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2일 토요일, 챨리 샘과 수정산에 올랐다
영도 봉래산이 햇볕을 받아 검푸른색 육중한 무게감으로 닥아 온다
두살 때부터 수물 두살 때 까지 영도 대평동에서 봉래산을 마주하고 살았다
모교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봉래산 기슭에 있었고. 그 시절엔 고갈산이라 불렀다.
대평동에서 고갈산 쪽으로 등교를 했어니, 또 날씨를 예측하자면 고갈산 꼭대기를 먼저 처다 봤어니
어릴 때의 고갈산은 지금의 백두산 만큼이나 큰 산이었고 중요한 방향이었다
어릴 땐 "시내"하면 영도대교 옆에 있던 시청, 남포동, 광복동 그리고 국제시장 부근이었다
그 시절의 시내가 지금의 수정산과 봉래산 사이에 걸처저 있는 모습이 새삼스럽고 감회가 깊었다
고갈산은 물과 나무가 없이 바위투성이인 민둥산이었다
문둥이들이 어린애를 잡아가서 간질러 죽여서 간을 빼 먹었다는 전설도, 여고생을 잡아가서 우쨌다는 전설도..
지금의 봉래산은 숲이 깊어 밀림에 가깝지만, 그 시절의 고갈산 기슭이엔
수 많은 이북 피난민들이 하꼬방(종이상자 집)을 지어 살았으니
취사 난방으로 산에 나무가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라가 약하면, 악독한 지도자를 만나면 백성만 불쌍해지고 고생하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나 산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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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에 중앙공원에 들려 애국지사 독립운동가 宵海(소해) 張建相(장건상) 선생님 동상을 참배했다
우리나라 헌법에 임시정부(1919년)의 법통을 이어 받는다 했으며,
임시정부수립 93주년 기념식이 4월13일 중앙공원 광복기념관에서 열렸다
그 93주년이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주신 부산의 역사적인 인물 소해 장건상 선생님을 소개해 본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655D3C4FBDAE0124)
![](https://t1.daumcdn.net/cfile/blog/136C9E3A4FBDB00124)
![](https://t1.daumcdn.net/cfile/blog/133ABA364FBDB01A2B)
![](https://t1.daumcdn.net/cfile/blog/130CC33A4FBDB04403)
선생은 왜놈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되어 민족적 위기감이 고조되던 1882년, 경북 칠곡(漆谷)에서
장운원(張雲遠)의 네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명은 명상(明相), 호는 소해(宵海),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그 시절 두살 때 경북 칠곡에서 좌천동으로 이사를 왔으니 아마도 천석군 집안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동경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서 공부하셨고 미국 인디아나포리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실 만큼
집념이 대단하셨다. 아마도 독립운동하신 애국지사 중에선 최고의 학력을 가지신 분 몇분 중의 한분이셨다
한국 독립운동사를 살펴보니, 좌/우파 사상가와 외교파와 무장파, 4개의 독립운동파의 통합과
독립운동 자금조달에 엄청난 고생과 고뇌하신 분이셨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5BBE334FBDB06632)
아울러, 긴 시간여행의 종착역에 이 어른의 손녀, 송석 장정숙 여사님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 심천서화연구회 본원서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음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챨리 샘과 함께 같은 샘이라 맞먹지 않고, 눈을 다소곳이 아래로 깔고,
항상 존경하는 경애하는 자세로 공손히 조심스레 대할 것이다.
아울러, 애국지사(Patriot)의 양성과 그 후손의 보호 차원에서,
좋은 것 귀한 것이 있어면 우선순위 1착으로 상납할 것이다. 나라가 있어야 우리가 있으니..
우리들은 각 혁명단체, 각 무장대오, 전체 전사 급 국내외 동포로 더불어 전민족적 통일전선을 더욱 공고
확대하면서 일본제국주의자에 대한 전면적 무장투쟁을 적극 전개하기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경주한다.
전체 전사, 전체 동포 제군! 일체의 준비와 행동은 다 이 반일투쟁의 조직 발동을 중심으로 하기 바란다.
- 1944년 장건상 선생의 임정 국무위원 취임 직후 임정이 발표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에서 - (<독립신문(獨立新聞)> 중경판(重慶版), 1944년 8월 9일자) |
![](https://t1.daumcdn.net/cfile/cafe/1538B43B4FBEF2952A)
宵海(소해) 장건상(장건상) 독립운동가, 정치인
출생-사망 : 1882년12월19일 (경상북도 칠곡) - 1974년5월14일
학력 인디애나주립대학교 법학 학사
수상 198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경력 1950 부산 제2대 민의원(국회의원)
1961 혁신당 위원장
민족혁명당 준비위원장
천안 목천 독립기념관에 서 있는 소해 장건상 선생님 어록 石碑文 ;
國家大義를 위하고 民族發展을 위하여
最善을 다하는 것이 나의 政治的 理想이다
國民은 이에 대하여 審判할 것이다
[기고] ″불행한 역사, 다시는 없어야! ...″
아시아 투데이, 부산지방보훈청 보훈과장 윤성문 2012-04-12
지금으로부터 107년 전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나라는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통상적으로 ‘조약’이란 국가간의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협상을 지칭하는 용어이지만,
당시 한일간에 맺어진 내용은 양국간의 합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늑약’이며, 1905년도가 을사년이었으니 정확한 명칭은 ‘을사늑약’이다.
결국 이 부당한 늑약과 주변 강대국의 힘에 밀려 우리나라의 외교권은 박탈당하였으며,
1910년도에는 주권까지 상실하고 1945년 광복 시까지
오랜 세월을 일본의 식민지배하에서 온갖 서러움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애국선열들은 좌절하지 않고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기 위하여 광복이 될 때까지
갖은 고초와 온갖 희생을 감내하며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머나먼 타국 땅에서 오로지 조국광복의 일념으로 개인의 안위를 마다하고 투쟁에 나선
임시정부의 주역들 속에, 자랑스러운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 소해 장건상 선생이 있다.
그는 1916년 상해로 망명하여 신규식이 조직, 운영하던 동제사에 가담하였으며,
거족적인 3.1운동 이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한인 거류민단의 국민대회 준비위원이 되어 김규식, 이시영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 공로로 1919년4월22일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외무부위원에 피선되어 임정의 중책을 맡았으며,
1924년에는 임정의 외교총장으로 있으면서 의열단의 활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 이후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장건상 선생은
1939년 상해 일본 영사관 형사에게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 국내 각 경찰서로 끌려 다니며 고문을 받았으나
1942년 국내를 탈출하여 동년 2월에 임시의정원의 개헌에 따라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이 선출될 당시 학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44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김구 주석의 특별요청으로 연안에 파견되어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좌우합작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하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시부터 주요 임정요인으로 활동하며 조국광복의 그날을 위해 헌신했다.
이런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1년10월13일 장건상 선생 추모사업회에서 주관하여
장건상 선생 동상이 부산중앙공원 내에 건립되었으며
매년 4월13일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아 기념식과 함께 장건상 선생 동상을 참배한다.
올해는 93회째 맞이하는 3.1절이며 동시에 임시정부수립 93주년이다.
우리의 의무는 선열들이 우리에게 물려주신 이 나라를 소중히 가꿔가는 것일 것이다.
역사 속에서 오늘의 의미를 찾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앞서가신 분들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4월을 맞이하면서, 나라가 약소국으로 전락하면
어떠한 위험이 따르는지를 우리의 근세사를 통하여 되새김하며,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통하여 국력과 나라사랑의 소중함을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첫댓글 이글을 쓰기 위해 앞의 긴시간여행을 서두로 올려셨군요.
책에서나보고 메스컴에서나 듣던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받쳤던 애국지사가
이렇듯 가까이에서 만날수 있어 감회가 깊습니다.
더군다나 그분의 손녀인 송석 장정숙샘과 한공간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으니 저역시 영광이옵니다.^^
원당샘 수고 많으셨습니다~`
소해 장건상 선생님 조국의 초석이자 보배이십니다.
손녀 장정숙선생님 숭배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게 일께워 주신 원당선생님 대단하십니다.
우리모두 그 뜻을 받들어 큰의미를 새깁시다.
먼저 감사하다는 인사말씀드립니다~~
저는 소해 장건상 선생님의 맏손녀입니다. 제가 카페회원이 아니어서 이렇게 동생인 장정숙의 이름으로 글 남기게 되었습니다.
매년 삼일절,광복절등의 행사에 참여하면서 조금씩 애국지사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멀어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렇게 상세히 애국지사에 대해 소개해주셔서 그리고 그분이 소해 장건상 선생님이셔서 더욱더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그 시대에 독립을 위해 애쓰셨던 모든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가족을 대신해서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애국지사님들, 순국선열님들의 후예들께서 제대로 대접/보상받지 못하고 지내시는 점 항상 안타갑게 생각합니다
좀 더 깊이 있는 자료들을 찾아야 하는데 제가 넘 피곤해서 내용이 다소 부실한 점, 죄송합니다
나중에 기회 닿으면 사진으로나마 어록 石碑文. 휘호 등을 함 더 올릴까 구상 중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즐거운 나날 되시길 빕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좋은 말씀들을 남겨 주셔서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조부님에 반해 후손들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앞으로 부끄럽지 않도록 살겠습니다.
다시 한번 모두에게 감사 드립니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보이차 첫잔을 송석샘에게 올리겠습니다.
서예학원에 다구가 이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