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자교양강의]
장자, 나비 꿈을 꾸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로 변했다. 정말 자유자재로 춤추는 나비였기에 매우 상쾌하고 즐거웠다. 장자라는 존재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깨어나자 자신이 그저 엎드려 꼼짝하지 않는 장주일 뿐임을 발견했다.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속에서 장자가 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장자와 나비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이런 꿈이 나타내는 것을 물화(物化)라 한다.
장자의 이름은 주(周)입니다. 송나라 몽(蒙)땅(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商丘 동북 지역) 사람입니다. 천하가 크게 혼란해 백성이 살기 힘들었던 전국(戰國)시대 중기에 살았습니다. 그는 고요하게 세월을 보내기로 마음먹었고, 가족과 함께 시골에서 곤궁한 날을 보냈습니다. 「열어구」(列禦寇) 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비좁고 지저분한 뒷골목에 살며 가난해서 신발을 만든다. 배가 고파 얼굴은 노랗고 수척하다."
이는 분명히 객관적인 사실일 것입니다.
신을 만들어 가족을 부양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때때로 강으로 고기를 낚으러 가거나 산에 가서 나무를 베거나 화살로 새를 잡았습니다. 산속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어느날 그는 편안해 보이는 나무그늘을 발견하고 드러누워 낮잠을 잡니다. 그리고 자신이 나비가 되어 수많은 꽃과 우거진 나무 사이를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춤추는 꿈을 꿉니다. 그는 분명히 즐거운 미소를 띠었을 겁니다. 장자라는 자기 존재를 근본적으로 망각한 순간입니다.
사람은 왜 꿈을 꿀까요?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어찌할 수 없는 일상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은 매우 흔한 예입니다. 서양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목동은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해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피곤하지만, 한번 잠들면 꿈에서는 국왕이 되어 최고의 즐거움을 누리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어떤 국왕은 하루 종일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한번 잠들면 꿈에서는 목동이 되어 말도 못하게 힘겨운 노동을 합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이 두 사람의 처지는, 부귀와 빈천은 운명 지워져 있으며 꿈 또한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불평등한 실제 인생이 가끔 꿈을 통해 현실과 완전히 다른 인생으로 탈바꿈한다면 불공평의 비율은 다소 줄어든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자는 부자가 아니라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는 그가 동경했던 것이 물질생활의 풍족함이 아니라 세속의 속박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만물과 왕래하는 마음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애석하게도 좋았던 꿈에서 깨자 장자는 현실 세계로 돌아와, 자신이 '엎드려 꼼짝하지 않는 장주'임을 발견하지요. 그다음 문제가 재미있습니다. 장자가 방금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요, 아니면 '지금' 나비가 꿈속에서 장자가 된 것일까요?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보면 '꿈처럼 떠도는 인생'이라는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하는 행위와 일을 '미래'의 관점에서 돌아본다면 그 역시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요?
이렇게 부정적이고 무력하게 생각하던 우리는 곧 깨달음을 얻습니다. 뒤이어 장자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장자와 나비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될 때는 자신이 진짜 나비인지 물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깨어난 후에는 자신이 진짜 장자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 능력이 바로 인간의 독특함입니다.
질문은 자신이 어떤 태도로 살아갈지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를테면 생활이 얼마나 곤궁한가와 관계없이 장자는 편안하게 그 상황에 임했습니다. 그는 영혼을 고양시키는 일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수양했습니다.
나비는 자유자재로 날아 춤출 수 있지만 영혼을 고양시킬 가능성이 없습니다. 만물은 모두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인간만큼은 어떻게 자신이 어떻게 활동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나비를 포함한) 만물의 차이입니다.
이런 차이는 저주일까요, 아니면 축복일까요? 장자의 답변은 아주 명쾌합니다. 당연히 축복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꿈이 나타내는 것을 물화라 한다."
장자가 볼 때 나와 만물은 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나는 나비가 자유자재로 날아 춤추듯 어떤 장애와 제한도 받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물화'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나와 만물의 차이도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에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체 외에도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형의 지혜, 사유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맞는 수양 과정을 선택해 자신의 정신이 나비처럼 아무런 구속 없이 세상에서 살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나를 제약하는 세속의 부귀빈천, 만족과 실의, 영광과 치욕 등 여러 가지 상대적인 가치관은 그 힘을 잃게 됩니다.
장자의 사상은 만화경처럼 각각의 각도에서 오색찬란하고 화려한 장관을 보여주지만 단순한 몇 마디 말로 전체를 개괄할 수는 없습니다. 장자의 '나비의 꿈은 무척 간단하지만 영혼의 깊은 사유를 촉발하는 아주 좋은 이야기입니다.
꿈이란 무엇인가
「제물론」은 『장자』의 두번째 편으로 내용이 상당히 추상적입니다. 사실 이 제물론」에 이미 꿈에 관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밤에 꿈속에서 술을 마시고 즐거웠는데 깨어나 아침이 되면 슬퍼서 울고, 어떤 사람은 밤에 꿈속에서 슬퍼서 울었는데 깨어나 아침이 되면 즐겁게 사냥을 나간다. 사람은 꿈속에서 자신이 꿈을 꾸는지 알지 못한다. 꿈속에서 꿈의 길흉이 어떠한지를 물으려고 하지만 깨어나서야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참된 깨어남이있은 후에야 비로소 이것이 한바탕 꿈인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마치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행동한다.
장자는 이 글에서 꿈과 현실이 상반된다는 사실을 강조할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대해 '참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현실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부분만을 놓고 이야기하면 꿈에 대한 서양의 연구와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1856~1939)는 20세기 서양의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입니다. 그는 『꿈의 해석』에서 인간의 꿈은 잠재의식의 작용이라고 말합니다. 잠재의식이란 평상시깨어 있을 때는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으로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마치 빙산 전체의 6분의 5가 수면 아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 방대하고 복잡한 내용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사람이 잠을 잘 때 의식이 깨어나지 않고 경계심이 해이해지면, 잠재의식이 뇌 속에서 떠올라 각종 이야기의 줄거리를 편집하고 구성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그 내용이 괴상하고 현란하여 해석이 어렵습니다.
한 사람의 잠재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하면,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좌절과 욕망이 억압되어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잠재의식의 주된 내용은 이것들로 구성되며, 억압된 욕망은 꿈을 꿀 때 표출되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이 이론에 근거해 사람의 심리적 질병을 치료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텔레비전에서 서양의 정신과 의사가 긴 소파에 환자를 눕게 하고 그들의 꿈 이야기를 듣는 장면을 봅니다. 의사는 환자의 꿈을 분석하고 해석하여 환자가 어렸을 때 억압당했던 욕망을 깨닫게 하고 다시는 이것으로 고통 받지 않게 해줍니다.
프로이트의 설명은 분명 일리가 있지만, '성적 억압을 가장 중요한 심리적 질병으로 보는 착오를 범했습니다. 이 관점은 모든 것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성적 억압'이 아니라 '자기 비하'가 더 보편적인 인류의 유년기 경험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모든 주장은 꿈을 잠재의식의 작용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낮에는 생각하고 밤에는 꿈을 꾼다'라는 것은 아마 보통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치일 겁니다. 독일계 미국 과학자 오토 뢰비(Otto Loewi (1873~1961)는 연구 중 풀기 어려운 난제에 부딪혀 한참 동안 고민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문득 꿈속에서 문제해결법을 찾았고 재빨리 종이에 그것을 적은 후 다시 잠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난 그는 꿈은 모두 잊어버렸고 지난밤에 적어놓은 것은 엉망이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그는 같은 꿈을 다시 꾸었고, 이번에는 꿈의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해두었습니다. 그의 연구는 이를 계기로 진전을 이루었고, 그는 이 연구로 193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뢰비가 잠들었을 때 잠재의식은 저지선을 뚫고 낮에 생각이 막힌 부분과 연결되어 꿈속에 나타났습니다. 이런 꿈은 어릴 적의 불행한 경험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여러 주장을 종합하면 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꿈은 잠재의식의 작용이지만 반드시 억압받은 욕망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낮에 생각한 것을 밤에 꿈으로 꿀 수도 있습니다. 조금 시간을 내어 자신이 평소에 꾼 꿈을 분석하고 이해하면 분명 자신의 마음속 세계를 깊이 인식할 수 있을 겁니다. 나비의 꿈에 대한 장자의 간단한 설명에는 깊은 철학적 이치가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배운 이 단서는 우리를 도가의 세계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환상, 꿈 그리고 이상
인간의 생명은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장자도 혼란했던 전국시대를 살았고, 약소국인 송나라에서 곤경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의지하고 돌아가야 할 곳으로 철학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노자를 배웠고 도가를 발전시켰으며 학문적으로 훌륭한 성취를 이루 니다. 장자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는 모두 후대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의 삶에 대해 말하자면, 장자는 매일매일 그야말로 진실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간 세상의 위험을 잘 알았고, 자연에 각별한 애정을 기울였습니다. 사람이 자연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태도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경쟁, 이용, 보호 그리고 감상입니다. 이 네 종류의 태도를 동시에 모두 취하거나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산에 올라가 놀고 있는데 독사나 말벌을 만났다고 합시다. 이때는 단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원칙만을 생각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과 경쟁하여 자신의 생명을 보존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장자처럼 물고기를 낚고 새를 잡아 자연의 자원을 활용하여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만족시키는 겁니다. 농부가 밭을 갈아 수확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이 대자연을 이용하거나 대자연에 의지해왔습니다.
세번째는 보호의 측면입니다. 자연을 보호하거나 환경을 보호하는 일은 고대인에게 생소한 일입니다. 고대인의 과학기술 수준에는 한계가 있어서 자연을 파괴하더라도 대부분 회복 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네번째는 감상입니다. 감상은 무척 중요합니다. 자연은 그 자체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며 무심하면서도 질서가 충만한 미감(美感)을 드러냅니다. 이런 미감이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새롭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자연을 복잡한 인간관계로 생기는 염증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나라의 시선 이백(李白, 701~762)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마주 보아도 서로 싫지 않은 것으로는 오직 경정산이 있을뿐.”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남송 최고의 시인 신기질(辛棄疾,1140~1207)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가 청산을 보며 매우 아름답다고 여기니, 청산도 나를 보면 똑같이 느끼겠지.” (我見靑山多嫌媚, 料靑山見我應如是)
어찌 청산만 그러하겠습니까. 꽃 한 송이, 풀잎 하나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자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새나 짐승, 벌레, 물고기는미감을 낳을 뿐 아니라 사람과 상호관계를 형성하여 더욱더 깊은맛을 느끼게 합니다. 당나라 시인 이의산(李商隱, 813~858)은"장자는 새벽에 꿈속에서 나비인가 미혹되었다지" (莊生曉夢迷胡蝶)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미혹되었다'고 번역한 미(迷)라는 글자는집착이나 그리움보다는 감상과 찬탄을 의미합니다.
현실생활의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내곤 합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그 해결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환상, 꿈 그리고 이상(理想)입니다. '환상'이라는 말에는현실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또는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 수학을 좋아하지 않아서 수학 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환상을 품기도 했습니다. 보통 이를 '백일몽'(白日夢)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낮이건 밤이건 무의식 상태에서 꾸는 꿈속에 잠들어 있다면 그것은 꿈입니다.
꿈이 꼭 실제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잠재의식에서오는 암시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꿈속에서 나도 모르게 나타난내용을 현실생활에 투사해 현실을 개혁하려는 바람을 갖는다면,이는 공개적으로 '나의 꿈'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나에겐 꿈이라고이 있어요" 라는 표현은 이미 미국 정치계에서 사람을 감동시키는구호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발을 멈추고 구호를 경청하면서 자신에게도 그러한 꿈이 있는지 생각했지요.
"인류는 꿈을 가지고 있기에 위대하다."
이 말은 문명 진보의 계기이기도 합니다.
이상은 어떨까요? 듣기에 근사해 보입니다. 이상은 현실과 대립하면서 보완하는 관계입니다. 이상이 없다면 현실은 방향을 잃을 테니까요. 다른 한편으로 이상은 이 단어의 '理'(이)라는 글자때문에 이성적인 성격을 띠고, 환상과 꿈의 감성적인 부분이 적습니다. 사람들은 이성을 통해 서로 소통하며, 더 나아가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어떻게 현실을 타개해나갈지 함께 상의합니다.
환상, 꿈과 이상을 완전하게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그 성분의비율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지요. 대자연을 감상할 때 우리는 자신이 나비라는 환상을 가질 수는 있지만 정말 나비로 살아 있는 듯이 느끼기에는 생생함이 덜할 것입니다. 이러한 환상이 늘 나타난다면 일상생활에 장애가 되고 현실적인 것이 헛된 것으로 변해서환상 또한 현실 도피의 핑계가 될 겁니다.
꿈은 잠재의식이 작용해서 생겨나는 것이지 저나 여러분이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나비의 꿈을 꾼 장자처럼 꿈에서 깬 후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지금 나비가 나를 꿈꾸는 것인지는 바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 나와나비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물과 인간에게는 분명 동화될 수 있는 면이 있지만 사람이라면 마땅히 심신을 수양해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해야 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후가 바로 자신을 위해 이상을 설정할 때입니다. 이상은 미래에 대한 동경이며 현실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끌어내기도 하지요. 장자의 이상은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대업이 아니라 사람들이 생명의 안녕을 추구하도록 호소하는 데 있었습니다. 자신이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그 속에서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것. 그것이인간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바라는 바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