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수백의 시조새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할퀴며 차오르고
찢어지는 굉음으로 바닥을 짓누르며 내려앉는다
차오르고 내려앉을 때마다
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직
시커먼 아스팔트 활주로 그 밑바닥
반백년 전
까닭도 모르게 생매장되면서 한번 죽고
땅이 파헤쳐지면서 이래저래 헤갈라져 두번 죽고
활주로가 뒤덮이면서 숨통 막혀 세번 죽고
그 위를 공룡의 시조새가
발톱으로 할퀴고 지날 때마다 다시 죽고
육중한 몸뚱어리로 짓이길 때마다 다시 죽고
그때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뼈소리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직
정뜨르 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변하고
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시조새를 타고 내리는 지금
'저 시커면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
'저 주검을 이제는 살려내야 한다!'라고
외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없는데
샛노랗게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유채꽃 사월
활주로 밑 어둠에 갇혀
몸 뒤척일 때마다 들려오는 뼈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직
이따금 나를 태운 시조새
하늘과 땅으로 오르내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잠시 두 발 들어올리는 것
눈 감고 잠든 척하며 창밖을 외면하는 것
- 김수열 시인의 '정뜨르 비행장' 전문
2003년 <내일을 여는 작가> 여름호
늙은 등대를 만나러 가는 길
손세실리아
지구촌을 긴장케 했던 신종 호흡기 질환 '사스' 소동으로 전세계가 바
짝 긴장하는 가운데 발병 환자가 전무했던 한반도, 그 중 천혜의 관광 휴
양도시 제주는 연일 몰려드는 국내외 관광인파를 수용하느라 몸살을 앓
고 있다 한다. 섬을 향해 다투듯 우르르 몰려왔다가 여행에 혹사당한 삭
신을 끌고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뭍으로 다시 떠나버리는 무심한 마음들
을 숨어서 부끄럽게 마중하고 아프게 배웅하는 섬소년 같은 마음이 제주
를 지키고 있음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 "어둠이 내려앉은 화북 그 방파
제 끝"에 앉아 12초 만에야 겨우 눈 한번 끔뻑이는 늙은 등대의 축 처진
눈꺼풀을 쏙 빼닮은, 이제는 난바다를 헤엄쳐온 지친 어선의 잔등 껴안
아줄 쇠한 기운조차 바닥난 지 이미 오래인 부동의 야윈 등대를 닮은, 불
면의 충혈된 눈 홉뜨고 진종일 눅진 방파제 바닥에 등 한번 편히 붙여보
지도 못한 채 밤새 허리 꼿꼿이 세워 목백일홍 같은 열꽃 전신에 툭툭 터
트리며 직립의 그리움 빚어 밤바다 저 둥근 선 밖을 향해 수신호로 띄워
보내는 바보 같은 등대를 판박이로 닮은 마음 하나 있다. 1948년 4월 제
주항쟁이 가져다준 덧난 상처에 빨간 약 발라 후후 불어주며 남몰래 눈
물 훔쳐내는 여린 마음, 스스로 화산도의 오래된 약속으로, 천형 같은 포
로로 하냥 서 있는 사람이 있다.
제주공항의 옛 이름이었을 「정뜨르 비행장」이 주는 아픈 서사를 출력
해놓고 단문장 한 줄 써내지 못하고 몇 날이 훌쩍 지났다 . 소리(音)가
문자(文)화 되어 내지를 수 있는 잔혹함의 한계와 죽은 자의 뼈 바숴지
는 소리를 반복적으로, 그것도 한 연에 두 행씩이나 세 연에 거푸 배치
한 시인의 저의는 과연 무엇일까? 내 안 깊은 우물에서 환청처럼 종일 윙
윙거리는 저 신음, 통곡, 아우성, 한숨, 잇단 총성, 시조새 바퀴 밑에 깔
려 바숴지는 뼈 소리.
"빠직 빠직 빠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직" 어떤 신념을 품고 작정하지
않았다면 눈으로 읽기에도 심히 부담스럽고 끔찍한 의성어를 이처럼 거
듭 반복하지는 않았으리라.
"하루에도 수백의 시조새"들이 승객과 화물을 실어 이착륙을 시도하는
「정뜨르 비행장」의 감춰진, 혹은 잊혀진 역사적 비극은 1948년 4.3 민
중항쟁부터 시작된다. 미군정과 군경토벌대가 북제주군 관내 무수한 양민
을 재판한다는 구실로 도두봉 가까이 위치한 자그마한 군비행장으로 끌고
와 사살한 후 구덩이에 매장해버렸던 최대의 학살현장이 바로 지금의 제
주국제공항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시인은 이러한 사실
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어떻게든 죽은 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여행으로 휴양으로 혹은 비즈니스로 집안 대소사로 비행기에 탑
승할 때마다 활주로 밑에 깔린 원혼들의 뼈가 육중한 동체에 짓눌려 부서
지고 가루가 되어간다는 사실에 심히 괴로웠을 것이다. 한 번 죽음으로
도 부족해 헤갈라지고 숨통 막혀 두 번 세 번 죽임 당한 원혼들이 지하세
계를 떠돌다 선한 시인에게 씌운 것일까? 아무도 이젠 저 아래 죽음이 있
다고, 저 밑에 억울한 주검이 있으니 살려내라고,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외치는 사람 없는데, 세월은 그렇게 바람처럼 훠이훠이 잊으라 하는데,
늙은 등대를 닮은 시인은 바보 같이 한사코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저 혼
자 ”몸 뒤척일 때마다 들려오는 뼈들의 아우성“에 불면의 밤을 밝히고
야 마는 것이다.
제주나 광주, 마산이나 서울 등 과거 항쟁을 치러낸 도시들은 저마다 투
쟁과 저항의 시대 정신이 출산한 문학작품을 갖고 있다. 어디 그러한 시
나 소설이 한두 편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정뜨르 비행장」또한 자칫
새로울 것도 없고 전혀 신선하지도 않은 평이한 시에 그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인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 시의 시적 완성이 4연에 와서
야 비로소 절정에 이른다는 것을. 누구도 감히 흉내내지 못할 자성의 독
백이 독자를 사뭇 먹먹하게 만들어 숨소리도 절제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뼈의 비명을 잠재우기 위해 이 땅에 살아남은 우리가 저마다 해야 할 몫
에 대해 시인은 타인을 향해 주장하지도 떠넘기지도 않는다. 다만 내
살과 내 뼈와 내 비루한 정신이 너를 또 한 번 깔아뭉개는구나. 미안해
할뿐이다. 그의 시집 「어디에 선들 어떠랴」와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
서」를 읽고 또 읽는다. 제주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그의 첫 시
집 「어디에 선들 어떠랴」는 이내 절판되어 뭍으로 상륙하지 못한 채 사
장되고 만다. 이것은 대중의 인기나 명예와 무관하게 살아온 그의 성품
을 짐작케 하는 한 단면일 것이다. 제주의 아픈 바람, 제주 사람들, 그
의 어머니, 섬이 앓는 그리움의 뿌리, 광대('놀이패 한라산'이라는 광대
패의 일원)로 살아내야 했던 부대낌의 시절이 고백성사로 고스란히 묶여
있으며 또한 그의 아름다운 싸움의 이력들도 눈 부릅뜨고 푸르게 살아
있다. 그의 시집 두 권을 정독하고 나니 비로소 글 고름이 풀리고 속살
설핏 보이기 시작한다. '돌아보면 부끄럽지만/ 그러나/ 투명했던 날들을
위하여' 시집 속지의 필체가 사람만큼이나 단아하다. 혹시 화산도에 가
실 일 있으시거든 부디 잊지 마시길. 늙은 등대를 닮은 시인 하나 거기
살고 있다고, 그의 마음 이러하다고.
이따금 나를 태운 시조새
하늘과 땅으로 오르내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잠시 두 발 들어올리는 것
눈감고 잠든 척하며 창 밖을 외면하는 것
-「정뜨르 비행장」부분
김수열 제주 출생. 198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등이 있음.
손세실리아 정읍 출생. 2001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