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도난당한 하서 김인후의 ‘묵죽도판’ 3점을 회수하는 모습.
인종이 스승이자 벗인 김인후에게 친히 그려 하사한 ‘묵죽도’를 유통시키기 위해 목판에 새긴 것이다.
|문화재청 사범 단속반·서울시경찰청 지능수사대
“…굳은 돌, 벗의 정신이 깃들었네.
調和를 바라시는 임금의 뜻을 이제 깨닫노니….”
悲運의 王 仁宗(1515~1545·재위 1544~1545)이 切親이자 스승인 臣下에게
‘情表’로 내린 ‘墨竹度’ 木版이 盜難 15年만에 回收됐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서울 경찰청 지능수사대는 공조수사를 통해
2006년 2월 하서 김인후(1510~1560)를 모셨고,
2019년 유네스코 世界계유산(書院)으로 登載된 필암서원(全南 長城)에서
盜難된 ‘河西 遺墨 墨竹圖板’(全南 有形文化財 216호) 3點을 回收했다고 1일 밝혔다.
■盜難文化財 34點 回收
사범단속반은 이 과정에서 1980년 도난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창 선운사 소장 ‘석씨원류’ 1점(전북 유형문화재 14호)과
2008년 도난된 충북 보은 선병국 가옥(국가민속문화재 134호)의 ‘무량수각 현판’
등 까지 모두 34점을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공조수사팀이 “(2006년 2월 도난당한)
‘묵죽도판’이 거래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은 2019년 5월이었다.
‘묵죽도판’을 문화재 매매업자 백모씨로부터 구입하려던
모 대학교수가 수사팀에 ‘확인을 요청’해온 것이다.
한상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은
“‘도난 신고된 문화재의 매매’는 문화재보호법 92조(손상 또는 은닉 등의 죄)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게 된다”고 전했다.
공조수사팀은
“백모씨의 집과 사무실, 은닉장소 등 3곳을 압수수색한 결과
‘묵죽도판’ 외에도 시·도지정문화재를 포함,
相當數 文化財가 不法流通되고 있다는 事實을 摘發했다”고 傳했다.
指定文化財 외에 충남 무량사 목조불좌상(2점)과 원각경 목판(1점),
청음선생 연보 목판(2점), 괴헌집 목판(3점), 성오당선생문집부록 목판(1점), 기자지 목판(1점),
하려선생문집 목판(4점), 동연학칙 목판(4점) 등이다.
이중에는 개인은 물론 博物館으로 흘러들어간 文化財도 있었다.
摘發된 백씨 등은 現在 裁判을 받고 있다.
仁宗이 金麟厚에게 친히 그려 下賜한 ‘墨竹度’.
■어수지계(魚水之契)
이번에 회수된 文化財 중 ‘하서 墨竹圖版’ 3點은 仁宗이 金麟厚에게 下賜한 墨竹圖를 새긴 木版이다.
1568년(宣祖 1년)과 1770년(英祖 46년) 새긴 것이다.
흔히들 理想的인 君臣關係를
‘물고기(臣下)가 좋은 물(임금)을 만나 마음껏 헤엄친다’는 뜻에서
‘어수지계(魚水之契)’ 라 한다.
이와 같은 仁宗-金麟厚의 君臣關係를 널리 알린다는 뜻에서
‘墨竹度’ 그림을 나무판에 새겨 流通한 것이다.
金麟厚는 어릴 적부터 仁宗의 벗이자 스승이 될 運命이었던 것 같다.
1518년(中宗 13년) 9살인 金麟厚를 만나본 弘文館 敎理 기 준(1492~1521)은
“이 少年은 후일에 마땅히 世子(仁宗)를 모시는 臣下가 될 것”이라고 豫言했으니 말이다.
과연 그랬다.
31살 때인 1540년(中宗 35년) 大科에 及第한 金麟厚는
기준의 예언대로 세자(훗날 仁宗) 敎育機關인 世子侍講院의 설서(정7품)가 됐다.
世子와는 5살 차이였지만 곧 절친이 됐다.
인종은 태어난 지 7일만에 친모(장경왕후·1491~1515)를 산후증으로 잃고,
1520년(중종 15년) 책봉 이후 세자 신분으로만 25년간이나 살았다.
새어머니 文定王后(1501~1565)에게도 아들(경원대군·훗날 明宗)이 있었다.
文定王后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玉座에 올려놓기 위해 血眼이 되었다.
仁宗의 世子 生活은 늘 危殆로웠다.
仁宗의 ‘墨竹圖’ 膳物에 河西 金麟厚가 忠誠을 盟誓하는 글을 썼다.
대나무는 洗者(仁宗), 돌덩이는 변함없이 충성스러운 臣下를 각각 象徵한다.
■세가지 膳物
그런 世子의 버팀목이 되어준 이가 바로 金麟厚였다.
世子가 金麟厚에게 하사한 ‘3가지 膳物’이 人口에 回刺됐다.
먼저 世子가 金麟厚에게 싱싱한 배 3個를 준 일이었다.
金麟厚는 이중 한 個는 맛을 보고,
나머지 두 개는 보자기에 잘 싸서 간수했다.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올리고,
그 씨는 받아두었다가 밭에 심었다.
子孫 대대로 그 배나무를 保護했다.
또 하나 膳物은 金麟厚에게만 特別 下賜했다는 <朱子大典> 한 질이다.
世子가 宿直室까지 친히 枉臨해 金麟厚에게 글을 質問하고,
<朱子大典> 한 질을 膳物한 것이다.
性理學의 典範인 <朱子大典>은 1543年(中宗 38년) 輸入된 新刊이었다.
仁宗은 ‘훗날 내가 玉座 위에 오르면
國家 이데올로기인 性理學의 解析을 그대에게 맡기려 한다’ 는 뜻을
<朱子大典> 膳物에 담았을 것이다.
金麟厚는 “朱墨(붉은 색 먹)으로 句節句節 標點까지 찍으며 읽었다”고 밝혔다.
세번째 膳物이 바로 ‘墨竹圖’였다.
세자는 김인후를 불러 비단 위에 손수 대나무를 그려 하사했다.
대나무가 애곡(涯谷·절벽과 골짜기) 사이에서 솟아나 곧게 하늘을 떠받드는 형세였다.
김인후는 이 ‘묵죽도’에 충성을 맹세하는 시를 남겼다.
“뿌리, 가지, 마디와 잎새, 모두 정미하다(根枝節葉盡精微)
굳은 돌, 벗의 정신이 깃들었네(石友精神在範圍)
조화를 바라시는 임금의 뜻을 이제 깨닫노니(始覺聖神모造化)
천지에 한결 같으신 뜻을 어길 수 없도다(一團天地不能違).”
대나무는 世子(仁宗), 돌덩이는 忠誠스러운 臣下를 象徵한다.
훗날 宋時烈(1607~1689)은
“仁宗은 金麟厚의 道德과 學問의 훌륭함을 알아 誠心으로 禮遇했고,
金麟厚 선생 亦是 世子의 德이 千古에 뛰어남을 알아
장차 堯舜의 政治를 펼 것으로 여겼다”며
“두 사람의 만남이 날로 더욱 짙어지고 企待도 날로 더욱 높아졌다”고 했다.
河西 金麟厚를 모신 全南 長城의 필암서원.
湖南 地方의 유종(儒宗)으로 推仰받는 河西 金麟厚를 配享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曲折있는 仁宗의 逝去
그러나 聖君의 資質을 받았다는 仁宗의 治世는 8個月 短命으로 끝나고 만다.
仁宗의 死因은 公式的으로는 ‘지나친 孝道 때문에 얻은 病’으로 알려져 있다.
1544年(中宗 39年) 中宗이 病에 걸려 結局 逝去하자
世子(仁宗)는 穀氣를 끊고 다섯달 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世子의 몸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衰弱해졌다.
結局 仁宗이 昇遐하자(7月1日) “이제야 太平時代를 열겠구나”라고 企待했던
百姓들의 失望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大闕 밖은 大聲痛哭하는 이들로 人山人海를 이뤘다.
그런데 仁宗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與論이 퍼졌다.
아닌게 아니라 文定王后와 王后의 오라비인
尹元老(?~1547)·尹元衡(?~1565) 兄弟가 仁宗을 해코지 하려고 갖은 術數를 썼다.
특히 尹元衡 等은 南山에 올라 손수 香을 피워놓고는
“제발 임금이 빨리 죽게 해달라”는 祈禱를 올리는 等 妖妄한 方術을 自行했다.
1543年 1月 世子가 起居하는 東宮에서 일어난
火災의 背後로 윤원로와 윤원형을 指目되기도 했다.
金麟厚도 이런 수상한 幾微를 感知했다.
金麟厚는 仁宗의 狀態가 나빠지고 있던 1545年(仁宗 1年) 4月 스승의 資格을 내세워 가슴을 치면서
“藥劑의 處方을 議論하는 자리에 參與하게 해달라”고 懇請했지만 默殺당했다.
金麟厚가 “그렇다면 殿下를 제발 다른 宮闕로 옮겨야 한다.
다른 곳에서 健康을 돌봐야 한다”고 申申當付했지만 그마저 許容되지 않았다.
文定王后를 疑心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痢疾에 시달린 仁宗에게
痢疾과 相剋인 닭죽을 每番 바쳤으며,
毒이 든 떡을 먹게 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卵生 처음 살갑게 대하는 季母(文定王后)가 먹어보라고 준 떡을 덥석 받아먹었다는 설까지….
仁宗과 婦人인 인성왕후 박씨(1514~1577)의 무덤이다. 경기 고양 서삼릉에 있다,
■ 해마다 7月 1日만 되면
仁宗이 逝去한 뒤 知人으로부터 昇遐의 自初至終을 들은 金麟厚는 놀라 울부짖었다.
뭔가 曲折이 있었다는 얘기다.
金麟厚가 남긴 詩(‘유소사·有所思’)가 심금을 울린다.
“님(仁宗)의 나이 바야흐로 30이요, 내 나이도 서른하고도 여섯이로세(君年方向立 我年欲三紀)
새 정을 반도 다 못누렸는데 이별은 화살과 같구나(新歡未渠央 一別如弦矢)
내 마음은 변할 줄 모르는데, 세상일은 동편으로 흘러가는 물이로다(我心不可轉 世事東流水)”.
金麟厚는 술과 눈물로 歲月을 보냈다.
특히 해마다 仁宗의 己日(7월1일)이 다가오면 실성한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울부짖었다.
“金麟厚는 恒常 6月 그믐 이전부터 7月 그믐까지
술을 실컷 마시고 몹시 취해 精神 잃고 말았다.
때로는 통곡하며 슬퍼하여 스스로를 이기지 못했다.”(<명신록>)
正鐵(1536~1593)은 인종의 기일이 되면 산중에 올라 痛哭하는 金麟厚를 위해
“해마다 7월이 되면(年年七月日)/ 만산중에서 痛哭한다(痛哭萬山中)”는 詩를 남겼다.
宋時烈은 金麟厚의 親舊인 정황(1512~1560)의 墓碣에서
“金麟厚가 당시 御醫의 處方을 살펴보겠다고 자청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宋時烈도 仁宗의 죽음에 의문부호를 표했던 것이다.
수사과정에서 ‘묵죽도판’과 함께 회수된 ‘고창 선운사 석씨원류 목판’.
석가의 일대기와 불법이 중국에 전래한 이후 원나라까지 유통에 관한 사실을 글로 쓰고
여기에 민중이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을 배치하여 목판으로 간행한 책이다.
||문화재청 사범 단속반·서울시경찰청 지능수사대 제공
이후 金麟厚는 여러번 明宗(1545~1567)의 부름을 받았지만
발에 濕腫(붓는 病)이 났니 어떠니 하면서 끝내 응하지 않았다.
1553년(명종 8년) 明宗은 金麟厚를 弘文館 敎理로 任命해버렸다.
金麟厚는 임금의 명을 마냥 거절할 수 없어 일단 “명을 받든다”면서
수임길에 올랐다.
하지만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10여 일을 술 한잔씩 마시며 길바닥에서 보냈고,
술이 다 떨어지자 “병이 났다”면서 발길을 돌렸다.
“(仁宗 때의 마지막 벼슬인) 옥과(전라 谷城) 縣監 이후의
官職은 절대 擧論하지 말라”는 金麟厚의 遺言이 심금을 울린다.
明宗 때 文定王后·尹元衡·정난정(?~1565) 등
國政壟斷 세력이 내린 벼슬(성균관 전적·정6품, 홍문관 교리·정5품, 성균관 직강·정5품)은
拒否한다는 강력한 뜻을 전한 것이다.
수사과정에서 찾아낸 충북 보은 ‘선병국 가옥’(국가민속문화제 134호) 무량수각 현판 1점.
|문화재청 사범 단속반·서울시경찰청 지능수사대 제공
■ 너무나도 짧은 만남
金麟厚는 正祖 때인 1796年(正祖 20年) 湖南 地方에서 唯一하게 文廟(孔子 祠堂)에 配享됐다.
正祖는 이때 “金麟厚는 비 갠 뒤의 맑은 달과 밝고 부드러운 바람(光風霽月) 같은 氣像과,
純潔하고 온향한 품성(精金美玉)에 文章까지 兼備해서
선비들의 模範이 됐다”고 極讚했다.
正祖는 이어 “鄭夢周(1337~1392)가 처음 提唱하고, 趙光祖(1482~1519)가 크게 드날린
(朝鮮 性理學의) 脈이 중간에 도가 막혀 실낱같이 아슬아슬했지만 湖南에 공(金麟厚)이 나타났다”고 했다.
金麟厚를 모신 筆巖書院은 바로 2019年 유네스코 世界文化遺産으로 登載된 書院 9곳 중 한곳이다.
朝鮮 中期 文臣 신흠(1560~1628)은 ‘墨竹圖’ 發文에서 仁宗과 金麟厚의 기구한 만남을 애달파했다.
“仁宗大王은 하늘이 낸 聖人이다…河西 金麟厚의 어짊으로 仁宗大王을 만난 것은 千載一遇였다.
그러나 한 해를 못 넘기고 仁宗大王을 잃은 哀痛을 만났으니….”
신흠은 두 사람의 짧고 哀痛한 만남을 두고
“天命에는 거짓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진짜 天命은 어디 있다는 말이냐”고 恨歎했다.
한편 ‘하서 墨竹圖版’과 함께 回收된
‘高昌 禪雲寺 석씨원류 木版’은 釋迦의 一代記와 佛法이 中國에 傳來된 已後
元나라까지 流通된 事實을 글과 그림으로 製作한 뒤 木版으로 刊行한 冊이다.
‘석씨원류 木版’은 1488년(성종 17)에 王命으로 새겼으나, 壬辰倭亂 때 消失됐다.
四溟大師(1544~1610)가 日本에서 구해온
<석씨원류> 1질을 母本으로 하여 1648년(仁祖 26) 復刊했다.
回收된 ‘석씨원류’ 板刻은 朝鮮時代 揷畵의 걸작 중 傑作이며 版畵 彫刻史를 硏究하는데 重要한 資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