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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굴라와 브리스가 원문보기 글쓴이: 아굴라
*James Tissot (1836-1902).
What Our Lord Saw from the Cross
(Ce que voyait Notre-Seigneur sur la Croix),
1886-1894.
Opaque watercolor over graphite on gray-green wove paper,
24.8 x 23 cm.
Brooklyn Museum
(출처 / 최주훈 님의 페북)
십자가 주위 사람들
도화지 한 장 던져 주고 ‘십자가 사건’을 그리라고 하면, 백의 아흔아홉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부터 그릴 게 뻔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예상을 비껴간다. 십자가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못박힌 예수님의 발가락만 그림 바닥 중앙에 살짝 보인다. 그것도 자세히 보지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다. 게다가 당황스럽게도 그림 속 등장인물 모두가 감상하는 나를 응시한다. 내가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그림이 나를 꿰뚫어 본다.
도대체 무슨 그림이 이럴까? 작품 제목을 알고는 한 번 더 놀란다. 작품명, “우리의 구원자는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What our Savior saw from the Cross).
프랑스 화가 띠소(James Tissot, 1836-1902)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수님이 매달렸던 십자가 위에 우리를 매달아 놓는다. 그리고는 십자가 위에 처참히 달린 예수의 시선으로 그 상황을 보게한다. 그런 다음 묻는다. ‘당신은 저기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는 곧바로 ‘예수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것 아닌가?’라 는 질문이 무겁게 돌아온다. 이로써 십자가 사건은 남의 일도 아니고, 고상한 감상주제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한다.
이 작품은 복음서에 나오는 십자가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고난주간 성금요일에 이 그림에 조용히 집중한다면 어떨까. 십자가 주위에 모인 군중들은 거룩한 깊은 묵상의 주제를 던진다. 여기엔 네 부류의 군중이 모여 있다. 로마 병정, 유대 종교지도자, 구경꾼,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
현장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고 그저 군주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버리는 병정들, 기득권 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다가 종국엔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죽음으로 내몬 유대 종교지도자들, 십자가 사건을 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여기고 지나가는 구경꾼들, 그리고 절망에 휩싸인 십자가 밑의 제자들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 네 그룹을 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십자가에 모인 이 네 그룹은 2000년 전 옛날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다. 오늘도 여전히 이 네 그룹은 교회 안팎에 공존한다. 교회 안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만 있고, 교회 밖엔 나머지 세 그룹이 있을 걸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나는 어디 서 있나? 세상 가치와 명령에 순응하는 로마 병정 옆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은 있지만, 자신의 지위와 신앙연수를 자랑하며 남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던 유대 종교지도자 속에? 아니면, 교회 출석은 열심히 하고 성경공부 제자훈련과 각종 교회 프로그램엔 열심이지만, 그저 주변인의 심정으로 지나가는 구경꾼 속에 숨어 있지는 않은가?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중심을 본다.
다시 한번 주목할 것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 제자들도 절망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예수와 친분 두텁다고 자랑하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간 상황이니, 여기 십자가 밑에 남은 사람이야말로 참 제자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절망하고 괴로워한다. 더 특별한 건, 마지막 십자가 밑 자리를 여인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십자가 사건을 성경에서 꼼꼼히 읽어보면, 시대적으로 여성 인권이라든지, 역사의 주도권이라든지 이런 건 생각도 못할 시대였는데, 놀랍게도 구원사 중심에 여인들이 서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십자가 주위뿐 아니라 부활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고, 그 소식을 알린 사람도 여인들이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기독교 선교 역사와 교회는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십자가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사랑하며 믿었던 주님이 죽었을 때 여인들이 절망했다는 것, 그러나 이 절망 다음에 부활의 소식이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가 이것 아닌가. 칠흑 같은 죽음과 절망 속에도 하나님은 계신다는 것, 절망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고 복음이다.
그리스도인에게도 고난과 절망의 순간은 찾아온다. 예수 잘 믿는다고 고난이 비껴가는 법 없다. 십자가 밑에서 비통에 잠긴, 십자가 밑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흐느끼던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시련의 순간은 찾아온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지막 목적지는 절망과 패망이 아니다. 오히려 절망의 나락 한가운데 숨겨진 구원의 길을 찾는 데 있다. 절망하던 여인들에게 부활의 소식이 주어졌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절망이라고 생각하는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사람의 가능성과 기대가 끊어진 그곳에서 부터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리고 이 능력을 믿는 게 신앙이다.
기도: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인가? 우리에게 임한 시련 속에 선한 하나님의 뜻이 숨겨있음을 믿고 기도해보자.
십자가 밑 여인 띠소의 이 작품엔 십자가 아래 여인의 모습으로 다섯 명이 등장한다. 특이한 건, 십자가 사건이 사복음서 모두 나오지만, 십자가 주위에 있던 여인들의 수와 이름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마태복음[27:56,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과 마가복음[15:40,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세(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자 살로메]는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하고, 요한복음[예수의 모친 마리아, 예수의 이모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에선 총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하고, 누가복음에선 여인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정확히 누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띠소의 작품은 요한복음을 배경으로 한 것은 분명하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네 명 모두 ‘마리아’라는 점은 매우 특별하다. 히브리어로는 ‘미리암’, 아람어로는 ‘마리암’, 헬라어로는 ‘마리아’인데, 이스라엘에서 여자를 대표하는 가장 흔한 이름이다. 이 이름 속엔 ‘쓰다’(Bitter), ‘반란’(Rebellion)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고통스럽고 괴롭다는 뜻이다보니 무척 안 좋은 이름이다. 자기 딸이라면 이런 이름을 지어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이렇게 안 좋은 이름이 구원의 역사에선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고통이 변하여 즐거움이 된다’는 선지자 이사야(9:1-7)의 예언이 이 이름과 연결된다. 실제로 십자가 밑에서 쓰디쓴 인생 경험을 하며 절망하던 네 명의 여인 모두 마리아였지만, 부활의 예수를 가장 먼저 만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다(요 20:15-17). 네 명의 마리아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쓰디 쓴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을 상징한다.
십자가는 마라의 쓴 물이 한 나무로 인해 단물로 변하는 사건(출 15:23-25)처럼, 쓰디쓴 인생이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는 사건이다.
사족 하나 더한다. 띠소의 그림이 요한복음을 배경으로 한 것은 분명하다. 그림 하단에 매우 간절한 모습은 막달라 마리아, 세 명이 모인 중앙에 푸른색 옷은 모친 마리아가 분명하다. 그리고 모친 뒤에 선 두 사람은 예수의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야고보의 어머니)일 것이다. 성경의 스토리를 따르면, 왼편에 흰색 옷을 입고 두 손을 간절히 모은 채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다. 그런데 무척 특별한 건, 요한의 모습 어디를 봐도 남자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유는 분명하다. 전통으로 종교화에서 요한은 언제나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 나온 여인들 얼굴을 보면서, 참 희한하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겠다), 요한을 비롯한 네 명의 여인 모두 얼굴이 닮았다는 점이다. 뭐, 모두 친척들이라서 그렇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억지로라도 띠소의 일생을 반추해 보면 여인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띠소의 작품에 유독 자주 나오는 한 여인이 나오는데, 그가 사랑했던 여자 케서린 뉴튼이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가 기구하다. 케서린은 혼외관계에서 아이를 가진 후 파혼당했고,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띠소는 이 여인의 암울한 과거까지 사랑해서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고 캐서린과 그의 아이들까지 가족으로 받아들여 행복하게 살게 된다.
그런데 그런 뜨거운 사랑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은 결핵에 걸려 죽게 된다. 본래 사교계 귀족들의 그림이나 그리던 띠소는 연인을 잃은 상처를 못 이겨 은둔생활을 하며 종교화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간 사랑을 잊지 못한 채 아파하다 고독한 죽음을 맞게 된다.
여기 소개한 띠소의 작품도 그 시기 만들어졌다. 띠소의 그림에 나오는 캐서린의 얼굴과 십자가 밑에서 서러워하는 여인들의 얼굴이 엇비슷하게 오버랩된다.
정말 캐서린을 다양한 얼굴의 마리아들로 그려 넣은 게 맞다면, 이 작품은 결핵의 쓰디쓴 고통 가운데 죽은 캐서린이 부활하여 다시 만나길 소망하던 띠소의 간절한 기도가 아닐까 싶다. 이 땅의 모든 마리아들과 함께, 나도 띠소가 갈망하던 그런 부활을 기다린다. (최주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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