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삶은 정입니다. 지구상 어느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말하는 게 우리 말과 우리의 떠뜻한 정이 아니겠습니까.
삶은 정이다.
1. 아픈 정이라니
“주인님! 저 여기 있는뎁쇼. 어서 분부만 내리십쇼. 떠날 준비 다됐습니다.” 고개를 삐죽 내밀고 나를 찾는 저 알량한 신세. 제 갈 곳도 모르고 헤헤거리는 폼이 축 늘어져 혓바닥을 쑥 내민 어린 시절의 우리 집 똥개 같다. 조금 있으면 어딜 가는 줄도 모르고. 그래서 풀썩 가라앉고 만다. 이번 쓰레기를 버려달라는 아내의 청은 늘 있는 단순한 부탁이 아니다.
쓰레기봉투에 담긴 내 구두. 구두 때문 아내와 실랑이를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버린 것을 몰래 숨겨 들어 왔는데 결국 은신처를 찾아내 내쫓는 무지막지함. 그럴 것이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면 될 것을 스스로 처단하라는 엄명을 하달한 야속한 처사는 무어란 말인가. 이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쯤 되는 피의 숙청이다. 이에는 어찌하는 지 지켜본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다.
마치 자기냐 아니면 구두냐 선택하라는 식으로 아내는 구두에 있어서는 나를 절대 안 믿는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나를 믿을 리 없다. 구두를 보는 눈이 아내는 나와 전혀 다르다. 나는 웬만해선 구두를 버리지 않는다. 그런데는 남다른 곡절이 있다. 나는 평발인데다가 발 한 쪽이 기형이다. 그러한 형편없는 발 형편으로서 내 신발로 산다는 것은 여간한 뚝심과 인내가 아닌 것이다.
부드럽지만 질기고 맵시 있지만 펑퍼짐한 폼 나는 구두가 나로선 절실한데 이 세상에 그런 구두가 존재할까. 진열장의 곱상한 모습은 내 수중에 들어오는 날로 그만 하직이다. 바락바락 대들고 발뒤꿈치도 물어뜯고 물집이 생겨 견딜 수 없도록 괴롭히는 성질 더러운 존재로서야 생이 각인되고 쇠줄도 끊고 참는 무참한 존재로 버텨내야 고비를 넘긴다.
그러다가 성질 다 죽고 주인에 기대어 풀죽어 사는 숙지근한 존재가 내 구두의 일생이다. 난 생의 곡절을 모르는 시중의 반짝이는 구두코를 소양배양 하는 처지로 시덥지 않게 여긴다. 살려니 아프고 버티다보니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긴 험한 내력을 감히 범접이나 할까. 이는 애완견과 동네 똥개 차이쯤 된다. 내 구두는 구겨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 세월인데도 밑창에 달라붙은 가죽은 한쪽으로 휘어지고 비틀어져 쪼글쪼글한 잔주름을 일찍이 짓이겨 갖는다.
그런 나는 내 구두의 안추른 주름이 안쓰럽지만 자랑스럽다 여긴다. 너만 아팠냐 말이다. 이심전심이고 동병상련이 따로 없다. 내 발도 너만큼 아프고 주름져 버텨낸 것이다. 젊은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은가. 한 번은 젊은 처지에 안쓰럽기도 하여 낙타표 약을 덕지덕지 발라본 적도 있는데 이미 갈라진 피부는 소용이 없었다. 내 온 몸을 작은 크기로 지탱하고 내 길은 어디라도 따라 다닌 직수굿한 용맹 때문이리라.
행동으로만 말하는 의로운 투사, 그러기에 나는 폭신폭신한 감이 드는 좋은 구두를 어쩌다가 만나도 여직 배신을 한 적이 없다. 이심전심이라 이번에도 굽만 바꾸면 이 바특한 세월쯤은 어디든 날고뛰고 갈만하다 싶은데 아내는 그렇게 생각이 안 드는 모양이다. 정장차림에 패션의 완성은 구두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나는 동거동락의 깊은 정으로 사는 구두가 진정이고 바로 그 구두가 내 구두라고 말하고 싶다.
서로가 고통을 이겨가며 한 몸체가 되는 과정을 꽤 긴 시간 겪은 터이라 든든하기 이를 데 없으며 버리려는 포기도 쉽지가 않다. 그러한 곡절로 나는 새 구두를 한 켤레 사면 적어도 7년은 신고 다닌다. 밑창에 구멍이 나서 빗물이 스며들어도 나는 질척질척 신을 때가 많다. 물끄러미 구두를 어찌할까 바라보자니 말리는 아내도 같이 떠오른다.
나도 늙고 새색시 같던 구두도 같이 늙었다. 곱상한 아내도 주름이 늘고 머릿수도 현저히 줄어 볼 때마다 안쓰럽다. 그러고 보면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못난 나를 믿고 산 아내나 구두나 그대로 닮은 격도 되는데 굳이 오랜 동지를 왜 버리려드는지 모르겠다. 난 절대로 조강지처는 못 버린다. 마누라가 날 버리면 몰라도. 나는 나와 같이한 오랜 존재라면 그 무엇도 감히 어쩌지 못하겠다. 이 글을 아내가 보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나는 내 구두를 몰래 차 트렁크에 숨겨 놓았다.
2. 조강지처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자연 그들과 대비가 되기 때문 우리를 잘 알게 된다. 우리는 밥도 빨리 먹고 가는 곳곳도 수박 겉핥기 하듯 휑하니 보고는 금세 다음 코스다. 서두르고 악착같으며 가지 수가 즐비해야 뿌듯하다 여긴다. 이에 반해 외국인들 특히 선글라스에 스웨터를 하나씩 걸쳐들은 서구 사람들은 우리와는 정 반대이다.
밥도 천천히 먹고 언덕을 오르더라도 서두르지 않으며 느릿한 템포로 마냥이다. 날씨가 좋지 않다 싶으면 아예 돌아다니지도 않는다. 아까운 시간을 그냥 허비한다 싶고 베짱이가 연상된다. 돈 들여 찾은 곳 우리는 돈이 아까워 어쩌나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는 모양이다.
코스를 다 못 보면 우리는 안달복달인데 한곳에 진득하니 눌러서는 내키는대로 보겠다는 그들의 태연함이다. 이와 같은 기질은 평상시에도 여전하다. 우리는 부지런하다는 소리도 듣지만 서둘러 산다는 소리도 늘 듣는다. 나는 그들의 여유와 느긋함이 요즘 부럽다. 그런 여유 중에서 기실 부러운 것은 그들의 걷는 모습이다.
덩치도 큰 사람들이 큰 거리를 채우며 노부부가 꼭 손을 잡고 걷는다. 우리한테는 어림도 없는 자연스러움이다. 긴 세월이 연상되고 행복한 느낌이 자연 떠올려지고 미소가 지어진다. 남녀의 사랑이란 인고의 세월이 필요하다. 온고지정이란 말이 있다. 오랜 세월 정들고 같이 산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그리 내세울만하지 않은가 한다.
중년부부의 ‘이렇게 정주며 살고 있습니다.’ 와 젊은 아이들 ‘나 이렇게 연애합니다.’ 하는 비유는 전혀 다른 속성이다. 사랑은 격정적이지만 짧고 정은 은근하지만 길다. 사랑에서는 쉬이 이별이 떠올려지지만 정은 그러하지 못할 것이란 예의 생각을 갖는다. 미운 정으로 산다는 삶을 나는 많이 보았다.
속을 무던히 썩인다고 하지만 그로 이별의 사유로 연결지지 않는 데는 찌든 욕망으로는 어쩔 수없지만 장 담그듯 묵힌 사람냄새가 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남녀유별을 하던 시대를 갖았던 우리로서는 정의 표출에 대해서 지극히 엄격하다. 그래야만 위엄이 있고 체통을 갖은 양 하며 살아온 긴 세월이어서 그런지 용기를 내지 못하고 야박하기 그지없다.
나이 든 부부가 손을 잡고 다정히 걷는 것은 우리사회에서는 극히 이례적이다. 오히려 그러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부부가 맞는가 하며 곁눈질 해 살펴본다. 손잡고 걷는 모습은 단순하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해보면 알겠지만 따스한 손길은 부드러운 대화 이상이다. 걸으며 생각하며 상대를 의식하고 동질이 된다.
손을 다정히 잡고 걷다 때론 손을 놓는 경우를 본다. 상호 뜻이 상충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다시 손을 내밀면 쉬이 손을 잡기 마련이다. 손을 잡는 것은 결국 뜻이 통하는 것이고 마음이 닮아 가는 것이다. 풋풋한 신혼 시절처럼 낭만과 여유 그리고 다가서는 마음으로 정답게 걸어가는 길이라 한다면.
나는 호들갑스런 신혼여행은 폐지 하던지 그만두고 살만큼 산 쯤에 결혼 여행을 하는 것이 풍속으로 자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한다. 얼마 전부터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거리를 걷는다. 처음에는 쑥스러웠는데 지금은 훨씬 낫다. 손을 잡지 않으면 마냥 허하고 마음이 숭숭 뚫린 것 같다.
아내 화장 하는 시간이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며칠 전 나는 화장품을 사서 아내 화장대에 올려놓았다. 비록 핀잔을 먹었지만 젊은 시절 화장품 선사할 때와는 또 다르다. 나는 아내의 긴 화장 시간을 요즘 기대한다. 기다림은 아내의 것이 아니라 나의 몫이다.
이제 예쁜 모습을 잃은 늙은 여인이지만 고운 마음을 저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참에 나는 서양사람들처럼 어디서든 조화를 이루며 잘 지내는 것이 우선이고 바삐 가야 할 여행지는 그 다음이라 해 두려한다. 두 손을 꼭 잡고 앞으로는 찬찬히 보조를 맞추며 그렇게 우리만의 여행을 찬찬히 떠나고 싶어서다.
3. 정으로 삽시다
다음 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