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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판 서문
쇼펜하우어
나는 여기서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일러주고자 계획했다.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의 사상이다. 그러나 갖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나는 그것을 전달하는 데 이 책 전체보다 더 짧게 쓰는 방법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사상을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무척 오랫동안 탐구되어온 것이라 간주하는데, 바로 그 때문에 역사상 교양 있는 자들은 현자의 돌을 발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발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다. 플리니우스가 그들에게 “어떤 일이 실행되기 전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박물지} 7권)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내가 전달하려는 그 한 가지 사상은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됨에 따라 형이상학이니 윤리학이니 미학이라 불리는 것들로 그 모습을 드러내 왔다. 그리고 이 사상은 이미 고백했듯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라면 물론 이러한 모든 것들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사상 체계는 언제나 건축학적인 관계를 지녀야 한다. 즉,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떠받치지만, 후자는 전자를 떠받치지 않으며, 결국 초석은 다른 것들로부터 떠받쳐지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떠받치고, 꼭대기는 아무 것도 떠받치지 않으면서 모든 것들로부터 떠받쳐지는 그런 관계를 지녀야 한다. 반면에 단 하나의 사상은 그것이 아무리 포괄적이라 하더라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통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사상을 전달할 목적으로 여러 부분으로 잘게 나누어야 할 경우 다시 이 부분들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지녀야 한다. 즉, 각 부분은 어느 것이 먼저고 나중이라 할 것 없이 전체에 의해 지지되는 동시에 전체를 지지하고, 전체 사상은 각 부분을 통해 명료성을 띠게 되고, 전체가 먼저 이해되지 않으면 아무리 작은 부분일지라도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그런 관계를 지녀야 한다. 그런데 책의 내용은 유기체와 아무리 비슷하다 하더라도 책은 첫 줄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줄에서 끝나야 하므로 그런 점에서 물론 유기체와 확연히 다르다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형상과 질료가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서술된 사상을 심도 있게 이해하려면 이 책을 두 번 읽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사실이 저절로 밝혀진다. 그것도 처음에는 시작이 끝을 전제로 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시작이 끝을 전제로 하고, 그리고 모든 뒷부분이 앞부분을 전제로 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모든 앞부분이 뒷부분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자발적으로 주어진 신념으로만 얻을 수 있는 강한 인내심을 가지고읽어야 한다. 내가 ‘거의’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뒷부분을 통해 비로소 해명되는 것을 앞서 보내기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것과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되도록 쉽게 이해하고 명료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양심적으로 솔직히 행해졌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그때마다 쓰인 내용뿐만 아니라 가능한 결론마저 거기서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 일이 어느 정도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대의 견해와 아마 독자의 견해에도 반하는 모순이 실제로 있는 것 외에도, 예견되고 상상되는 다른 수많은 모순이 첨가될 수 있으므로 단순한 오해에 불과한 일이 명백한 거부로 드러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쓰인 내용의 직접적인 의미에 대해 힘들여 이룩한 서술과 표현의 명료함은 어쩌면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만, 그밖의 모든 것에 대해 쓴 내용의 관계가 동시에 표현될 수는 없으므로 그런만큼 독자는 그것이 단순한 오해에 불과함을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독서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두 번째 독서에서 많은 것, 혹은 모든 게 전혀 다르게 보일 거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인내가 필요하다. 게다가 무척 까다로운 대상을 다루므로 가끔 같은 내용이 되풀이 되더라도 내가 완전하고도 쉽게 이해시키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느라고 그렇다는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사실 전체 구조가 유기적이긴 하지만, 고리 모양의 연쇄 구조는 아니기 때문에 더러 같은 대목에서 두 번 언급할 필요도 있었다. 또한 바로 이러한 구조와 모든 부분들의 매우 밀접한 관계 때문에 다른 책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지만 나는 이 책을 장과 절로 나누지 않고 네 권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사상을 네 개의 관점으로 나누는 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네 권의 어느 것을 읽더라도 거기서 필수적으로 논의되는 세부사항에 얽매여 그것이 속해 있는 근본 사상과 전체적인 서술이 진전되는 상황을 눈에서 놓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일단 이것이 첫 번째 요구이며, 다음에 이어지는 요구들과 마찬가지로 비호의적인 독자에게 (사실 독자 자신도 한 명의 철학자인 셈이므로 철학자에게) 행하는 불가피한 요구이다.
두 번째 요구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서문을 읽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서문은 이 책에 들어 있지 않고, 5년 전에 [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에 대하여. 하나의 철학 논문]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이러한 서문이자 입문서를 알지 않고는 이 저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논문이 마치 이 책에 함께 수록되어 있는 듯 그 내용이 여기 어디서나 전제가 되어 있다. 그건 그렇고 그것이이 책에 앞서 이미 수년 전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사실 이 책의 서문에 실리지 않고 제1권에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논문에서 다루어진 내용이 이 책에서 빠져 있고, 이러한 결함으로 이미 어느 정도 불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그 논문을 계속 끌어들여 이 책에서 부족한 곳을 메워나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내가 칸트 철학에 근거를 두는 범주, 외적 감관 및 내적 감관과 같은 개념들에 당시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몇몇 개념들을 순화함으로써 지금 같으면 그 논문 내용을 보다 잘 표현할 수 있겠지만, 이미 쓴 내용을 다시 베끼거나 이미 한 번 충분히 이야기한 내용을 힘들여 다른 말로 또 한 번 표현하는 게 너무 싫어 나는 이 길을 택하게 되었다. 아울러 거기서는 내가 그때까지 그 개념들을 깊이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아직 부차적으로만 사용할 뿐 가장 중요한 점을 다루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 논문에서 그런 부분을 고치는 것도 이 저서를 알게 됨으로써 독자의 생각 속에서 저절로 행해질 것이다. 하지만 독자가 그 논문을 통해 충분근거율이란 무엇이며 무슨 뜻인지, 그것의 타당성이 어디까지 미치고 어디까지 미치지 않는지를 완전히 인식해야만, 그리고 그 원리가 모든 사물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는 단지 그것의 결과인 것이며, 말하자면 그것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인 셈이고, 오히려 어떤 종류의 객관이든 간에 주관이 인식을 하는 개체인 한, 그것은 항시 주관에 의해 제약받는 객관이 어디서든 인식되는 그러한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독자가 완전히 인식해야만, 내가 여기서 맨 처음 시도하는,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적 사유방식과 완전히 다른 방식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내가 말한 것을 글자 그대로 베끼거나, 더 나은 말을 이미 썼기 때문에 다른 말이나 그보다 못한 말로 다시 말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 이 저서의 제1권에는 또다른 결함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여기에 그대로 실었어야 했을, [시각과 색채에 대하여]라는 내 논문의 1장을 모조리 빼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전에 나온 이 소논문에 대해서도 독자가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독자에게 하는 세 번째 요구는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전제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2천 년 전부터 철학에 나타난 가장 중요하고도,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현상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칸트의 주된 저서들을 읽어야 한다는 걸 일컫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런 말을 했듯이, 사실 칸트의 주저主著를 읽은 사람이 그로 인해 정신에 받는 영향은 장님이 내장안內障眼 수술을 받은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유를 계속하자면 이 책의 목적은 그런 수술을 성공리에 마친 사람들의 손에 내장안경을 쥐어주려는 거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용하려면 수술을 받는 것이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라 하겠다. 그에 따라 내가 칸트가 이룩해낸 업적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사실 그의 저서를 진지하게 검토한 결과 거기에 중대한 결함도 있음을 알아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학설 중에서 오류가 없는 걸로 규명된 까닭에 참되고 탁월한 것을 전제로 하여 적용할 수 있도록 오류를 골라내어 버려야 하는 것으로 서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칸트에게 너무 자주 반론을 제기하는 바람에 나 자신의 서술이 중단되고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에 대한 비판을 특별 부록으로 실었다. 이미 말했듯이, 나의 저서는 칸트 철학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으므로 이 부록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볼 때 부록을 먼저 읽는 게 좋을 듯 싶다. 부록의 내용은 이 저서의 제1권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다른 한편 일의 속성상 부록도 여기저기에서 이 저서 자체를 끌어들이는 게 불가피했다. 그런 이유로 사실 이 책의 주요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부록도 두 번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칸트 철학이야말로 여기서 사상을 펼쳐 보일 때 철저히 알아야 하는 전제가 되는 유일한 철학이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독자가 신과 같은 플라톤 학파의연구에 헌신해 왔다면, 그만큼 내 강론을 들을 준비가 잘 된 것이고, 그것을 보다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산스크리트 문학이 15세기에 끼친 영향이 그리스 문학의 부흥이 끼친 영향에 못지 않다고 추측되기 때문에, 내가 볼 때 아직 일천한 금세기가 이전의 수 세기에 대해 내세울 수 있는 최대의 특전이라 할 수 있는 우파니샤드를 통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베다를 읽는 혜택을 독자가 받았다면, 따라서 말하자면 그가 이미 고대 인도의 신성한 지혜도 받아들이고 소화했다면 내가 펼칠 강론을 들을 최상의 준비를 갖춘 셈이다. 그런 독자는 다른 일부의 사람들이 낯설게 느끼고, 심지어 적대감마저 느끼는 것과는 달리 그러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사상이 이미 우파니샤드에서 결코 발견될 수는 없겠지만, 우파니샤드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단편적인 말들 모두가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사상에서 결론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독자들은 성미를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고, 오랫동안 억지로 자제해 오다가 마구 비난을 퍼부었다. 어떻게 내가 감히 책 한 권을 대중에게 선보이면서, 앞의 두 가지처럼 외람되고 불손하기 그지 없는 여러 가지 요구와 조건을 내건단 말인가? 독특한 사상이 어디서나 넘치고, 독일에서만도 내용이 풍부하고 독창적이며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저술들이 매년 3천 권 이상 쏟아지는 이 시대에, 그밖에도 수많은 정기간행물이나 일간지들이 인쇄기를 통해 공유재산이 되는 이 시대에, 특히 독창적이고 심오한 철학자들이 조금이라도 부족하기는 커녕 독일만 해도 전에는 수 세기에 걸쳐 나타난 것보다 더 많은 철학자들이 동시에 살아 있는 이 시대에 어떻게 그런 것을 내건단 말인가? 책 한 권을 읽는 데 그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 대체 어떻게 끝까지 책을 읽어낼 수 있겠느냐고 분격한 독자가 반문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러한 비난들에 맞서 일일이 대응할 생각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요구들을 이행하지 않으면 죽 읽어나가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어, 그냥 내버려둬야 하는 책을 읽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내가 때맞춰 주의를 준 것에 대해 이런 독자들이 조금이나마 고마워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특히 이 책들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말해 줄 수 없어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므로, 사유방식이 비상해 이를 향유할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을 차분하고 겸허하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이 독자를 번거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훌륭하게도 그의 지식이 역설적인 것과 그릇된 것을 완전히 동일하게 보는 데까지 다다른 이 시대의 교양인이 그야말로 스스로 참되고 확실하다고 굳게 믿는 것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내용을 거의 매 페이지마다 만나게 될텐데 그가 어떻게 이를 참아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정말 감동적인 책을 저술했지만, 자신이 15세 이전에 배워 인정한 모든 것을 인간 정신의 타고난 근본사상이라고 간주한 점에서 조그만 약점을 지니고 있는 아직 살아 있는 어떤 위대한 철학자가 있다. 그런데 독자들 가운데는 자신의 사유방식이 그 철학자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이유로 바로 이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든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기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알고 속았다는 생각에 언짢게 여기는 사람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참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그 책을 다시 그냥 옆으로 치워버리라고 충고하는 바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한다고 면책이 될 것 같지 않아 두려운 생각이 든다. 서문까지만 읽고 그만 둔 독자는 현금을 주고 이 책을 샀으므로 무엇으로 자신의 손해를배상할 건가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제 나의 마지막 도피처는 책이란 읽지 않아도 여러모로 이용할 수 있다고 그에게 일러주는 것이다. 다른 많은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그의 장서의 빈곳을 메워줄 것이고, 장정이 훌륭하면 확실히 보기에도 좋을 것이다. 또는 그에게 박식한 여자 친구가 있으면 그녀의 화장대 위나 차 마시는 탁자 위에 놓아두어도 좋을 것이다. 또는 마지막으로 분명 가장 좋은 용도이고 내가 특히 권하는 것은 이 책을 비평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가 감히 이런 농담을 한 것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이런 삶 속에서 어느 페이지를 넘겨도 농담 한 마디를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너무 진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인데, 나는 이 책이 조만간 그것의 진가를 알 만한 사람들의 손에만 들어가게 될 것을 확신하면서 아주 진지한 마음으로 이 책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것 말고 나는 이 책도 모든 인식에 있어서, 그러므로 그런 만큼 가장 중요한 인식에 있어서 언제나 진리가 처하게 되는 운명과 전적으로 같은 운명을 맞을거라 생각하고 차분하게 각오하고 있다. 역설적이라 비난받고 진부한 것이라 무시당하는 앞뒤의 장구한 두 기간 사이에서 진리가 누리는 축제의 기간이란 너무나 짧을 뿐이다. 또한 이러한 진리를 주창한 장본인도 마찬가지로 역설적인 운명을 맞곤 한다. 하지만 인생은 짧지만, 진리는 멀리까지 영향을 끼치며 오래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우리 진리를 논하기로 하자.
1818년 8월 드레스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