어. 우리가 몰라 그렇지. 하지만 그래서 정임이가 중이 된 것은 아닌가 봐. 원체 음식 솜씨가 있구 침공이 얌전하다니까 거기에 홀깍해서 부려먹자고 데려간 것이겠지마는, 정임이는 그래두 어린 마음에 첫정이라, 큰댁의 구박이나 일이 고된 것도 이겨내 가며 바둥바둥 살려고 애를 썼던 게지. 무엇보다도 시어머니가 옷솜씨가 있다고 은근히 등을 두드리는 소리를 하는 것이 좋았을 거야. 게다가 남편이 귀애해서 여전에는 산정사랑(山亭含廊)이었던 모양인지 뒤채에 늙은 식모와 거처하게 하니 밥이면 좀 쓸쓸할 때도 있었지만, 기죽을 펼 수가 있었고 난생 처음으로 그러한 데 거처해 보는 것도 좋았다는 거야."
"그만하면 호강했군요. "
하고 동생은 또 코웃음을 쳤다.
"호강은 무슨 놈의 호강! 정작 아이를 낳아 놓으니까 집안 눈치가 싹 달라지더라는구먼. 큰댁야 물론 좋은 낯일리 없겠지마는 하속배들까지도 피하는 눈치인 데는 새삼스럽게 깜짝 놀랐다는 거다. 큰댁한테 따라야 할지, 이 집의 손을 이어 놓은 작은댁에게 긴하게 보여야 할지 망설여서 그랬겠지……. "
"세상 인심이란 그런 거죠."
"헌데, 시어머니마저 차차 내색 이 달라 가더라니·딱한 일이지……."
"그건 또 왜?"
"그리게 말이지……. "
"응, 손주새끼를 얻었으니 인제는 그만이라구 내미는 거겠죠?"
순영이는 혀를 찼다.
"그두 그렇지만, 큰메누리, 말하자면 원메누리의 기색두 살펴야 하겠으니까 그랬던 게지."
"그렇기루 박차구 나올 거야 뭐 있어요. 눈치 밥도 지긋 지긋했겠지만……."
"하지만 그것두 문제가 아냐……."
난영이는 밖에서 들어와서 찡얼대는 손주새끼를 달래 가며 부엌에 들어가 점심상을 차리며 이야기는 여전히 이어나갔다.
"하루는 밤중에 술이 거나하게 취해 가지구 들어와서 다짜고짜 건넌방에서 자는 식모 노파의 방으르 건너가라던가?……."
"아이를 난 뒤에요?"
"그럼. 어쩐 영문인지도 모르구 삼칠일이 겨우 지난 어린것을 싸 안고 나서면서 아마 손님을 끌구 왔나? 하였더라는 거야!"
"그래 그게 누구더란 말예요?"
하고 순영이는 부엌문께로 뛰어왔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컴컴한 속에서 환히 불빛이 비쳐 나오는 안방으로 소리없이 살짝 스며들어가는 감장 치맛자락이 펄럭할 때 가슴이 선뜻하더라는구먼! 호호호."
"어머나!"
"미친놈이지. 말할 거 뭐 있나:"
형은 밥상을 차려 가지고 마루로 나왔다.
"그래 어떻게 됐어요?"
정임이의 일에 이것만은 금시초문인 순영은 슬며시 새로운 흥미를 느끼며 뒷말을 재촉하였다.
"눈이 뒤집히는 것 같고 창피스러운 생각을 하면 무르팍에 안긴 아이를 내던지고 뛰어나오고 싶은 것을 그래도 얌전하고 차근한 아이라 꽁꽁 앓으며 하룻밤을 꼬박이 밝혔으나, 이때 놀라고 정이 떨어진 것이 마음을 홱 뒤집어 놓아서 그렇게 되고 만 것이지."
"허!"
하고 순영이는 여자의 운명을 탄식하는 듯이 목에 걸린 소리만 지며 밥상으로 다가앉았으나 밥맛도 모르고 딴생각에 팔렸었다.
"안채는 멀고 누구 하나 타하고 나서서 말리는 사람이 있을까, 밤이면 뒷문으로 넌짓넌지시 끌고 들어오는 것이 예증이 되어 버렸더란 말이지……. "
난영이는 밥이 당기지 않는다고 담배를 피워 물며 또 옛이야기를 잇는 것이다.
"비위두 좋지! 그래, 그 꼴을 보고 있더란 말예요!"
순영이는 쏘는 소리를 하였다.
"그럼 별수 있나! 친정이라야 다시 들어가서 몸 붙일 데가 없구, 당장 어린것에 정이 끌리니 날 죽여잡수, 하구 입을 봉하고 있자니까 젖은 흔해서 짜낼 지경인데, 의논두 없이, 어디서 부엌데기 같은 유모를 하나 얻어다가 놓더란 말이지……."
"아, 저런! 나가란 말이죠, 한통속이었더군요?"
"한통속이건 말건 자라는 자식의 에미는 두구 싶지 않다는 거지. 서방은 서방대루 계집에 미쳐서 그러겠지만, 큰댁은 큰댁 노릇을 하려면 그애가 없어지거나, 그애를 정말 자기 자식으로 길러야 하겠으니 말이지."
"저런 도둑놈의 인심! 이천 원에 계집만 산 게 아니라 자식을 샀단 말이지."
하고 순영이는 입맛도 없어서 수저를 지었다.
"그런데 그것만 아냐. 그래두 그애는 어린것이 가엾어서 어떻게든 살려구 지지구 볶으며 지내는 동안에 그년하구 맞장구를 쳐서 싸우기도 몇 차례나 했던 거지…… 하루는 내게 와서 인제는 참 정말 못 살겠다면서 그래두 마지막으루 그년을 한번 만나 보구 떨어지도록 타일러 달라는 청이구먼. 저의 붙이로는 늙은 아버지나 나이 어린 오라비나 제법 들구 일어나서 역성이라도 들어 줄 사람이 없으니 대신 나서 달라는 것인데 내 말이 무슨 성검이 있어 떼어놀 수가 있을까마는, 마침 놈팡이의 생일날 저녁때는 생일법 먹으러 올 거니 그날 와서 만나 달라는구먼……."
"어쩌면 그렇게 꾸민 듯이 마침 생일이더람?"
순영이는 인제는 꾸민 이야기나 듣는 듯이 건성 대꾸를 하였다.
"그러니까 생일날 올 줄 알구 궁리 궁리해서 나를 끌어낸 거지."
"그래 어떤 여자예요?"
"어떤 여자가 뭐야! 참 기가 막혀서! 내가 미리 가서 정임이 방에 앉았는데 딱 들어서는 걸 보니, 엊그제도 내게 와서 묵고 간 내 동무 아닌가! 소학교 적부터 한동리에서 자라난 동무만이 아니라 같은 여학교를 나온 동창생이거든! 기가 차서! 너 이거 웬일이냐? 하구, 내가 놀라 자빠지려니까, 아, 나 이런 줄 알았니? 넌 어째 여길 왔니? 하고 되레 나를 윽박지르겠지……."
"허! 어쩌면 그렇게두 공교스럽게!"
순영이는 또 한번 꾸며댄 이야기나 듣는 듯이 반신반의면서도 눈이 번쩍하였다.
"허다헌 양반이라구 텃세를 하구 저의 할아버지가 남작으루 저 아버지가 습작(襲爵)을 하였다나 하는 집 고명딸루서 시집을 가더니 몇 해를 못가서 그 지경 돼버렸구면. 쫓겨난 시집에서 다시 붙이기를 할텐가, 본가집에서 발을 들여놓게를 하나! 그만 그 지경이 돼 가지구 떠돌아다니다가 그래두 저의끼리는 양반이라 해서 연줄이 닿았던 게지. 그렇게 어울린 것이더구면."
"그래 어떻게 됐어요?"
"아무리 타일러 봤자 별수가 있어야지. 자리를 걷어차구 일어서 나오자니까 정임이는 따라나와서 눈물이 글썽하겠지. 그때야 정임이의 마음이 홱 돌아선 것이지! 생각하면 불쌍하지."
"그래두 아이한테만 못할 노릇이요, 가엾지, 깨끗하니 좀 좋아요."
동생의 대꾸에 형은 긴 이야기에 지친 듯이 잠자코 앉았다. 그 말이 동감이 라는 눈치기도 하였다.
3
"아니, 이 마님이 어떻게 오셨어요? 그래두 잊지 않구 찾아 주시니 고맙습니다. "
정임이의 오라범댁은, 잘못 찾아 들어서지나 않았나 하고 기웃거리는 난영이를 보고 마주나오며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두 예서 그대루 사시는구면! 그래 다 무사하슈?"
난영이도 정임이 친정이 예전 그 집에 그대로 사는지 어쩐지 미심하면서 찾아나선 것인데 딱 만나니 반가웠다.
"애 어머니두 인젠 늙어 가는구료. 올에 몇이유? 그래 시아버는 그저 사셨수?"
좁아터진 예전 집 그대로이지마는 살림이 퍽 앙그러지게 붙은 눈치를 둘러보며 난영이는 속으로 반갑기도 하였다.
"아버님 돌아가신 지가 벌써 언제라구요. 그 난리를 안 겪구 돌아가신 게 다행하죠."
"허! 그렇구면. 사셨으면 여든이 넘으셨을 거니까. 그래 아이는 몇이나 되우?"
"이게 넷째랍니다."
방문 앞에 순동이로 멀거니 앉은 돌잡이쯤 된 것흘 가리키며 애 어머니는 웃었다. 새색싯적에 보그르르 피어나던 얼굴을 본 기억밖에 남지 않은 난영이는, 까칫이 벌써 중년이 들어가는 이 여자의 얼굴을 치어다보며 세월은 빠르다고 생각하였다.
"헌데, 그애 누구요? 형철이랬나? 시뉘님 아들말요?"
난리통에 피난 다니던 이야기를 주기니받거니 한참 하다가 난영이가 말을 돌리니까, 정임이 오라범댁은,
"왜요? 어떻게 됐대요?"
하고 도리어 깜짝 놀라며 묻는다.
"아니, 그애 어머니를 요전에 우리 동생이 길가에서 만났대길래 오랜만에 궁금두 하구 좀 만나들이나 보는가 해서 가엾은 생각이 들기에……."
"만나는 게 뭡니까. 아주 남이 됐는뎁쇼. 그래 그 누님 어디 와 계시대요?"
정임이 오라범 댁은 여전히 별 흥미를 느끼는 눈치도 아니었다.
"저 조기 승방이라는데 우리 한번 찾아가 봅시다. 아무리 도는 닦아두 사람이요, 인정은 마찬가지 아니겠소."
"글쎄요. 되레 성이 가셔 하시지나 않을까요."
오라범 댁은 어정쩡한 말눈치였다.
"싫어하거나 말거나…… 난 그애 ㅡ형 철이랬지? ㅡ그애두 데리고 가서 커닿게 자란 것을 보여주구 싶은 생각인데…… 잘 자란답니까? 뭐, 제 고모집에 가 있댔지 않수?"
"그것두 모르죠. 해방 후 얼마 안돼서 들은 말인데…… 그 후 어찌나 됐는지 알겠어요. 당자는 예가 제 외가거니 외삼촌집이거니 하는 것두 모르니까 통 무슨 연신이 있을 까닭이 있어요."
그것도 벌써 칠팔 년 전 일이지마는, 해방 후 이애 어머니의 남편 ㅡ 정임의 오라비가 그 놈팡이와 딱 마주치니까 저편에서는 고개를 외로 꼬고 피하려 하였으나, 의절한 매부지마는 그래도 누이가 자식까지 낳아준 전날의 매부거니 하는 생각으로 그애의 소식이라도 들으려고 알은 체를 하니까 마지못해서 "헤헤 ㅡ" 하고 인사를 하며, 제 고모가 맡아서 잘 기르고 학교에도 보낸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그후 소식은 여기서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벌써 그때두 보니까 그이가 구지레한 양복을 걸치구 비쓸비쓸하는 눈치가 다 깝살리구 집간두 없어졌기에 그애를 고모한테 갖다 맡겨 두었나보다는 말이더군요."
"응, 그 고모집이란 데를 내 알지! 애 어머니는 시집 갓 와서 색싯적 일이니까 어정쩡할지 모르지만, 그때 내가 들러리처럼 수모처럼 따라가지 않았수?"
"그러믄요. 왜 몰라요."
그때 명색이 성례랍시고 하는데, 그나마 본색 (큰여편네)이 있는 제 집에서 첫날부터 끌어들일 수는 없다 하여 고모집으로 데려다가 성례랍시라 하고 삼 일을 치렀던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 한번 가 봅시다. 입때껏 나두 무심했었지만 한번 가 봐줘야 하지 않겠수."
난영이는 생각난 김에 당장이라도 갈 듯이 서둘렀다.
"그두 그렇죠만, 저편에선 찾아다니구 하는 것을 싫어하논 눈친가 봐요."
정임이 오라범댁은 탐탁치 않은 기색이었다. 언제 정이 든 외삼촌댁이랴마는 더구나 남편이 길가에서 크애 아버지를 만났을 제 한번 가 보겠다고 하니까 "그건 가 봐서 뭘하느냐."고 핀잔을 주더란 말을 하며 화를 부르르 내던 것이 생각나서 하는 말이었다.
"그건 무슨 소리유. 아무리 저 잘난 양반이기루 자식이 에미두 못 찾구 두 눈이 싯검은 에미를 못 만나 보구 살란 말유. 애 어머니 나설 수 없으면 내라두 혼자 가 보리다."
오십이 넘어 육십 줄에 든 이 마나님은 역정을 와락 내며 나섰다.
"제가 가기 싫은 게 아니라요. 애 아버지나 들어오거든 의논해서 하죠."
하고 정임이 오라범댁은 난영이를 달랬다.
그러나 난영이는 이 집에서 나와서도 옛날의 손아래인 동무의 쓸쓸한 정경이나, 아무것도 모르고 눈칫밥으로 자라가는 그 아이의 신세를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가슴이 뭉클한 것을 새길 도리가 없어서 집으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서 효자동 가는 차를 잡아타고 말았다.
청운동 막바지의 정자같이 드높이 지은 형철이의 고모집은 이십 년 가까이 지낸 오늘날도 그대로 서 있고 한 번 와본 데건마는 금시로 찾았다.
개가 짖고 내달아서 조용한 산촌 같은 거리를 떠들썩하게 뒤집어엎˙고 하였으나 별당 같은 노마님방 앞에 까지 끌려갔다.
"어디서 오슈?"
하고 영창으로 내다보는 노마님은 그때 보던 그 얼굴이 그대로 있지는 않으나 육십은 훨씬 넘었을 텐데 머리털 하나 세지 않고 얌전히 깨끗해 보였다.
"날 못 알아보시겠죠? 어누 핸가 흔인답지 않은 혼인에 신부를 따라왔던 그 동무입니다."
난영이의 말씨는 좀 비꼬는 듯이 들렸다.
"어, 그 누구신가? 어쨌든 올라오슈."
주인 마님은 속으로는 짐작이 나서면서도 어정쩡히 치어다보며 낯빛이 흐려졌다 갰다 겁을 집어먹은 눈치기도 하고 얕보는 기색이기도 하였다.
난영이는 자기가 오게 된 이야기를 대충 하고 나서,
"형철이 댁에 있대죠?"
하고 정통을 쏘아 보았다.
"그거 지금 새삼스럽게 따져 뭐하는 거요? 제 에미가 만나 보구 싶답디까?"
주인 마님은 역정스럽게 대꾸를 하는 것이었다.
"네. 그래서 왔어요."
난영이는 자의(自意)로 왔다고 할 수 없으니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딴소리! 그런 걸 왜 버리구 나갔더람?"
노마님은 흔잣소리처럼 코웃음을 쳤다.
"아니! 붙어 있을 수가 없어서 쫓겨 나가 가지구 갈 데가 없어 그 지경 된 그 사정은 나보다두 마님께서 더 잘 아실 텐데 이거 말씀이라구 하시는 거예요?"
하고 난영이는 눈이 똥그래서 대들었다.
"그렇다기루 지금 와서 날더러 어쩌라는 거요?……"
하고 주인마님도 맞섰다.
"……그래 제 어미가 그애를 데려간답디까?…… 여기엘 다시 들어오구 싶답디까?"
난영이는 거기에 대해서 책임 있는 말을 할 수 없으니 말이 잠깐 막혔다. 그러나 한숨 돌려서 다시 말을 꺼냈다.
"왜 내게 역정을 내십니까? 댁에선 잘하셨는데 그 사람이 잘못해서 쫓아내셨다는 말씀이죠?"
난영이는 이 집 마님이 말끝마다 제 에미 제 에미하고 정임이를 홀대를 하는 것이 심사에 틀리기도 하였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 말 좀 들어 보슈. 그애가 참다랗게 큰에미가 제 에미거니, 외가루 말해두 제 큰에미 친정을 제 외가거니 믿구 저만큼 커 왔는데 지금 새삼스레 또다시 난 에미가 있다는 걸 알면 그앤 뭐 되는 거요? 마음이 벗나서 떠돌아다닐까봐 걱정 이유. 그러니 그애를 위해서라두 가만히 계시유. 공연히 그애를 쑤셔대만 놓구서 에미를 찾어갈 수두 없구, 에미가 찾아올 것두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걱정이란 말이유. "
난영이는 눈만 깜짝깜짝하고 앉았다. 이때까지 생각해 본 일도 없던 일이지마는 딴은 그 아이의 마음의 평화라든지 어떠면 장래의 행복을 위하여서라도, 지금 이 마님의 말처럼 난 어머니의 존재를 끝끝내 숨겨버리고 마는 것이 좋을 듯도 싶었다.
그러나 일생을 두고 가뭇같이 속아 사는 형철이의 처지를 생각해 볼 제 가엾은 생각이 들고 마음이 흐려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 그애 본집은 어떻게 됐어요?"
무슨 일가붙이가 되는 것도 아닌데 중뿔나게 나서서 제자식이나 찾으러 온 듯이, 그렇지 않다고 우길 수도 없어서 난영이는 말을 돌려 버렸다.
"그애를 내게다가 칠판 년째 뱉겨 둔 걸 봐두 대강 짐작은 하시겠구료. 말이 아니라우. 해방됐다구 남들은 큰 부자두 되구 큰 감투도 쓰더구면만……. "
마님은 친정 조카의 말을 하기가 부끄러운 듯이 어물어물하였다.
해방 직후에 정치운동한다고 올려앉히는 바람에, 그러지 않아도 해방 전에 은행에 들어가 앉은 그 집이나마 깝살리고 지금은 두 내외가 셋방살이로 떠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아, 그 큰 집을요?"
난영이는 조금도 동정이 가는 것은 아니건마는 인사성으로 놀라는 소리를 하였다.
"크면 뮐 하우? 아 집야 칩십여 간 집에 텨가 넓구……. 그것만 정리해 가지구라두 잘만 하면 지금 저 지경야 됐겠수마는, 게서 떨어지는 걸 가지구 무슨 물산회사인가를 벌이구 돈을 벌어서 정치 운동자금을 댄다더니…… 한때는 자동차를 흘홀 달리구 다니는 바람에 정말 무에 되는가 보다 했더니 될 게 뭐요? 영골부터 해보지 못한 일이!"
주인 마님은 친정이 그 지경으로 영락(零落) 한 데 대한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남에게는 말을 안한다면서도 저절로 나오는 불평이었다.
"첼량이만 그저 그런 거죠. 있다가두 없어지구, 운이 틔면 금시 발복두 하는 거구……."
하며 난영이는 위로삼아 대꾸를 하며 속으로는,
"너무 지랄을 버릇더라니!"
하고 코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다가 그래도 또 한 가지 물어 보고야 말 일이 있어서,
"그래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그때 작은 집으루 들여 앉힌……."
하고 또 말을 돌렸다.
"이거 옛이야기하러 왔구료, 아, 헤진 지가 벌써 언제라구! 난 지금 그애의 얼굴두 잊어버렸수."
하며 주인 마님은 쓴읏음을 띠었다.
난영이는 정임이 대신에 형철이를 좀 보고 가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요새 학교는 놀겠지만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언제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더 할 이야기도 없이 질깃질깃 앉았기도 안되어서 일어서려니까,
"이렇게 찾아오신 그 뜻은 잘 알겠소이다만, 염려 마슈. 삼대 외독자인 그애를 낸들 맡아서 범연히 기르리까. 낳아준 제 에미의 공을 모르는 것두 아니구."
하며 주인 마님은 쫓아 나오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공을 알아 주시면 어떡 허신다는 거예요?"
난영이는 정임이가 동생만 같애도 이렇게 한 마디 채쳐 보았겠지마는, 이 노마님한테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좋은 낯으로 헤어져 나오기는 하였으나 허턱대고 분한 생각부터 앞을 섰다. 그것은 옛날 동무 정임이를 위해서도 아니요, 지금 만난 그 마님이나 정임이의 옛날 남편에게 대한 분개도 아니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계집으루 태어나서……."
어떤 아낙네나 답답할 때면 입밖에 내는 군소리를 한 마디 속으로 웅얼거렸다. 그것은 물론 팔자 사나운 정임이를 두고 한 말이나 자기 자신의 저물어 가는 생애를 돌아다 보고 하는 말이기도 하고 여성 전체를 얼싸안은 신세 타령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의 여성, 이 시대의 여성의 이러한 막연한 탄식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생각해 볼 힘이 난영이에게는 없었다.
〈1956년〉
2016년 11월 25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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