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 「기차를 기다리며」감상 / 권혁웅
기차를 기다리며
천양희 (1942~ )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긴 길인지
얼마나 서러운 평생의 평행선인지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역은 또 얼마나 긴 기차를 밀었는지
철길은 저렇게 기차를 견디느라 말이 없고
기차는 또 누구의 생에 시동을 걸었는지 덜컹거린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를 기다리는 일이
기차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며 쏘아버린 화살이며 내뱉은 말이
지나간 기차처럼 지나가버린다
기차는 영원한 디아스포라, 정처가 없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기차역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기차역을 지나간 기차인지
얼마나 많은 기차를 지나친 나였는지
한 번도 내 것인 적 없는 것들이여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지나간 기차가 나를 깨운다
기차를 기다리는 건
수없이 기차역을 뒤에 둔다는 것
한순간에 기적처럼 백년을 살아버리는 것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도 기차역을 지나치기 쉽다는 걸
기차역에 머물기도 쉽지 않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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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기다리다’ ‘길다’와 동족어(同族語)라는 걸 이 시를 읽고서야 알았다. 기차는 기다려야 하는 차, 그래서 그토록 긴 차다. 시어들을 가만가만 읽다 보면 입안에서 기차 한 대가 지나간다. “기차는 또 누구의 생에 시동을 걸었는지 덜컹거린다” 같은 시행은 입안에서 정말로 덜컹하며 소리를 내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며 쏘아버린 화살이며 내뱉은 말이”와 같은 시행은 정말로 입안을 쏜살같이 지나간다. 기차는 5~6행에서는 느릿느릿 출발하고 8~10행에서는 기분 좋게 가속했다가 15~18행에서는 잠시 정차한다. “기차역”과 “얼마나”라는 말소리의 만남은 또 어떤가? 15행 이하를 읽다 보면 세상에 그토록 역이 많은 것이 제각각의 사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시 한 편 읽었는데 무궁화호에 타고 내린 기분이다. KTX라면 이런 여행은 꿈도 못 꾸었겠지.
권혁웅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