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럼
부럼은 정월 보름날에 부스럼을 다스리기 위해 먹는 밤, 호두, 은행, 땅콩 등을 이른다. 이를 보면, 지난 시절 부스럼이 얼마나 사람들을 괴롭혔는가를 알 수 있다. 임금도 종기로 죽는 일까지 있었다. 4, 50년대만 하더라도 부스럼 없는 아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스럼투성이의 아이도 많았다. 부스럼을 예방하기 위해 부럼을 먹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보름에 부럼을 먹는 것은 보름과 부럼이라는 두 말이 지닌 음의 유사성에 기인한 것 같다. 지금도 부럼을 부스럼의 뜻으로 쓰는 이가 있어서, 사전에도 부럼은 부스럼의 잘못이라고까지 적어 놓고 있다.
부스럼의 옛말은 브스름이다. 브스름은 ‘붓다’의 고어 ‘븟다’에서 온 말이다. 부스럼이 나면 붓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스름은 우리말의 음운 변화 법칙인 ㅅ>ㅿ>ㅇ의 과정을 거쳐 변해 온 말이다. 즉 브스름>브ㅿ ㅡ름>브으름으로 변해 왔다. 이 브으름이 브름으로 줄어지고, 이 말이 부럼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럼에 대해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부회한 듯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 첫째는, 부럼은 이[齒]를 튼튼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설이다. 이것은 부럼으로 쓰는 것이 거의가 견과류이기 때문에, 그러한 딱딱한 것을 깨문다는 사실과 이를 관련시킨 듯하다. 그러나 부럼은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부스럼과 관련하여 생긴 민속이지 그 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세시 풍속에 대한 대표적 기록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의 기록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그것을 작절嚼癤이라 하고, ≪열양세시기≫에는 교창咬瘡이라 적고 있는바, 이는 모두 부스럼을 깨문다는 뜻이다. 부럼을, 튼튼한 이와 관련시킨 이야기는 후대에 부회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부럼을 깨뜨리는 소리와 관련시킨 이야기로, 견과류가 깨질 때 나는 소리로 부스럼을 일으키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함이란 것인데, 이는 아마도 1882년에 간행된 김려金鑢의 ≪담정유고藫庭遺藁≫에 나타난 기록에 이끌린 듯하다. 거기에는 “호두와 밤을 깨무는 것은 바가지를 깨는 것처럼, 종기의 약한 부분을 깨물어 부수는 것이다. 신령의 소리를 흉내 내어, 용한 의원이 침을 놓는다는 주문呪文을 외우며 깨문다.”라 적혀 있다. 바가지를 깨뜨려 악귀를 물리치는 습속이 예부터 있긴 하나, 이 기록은 그런 것과는 다르다. 여기서의 소리는 흉내 내는 주문의 소리를 가리킨 것이지, 부럼견과류을 깨는 소리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견과류를 깨뜨리는 소리와 관련시킨 이야기 또한 그 근거가 희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부럼을 깬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말 그대로 부스럼을 깨는 것이다. 부스럼을 깨뜨려 없애버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앞에서 인용한 《담정유고》의, “종기의 약한 부분을 깨물어 부수는 것”이란 기록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민속이 생기게 된 그 근저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딱딱한 견과류는 부스럼에 비유하고, 깨는 것은 부스럼을 깨뜨려 없애는 것을 빗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지난날의 부스럼 치료법과 관련하여 유추된 것으로 보인다. 마땅한 약이 없던 과거에 부스럼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부스럼을 터뜨려깨뜨려 그 속에 박힌 고름 덩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민간에서는 이를 가리켜, “해를 빼낸다.”고 하였다. 《담정유고》에, 종기를 말하면서 ‘침’을 이야기한 것도 이러한 치료법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여기에 쓰인 대표적인 약이 고약膏藥이다. 고약은 부스럼을 깨뜨려 고름을 빼내는 약으로,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부스럼 치료용으로 널리 쓰였다. 부럼 깬다는 말은 이런 사연을 그 속에 안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