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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칼럼] 영화 ‘리슨’ - 2012년 감독 아나 로사
한 마리 양이라도 잃어버린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도 합니다. 선의를 내세운 원칙에만 집착해 열린 마음과 섬세한 눈을 가지지 못할 때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최재희(1914∼1984)도 “사람을 위해서 제도가 있는 것이지, 제도 자체에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아흔아홉 명을 구원하고, 겨우 한 사람만 놓치거나 잃어버릴 정도라면 모두 좋은 제도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에게는 그 제도가 잔인함과 절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영국의 실업급여제도가 한 늙은 노동자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짓밟아 버리는 것을 <나, 다니엘 블레이크>(켄 로치 감독)에서 봤습니다.(2021년 1월 24일 자 영화칼럼)
<리슨>의 벨라(루시아 모니즈 분)에게는 가정폭력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고, 아이를 더 좋은 가정에서 자라도록 해준다는 영국의 강제입양제도가 그렇습니다. 해당 제도는 남편 니콜라오와 열한 살 된 아들 디에구, 여섯 살 된 딸 루, 12개월 된 아기 제시와 함께 사는 그녀의 가족을 무자비하게 강제해체시킵니다. 그것도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편견과 무시로.
발단은 청각장애를 가진 루의 고장 난 보청기입니다. 끼니조차 마련하기 힘든 가난한 포르투갈 이민자에게는 그것을 고치거나 새것으로 교체할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복지국은 그 사실을 숨긴 것과 아이의 등에서 발견된 멍을 아동학대로 보고 긴급보호명령을 발동해 세 아이를 강제로 데려갑니다. 니콜라오와 벨라와 아이들이 “난 좋은 엄마, 우린 좋은 가족이다.” “아이들에게 손 한번 댄 적 없다.” “우린 엄마가 돌본다.” “부모님과 집에 있고 싶다.”고 절규하고, 애원하고, 반항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잠깐의 면회시간에도 복지국 직원들은 규정을 고집하면서 영어로만 말하기를 강요하고, 보고 싶었다는 말도 못 하게 하고, 벨라와 루의 유일한 소통수단인 수어(手語)를 하는 것도 막습니다.
하루아침에 자식을 빼앗기고 멀쩡할 엄마가 있을까요. 그런데도 그들은 벨라의 분노와 불안, 절망과 슬픔을 우울증으로 규정하고 그런 엄마는 위험하다며 아이들과의 면회까지 막아버립니다. 강제입양은 아동보호라는 제도의 정당성을 앞세워 양육수당까지 주면서 디에구와 제시를 다시는 친부모 품으로 돌아올 수 없는 입양을 보냅니다. 그나마 루만 가까스로 부모 품으로 돌아옵니다. 정부가 청각 장애아를 입양할 가정을 찾지 못한데다, 등에 있던 멍이 자색반병의 출혈 자국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법정에서 벨라는 “루에게는 저희보다 나은 부모는 없다.”고 자신합니다. 루에게는 엄마가 최고의 ‘리스너(Listener)’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다고 사랑까지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아이는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라는 벨라의 말이 아픕니다.
중요한 것은 제도가 아닙니다. 편견과 오만함을 버리고 ‘한 마리 잃어버린 작은 양’도 찾아서 함께 하려는 진실하고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벨라 가족의 비극은 언제, 어디서든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라고 하셨습니다.
[영화칼럼] 영화 ‘히든 피겨스’ - 2016년 감독 데오도르 멜피
편견, 누군가 먼저 깨뜨려야
편견은 ‘무지의 자식’입니다.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맹목적 믿음, 혹은 고정관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고집이 세고 끈질깁니다. 아무리 대문으로 쫓아내도 어느새 창문으로 되돌아오곤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편견이란 어리석음의 으뜸’이라고 했습니다.
독설로 유명한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가 로댕의 작품이라면 무턱대고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데생 하나를 보여주면서 ‘로댕의 최근 작품’이라고 말해줍니다. 아니나 다를까 혹평이 쏟아집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허! 작품을 잘못 내놓았군. 로댕의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작품일세.”
편견은 그 자체로 차별입니다. 비뚤어진 눈, 기울어진 마음으로 세상과 인간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눈과 마음을 가지고 편견을 의심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최초’가 되어 그것을 깨야 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히든 피겨스>(원제: Hidden Figures)에서 캐서린 존슨(타라지 헨슨 분)은 그렇게 합니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 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초, 그녀는 ‘백인, 남성’들의 냉대와 무시 속에서 ‘흑인, 여성’ 최초로 미 항공우주국(NASA)의 비행연구소 전산원을 거쳐 정식 연구원이 됩니다. 그냥 운이 좋아서 유색인종과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우주선의 발사와 대기권 재진입에 필요한 수치를 계산해 내는 천재적인 수학 실력, 흑인 여성도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신념과 실천이 그녀에게는 있었습니다.
연구소 책임자인 백인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 분)도 그때까지도 당연하게 여기던, 사소한 것 같지만 아주 상징적인 차별의 벽 하나를 부숩니다. 초를 다투는 급한 상황에도 “먼 아프리카(다른 건물)에 있는 유색인종 화장실을 가야 한다.”는 캐서린 존슨의 항의에 망치로 화장실 간판을 모두 떼어냅니다. 그리고는 “이제 나사(NASA)에는 유색인종 화장실도, 백인 화장실도 없다. 변기 있는 화장실만 있다. 이곳 모든 사람의 오줌 색깔은 똑같아.”라고 선언합니다.
<히든 피겨스>는 재능에는 인종의 구분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나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비난과 멸시를 이겨내고, 편견과 불합리를 깨는 ‘최초’가 있어야 편견과 차별이 없어지고, 아폴로 11호를 달에 쏘아 올릴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과 문명이 열립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낡은 편견이 깨지기가 무섭게 새로운 편견이 찾아옵니다. 때론 무지해서, 때론 이기심으로, 때론 편해서 우리는 그 안경을 씁니다. 그것이 눈과 마음을 흐리게 해 차별을 평등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집단 이기주의와 갈등을 낳습니다. 과감히 벗겨내거나, 벗어버려야 합니다. 캐서린 존슨이나 알 해리슨처럼.
예수님께서 일찍이 야곱의 우물가에서 몸소 실천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요한 4,7)
[영화칼럼] 영화 ‘언노운 걸’ - 2016년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 뤽 다르덴
문을 열면, 마음도 열립니다
당신이라면 다를까요. 낯선 누군가 급하게 대문을 두드린다면. 그것도 일이 끝난 시간이거나 한밤에. 쉽게 문을 열지 못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당신의 안전을 위해. 그럼 인터폰을 통해 한눈에 그가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문을 열어 주겠습니까.
벨기에의 빈민가, 간호사도 없는 작은 클리닉(진료소)의 석 달 임시 의사인 제니(아델 하에넬 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 흑인 소녀가 다급히 인터폰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는 것을 무시했습니다. 순간적인 오만과 이기심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늦게 오면 의사는 쉬지도 말란 말이야.” 평소 그녀는 가난하고 외롭고 아픈 사람들을 성의껏 치료해왔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불러도 불평 없이 집으로 달려갑니다. 불법 체류자라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날 밤 딱 한 번이었습니다. 내일이면 클리닉의 근무가 끝나는 데다, 오늘은 어느 때보다 늦게까지 환자가 많았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기억조차 못 하고 무심히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문을 두드린 신원 미상의 그 소녀가 강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세상의 틀로 보면 그녀의 잘못은 없습니다. 진료 시간이 끝났고, 응급 환자도 아니었고, 치료를 하지 않아 죽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경찰도 잊어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그녀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하지만, 하느님은 그녀에게 단 한 번의 외면과 무심함조차 허락하지 않으면서, “너는 정말 아무 죄가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녀는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것까지 포기하고 누군지도,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소녀의 행적을 찾아 나섭니다.
제니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언노운 걸(The Unknown Girl)>이 보여주려는 것은 우리 모두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가거나, 그렇게 해도 괜찮거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녀 역시 큰 사명감이나 신념으로 소녀의 죽음에 매달린 것은 아닙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양심이 움직이는 대로 갔을 뿐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소녀의 존재를, 죽음의 진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왜 중요할까요. 성매매 강요로 그 소녀를 실족사하게 만든 남자와 나눈 대화가 답을 해줍니다. “경찰에 가서 모든 진실을 밝히라.”는 제니의 요구에 남자는 “왜 내가 그래야 해. 죽으면 끝난 것이 아니냐.”면서 거부합니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죽은 소녀가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끝난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이렇게 괴로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소녀의 죽음에 나도 잘못이 있음을 고백할 때 비로소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소녀의 죽음의 진실이 그렇듯 어쩌면 우리 모두는 타인의 아픔과 불행에 ‘공범’일지도 모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모르고 지나간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모르는 죄까지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문’을 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야말로 주님 사랑의 실천이고, 주님이 바라는 세상이 아닐까요.
[영화칼럼] 영화 ‘오베라는 남자’ - 2015년 감독 하네스 홀름
아름다운 부활
‘오베’라는 스웨덴 남자가 있습니다. 59세로 까칠하기가 그지없어 뭐 하나 맘에 드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만 옳고, 자기 빼고는 다 바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눈에는 이상한 동네, 멍청한 이웃, 망가진 세상만 보입니다. 옛 물건의 유용성만 고집하고, 고쳐서 쓸 생각은 않고 새 것을 사는 젊은이들을 경멸합니다. 컴퓨터도 당연히 멀리합니다.
사소한 것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그에게 ‘조금만 마음 편하게’, ‘조금만 느긋하게’는 무책임일 뿐입니다. 혼자일 수밖에 없겠지요. 43년 동안 근무한 철도회사에서 해고되었습니다. 함께 떠난 여행길에서 버스 전복 사고로 임신한 아이를 잃은 것은 물론 하반신까지 마비되는 ‘최고의 순간에 닥친 최악의 비극’ 속에서도 밝게 살아간 아내, 유일하게 자신을 감싸주고 이해했던 아내 소냐(이다 엥볼 분)도 6개월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흑백으로만 보는 그에게 유일한 색깔이었던 아내의 죽음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멈추게 했고, 완전한 어둠에 갇히게 했습니다. 더 이상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그는 죽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게(자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옆집에 새로 이사 온, 그것도 이민자인 이란 출신의 여자 파르바네(바하르 파르스 분)와 그녀의 여섯 살 난 딸부터 방해를 합니다. 절묘하게도 시도를 하는 순간 트레일러로 벽을 긁고, 아이가 음식을 들고 와서는 문을 두드립니다.
그들만이 아닙니다. 기차역에서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어 죽으려다 한발 앞서 철로로 넘어져 죽을 뻔한 남자를 구해줍니다. 차고에서 몰래 자동차 배기가스를 이용하려 했지만, 때마침 기차역에서의 그의 용감한 선행을 취재하러 찾아온 여기자에게 발각되고 맙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아내에게 “어떻게든 당신에게 갈게.”라고 하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그때마다 실패합니다. 자꾸만 할 일도 생깁니다. 창문을 고치려다 사다리에서 떨어진 파르바네의 남편을 병원에 데려가고, 파르바네에게 운전도 가르치고, 이웃 소년의 자전거 타이어에 바람도 넣어주고, 의절한 이웃 친구의 아내가 부탁한 난방기도 고쳐줍니다. 이웃들과 합심해 친구가 아내와 헤어져 혼자서 요양원으로 가는 것도 막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둘 생깁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과 너그러움, 누군가를 도와주려는 마음이 생기면서 깜깜했던 그의 세상도 빛깔을 띠기 시작합니다. 그의 아내는 “모든 어둠을 쫓아버리는 데는 한 줄기 빛이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 빛으로 오베(롤프 라스가드 분)는 새로운 삶을 맞이합니다. 살아가는 것을 멈추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미래를 위해 살아가는 법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이 모든 일들이 우연일까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결코 아닙니다. 이방인인 파르바네 가족을 통해 그에게 비춘 한 줄기 빛이야말로 주님의 손길일 것입니다. 그분은 보이시지는 않지만 “있는 나”(탈출 3,14)로 늘 우리 곁에 계시니까요. 휠체어에 의지해 살면서도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을 도왔던 아내가 그에게 진정으로 바란 것도 멈춤보다는 이렇게 살아있는 세상에서 누군가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는 아름다운 ‘부활’이 아닐까요.
[영화칼럼] 영화 ‘코다’ - 2021년 감독 션 헤이더
우리도 당신만큼이나 건강합니다!
코다(CODA). ‘청각장애를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력을 가진 자녀들’(Children Of Deaf Adult)을 말합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가족의 수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다른 사람들의 말은 가족에게 수화로 전달합니다. 소리 언어와 손짓 언어를 서로 연결하면서 들리는 세상과 들리지 않는 세상, 가족과 타인들 사이를 끝없이 오가야 합니다.
열일곱 살인 루비(에밀리아 존스 분)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어촌 마을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아버지 프랭크(트로이 코처 분)와 오빠 레오(다니엘 듀런트 분), 세상 밖으로 나가길 거부하는 어머니 재키(말리 매트린 분)의 입과 귀가 됩니다. 함께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고, 잡은 고기를 팔고,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만나는 자리에 어김없이 나타나 통역을 해야 합니다.
집안에서는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현실, 들리지 않는다고 무신경하게 일으키는 가족들의 온갖 소음, 장애 가족이라고 무시하고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힘들고 답답하게 합니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의지하고, 그 때문에 화가 나 소리를 질러도 듣지 못하는 가족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루비는 이런 감정들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드러냅니다.
영화 <코다>는 그런 그녀가 누구 못지않게 건강하다고 말합니다. 10대 소녀답게 가수가 되고 싶은 꿈이 있고, 설레는 첫사랑도 있습니다. 가족에 대한 의무로 고민하고 방황하면서 들리지 않는 세상도 이해합니다. 그들에게는 듣지 못하는 것이 장애가 아닌 정체성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루비의 가족 역시 건강합니다. 가난하지만 힘을 합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갑니다. 어장 감독관의 횡포에 항의하고, 잡은 생선을 헐값에 경매에 넘기지 않고 직접 판매하는 일에 나섭니다. 딸의 꿈을 위해 당장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없는 어려움도 각오합니다. “넌 어부가 아니야. 여기 남아있으면 안 돼. 네가 태어나기 전에도 우리 가족은 잘 살았어.” “난 네가 너 자신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넌 용감한 아이야.”
단지 귀로 듣지 못할 뿐, 그들은 누구보다 루비의 노래에 감동합니다.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과 박수로, 딸이 노래하면서 수화로 전해주는 가사로, 딸의 목을 감싼 아버지의 손에 전달되는 소리의 떨림으로. <코다>는 잠깐 소리를 지우고는 우리도 그렇게 한번 들어보라고 합니다. 귀로만 듣는 우리에게는 그 시간은 적막일 뿐이지만, 루비의 가족은 소리 없는 노래에서 딸의 간절한 꿈과 사랑을 가슴으로 듣습니다.
프랑스의 청각장애인 베로니크 풀랭의 자전적 소설 『수화, 소리, 사랑해!』가 원작인 <코다>에 올해 미국 아카데미는 작품상을 안겼습니다. 실제 청각 장애를 가진 배우인 트로이 코처는 남우조연상까지 받았습니다. 동정이나 배려는 아닐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소중할 것인 건강한 삶, 아름다운 가족 사랑에 대한 찬사일 것입니다. 거기에 대상의 차별이나 구분이 필요할까요. 루비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처럼 비장애와 장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양면(Both Side)일지 모릅니다. 함부로 나눌 수 없고, 나누어서도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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