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성내리 8 소재. 1921년 5월 5일 내평(內坪)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관할 구역은 양양읍, 서면, 손양면, 현북면 전 지역과 현남면, 강현면 일부 지역, 관할 공소는 현북 1개소.
전사
양양 지방의 전승에 따르면, 병인박해 때 충북 제천의 배론[舟論] 교우촌에 거주하던 이 베드로가 양양면 화일리(禾日里)의 범뱅이골로 피신해 오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베드로의 동생 이 바오로와 김덕수, 그리고 김덕수의 숙부가 범뱅이골로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또 다른 전승은 양양 인근에 있는 속초의 싸리재(上道文里)에 관한 것으로, 충청도 청주에 살던 오광선이 병인박해를 피해 강릉 홍제동으로 이주하였고, 이어 맏아들 오춘영(바오로)이 속초 도문동으로 이주하여 ‘싸리재 옹기점’을 일구었다고 한다. 범뱅이골과 싸리재는 영동 지역에서 최초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였다.
영동 지역에는 1882년 가을 뮈텔(G. Mutel, 閔德孝) 신부가 처음으로 파견되어 이듬해 봄까지 순방하면서 양양 최초의 공소인 쉬일(양양읍 파일리) 공소를 비롯하여 8개의 공소를 설립하였었다. 그리고 1887년 싸리재 공소에 이어 장승골 공소, 한재 공소, 정바위 공소, 장두골 공소, 명지골 공소, 이목동 공소, 신흥 공소 등이 설립되어 양양 · 속초 지역에만 9개 공소가 되었다.
이 지역은 1883년 4월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신부가 설립한 ‘섭가지 본당’(이천군 산내면 龍浦里 섭골) 소속이었다. 그 후 함경도 안변에 있던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1888년 가을에 강원도 풍수원으로 거처를 옮겨 풍수원 본당을 설립하면서 잠시 이 본당 관할이 되었으나, 1890년부터는 다시 원산 본당으로 이관되었다. 1891년부터는 안변 본당 샤르즈뵈프(E. Chargeboeuf, 宋德望) 신부의 순방을 받았으며, 1896년 2월에는 안변 본당의 4대 주임 불라두(T. Bouladoux, 羅亨黙) 신부가 거처를 안변의 내평으로 이전하여 내평 본당을 설립하면서 이때부터 1921년까지 내평 본당 관할이 되었다.
본당 설립과 변모
영동 지역의 신자수는 점차 늘어났지만, 내평 본당과 멀리 떨어져 있어 본당 신부가 공소를 순방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이에 뮈텔 주교는 1921년 5월 5일 양양 본당을 설립하고 북간도 조양하(朝陽河) 본당에 있던 최문식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처음에 최문식 신부는 속초 상도문리의 싸리재에 거주하였으나, 성담 겸 사제관으로 지은 초가집이 허술하였고, 전교 면에서도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성당 이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22년 2월 17일 양양읍 서문리 282번지로 성당을 옮긴 뒤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성당 공사에 착수하여 12월 22일 완공하였다.
2대 주임 유재옥 신부는 공소 회장 피정을 연 4회 이상 실시하였고, 청년회 · 부인회 등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1936년 여름 수해로 성당이 완전 침수되자 성당 재신축 계획을 포기하고 시내 중심지로 이전하기로 결정한 뒤 현 성당 소재지의 부지 1,140평을 매입하였다. 이어 3대 주임으로 이광재 신부가 부임하여 1940년 2월 28일 성당(65평)과 교육회관(25평)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나,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련군의 주둔으로 성당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1948년부터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와 수도자들, 그리고 신자들이 양양 본당을 거쳐 남하하게 되자, 이광재 신부는 이들이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러던 중 이광재 신부는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9일 총살당하였다.
전란 중 성당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본당 신부가 공석이 되면서 신자 공동체 역시 혼란에 빠졌다. 이에 주문진(注文津) 본당에 이어 동명동(東明洞) 본당에서 사목하던 맥고완(P. McGowan, 元) 신부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양양 지역을 맡아 사목하면서 성당(65평)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설리반(T. Sullivan, 서) 신부는 부임한 지 얼마 안된 1954년 11월 30일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고, 1956년에는 강현 공소(강현면 정암리 2구)를 설립하여 12월 25일에 강당을 신축하였으며, 1958년 1월 10일에는 현북면 상광정리에 460평의 부지를 매입한 뒤 11월 8일 32평의 현북 공소 강당을 신축했다. 또 1960년 4월 1일 수녀원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7월 12일 2층으로 된 수녀원을 완공하였다. 한편 1960년대에 접어들어 한때 냉담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본당 재정 상태가 매우 약화되기도 하였다.
1972년 7대 주임으로 머레이(B. Murray, 함) 신부가 부임하여 학생회와 주일학교 육성에 힘을 쏟았으며, 9대 주임으로 부임한 린치(J. Lynch, 임) 신부는 가정 성화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사목하였다. 그리고 10대 주임 스미스(M. Smyth, 천) 신부는 이광재 신부의 깊은 신앙심과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3년 10월 1일 경당 내에 이광재 신부 기념관을 건립하고 순교 기념각을 세웠다. 그 후 1988년 4월 6일 현재의 수녀원(55평)을 신축하였고, 성당이 협소하여 많은 불편이 따르자 1995년 10월 1일 성당을 증축(75평)하였으며, 이듬해 10월 4일 농어촌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현북 가정 간호의 집을 개원하여 서울 성가 소비녀회에 운영을 위탁하였다. 14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동주(李東周, 시몬) 신부는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교회상을 정립하기 위해 부임 직후 ‘디모테오 어린이 집’을 개원하였다. 한편 본당에서는 2000년 10월 8일 이광재 신부 순교 5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는 등 이광재 신부가 시복 · 시성될 수 있도록 끊임없는 기도와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출처 : 김성희,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 춘천교구 양양 성당
옹기촌에 뿌리 둔 영동지방 신앙 '모태'
(사진설명)
1. 양양 성당은 6.25 전쟁 때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불을 지르는 바람에 잿더미가 됐다. 현 성당은 1954년 공소 신자들까지 팔을 걷어부치고 공사에 나서 완공한 것이다. 성당 구석구석에 82년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2. 순교자 이광재(디모테오) 신부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교각. 기념비에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시골 마을의 언덕배기에 서있는 성당에 들어서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푸근해진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 마당을 서성거리면 인심 넉넉한 신부님이 사제관에서 나와 반겨줄 것만 같다. 순박한 주민들이 한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을 무심히 내려다보면 그 정취가 마음 속까지 전해진다.
남설악을 병풍처럼 휘두르고 있는 강원도 양양군 양양 성당(주임 정원일 신부)도 그 같은 정취가 남아 있는 언덕 위의 성당이다. 지금이야 시내가 제법 번창하고 군데군데 아파트도 눈에 띄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양양 군청 옆에 있는 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현대식 2층 건물 '디모테오 어린이 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아이들이 안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지 마당은 적막할 정도로 고요하다. 옛날에는 성당 주변에 사는 코흘리개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와서 천사같은 수녀님을 친구삼아, 마당을 놀이터삼아 뛰어노느라 왁자지껄했을 텐데….
성당 올라가는 진입로 중간에 기와 지붕을 얹은 순교각(殉敎閣)이 세워져 있다. 순교비에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니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옛 수녀원 건물에 '이광재 신부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본당 공동체의 전체적 분위기가 1940년대 후반 공산치하에서 핍박받던 사제와 수도자들을 38선 이남으로 남하시키고 6.25 전쟁때 순교한 이광재(디모테오) 신부에게 쏠려 있음을 금방 느낄 수 있다.
기념관에는 이광재 신부의 손때 묻은 유품들뿐 아니라 82년 본당 역사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잘 정돈돼 있다. 1930년대 공소회장단 피정 기념사진과 교리문답집 등 빛바랜 흔적을 쭉 더듬어 가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가난하고 배운 게 없지만 끔찍한 정성으로 천주님을 모시고, 교우들이 친형제 자매보다 더 의좋게 살았던 그 시절 말이다.
양양 본당은 영동 지방 신앙의 모태(母胎) 같은 믿음의 고향이다. 영동 지방은 백두대간이 동서를 가로막고 있는 지형 탓에 타 지방에 비해 복음이 꽤 늦게 전파됐다. 마지막이자 가장 혹독한 박해인 병인박해(1866년) 당시 더 숨을 곳이 없던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 신자들은 백두대간을 넘었다.
그때 형성된 '범뱅이골'(양양), '싸리재'(속초) 등의 교우촌에 뿌리를 두고 1921년 설립된 본당이 양양 본당이다. 인근 홍천군에 5개, 인제군에 4개 본당이 있지만 양양군에는 아직까지도 양양 본당이 유일하다. 양양은 지금도 모든 면에서 외진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당은 예나 지금이나 굴곡없이 평온하게 신앙을 영위했을 것 같다. 그러나 군(郡)의 유일한 성당이라서 그랬던지 우리 민족과 교회가 겪은 수난과 고통을 단 한번도 비껴가지 못했다.
초기에 밭 한 뙤기 없이 옹기장이 신자들은 흙과 나무를 찾아 떠돌아다니면서 생계를 잇느라 가난의 설움이 컸다. 공소 마을은 대부분 옹기마을이었고, 본당신부가 봄가을 판공성사 시기에 방문을 해도 공소 한 칸이 없어 교우집에서 성사와 미사를 거행했다.
일제시대 말기에는 일본군이 성당을 빼앗는 바람에 신부와 몇몇 성당 식구들은 성당에 붙어있는 쪽방에서 살아야 했다. 해방후 36년 일본 압제에서 풀려나는가 했더니 소련군이 들어와서 또 성당을 짓밟았다. 성당 지대가 높아 무전실로 사용하기 안성맞춤이라며 막무가내로 빼앗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양양은 38선 이북에 속해 있었다. 이광재(1909-1950) 신부는 성당 안에 있는 비밀 다락에 성체를 모셔두고 미사를 드리다 그마저도 발각돼 성당 아래 부속건물로 쫓겨났다.
소련군이 물러가서 성당을 되찾았는데 이번에는 또 인민군이 들어와서 성당은 물론 부속건물까지 모조리 차지했다. 공산정부를 수립한 북한 공산당의 종교탄압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이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핍박을 견디다 못해 월남할 생각으로 38선 부근까지 내려왔으나 이미 길은 막혀 버렸다. 특히 1948년부터는 경비가 한층 강화돼 목숨을 걸지 않고는 월남을 감행할 수가 없었다.
38선 마을, 양양에 사목기반을 둔 이광재 신부가 걸었던 '순교의 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평화신문, 제731호(2003년 7월 6일), 김원철 기자]
'한국의 꼴베' 이광재 신부 순교혼 '생생'
(사진설명)
1. 정원일(왼쪽) 주임신부가 김두한 전 사목회장과 함께 이광재 신부 기념관 운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속의 주인공이 순교자 이광재 신부.
2. <인터뷰> 해방 이후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남으로 탈출시킨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김봉만 할아버지 내외.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월남(越南)을 결심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38선과 가장 가까운 양양 성당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연길, 함흥, 원산 등지에서 활동하던 사목자들이었다.
삼엄한 감시를 따돌리고 이들을 남으로 내려보내는 일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하지만 양양 본당 이광재 신부는 "나보다 훌륭한 성직자와 수도자가 한 명이라도 더 내려가는 것이 남한에서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라며 탈출을 도왔다.
당시 이 신부 부탁으로 38선을 넘나들면서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탈출시킨 김봉만(보니파시오, 85) 할아버지는 "밤이 되면 신부님과 수녀님들을 모시고 외진 산등성이를 타고 가서 넘겨주고 날이 새기 전에 돌아왔다"며 "특히 1948년부터는 38보안대 경비가 강화돼 숨이 멎을 정도로 위태로웠던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인터뷰 참조>
수녀들은 남양리에 사는 김성녀(서울대교구 김홍진 신부 조모, 58년 작고)씨가 주로 맡았다. 김씨는 수녀들에게 치마를 입히고 비녀를 꽂아 박물장수로 변장시켜 감시를 따돌렸다.
그러나 정작 이 신부는 끝까지 남아 성당을 지키다 6.25전쟁 발발 하루 전날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투옥됐다. 그리고 그해 가을 밤 움푹 패인 방공호에서 다른 수감자들과 엉켜 인민군의 총에 숨을 거뒀다.
아비규환의 집단살육 현장. 숨이 붙어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물을 찾자 시체더미 속에서 "응, 내가 물을 떠다주지. 응, 내가 가지요…. 내가 가지요…."라는 신음섞인 말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24시간 이상 숨이 붙어있던 이 신부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집단처형 상황과 이 신부의 최후 순간은 아비규환 속에서 생존한 한준명 목사와 권혁기(라파엘)씨가 생생한 증언으로 남겨놓았다.
이 신부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양양 신자들의 가슴 속에 '착한 목자'로 각인돼 있다. 50년 넘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착한 목자'를 따르는 신자들의 믿음, 그리고 '착한 목자'가 남긴 자취와 정신은 성당내 순교각과 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특히 이 신부의 제의와 제구, 친필교리서 등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데 이는 신자들이 그것들을 옹기에 숨겨놓고 피난을 떠난 덕분이다.
이 신부 추모열기는 5년전부터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38도보 순례'에 잘 드러난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남하한 길을 따라 10㎞를 걷는 순례인데 최근에는 타본당 신자들도 이 도보순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영북지역 사제단과 신자들은 이 신부 순교 50주기에 즈음해 시복청원 요청서를 교구장 장익 주교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정원일 주임신부는 "이 신부는 자신을 버리고 철저하게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산 사제라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된다"라며 "묻혀있는 지역 교회사와 이광재 신부 행적을 조사, 연구할 전임자가 시급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 신부는 이어 "박해시절 옹기골에서 시작된 신앙 역사와 이 신부의 순교혼이 잘 보존돼 있다"며 "동해안을 찾는 피서객들이 많이 찾아와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양양성당 : 033-671-8911.
인터뷰 : 성직자 수도자들을 탈출시킨 김봉만 할아버지
"왜 겁이 안나?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는데."
목숨을 걸고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월남시킨 김봉만(보니파시오, 85, 양양읍 내곡리) 할아버지는 "쌀 2가마를 짊어지고 10리를 걸었을 만큼 기운이 좋았던 때라 이 신부님이 그 험한 일을 믿고 부탁한 것 같다"고 말했다.
"북에서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내려오면 이 신부님께서 그분들을 교우 집에 숨겨놓고 저한테 연락을 해와요. 보통 밤 8시에 출발하는데 보초병과 주민들의 눈을 피하느라 험한 산등성이를 빙빙 돌아갔지요. 38선 아랫 마을로 넘겨드리고 나면 뒤돌아서서 정신없이 뛰었어요. 그래야 날이 밝기 전에 집에 도착하니까. 그때는 동네 사람들간에도 감시가 얼마나 심했는데요."
손바닥보듯 훤한 길이었지만 한번은 돌아오는 새벽길에 낭떠러지에서 굴러 그 날 밤에 깨어난 적이 있다. 허리가 성인 얼굴 크기만큼 부은 채로 집에 돌아와 눕자 주민들은 '38선 넘어가다가 인민군에게 두들겨 맞아서 그렇게 됐다'고 수군거렸다.
부인 정순남(아가다, 81) 할머니는 "신부님이 자꾸 그 일을 시키길래 한번은 찾아가서 '일본 보국대에 끌려가서 3년 만에 겨우 살아 돌아온 남편을 죽이려고 하느냐'고 싫은 소리를 했다"며 "신부님이 시킨 일이니까 하느님한테 목숨을 맡겨놓고 했지만 남편이 나가면 걱정이 돼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15회 가량 38선을 넘나들었다. 신부와 수녀는 20여명, 신자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월남시킨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중에는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수녀 9명이 포함돼 있다.
김 할아버지는 "한번은 신부님과 수녀님을 데리고 가는데 뒤에 따라 붙은 신자가 62명이었다"며 "그런 경우 발각돼도 흩어져 도망치면 절반은 살아남지만 1, 2명이 갈때는 정말 위험하다"고 말했다.
수고비를 받았느냐는 질문에 김 할아버지는 "만주 등지에서 몇달, 몇주를 걸어 내려온 분들에게 무슨 돈이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또 "물이 겨드랑이까지 차오르는 개울을 건너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어떤 수녀님은 손을 잡아줄테니 내밀라고 해도 손 대신 수건을 내밀고 그걸 잡아달라고 하더라. 수녀님들의 생활규율이 무척 엄했던 시절이었다"며 껄껄 웃었다.
김 할아버지는 "이 신부님이 말씀하신대로 '이때 아니면 언제 하늘에 공덕을 쌓을까' 싶어 한 일"이라며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말했다. [평화신문, 제732호(2003년 7월 13일), 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