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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읽는 단편 교리] 성탄 팔일 축제
주님 성탄 대축일은 12월 25일 하루지만, 교회는 예수님 탄생의 기쁨을 하루로 끝내지 않습니다. 1월 1일까지 성탄 팔일 축제를 지냅니다. 이는 말씀이신 성자께서 강생하신 신비를 더욱 깊이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 팔일 축제와 마찬가지로, 축제의 기간이 8일인 이유는 성경에서 8이 구원과 연관된 숫자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3,20; 마태 5,1-12 참조). 7이 거룩한 숫자라면, 8은 ‘그 너머 저편을 향한 숫자’이고, ‘새 시대 또는 새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새 생명이 주어지는 장소인 세례당도 팔각형으로 지어집니다.
성탄 팔일 축제의 첫날은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12월 25일에 이 대축일을 거행했다는 기록은 4세기 로마 교회의 ‘순교자 달력’과 ‘주교 달력’에 이미 나옵니다. 또한 옛 로마 교회는 성탄을 포함하여 8일째 되는 날 성모님의 축일을 지냈는데, 당시 새해 첫날에 흔히 행해지던 미신적 행위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1월 1일을 참회하면서 경건하게 지내도록 성모님의 축일을 지냈고, 이것이 1969년 전례력 개혁을 거치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 되었습니다.
12월 26일은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4세기경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어 5세기 초 서방 라틴 교회에도 전해졌습니다. 12월 27일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이며, 4세기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2월 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은 이전 두 축일과는 달리, 서방 교회에서 먼저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축일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505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지역의 전례력인데, 12월 28일에 지낸 이유는 베들레헴 일대의 아기들을 학살한 사건이 예수님 탄생 3일 후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12월 25일의 다음 주일(주님 성탄 대축일이 주일인 경우엔 12월 30일)에 지냅니다. 성가정에 대한 신심은 그리스도인의 모범적 가정관을 제시하려는 열망으로 19세기에 크게 확산하였고, 1969년 전례력 개혁 때 성탄 팔일 축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올해는 주일과 12월 28일이 겹쳐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은 기념하지 않고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만 지냅니다. 참고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미사에서는 복음으로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대목(가해: 이집트로 피신, 나해: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 다해: 성전에서 다시 찾음)을 봉독합니다.
성탄 팔일 축제는 전례 2등급이어서 제대 위의 초는 2개씩 총 4개를 켭니다. 물론 주님 성탄 대축일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은 전례 1등급이기에 3개씩 6개를 켜고, 성탄 팔일 축제가 끝난 성탄 시기의 평일에는 전례 3등급으로 1개씩 2개를 켜게 됩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41) 신부들과 그리스도의 관계, 「교회헌장」 제28항 전반부
「교회헌장」은 주교들에 대한 가르침(18항~27항)을 마치고, 제28항에서 신부들에 관해서 언급하는데, 신부들의 직무를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와의 관계, 주교와의 관계, 모든 신부와의 관계 그리고 신자들과의 관계로 구분하여 다룹니다. 첫머리에서 공의회는 ‘신부’라는 봉사 직무의 기원을 두 단계로 설명합니다. 먼저, 주교 직무의 기원을 언급하는데, 성부께서 축성하여 파견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주교들을 축성하고 사명을 부여하셨다고 말합니다. 이후 주교들은 그들이 받은 다양한 봉사 직무를 여러 단계로 여러 사람들에게 합법적으로 전수하였고, 그렇게 성부에게서 비롯된 교회의 직무가 주교들(Episcopi), 신부들(Presbyteri), 부제들(Diaconi)의 품계라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공의회는 신부들의 ‘사제직’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신부들은 “성품성사의 힘으로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신약의 참 사제(veri sacerdotes)로서 축성”됩니다. 신약 성경에서 성찬례는 희생 제사로 이해되었고, 공동체의 지도자인 신부가 성찬례의 주례자였습니다. 따라서 신부는 신약 성경에서 희생 제사인 성찬례를 집전하는 사제(sacerdos)이며, 이러한 신약의 사제직은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회는 신부들이 대사제직의 최고 단계를 지니는 것은 아니며, 권력의 행사에서 주교들에게 의존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제의 영예로는 주교들과 결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약의 참 사제”로 축성된 신부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신자들을 사목하며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명을 받아, 자기 봉사 직무의 단계에서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임무에 참여합니다. 신부들은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합니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in persona Christi) 행동하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며, 신자들의 희생 제물인 자기 봉헌을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과 결합하는 거룩한 임무를 수행합니다. 신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흠 없는 제물로 성부께 단 한 번 바치신 희생 제사인 신약의 유일한 제사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미사에서 재현하고 봉헌합니다. 또한 신부들은 고해 성사와 병자 성사를 통해서 화해와 위안의 직무를 수행하고 신자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신부들은 통치 직무의 수행에서도 그리스도의 임무를 자신이 받은 권위에 따라 수행하여, 하느님의 가족을 한마음으로 모아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느님께 인도하고 하느님을 흠숭합니다. 또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묵상한 것을 믿고, 믿은 것을 가르치며, 가르친 것을 실천합니다.
[순례지에서 희년을 보다] 로레토 대성당(Santuario della Santa Casa di Loreto)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모든 가정의 모범이신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 있었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의 집’은 천사 가브리엘께서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들려주신 장소이고, 소녀 마리아의 겸손과 순명의 아름다운 대답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시작된 장소입니다. 또한, 공생활 이전까지 성가정 안에서 생활하셨기에,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 동안 가장 오래 머무셨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나자렛은 산골(루카 4,29)의 보잘것없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나자렛을 순례하는 이유는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시던 성가정이 있었던 곳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incarnation 육화의 신비)을 기억하며 매일 우리가 드리는, 삼종기도의 기원이 되는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희년에는 전쟁으로 인해 결국 성지 이스라엘과 나자렛을 순례할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아이들과 약자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음과 고통을 당하지 않기를, 거룩한 땅이 평화를 되찾게 되기를 두 손 모아 함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이탈리아의 동쪽 바다인 아드리아해 연안에 로레토 ‘거룩한 집(Santa Casa)’ 성지가 있습니다. 십자군이 패하고 팔레스티나(이스라엘)에서 철수하던 1291년에 천사들이 나자렛 성가정의 집 전체를 들어 옮겼다고 전승은 전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집’은 1291년 5월에는 일리리아(현재 크로아티아 리예카 Rijeka의 프란치스코회 트르사트 Trsat 성지)에 한동안 머물러 있다가 1295년 12월 10일 새벽에 다시 이탈리아의 로레토 성지로 옮겨져 현재 ‘로레토 대성당’ 내부 한가운데 보존되어 있습니다.
십자군의 패전으로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간 나자렛 성가장을 안전한 장소로 옮겼다는 역사의 해석이지만, 이후 질병과 전쟁 등 교회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나자렛 성가정(전 세계 많은 국가에 Loreto라는 이름의 지명과 성지가 있습니다.)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함께 사랑으로 기도하며 위안과 평안, 치유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역대 교황님들께서 로레토 성지를 순례하시며 모든 이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안에서 평화롭게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교회의 언어] Familia (가정, 가족)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Sacra Familia) 축일입니다. ‘가정, 가족’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는 “Familia”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Familia”는 하인이나 노예를 뜻하는 “Famulus”에서 왔습니다.
이 어원을 통해 되새기는
첫 번째 의미는 가족의 개념이 단순히 혈연관계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모든 이(입양, 이웃, 친구, 반려동물)가 가족이 될 수 있고, 가정공동체를 이루는 소중한 구성원이 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두 번째 의미는 가정의 모든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봉사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느 공동체이든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유지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의 크기를 측량하고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삶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가족으로서 서로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릅니다. 서로를 부르는 이 이름이 호칭에 머물지 않고, 서로를 향한 봉사와 사랑으로 이어져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Familia”의 구성원으로 기쁘게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가톨릭 신학] “나는 길이다”(요한 14,6)
‘특기’가 남보다 잘하는 것을 의미하고, ‘취미’가 즐겨 행하는 것이라면 제겐 딱히 특기나 취미가 없습니다. 대신 빠짐없이 매일하는 것은 걷기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철학자 칸트처럼 매일 동일한 시간을 걷지도 않고, 특별한 코스를 걷거나 준비도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냥 매일 걷습니다. 평소 책상에 앉는 시간이 많고, 좋지 않은 머리를 자꾸 쓰다 보니 늘 머리가 무거운데, 밖에 나가 걸으면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꾀가 날 때도 있고, 쉬고 싶은 날도 있지만, 그래도 나갑니다. 누군가 등산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는 ‘안방에서 현관까지 나가는 것’이라 했는데, 저도 이 말에 공감하며 무조건 나가 길을 걷습니다.
성경에서 ‘길을 걷다.’라는 것은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아브람이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야훼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바르게 살아라.’”(창세 17,1 공동번역) 여기서 ‘바르게 살다.’는 ‘걷다.’입니다. 즉 하느님 뜻을 따르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삶과 말씀에 ‘순종’(Fiat)하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께서 당신을 ‘길’이라 알려주셨기에, 그분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길이 되셨고, 그 길을 따르면 진리와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완덕의 길에 이르기 위해 좁은 길로 가라 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편리함’이라는 거대한 우상(偶像 Idol)이 있습니다. 삶에서 편리함이 너무 중요한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편리함을 마냥 거부할 수는 없지만,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 혹시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없는지, 놓치며 사는 것은 없는지 경계해야 합니다. 편리함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지만, 평소 살아가면서 하느님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을 감내합시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길은 남들이 편하게 가고 있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가라 하십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마태 7,13) 좁은 문, 좁은 길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처럼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완덕에 이르는 길 자체이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하느님 말씀은 진리이고 생명입니다.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은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길이고, 그분은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 주시는 빵입니다. 따라서 성체를 정성스럽게 모시는 것이 그분이 마련하신 길을 걷는 첫 걸음이자 올바른 방향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체는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성가정 성화 중에 요셉 성인을 할아버지로 그린 경우를 봤습니다. 왜 그렇게 어색하게 그렸을까요?
성가정은 예수님의 가족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성가정을 바라보며, 우리 가족도 성가정과 같은 가정이 되길 희망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성가정에 대한 신심이 깊어지면서 레오 13세 교황님께서 세상의 모든 가정을 성가정에 봉헌하겠노라 하셨고, 1921년에 이르러 베네딕토 15세 교황님께서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성가정 축일을 제정하셔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주변에서 성가정의 모습을 담은 성화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데, 종종 성가정 성화에 그려진 요셉의 모습이 우리의 기대와 사뭇 달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나이 든 할아버지 모습이 낯설어 보일 때가 있지요. 이는 ‘예수님에게 형제가 있다’는 성경 속 표현(가령, 마태 12,46 등)에서 비롯된 고민의 결과물입니다. 이 ‘형제’라는 표현을 단순히 성모님께서 낳은 다른 아이들로 이해하는 개신교와 달리, 우리 교회를 비롯한 다른 종파들은 이 표현이 평생동정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동방 정교회는 요셉이 첫 번째 아내로 살로메라는 여성과 이미 혼인했었던 홀아비라고 이해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요셉이 성모님과 결혼하고 성가정을 이뤘을 때는, 이미 이전 결혼에서 얻은 배다른 형제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셉 성인을 나이 많은 노인으로 그리는 것은 이와 같은 설명을 배경으로 합니다. 요셉 성인이 아이를 여럿 낳고 재혼한 만큼, 성모님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평생동정’ 가르침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려고 한 셈입니다.
반면, 우리 가톨릭교회는 오래전에 예로니모 성인께서 이에 대해 밝히신 말씀과 입장을 같이 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라는 말은 사촌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성경에 이미 그런 용례가 여럿 등장합니다. 가령,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인데,(창세 11,26-28 참조) 형제라고 부를 때가 있었습니다.(창세 13,8 참조, אחים אנשים, 새번역 성경에서는 ‘혈육’이라고 번역) 또한, 당시 문화적인 환경 안에서, 이미 나이가 들고 자녀도 여럿인 남자에게 어린 딸을 시집보낼 때는 경제적인 이유 탓인 경우가 많았는데, 신앙심이 깊으신 ‘요아킴과 안나’ 성인 부부가 그런 목적을 위해 소중한 딸을 보냈을 리가 없다는 믿음도 한몫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모님과 요셉이 그 정도로(!)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시각을 통해 순수한 사랑으로 결합하여 삼위일체의 하나 됨을 따라가는 성가정의 진실함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믿나이다] (56·끝)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부활을 믿나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마지막 고백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경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삶에 대한 선언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교회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내용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질타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12-14. 20)
예수님께서는 죽은 모든 이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9)
죽은 이들은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요?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35-37.42. 52-53)
교회는 모두가 이해하도록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셨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루카 24,39)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로 돌아오셨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지금 가지고 있는 자신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육신은 ‘영적인 몸’(1코린 15,44)으로,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필리 3,21 참조)(「가톨릭교회 교리서」 999)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살기’(2코린 5,8) 위하여 떠나야 한다. 죽음이라는 이 ‘떠남’에서 영혼은 육신과 분리된다. 그 영혼은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날 육체와 다시 합쳐질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05)
그러면 언제 죽은 이들이 부활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요한 6,39-40), “세상 끝 날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가톨릭교회는 모든 사람은 죽자마자 그 불멸의 영혼 안에서 산 이와 죽은 이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의 ‘개별 심판’으로 영원한 갚음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가는 연옥에서 정화를 거치거나,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거나, 곧바로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지옥의 주된 고통은,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새겨야 할 교회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유 의사로 하느님께 반항하고 죽을 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만이 지옥에 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교회는 미사와 일상 기도를 통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2베드 3,9) 바라며 하느님의 자비를 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최후의 심판을 하시는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라고 신약 성경은 말합니다. 이날 모든 것이 변화할 것입니다. 모든 이가 부활할 뿐 아니라 교회 역시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이날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통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것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과 마찬가지로 “아멘”으로 끝맺습니다. 히브리말 ‘아멘’은 견고함, 신뢰, 성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멘’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과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의미합니다.
“신경 끝의 ‘아멘’은 첫머리의 ‘저는 믿나이다’라고 하는 말마디를 되풀이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과 계명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무한한 사랑과 완전한 성실성의 ‘아멘’이신 분께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 때 ‘저는 믿나이다’라고 한 신앙 고백에 대한 ‘아멘’이 될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64)
부족한 긴 연재 글을 인내로이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신경은 여러분에게 거울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는다고 고백한 모든 것을 정말 여러분이 믿고 있는지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여러분의 믿음 안에서 기뻐하십시오.”(「설교집」 58,11,13)
