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한 송이, 물 한방울, 인생의 일분 일초가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폴 투르니에의 이런 표현은 인생에 대한 생생하고 감격적인 토로다.
그러나 “참으로 중대한 문제는 단 하나뿐,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던지는 이 화두는 음울하다.
귀한 생명을 받아 태어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여 애써 도달한 결과가
자살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라면 인생이란 코믹한 비극 아닐까?
그것은 세상을 부조리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의 세계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견해였다.
까뮈가 인생을 페스트라고 주장한 그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는 있지만 공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꿀처럼 달콤하기만 하다는 말이 아니며 또 인생이 용이하다는 말도 아니다.
비록 인간의 죄로 세상은 혼란스러워졌어도 세상은 진리를 배우는 학교요,
인생은 이 학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를 배워 영생에 이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기회며 의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한 마리의 개미가 사고를 당해 두 동강이가 났으면서도
그 동강난 상체를 끌고 갈 데까지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개미는 자살하지 않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 세상에서 보아왔던 인생 자세들은 대충 네 가지로 정리된다.
무의식적 자세, 우상숭배적 자세, 비관적 자세, 청지기적 자세.
시간의 움직임에 따라 아침이면 눈을 뜨고 낮이면 일을 하고 밤이면 잠을 자면서
생각 없이 관성의 법칙에 의해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무의식적 자세다.
기준 없고 목적 없는 이런 인생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 표류하는 배처럼 살아갈 것이다.
자기의 행복이나 영광에 목적을 두고 이기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상숭배적 자세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영광에 매몰된 그 사람의 눈에 삶과 신앙의 신비 따위는 가려질 것이다.
그런가 하면 쇼펜하우어나 에밀 시오랑처럼 인간의 삶에는 의미도 가치도 없기에
인생이란 자살로 끝낼 수도 있는 무의미하고 무익한 것이라고 믿는 것이 비관적 자세다.
불신앙에서 출발한 이런 우울한 인생관은 인생의 신비를 파묻어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상황이 어떻든 인간의 주장이 어떻든 삶이란 위로부터 주신 선물로서,
사람은 이 선물을 주신 이를 경외하며 섬기는 마음으로 인생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이 청지기적 자세다.
성경은 사람을 하나님의 청지기로 비유하는데(눅16:1-13),
청지기란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인생을
신실하게 관리해야 할 존재로서의 인간 정체성을 대변해주는 적절한 말이다.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에 대한 감사와,
또 그분이 인간의 삶에 부여하신 준엄한 의미를 무시해버릴 것이다.
인생을 무시한 자는 무시될 것이다. 인생을 모욕한 자는 모욕될 것이다.
인생은 한 병의 물과 같다. 이 한 병 물을 무의미하게 퍼부어버리지 말라.
믿음으로, 감사로, 경건함으로, 겸손함으로, 진지함으로 이 물을 관리하는 것이 인간다운 매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며 그분을 믿고 사랑하고
인생을 그분을 섬기는 기회로 받아들인 자는 마침내 영광에 도달할 것이다.
2023. 3. 14
이 호 혁
첫댓글 아멘! 청지기적 자세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일평생 주를 경외하며 섬기는 자세로 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