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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의 갑옷
이사야 59:15-21
15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6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17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18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19 서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쪽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우리 주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이사야 59장 1절부터 보면 죄악으로 가득한 남유다 백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맘껏 죄를 범하면서 하나님과 거의 관계 없는 백성처럼 되어 버렸고 남유다 사회는 불의와 부정과 거짓과 포악이 난무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죄악의 행위고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로 나아갔습니다”(6-8).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
9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10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사 59:9-10)
이러한 남유다의 죄악된 상황 때문에 이사야는 비통을 느끼며 자신을 그들과 일치시키면서 외칩니다.
[
11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12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13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낳으니
14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
](사 59:11-14)
여기서 성실은 원어로 (에메트)인데 진리와 진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성실이 사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진리와 진실이 무너진 것을 의미합니다. 재판장, 증인, 고소 등, 모든 것이 진실과 사실을 부정하고 거짓과 뇌물과 아첨과 포악과 패역이 사회에 범람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거의 무법주의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상태에 있는 남유다는 거의 회복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남유다를 시내산의 모세 언약에 따라 다루실 것입니다. 즉,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시키시기 위해 친히 역사 속에 개입하실 것입니다. 이는 그들에게 영원한 참된 중재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한 중재자로 오셔서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나아가 이스라엘 사회를 거룩한 공동체, 즉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
15 …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6 (의로운)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17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18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사 59:15-18)
이 내용에는 벌써 남유다 백성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함으로 그들을 모세의 율법대로 징계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회복된 후에는 곧바로 남유다를 포로로 삼고 고통을 주던 이스라엘의 원수 바벨론 제국 및 여러 나라들을 향해 분노하시며 보응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유다의 주변 나라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일차적인 역사적 배경은 바사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 제국 및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서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쪽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사 59:19).
그러나 바사의 고레스 왕은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 구약에서 보여주는 예표일 뿐이고, 그 실재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중재자이신 구속자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죗값에 대해 친히 십자가에서 속량을 치르시고 나아가 그들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아 거듭난 자들은 다름 아닌 구약 언약에서 살아남은 참된 신자들의 영적인 후손들입니다. 그 후손들에게는 두 가지의 영원한 언약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영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새언약의 표현으로 하면, 말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보내신 그리스도의 영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말씀인 정경입니다.
[
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 59:20-2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은 본문 16절과 17절에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셨도다.”
즉, 주의 백성의 죄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중보자가 되시고 자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구원을 베푸시며 완전한 의를 이루시고 그 의로 갑옷 삼아 입으시고, 그 구원을 그에게 속한 남은 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중재자가 되셔서 의를 이루신 후 그 의의 갑옷으로 무장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무장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심은 자기 백성을 의로 지켜주시고 살려내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무장을 하신 중재자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드린 이방 나라들을 가만두지 않으시고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의입니다. 그리고 그 의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및 그분의 사역입니다. 그분의 사역은 호흡이 마칠 때까지 평생 완전한 의를 이루시고 흠 없는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주의 백성의 죗값을 속량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의’ 또는 ‘공의’를 갑옷으로 비유합니다. 특히 의는 가슴과 배와 등 뒤를 막아주는 갑옷의 호심경으로 비유됩니다.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엡 6:14).
의의 호심경은 신자가 지닌 가장 든든한 영적 무기입니다.
에베소서 6장 11절을 보면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말합니다. 전신 갑주는 전투할 때 사용하는 무기를 말하는 것인데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의 호심경은 영적인 무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17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는다”는 것은 전신 갑주를 입었다는 뜻입니다. 그 중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라는 표현은 바울이 언급한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라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의’를 갑옷 또는 호심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갑옷이 됩니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로마 군병의 호심경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군병의 호심경을 보면 그것은 온 몸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며, 가장 찬란한 부분입니다. 누가 보아도 로마 병정을 볼 때 한눈에 확 띄는 것은 호심경입니다. 호심경은 목부터 무릎까지 이어지는 옷입니다. 호심경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부분은 앞면에, 다른 부분은 뒷면에 있고, 그 두 부분은 놋으로 만든 어깨의 연결 고리로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또한 호심경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미끈하고 강한 동판으로 만든 것과 물고기 비늘처럼 매우 작은 동으로 여러 겹을 연결하여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무게는 일반 로마 병정의 호심경은 약 18 킬로그램 정도이고 대형 사이즈일 경우 35 킬로그램 정도입니다. 성경 연구가들에 의하면 골리앗 장군이 입었던 호심경은 비늘형으로 된 갑옷으로써 55 킬로그램이 넘었다고 합니다.
한편, 로마 병정이 호심경을 입고 다니는 동안 흥미로운 일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로마 병정이 호심경을 입고 다닐수록 시간이 지나면서 군인들 사이에서 호심경끼리 서로 마찰되면서 광채를 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 병정이 밖에서 행렬을 할 때 태양빛이 비치면 밝은 광채가 비치게 되는데 그 아름다움은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면에서 호심경은 방어용 무기일 뿐 아니라 적군의 눈을 잠시 멀게 만드는 공격용 무기기도 하였습니다. 로마의 전쟁 기사를 살펴 보면, 적군이 로마 군사의 호심경에 의해 반사되는 빛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어서 패전하게 된 사건들이 여럿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호심경을 창고에 오래 둘 경우 녹이 슬어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갑옷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로마 병사들은 호심경은 닳을수록 더 빛이 나기 때문에 평생 자기 호심경을 바꾸지 않고 매일 입고 다녔습니다. 아무튼 이처럼 최고의 광채를 내는 당당한 무기가 바로 호심경이었습니다.
호심경이 주로 막아주는 부위는 가슴과 어깨와 등입니다. 의의 호심경을 입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신자를 공격하여 무너뜨리려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공격자는 누구이며 어디를 공격합니까? 그 원수는 마귀입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그리고 마귀가 공격하는 부위는 신자의 심장입니다. 가슴을 통하든, 어깨 위에 무거운 충격을 주든, 또는 등을 공격하든 궁극적인 공격 목표는 심장입니다. 만일 마귀가 신자의 가슴 부분을 직접 공격할 수 있으면 신자는 곧바로 땅바닥에 쓰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신자의 심장을 칼로 찌르려고 할 것입니다. 신자의 심장을 죄와 악으로 썩게 만들기를 시도할 것입니다. 종종 신자의 등 뒤에서 비수를 꽂으려고 할 것입니다. 어깨에 염려라는 무거운 짐을 한없이 올려 놓아 결국 신자가 염려 가운데 심장이 파열되게 할 것입니다.
아무튼 마귀는 어떤 방법으로든 신자의 심장을 파괴함으로 그 인생을 박살내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의의 호심경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라는 원어를 보면 ‘디아볼로스’입니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비방’이란 뜻입니다. 이 단어의 동사형의 의미는 쉬지 않는 비방과 헐뜯음으로 상대를 공격해서 상대의 마음을 무너지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Slanderer, 즉 참소자입니다. 그는 거짓과 간교함과 독한 말을 사용하여 신자를 비방하고 참소합니다.
이처럼 사탄은 가장 악한 참소자이기에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법정까지 찾아가 주의 백성을 참소했습니다. 욥기를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비방하며 고발하였습니다. 또한 사탄은 틈만 나면 신자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의 감정과 생각이 정상적으로 동작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약점을 잡아 계속 비방하고 조롱하고 거짓을 말합니다. 그는 등 뒤에서 공격하고 또한 정면에서 쉬지 않고 비방하며 거짓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신자의 마음은 염려에 짓눌려 지쳐 포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귀는 여전히 그는 틈도 주지 않고 계속 신자의 가슴과 등을 공격하여 신자의 심장이 파열되게 합니다. 따라서 의의 호심경이 없는 사람은 사탄에게 계속 참소를 당하고 비방을 당하면서 마침내 그 마음이 무너져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참소자 사탄이 신자의 마음에 던지는 공격은 이러합니다.
‘너 같은 녀석이 무슨 신앙 생활을 해? 이 악한 놈. 너 전에 이러이러한 나쁜 짓을 했지. 너는 여차여차한 죄와 죄악이 있으니 너는 아주 나쁜 놈이요, 형편없는 놈이요, 죽어 싸며, 이제 너는 율법에 의하여 지옥에 떨어지는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다.’
마귀는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군수군하게 하여 그 공격 대상을 왕따로 만듭니다.
‘저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해서 비참과 실패를 하였다고 해. 자녀들은 어떻고 가족은 그 일로 어떻게 되었고 그래서 저 모양이라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귀의 유혹에 빠지면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남의 약점을 잡아서 틈만 나면 그것을 들쳐내어 그것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즉, 마귀와 똑같이 참소자, 비방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눈 속에 들보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티를 찾아 비방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구브로에 가서 바로라는 섬에 갔을 때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납니다. 그런데 이 박수 무당이 바울이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자 사도 바울을 비방합니다. 그러면서 공작을 펴서 총독으로 하여금 예수를 못 믿게 만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때 성경이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 13:9-10).
바울이 바예수라 하는 거짓 선지자에게 마귀의 자식이라고 부르며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하다고 했는데, 여기서 거짓과 악행은 다른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비방하고 대적한 일을 말합니다. 이처럼 비방은 마귀의 일이며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일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비방은 사탄의 일입니다. 로마서 1장 28-30절을 보면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비방을 싫어하십니다. 수군수군거리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는 사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수군거림과 비방에 대하여 베드로는 당장 신자들에게 내다버릴 것을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이 말씀은 갓난아이들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관심을 갖고 힘써 말씀에 노력하지 않으면, 마귀의 유혹에 빠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기, 비방하는 말, 모든 악독과 기만과 외식을 행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언제나 마귀의 미혹에 빠져 “자기 자랑, 남의 흉”을 보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의의 호심경을 입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전쟁에 나가면 그는 사탄의 비방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여 그의 가슴이 파장될 것입니다. 사탄은 쉬지 않고 정죄할 것입니다. 비방할 것입니다. 이 사람 입술을 통하고 저 사람 입술을 통해서 의의 호심경을 입지 않은 자의 마음을 칼로 칠 것입니다. 등 뒤에서 찌를 것이며 그 삶의 어깨에 계속 비방의 짐을 쌓아 올릴 것입니다.
이 때 사탄의 비방과 정죄의 공격을 받고 무너지는 마음은 그 생각이 비정상이 되고 감정은 공포와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따라서 쉽게 정신병 증세가 나타납니다. 이 정도가 되면 그 신자는 이미 사탄에게 패배한 패잔병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패잔병이 되었을 때는 사탄의 포로로 전락하여 더 큰 비참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보통은 우울증에 걸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사탄의 이러한 영적 궤계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탄의 무기인 정죄와 비방과 수군거림에 대하여 영적 무기를 주셨습니다. 그 무기는 의의 호심경입니다.
그러면 의의 호심경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의의 호심경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입게 될 의의 호심경은 완전한 의의 호심경입니다. 이 의의 호심경을 입으려면 자기 의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의 헛된 알량한 자기 의의 썩은 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죄악에 물든 옷을 회개하며 우리의 더러운 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이 과정이 없이는 의의 호심경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호심경을 입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의입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의를 전제로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 의의 호심경을 입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사탄이 비방합니다.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 수군거립니다.
“너는 안돼. 너는 죄가 많아. 그 죄를 다 어떻게 할 거야. 그러고도 뭐 교회를 다니겠다고? 그러고도 신앙 생활을 하겠다는 것이야? 그것은 위선이잖아.”
이때 우리가 의의 호심경을 입고 있는 신자는 마귀에게 담대히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 나의 의는 없다. 나는 죄인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을 통해 죄사함을 받았으며 예수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를 옷 입고 산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사탄아 더 이상 나를 정죄하지 말라. 비방하지 말라. 그래 나는 죄인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내 죄를 사해 주셨다. 이제 나는 나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호심경을 입었다. 그리고 이렇게 죄악 된 삶을 회개하고 바른 삶을 살고 있지 않느냐. 와서 해 볼 테면 해 봐라. 이 사탄아.”
분명, 내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를 소유할 때 우리에게는 담대함이 넘칩니다. 자신감이 넘칩니다. 이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원히 죄사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성령을 따라 의로운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용기가 흘러 넘칩니다.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강해집니다. 베드로의 권면을 따라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랍니다”(벧전 1:13). 따라서 더 이상 사탄의 비방과 궤계가 먹혀 들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주 하나님과 예수님 외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아들이 도박 빚을 지고 빚쟁이를 피하여 도망 다닙니다. 그 다음 날 빚쟁이들이 그 아들의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들이 진 빚을 전부 받아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아들은 가족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도망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빚쟁이처럼 생긴 사람이 어디에 있으면 불안과 공포 때문에 무조건 도망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버지에게 어렵게 전화를 하여 통화를 하게 되고, 아버지는 아들의 도박 빚을 다 갚아준 지 오래 되었다고 알려줍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아들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자유를 얻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더 이상 빚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지불해야 할 모든 빚을 아버지께서 청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주 안에서 의의 갑옷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녀이기 때문에 내게는 의의 호심경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 바랍니다. 내 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예수님의 의입니다. 그 의가 바로 신자들의 영적 무기인 의의 호심경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호심경을 차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의의 호심경을 찰 때 심리적 변화, 신분적 변화, 영적 변화가 나타난다고 알려줍니다. 로마서 5장 17을 봅시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선물을 받은 자들, 곧 의의 호심경을 입고 사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한다고 합니다. 왕노릇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빚쟁이 때문에 노예로 사는 삶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떳떳하게 다스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 안에서 죄로부터 자유로운 영광스러운 삶은 산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의의 호심경이 없을 때는 조롱과 비방을 당할 때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의의 호심경을 차니 마귀의 수군거림과 조롱에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고, 나아가 생명과 자유 안에서 왕처럼 풍성하며 충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은 호심경을 차고 있을 때 강한 자신감을 느꼈습니다. 우리도 의의 호심경을 차고 있을 때 자신감과 담대함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여집니다. 그 이유는 의의 호심경은 공의로운 율법의 정죄를 완벽하게 다 막아내기 때문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신자가 언제 담대하여집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을 때입니다. 담대함이 생기면 힘찬 기도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호심경을 입고 있는 자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 기도합니다. 이는 내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힘 입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이처럼 신자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인 의의 호심경을 차고 다니면 담대하여집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마귀의 모든 수군거림과 비방에 대해 넉넉히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대장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담대한 마음이 더욱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 3:21).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 10:35).
그러한 담대함 가운데 살아가면서 신자는 더 이상 마귀에게 그 놈이 공격할 빌미를 주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신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처럼 담대한 믿음의 삶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의로운 삶을 드러냅니다. 의의 호심경을 찬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은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찬란하고 화려하게 드러냅니다. 이에 마태복음 5장 16절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1)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단 한 사람의 의인이 자기 백성에게 없는 것을 아시고 친히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의인으로서 실제로 자기 백성의 죄값을 치러주시고 우리에게 없는 완전한 의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시간 내게 의의 호심경을 쥐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합시다.
십자가에서 당하실 일이 얼마나 무한하게 고통스러운지를 아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또한 아버지께 부탁합니다.
[
33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더라
](막 14:33-36)
그리고 곧바로 성전의 경비 대장들에게 붙잡히시고 밧줄로 결박 당하십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베드로는 저주 가운데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이제 실세를 가지고 있는 은퇴한 대제사장 안나스 앞에 홀로 서시고 안나스 앞에서 병사에게 맞으십니다. 그 다음 공식적으로 대제사장인 가야바 앞에 서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조롱과 협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그리고 이동하는 사이에 계속 성전 군사들에게 조롱과 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눅 22:63-65).
그리고 빌라도에게 넘겨져서 심문을 당하고 헤롯을 만나서 조롱과 멸시를 당합니다. 그때 가룟 유다는 자살해서 죽고, 이스라엘 백성은 빌라도 앞에서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만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하지 않으면 로마 황제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고 빌라도를 협박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의 피를 자신들과 후손들에게 돌리라고 빌라도에게 도전합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
그 후 곧바로 그 무서운 총독의 군병들의 손아귀로 예수님이 넘겨집니다.
[
26 이에 (총독 빌라도는)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 27:26-31)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예루살렘 영문 밖으로 쫓겨 나십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오르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십니다. 그곳에서 6시간을 매달려 계시면서 오후 3시에 예수께서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예수께서 율법의 저주인 십자가를 지심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순간이 바로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예수께서 세상 모든 죄를 지고 아버지의 거룩하고 무한한 진노를 받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우리 주 예수께서 주께 속한 모든 백성의 모든 죄와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다 품고 하나님의 무한한 저주를 당하는 순간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13).
아버지와 아들의 무한한 연합이 우리와 세상 죄를 감당하심으로 끊어져야 하는 그 고통은 우리 피조물로서는 전혀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괴수들도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 형을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피할 수 있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 버림 받으며 끊어지는 그런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라고 우리의 둘째 아담이며 머리이신 예수께서 아버지께 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아버지의 뜻과 소원에 자신의 뜻과 소원을 항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때의 무한한 고통은 지옥의 고통보다 훨씬 더 무한하게 큽니다. 그 이유는 지옥의 고통은 피조물 세계의 고통이지만 아들이 당하시는 고통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한하신 아버지로부터 받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피조물은 예수께서 받으신 고통을 억만분지 일도 헤아릴 수 없으며 이는 우리를 위해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그분의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에 대해서도 억만분지 일도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죗값과 세상 죄를 다 담당하시도록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이 고통 당하시는 순간 얼굴을 돌리신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사랑 역시 무한한 사랑이며 이 사랑 역시 우리는 전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이 떠나시고 무한한 고통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영혼은 곧바로 아버지 품에 안깁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흘 후에 죽음에서 일으켜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께서는 이러한 무한한 고통을 치르고 친히 아버지로부터 얻어내신 공의로 우리에게 의의 호심경을 입혀주셨고 또한 맘껏 의를 행할 수 있는 부활 생명도 주셨습니다.
그것이 21절이 말하는 여호와의 새언약입니다. 주의 언약은 친히 의의 호심경을 이루신 후 부활 승천하심으로 주의 영을 보내시고 성경을 완성함으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의의 호심경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고 후손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의 호심경이 없는 자들마다 저주를 받고 지옥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의 호심경을 차기 바랍니다. 의의 호심경을 찬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떳떳합니다. 또한 마귀의 수군거림과 비방 공격을 막아내고 우뚝 설 수 있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0-11).
이미 의의 호심경을 찬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를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한 생명의 역사로 신자가 의의 역사를 나타낼 때 원수 마귀는 의의 광채에 눈이 멀게 되면서 신속하게 물러갈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영적 전쟁에 승리하게 되면서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킬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시는 이 시간, 그분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에게 의의 호심경이라는 영적인 무기를 주기 위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한없는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의의 호심경을 차고 다니며 그 호심경을 사용하기 바랍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삶에 나타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여지고 더욱 빛을 내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자신감과 담대함과 의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온 세상에 비추는 영광스런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항상 의의 호심경을 착용하기 바랍니다. 주의 의의 호심경을 열심히 차고 다니며 의의 빛을 반영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데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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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는 일마다 기쁨이 되고 숨쉬는 순간 순간 마다
즐거움과 사랑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