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성큼 다가 온 여름날의 약사암 풍경
일 시 : 2024.06.13(목)
참 가 : 강공수 김상문 김영부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장휘부 등 10명
불 참 : 김재일 정원길 등 2명
회 비 : 100,000원
식 대 : 83,000원(김치찌개 5, 애호박찌개 3, 해물파전 1, 공기밥 1), (별도 : 리정훈 선배 말걸리 2)
금일 잔액 : 17,000원
이월 잔액 : 545,000원
총 잔 액 : 562,000원
부곡정에는 8명(강공수 김영부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등)이 모였다.
10시가 되어 산행을 시작하였다. 오늘이 금년 들어서 가장 기온이 높다고 예보가 되어서인지 진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오늘 산행을 하러 온 것으로 보였다. 햇볕을 가리는 구름이 있어서 그런지 햇볕이 그리 따갑지는 않았지만 기온이 무덥게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만 걸어도 진땀이 조금씩 흘러 나왔다. 발걸음이 자유롭지 못한 윤정남이 용케도 우리 뒤를 따라 오고 있었다. 나종만에게 윤정남과 동행하여 갈 수 있을 만큼만 가다가 쉬고 있으라, 부탁하고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런데 이용환도 오늘 새벽 4시부터 집사람과 양동시장에 가서 마늘을 사가지고 옮기느라 힘이 방전되어서 오늘은 약사암까지 갈 수 없다고 하소연하면서 오늘은 증심사 입구까지만 가겠다고 하여, 강공수 김영부 윤상윤 이용환 등 4명은 증심사 부근에서 떨어지고, 박남용과 나는 등나무 밑에서 쉬었다가 약사암까지 올라갔다.
날이 가물어서 약사암 대웅전 앞에 잔디가 말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박남용이 우리가 잔디에 물을 주자고 하였다. 석등에서 나오는 석간수도 철철 나오고 있지만 물을 마실 표주박을 누가 치워버렸는지 2개만 달랑달랑 걸려 있어서,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목도 마르고 기온도 무더워서 플라스틱 표주박 가득 물을 받아서 마셨다. 서재(西齋)의 지붕갈이를 하느라 종무소에서 관리하는 온수통도 없어서 오늘은 음양탕(陰陽湯)을 만들 수가 없었다.
건축 공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계를 설치하고 지붕에 닿게 안전 발판을 만들어 지붕의 기와를 들어내고 흙을 다시 올린 다음 새 기와를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요즘 비가 안 와서 작업이 수월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였다. 2주 전에 시작된 공사가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든 느낌이었다. 모래(토요일)는 비가 온다고 하였으니 그 안에 공사를 마쳐야 할 텐데. 그리 될 수 있기를 바랄뿐이었다.
해우소(解憂所)에서 근심을 해결하고 하산하였다.
박남용이 몽골 이야기를 하였다. 중국과 교류가 많았던 몽골이, 요즘 중국의 대 몽골외교에 대한 반감으로 우리 한국과 가까워져서 몽골의 모든 지역에 생긴 상가들이, ‘GS25'나 'CU' 등 한국식 상가들이 등장하고 거리를 달리는 교통수단들이 서울에서 퇴역한 중고 버스 택시들이 외부치장을 바꾸지 않고 ‘동대문’, ‘50번 버스’ 등을 달고 달리고 있어서, 마치 서울의 어느 거리에 와 있다는 느낌까지 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세계를 지배한 칭기크칸의 나라가 이제는 몰락하여 약소국이 되었고, 그런 나라가 우리 한국을 그렇게 가장 가까운 외교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하였다. 나도 그 생각에 동조하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후금을 새운 누루하치가 명(明)나라를 쳐들어가려고, 만리장성의 맨 동쪽에 있는 관문(關門)인 산해관(山海關)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돌아가다가 산해관에서 쏜 홍이포(紅夷砲)를 맞고 부상당하여 죽었고, 그 아들 홍타이시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명(明)나라를 치기 전에, 우리 조선을 먼저 제압하려고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켜, 1636년 12월 압록강을 건너 임경업장군이 지키고 있는 의주성을 건드리지 않고 지나친 다음, 정예의 기병들로만 바로 한양으로 쳐 들어가서 겨우 1주 일만에 강화도로 피신하려는 조정의 발걸음을 막아버리니까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다음, 전국의 군대를 남한산성으로 집결토록 하였지만, 2주후에 선발대 기병의 뒤를 받치고 온 홍타이시가 ‘홍이포 부대’를 이끌고 남한산성을 홍이포로 연달아 공격하니, 우리 보성출신 군기시 정 문제도(文濟道) 장군이 인조의 모든 신변을 보호하였지만 워낙 보급이 전무한 대다가 가공할만한 추위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남한상성에 웅거한지 36일 만에, 인조(仁祖)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역사 이래 최초의 항복문서를 바치고, 청태종(홍타이시) 앞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3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것)로 단군 이래 가장 치욕적인 굴욕을 당하였는데, 그렇게 항복하는 조건으로 왕자 2명(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그 권속들을 심양으로 인질로 보내야 하였다. 또 수만 명의 아녀자와 노인들을 인질로 잡아 가게 되었다.
인질로 잡혀 간 노부모를 환국시키기 위하여 우리나라 자손들은 수만금의 금은보화를 싸가지고 가서 노부모를 찾아와야 하였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통화가치는 8년 동안 청나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고 우리나라는 그 만큼 가난하고 피폐한 나라가 되어 갔다.
그렇게 8년이 지난 후에 홍타이시는 명나라까지 완전히 점령하고 난 후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한양으로 돌려보내었다. 못난 인조는 세자가 청을 뒷배로 자기를 왕위에서 밀어내고 아들이 왕이 될까 의심하여 아들을 독살하고, 며느리인 세자빈 강빈(姜嬪)까지 죄주어서 죽인 다음, 세손들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서 죽게 만든 인면수심의 못난이였다고 학자들이 연구한 바를 읽은 적이 있다.
인조가 죽고 둘째 왕자 봉림대군(효종)이 임금이 되었는데, 정신 못 차린 우리나라의 벼슬아치들은 북벌론(北伐論)이란 실속 없는 정책으로 더욱 나라가 병들어가게 되었다.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 졌을까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
몽골의 징기스칸이나 후금(後金)의 누루하치는 신속한 속도전으로, 목적하는 나라에서 아직 전열(戰列)이 갖추어지기 전에, 바람같이 쳐들어가서 벌같이 쏘아버리니 백전백승을 하였고, 중국이나 서양의 모든 국가들은 수년 동안의 부국강병책을 써서 이룩한 강력한 무력으로 공격하여 승리한 다음, 군인들에게 패전국에서 획득하게 된 모든 전리품들을 군인들이 차지하도록 허용하여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달콤한 승리의 기쁨을 보상해 주었던 반면, 몽골과 후금은 엄격한 군율로 약탈과 살육을 금지하여 전쟁승리의 기쁨을 준 다음 금은보화를 차지하지 않고 항복만 받은 다음, 그 나라의 지배계급들의 가족을 포로로 데리고 오게 되니까, 포로들의 안위 때문에 패전국이 보복을 하지 못하고 복종하도록 하였다는 연구발표를 접한 적이 있다. 우리가 오랑캐라고 멸시하였던 몽고족의 원(元)나라와 만주족의 청(淸)나라는 그렇게 세계를 제패하거나 강력한 제국(帝國)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산하다가 <의재미술관>에서 나오는 일행들과 합류하여 음악정자로 갔더니, 지난주에 통신대 1학기 종합시험을 마친 김상문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과자를 사가지고 와서 우리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금주의 노래는 전에 불렀던 <과꽃>과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어서 <비목>을 또 한 번 불러보았다. 우리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동안 장휘부도 와서 같이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