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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4/19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동학유적지 답사
-일시 :2025.4.19. 일요일 9:30-17:30
-답사장소 : 금평저수지-원평무명동학군무덤-만석보-말목장터-전봉준생가-백산성
-회장 : 손인범
-차내해설자 : 원광대 전총장 박맹수
자유인 조동화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주관한 동학유적지 답사를 위해 삼양라면 앞에서 대기한 버스에 40여 인원이 승차 9:30에 출발, 첫 번째 들른곳은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한 금평저수지 위 동곡마을을 답사하였다.
세월이 지난 지금 정여립을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또는 혁명가로 재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 지역에서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기축옥사 정여립의 난!
전라도 지역을 반역향으로 지목하고, 이후 호남인들의 관직 등용을 제한하는 빌미를 제공했던 사건이 1589년의 기축옥사(己丑獄事)이며 호남의 지식인 1천 여명이 희생된사건이랍니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는 여러곳에 분포되여 있으나 오늘 답사는 시간관계상 김제원평, 정읍과 부안의 유적을 답사하였다.
김제시 금산면 구미란 마을 뒷산에 있는 무명동학군무덤을 찾아 답사하였다.
구미란 무명동학군무덤은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로, 1894년 11월 구미란 전투에서 일본군 및 관군에게 몰살당한 동학농민군들의 넋이 잠든 곳이다.
무명동학군무덤 답사시 최고원선생(황영수친구외사촌여동생)이 자세히 해설 해 주었다.
무명동학군무덤 답사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점심시간이 되어 원평집강소 “등록개밥상”에서 나물종류의 한정씩으로 막걸리를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점심후 만석보-말목장터-전봉준생가를 답사하였고, 버스는 부안 백산성으로 이동, 약 1km오르막 계단을 올라 백산성에서 박맹수전원광대총장의 해설을 들으며 동진강 들역을 구경하였다.
동학농민혁명지유적답사소감
조동화는 손인범회장님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답사초청으로 오늘 유적답사에 동행하게 되어 대단히 만족하였다.
손인범회장님은 1957년 전북 익산시에서 출생하고, 전북대 사범대학 재학중 1977년 유신반대와 언론자유보장등의 주장이 담긴 유인물을 배포한 혐의 등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유적답사 내내 박맹수전원광대총장의 동학농민혁명 해설을 들은 것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박맹수전원광대총장(2018~2022년 총장엮임)은 검소한 서민스타일로, 40년간 동학을 연구한 동학 전문가이자 원불교학과 출신의 교육자이다.
국교동창생이며 이리중학동창 황영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답사한것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나날이 반복되는 삶속에서 복잡한 세파를 잊고 김제 금평저수지 정읍 부안 동학농민혁명 유적 답사하며 춘삼월 꽃의 향연을 볼수 있어 감사했고 부안 백산성 계단 1km 걸으며 계단길 아름다운 자태에 젖어 힐링(Healing)하니 몸과 마음이 가벼운 느낌이 들었지요.
(Healing)이란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의미로, 좀더 풀어서 살펴보자면 마음의 상처나 스트레스 등으로 손상된 심신을 온전한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상한 세월의 수레바퀴속에서 시시한 일에 세월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도 어영부영 하루가 흘러가고 새아침이 찾아온다.
人生七十古來稀라는 고사성어가 있듯
옛날에는 나이 칠십만 살아도 오래 산다고 했다.
한국은 2024년 말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어서며 초고령 사회에 진입하였다.
고령화사회로 진입한 한국은 5명중 1명이 노인이다.
시니어(Senior) 65세이상된 은퇴한 노인을 일컫는다.
영어 시니어(senior)는 연장자라는 뜻인데,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며, 예전에는 직장 은퇴 후 활동이 제한적이고 고립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이제는 초고령화시대에 다양한 활동과 참여를 통해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지요.
조동화의 시니어 친구들은 다들 나이가 들어 각자 나름데로 건강비법을 실천하여 100시대에 무병장수 염원하는바이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자고나면 아침, 아침 지나면 정오...저녁 그리고 밤
매일 매일 똑같이 연속되는 일상속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보자.
나는 누구이고, 또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지금 나는 과연 행복한 삶을 살고있는것일까.
인간의 육체는 200여 개의 뼈와 600여 개의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00조 정도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한 인간의 가치는 잠재적인 전자 에너지를 포함하여 7조2천억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을 소우주라고도 한다. 인간은 실로 놀라운 존재다. 인간의 육체로 태어난 것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만 하다.
「인간이 생각한 것은 모두 다 이루어 진다」라고 말 한다.
인간의 잠재적인 에너지가 7조2천억이라니 얼마나 소중한가.
숫자로는 셀수없는 소중한 존재.
김제 정읍 부안 일원 동학농민혁명유적 온종일 답사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니 행복하였고, 두눈으로 볼수 있어 내몸에 감사하였다.
인생의 삶의 행복이 무엇인가?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행복이 뭐 별거 있습니까?
동학농민혁명유적 소감 한마디한다면 즐거웠다, 보람있었다 표현하면 좋을것 같여.
건강합시다.
행복합시다.
감사합시다.
<원평집강소 앞에서 조동화는 기념사진을 남기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했던 곳이다. 집강소 시기 금구 원평지역에서는 이 지역의 대접주 김덕명이 중심이 되어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때 원평 학원마을에 살던 백정출신의 신분인 부자 동록개가 김덕명을 찾아와 ‘신분차별이 없는 평등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이 집을 농민군에게 헌납하였다. 농민군은 이 집을 농민군 집강소로 활용하여 백정출신인 동록개가 원하던 폐정개혁활동을 전개하였다.
원평 집강소는 일제 강점기 면사무소와 원불교 종교시설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1990년대 이후 폐가로 방치되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2015년 문화재청으로부터 6억4000만 원을 지원받아 건물을 매입, 고증과 자문을 거쳐 복원했다.>
<이곳이 무명동학군무덤으로 처음에는 봉분이 확실히 올라 있었으나 오랜세월에 비바람에 씻겨 소나무와 잡목만 우뚝 서 있다.
손인범회장님이 들꽃을 옮겨와 무덤앞에 심어놓고 묵염으로 40여 회원이 추모하였다.
구미란(九尾蘭) 무명동학군무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구미란 전투에서 희생된 수많은 농민군의 유해가 묻힌 곳입니다.
이름없이 쓰러져 간 수많은 농민군이여.
편히 잠드소서>
<이비석은 원평의 향토사학자 최순식선생의 비석이다.
최순식선생(1933~2008)은 생전 김제원평의 동학혁명사를 헌신적으로 연구하고 보존하는데 열정을 쏟아 부었다.
최순식 선생 딸 최고원(황영수와 외사촌)씨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원평의 향토사학에 대단한 애정을 가지고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활동을 왕성히 하고 있다.최순식선생은 조동화의 국교동창생 황영수의 외삼촌으로 황영수의 모친과는 친남매지간이다.
황영수의 모친께서는 김제 원평에서 용지평고로 시집을 왔구나.>
<조동화의 친구 황영수의 외가집 최순식님이 살던 집이다.
황영수는 어린시절 어머니따라 원평외가집에 자주 왔으리라.
최서원씨는 이집에서 어머니(황영수의 외숙모)와 함께 살고 있다고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오전 답사후 1시가 넘어서 40여회원들이 원평집강소부근 “등록계밥상”에서 15가지 산채 나물 한정식으로 점심을 하였는데 음식맛이 좋다고 다들 감개무량하였다.
조동화는 황영수친구와 같은 식탁에 앉아 단지에 준비해 놓은 막걸리 두어잔 마시니 기분이 좋았다.
황영수친구는 나와 초등학교동창이며 이리중학을 나온 동창이기도 한데, 동학농민혁명유적에 관심이 많아 오늘 만나게 되어 반갑고 즐거웠소다.>
<세월은 어찌할 수가 없나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손인범회장은 1957년 함열에서 태어나 전북대사범대학을 나온후 교육계에서 후학양성에 몰두하다보니 머리가 하얀 백발이 되었구먼.>
<조동화의 종친이며 친구 조성곤의 고향마을 정읍이평의 말목장터를 답사하였다.
조성곤은 나와 국립철도학교를 졸업, 철도에서 10년 봉직후 서울대학교로 전근 행정처장으로 퇴직하였다.
수년전 이평면 창동리의 조성곤의 고향집을 방문시 이곳 말목장터에 들렀었는데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유명한 말목장터는 5일장이 섯던 장소이며, 정봉준장군이 유세했던곳이라 한다.
전봉준 장군이 집결한 농민들에게 일장연설을 하고 기대어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아름드리 감나무는 2003년 여름 태풍 '매미'에 의해 넘어지면서 고사돼 방부 처리한 다음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보관 중이며 이곳에는 현재 대체 감나무를 식재했다.
전봉준이 조병갑의 학정을 일일이 들어 고부관아로 처들어갈 것을 역설하자 농민들은 동헌에 고부관아로 들이닥쳤고 이후 말목장터로 나와 원한의 표적이었던 만석보를 허물었다. 『갑오동학혁명사』.
1894년 1월 10일 밤 술시경 농민들이 말목장터에 모여들었다. 개남장이 계획하고 써 돌린 통문의 전달이 잘 되어 예상한 인원보다 농민들이 더 많이 모여 그 수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들 주모자들은 10일(양 2월 15일) 밤 배들평을 중심으로 10여 부락의 풍물을 동원하여 예동에 걸꾼 수천 명을 모았다. 이때 전봉준은 호령하여 조병갑의 학정을 일일이 들어 선언하고 고부관아로 쳐들어갈 것을 역설하였다.>
<전봉준장군 고택 답사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있는 이 집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이 살던 집으로 사적 제 2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봉준은 양반계층에 속했지만 몰락한 양반이었고, 가난 때문에 생계를 위해 전봉준은 원평, 태인 등지로 떠다니며 살았고, 결국 농민혁명 직전에 여기 이 조소마을에 살며 동학의 고부 접주로 있었다고 한다.
유학을 공부하던 전봉준은 이 가르침만으로는 세상을 구제하는데 이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있던 중 ‘보국안민’ 이라는 동학당의 주의에 감동하여 1890년 무렵에 동학에 입도했다. 그러나 그는 입도 후에 포교 활동은 하지 않았고, 체포되었을 때에는 동학에 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동학을 대단히 좋아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는 동학을 종교적인 관점이 아닌, 부패한 현실을 개혁하고 하루빨리 무고한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자는 현실 개혁적인 관점으로 보았다.
전봉준은 농민혁명의 전 과정을 통해 눈부신 지도력과 조직력을 발휘했고, 1894년 12월에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잡혔을 때에도 “너희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일본)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 잡으려다 도리어 남의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것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마라. 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법을 받지는 아니하리라.” 라고 하며 기개에 찬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결국 1895년 3월 29일에 손화중, 김덕명 등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농민혁명의 실패와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부르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는 아직도 전국에서 전해지고 있다. 노랫말에 나오는 파랑새는 그의 성인 전(全)자를 풀어 팔왕(八王)새라 한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읍 고부 대뫼마을로 이동, 동학혁명모의탑을 답사하였다.
사발통문이 작성된 곳으로 알려진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은 사발통문에도 나와 있듯이 원래는 고부 서부면 죽산마을이었다. 순수 우리말 지명은 '대뫼'였으나 일제 때 이 마을의 정기를 말살할 목적으로 배처럼 떠돌아다니라는 뜻에서 주산으로 개명한 것이다.
사발통문이 발견된 것은 4201년(1968) 12월 4일로 신중리 주산마을에 사는 송기태(송국섭씨의 아들)씨 집에서였다. 통문에는 전봉준을 포함하여 20명의 서명자 명단이 주모자를 알 수 없게끔 사발을 엎어놓은 둥근 원 주위에 한자와 함께 한글로 쓰여 있다.>
<고부대뫼마을에는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정읍 고부면에 위치한 대뫼마을은 동학농민혁명을 계획한 사발통문이 작성된 곳으로 1893년 11월 전봉준 등 20명은 대뫼마을의 송두호의 집에 모여 혁명적인 모의를 결의하였다.
이곳 대뫼마을회관 앞에는 1994년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에서 건립한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이 있다. 사발통문 모양의 둘레석 안에 5m크기의 주탑과 주탑을 둘러 싼 1~2m 규모의 보조탑 32개에 무명농민군을 상징하는 얼굴과 무기가 새겨져 있다.
무명농민군의 무기는 죽창과 낫 농기구로 무장하여 1894년 1월 정읍 고부지역의 군수인 조병갑이 농민들을 과도하게 착취한 것을 계기로 발생한 사건이다.
그 중심에는 ‘녹두 콩처럼 왜소하다’고 해서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전봉준이 있다. 전봉준은 아버지가 조병갑의 착취에 저항하다 죽임을 당하자 사회개혁의 뜻을 품고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지역의 접주(接主)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민주주의 국가로 우뚝서게 된 원동력은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말할수 있으리라.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속에서 12.3불법계엄을 이름 없는 민초들이 막아 내었다. >
<동학농민혁명 유적 마지막 답사코스였다.
부안 백산성(扶安 白山城)은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47.4m 산성으로 1998년 9월 1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09호 백산성으로 지정되었다.
백산성은 1894년 갑오동학농민항쟁 때 동학군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산성이기도 하다.
1894년 전봉준은 고부·흥덕·고창·부안·금구·태인 등 각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백산에 집결시키고 지휘소인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여 전열을 정비한 후 전주로 진격하였다.
당시 동학농민군이 백산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산을 덮을 정도로 몰려와, 모여있던 그들이 서면 산이 온통 농민의 흰옷으로 덮이고 앉으면 손에 쥔 죽창이 가득하다고 해서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라고 했다고 한다.
산 정상 부분에는 동학농민군을 기리는 ‘동학혁명백산창의비’와 ‘동학정(東學亭)’이 있다. 백산 정상부 남서측에 ‘효자 증가선대부이조참판행통훈대부호조좌랑’ 최공의 묘가 있으며, 성의 동측 기슭과 서측에는 채석장 개발로 인해 일부 훼손되어 있다.>
<백산성 정산부에는 수백년된 백일홍나무 세구루가 도도히 흐르는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백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동진강 전경은 주변이 넓은 평야 지대라 사방 수십 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천혜의 요충지다.
동쪽으로는 동진강이 흐르고, 북쪽으로 강을 따라가면 동진강 하구까지 이어지며, 맑은 날에는 김제 평야와 죽산면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전망이 일품이다.>
전봉준(1855-1895)
전봉준은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1855년(철종 6)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 40세에 사망했다. 35세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1894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고,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여 동학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시정개혁에 전념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했다. 남도접주로서 12만 농민군을 지휘하며 싸우다가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고, 피신 중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전봉준이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다.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애초에 태인 산외면 동곡에서 지낼 때는 다섯 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스스로 선비로 자처하면서 세 마지기[三斗落]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小農)주1이었으며, 이 무렵 농사일 외에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훈장 일로 생계를 보태기도 하였다.
1890년(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농민 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 형제의 조카)로서 여러 주 · 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이래 농민들에게서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였다.
한재(旱災)주2가 들어도 면세해 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3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 · 음행 · 잡기 · 불목(不睦: 사이가 좋지 않음)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에 따른 탐학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 여러 사람이 서명한 소장의 첫머리에 이름을 적는 사람)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0일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민란이다.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주3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 주었다.
이 보고에 접한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 장흥 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 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조사, 수습하도록 하였다. 이 동안 자연발생적으로 고부민란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백산(白山)으로 이동,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그리고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 1894년 3월 하순 드디어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으며, 여기에서 전봉준은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孫和中) · 김개남(金開南)을 총관령(總管領)으로 삼아 보좌하게 하였다. 전봉준은 4개 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창의(倡義)의 뜻을 밝혔으며 또한 격문을 작성, 통문으로 각처에 보내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민란은 전반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되었다.
1894년 4월 4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중 황토현(黃土峴)에서 영군(營軍)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 · 흥덕 · 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였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는 영광 · 함평 · 무안 일대에 진격하고, 4월 24일에는 드디어 장성을 출발,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정부에 외병차입(外兵借入)을 요청하였고, 결국 정부의 원병요청으로 청국군이 충청남도 아산만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톈진조약주4을 빙자하여 제물포(지금의 인천)에 들어왔다. 국가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선무(宣撫: 흥분된 민심을 어루만져 가라앉힘)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놓았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執綱所)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여기에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휘하의 10만 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牛金峙)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金溝)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 · 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 · 원평(院坪)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학 농민 혁명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동학 혁명(東學革命), 동학 운동(東學運動),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 전쟁(東學農民戰爭)으로 불리기 시작한 동학난(東學亂)은 1894년에 동학 지도자와 동학교도 및 농민이 일으킨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교조 최제우의 신원 외에도 조선 양반 관리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불만이 쌓이다가 1892년(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학정이 도화선이 되었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농민군은 흥선대원군, 이준용과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 반의하면서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민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하였고 농민군과 제휴하였다. 농민군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2]까지 거병 명분으로 삼았다.
한편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못마땅히 여긴 김개남은 수시로 전봉준과 충돌하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방언은 농민운동 진압 직후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사면을 청하여 석방되었으나 민씨 계열의 관군에 살해당한다. 그밖에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는 남접의 거병에 쉽게 호응하지 않다가 그해 9월의 3차 봉기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개화파 지도자이자 망명정객인 윤치호는 동학 농민 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었다.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 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대한민국 초고령사회(super-aged society)진입
우리나라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2020년 15.7%를 기록했고, 2025년 20%, 2035년 30%, 그리고 2050년에는 40%를 초과할 전망이다.
초고령사회는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20% 이상인 사회를 말한다. 선진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사회보장(social security)을 요구할 수 있는 시기인 65세를 기준으로 하여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사회(aging society)’, 14% 이상이면 ‘고령사회(aged society)’, 20% 이상은 ‘초고령사회(super-aged society)’로 분류하고 있다(World Bank Group 2019).
2022년 기준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전체 인구의 17.5%로, 계속 증가하여 2025년에는 20.6%를 기록하여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2035년 30.1%, 2050년에는 43%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통계청 2022). 우리나라가 초고령사회에 도달하는 속도는 OECD 주요국에 비해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 도달 소요연수는 영국 50년, 미국 15년, 일본 10년에 비해 우리나라는 7년에 불과할 것으로 전망된다(통계청 2022).
이시대의 필수품 스마트폰
세상의 변화속에서 스마트폰은 우리생활에 필수품이 되었지요.
좋든 싫던 이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수 없습니다.
모바일이란 이동통신 혹은 이동통신 기술을 기반으로 한 무선 인터넷 기술을 통칭하는 단어로, 이제 개인간, 기업간 또는 개인 대 기업간의 거래도 인터넷을 이용하는 무선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스마트폰시대는 인간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속도, 편의, 효율’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기에 디지털 혁신은 계속된다. 이말이지.
속도, 편의, 효율은 한 번 경험하면 되돌리기 힘든 불가역적 속성을 가졌다.
우리한국은 스마트 IT 정보통신기술이 김대중 대통령시절 비약적으로 발전했지요.
김대중대통령은 인터냇 고속도로의 선구자이며,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일상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제공했지요.
김대중 전대통령은 재임 시절인 1998~2003년 동안 햇볓정책과 더불어 전세계 어느나라보다 컴퓨터를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초고속인터넷망을 도입하였으며,
김대중 정부의 5년을 IT 관점에서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인터넷 5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편리한 스마트폰세상속에서 사는 것은 김대중대통령의 임기5년동안 10조를 초고속 인터냇망 구축사업(인터냇고속도로)에 투자한 공로가 있다 이말입니다.
시대를 앞서간 김대중대통령의 선견지명으로 세계1등국가 인터냇 강국 대한민국이 될수 있었다.
모바일(Mobile) 무선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경제.문화.정치.사회 등 각 분야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말았다.
바닷 물로도 못 채운 사람의 욕심
불교에서 말하는 3대 악(惡)중에 탐욕이 있어 이를 버려야 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나이가 듦에 따라 남보다 더 갖고 싶고, 좋은 집에 살고 싶고, 지식욕, 명예욕, 권력욕 등에 집착하려 한다. 장수(長壽) 시대가 되니 노인들의 생에 대한 욕심이 100세까지를 꿈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무탈하게 살아온 것만 해도 다행인데 노욕(老慾)이 생긴 것이다. 정치계에서는 노인이 권력욕에 미쳐 남을 해치며 차지하려 한다. 재계의 일부는 온갖 부정을 하면서 재산 욕심을 채우려드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출생부터 죽을 때까지가 욕계(欲界)의 세계에 살기 때문에 무한한 욕망을 채워가면서 살아가야 한다. 욕계는 삼계(三界-색계 ,무색계, 욕계)의 하나로 지옥, 아수라(阿修羅), 축생(畜生), 인간계를 말하는데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음욕(淫慾)이 있으므로 욕계라 한다.
욕계에 살기 때문에 불가(佛家)에서 삼독(三毒)의 하나인 탐욕(貪慾)의 마음이 항상 일어나 자기의 욕망(慾望)을 채우려 한다고 했다. 속담에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메운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욕심은 바닥없는 항아리와 같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 이를 깨달아야 한다.
미국의 재벌 록펠러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당신은 미국 제일가는 갑부인데 얼마나 벌면 만족하겠는가?” 그때마다 “조금만 더”라고 대답했다. 사람은 세상의 재물, 권력, 명예로 공허함을 채워보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일이다.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평안을 살 수 없고, 건강도, 진정한 사랑도 살 수 없고 죽음에서 보호받을 수 없다.
톨스토이의 소설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왕이 농부에게 “네가 하루 동안 밟고 걸어 다니는 땅은 모두 주겠다.” 조건은 해지기 전에 출발한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농부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빠르게 더 많은 땅을 밟아야 하기 때문에 힘을 다해 해질 때 까지 전력을 다해 뛰었다. 그래서 그는 많은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출발했던 장소에 도달했을 때, 그는 모든 힘을 다 쏟아버려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탐욕은 일체를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어 버린다.’고 몽데뉴는 말했다. 오늘 날 이 시대에도 이런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큰집 천간이 있어도 밤에 눕는 곳은 여덟 자뿐이요, 좋은 논밭이 만경(萬頃)이라도 하루 먹는 것은 두되 뿐이다.<명심보감>
욕심의 수준을 낮추게 수행해야 한다.
모든 파멸의 근원인 탐욕은 바닷물로도 채울 수 없다. 탐심(貪心)에는 적당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가진 자가 더 가지려 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중국의 회남자는 “해와 달이 밝게 비추려 해도 뜬 구름이 가리고, 감물이 맑아지려해도 흙모래가 더럽히듯 사람도 본성대로 허무평평(虛無平平) 하고자 해도 욕심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그러므로 욕심은 채우려 말고 수행의 마음으로 다스려야 한다. 조금만 더 채우고 움켜쥐려 말고 조금만 더 비우고 내려놓아야 한다.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과 자꾸 비교하지 말고, 높은 곳만 자꾸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의 가난은 상대적인 가난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만족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행복의 길이 열린다. 가난은 조금 불편할 뿐이지 불행은 아니다.
<돈의 5가지 속성>
1. 돈은 중력과 같다
- 무게가 무거울수록 끌어당기는 힘이 강해지는 중력
- 처음 1억을 모을 때 100의 노력이 필요하다면, 그 다음 1억은 80, 그 후는 60의 노력이 필요하다.
- 1,2,3,4,5 가 아닌, 1,2,4,8,16 과 같은 배수의 법칙
- 매장 10개까지 몇 년, 300개 까지 많은 노력, 그 뒤로 언제 600개가 되었는지 기억이 없음
2. 돈은 인격체다
- 큰 돈은 어른, 작은 돈은 아이, 아이를 함부로 대하면 부모가 싫어하는 것과 같이 작은 돈을 함부로 다루면 큰 돈도 나를 배척하게 됨
- 돈은 감정이 있다. 자기를 하잖게 여기는 사람 옆에 있지 않으며, 이유 없이 사치하면 떠나버린다.
- 돈은 생각을 한다. 본인을 좋게 쓰는 사람에겐 반드시 돌아온다. 따라서 작은 돈은 낭비하지 않고, 큰 돈은 제대로 좋은 곳에 보내준다.
3. 일정하게 들어오는 돈은 힘이 세다.
- 일정함 그 자체가 엄청난 힘이다.
- 일 년에 꾸준히 조금씩 오는 비와 한 번에 내리는 비
- Cashflow가 일정하면 그 돈을 조직화할 수 있다.
4. 고생해서 번 돈은 힘이 세다.
- 돈을 버는 과정에 따라 돈의 가치가 달라진다.
- 돈은 몰려 다니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의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생과 슬픔이 있다. 그것들은 ‘가시’이므로 잘 다듬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나를 찌르게 된다.
5. 남의 돈을 대하는 태도가 내 돈을 대하는 인격의 근본이다.
- 나의 돈과 마찬가지로 남의 돈도 인격이 있다.
- 회비, 공공재를 아끼지 않는 것은 결국 내 돈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 돈은 중력과 같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무게감이 클수록 다른 돈을 끌어들인다. 예를 들어 10억을 모은다고 가정했을 때, 처음 1억을 모으기까지 100의 힘과 노력이 들었다면, 10억을 모을 때까지 1000이 든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본은 다른 것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그다음 1억을 모을 때는 90, 그다음에는 80의 힘이 든다. 점차 들어가는 노력과 힘이 줄어들면서도 버는 양은 늘어난다.
김회장의 경우 매장 1개를 300개로 확대할 때까지는 수년이 걸렸지만 600개로 늘어나는데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돈 역시 가속이 붙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불어난다.국가, 회사, 가정 모두에게 돈의 중력은 적용된다. 단순히 베푸는 게 아니라 성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판단해야 한다.
회사가 조금 성장하면 사회적 기업으로 준비하는 사장이 많은데 무턱대고 베풀다간 돈의 중력, 힘 자체가 줄어들 수 있다. 어디서든 자본이 일정하게 모여서 다른 자본을 만들 때까지는 돈을 모아야 한다.
◇ 돈은 인격체다
돈도 인격체처럼 스스로 존재하고 생각하며 개별적 실체를 가진다. 감정과 생각, 호불호가 분명하고, 흩어지는 것을 싫어하며 모여 있길 좋아한다. 자본도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으로 불리는 ‘법인’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사람 대우를 해줘라 - 큰 돈은 어른으로, 적은 돈은 아이로 인식하면 된다. 어린아이를 함부로 하면 그 부모와 말다툼하게 되는 것처럼 적은 돈이라고 무시하고 낭비한다면 그에 따르는 이익을 얻기 힘들다.
감정을 가진 존재다 - 도박, 쓸데없는 사치, 무가치하게 탕진한다면 돈은 자신을 하대한다고 생각하고 가차없이 떠나 버린다.
생각하고 써라 - 돈을 좋은 곳에 쓰면 그 가치는 다시 돌아오게 된다. 적은 돈은 아끼고 큰 돈은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
◇ 일정 수입(돈)이 불규칙 수입보다 강하다
일정하게 들어오는 돈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다. 현금 흐름(Cash flow)이 균일하게 유지되면 돈이 조직화해 강한 결속력이 생긴다.
예를 들어 1년 강수량인 1000mm의 비가 하루아침에 오면 홍수가 되지만 정기적으로 비가 온다면 그 물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
일용직 노동자도 이와 비슷한데 일당으로 보면 적지 않은 돈을 벌지만 불규칙하게 들어오기 때문에 계획적으로 돈을 관리하기 힘들다.
상담을 받았던 기업체 사장 가운데서도 사업 이익이 일정치 않아 고민을 토로한 경우가 있었다.
예측 가능성이 떨어져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주말 하루에 매출이 500만 원 나오는 것보다 5일간 매일 꾸준히 100만 원씩 나오는 게 더 좋다.
◇ 고생해서 번 돈은 공짜 돈보다 힘이 세다
같은 가치의 돈 1000만 원일지라도 돈을 번 과정에 따라 그 무게는 달라진다. 고생해서 번 돈 무게가 100kg이라면 쉽게 얻은 돈은 1kg도 안 된다.
복권 당첨, 누군가 준 돈, 갑자기 사업이 흥해 모인 돈, 유산 상속 등이 이에 해당한다. 돈을 번 사람 자체가 느끼는 돈에 대한 자세가 다르기 때문이다.
초년 사업가들이 초반에 운에 의해 성공하는 경우, 이 원리를 인지하지 못해 회사가 망하거나 사업을 접는 사례를 많이 볼 수 있다.
노력 없이 모인 돈은 그만큼 빨리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 남의 돈을 대하는 태도가 돈을 대하는 내 인격의 기본이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밥 대접할 때와 남이 사는 음식을 먹을 때 마음가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내가 음식을 살 때는 항목 하나하나 가격을 신경 쓰면서 남이 제공하는 음식은 쉽게 여긴다면 자신이 번 돈을 대할 때도 하찮게 볼 가능성이 커진다.
남의 것을 귀하게 여기고 내 돈을 아끼지 않으면 돈의 존중을 받을 수 없다. 세금으로 이뤄진 공공자산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남의 세금과 내가 낸 세금이 섞여 있는 상황에서 공공기물이나 서비스를 함부로 대한다면 내 것과 남의 것 모두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회사지분을 대할 때에도 드러난다. 불과 10%도 안 되는 지분을 가지고 마치 자신의 회사처럼 휘두르거나 전체 자산이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영자를 종종 볼 수 있다.
끝으로 김 회장은 ‘수각(水閣:돌로 만든 조형물) 이론’을 말하며 “돈의 속성을 잘 알고 관리해야 자본을 쌓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김승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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