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거지 ①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傍村)
판서공 덕화(德和․1551~1598)는 진사공의 넷째 아들이다. 공은 당동에서 태어나 1583년 무과에 합격, 원(院)과 부(府)에서 근무했다. 공은 결혼 후 셋째형 집근처로 분가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공의 둘째 아들 정양재(靜養齋)의 행장에는 아버지 판서공이 당동(堂洞)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방촌과의 인연은 공의 큰아들 병조참판 정철(廷喆․1583~1657)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병자호란 때(1636) 청나라 군과 싸우다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심한 번민에 싸인다. 이어서 숙천(肅川)과 갑산도호부사·만포진병마첨사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 1644년(甲申) 귀가해 당대의 국풍 이의신(李懿信)을 초대, 방촌에 집터를 잡았는데 그 집이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돼 2004년 12월 크게 보수했다.
그런데 방촌의 입촌 시기와 수령현에 장흥부의 치소가 들어간 시기와의 차이가 있다. 즉 조선이 건국되면서 철야현에 있던 치소가 1392년에 장흡읍 중녕산쪽에 있다가 1414년에 장원봉 밑 동동리 지금 법원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위씨의 방촌 입촌은 그로부터 230년 후인 1650년 전후이기 때문이다.
판서공파의 입촌 이후는 비교적 순탄하다. 주로 종손과 그 대소가를 중심으로 살았다. 자손의 번창은 5덕파의 두 번째(대동보 2권p 381~1024)에 이를 만큼 불었다. 특히 종손이 15대째 혈손으로 한 집터에서 내려온 것은 희귀한 경우에 해당된다. 재물과 권세는 만족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종손은 성렬(聖烈․1928년 戊辰生)이다.
□세거지 ② 장흥군 대덕읍 초당(草堂)
대덕 초당의 입향조는 간암공(艮庵公) 세옥(世鈺․1689~1766)이다. 공은 영유와 남해군수를 역임한 23세 동전(東峑)의 셋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고 살결이 너무 하얀 나머지 푸르게 보일 정도여서 청학(靑鶴)에 비유되기도 했다. 우의정을 지낸 민응수(閔應洙)와는 둘도 없는 친구간이고, 당대의 석학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와는 죽마고우였다.
그러나 33세 때인 1721년(辛丑) 서울에서 귀향했다. 하향한 한 때 큰집 밑에서 지냈다고 한다. 하향한 이후 1732년과 33년 두해에 걸쳐 가뭄이 들어 아사자가 속출하자 '임계탄'을 짓고, 이듬해인 1734년(甲寅) 영조(英祖)에게 6조7실의 상소문을 올려 비답을 받았다. 60세 이후에는 대덕 초당으로 이거했다. 그곳에서 향약을 설행하고 후학 지도와 개간한 땅에 약초를 재배했다.
공은 비록 벼슬을 못했지만 장흥위씨를 중앙무대에 알린 주인공이다. 국토의 끝자락 해변에 살고 있는 위씨는 병자호란 이후 변변한 벼슬아치를 배출하지 못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3벽의 한계를 중앙무대에 알린 것은 공의 풍부한 교우관계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친구 우의정 민응수, 공조판서를 지낸 화전(花田) 이재(李縡) 등이 동문수학한 선후배간이기 때문이다.
간암공이 스스로 개척한 대덕의 세거지에는 직계후손 4가구와 신월 2구인 내도에도 2가구가 살고 있다. 지금도 공이 인재양성을 위해 세웠다는 서원자리에는 약수터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대동보의 면주에 간암공의 졸년이 잘못 기록돼 설이 엇갈려 혼란을 일으키고 있으나 그의 졸년은 1766년이다.
□세거지 ③ 전북 김제시 청하면 월현(月弦) (대동보 2권p.430~651)
간암공의 후손인 30세 병권(柄權․1903~1974)이 고향을 떠나 김제에 보금자리를 잡았다. 간암공의 6대손인 그는 문좌(文座)의 둘째 아들인 백의(伯毅)의 현손이다. 그의 가족은 29세 만기(萬基)대까지 대덕에서 살았다. 이주의 동기는 알 수 없으나 먹고살기 위해 어떤 연고로 고향을 떠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사 간 시점은 빨라야 1920년 전후라고 보면 아직 100년도 넘지 않았다.
《위 가계도의 오기 설명》
호조판서공(휘 덕화)의 장자 병조참판공(휘 정철)에게는 다섯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정부인 진원朴氏 사이에 동전(東峑), 정부인 온성孟氏 사이에 둘째 동잠(東岑), 셋째 동성(東星), 넷째 동두(東㞳), 다섯째 동윤(東崙)입니다. 이중 동잠, 동성, 동두의 후손은 손자~증손 때 후사가 없어 무후(無後)입니다. (기묘대동보 2권 P 381~392)
첫째 상원군수공(휘 동전)과 숙부인 문화柳氏 사이에서 방촌 후손, 숙부인 금성羅氏 사이에서 초당•김제 월현•도청•기산 후손, 숙부인 남양洪氏 사이에서 여수 개도 출신이 후손입니다.
다섯째 통덕랑공(휘 동윤)과 공인 제주梁氏 사이에서 모산•용전•칠량, 신촌 출신이 후손입니다.(기묘대동보 2권 P 401~479, 570~717)
이러한 내용은 기묘보를 포함한 족보, 1995년 5월 장흥위씨 종보 창간호(관북, 송당 재형 편집) 세계도 등에는 바르게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 "장흥위씨요람" 등에서는 동윤(東崙)이 삭제되고 동윤의 손을 동전(東峑)의 계열에 붙여 오기(誤記)하고 있습니다.
동윤(東崙)...세봉(世逢)...
명장(命章)...사전(師田, 모산•용전) 사형(師衡, 칠량)
세언(世彦)...
명룡(命龍)...사득(師得, 신촌)으로 기록함이 타당함을 알립니다.
정부인 온성孟氏, 통덕랑공(휘 동윤) 등 이하 후손의 묘소는 주로 대덕읍 덕촌과 잠두리에 위치합니다..
직계후손들의 주관으로 매년 陰 10.4날 국찬공(28세조 휘 영훈, 1786~1852) 묘전(墓前)에서 온성孟氏 (병조참판공) 이하 선조 18位에 대한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합니다.
온성맹씨 후손들 중, 지난날 본향 문중사에 용강공(휘 용량, 1930~1989)과 우송공(휘 성량, 1931~ 2014, 정천문계장 역임)이 참여하였습니다..
광주 제일체육사를 운영한 효량(1939년생, 관산읍 용전 태생)님과 홍량(1942년생, 서울 반포동 거주)님 형제는 자수성가한 재력가 입니다..
덕환(1950년생, 관산읍 용전 태생)님은 목포세무서장, 동광주세무서장을 역임하고 퇴직한 후 광주에서 세무사 일을 하고 있고,
재호(1964년생, 용산면 모산 태생)님은 인천에서 광주은행 지점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광환(1967년생, 용산면 모산 태생)님은 전라남도 국장(부이사관)직위로 재직중이고,
서울 신설동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늘 밴드에 유익한 내용을 게재, 종친들과 소통하면서 문사에 참여하고 있는 야운(이환, 1968년생, 관산읍 용전리 태생) 님 등이 주요 후손들 입니다.
김제에도 세거지가 있네요
栢江위성록/장흥위문사랑 님
좋은 자료와 정보입니다
휼륭하신 위문중 조상들의 옛발자취와 역사 공부를 잘하고 갑니다.栢江위성록/장흥위문사랑 자세한 설명이 곁들여지니 이해하기가 쉽고 공부가 잘되네요.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