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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1월2일(토)맑음
새벽 5:45 진주에서 공항버스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탑승수속하다. 마음여행 일행과 합류하여 탑승하다. 기체 점검으로 출발이 2시간 지연되다. 기내에서 다큐를 감상하다. <두뇌게임-종교와 뇌>를 보면서 생각나는 게 있어 기록에 남긴다.
자기의 삶이 원하는 대로 굴러가지 않고 자기 손을 떠나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사람은 자기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보이지 않는 모종의 초자연적인 요소가 개입한다고 상상하면서 자신이 처한 현재의 시련을 바라보는 동시에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말하자면 통제할 수 없는 현실에 초인적인 인격신을 등장시켜 자기 삶을 통제해보려 하는 짓이다.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신적인 존재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신이 창조된다. 신에 대한 경외감을 자아내는 분위기로 성당이나 교회는 설계되고 건축된다. 소위 성스러운 공간에 들어서면 참관자의 시선은 하늘로 향하게 되고 스테인드글래스stained glass를 통해 들어오는 태양광선이 성령이 쏟아지는 듯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이것은 뇌의 한 부위를 자극하여 성스러운 감정을 유발시킨다. 신의 은총을 느끼는 감정은 뇌의 시냅스회로가 구성해낸 일종의 환상이다. 그러나 무익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유익한 플라시보효과를 나타낸다. 결국 실재하는 신이 인간에게 은총을 내려준다고 믿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믿어도 되겠지만, 사람은 마음의 힘에 의해 믿는 대로 경험한다는 사실을 받아드리는 것이 차라리 더 현실적일 것이다. 마음의 힘은 불선업을 정화시키고 선업을 증장시킬 수 있다. 마음의 힘이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어 운명을 바꾸고 세계를 바꾼다. 이것은 정신력의 기적이다. 불자들은 세상을 창조하여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는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지혜와 자비를 무한하게 개발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믿는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마음의 힘을 무한하게 개발하여 광대무변한 이타행을 행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 생뿐만 아니라 무수한 생 동안, 한 몸이 아니라 무량한 화신(아바타avatar)을 나투어 무한한 세계에 가득한 무수한 중생을 제도할 수 있지 않겠는가?
뉴델리 래디슨 호텔에 일박하다.
2019년11월4일(일)맑음
버스타고 뉴델리 공항, 잠무 행 비행기 타다. 잠무 카시미르는 테러 때문에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이다. 잠무 공항에 도착하였으나 공항 주차장에 버스를 주차할 수 없기에 1km정도 떨어진 곳까지 각자의 짐을 끌고 가서 버스에 싣고 다람살라로 향해 달리다. 중간에 점심을 먹고 다람살라에 도착하니 오후 7시쯤이다. 수리야 호텔에 투숙하다. 4층 405호. 십 수 년 전 와봤던 다람살라와는 많이 달라졌다. 보살님들과 함께 하우스 오브 티베트 카페에 들러 짜이와 난을 시켜먹다.
2019년11월5일(월)맑음
7시에 남걀사원으로 가다. 최 상석으로 안내 받아 나아가니 청전스님이 먼저 와 계셨다. 한국 목탁에 맞춰 염불하다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한다. 이어 9시에 달라이라마 존자 법문하시다.
<반야심경의 주석: 깊은 진실을 밝히는 태양>-1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는 과학이 놀랄 만큼 발전했다.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아직도 불교에서 가르치는 법이 인간생활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모든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가르친다. 다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전한다. 기독교 같은 경우에는 창조주가 세상을 창조했으니 사람들은 하나의 조물주의 사랑에서 창조된 피조물이기에 서로 사랑할 것이 요구된다. 말하자면 70억 인류가 한분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는 것이다. 인도에서도 고대로부터 이런 발상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상키야samkhya학파에서는 하나의 근원(purusa, 푸루샤, 原人)에서 만물이 발생했다고 가르쳤다. 이런 흐름이 자이나교까지 흘러갔다. 그런데 불교는 창조주 개념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자신이 자신의 스승이며, 자신을 구원한다.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 원인도 내가 만들고 결과도 내가 받는다. 자업자득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 나에게 해가 돌아오고, 타인에게 이익을 주면 내게도 이익이 돌아온다. 인도 전통에서 오온과 별도로 아트만atman이란 것이 있다고 믿었다. 영혼 같은 관념이 여기에 속한다. 불교에서는 오온의 속이나 바깥에 아트만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苦와 樂은 누가 받는가? 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아트만이 없다(無我 an-atman)는 말은 단지 常一主宰상일주재하는 我가 없다고 할 뿐이지, 인과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상키야학파에서도 인과를 인정했다. 모든 중생은 고를 싫어하고 낙을 좋아한다. 부처님의 법은 마음을 변화시키데 있다. 고에는 육체적 고통이 있는데 그건 고통스런 감각이다. 마음을 변화시키려면 근본번뇌와 隨煩惱수번뇌, 心王과 心所심소, 5遍行변행(인식작용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따라오는 다섯 가지 정신요소, 그래서 cetasika마음부수部首라고 한다)을 알아야한다. 이는 아비달마구사론(줄여서 구사론이라 한다)에 나오는 法數법수이다. 창조주 신앙에서는 기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지만, 불교에서는 마음을 변화시켜 자기구원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을 치밀하게 성찰하고 분석해야한다. 불교를 종교적인 차원이라기보다는 교육적인 차원으로 접근해보자.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고통의 예를 들면 심리적인 고통의 본질과 원인은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을 살펴야 한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나서 거름을 주고 습도를 조절해주며 씨앗이 발아하여 생장하도록 거기에 알맞은 여러 가지 조건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파종에서 기대되는 수확을 걷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마음에 대해서도 안락하고 선한 결과를 가져오게 만드는 구체적인 조건이 무엇인지 살펴봐야한다. 원인과 조건은 무엇인가? 그에 따라오는 결과는 어떠한가? 그 둘의 상관관계는 어떠한가? 이런 것을 살펴보는 것이 논리적 사유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내가 말했다고 해서 곧바로 받아드리지 말고, 들은 것의 의미를 분석해보고 사유해서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받아드리고 그렇지 않다면 따르지 말라.’ 많은 종교가 있지만 논리성과 합리성이라는 면에서 불교를 따라올 수 없다. 양자물리학에서도 소립자세계는 상호의존적인 사실을 밝혀냈는데 이를 연기緣起로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의 상대성이론은 아직 표면적인 개념만 구축했을 뿐이어서 주관과 객관의 관계에 대해서는 완전하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구사론에 심리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五根)이 다섯 가지 감각대상(五境)과 접촉하면 다섯 가지 식(五識)이 발생한다. 다섯 가지 식이 다섯 가지 감각(5受)를 일으키는 데 각각의 대상에 대해 고와 낙을 느끼면 동시에 好惡호오의 정서적 반응을 유발한다. 그에 따라 6식에서 집착이나 악의(혐오)가 따라붙게 된다. 깊은 수면상태에서는 5식은 잠들지만 6식은 활동한다. 애착이나 성냄이라는 심리현상은 6식의 활동이다. 번뇌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마음을 괴롭게 만드는 것, 마음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정의한다. 70억 인류는 모두 집착과 증오 때문에 괴로운 상황을 연출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음주나 유흥 등 다른 오락꺼리로 마음에 위안을 찾아보려하지만 고통은 외부 대상을 추구한다고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애착과 미워함, 좋아함과 싫어함이 줄어들 때야만 고통은 줄어든다. 대상을 향해 끌림이 일어나 애착이 생긴다면 부정관이나 무상관으로 다스려야 한다. 대상을 밀어내려는 경향이 발생하여 혐오나 성냄이 일어나면 자애관으로 다스려야 한다. 깊은 수면에서도 6식을 활동하기에 그냥 내버려둔다고 고통이 저절로 줄어들 수는 없는 법이다. 현재 물질문명이 이토록 찬란하게 발전하여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만 고통이 줄어들거나 소멸되지 않고 있다. 사랑과 자비라는 가르침은 인도에서 삼천년 전부터 내려오고 있다.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karuna연민과 metta자애가 있다면 나날이 평안할 것이다. 모든 사람을 친구로 대할 수 있다면 서로 만나 반가워하고 배려하며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을 향해 의심과 혐오와 분노를 투사하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도 사랑과 자비를 길러야한다. 사랑과 자비는 인류의 생존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인이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생기는 해로움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만큼 ‘나의 것’에 대한 애착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나’에 대한 애착이 심하면 타인에 대한 반감이 깊다는 것이다. 대상이 마음에 들면 대상에 대한 집착이 늘어난다. 애착이 심해지면 (대상에 관해 제 마음대로 만들어낸)왜곡된 분별망상이 일어난다. 모든 번뇌는 분별망상에서 비롯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관적인 감정 즉, 애착과 거부감을 갖고서 본다. 내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이런 관점은 사실 양자 물리학적이다. 주관과 객관의 상호의존적 관계에서 개별사물이 인지된다. 이런 연기적 관점은 부처님에 의해서 삼천년 전에 발견되어졌다. 대상에 대한 주관적 인식과정에서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조작된다. 그 무엇도 내게 보여 지는 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름과 소리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사람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맞다 고 주장하지만 자기에게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사념처에 가르치고 있듯 몸과 마음, 감각을 해체해서 바라보라. 그러면 몸과 감각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을 과거 현재 미래, 세 군데에서 찾아보지만 결코 찾아지지 않는다. 과거 현재 미래는 다만 개념일 뿐이다. 의식이 ‘나’라는 믿음은 타당하지 않다. 왜곡된 분별망상일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실 매우 심리학적이다. 부처님의 교설은 세 번에 걸쳐 설해졌다. 이를 初轉法輪초전법륜, 重轉法輪중전법륜, 三轉法輪삼전법륜이라 한다. 초전법륜은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설해진 것으로 사성제, 12연기 등이다. 이를 기록한 것이 빠알리 Pali경율론 3장이다. 현재 남방불교 테라바다Theravada로 전해진다. 초전법륜은 불멸 후 부파불교로 전개되었다. 이 학풍은 산타락시타Santarakshita 존자에 의해 티베트로 전해졌다. 산타락시타 존자에 의해 티베트로 전래된 율장은 설일체유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으로 전해진 율장과는 경미하게 다르다. 두 번째의 법륜은 영취산에서 설해졌는데, 반야와 공성에 대한 가르침으로 반야부 경전이 되었다. 아! (Ah)이 한 마디가 반야요, 空性공성이다. 긴 것으로는 10만송 반야경과 8천송 반야경이 있다. 가장 짧은 것으로 반야심경이 있다.
<반야심경에 대하여>
사람들은 내가 보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이 항상 실재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실재하지 않는 거라는 확신을 가져야한다. 성현은 공성을 알고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다. 보리심을 일으켜라. 불성을 깨닫겠다는 열의를 일으켜라. 그리고 이타적 동기를 개발하라. 보리심을 일으키는 善한 心所를 구족해야 한다. 반야바라밀을 완성하면 일체종지를 성취한다. 지혜와 방편을 동시에 닦으라. 복덕자량을 갖추면 色身색신을 얻게 되고, 지혜자량을 갖추게 되면 法身법신을 장엄하게 된다. 이타행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으킨 보리심을 실천해야한다. 공성을 사유하는 데서 지혜바라밀을 쌓인다.
불경이 인도 산스크리트에서 왔기 때문에 먼저 범어로 말한다.
바가와띠 쁘라즈냐 빠라미타흐리다야
bhagavati prajna paramita hrdaya
티베트말로 존귀한 여성분(世尊母)인 지혜의 완성의 핵심
반야에 대한 경론이 인도에서 티베트로 전해진 경은 100권이며, 논은 200권이 있다. 총300권이 반야에 대한 것이다. 이것을 7c 송첸감뽀 대왕 때 인도에서 산타락시타 존자가 가지고 왔다. 왕은 불경을 범어에서 티베트어로 번역하기 위한 기관을 세우고 강원도 세워서 학승을 길러냈다. 또 한편 중국에서 선불교도 유입되었다. <집경론>에서는 사성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논리적 사유방법을 중요하다. 왜 사성제가 나오게 되는지 논리적으로 이해해야하는 것이지, 그냥 부처님께서 설했으니까 그런 것으로 받아드리는 태도는 논리를 갖추지 못한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논리를 다루는 因明學인명학이 발달했고 논사들은 이를 계승해왔다. 그런 맥락에서 對論대론이 전승되어 왔다. 오늘날 티베트 강원에서 스님들이 대론을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다. 사키야판디파Sakya Pandita존자는 논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반면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불교에서는 논리학에 대한 교육이 없거나 미미했다. 그들에게서 논리적 사고가 부족하고 강원 교육과정에서 대론이 없다. 티베트불교에서는 겔룩Gelug파에 속한 강원에서대론이 제일 잘 전수되고 있다. 중관은 논리적으로 사유해야 할 것이다. 불교학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면 불교논리학, 불교심리학, 불교종교학이다. 구사론은 세친존자께서 저술하신 것이지만 수미산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이야기는 오늘날 천문학적 지식에 비추어보면 받아드리기 어렵다. 진리를 인식하는 방식에는 現量현량과 比量비량이 있다. 현량을 직관적 지식이고 비량은 추론적 지식이다. 수미산 이야기는 현량에 어긋난다. 논리적이 아니며 합리적이 아니다. 비록 성인이신 세친존자가 저술했으나 이런 이야기는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천문학적 지식으로는 인정하기 힘들다. 반야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이다. 이런 것을 중전법륜에서 설하셨다. 三轉法輪삼전법륜에서는 식(주관)의 공함과 금강승을 말씀하셨다. 흔히 초전법륜에서 터를 닦고 중전법륜에서 제단을 짓고 삼전법륜에서 제단을 완성하는 걸로 비유한다. 부처님께서 대각을 이루시고 나서 이런 독백을 하셨다. ‘내가 깨달은 법은 심오하고 분별이 없으며 무위법이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설한다하더라도 중생이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잠시 홀로 외딴 곳에서 머무르리라.’ 여기에서 심오하다는 법은 초전법륜에 해당하고, 분별이 없는 법은 중전법륜, 무위법은 삼전법륜에 해당한다. 족첸과 마하무드라는 마음의 본성자리를 지시하며, 普賢佛보현불의 경지이다.
관세음보살이 반야심경을 설하실 때 부처님은 法受법수삼매에 들어계셨다. 법수삼매란 미묘한(깊은 것) 것이 현현(나타나다)했다. 공하기 때문에 상호의존하며, 상호의존하기에 공하다는 삼매에 들어계셨다는 말이다.
<삼동 린포체Samdhong Rinpoche의 보충강의와 질의응답>
인류는 물질문명을 발전시켰으나 행복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사랑과 자비를 가르친다. 기독교에서는 유일신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걸 가르칩니다. 불교는 내가 고통을 원하지 않듯 타인도 고통을 원하지 않고, 내가 안락하기를 바라듯 타인도 안락하기를 바란다는 공감 위에서 행동하는 원칙을 가르칩니다. 초전법륜은 빠알리Pali어 경전으로 집대성 되었고, 중전법륜은 산스크리트로 이루어졌으며, 삼전법륜은 의식의 공함과 금강승을 설하셨습니다. 반야심경이 설해질 당시 부처님은 법수삼매에 들어계셨다는데 이는 보이는 것이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경지, 微妙顯現미묘현현 삼매에 들어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오온개공이란 ‘나’뿐만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요소까지도 모두 공하다는 사실입니다.
질문 1)수미산 설을 받아드리기 어렵다고 달라이라마 존자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이는 부처님이 一切智者일체지자이라는 것과 모순이 되는 게 아닙니까? 현대과학조차도 불완전한데 최근의 천문학적 지식에 비추어보아 수미산 설을 부정한다면 이게 논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습니까? 만약 수미산을 부정하게 되면 도리천을 비롯한 욕계6천 설도 부정해야하는데 이를 어떻게 해명하시겠습니까?
답변)과학자들이 지식을 추구하는 방식은 현량과 비량 두 가지입니다. 현량은 실험이나 관측을 통한 직관적 지식, 비량이란 실험이나 관측 자료를 분석하여 판단하는 지식입니다. 제가 1970년대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간디의 동지였던 비노바 바베Vinoba Bhave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학이란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어린애와 같습니다. 과학이 어느 정도 성숙해지면 불교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다.’ 나는 그때 그 말을 반박했습니다. ‘과학자들이 선정과 지혜를 통해 내면의 성찰로 나아갈 수준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라고. 데이비드 봄David Bohm과 오랫동안 粒子입자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는데 과학자가 하지 못하는 것(즉 과학자의 한계)은 수행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수미산을 눈(혹은 천문관측 망원경)으로 보아서 실재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만 따진다면 현재로서는 수미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사론에서 수미산을 말하는 것은 그 당시 설법을 듣는 대중의 인식정도 즉 중생의 業識업식에 맞춰서 방편으로 설한 점이 있기에 그 것을 고려해야합니다. 중생의 업에 따라 하늘의 해와 달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물이 수정이나 고름으로 느껴지는 경우(一水四見)도 있습니다. 구사론에 의하면 당시의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구사론에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당시의 과학수준을 반영하기에 시대적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구사론을 보면 세계창조설이 있는데 이는 중생의 업과 번뇌에 따라 다양한 세계가 건립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불경이나 논장에서 설해진 것도 맥락에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四依法사의법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의미를 완전히 드러낸 경을 의지할 것이며, 뜻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경을 의지하지 말라.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해졌다는 부처님의 설법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끔 부처님께서 질문에 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신 경우가 있는데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이 몰랐기 때문에 말씀을 하지 않을 걸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질문자의 의도와 의식수준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제일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써 침묵을 지키신 것입니다. 침묵은 지혜에서 나온 답이었던 것이죠.
<참고>
①비노바 바베(Vinoba Bhave, 1895~1982)는 인도의 비폭력 인권 운동가이다. 간디와 더불어 인도의 독립을 위해 활약했으며, 토지헌납 운동인 부단 운동을 통하여 사회개혁 운동을 일으킨 방랑 스승이다.
②데이비드 봄(David Joseph Bohm, 1917~1992)은 주로 영국에서 활동한 미국 태생의 물리학자이다.
질문 2)애착이 생기는 대상에 대해서 어떻게 상대해야 합니까?
답) 중관에 의하면 실재하는 것은 없다. 오직 소리와 이름뿐이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색수상행식 오온을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느냐? 없다. 또 오온을 헤쳐보아도 상일주재하는 실체가 있느냐? 없다. 따라서 오온에 고정불변하는 ‘나’가 없는데 어디에 나와 나의 것이 있는가? 내게 보여지는 것이 내 마음에 들면 좋다 하면서 끌어당기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싫다 하면서 밀쳐낸다. 대상 그 자체는 본래 아무 것도 아닌데, 대상을 대하는 나의 정서적 반응이 그 대상을 특별한 무엇으로 만든다. 즉 애착이 가는 대상으로, 아니면 혐오하는 대상으로.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대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측자에게 어떻게 관측되는가에 따라 나타날 뿐이라고 하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대하는 주관의 태도에 따라서 대상이 이렇게도 나타날 수 있고 저렇게도 나타날 수 있느니,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대상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알아차려서 평정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질문 3)심왕과 심소, 그 둘의 관계와 또 사마타와 비파사나 수행과 관련지어 설명해주십시오.
답)심왕은 6식을 말하며, 심소는 식 작용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요소를 말합니다. 구사론에서 이런 구별을 한 것은 선법과 불선법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선법과 불선법을 분별해서 알아야만 어떤 것을 삼가서 줄일 것이며, 어떤 것을 증장하여 개발할 것이지 알게 될 터이니 말입니다. 사마타와 비파사나는 시간관계상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4시간 동안 대상에 집중하여 편안하게 좌선할 정도가 되었다면 사마타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19년11월6일(화)맑음
09:00~10:30 달라이라마 강의
10:30~11:00 삼동 린포체 보충강의와 질의응답
오후에 규또Gyuto 사원을 참배하다. 겔룩파 소속 밀교사원인데 달라이라마 존자의 배려로 카르마파 존자가 여기에 거처를 마련하여 주하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제 와본다.
<반야심경의 주석: 깊은 진실을 밝히는 태양>-2
떼야따 옴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바하
대자비심으로 설해주신 고타마 붓다께 예경 올립니다.
불법이 동방으로 전해져서 많은 나라들이 불교화 되었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 라오스, 태국, 스리랑카, 러시아 등등 많은 나라에 불자들이 있습니다. 불교의 특징은 논리적이라는 겁니다. 자기의 내면을 변화시킴으로써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배움을 중시합니다. 서양의 기독교의 경우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습니다. 이와 달리 동양의 불교는 마음을 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평화를 얻습니다. 그렇기에 배운 것을 오래 동안 사유할 것이 요구됩니다. 배움은 속제(俗諦세상적 차원 진리)와 진제(眞諦절대적 차원의 진리)가 근간이 됩니다. 부처님이 우리들의 귀의처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귀의처는 法입니다. 그래서 법보가 제일 중요합니다. 승가Sangha는 법의 길을 함께 가는 도반들의 모임입니다. 3보 가운데 법보가 제일 소중합니다. 법이란 사성제 가운데 멸성제를 말합니다. 법을 알지 못하면 불교를 믿어도 큰 효험이 없습니다. 멸성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아를 알아야 합니다. 무상, 고, 공, 무아를 이해해야 합니다. 깨달음(멸성제)으로 가는 길이 도성제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들어서 배우고, 배운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배움과 사유가 없다면 불교를 한다고 해도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인도 날란다 대학에서는 무아 교설에 대하여 다양한 학파의 견해와 철학을 연찬해왔습니다. 부처님의 교리를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면서 이를 논리적으로 관철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식학파, 중관학파가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반야심경에 대해 계속 말씀 드리겠습니다. 초전법륜에서 사성제가 3전12행상으로 설해졌습니다. 그리고 戒계sila와 律율vinaya이 설해졌습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이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하며, 어떻게 생활하는가를 정해놓으셨습니다. 비구들은 매일 아침 탁발을 나가야 합니다. 태국과 미얀마 스님들은 매일 아침 탁발을 나갑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정하신 율을 지키는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그들은 대승불교도에게 선배가 되십니다. Nalanda날란다 대학의 전통은 티베트로 전승되었습니다. 날란다 전통은 논리적 사유를 중시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말한 것을 논리적으로 따져봐서 합리적이라고 수긍이 될 때 받아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삼전법륜에서 설하신 解深密經해심밀경에 따르면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 원성실성은 자성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이것이 소위 3무자성설이라는 것으로 唯識유식이라 해도 결국 空性공성으로 돌아감을 설하고 있습니다). 한편 유식학파에서는 外境외경(인식된 대상)은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투사해낸 것이라고 합니다. 이 논리를 자기 마음 다스리는 데 적용한다면 애욕이나 성냄을 줄일 수 있는 좋은 방편이 됩니다. 중관학파에서는 외경은 마음이 비추어낸 바이나, 마음 그 자체도 홀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고 합니다. 외경(인식대상)과 마음(인식주관)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을 뿐 외경에도 자성이 없으며 마음에도 자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상과 마음은 둘 다 空합니다. 그런데 모든 번뇌는 아집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이는 양자물리학의 관점과 흡사합니다. 관측할 대상이 관찰자가 관측하는 방식에 따라 나타날 뿐이지, 그 대상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五蘊皆空오온개공’ 부분에 대해서:
‘오온조차도 비어있다’ 라고 해석해야합니다. ‘,,,조차도’라는 문구는 산스크리트本에 있고 따라서 티베트本에도 있는데 중국 한자로 번역되면서 그 문구가 불분명해졌습니다. 그런 영향은 한국과 일본에까지 미쳤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오온 역시도 공하다고 알아야 합니다. 법을 배울 때 이처럼 원문에 맞는지 알아봐야 합니다. ‘비어있다’라는 말은 자성이 없다, 無自性무자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사물이든지 변하지 않는 고유의 성질 즉 自性이 있어야한다고 믿고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대상과 의식은 상호의존적으로 생멸할 뿐이어서, 대상은 내게 보이는 것처럼 있는 건 아닙니다. 대상은 단지 내게 그렇게 보일 뿐 고정불변한 실체로 있는 건 아닙니다. 대상은 관점에 따라서, 마음에 따라서 나타나는 의존적 발생입니다. 중관에서는 대상은 없다, 다만 소리와 이름일 뿐이라고 합니다. 관점에도 자성이 없고, 대상에도 자성이 없어, 둘 다 공하다고 합니다. 상호의존(연기)한다고 하면 대상과 관점 양쪽이 함께 실체가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소리와 이름일 뿐 실체는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내게 보이는 대로, 내게 생각되어지는 대로 있지는 않습니다. 인식되는 대상뿐만 아니라 관찰자 역시 실체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보이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가? 언제나 변치 않고 그대로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다만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내게 보여지는 대로 실체가 있다고 믿고 있었구나! 라고 깜짝 놀라야합니다. 오온조차도 자성이 비었다. 모든 법은 자성이 없다고 보라는 취지의 말씀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부분에 대해서;
形色형색, 즉 모양과 색깔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는 의존적 발생(연기)이기에 실체가 없다, 본질이 없다, 그래서 공성이라 합니다. 그러나 전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양과 빛깔이 조건과 원인에 따라 나타납니다. 바깥대상(外境)과 의식주관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상호의존적으로 작용해서 色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다만 이름일 뿐 실체가 없습니다. 상호의존적 발생이기에 공(비었다, 빈 것)이라 합니다. 연기 즉 공이며, 공 즉 연기입니다. (‘의존 발생한 것이기에 비었다고 하며, 비었기에 의존 발생한다.’라고 우리말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내게 보여지는 대로, 내게 생각되어지는 대로 있지 않습니다. 원인과 조건에 따라 존재하는 것처럼 잠시 나타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지금 이대로 언제까지나 변치 않고 있을 거라 여기는 사고방식은 왜곡된 분별망상입니다. 연기와 공성을 사유하면 분별망상이 깨어지게 됩니다. 말하자면 고정관념이 타파되는 것입니다. 아집과 무명도 흩어집니다.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관측자의 관점에 따라서 소립자의 양자상태가 나타난다고 합니다(소립자의 상태와 운동이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로 관측될지는 단지 확률로만 알려질 뿐이라는 ‘불확정성 원리’가 현대양자물리학의 관점입니다). 이런 과학적 지식이 마음을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모든 법은 진제와 속제로 귀결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에 대하여:
속제와 진제가 하나의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세속적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멸하기에 실체가 없으므로, 무자성이며 공입니다. 연기하기에 공입니다. 속제는 진제로 돌아갑니다. 무자성이며 공하기에 어떤 현상이라도 조건과 원인만 맞으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비어 있기에(空이므로) 연기할 수 있습니다. 진제가 속제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속제가 진제로 돌아가고, 진제가 속제로 돌아가니,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12연기와 4성제의 관점도 결국 ‘내가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나’와 ‘나’를 만들어내는 오온의 각 요소는 자성이 없습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자애와 연민을 기르십시오. 그러나 화를 근원적으로 없애려면 왜곡된 분별망상을 소멸시켜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공성과 연기가 둘이 아닌 것을 사유해야하는 것입니다.
<떼야따 옴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바하>에 대하여:
가자, 가자, 피안으로 나아가자, 가서 완전히 머무르자
공성을 사유하고 수행하여 깨달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뭇 생명들과 함께 부처를 이루게 하겠다는 원대한 마음, 성스런 열의(이를 일러 보리심이라 한다)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면 資糧道자량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공성에 대한 사유가 지속됨으로써 사마타(선정) 가운데 공성을 사유하게 되면 이 사람은 加行道가행도에 들어간 것입니다. 4가지 수행단계(煖位난위→頂位정위→忍位인위→世第一法세제일법)를 지나 공성을 완전히 보게 될 때 見道견도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가떼 가떼-가자, 가자’ 라고 한 것입니다. ‘빠라상가떼, 피안으로 나아가자’는 修道수도를 말합니다. 공성에 대한 확신을 얻은 후 無始무시이래로 내려오는 習氣습기를 제거하여 所知障소지장이 제거됨을 말함입니다. 마침내 성불의 지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보디 스바하’입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바하’는 마음이 정화되는 과정과 단계를 보여줍니다. 공성을 닦는 길을 말하겠습니다. 먼저 스승으로부터 공성에 대한 가르침을 듣습니다. 들은 것을 사유합니다. 사유한 것을 실천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성불의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도 걸쳐 영원한 길을 가게 됩니다. 성관자재보살께서 반야심경을 설하실 때 부처님은 미묘현현이라는 법수삼매에 들어계셨는데, 이제 그 삼매에서 나오십니다. 그리고는 ‘옳도다, 옳도다!’라면서 성관자재보살을 칭찬하십니다. 반야심경을 독송하면 가피를 받는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반야심경을 공부하여 이해하는 것이 내면의 毒독과 착각을 제거하는 효능이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수행의 핵심이 되는 세 가지 법/三種要道삼종요도>에 대하여:
14세기 티베트에 렌다와Rwendawa(1349~1412)라는 스승은 가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비었다, 비었다’고 하면서 空性공성을 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보여지는 대로 ‘空 空 空’했다고 합니다. 렌다와 존자와 쫑카빠 존자 두 분이 있기 때문에 티베트불교는 융성하리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렌다와는 쫑카빠의 스승입니다. 쫑카빠는 자기 수행에도 열심이셨지만 다른 수행자들을 위한 수행처를 짓는 데도 열심이셨습니다. 그분은 일어나자마자 새벽부터 경과 논을 외우셨습니다. 심지어 누가 더 많이 외우는지, 누가 짧은 시간에 많은 경론을 외우는지 경쟁을 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일곱 살 때 출가하였고 고향인 암도Amdo에서 라싸Lhasa로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분은 어릴 때부터 문수보살을 친견하기도 해서 인연이 깊었습니다. 스승이셨던 우마빠Umapa(쫀두 셍게, 14세기 중관학자)는 문수보살을 어느 때라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쫑카빠 스님도 검은 얼굴의 문수보살을 만나서 불교에 대한 의문을 물어서 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공성에 대해서 물었는데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고 하자 문수보살은 복덕과 지혜가 쌓이면 공성이 자연히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쫑카빠는 참회와 복덕자량을 쌓기에 열심이셨습니다. 중년에 몇 몇 제자들을 데리고 깊은 산속 무문관으로 들어가 수행에 몰두하셨습니다. 제자 가운데 누군가가 묻기를 스승께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자기 수행에 몰두하시면 세상의 불법은 쇠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스님이 답하시길 ‘내 수행이 불법에 도움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안다.’라고 하셨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참회와 정진을 하셨습니다. 만달라 공양을 올리는 수행을 너무 열심히 하셔서 팔뚝에 피가 흐르고 살이 깎여 나갔습니다. 공성이야말로 부처님의 의중입니다. 노력과 마음과 열의가 없으면 공성을 체득하기는 어렵습니다. 쫑카빠 대사가 공부하던 중에 가사를 수하신 붓다빨리따Buddhapalita(佛護, 470~540)논사가 가사를 수하시고 친히 논서를 들고 대사의 머리에 대면서 축복을 받는 瑞祥서상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라고 나서 붓다빨리따(보통 佛護불호 논사라고 한다)가 저술한 주석서 가운데 18장을 보는 찰나에 공성을 완전히 깨달았습니다.
대사는 공성을 쉽게 깨친 게 아닙니다. 피나는 정진으로 마침내 공성을 완전히 보신 것입니다. 그 후에도 엄청난 수행의 열의를 견지하시며 늘 정진하셨습니다. 공성을 완전히 깨달으신 후 금강승 수행으로 관심을 돌리셨는데, 밀교에서 말하는 脈맥(nadi), 氣기(prana), 精정(bindu)을 몸소 수행하신 다음 공성과 연기의 관점으로 금강승 수행에 대한 주석서를 집필하셨습니다. 그분의 저서로는 18권이 있습니다. 부뙨(부뙨 린첸둡Buston Rinchengrub, 1290~1364, <티베트불교사>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대사가 지은 25권을 제가 모두 읽었는데 쫑카빠 대사의 저서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부뙨 대사의 것은 포괄적이긴 하나 깊이에 있어 쫑카빠 대사에 못 미칩니다.
쫑카빠 대사가 제자인 차코 아왕닥빠에게 편지를 보내 수행에 대한 경책을 합니다. 그것이 <수행의 핵심이 되는 세 가지 법/三種要道삼종요도>입니다.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여 살지 말라. 이생만을 위해서 살지 말라. 출리심을 개발하라. 지금 삶이 그런대로 안락하다고 거기에 빠져 살지 말라. 인간의 몸을 받아 나온 것은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크나큰 기회입니다. 인간의 몸을 타고나야만 공성을 사유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생만 탐닉하다가는 다음 생에 인간의 몸을 잃어버릴 지도 모릅니다. 무상, 고, 공, 무아의 가르침을 배우십시오. 고성제를 아십시오. 윤회는 괴로움입니다. 모든 현상은 무자성이어서 빈 것(空性)입니다. 보통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는 8가지 유가구족有暇具足과 10가지 원만圓滿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처럼 인간으로 태어나는 원인을 짓기도 힘들지만 인간으로 태어나는 결과를 얻기도 어렵다는 말입니다. 현재 지구상 인구가 70억이나 되지만 그 가운데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죽음에 다다라서는 일생동안 이루었던 부귀영화는 모두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지은 선업만이 도움이 될 뿐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내가 닦은 선업과 수행력만이 도움이 됩니다. 이생에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윤회하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바라지 마십시오. 오직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세요. 출리심을 일으키세요. 거친 생로병사의 물살에 휩쓸리고 벗어나기 어려운 업의 족쇄에 단단히 묶이어 나라는 생각의 덫에 걸리어 캄캄한 무명의 어둠이 우리의 시야를 가립니다. 꿈속에서조차도 ‘나’라는 생각이 끊어지지 않아,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갑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실을 먼저 깨우친 불자들은 모든 중생을 향해 연민과 자애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일체중생을 윤회의 고통에서 건져내어 완전한 부처의 경지로 이끌고 말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키십시오. 일단 보리심을 일으켰다면 연기를 이해하고 나서 공성을 깨닫도록 노력하십시오. 원인과 조건에 의존해서 발생했기에 본래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여우의 무리 가운데 있는 사자처럼 특출하십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는 ‘나’가 있다는 전제하에 무엇인가를 가르치지만, 오직 부처님만이 ‘나 없음, 無我무아’를 가르칩니다.
1960대년쯤에 제가 쫑카빠 대사가 지으신 입중론의 주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나’라는 것은 오온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오온을 ‘나’라고 이름 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라는 구절에서 제 가슴이 뻥 뚫리면서 뭔가 열기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라는 것은 없구나.’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더 이상 ‘나’라는 것은 없구나! 오온을 집착하는 한 아집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중론의 구절에서 人無我인무아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오온과 별개로 있는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공성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오온의 주체가 없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그때부터 공성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정진하고 있습니다. 경과 논은 자신의 체험을 비쳐주는 거울이 됩니다. 의존해서 발생하는 연기를 보는 것과 공성과 각각 다르게 보인다면 아직 공성을 완전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보여지는 대로 존재하는 것(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이 합쳐서 생겨난, 즉 緣起연기된 대상세계)은 없다(空性, 빈 것이라는)는 확신이 들어야 <견해의 분석이 끝났다>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보여지는 것이 없다(원인과 조건이 모여 잠시 있는 것처럼 보이나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것으로 常見상견을 여의고 (그러나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소리와 이름이 부여되어 대상으로 인식되기에 斷見단견을 여읩니다. 상견과 단견이라는 두 견해 현혹되지 않으면 공성을 깊이 꽤 뚫어보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을 살아갈 때 시비분별, 선악장단, 호오미추, 상견과 단견이 끊어질 것입니다. 공성을 본다면 견해의 장애 즉 所知障소지장이 완전히 끊어집니다.
차코에 지방에서 정진하는 아왕닥빠에게 마지막으로 이야기 합니다.
아들아, 수행의 핵심이 되는 세 가지을 이해했다면 고요한 곳에 머물며 끊임없이 정진하라. 아들딸이라 한 것을 보면 얼마나 아끼던 제자였던지 알 수 있습니다. 보리심을 발한 여러분들도 모두 쫑카빠 대사의 아들딸이니 부지런히 수행하십시오.
<참고>8유가有暇와 10원만圓滿을 말한다.
8가지 여유라는 뜻으로 ①지옥에 나지 않음 ②축생으로 태어나지 않음 ③아귀로 태어나지 않음 ④장수천長壽天에 나지 않음 ⑤변방에 나지 않음 ⑥불구자가 아님 ⑦사견을 지니지 않음 ⑧여래 없는 때에 태어나지 않음.
10가지 구족한 10원만은 ①인간의 몸을 받는 것 ②중심지(법이 있는 곳)에 난 것 ③몸이 온전한 것 ④전도업顚倒業(5무간죄를 짓지 않는 것) ⑤불법을 믿는 것 ⑥부처님이 계신 것 ⑦정법을 설하시는 것 ⑧가르침을 펴기 위해 머무시는 것 ⑨법의 수레를 굴리시는 것 ⑩법을 수행할 조건이 갖춰진 것 등을 말한다.
<참고>월칭논사:月稱월칭/찬드라키르티Chandrakirti, 600~650년경에 활동한 프라상기카/Prasangika/귀류논증학파의 대표적인 불교학자, 중론의 주석서인 입중론/入中論/ Madhyamakāvatāra과 쁘라산나빠다Prasanapada明句論의 저술로 유명하다.
<삼동 린포체Samdhong Rinpoche의 보충강의와 질의응답>
오늘 복습할 주 내용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입니다.
일체는 (다만 마음에 그처럼 나타난 걸로)보이는 것일 뿐이라는 확신으로 ‘항상 있다’는 견해(常見)를 극복하고, (그러나 불변하는 고유의 실체가 없다는)공성으로 ‘아무 것도 없다’는 견해(斷見)을 극복합니다. 공성이 원인과 결과로 나타나는 이치를 이해한다면 상견과 단견이라는 두 견해에 휩쓸리지 않을 것입니다. ‘형색이 공(色卽是空)’이라고 하는 것은 형색은 상호의존하여 발생하기 때문에 자체성이 없어 공이라 말하는 겁니다. 공성과 현상이 다르게 보이지만 본질을 하나입니다. 관점에 따라 둘로 보일 따름입니다.
<떼야따 옴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바하>에서 ‘가떼 가떼’는 자량도에서 가행도로 올라가는 차제를 의미합니다. 공부해가는 세 가지 단계 즉 聞思修문사수-스승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들을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있습니다. 법문 들음과 그것을 깊이 생각함(문사聞思)은 자량도에 해당하고, 공성을 사유해서 추론적 이해가 이루어졌을 때는 가행도에 해당합니다. 그다음으로 소지장(所知障, 앎의 장애)이 제거되면 견도를 이룬 것이고 번뇌장(煩惱障, 정서적 장애)이 완전히 제거되었을 때 수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참고> 수행해나가는 다섯 단계 즉 五道오도 혹은 五位오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資糧道자량도→加行道가행도→見道견도→修道수도→無學道무학도
보리도등론(아티샤Atisha존자가 저술하신 불교교과서, 이것을 보충확장한 것이 쫑카빠 대사의 보리도차제광론 즉 람림Lamrim이라는 것이다)에 의하면 보살은 세 단계를 밟아서 서서히 점차로 상승해갑니다. 즉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가 그것입니다. 보살은 출리심, 보리심, 공성에 대한 견해, 이 세 가지를 필수불가결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복덕이 부족하면 소지장이 제거되지 않아 공성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6바라밀을 긴 세월동안 쌓는 것입니다. 공성에 대한 이해는 연기에 대한 이해와 함께 갑니다. 하나를 이해하면 다른 것도 자연히 이해하게 됩니다.
어제 질문에 대해 제가 답을 것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어제 어떤 스님이 수미산이 없다고 한다면 도리천(33천이라고도 한다)도 부정해야 하고, 야마천, 도솔천, 나아가서 욕계6천도 부정해야 한다는 모순에 빠질 것이란 말씀은 논리적으로 지당하긴 합니다. 그러나 수미산이란 것이 있건 없건 이런 문제는 진지한 수행자의 관심사가 되지 못합니다.
질문-1)양자물리학과 공성이 같은가, 다른가? 둘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양자물리학으로 깨달을 수 있다면 불교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답)저는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퀀텀 피직스)에 대해서 자세히 모릅니다. 다만 양자물리학을 알게 되면 공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걸 다만 말씀드릴 뿐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 무엇인가 관측되기 위해서는 관측자의 의식이 개입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이것이 ‘관측의 문제’라는 양자물리의 딜레마이다). 이것은 관찰자의 의식과 관찰대상이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양자물리 실험에서 유식에서 말하는 소위 唯心所造유심소조(마음으로 말미암아 대상이 나타난다)와 비슷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즉 외경과 의식이 연기적 관계라는 것을 양자물리학에서 밝혀준 셈입니다. 의식 없이는 대상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관측에 따라 외경이 잠시 그런 것처럼 나타날 뿐입니다. 과학자들이 실행하는 양자물리 실험에 대하여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관찰자의 의식은 어떻게 관찰할 수 있습니까? 왜 관찰자의 의식은 관찰하지 않습니까? 바라보는 자(관찰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불자들이 과학자들의 작업에서 본받아야 할 것은 그들의 분석적 사유방법과 가치중립적인 태도입니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창조주를 믿는 신앙들은 위기(과학이 물질의 궁극과 우주의 끝까지 파헤쳤는데도 창조주인 신의 존재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구태의연한 기존의 신앙은 회의에 휩싸이면서 파탄을 맞게 되었다)를 맞이해서 쇠퇴하는 추세인데, 불교는 오히려 그 논리성과 합리성 덕분에 부흥의 계기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양자물리학이나 상대론적 우주론은 불교의 진리성을 오히려 재인식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갈 수 있는 종교는 불교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관점에 따라서 대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양자물리적 관점을 자기의 마음에 적용시켜본다면 애착이나 성냄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과학자가 양자물리학으로 깨달을 수는 없겠지만 그가 만약 자기 마음의 공성을 볼 수 있게끔 수행을 한다면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달라이라마 존자가 물리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이유는 과학과 불교를 서로 소통시킴으로써 마음의 행복을 가져오고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고자 함입니다.
질문-2)반야심경 말미에 나오는 ‘시 무상주, 시무등등주...’에서 무등등주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답)‘비할 데 없는, 견줄 바 없는 만트라’라는 의미에 대한 다양한 해설이 있겠지만 저는 잘 모릅니다. 속제에서 보는 이해방식과 진제에서 보는 이해방식이 서로 다를 것이라고 짐작해봅니다. 그러나 윤회와 열반, 중생과 부처는 공성의 자리에서 본다면 一味일미, 한 맛입니다. 그러니 편견이나 차별을 두지 마십시오.
질문-3)공성을 깨닫기 전까지는 6식,7식,8식을 수습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공성을 깨닫고 난 뒤에는 6,7,8식이 어떻게 변합니까?
답)6,7,8식을 인정하는 학파는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입니다. 6식까지는 모든 학파가 인정하는 반면 7, 8식은 인정하는 학파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학파도 있습니다. 귀류논증학파에서는 7식과 8식을 도입하지 않습니다. 유식학파에서는 번뇌가 쌓이는 장소로서 8식을 인정합니다. 6식, 7식, 8식이라는 개념은 마음을 설명하는 수단일 뿐 공성의 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6,7,8식이 다른 것처럼 보인다 해도 무아의 자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人無我인무아, 法無我법무아라 해도 공성의 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6,7,8식이라는 구별은 설치된 방편일 뿐 공성의 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마감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11월6일(수)맑음
09:00~10:00 달라이라마 강의
10:00~10:30 보살계 수계
10:30~11:00 기념촬영
2019년11월7일(목)흐림
아침에 다람살라를 뒤로 하고 암리짜르Amritsar를 향해 출발하다. 다람살라의 배경이 되어주는 다울라기리Dhaulagiri 설산은 구름을 두르고 떠나보내는 길손을 아쉬워하며 고개를 숙인다. 긴 시간을 달려 암리짜르 홀리데이인 호텔에 투숙하다. 오후에 시크Sikh교 성지 황금사원을 순례하다. 폭우가 쏟아지는 호숫가를 맨발로 걷다.
<달라이라마 강의-3>
대자비심으로 정법을 설해주신 고타마 붓다께 귀의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남방불교스님, 대승불교스님, 그리고 사부대중이 함께 모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고타마 붓다를 따릅니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불교를 믿습니다. 저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라는 구분이 차별을 암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이런 말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빠알리Pali어권 불교와 산스크리트Sanskrit어권 불교라고 하는 것이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가 대개 사랑과 자비를 가르칩니다. 또한 인욕과 절제와 화합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공통된 가치와 미덕은 70억 인류가 평화스럽게 살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신 후에 불교 교단 안에서 견해의 차이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자신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마음과 말과 행동을 변화시킴으로써 운명을 바꿀 수 있으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탈을 이룰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가르침은 당연히 공유하고 있습니다. 나는 길을 제시할 뿐, 가고 안 가고는 너희에게 달려있다. 해탈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이 번뇌와 업이 끊어져 없어지면 자연스레 오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마음에서 번뇌가 끊어지는 것이 해탈입니다. 번뇌장이 제거된 것입니다. 소지장 즉, 번뇌의 習氣습기까지 완전히 제거되면 일체지의 지위에 오릅니다.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조건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과거의 부처님도 현재의 부처님도 미래의 부처님도 모두 중생에 대한 자비심과 연민심으로 말미암아 성불하셨습니다. 중생에게 선심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의 본성 자리는 청정합니다. 부처의 자리가 법성이며 마음의 본래 청정함입니다. 모든 사람은 불성이 있습니다. 다만 무시이래로 번뇌가 그 자리를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하게 만들고 있는 이유입니다. 성불의 씨앗을 불성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성불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베트남과 내몽고에서 오신 불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의 소수민족인 칼미크(Republic of Kalmykia, 칼미키야 공화국)와 부리아트(Buriat, Buryat, 러시아 연방)족 불자들도 만났습니다. 그 지방은 아주 오래전부터 불교를 믿었던 곳입니다. 동방의 태양이 떠올라 세상을 비추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방의 태양이란 불교를 말합니다. 동방의 태양이 햇빛을 어떻게 비출지는 불자들에게 달려있습니다. 단지 믿음만으로는 안 됩니다. 논리적 사유와 수행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과거에 일찍이 불교가 전래되었던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지금 더 이상 불교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믿음만으로 법이 유지 되지는 않습니다. 불자들 각자가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한 것을 사유해야합니다. 그래야 법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제가 과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논리적 사유를 통해서 얻은 확신은 그 무게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과학자들이 성취한 지식을 취하여 불교에 대한 이해를 업데이트하고, 그 대신 불교의 심리학적인 부분을 과학자들에게 전해주면 됩니다. 불자들이여, 공부하라. 사유하라. 이 나이에 저 자신도 매일 경전을 보고 사유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예불만 하지 말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스승으로부터 들은 법문을 사유하고 수행해야합니다. 수행한다고 하지만 사유가 결여되면 효험이 없습니다. 사유한다고 하더라도 들은 것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달라이라마 역시 늙은 노승이지만 공부하고 사유하며 수행합니다. 오늘이 이번 법회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나는 여러분 한분 한분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가슴에 새겨 간직해주시길 바랍니다. 부처님은 일체중생의 해탈을 지향합니다. 우리는 부처가 되는 걸 목표로 삼아야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남방불교와 대승불교가 한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감싸 안는 진리는 날란다 대학에서 전승해온 것입니다. 날란다 대학에서는 매우 전문적으로 활발하게 불교교학을 연찬했습니다. 자비심, 보리심, 공사상 이 세 가지가 3종요도 즉, 세 가지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우리 모두 보리심을 내도록 합시다. 쫑카빠 대사가 말씀하시되 ‘보리심을 발한 사람들은 매우 용감한 분이다. 중생을 위하는 가장 큰 마음을 내신 분들이기에.’ 보리심은 부처를 이루는 핵심이 됩니다. 성불하는 핵심 되는 열쇠가 바로 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이 없으면 성불할 수 없습니다.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보리심을 일으키십시오.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은 사람은 마음에 번뇌의 습기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일하거나 앉거나 잠자거나 간에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들 보리심을 일으켰다는 그 이유만으로 복이 계속 늘어납니다. 보리심을 일으킨 분은 언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복이 증장되고 있습니다. 매일 선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고요한 경지에 머물 것이며 그래서 몸이 피곤하지 않을 겁니다. 보리심은 최고의 선심입니다. 보리심을 말을 타고 나아가는 행자는 피로하지 않아 쉬지 않고 달립니다. 모든 중생을 행복의 경지로 이끌기 위해서 힘차게 나아갑니다. 그는 중생을 위하여 이생도 내생도 바칩니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과 번뇌가 다할 때까지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겠습니다.’ 라고 맹세합니다. 그러면 천상계의 천신들이 모두 환희심을 내어 이 사람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일시적인 평안이나 궁극적인 평안을 얻기 위해서 보리심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생은 나의 손님이며, 내가 보살펴야할 어머니입니다. 중생을 의지하지 않고는 부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중생을 외면하고는 부처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중생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부처의 지위에 이를 수 없습니다. 중생을 아끼는 만큼 성불에 가까워집니다.
지금부터 보살계를 설하겠습니다. 보살계를 줄 수 있는 스승은 보리심을 발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모두 발보리심 하도록 기도문을 합송합시다.
<원보리심>
중생을 해탈코자 하는 마음으로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제가 항상 귀의합니다,
지혜와 자비심으로 정진하며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 앞에서
원만한 보리심 일으킵니다.
<원, 행보리심 일으키기>
삼보에 귀의합니다.
모든 악업을 참회합니다.
중생의 선업에 수희찬탄 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제가 귀의합니다.
자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최상의 보리심을 발하여
모든 중생을 나의 귀빈으로 여겨서
최상의 보살행을 하겠습니다.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부처를 이루겠습니다.
<행보리심>
스승님과 부처님과 보살님들이시여
저를 굽어 살펴 주소서.
이와 같이 과거세의 여래께서
보리심을 발하시고
보살이 배워야 할 것을 차례로 닦았듯이
저 또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보리심을 발하고 보살의 배움을
차체로 따라 배우겠습니다.
보살계에는 18근본 계와 48소소계가 있습니다. 핵심은 이기심을 내려놓고 중생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공성을 설한 법>은 받아드릴 준비가 된 수행자를 위한 수승한 가르침인데 금강승(Vajrayana바즈라야나, 소위 密敎밀교라 지칭되는 불교)이 거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次第차제(하사도, 중사도, 상사도를 차례로 설한다)를 설하는 법>은 초보에서부터 출발하여 점차로 성숙시켜 성불로 가는 가르침이기에 대중적입니다. 금강승에 입문한 수행자는 자신을 만달라의 主尊주존(이담yidam이라 지칭한다)이나 本尊본존으로 관상하며 卽身成佛즉신성불을 수행합니다. 대중적 방식의 설법을 顯敎현교라 하며, 준비된 소수를 위한 설법을 밀교(金剛乘금강승)라 합니다. 한국 역시 과거에 밀교가 전래되었던 자취가 남아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사찰에서 요령과 금강저를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티베트로부터 밀교가 전해졌다는 증거입니다. 티베트에서는 한때 현교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밀교가 극성인 시대가 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불교가 타락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현교에 대한 이해 없이는 밀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금강승의 본뜻은 공성에 대한 철저한 이해로부터 시작합니다. 모든 금강승 수행은 공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금강승을 수행할 때 이런 만트라를 외웁니다.
옴 소바와 슛다 사르와 담마 소바와 슛도 함
Om svabhava suddha sarva dharma svabhava suddho ham.
<참고> 산스크리트로 된 만트라의 뜻은 ‘옴! 본성이 청정한 일체법이여, 내 자성도 청정하여지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천수경 독송 말미에 이어서 외운다. 정삼업진언(몸, 입, 마음의 업을 맑혀주는 진언),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세 번)
모든 법이 공해진 본연의 자리에서 본존이 나툰다고 觀想관상(visualize)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툰 본존은 자비스럽게 보이는 평화존과 무섭게 보이는 분노존의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공성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합니다. 저 달라이 라마는 용수보살(나가르주나)이 공성을 가르치신 중관과 세친보살이 가르치신 차제라는 이 가지의 학풍을 이어오신 17분 논사들을 칭송하는 예경문을 지었습니다.
*이하 중요하지 않은 소소한 내용은 줄입니다. 이어서 단체 기념사진 촬영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법회내용은 유투브 <달라이라마 한국어>를 치면 동영상으로 나오니까 참고하십시오.
<참고>
『중론』에 나오는 처음 문구로서 유명한 歸敬偈귀경게는 대담하게 八不팔불을 선언한다. 팔불이란 사물의 <생기>, <소멸>, <단절>, <영속>, <동일성>, <다양성>, <도래>, <퇴거>를 부정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세계의 8가지 극단(생, 멸, 단, 상, 일, 이, 거, 래)을 부정하면 中道중도가 드러나기에 8不 중도라 한다. 이것을 한문으로 <不生不滅, 不斷不常, 不去不來, 不一不二>으로 알려져 있으며 不이 8개 들어있다 해서 八不팔불 中道중도라 한다. 사물은 결코 어느 곳에서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나가르주나(龍樹용수 존자, 중론을 지으신 분)의 확신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결코 어느 곳에 있어서도 사물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것으로부터, 그 양쪽으로부터, 또 원인이 없는 것으로부터 생겨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1-1)”라고 선언했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不生不滅)이 사물의 진정한 성질이다. 사물 그 자체는 “환영과 같으며, 꿈과 같으며, 건달바성과 같다. 생성도 그와 같고, 지속도 그와 같으며, 붕괴도 그와 같다고 예증된다(7-34).”고 말하고 있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사물에 自性자성있다면 생기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왜 자성이 있다면 생기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결코 다른 사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15-2).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생사도 혹은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현재·미래는 상대적인 것
으로, 독립의 존재는 아니다. 나가르주나는 시간을 부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전·이후·동시라고 하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데 생, 노 및 사에 대하여
어떻게 사람들은 어지러이 논하고 있는가.(11-6)
결국 자성에 있어서는 세계는 생겨나는 일도 없으며, 멸하는 일도 없고, 정지되어 있으며,
갖가지 상태로부터 자유롭다(24-38). 『중론』에 대한 주석인 『프라산나파다』에서 찬드
라키르티(月稱월칭보살, 인도 스님, 입중론과 프라산나파다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존재자가 자성으로서 존재할 때에는 자성은 만들어진 것이 아닌 까닭에
또 그것은 사라지는 것도 아닌 까닭에 이 세계는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을 것이다. 세계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정지된 것과 같이 될 것이다.
(원담 주: 존재자가 자성이 있다는 가정 아래에서 세계는 정지해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현실세상은 정지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존재자가 자성이 있다는 가정은 사실이 아니다)
중관의 체계에서는 현상계에서 자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세계는 자성을 缺결하고 있다(없다). 사물의 성질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18-7)라고 나가르주나는 말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공이다. 그러면 空공이란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하여 찬드라키르티는 “다른 것에 의존 해 있는 상태가 공이다. 따라서 공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프라산나파다』)”라고 말한다.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사물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물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만약 사물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타트바tattva)이다. 그런데 일상적인 세계에서는 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성을 결하고 있다(24-38). 따라서 사물이 자성을 결하고 있는 것이 곧 공이다. 그리고 이 공이 사물의 생기와 소멸을 설명하는 원리 즉 연기인 것이다. 사물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는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에 의해 생기하는 것이 <연기>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imasmin sati idam bhavati)”라고 하는 연기의 법칙은 공을 뒷받침하는 공식으로 이해된다.
그런 까닭에 나가르주나는 “우리들은 연기를 공성이라 부른다. 그것은 비유적인 명칭이다.그것이 곧 중도이다(24-18)”라고 말한다.공에 기초하지 않으면 사물의 생기와 소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은 본래적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며 멸하는 것도 아니다. 나가르주나의 공의 원리는 이와 같이 이중으로 해석된다.
2019년11월9일(토)맑음
인천공항 도착, 진주로 돌아옴. 짐 풀고, 법문들은 것 정리. 쉼.
2019년11월10일(일)흐림
부산에서 객승 와서 점심 공양하고 함께 고성 옥천사 적멸보궁 참배 가다. 객승은 보궁의 주지이신 지성스님의 상좌이다. 고독, 자유, 가난, 독서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간다. 그런데 가끔은 자기를 은폐한 벽에 구멍을 내어 바깥공기를 마시고 싶은가보다. 인터넷을 서핑 하다 내가 붓다프로젝트 책 출판할 때 BBS에서 인터뷰했던 동영상을 보고 나의 삶이 궁금해서 진주까지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지월거사가 추야풍경이란 시를 고쳐 달라 해서 고쳤다.
不覺至秋夜, 불각지추야
榻下明孤燈; 탑하명고등
旻天寂寞乎, 민천적막호
過時願君平. 과시원군평
몰란결에 가을밤 내리고
책상 위에 외로운 등 밝힌다,
올려다보니 가을하늘 적막하여라!
계절이 지나는 이때 그대 평안하시길.
*榻下:탑하, 책상 위 旻天:민천, 가을하늘
2014. 9.27(토)에 지월(池月)거사에게 보낸 가을 시 한편이 있음을 떠올린다.
旻天翠渺仰望深, 민천취묘앙망심
片雲南飛思友心; 편운남비사우심
梨花開落生玉果, 이화개락생옥과
秋月老樂不可吟. 추월노락불가음
아득히 푸른 가을 하늘이여
우러러봄에 더 깊어지고
조각구름 남으로 흐르니
님 그리는 마음일레,
배꽃 피고 지는 가지마다
백옥 같은 배가 주렁주렁 달리니
가을 달 같은 노승의 즐거움이여
어이 말로 할 수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