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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묵상글 들 ( 연중 제31주일. - 마음에 새기고 마음을 다하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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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마음에 새기고 마음을 다하는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오늘 신명기는 거듭 명심하라고 그러니까 마음에 새기라고 합니다.
잊지 않고 기억키 위해 우리는 간단한 것은 손바닥에다 적어 놓고,
수첩이나 비망록에 적기도 하고 더 중요한 것은 돌판에 새기기도 하지요.
제가 북한에 갔을 때 참으로 한탄을 했던 것이 곳곳에 김일성 우상화 글귀,
곧 "우리의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글귀를 돌에 새겨놓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김일성을 마치 하느님처럼 여기는 것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돌에 새겨야 할 것은 하느님의 계명이고
모세도 자기가 받은 하느님의 계명을 그래서 돌판에 새긴 것인데
오늘 신명기는 그것을 돌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에 새기라는 것은 또한 머리와 생각 이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이 머리와 생각에만 있지 않고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사실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아는 것만도 대단하지요.
그것을 모르기에 다른 것, 예를 들어, 돈을 더 중요시하다가
건강 상하고 인생 망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제일 중요한지 아는 것은
생활의 지혜를 넘어 인생의 지혜이며 행복의 첫걸음입니다.
이리 가야 할 것을 저리 가지 않게 하는 것이며
방향을 잡았기에 비로소 첫걸을 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걸음이란 그야말로 가야 할 걸음의 첫 번째일 뿐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이 제일 소중함을 알았다면 이제 사랑해야 하고,
그것도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데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마음에 새겨져 있어야 하고 분심 곧 마음의 갈림도 없어야 합니다.
마음에 갈림이 있다는 것은 사랑하는 다른 것이 있다는 말이고,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 외에 다른 것에도 관심이 있다는 거지요.
이 분심 중에 가장 흔한 것이 하느님 사랑이 중요하다는 걸 머리로 알지만
욕망이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좋아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여
마음이 갈리고 사랑이 갈리는 것입니다.
욕망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소유하게 하지만
사랑은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 봉헌케 하고,
좋아하는 것 곧 소유물뿐 아니라 자신마저 봉헌케 하지요.
이것이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우리는 여기서 프란치스코의 다음 말을 오늘 묵상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미 인준 회칙 23장)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넋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모든 것에서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정신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기력과 영혼의 감각과 육신의 감각을 당신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치고 다른 데에 쓰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나이다.
그리고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 모든 이를 당신의 사랑으로 이끌고,
다른 이들의 선을 우리 것처럼 즐거워하며 불행 중에 있는 이들의 고통에
함께 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음으로써 우리 자신과 같이
우리 이웃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나이다."(주의 기도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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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3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웃사랑과 하느님사랑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부터 이미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레위 19,18)는 ‘제 2계명’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서의 가장 오래된 부분들에 있어서도 벌써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나 적대는 하느님께 대한 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창세 3,12; 4,9). 또 율법도 하느님께 대한 의무와 이웃에 대한 의무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웃들 특히 가장 버림받은 자들과 자신과 별로 상관없는 자들을 돌보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결합될수가 없습니다. 이웃에 대해 냉담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생각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사랑의 이중계명은 율법의 정점이며 완성이요 중심입니다. 이웃사랑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박애가 아닙니다. 그 종교적 성격을 두 가지 점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 자신이 모범을 보여 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원천이 하느님 자신이시며 따라서 우리의 이웃 사랑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느님의 업적이라는 점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에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 인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하느님께로 오며 동시에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실로 인하여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기에 우리도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 모두가 세상 끝날까지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근본 요청인 동시에 최후의 심판도 바로 이 사랑의 실천에 의해 판가름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이것이 예수님께서 남기신 유언입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의 사랑의 유언은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 실천되어 왔고 우리 또한 사랑을 실천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이에게 미치며, 사회적 내지 인종적 차별의 벽을 모두 타파하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이들을 소중히 여깁니다. 더 나아가 원수에 대한 사랑까지도 요구합니다. 사랑은 의기소침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한없이 용서하고, 원망을 품고 있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화해하며, 모든 것을 참고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악을 선으로 보답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의 찬가(1고린 13장)에서 사랑의 본질과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이미 지상에서 영원한 하느님의 세계에 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인하여 교회 공동체가 성숙한 인간이 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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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연중 제 31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불리는 ‘셰마 이스라일’을 들려줍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맨 먼저 배우는 것이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바로 이 “셰마”라는 신앙고백문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 이 기도를 정해놓고 드립니다. 그리고 경건한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이마와 왼쪽 팔에 경구갑을 부적처럼 붙들어 매고 다녔고(신명 4,8-9 참조),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민수 15,37-39).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십계명은 6백 조항이 넘게 보태어져 실천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지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도 이 질문을 예수님께 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었던 계명으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 다~.”(마르 12, 29)
이 말씀은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밝히신 ‘하느님의 존재’ 와 ‘우리의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계시입니다. 곧 행동의 원리로서의 사랑의 계명에 앞서, 먼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와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한 분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이신 분과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인 우리와의 관계에서 사랑의 계명이 흘러나옴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근거요 바탕이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며, 바로 이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율법학자에게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모세가 말한 구약의 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과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구약>에서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곧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동포로 한정하거나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시킬 뿐입니다(레위 19,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마태 5,44-48).
또한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듯이,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의 ‘하느님 사랑’(6,4-5)과 <레위기>의 ‘이웃 사랑’(19,18)을 한데 묶으시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사랑의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사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며, 그러기에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좀 더 확장해서 표현해본다면, 형제가 곧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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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사랑이 살아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7). 오늘 이 시간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얻기 바랍니다. 사랑이 살아있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많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으며, 가난한 자와 곤궁한 자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비극에 처한 자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사랑에는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만일 수고를 느낀다면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라스머스’ 라는 병을 아십니까? 이 병은 외롭게 자란 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병입니다. 증상은 신체발육이 부진하고 온 몸에 힘이 빠져 시름시름 앓는 증세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영양결핍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사랑을 한창 공급 받아야 할 아이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표현하지 못할 때 이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이병에 대한 의사의 처방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무엇일까요? 예, “매일 사랑을 고백하세요!”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좋은 약이랍니다. 사실 매일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부간, 부자간에 고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서로의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질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부간에도 “여보 사랑해!” 라는 표현을 자주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들은 대개 ‘그냥 눈빛만 봐도 알지, 그것을 꼭 표현해야 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꼭, 그리고 자주 듣고 싶어합니다. 사실 남자들도 “사랑한다”는 말에 무덤덤해 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기뻐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자녀와 듣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들로부터 “사랑한다”는 표현을 듣게 될 때 모든 피곤이 풀립니다.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줄 때 삶의 활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합니다” 라는 표현을 자주 하시길 권합니다.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 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사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써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행위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테레사 효과를 아시지요?
미국 하버드 의대생들을 봉사 활동에 참여시킨 후 체내 면역 기능을 측정해 보았더니 면역기능이 크게 증강되었답니다. 또한 마더 테레사의 전기를 읽게 한 다음 인체 변화를 조사했더니 그것만으로도 생명 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인체에 도움이 되는 항체가 생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진은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거나 봉사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면역기능이 높아지는 것을 두고 마더 테레사 효과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사랑을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주님을 차지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을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3장34절 이하에서 주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사랑의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나의 벗이 된다”(요한15,13)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5,46) 하시며 끼리끼리의 사랑을 경계하셨습니다.
1요한 3,14에 보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하고 있고 1요한4장20절에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 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적고 있습니다.
로마서13장8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사랑은 손발에서 열매 맺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에 대해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루카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운동 경기에서 골인 한 것과 골을 넣을 뻔 한 것은 분명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술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있는 사랑을 가슴으로 끌어내리고 가슴에 담긴 사랑을 마침내 손발로 행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지식의 앎이 아니라 사랑의 삶이 살아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진정한 사랑은 이것저것 재지 않습니다. 그저 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보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사랑 그 자체가 보상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많이 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큰 부자의 아들이 탄 경비행기가 사막을 지나다 강한 모래 바람을 만나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수색대를 조직해 사막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불행히도 아들의 생존여부조차 알 수가 없었습니다. 끈질긴 수색 끝에 비행기 추락지점을 발견한 것은 며칠 뒤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비행기의 잔해와 조종사의 시체만 있을 뿐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실망하지 않고 아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제발 아들을 지켜주십시오.” 기도를 마친 뒤 아버지는 수백만장의 전단지를 사막에 뿌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뭐라고 써야 할지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사막에서의 생존법? 아니야!” 한참을 고심하던 아버지가 결국 전단지에 적은 글은 단 한마디 였습니다. “아들아! 사랑한다!” 아버지의 그 외마디 절규가 사막 곳곳에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탈진해 가던 아들이 그 전단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니 반드시 나를 찾아내실 것이다!” 전단지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한 아들은 이를 악물고 버텼습니다. 사막한가운데서 아들을 찾는 수색작업은 고되고 험난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수색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수색대는 사막 한가운데서 아버지가 보낸 전단지를 손에 꼬옥 쥐고 쓰러져 있는 아들을 발견 했습니다.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아들을 구했습니다. “아들아, 사랑한다!”는 한마디가 사막의 열기와 배고픔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과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려움 안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으로 여전히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언제나 주님을 향한 희망 안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 LOVE
L은 웃음(laugh)이니 서로 웃는 모습을 보여라.
O는 OK이니 서로 상대의 말을 옳다고 하라.
V는 빅토리니 힘을 합쳐 승리하라.
E는 엔조이니 서로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가 되라!
## 에덴 동산에 사는 하와가 아담에게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아담에게 “자기 나 사랑해!” 하고 물었지요. 그러자 아담이 “그럼”하고 대답했어요. 하와가 다시”정말 나를 제일 사랑하는 거지?” 물으니 아담이 “그렇다니까?”하고 대답했어요. “내가 제일 이뻐?”하와가 묻자 “야! 여기 너 밖에 다른 사람이 더 있니?” 아담이 대답했답니다.
거듭거듭 확인하려는 하와나 그렇게 멋없이 대답하는 아담이나….
천생연분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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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사제직,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
⒈ 신앙의 최소한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최대한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 이래로 계명을 정해 놓고 죄를 짓지 않도록 기준을 마련해 놓았으며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목표를 정해 놓았습니다. 기원 전 천2백5십 년 경에 이런 문명을 이룩했던 이스라엘은 당시로서는 첨단 정신 문화의 수준의 종교였었습니다.
⒉ 이스라엘이 이렇듯 높은 수준의 정신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계기는 아브라함이 바벨탑 문명의 우상숭배를 벗어나서 하느님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바벨탑 문명에서는 인신제사가 유행했습니다. 처음에는 전쟁의 결과로 사로잡은 포로를 제물로 바치더니 나중에는 전쟁이 뜸해지니까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 흔적인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칼로 찌르려던 순간에 천사를 시켜 막으신 일입니다(창세 22,1-19).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진 문명은 사람 대신에 짐승을 붙태워 사람들의 죄를 속죄한다고 믿었던 제사 신앙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⒊ 짐승의 피를 쏟아버리고 그 살코기만 불살라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대속물 신앙에 있어서 전문적으로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하는 직분이 확립되기 시작한 것은 통일 왕국을 세운 다윗 때였고 대사제와 사제들의 조직이 생겨난 것은 성전을 지은 솔로몬 이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얼한 지파는 십일조를 내어 성전 봉사를 맡은 레위 지파를 먹여 살렸고 레위 지파가 낸 십일조는 사제들의 몫이었습니다. 게다가 사제들은 별도로 성전세를 거두었고, 제사를 지내려던 백성에게는 봉헌하고 난 제물까지 차지했으므로,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어려웠어도 사제들은 여유로웠습니다. 더군다나 왕과 대신들과 궁정 예언자들이 모조리 학살당하고 바빌론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이후에는 이 세습 사제들외에는 이스라엘 안에서 지도자 계층이라 할만한 사람들이 죄다 사라졌으므로, 사제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이들은 다윗 시대에 대사제였던 사독의 후손들이어서 사두가이파라 불리었습니다.
⒋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이 사두가이파 사제들과 대립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율법에 따라 소년 시절부터 해마다 성전을 방문하여 순례하시던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두가이파 사제들이 성전에서 자행하던 온갖 비리와 부패상을 잘 알고 계셨기에, 공생활 초기에도(요한 2,13-22) 말기에도(마르 11,15-29; 마태 21,12-13; 루카 19,45-48) 이 복마전과도 같았던 성전의 질서를 정화시키고자 하셨고, 이로써 사두가이파 사제들과의 관계는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정도로 악화되었으나 이를 지켜본 백성들은 환호하였습니다(요한 2,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 대신에 백성들 사이에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시며 하느님께 이르는 새로운 길을 가르치셨고, 제자들에게는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어 그 성사 거행의 임무를 맡기심으로써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의 새로운 양식도 확립하셨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십자가상 제사로 세상의 죄를 없애셨다는 대속 신앙이었는데, 이것이 짐승 번제의 대속물 종교에서 한 차원 높게 개혁된 대속 신앙의 제사였습니다.
⒌ 사제직의 역사가 이러했기 때문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께 대해서 ‘사제’라는 이러한 불명예스러웠던 구약종교에서 유래된 호칭을 함부로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서기 68년과 70년에 두 차례의 독립전쟁이 실패로 돌아가고 성전마저 파괴되어 사두가이파가 몰락하고 나서야 서기 백 년경에 히브리서가 쓰여지면서 비로소 예수님께 대사제라는 호칭을 붙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안에서 예수님을 대사제라고 불러드린 성서는 히브리서가 유일합니다.
⒍ 그래서 그리스도교 사제직의 역사는 히브리서를 기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와 고대 교회 시절까지만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만 대사제의 호칭을 불러드렸고 교회 안에는 사제라는 명칭이 따로 없었습니다. 단지, 신자들 안에서 공동체의 지도자로 선출된 이들이 돌아가면서 성찬례를 집전하였고, 성찬례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거행하는 주체는 공동체였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제사를 드려야 함을 신앙으로 철썩같이 믿고 있었고, 따라서 예수님께서 남기신 제사를 주례하기 위한 사제를 공동체가 선출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시대의 사제직은 구약시대와 달리 철저하게 봉사직이었고 공동체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세습 사제직의 전통 역시 부정되었습니다.
⒎ 그러던 것이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그 대신에 로마 제국의 법적인 유산이 가톨릭 교회로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12세기 이후 중세부터 오늘날까지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은 독신 남성으로서 제사 봉헌을 전담하는 공직자 신분으로 고착되었습니다. 이를 직무 사제직이라 합니다. 평신도들의 공동체가 성사에 참여하고 자신들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본연의 사제직무인 보편 사제직이 강조되기 시작한 때는 20세기 중반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였습니다.
⒏ 공의회는 교회 헌장, 사제 직무 교령과 특히 평신도 사도직 교령을 통하여 평신도들이 수행해야 할 보편 사제직을 대단히 강조한 데에는 사제직의 성서적이고 교회적인 전통을 회복해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히브리서가 어렵사리 회복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온 교회를 통하여 계승되게 하기 위해서였고, 사도단의 으뜸이었던 베드로 사도 역시 이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
⒐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평신도들이 행해야 할 보편 사제직무는 첫째는 직무 사제직을 맡은 사제들이 집전하는 성사에, 특히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계승하는 일이고 이로써 대속 신앙을 수용하는 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바쳐 세우신 유산입니다. 주교와 신부로 이루어진 직무 사제들은 성사를 집전할 의무가 있고, 이들의 봉사를 통해 평신도들을 비롯한 온 교회가 성사를 거행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미사의 구경꾼이거나 손님이 아니라 주체입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미사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⒑ 보편 사제직무의 두 번째는 성사생활의 지향이 가리키는 대로, 자신의 온 삶을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일로서, 이를 통해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된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자신의 삶을 제물로 삼아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적인 실존이 실현되고 따라서 대속 신앙도 실천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우리네 삶으로써 세상의 죄를 없애자는 것입니다.
⒒ 그러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성사가 거행되는 성당이 거룩하듯이, 우리네 삶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 즉 가정이나 일터 그리고 모든 활동장소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노력입니다. 특히 가부장이요 가모장으로서 부부는 가정 교회의 사제로서 가족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아이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주는 안수 예식에 사명감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마음과 정신과 몸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⒓ 이렇게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제사는 역사적으로 볼 때, 우상 종교에서 이루어지던 인신공양 풍습에서 구약 유다교에서 실시한 짐승의 번제로 개혁되었던 것이 1단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단계에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상에서 봉헌하신 예수님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치는 성사로 신약의 제사 전통이 확립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제사 전통의 과제는 사제직무의 공동체성을 회복함으로써 제사적 실존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칠 줄 알아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공의회가 가르치는 사제직의 미래상이 우리 교회 현실 안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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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키엣 대주교님.
아주 부유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처럼 멋진 집을 가지고 있었고 해변과 경치좋은 산에도 고급 별장과 고급스런 호텔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 주위에는 언제나 구걸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느님보다 자신의 사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녀의 운전기사가 있었습니다. 깊은 신앙심과 효성을 가지고 있는 그는 언제나 열심히 미사를 가고 성경을 읽고 자신도 가난하지만 주변의 불쌍한 사람들을 지나치지 않는 따뜻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부인을 태우고 가던 차가 사고가 나서 두 사람 모두 사망하였고 두 사람은 모두 하늘나라에 올라가게되었습니다. 그들을 맞이 한 베드로 성인과 천사들은 고층 빌딩으로 가득 찬 거리를 지나 일꾼들이 열심히 벽돌과 시멘트를 나르며 집을 짓고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베드로 성인은 지금 이집은 3층집인데 앞으로 모든 편의시설이 갖춰질거라고 하며 이 집이 바로 운전기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은근히 기뻤습니다. 기사 집이 이렇게 좋다면 자기 집은 훨씬 좋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 성인과 천사는 부인을 데리고 시내를 벗어나 한참을 가다 아주 허름한 시골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일꾼들이 시멘트와 벽돌이 아닌 대나무와 짚으로 오두막을 짓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성인이 여기가 바로 당신의 집이라고 말하자 부인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왜 기사보다 나쁜 이런 초라한 집에 있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 성인이 대답했습니다. “하늘 나라의 집은 각자 자신의 하늘나라로 보낸 제물로 집을 짓습니다.” 부인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러면 기사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벽돌과 시멘트를 그렇게 빨리 하늘로 옮겨 놓았죠?” 베드로 성인이 대답했습니다. “한 순간에 모두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제물을 옮기는데 그는 자신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미사에 참석하면서 철 한 묶음씩을 보내고 묵주기도 한번을 바치면서 한 주먹의 시멘트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때마다 대리석 하나씩을 하늘에 올려보냈습니다. 이웃을 위해 희생할 때 마다 어둠을 밝혀줄 불빛 하나씩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평생동안 천국에 제물을 보냈으니 이제 그만큼 받는겁니다. 그런데 부인은 평생을 세상에만 집을 지었고 성경을 읽지도, 사랑을 베풀지도 않았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지도 않았기때문에 단지 대나무 몇 그루만으로 집을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변하지만 사라지지 않습니다”는 진리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영육이 머무는 곳은 언젠가 변할 것입니다. 죽은 육체는 차갑고 어두운 지하에 누워있겠지만 영은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이 세상에서 이룬 공복에 의해 영이 머무는 곳이 정해지고 세상의 운명 그대로가 아닌 새로운 운명으로 다시 태어날것입니다. 아무리 부유하고 권세를 가진 부자라 해도 죽은 후 그가 받을 집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비우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가진 것을 나눈 사람은 천상에서 다시 돌려받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을 준비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영의 삶을 돌보는 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초겨을이 시작되었습니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세월의 빠름을 느낍니다. 11월 첫날, 교회는 모든 성인을 기리며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합니다. 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이신 그분들이 어떻게 하늘 나라의 영광을 누리게되셨는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해야하는 일을 ‘다음’으로 미루면 그 ‘다음’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그것을 시작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세월은 내가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도록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고 그 길을 가야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있음을 알게 하여주소서. 언제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찾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까지 하늘 나라에 보낸 제물로 지은 나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요?
2. 11월이 되었습니다. 11월은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3. 돌아가신 가족과 성인들을 되새기고 기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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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람들이 저를 싫어해요. 성당 다니는 사람들이 어떻게 왕따를 시킬 수 있죠?”
어떤 분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면서 눈물로 호소하십니다. 그래서 이분들에 직접 물어보았냐고 여쭤보니, 자신이 나타나면 시선을 돌리고 말도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직접 그 이유를 물었는지 여쭤보니, 자기들끼리만 따로 모임을 하면서 자기를 왕따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분명하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유를 ‘직접’ 물어보셨어요?”
직접 물어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것을 보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물어본 뒤에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고 했습니다.
며칠 뒤, 이분은 환한 미소를 띠며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서로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 모두 풀었다는 것입니다. 눈치를 보는 자매님 모습을 보며 그 공동체 분들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말을 걸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눈도 잘 마주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또 사적인 모임이 갑작스럽게 생겨도 이런 자리를 힘들어 할 것 같아서 연락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십니다.
지레짐작은 서로 간 오해를 낳고 서로 힘들게 하는 시작점이 됩니다. 여기서 잘못된 판단이 나오고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을 낳게 됩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랑’입니다.
율법 학자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 몸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은 지레짐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인정하고 지지하면서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지레짐작하면서 불평불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사랑’이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레짐작으로 하느님을 판단하고 나의 이웃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이에 불신과 오해가 가득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가운데 사랑은 점점 커져서 우리의 진정한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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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보지 않고는 나를 발견할 수 없다(매튜 존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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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있는 삶
일주일 중 이틀(화, 수)은 성지에 함께 생활하는 다른 신부님께서 성지 미사를 합니다. 그래서 이 이틀 동안 그중에 밀린 일들을 몰아서 하곤 했습니다. 글을 쓰거나, 강의 준비를 하거나, 또 그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을 만나는 시간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날도 이렇게 못다한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불안했습니다. 이것들을 하지 않으면 한 주를 너무 바쁘게 보낼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실험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글도 안 쓰고, 강의 준비도 하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고 방안에만 있으면 음악을 들으며 책만 읽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종일 빈둥거리기만 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또 한 주를 그렇게 바쁘게 지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망할 것 같은 불안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세상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주님 뜻에 따라 흘러가는 세상이기에 내 생각이 이루어질 확률은 너무나 낮습니다.
여유 없이 힘들게 살기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여유 있는 삶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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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연중 제31 주일이고, 10월 31일입니다. 31일은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생각나는 노래가 있습니다. 감미로운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로 위로를 주었던 ‘잊혀진 계절’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잊혀진 계절도 좋지만 윤동주 시인의 ‘서시’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시인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학생 때 에릭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3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성적인 사랑’입니다. 생명의 목적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생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손을 낳아 번성하는 것입니다. 작은 나비부터, 가장 큰 수염고래,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까지 이 목적은 같습니다. 이 감성적인 사랑에는 윤리와 도덕이 개입하지 않습니다. 본능에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이성적인 사랑’입니다. 철학, 문학, 예술, 건축, 음악은 이런 이성적인 사랑으로 시작됩니다. 이성적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인류의 문화와 문명은 이성적인 사랑에 의해서 꽃이 피었습니다. 세 번째는 ‘종교적인 사랑’입니다. 불교에서는 자비와 보시를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는 희생과 헌신을 이야기합니다.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구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이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종교적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하고,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사랑에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랑을 받는 단계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들숨이 있어야 날숨이 있습니다. 한동안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셨습니다. 흙 속에 있는 씨앗은 물과 햇빛을 받아야 싹이 나옵니다. 사랑 받는 아이는 면역력도 강해지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생깁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가 남을 생각하며 감동할 수 있고, 자신의 애정을 특별한 존재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느낌은 사랑받는 것보다 한결 흐뭇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것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도, 역경도, 굶주림도, 죽음까지도 이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자신의 애정을 남에게 투사하고 나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쏟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단계의 사랑은 받는 사랑과 주는 사랑과 비교할 때 한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든, 받기 위해서든 남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주거나 받는 존재에게 실망하거나 배신당할 염려도 없습니다. 네 번째 보편적인 사랑의 단계입니다. 이는 무제한의 사랑입니다. 애정을 받고, 남에게 투사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나면, 사랑을 자기 주위의 사방팔방으로 전파하기 시작하기도 하고 사방팔방에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 보편적인 사랑을 부르는 이름은 생명, 자연, 대지, 우주, 기, 하느님처럼 문화와 민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합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금 나의 사랑은 어느 차원의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의 사랑은 어떤 단계의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식어 하느님 아버지를 잠시 외면한다고 해도 끝내 우리를 버리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면 기다리지 못하곤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식어 버리면 그들 역시 사랑이 식어버리곤 합니다. 2021년도 이제 2달 남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미워한 이웃을, 나를 미워한 이웃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용기와 힘을 청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고, 우리의 이웃과 이웃을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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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매일의 최고의 선택
-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사랑 -
요즘 강론중 ‘선택’을 참 많이 강조했습니다. 흡사 새로운 발견처럼 참 반가운 말마디 ‘선택’입니다. 그러고 보니 삶은 ‘선택의 여정’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잘 선택하여 살 수 있도록 지혜와 열정, 용기를 주십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타고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태할 수 없는 타고난 것들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도 심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선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고 심판하십니다.
사실 하루하루 날마다 선택할 수 있는 것들만 해도 무궁무진합니다. 하루하루 날다마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입니다.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인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점에서 모세와 예수님도 일치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모세의 명령입니다.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평생토록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그분의 모든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오래 살 것이다.”
몇날이 아니라 한결같이 평생토록 하느님 경외의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모든 규정과 계명을 지킴으로 사랑을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수행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거듭 이어지는 모세의 명령입니다. 이스라엘이 상징하는 바, 우리 하나하나 모두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당장 늘 잘 보이는 곳에 써붙여 놓고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수시로 마음에 새기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살기위하여, 참 사람 내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입니다. 살아갈수록 사랑으로 우리 인생 날로 깊어지고 익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여 알아갈수록 하느님을 닮아가면서 참 나를 알아가게 됩니다.
참으로 갈림없는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와 방향, 중심과 의미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는 최고의 선택도 모세와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모세를 롤모델로 했음이 분명합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 물으시자 첫째만 아니라 둘째까지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누가 여러분을 보고 ‘무슨 맛으로, 무슨 재미로, 무슨 기쁨으로 사느냐’ 묻는 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저는 지체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하는 맛으로, 재미로, 기쁨으로 산다고 말입니다. 사실 하느님 사랑하는 맛이, 기쁨이 없으면 이 삭막한 광야인생 무엇으로 살아낼 수 있을런지 막막합니다. 늘 하느님 사랑하는 설렘의 기쁨으로 새벽부터 일어나 강론을 쓰며 하루를 시작하는 저의 삶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제가 고백성사 처방전 말씀으로 자주 써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녀 소화데레사의 임종어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최고의 화장품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닮은 고유의 아름다운 모습은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치 꽃처럼 제 고유의 크기와 모양, 색깔과 향기의 사랑을 지닐 수 있습니다. 예전 써놨던 자작시 두편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여전한 모두 주님 사랑을 표현한 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임 오시면
달맞이꽃 청초한 연노랑 저고리에
메꽃 소박한 연분홍 치마
달개비꽃 영롱한 연보라 고무신
해드리고 싶네
임 오시면”-2000.7.16.
그러고 보시 제 무수한 졸시拙詩들이 온통 하느님 사랑의 표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눈이 열려 하느님 베푸시는 무수한 사랑을 체험하고 발견하고 깨닫게 되니 더욱 주님 사랑도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사랑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사랑의 천국이옵니다”-2018.10.16.
사랑의 시인, 사랑의 신비가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최고의 시인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이웃 사랑을 통해 검증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주님은 하느님 사랑에 이어 둘째로 중요한 이웃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경천경인敬天敬人을 하나로 묶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십니다. 마음 같아서는 해월 최시형의 말씀대로 경천과 애인(敬人)에다 만물 사랑까지 이르는 경물敬物을 더하고 싶습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가 가져오는 환경위기에 더욱 그리워지는 옛 사람들의 몸에 뱄던 경물 정신입니다.
구별할 수는 있을지언정 분리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만물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율법학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경천경인의 중요성을 새롭게 상기시킵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
언젠가 어느 사랑 많은 자매님이 미사예물이 적다 미안해 하기에 드린 덕담도 생각납니다. “자매님 사랑의 삶 자체가 최고의 미사예물입니다!” 정말 진심이 담긴 덕담입니다. 사실 경천경인의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능가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성대한 전례라도 경천경인 실천의 사랑이 없으면 공허할 뿐이겠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바 경천애인의 본질적 사랑입니다. 율법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하시자 주님을 몹시 흐뭇해 하시면 화답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참으로 경천경인의 삶에서 하느님 나라의 꿈도 현실화됩니다. 아니 이런 이들 자체가 하느님의 현존이고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됩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모범이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 경천경인의 모범을 보여 주시며 중재자 역할을 하시는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제2독서 히브리서 고백 그대로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그분은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사랑의 거룩함, 사랑의 순수, 사랑의 순결입니다. 바로 우리의 경천경인의 롤모델이자 결정체인 대사제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평생 한결같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헌신해온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최고의 선택이 경천경인의 사랑입니다. 참행복의 비밀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랑의 선택에 이어 시종여일 한결같은 사랑공부와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인생 사랑의 학교에서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예수님의 사랑 공부에 비하면 언제자 초보자처럼 생각되는 우리의 사랑 공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초발심의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공부와 실천에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평생 매일 하는 기도와 말씀 수행의 궁극 목적도 경천경인의 사랑을 잘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경천, 경인, 경물의 사랑에 항구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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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정립해 주십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마르 12,29)
이 말씀은 제1독서와 복음에서 동시에 울려퍼집니다. 첫째 가는 계명에 대해 묻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들려 주셨지요. 한 분이신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입장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가 다르지 않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니까요.
"이스라엘에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제1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그분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영원히 지켜야 할 근본 정신을 들려줍니다. 온 존재를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의무를 앞서지요.
제2독서는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히브 7,25)
하느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은 새로운 계약으로 옛 계약을 완성하십니다. 사랑하는 외아드님을 내어 주신 사랑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늘 우리를 위해 빌어 주시는 중재자 예수님의 사제직은 그분이 항상 살아계시기에 "영원"하며, 단 한 번의 제사로 구원을 가져오셨기에 "완전"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가장 탁월한 중재자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해야하는지 강조하십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는 사랑으로 엮여 있습니다. 사랑이신 그분께서 사랑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동행하시니,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 본능이고 도리입니다.
마음, 목숨, 정신, 힘은 인간 전체를 가리킵니다. 어느 한 부분만으로 아니라 존재 전체로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지요. 사실 사랑은 부분이 나뉘지 않습니다. 마음은 사랑하는데 행동은 안 따라가고, 생각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을 자기 욕정 채우는데 이용하고 있다면 감히 사랑이라는 말을 붙여도 되는지 숙고해야 합니다. 사랑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전체를 쏟아붓는 것이니까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그래서 하느님과의 사랑은 사람 사이로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지요.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특히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당하는 이들 안에는 반드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면서 우리의 사랑을 갈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복음 환호송)
이 말씀이 바로 놀라운 사랑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성 삼위 하느님 안에 머물러 사랑이 되어 갑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이 세상에 하나의 사랑을 이루어가게 되지요. 한 분 하느님의 하나의 사랑 안에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이 하나가 된다니,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지요!
사랑하는 벗님! 묵주기도 성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하느님 사랑 안에 푹 잠기시길 기원합니다. 반갑기도 하고 걱정되는 위드코로나 시대를 앞두고, 사랑으로 분별하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면서 사랑이 되어 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10월 한달도 수고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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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29-31)
그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첫째가는 이 두 계명,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십니다.
'하느님의 나라'(천국)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나라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제와 영원히' 우리가 꼭 들어가야만 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첫째 길은,
'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지켜야 할 첫째 계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첫째 계명이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
이 두 계명을 잘 지켜야 하느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을 우리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표지가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내 원수와 박해자를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웃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힘으로부터 나오며, 하느님의 힘인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사랑을 합시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은 내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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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려 주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도 등장합니다
(마태 22,34-40; 루카 10,25-28 참조).
다만, 오늘 복음인 마르코 복음만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라는 율법 학자의 대답을 들려줍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형식적으로 봉헌하는 번제물과
희생 제물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물을 봉헌하기만 하면
하느님께 바쳐야 할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희생 제물과 번제물을 바라지 않으시고,
신의와 하느님을 옳게 아는 것을 더 바라셨습니다(호세 6,6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읽으면, 제물을 봉헌하고
전례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증해 주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전례에 참여하는 것이 이웃에 대한 미움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그 어떤 계명보다 강조한 이유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감사드리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웃 사랑을 강조한 것은, 모든 이가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이웃과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의 의미를 기억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형식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미사에 참석한다고, 주일의 의무를
잘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감사드릴지 생각하며,
만약 미워하는 이웃이 있다면, 쉽지 않겠지만 ‘함께’라는
단어와 그의 얼굴을 같이 떠올려 봅시다.
하느님의 나라가 더 가까이 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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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의 동기와 이유로 제시하실 만큼 밀접히 결합하신다. 즉 인간이 위대한 존재로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죽는 곳에서는 인간도 죽게 된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신명기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찬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어떤 계명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인지 묻는 율법학자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상기시키시면서, 그 계명에 다른 계명, 즉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까이 놓으신다. 이 계명도 구약성서에 나타나지만 ‘동족’만을 가리킨다(레위 19,18). 마태오는 첫째 계명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한다(22,39). 루카는 두 계명을 종속관계로 보지 않고(10,27),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이웃으로 간주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10,30-37). 그러나 마르코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첫 자리에 놓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두 번째 자리에 놓은 것을 보면 유일신론적 배경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첫 자리에 계셔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대성이나 품위도 올바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랑이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사랑은 서로 교차하며 서로를 요청한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 종교이다. 오로지 이웃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시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라고 하신다. 이 두 계명은 다시 율법학자의 말로써 강조되고 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2-33절). 즉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을 다 같이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잘못하기 쉬운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전례행위가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국한해 그 의미를 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펼 때, 하느님은 사회적인 분이시며 위대한 창조를 하시는 분임을 증거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저절로 형제들에 대한 봉사가 되고, 또한 구체적인 필요에서 구현되기에 참된 예배가 된다. 우리가 주일을 지내는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주일미사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바쳤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제대에 봉헌하는 것이다. 봉헌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들은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라고 칭찬을 듣는다. 율법학자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충만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이 자리에서 가까이 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실체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즉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가까이 와 있다. 예수께서는 누가 당신 가까이 있는지를 아시고 또 명백하게 규정하신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자발적으로 봉헌하신 당신의 희생으로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를 확실히 가르쳐 주셨다. 즉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성이며,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게 하는 요청이다. 이 요청은 이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작은 일에서부터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참된 예배를 우리도 이제 이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미사가 더 기쁘고 하느님 앞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몸만 왔다 갔다 하는 타성적인 신앙생활 그래서 아무 맛이 없는 신앙생활, 전례생활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이고 활기찬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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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첫째는 이것이다."(마르 12, 29)
첫째도 둘째도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과
마주하는
사랑의
주일이다.
첫째로
지켜야 할
사랑이다.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삶이 있다.
사랑이
삶이다.
사랑을
전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십자가로
사랑을 뜨겁게
배우는 사랑의
여정이다.
영원한 사랑은
하느님
사랑뿐이다.
그래서 삶이란
하느님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하나이다.
그래서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된다.
사랑의 순간이
나눔의 순간이며
거룩한 순간이다.
하느님 사랑과
상관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랑을 위해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사랑을
만나는 것이
만남의
복음이다.
우리 사랑을
가장 먼저
드려야 할 분또한
하느님이시다.
사랑이
구원이다.
다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참된 회개이다.
사랑을
채우는 것도
언제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우리또한 본래
사랑이었음을
깨닫게된다.
하느님 사랑이
영원하기에
생명도 영원하다.
영원한 사랑
영원한 빛이
있다.
하느님 사랑보다
더 중요한 사랑은
없다.
줄수록 더욱
커지는 사랑의
힘이다.
서로
사랑하는
내어주는
사랑만이
모두를 위한
살길이다.
첫째는
이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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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마르 12,32-34).”
1)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제물보다 낫다는 율법학자의 말은,
실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은, 사무엘 예언자가 사울 왕을 꾸짖을 때 했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1사무 15,22-23).”
사무엘 예언자의 말에서는 ‘순종’이 강조되어 있고,
복음서에서는 ‘사랑’이 강조되어 있는데, 이 두 가지를 합해서 생각하면,
“사랑은 곧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요한 1서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1요한 5,3).
2)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라는 말은,
하느님만이 한 분뿐이신 참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세속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도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속에 ‘하느님 사랑’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하느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만
모든 힘을 쏟고, 다른 일에 헛심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3) <사랑은 ‘정성’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다는 말은,
사랑한다면 제사는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니고,
제사를 안 드려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전례’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 마음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니까 거행하는 일, 즉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례’는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사랑으로, 또 정성껏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행한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전례를 거행할 때에는 ‘정성’을 다 쏟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정성을 다 쏟는 법입니다.)
사랑 없이 전례를 거행하는 경우에는 정성도 없습니다.
(‘정성의 부족함’에서 ‘사랑 없음’이 금방 표시가 납니다.)
사랑도 없고 정성도 없으니 대충 형식적으로 하게 됩니다.
4)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천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 쏟아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5)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행동’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랑’은 세속의 ‘좋아하는 감정’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
즉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덕행’입니다.
‘좋아하는 감정’은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쳐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덕행은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7-18).”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5-16)”
(이 말을,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그처럼 사랑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죽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구원을 얻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입니다(야고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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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신명 6,2-6)는 주님의 규정과 계명을 가르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은 “주 우리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시면, 우리가 듣고 실천하겠다.”면서 모세를 하느님과 자기들 사이에 중개자로 세워달라고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의 청을 허락하시면서 모세를 선택하십니다(5,27-31). 모세는 십계명을 명심하여 실천하라고 한 뒤(5장)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들을 백성에게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토착신을 섬기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고, 오랫동안 번성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신앙고백의 방식으로 “이스라엘아, 들어라!”(“셰마”=“들어라”: 4-6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시작인 믿음이 생기도록(로마 10,17), 인간이 최초에 저지른 죄에(창세 3장) 다시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이들의 세력이 강한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복하게 살기 원한다면 십계명을 잘 자키는 것은 물론 반드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원초적인 계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마르 12,28ㄱㄷ-34)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말로 올무를 씌워 붙잡으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12,13), 그리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까지 몰려온 살벌한 상황에서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께(마태 5,17) 613개 규정들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유다인이라면 7살만 되면 누구나 다 아는 것으로서 정말 유치한 짓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성실하심과 자비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이 파생되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십계명의 처음 세 가지)을 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외치던 “셰마”(“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하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아주 정성껏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셰마”(마음, 목숨, 힘)에 “정신”을 첨부하시면서 육체적인 “힘”에서 이성적이고 심리적인 “힘”을 따로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마음은 갈라지지 않는 한결같음을(1역대 29,19), 생각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능력을(히브 5,13), 정신은 영적으로 높은 차원의 지혜와 깨달음을(신명 30,2.6), 힘은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을 다 발휘함이 요구됨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치 십계명의 나머지 6가지를 요약하듯이, “셰마”에 “이웃을 향한 사랑”(레위 19,18)을 첨부하십니다. 원래 유다인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별개의 것으로 여겼는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선의 시작이고, 이웃사랑은 다른 사람을 정의롭고 자비롭게 대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했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훌륭하신 스승님”이라고 고백했음에도 자기들이 외치던 “셰마”를 고집스럽게 반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셰마”에 “정신”을 첨부하시고 이웃사랑까지 말씀하신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라고 했던 율법학자는 느닷없이 사무엘이 계명을 어긴 사울에게 했듯이(1사무 15,22), 비인간적인 행동으로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했던 이스라엘을 비난했듯이(호세 6,6),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라고 얼버무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율법학자가 단지 비유로만 알아듣지 않고(4,11) 조금이나마 머리로는 깨달았지만 마음으로는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희망을 주십니다. 그리고 복음사가는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예수님께 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말로 올무를 씌워 붙잡으려고 온통 혈안이 되어 있으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심이(마태 5,17) 율법학자에 의해 입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조금 뒤에 사람들에게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역시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12,38) 하십니다.
제2독서(히브 7,23-28)는 구약의 대사제와 신약의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율법을 너무나도 잘 아는 히브리인들에게 율법을 어기지 않았기에 죽을 이유가 없었던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으로 대사제의 직무를 수행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맡기신 영원한 사제직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며, 늘 살아계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를 빌어주신다고 합니다. 율법에 의해 뽑힌 구약의 대사제들은 돌아가면서 사제직무를 수행했고,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쳐야 했으며, 언젠가 죽으면(7,8.23) 사제직이 세습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의해 세워진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사제직무는 영원히 이어집니다. 신약의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단 한 번 죽으심으로 봉헌하신 제사로 충분하고, 완전하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모든 이들의 죄를 다 씻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극단적인 표현으로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히브 7,28) 하느님께서는(1요한 4,16)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예수님을 대사제로 세우셨습니다. 율법을 완성하기 위한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24)라고 가르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하느님과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20)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완전하게 표현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옳고 그른 것을 잘 가려내는 분별력을 가지고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잘 깨닫고, 갈라지지 않는 마음과 꾸준함으로 당신은 물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라.”(루카 6,31)는 것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그럭저럭 하느님은 사랑할(계명을 지킬) 수는 있는데, 이웃을, 그것도 가장 가까운 이웃을 사랑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합니다. 사랑 때문에 만난 이들이라면, 이론적으로는, 오랜 기간 사랑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랑에 익숙해져서 사랑하기가 쉬워야 할 텐데, 어렵다고 합니다.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사랑 뒤에는 항상 섬겨야 하는 희생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두렵다고 사랑을 포기하지 않듯이, 사랑하기 어렵다고 가장 가까운 이웃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가까운 이들(부부와 가족들) 사이의 사랑을 말한다는 것이 우습지만, 세 가지만 제안해 보렵니다. 첫째, 이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성장하고 배웠기에,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지만 익숙해질 때까지 해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상대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말이든 행동이든, 화가 났을 때에는 더욱 더, 한 순간만 멈칫하면서 따뜻하게(다정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명령이 아니라 상의하는 방식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공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또 반대로 자신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그분께서 하신 것처럼 목숨을 바치지는 않을지라도 극진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그리스도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극진한 마음을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가장 가까운 이에게 보여주도록 애를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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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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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국 사랑이 전부입니다!
나이를 조금 먹고 나서야 사랑에 대해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이팔청춘 때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적어도 서른 안팎까지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사랑을 알고 난 후 그것은 너무나도 큰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병세가 위중해도, 아무리 인생의 막장 앞에 설지라도, 그럴수록 사랑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목숨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필요한 것이더군요.
이 세상에는 사랑이 필요치 않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만사가 잘 풀릴 때만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꼬이고 꼬인 인생길을 걸어갈 때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사사건건 내 발목을 잡는 지긋지긋한 그 ‘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면 만사가 OK인줄 알았습니다. 사랑에는 늘 기쁨과 감미로움만 따르는 줄 알았습니다.
사랑을 시작하면 향기로운 장미꽃 길만 계속되는 줄 알았습니다.
사랑에는 괴로움이 뒤따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시작한다는 것은 고통의 길을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시작한다는 것을 희생을 각오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사랑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 복음 12장 29~31절)
결국 사랑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부입니다. 사랑만이 그리스도인 인생의 전부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인생문제의 해답입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최종 기착지입니다.
결론적으로 산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시절입니다.
참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늘 자신을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시라도 내 그릇된 언행, 부족한 사고, 빈약한 가치관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좀 더 사랑스런 존재, 이웃들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로 서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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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창조자만이 당신을 위해 목숨 바쳐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하느님의 계명 중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하십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계명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이 해답은 ‘왜 살아야 하는가?’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은 묻다 지쳐서 ‘그냥’이라는 해답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중년에 들어서면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생각도 하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삶에 공허함도 느낍니다.
우리가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답을 지금까지 명확하게 주는 인물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역사상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인류 최초의 소설이라는 ‘길가메시 서사시’가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주인공 길가메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돈도 많고 힘도 세고 나라도 다 정복한 영웅이었습니다.
이 영웅이 언젠가 징그럽게 생긴 훔바바(Humbaba)라는 괴물과 싸우게 됩니다.
물론 길가메시가 승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엔키두라는 친구가 죽습니다.
길가메시는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자신도 언젠가 죽을 운명임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유명하고 성공하고 돈과 권력이 많아도 죽으면 다 의미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먼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게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생하고 고생해 결국 어느 먼 곳에 우트나피슈팀이라는 아주 유명한 산신령 같은 분이 계신데 그분은 죽음을 초월하였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를 찾아간 길가메시는 그가 어떻게 불사신이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우트나피슈팀이 대답합니다.
“나는 신들에게 잘 보여서 불사신이 되는 약을 하나 선물 받았는데 그것을 먹었더니 불사신이 되었소.”
길가메시는 “저에게도 그 약을 하나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은 약을 줍니다.
길가메시는 기분이 너무 좋아 그 약을 놓고 연못에서 목욕했습니다.
그런데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서 그 약을 훔쳐 가버립니다.
이 약이 없으면 죽음으로 모든 게 무의미해지는데
뱀이 훔쳐 가버렸으니 엉엉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가메시는 다시 우트나피슈팀에게 가서 약을 하나 더 줄 수 없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약은 한 번밖에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길가메시가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죽어야 합니까? 적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우트나피슈팀은 말합니다.
“그냥 집에 가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아름다운 여자와 데이트하고 맛있는 거 먹고 친구들과 술 마시면서 재미있게 놀아라.”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길가메시가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었습니다.
이게 이야기의 끝입니다. 오천 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뭔가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는 삶의 의미에 관한 의문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우트나피슈팀이 길가메시에게 주었던 그 약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신들이 줄 수 있는 바로 그 약, 그것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만든 모든 것들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입니다.
우리에겐 그 계명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사탄이라는 뱀, 혹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그 계명의 중요성을 잃습니다.
그래서 또 그냥 생존 욕구대로 살아갑니다.
생존 욕구는 그냥 태어날 때 생존을 유지하게 하려고 넣어진 욕구이지 삶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 불사의 약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돈 더 많이 벌고 더 맛있는 것 먹고 더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약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창조하신 대상들을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창조자만이 줄 수 있는데, 창조자가 아니시면 우리에게 그런 계명을 주실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은 누구에게도 생존을 포기하라는 욕구를 줄 수 없습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그런 욕구를 주면서 자기까지 사랑하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생존을 포기하라는 사랑의 욕구를 줄 수 없다?
일본 천황은 가미카제 특공대에게 나라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분명 천황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라는 명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황이 양심이 있다면 그들에게 진정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요?
자기가 창조하고 다시 생명도 줄 수 없는 이들을 자살로 내몰면서 자기를 사랑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라면 그런 명령은 내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피조물에 다시 생명을 줄 수 없어서 자신이 피 흘려 창조한 무엇이 아니면 자신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줄 수 없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이용하면서 자기를 사랑하라? 이것은 마귀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나마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줄 수 있는 분들은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의 창조를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당당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합니까?
항상 더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부모를 공경은 해야 한다는 말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자녀를 창조하기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영약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삶의 의미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영약을 주신 분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도
책임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분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며 목숨을 바친 당신 자녀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지 않을 리 없습니다
이 계명으로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오직 창조자만이 당신과 당신이 창조한 것들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그 영약을 절대 뱀에게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그래야 모든 삶이 의미로 가득 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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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알기에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삶이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닮아가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때로는 계산하게 되고
때로는 확인하고 싶고
때로는 나의 사랑과 하느님 사랑을 혼동하게 됩니다.
자연히 따스함 속에서 성장하는 사랑을 맺어가지 못하고
때로는 이해타산적이 되고
때로는 집착이 되며
때로는 타인을 폭력적으로 대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다시 살피게 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은
상대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서로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합니다.
말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했던 행동을 중심으로 쌓인 신뢰는
앞으로 함께 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희망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이 가능해 집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이 있기에 기꺼이 나눠줄 수 있는 사랑이고
이웃이 아닌 이웃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하나의 원천, 곧 하느님과 맺어지는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더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율법학자의 자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배우고 익히는 삶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적용하며 살아가는 삶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배우고 교회의 가르침을 익히며
내 삶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찾고 찾은 사랑을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그럴 때 우리 역시 예수님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분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음을 깨닫고
하느님께 대한 희망으로 오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와 가족, 이웃과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함께 하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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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연중 제31주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1주일 제1독서(신명기6,2-6)
"이스라엘아,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4-6)
"Hear, O Israel ! The Lord is our God, the Lord alone ! Therefore,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Take to heart these words which I enjoin on you today."
'이스라엘아,들으라!'
본문으로부터 그 유명한 '셰마'(shema; hear)가 시작된다. 본절은 6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으며(세마 이스라엘 예흐와 엘로헤누 예흐와 에하드; shema israel yehwa ellohenu yehwa ehad; hear,o Israel the Lord is god,the Lord alone), 그 첫 단어가 '들어라'는 뜻이 있는 '셰마'이다. 따라서 본 단락은 이 첫 단어를 따라 '셰마'(shema)로 불리워진다.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셰마는 원래 6단어로 구성된 신명기 6장 4절만을 일컬었으나 , 후에 5절이 포함되었고, 더 나아가 본문부터 시작해서 한 단락을 이루는 4~9절까지를 일컬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6장 4~9절(제1부분)에 이어 신명기 11장 13~21절(제2부분), 민수기 15장 37~41절(제3부분)도 셰마에 포함하게 되었다.
제1셰마에 해당하는 신명기 6장 4~9절은 유일신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으로부터 시작하여 항상 계명을 기억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명령과 자녀에게 그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명령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추가된 신명기 11장 13~21절은 이 명령에 순종했을 때주어지는 축복과 불순종했을 때 주어지는 저주가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민수기 15장 37~41절은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옷자락 술에 자주색 끈을 달게 하라는 규정이 기록되어 있다.
유대 랍비들은 신명기 6장 7절에 근거하여 이 셰마 본문을 아침 저녁으로 암송하는 의식을 제정했으며, 이 셰마 규정의 준수 여부는 진실된 유대인임을 확인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사랑과 순종의 대상이 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밝히시는 본문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먼저 즈카리아서 14장 9절의 "그리고 주님께서 온 세상의 임금이 되실 것이다. 그날에는 주님이 한 분뿐이시고 그 이름도 하나뿐일 것이다."라는 말씀에 나오는 '그 이름도 하나뿐일 것이다'(우셰모 에하드; ushemo ehad)란 표현에 근거하여 '에하드'(하나 뿐; one)를 주님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라 본문을 번역하면,"주님은 우리 하느님이시며 '하나 뿐'인 주님이시다"가 된다. 즉 '하나 뿐'이라는 고유 명사를 이름으로 가진 주님이시라는 의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에하드'를 주님의 이름으로 보지 않고, 새 성경을 포함해서 대다수 성경과 같이 이것을 주님을 서술하는 '하나'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즉 하느님의 이름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원문대로 직역하면,'주님 우리 하느님 주님 하나'이며,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전반부는 '주님은 우리 하느님이시다'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주님은 한 분이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을 종합하면, 본문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하는 하느님의 유일성을 알리는 구절이 된다.
이런 의미를 갖는 본문에 근거해 볼 때, 성경은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다신주의(多神主義; Polytheism) 뿐만 아니라 혼합주의(Syncretism)을 일체 배제하며, 실제로 모든 종류의 자연신론(自然神論)을 배제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철학적인 사상에 의해 추상적으로 만들어내는 신, 예를 들어 '절대 존재', '절대 이데아'와 같은 개념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한 분이신 주 하느님은 오직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서 크신 능력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절대적인 살아계신 하느님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새 성경에는 본문이 본절의 후반부에 있지만, 원문에는 본절의 맨 처음에 나온다. '웨아하브타'(weahabtha; therefore(and) you shall love; 너희들은 사랑해야 한다)로 시작하는 단어에서 "와우'(wau; therefore; and) 접속사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우리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내용의 앞 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정리하면,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하느님은 세상의 수많은 다른 헛된 우상이 아니고, 오직 한 분이신 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한편,'웨아하브타'에서 '아하브'(ahab; love)동사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신명4,37; 11,1)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경우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호세아서의 경우 남편과 아내의 사랑(호세3,1),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호세11,1)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바로 '아하브'동사가 매우 실제적인 차원의 사랑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에서 특별히 구별된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이 익히 알고 있는 평이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단지 종교적인 관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가운데서도 친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출애굽 이후 시나이산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 관계를 맺은 (탈출19,5.6;24,1,8)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현존하고 임재하셔서 그들 가운데 당신을 드러내어 주셨으며,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제를 사랑하듯이, 하느님을 자신의 아버지처럼 또는 자신의 연인처럼 사랑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편, 신명기 6장 4절에서는 주 하느님을 '우리 하느님'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반하여, 6장 5절에서는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4절이 이스라엘 공동체와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 대한 계시라면, 본문은 그 계시된 하느님께 대한 각 개인의 인격적 반응에 대한 촉구라고 말할 수 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우베콜 나프셰카 우베콜 메오데카'(bekol lebobka wubekol naphscheka wubekol meodeka)에서 3번이나 나오는 전치사 '뻬'(be)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 가지고' 란 뜻이다.
또한 각각의 '뻬'(be)에 붙어 있는 '모든'이란 뜻의 '콜'(kol)은 수단이 될 수 있는 대상의 최상 혹은 최대의 상태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말 위에는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어 '카'(ka)가 붙어 있다. 이것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수단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당사자의 것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입된 생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중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너의 최선의 마음을 가지고 너의 최선의 목숨을 다하고 너희 최선의 힘을 가지고'이다.
'마음'에 해당하는 '레바브'(lebab)는 사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란 뜻이며, '마음을 다하고'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는 '너의 모든 중심을 다하여'라고 하는 것이 원어적 의미를 살린 번역이 된다(with all your heart).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知,意,情)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서, 한마디로 '(한 사람의)인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부분이 없이, 완전히 드러낸 상태에서 진실하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목숨'으로 번역된 '나프셰카'의 원형 '네페쉬'(nepesh)는 일반적으로 '영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 '뻬콜 나프셰카'는 '너의 온 영혼을 다해'(with all your soul)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지녀야 할 가장 귀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자기 영혼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요한4,24).
끝으로 '힘'으로 번역된 '메오데카'(meodeka)의 원형 '메오드'(meod)는 '넘치는 것'이란 뜻이다. 물론 이 단어를 '힘'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 '그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 또는 '넘치는 활동력'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즉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관념적인 부분에 국한되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의 모습과 행동 등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내 삶 속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은 각각으로도 최상급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세 가지 표현을 중복시켜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태도와 그 정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매우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본문의 이러한 표현을 볼 때,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 가운데 결코 자신의 것이라고 하느님 대전에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그러기에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되, '전심(全心),전영(全靈),전력(全力)'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6)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것이 네 마음 (위)에 있게 하라'(take to heart; be upon your hearts)이다. 여기서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말씀'을 가리킨다. 또한 '마음'에 해당하는 '레바브'(lebab)는 신명기 6장 5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인격을 가리킨다.
따라서 말씀이 마음에 있게 하라는 말은 단지 말씀의 내용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생각과 의지와 감정에 언제나 말씀이 반영되어 있는 인격을 소유하여 실제로 자신의 삶속에서 주님의 향기를 풍겨내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한 14,21)
그리고 '새겨 두어라'로 번역된 '웨하유'(wehayu)에 쓰인 동사는 '~이다'란 상태를 나타내는 '하야'(haya)동사로서, 이것은 말씀이 마음 위에 있는, 즉 말씀이 인격 위에 반영되는 삶이 일시적인 상태로 끝나는 일회적 행위가 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항상 지속되는 상태에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에'로 번역된 '알 레바베카'(al lebabeka; 너의 마음에)라는 표현은 신명기 5장 22절에 나온 '알 셰네 루호트 아바님'(al shene luhoth abanim) 즉 '두 돌판위에'라는 표현과 대구를 이룬다.
우리는 이 두 구절의 대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두 돌판에 율법을 새겨 주신 행위가 실제로는 그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마음 위에 있기를 원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예례31,33참조).
[연중 제31주일]
사랑(信仰)의 出發點은 하느님이시다.
(마르12,28-34)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둘째는 이것이다. 병행복음- 마태33,39에도 ‘둘째도 *이와 같다’. 첫째 계명과 둘째계명은 ‘같은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갈라5,14)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야고2,8-9) 8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9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
= 인간의 사랑을 차별적이다. 그래서 그 누구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먼저 ‘차별이 없으시고 원수(죄인)까지 사랑하신, 그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주신’ 그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야한다. 죄인들을 위해 당신 외아들 예수를 속죄 제물로 내주신 하느님, 그 사랑을 알아야(받아야)한다. 그랬을 때 우리의 마음, 목숨, 정신, 힘을 다해 하느님을 나의 주님으로 사랑할 수 있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사랑하는 것이다. 곧 우리 구원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주는 것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한 계명인 것이다.
인간의 지각(知覺)으로 깨달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성령의 이끄심으로 깨달아, 내가 먼저 받고, 그 하늘의 사랑(아가페)을 이웃과 나누는 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시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가장 큰 두 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두 나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지니고 있으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 받기 위하여 태어난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하느님께서 흙 먼지로 손수 빚어 만드시고, 숨과 영을 불어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까?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데, 나에게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를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출발점,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 흙의 먼지에 불과한 그 없음의 존재가 하느님의 숨을 받아 생명체가 된 것, 소중한 존재 맞다. 그러나 그 생명체는 다시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 흙, 땅의 존재들을 하늘의 존재, 곧 당신의 영원한 자녀로 재창조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님을 이 흙(어둠)의 세상의 빛(생명)으로 보내신 것이다.
빛, 하늘의 존재 예수께서 어둠인 이 세상에 육을 입고 오심, 그 자체가 신의 죽음의 시작이다. 그 어둠, 그 없음의 존재 들을 빛, 있음의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희생하신, 그것이 십자가의 희생, 대속, 죽음, 사랑인 것이다.
(요한1,9-12)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 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실 속죄 제물로 보내신 예수님을 생명의 빛으로,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피(죽음)로 모든 죄,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하게 씻기게 하는 것,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히브10,10.22참조) 그 하느님의 뜻, 그분의 약속,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땅의 욕망으로 가득 찬 나를 부인하는(비우는)것,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모르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사랑)의 출발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시작하심을 알아야 한다.(제가 말씀 묵상을 드리는 것이 여러분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 = 제사행위보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기특한 말은 했다. 그러한 율법학자에게 아직 하느님 나라가 들어오지 못했다. 아직 사랑의 계명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죽으러 오신, 곧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셔서 그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명하러 오신, 그래서 이웃인 율법학자 구원을 위해, 그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 번제물과 희생제사로 죽으러 오신 구원자 그리스도를 몰라보고 훌륭한 선생님 정도로 보고 있으니 그가 어찌 깨달았다고, 하느님 나라가 들어 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 하신 말씀은 “너는 아직 하느님 나라 밖에 있다” 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루가4,21)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마태12,28) 28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하느님, 순교자들의 피가 그리스도인의 씨앗이 되게 하시니 순교자들의 피로 하느님의 교회를 비옥한 땅이 되게 하시고 이 땅에서 언제나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하소서.’ 라는 이 기도보다
저는 ‘하느님, 예수님의 피가 그리스도인의 씨앗이 되게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 새 계약의 말씀으로 하느님의 교회를 비옥한 땅이 되게 하시고 이 땅에서 언제나 하늘의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하소서’ 로 기도해 본다.
(골로3,1-2) 1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자신을 먼저 사랑할 줄 알게 해 주소서 의탁하나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저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연중 제31주일복음(마르12,28ㄱㄷ~34)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3)
원래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은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우베콜 나프셰카 우베콜 메오데카'(bekol lebobka wubekol naphscheka wubekol meodeka)에서 3번이나 나오는 전치사 '뻬'(be)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 가지고'란 뜻이다.
또한 각각의 '뻬'(be)에 붙어 있는 '모든'이란 뜻의 '콜'(kol)은 수단이 될 수 있는 대상의 최상 혹은 최대의 상태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말 위에는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어 '카'(ka)가 붙어 있다.
이것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수단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당사자의 것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입된 생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중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너의 최선의 마음을 가지고 너의 최선의 목숨을 다하고 너희 최선의 힘을 가지고'이다.
'마음'에 해당하는 '카르디아'(kardia)는 히브리어 '레바브'(lebab)를 번역한 단어인데, 사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란 뜻이며, '마음을 다하고'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는 '너의 모든 중심을 다하여'라고 하는 것이 원어적 의미를 살린 번역이 된다 (with all your heart).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知,意,情)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서, 한마디로 '(한 사람의)인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부분이 없이 완전히 드러낸 상태에서 진실하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목숨'으로 번역된 '프쉬케'(psche; soul)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셰카'(naphsheka)의 원형 '네페쉬'(nepesh)는 일반적으로 '영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
'뻬콜 나프셰카'(bekol naphscheka)는 '너의 온 영혼을 다해' (with all your soul)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정신'으로 번역된 '디아노이아'(dianoia; mind)는 신명기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영혼이 가지고 있는 속성인 정신성과 정신력을 의미하기에 '목숨을 다하고'를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마태22,37참조)로 세분하여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코 복음 12장 33절에는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가 '생각을 다하고'로 대치되고 있다.
여기서 '생각'에 해당하는 '쉬네시스'(synesis; understanding)는 '지혜', '총명', '깨달은 것', '이해' 등으로 번역된다. 전체적인 의미에서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지녀야 할 가장 귀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자기 영혼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요한4,24).
끝으로 '힘'으로 번역된 '이스퀴스'(ischys; strength)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오데카'(meodeka)의 원형 '메오드'(meod)는 '넘치는 것'이란 뜻이다.
물론 이 단어를 '힘'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 또는 '넘치는 활동력'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관념적인 부분에 국한되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의 모습과 행동 등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내 삶 속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은 각각으로도 최상급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세 가지 표현을 중복시켜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태도와 그 정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매우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본문의 이러한 표현을 볼 때,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 가운데 결코 자신의 것이라고 하느님 대전에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그러기에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되, '전심(全心), 전영(全靈), 전력(全力)'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을 향한 전인격적인 절대적 사랑이어야 함을 강조하며, 십계명의 첫 부분인 1~3계명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레위기 19장 18절의 인용으로서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자연적 결과로서의 둘째 계명인 이웃 사랑을 말하는데, 이것은 십계명의 4~10계명의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웃 사랑을 하느님 사랑의 연장선상에 두어 율법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웃'에 해당하는 '플레시온'(plesion; neighbour)은 인종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우리와 함께 살거나 혹은 우연히 만나는 사람까지도 모두 포함한다 (루카10,25~37).
이제 이 두 가지 계명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구절에서 '번제물'에 해단하는 '홀로카우토마'(holokautoma; whole burnt offerings)는 '전부 불태우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홀로카우토오'(holokautoo)에서 유래된 명사이다.
그리고 '희생 제물'에 해당하는 '튀시온'(thysion; sacrifices)의 기본형 '튀시아'(thysia)는 '희생 제물' 또는 '제사'를 뜻한다. 여기서 '홀로카우토마'(holokautoma)는 번제를, '튀시아'(thysia)는 번제 이외의 다른 제사들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사무엘 1권 15장 22절의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라고 사울을 책망하는 사무엘의 교훈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과 순종이 없는 형식적 제사와 제물은 하느님을 결코 기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며, 그것은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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